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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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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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창
    강희창(姜熙昌), 湖節2下-210-1, 光州, 임진왜란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303
  • 고경리(高敬履, 1560~1609)
    김장생 문인록, 사계전서 제47권 부록고경리高敬履(1560~1609) 자는 이척(而惕)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장흥인(長興人)으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무고를 변론하였다가 상소는 불태워지고 금고(禁錮)되었다. 생원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창랑실적 滄浪實蹟, 1857>이 있다.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2020-10-03 | NO.302
  • 고경명高敬命(1533~1592)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 호는 제봉ㆍ태헌이다. 환갑의 나이,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해 광주의병의 첫머리에 오르내린다.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이다. 1552(명종7년)년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했다. 공조좌랑ㆍ전적ㆍ정언 등을 거쳐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다. 한말 의병으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순절한 고광순(高光殉 대장) 고광훈(좌익장) 고제량(부장) 고광수(선복장) 고광채(우익장)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두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양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선조14)년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박광옥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마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하였다.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 유팽로, 안영 등과 순절했다.시ㆍ글씨ㆍ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유서석록』,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 금산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광주시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시작하여 장동로타리와 대인광장을 지나 광주역에 이르는 도로를 제봉로로 부르고 있다.
    2020-03-06 | NO.301
  • 고경신
    고경신(高敬身), 湖節1下-173-1,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300
  • 고경형
    고경형(高敬兄), 고경명의 동생이다. 湖節1下-173-2,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99
  • 고광련(高光璉)
    고광련(高光璉, 1872~1949)의 본간은 장흥이며 자는  호기(瑚器), 호는 침천(枕泉)이다. 남구 압촌동에 거주했다. 부 : 高馹柱조 : 高濟尤증조 : 高鳳鎭외조 : 李基彬처부1 : 申文休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했다.
    2020-08-06 | NO.298
  • 고광문 고광인 고광룡
    남구 이장동 고광문(高光文, 1860~1898), 고광인(高光寅, 1862~1936), 고광룡(高光龍, 1867~1938) 형제는 부농 집안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가사에 근면하였다. 동학군에 종군한 뒤 집안의 수많은 전답을 동학군자에 헌납하고 목숨 걸고 싸웠다. 결국 일본군에게 동학군이 밀리면서 타향 객지로 피신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통탄 비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3형제의 행적이 110년이 지난 뒤로도 잘 알려지지 않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동학 3형제기> 비석이 2004년 10월 세워졌다.후손인 고영두(高永斗. 1930~2006)씨의 450평방미터 부지 희사로 이장동 216에 2016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2020-03-06 | NO.297
  • 고광선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본관은 장흥(탐라)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서창면 용두리에 살았다. 1855년(哲宗 6) 光州 復村에서 湖隱 高璞柱와 행주기씨 禹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霞川 高雲과 忠烈公 高敬命의 직계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행동이 비범하여 아이들과 함부로 섞여 놀지 않았으며, 스스로 글을 깨쳐 경서와 제자서를 읽을 줄 알았다. 10세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상례를 어른처럼 행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이러한 고광선을 두고 부친의 친구들이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여 자못 기대하는 바가 컸다.그때 마침 德岩 羅燾圭가 이웃 石亭里에 와서 강의를 함으로 나아가 학문을 닦는다. 또한 蘆沙 奇正鎭 문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바를 듣고서 기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을 익혀 깊이 있는 학문의 세계를 이룬다. 또한 기정진의 문하에 있으면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는데, 吳繼洙, 朴魯述, 奇宇萬 등이 그들이다. 고광선의 나이 40세 무렵에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고광선은 그 어지러움을 매우 걱정하며 거동을 바르게 하여 흔들리지 않아 안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처럼 성격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상과 그리 어울리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는 을사조약(1905년), 경술국치(1910년), 고종의 승하(1919년) 등 국내적으로 굵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목도한 고광선은 적과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하여 光山 西倉 鳳山(봉황산)으로 숨어들어 掩耳齋를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생을 마감하고자 했으나 원근에서 많은 이들이 학문을 닦으러 찾아옴으로 막지 못하고 봉산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1934년 생을 마감하니 향년 80세였다. 훗날 제자들이 그를 기리는 鳳山祠를 지어 배향했으나 시간이 오래되어 찾는 이가 없어지면서 2017년을 전후해 멸실되었다. 남긴 문집으로는 『현와유고』가 있다. 부 : 高璞柱 조 : 高濟說 증조 : 高公鎭 외조 : 奇禹鎭 처부1 : 李周洪 처부2 : 金運錫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06년 12월 12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454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했다. 
    2020-02-05 | NO.296
  • 고광수
    고광수(高光洙), 1870~1937의 본관은 장흥으로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도일(道一)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부 : 高德柱 조 : 高濟乙 증조 : 高性鎭 외조 : 李志容 처부1 : 光州 李秉一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2-05 | NO.295
  • 고광익(高光益)
    고광익(高光益, 1858~?)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성오(省五), 호는 우정(愚汀)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 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李基彬처부2 : 具元模처부3 : 鄭大彦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94
  • 고광준(高光俊)
    고광준(高光俊, 1853~193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치삼(致三), 호는 인암(忍菴) 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尹柱興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昭義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93
  • 고규상(高奎相)
    고규상(高奎相, 1878~195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윤화(允和), 호는 덕봉(德峰) 이다. 남구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濟國조 : 高宜鎭증조 : 高時興외조 : 昌寧 曺처부1 : 李謙緖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92
  • 고봉 기대승 선생 연보(高峯先生年譜) 〔목판본〕
    세종(世宗) 가정(嘉靖) 6년 중종대왕(中宗大王) 22년○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갑진시(甲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니,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물재(勿齋) 선생 기진(奇進)이 아우 준(遵)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는데 아우가 논죄를 당하였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당세에 대한 뜻이 없었으며, 모부인(母夫人)마저 돌아가시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마침내 광주로 물러가 살았으므로 선생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다.-〔보충〕 나는 가정 정해년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 -중종대왕- 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12년 계사(1533) 선생 7세○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5, 6세부터 어른처럼 의젓해서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보충〕 계사년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13년 갑오(1534) 선생 8세○ 모부인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른처럼 몹시 애통해하였다.〔보충〕 갑오년 초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가군(家君)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았다.14년 을미(1535) 선생 9세○ 《효경(孝經)》을 읽었다. 손수 《효경》을 베꼈는데 자획이 해정(楷正)하였다. 선생의 백씨(伯氏) 참봉공(參奉公)이 교외에서 각저(角觝 씨름 ) 놀이를 구경하고자 하였는데, 물재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참봉공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피해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형의 손을 잡고 “아버지께서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형이 만약 피해 달아난다면 이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가중시키는 것이고 형의 잘못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붙들고 돌아왔다.〔보충〕 을미년에 《효경》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15년 병신(1536) 선생 10세○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한곳에 정좌한 채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하지 않았다.〔보충〕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가군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16년 정유(1537) 선생 11세○ 물재공이 서울로 가면서 일을 맡아보는 계집종으로 하여금 선생의 형제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하루는 계집종이 그 남편과 함께 침실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똑바로 서서 눈여겨 살피더니 계집종이 밥을 먹으라고 해도 응하지 않고 울었다. 계집종이 야단을 치자 선생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더니 이튿날 새벽에 서당으로 가서 의탁하였다. 스승이 동몽(童蒙)이 배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청하여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일과 외에도 동몽이 배우는 것과 《중용(中庸)》, 《맹자(孟子)》 등의 책까지 아울러 외웠다.○ 김공 집(金公緝)이 선생이 육갑(六甲)과 상생(相生)의 이치에 능통한 것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너의 계부(季父) 덕양(德陽) 선생이 성리학(性理學)을 궁구하여 사림(士林)의 영수가 되었는데, 네가 역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하는구나.” 하였다. 이어 ‘식(食)’ 자를 부르며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자 선생은 응하여 읊기를 “밥 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하니, 오래도록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12세에 《중용》, 《고문진보(古文眞寶)》, 《맹자》 등의 책을 읽었으며, 13세에 《사략(史略)》을 읽었는데 문리가 통창하였다.-〔보충〕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 가을까지 가군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군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 및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었는데,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 및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이었다.이 당시 나의 외조부의 첩(妾)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어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가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後集)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이었다.이때 선배(先輩)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가군에게 《사략》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이요 달은 1월이었다.19년 경자(1540) 선생 14세○ 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여 날마다 한 권씩 끝까지 읽었는데, 문을 닫은 채 차분히 보았으며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보충〕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고찰하시고 또 그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20년 신축(1541) 선생 15세○ 늘 선대인(先大人)이 훈계한 말씀을 손수 기록하여 좌우에 써 두고 날마다 노력하면서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았으니 지금쯤에는 거의 성취되었어야 하는데도 기질이 범범하여 여전히 어리석으니, 생각할수록 통탄스럽다. 지난날의 잘못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소씨(邵氏)는 〈문견록(聞見錄)〉을 남겼다고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차기(箚記)를 써서 잊어버리지 않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에 들은 것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완미(玩味)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해 늦봄에 〈서경부(西京賦)〉130구(句)를 지었다. 선생 16세.〔보충〕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부터 신축년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가군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니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신축년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자로 삼아 오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들을 자식처럼 여겨,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시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를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을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告)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를 지었다. 용산(龍山)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22년 계묘(1543) 선생 17세○ 선생은 선부인(先夫人)이 일찍 별세하시어 나이가 어려 복을 입지 못한 것을 슬퍼해 휘신(諱辰)이 다가올 때마다 한 달 전부터 백의(白衣)를 입고 소찬(素饌)을 하였다.○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읽었다.〔보충〕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詩賦)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종유하였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모두 100여 구(句)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서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에서 원부(元賦)의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길이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 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책을 싸 들고 산재(山齋)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6월 그믐에 회합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1일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맞았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다고 하겠다.23년 갑진(1544) 선생 18세○ 《심경(心經)》을 읽었다. 의리를 강구하는 한편 뜻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문장을 지을 적에는 오로지 과식(科式)만을 일삼지 않았다.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다.〔보충〕 다음 해 갑진년에 목사 송공 순(宋公純)이 유생(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맞았는데,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었다.아, 내가 태어난 해의 정월 초하루가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햇수도 적은 햇수가 아니건만, 포기를 해 버리고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권면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써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24년 을사(1545) 선생 19세○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림하고 소식하였다.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종일토록 식음을 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였다. 일찍이 책 한 편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25년 병오(1546) 선생 20세○ 가을에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입격하였다. 선생 21세, 1월에 반궁(泮宮 성균관 )에 유학하였다.27년 무신(1548) 선생 22세○ 나주 충위(羅州忠衛) 함풍(咸豐 함평(咸平) ) 이임(李任)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28년 기유(1549) 선생 23세○ 일재(一齋) 선생 -성은 이(李), 명은 항(恒)이다.- 을 배알하였다.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 )에 모두 2등을 하였다.29년 경술(1550) 선생 24세○ 8월 10일, 아들 효증(孝曾)이 태어났다.30년 신해(1551) 선생 25세○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다.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下等)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곧바로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26세, 27세-33년 갑인(1554) 선생 28세○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봄에 용산(龍山) 정 선생(鄭先生 정희렴(鄭希廉))을 곡(哭)하였다.-34년 을묘(1555) 선생 29세○ 1월 15일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하였다. 3월에 집 뒤 동쪽 언덕에 장례하였으며, 묘지(墓誌)를 지었다.35년 병진(1556) 선생 30세○ 3월에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의 묘를 옮겨 선고(先考)의 묘소 동쪽에 안장하였는데 봉분은 다르고 묘역은 같다. 〈천묘기(遷墓記)〉를 지었다.36년 정사(1557) 선생 31세○ 3월에 복제(服制)가 끝났다. 이달에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였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이 완성되었다.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이 발문(跋文)을 지었다.-37년 무오(1558) 선생 32세○ 4월에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였다.○ 8월에 고양(高陽)으로 가서 선조의 묘소에 배알하였다.○ 정추만(鄭秋巒)이 찾아와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대해 강론하였다.○ 10월에 문과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달에 퇴계(退溪) 선생을 배알하고 처음으로 사단ㆍ칠정을 발론하였다.○ 11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38년 기미(1559) 선생 33세○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 )의 고과에서 하등을 받았다.39년 경신(1560) 선생 34세○ 8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사단ㆍ칠정을 논하였다.40년 신유(1561) 선생 35세○ 9월에 아들 효민(孝閔)이 태어났다.○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서울로 들어가 사은(謝恩)하였다.○ 3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5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12월에 대교(待敎)로 천직(遷職)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에 또 봉교(奉敎)로 천직되었으며, 임금의 소명(召命)이 있었다. -36세, 검열(檢閱)에 배수되었으며 봉교(奉敎)로 승천하였다.-42년 계해(1563) 선생 37세○ 1월에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였다.○ 3월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4월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주서에서 체직되었으며, 옮겨 제수되었다.○ 5월에 예습(隷習)에 중등(中等)을 받았다. 봉교에서 체직되고 부사정(副司正)에 제수되었다.○ 8월 17일에 논박을 당하였다. -이량(李樑)이 헌부(憲府)를 사주하여 선생과 박소립(朴素立),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을 논박하였는데, 선생을 괴수로 지목하여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였다. 며칠 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핵하여 그들을 축출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다시 명하여 서용(敍用)하였다.-○ 19일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9월에 예문관 봉교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 25일에 청궁(靑宮)의 부음을 듣고는 곡읍(哭泣)하는 예를 행하였다.○ 10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으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갔다.○ 11월에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43년 갑자(1564) 선생 38세○ 3월에 병으로 정사하여 수찬에서 체직되었으며, 전적(典籍)ㆍ지제교(知製敎)로 옮겨 배수되었다.○ 6월에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에 배수되었다.○ 10월에 병조 좌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12월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하여 체직되었으며, 병조 좌랑으로 옮겨 제수되었다.44년 을축(1565) 선생 39세○ 2월에 병조 좌랑에 배수되었다.○ 6월에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이달에 또 이조 정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10월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겸직하였다.○ 11월에 휴가를 청해 남쪽으로 귀향하였는데, 그 길에 전비(前妣) 방씨(房氏)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묘는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는데, 왕래할 때마다 매번 성묘하였다.-○ 12월에 노소재(盧蘇齋)가 양이(量移)되어 진국원(鎭國院)을 지나갈 때 선생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논하였는데, 소재는 정암(整菴)의 소견을 적확하다고 하였다. 뒤에 선생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논변하였다.45년 병인(1566) 선생 40세○ 4월에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예조 정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6월에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와서 ‘이주(二主 두 신주 )’의 뜻에 대해 물어 선생이 논변하여 대답하였다. 뒤에 〈이주설(二主說)〉을 지어 보냈다.○ 이조(吏曹)에서 선생이 일찍이 본조를 거쳤다고 하여 두 자급을 초수(超授)하였는데, 선생은 기어이 고칠 것을 청하였다.○ 10월에 통선랑(通善郞)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에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지제교에 배수되었으며, 재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이달에 또 사인(舍人)으로 승천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융경(隆慶) 원년 정묘(1567) 선생 41세○ 2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3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4월에 사인ㆍ지제교에 배수되었으며, 이달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배수되었다.○ 5월에 홍문관 응교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10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융경 2년 무진(1568) 선생 42세○ 1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고 홍문관직제학 겸 교서관판교(弘文館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배수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2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에 배수되었다. -당시 표종형(表從兄) 박충원(朴忠元)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대(兼帶)하고 있었으므로 겸춘추는 하비(下批)하지 않았다.- 이달에 또 우부승지로 승천하였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3월에 전위사(餞慰使)로 의주(義州)로 갔다가 이달에 복명(復命)하였다.○ 4월에 병으로 승지에서 체직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7월에 퇴계 선생을 우사(寓舍)에서 배알하였다.○ 8월에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고 공조 참의에 배수되었다.○ 11월에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배수되었다.○ 12월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천하였다.융경 3년 기사(1569) 선생 43세○ 3월에 퇴계 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여 강가의 농막에서 함께 유숙하였으며,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였다. 배 위에서 한 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퇴계 선생과 작별하다〔奉別退溪先生〕〉를 드리자, 퇴계 선생 역시 화운(和韻)하여 답하였다. 퇴계 선생이 여덟 수의 칠언절구로 된 〈매화시(梅花詩)〉를 꺼내어 선생에게 보여 주며 화답을 요구하였다. 선생이 또 퇴계 선생을 저자도(楮子島)까지 따라가 송별하였다. 이달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4월 16일에 문소전(文昭殿)을 봉심(奉審)한 뒤 예궐(詣闕)하였다. 이달에 좌승지에 배수되었다.○ 6월 4일 오시(午時)에 문정전(文政殿)에서 면대(面對)할 것을 청하여 김개(金鎧)의 일에 대해 분명하게 논변하였다.○ 7월에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승지에서 체직되었다.○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다.○ 9월에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었다.융경 4년 경오(1570) 선생 44세○ 2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도성을 나와 한강에서 유숙하였는데 온 조정이 와서 전별하였다. 김계 회숙(金啓晦叔)과 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이 강가에서 유숙하자 선생이 절구 2수를 보여 주었는데,천 리 길 돌아가려니 넋이 끊어지는데 / 千里歸程欲斷魂종남산의 안개는 대궐 문을 가렸네 / 終南烟霧掩修門성명하신 우리 임금 빠짐없이 비추나니 / 吾君聖明無遺照비방 두려워 번거로이 아룀을 꺼리지 말라 / 恐被人譏不憚煩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 / 歲月悠悠水共流천기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 / 天機如許不曾留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 / 前年惜別傷心地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 / 今日南歸亦自愁하였다. -지난해 퇴계 선생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한 것이다.-○ 5월에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다. -낙암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있다. 그 아래 동쪽에 또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동료(東寮)’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편지에 “집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초암(草庵)을 새로 지었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쉴 곳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낙(樂)’ 자로 현판을 걸고자 하는데, 이는 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원하고 사모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6월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생은 의리가 이미 부합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귀향하였는데 조정에서 부경사에 충원하였다. 이 때문에 소장(疏章)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7월에 재차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12월에 퇴계 선생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곡읍하는 예를 행하고 몹시 슬퍼하였다.융경 5년 신미(1571) 선생 45세○ 1월에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 조제(弔祭)하였다.○ 2월에 도산으로 사람을 보내 전제(奠祭)하였다. 이달 19일에 종가(宗家)에서 시사(時祀)를 지낸 뒤 저녁 무렵에 귀전암(歸全庵)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孝曾)과 유은(柳溵), 김경생(金景生), 이운홍(李運鴻), 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이 산중턱을 둘러보더니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해 보이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모름지기 나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록 해라.” 하였다.○ 3월 13일에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서석산(瑞石山)으로 가서 유람하였는데 따라간 문인들이 몹시 많았다. 이달에 돌아와 가묘에 배알하였다.○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弘文館副提學兼經筵修撰官藝文館直提學)에 배수되었으며, 소명이 있었다.○ 5월에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다. 이달에 다시 상이 소명을 내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였는데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다. 이달에 문인들과 〈태극도(太極圖)〉에 대해 강론하였다.○ 8월에 순천(順天)의 사인(士人) 허사증(許思曾)이 와서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를 부탁하였다.○ 9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융경 6년 임신(1572) 선생 46세○ 2월에 아들 계업(啓業)이 태어났다. 이달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다. 25일에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27일에 소명에 달려갔다. -당시 선생이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었기 때문에 길을 떠난 것이다.- 이달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4월 2일에 지나가는 길에 이일재(李一齋 이항(李恒) )를 배알하였다. 3일에 소명이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청주(淸州)로 가서 전모(前母) 방씨(房氏)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이달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5월에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7월에 공조 참의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9월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는데 그날 곧바로 병으로 정사(呈辭)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10월 3일에 남쪽으로 귀향하니 온 조정이 와서 전별하였다.○ 10일에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15일에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는데, 병이 더욱 악화되어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였다. 25일에 병이 위중하였는데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급히 달려와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길고 짧은 것은 명운(命運)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개의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넉넉하여 문장에 진력하다가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터득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공부가 부족한 나머지 늘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 엄숙하게 날마다 반성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강석(講席)에서 옛 성현의 면모를 접하여 강론한 것으로 말하면 저도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학문이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몹시 송구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몇 년이라도 더 살아서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며 학자들과 함께 끝까지 강론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크나큰 다행일 텐데,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이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집안일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척박한 전지 몇 마지기가 있으니 자손들이 자연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제가 그대의 집으로 가서 죽고 싶으니 내일 떠나야겠습니다. 그대의 집에서 며느리를 봤으니 이는 우리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제 병이 비록 중하긴 하지만 힘을 다해 나아가 거기에서 마치렵니다.” 하였다. 28일에 시중드는 사람에게 길을 재촉하여 매당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병을 돌보던 사람들이 힘들게 거동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기를 청하자 선생은 “내가 곧 죽을 것인데 내 어찌 공해(公廨)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가마에 오르기에 앞서 부축을 받아 서서 옷을 정제하고는 갓을 가져와 씌우라고 명하였다. 시중들던 사람이 바로 올리지 않자 억지로 씌우라고 재촉한 다음 가마에 들어갔다. 저녁에 매당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린 뒤 다시 갓을 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병을 돌보던 사람들이 들어가 문후(問候)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이곳에 도착하니 기운이 살아나는 것 같다. 객이 많아 주인집이 폐를 당하니 자네들은 머무를 필요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이날 상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고 승정원의 서장(書狀)까지 보냈는데, “지금 듣건대 그대가 태인현(泰仁縣)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까지 앓고 있다 하니 실로 내 마음이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吳忭)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조리하도록 하라.”는 유지였다. 오변이 오는 도중이었는데 선생은 이미 별세하였다. 30일 저녁에 선생은 아들 효증에게 명하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가 잠시 뒤에 다시 누웠다. 효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경박스러우니 진중한 의사를 지닌다면 내 걱정이 없겠다.” 하고는 말이 끝나자 눈을 감았다. 밤 2경에 기증(氣症)이 치솟아 시중을 들던 사람이 약을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4경에 큰 바람이 일고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선생께서 졸하였다. 닭이 이미 운 뒤였으니 이날은 곧 11월 1일이었다.선생이 태인에 있을 때 원근에서 문병하러 온 문인들이 몹시 많았는데 매당에 도착한 뒤 일찍 돌아가도록 하였으며, 머물던 수십 명은 호상(護喪)까지 하고 돌아갔다. 부음이 서울에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였고, 서울 사람들은 종남산에 있는 선생의 우사(寓舍)에 모여들어 조곡(弔哭)하였으며, 조정은 관(官)에서 상례와 장례를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이듬해 계유년(1573, 선조6)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생이 잡은 터를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모여들어 장례에 참례한 이들이 수백 명이었다.[주-D001] 준(遵) : 1492~1521.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ㆍ양덕(陽德),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에 《복재집》,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으며, 시에도 능하여 《해동시선(海東詩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1545년(인종1)에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주-D002] 〔보충〕 : 이하 이 표시를 하고 왼쪽 여백을 두어 문단을 구분한 부분은 속집 2권 〈자경설(自警說)〉의 내용을 해당 시기별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주-D003] 나의……외조모 : 뒤의 문맥과 연관 지어 볼 때 외종조모가 되어야 할 듯하다.[주-D004] 소씨(邵氏)는……하니 : 소씨는 소옹(邵雍)의 아들 소백온(邵伯溫)을 가리킨다. 소백온이 〈문견록(聞見錄)〉을 지었는데, 그의 작은아들 소박(邵博)이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문견후록(聞見後錄)〉을 남겼으므로 후세에 소백온의 〈문견록〉을 〈문견전록(聞見前錄)〉이라고 일컫게 되었다.[주-D005] 용산(龍山) : 정희렴(鄭希廉 : 1495~1554)의 호이다. 본관은 서녕(瑞寧)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주-D006] 서정부(西征賦) :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작품이다.[주-D007] 휘신(諱辰) : 기일(忌日)이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주-D008] 과식(科式) : 과거의 형식이다. 수 양제(隋煬帝)가 진사과(進士科)를 제정하여 시부(詩賦)와 책론(策論) 같은 시험 과목을 정하였는데, 이것이 과거의 형식을 갖춘 시초이다.[주-D009] 곡림(哭臨) : 왕이나 왕비의 초상 때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곡하는 예식이다.[주-D010] 일재(一齋) 선생 : 일재는 이항(李恒 : 1499~1576)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에 《일재집》이 있다.[주-D011] 정추만(鄭秋巒) : 추만은 정지운(鄭之雲 : 1509~1561)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이다. 저서에 《천명도설(天命圖說)》이 있다.[주-D012] 청궁(靑宮) : 동궁(東宮)을 이른다. 오행(五行)의 설에서 청(靑)은 동쪽〔東〕 또는 봄〔春〕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궁을 청궁 또는 춘궁(春宮)이라고도 한다.[주-D013] 노소재(盧蘇齋) : 소재는 노수신(盧守愼 : 1515~1590)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주-D014]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노수신이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다가 이때 괴산(槐山)으로 양이되는 길이었는데, 고봉이 진국원(鎭國院)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주-D015] 정암(整菴) : 명나라 때의 학자인 나흠순(羅欽順 : 1465~1547)의 호이다. 자는 윤승(允升)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20여 년간 시골에서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에 전념하고 《곤지기(困知記)》를 지었으며, 문집으로는 《정암존고(整菴存稿)》가 있다. 《明史 卷282 羅欽順列傳》[주-D016]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논변하였다 : 노소재는 《곤지기》를 옳다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그의 잘못을 통박하였다. 그 후 무진년(1568, 선조1) 5월 노소재와 또다시 《곤지기》의 내용을 논하면서 그것이 옳은 것 같으나 잘못되었음을 논척하였으며, 기사년(1569)에는 〈곤지기론〉을 지어 논변하였다. 이 내용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자세히 보인다.[주-D017] 김계(金啓) : 1528~1574.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회숙(晦叔), 호는 운강(雲江)이다. 1552년(명종7) 문과에 급제한 후 헌납을 거쳐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 도의를 강론하였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주-D018] 박충원(朴忠元) : 1507~1581.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ㆍ정관재(靜觀齋),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저서에 《낙촌유고》가 있다.[주-D019] 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 : 1526~?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이정(而精), 호는 정암(靜庵)ㆍ잠재(潛齋)이다. 퇴계의 문인이다.[주-D020] 김점(金坫) : 본관은 부안, 자는 경숙(敬叔), 호는 매당(梅塘)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고봉의 큰며느리의 부친이다.
    2022-04-29 | NO.291
  • 고봉 기대승 시장- 고봉집 부록 제1권
    이식(李植) 택당(澤堂)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이니 세상에서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관향이 행주(幸州)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어 있다.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하여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을 배출한 문벌의 융성함이 국사(國史)에 갖추 실려 있다.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조(世祖)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하고 다시 불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축(軸)은 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응교(應敎)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이다. 아우 복재(服齋) 준(遵)과 함께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나,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시골에 물러나 살았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공이 공신에 녹훈됨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고 공신호(功臣號)가 내렸으며 군(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로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겨우 5, 6세가 되자 마치 성인처럼 침착하고 점잖았다. 7세부터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하여 읽되 새벽이면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저녁 늦게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한번은 노복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며 넌지시 마음을 떠보니, 공이 “너희들이 어찌 이 맛을 알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시자 울부짖고 통곡하며 하도 슬퍼하여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했다.상을 마치고 나서 집안의 번잡한 일이 공부에 방해되는 것을 싫어하여 향숙(鄕塾)에 나아가 배우며 학업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총명한데다 기억력도 대단히 뛰어나 같이 배우던 뭇 아이들의 학업 내용까지 겸하여 통달했으며, 시구를 짓기만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훈계한 글이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정하고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할 뿐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승하했을 때, 공은 벼슬도 아직 없고 관례도 올리지 않은 몸으로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소식(素食)을 하였다. 을사년(1545, 즉위년)에 사림의 참변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문을 굳게 닫고 여러 해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기유년(1549)에 처음으로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입격해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과거장을 휩쓸었기에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꺼리던 중에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을묘년(1555, 명종10)에 물재공이 돌아가셨다.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무오년(1558) 문과에 급제하였다.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계시던 때라 선생에게 나아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단(四端)ㆍ칠정(七情)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뒷날 퇴계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서울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正字)에 올라 사관(史官)의 천거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았다. 신유년(1561) 여름, 비로소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고 전례에 따라 봉교(奉敎)에 승진되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 주서로 옮겨졌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다시 봉교가 되었으나 이문(吏文)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깎여 체직되었다.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그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등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 관계를 믿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공은 당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올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다. 사림의 화가 막 일어나려 하매 온 나라가 크게 경악하였는데, 수일 후에 옥당(玉堂)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달아 이량 등을 찬출(竄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존숭하였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갑자년(1564, 명종19)에 병으로 사직하여 물러났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고, 병조 좌랑ㆍ성균관 전적ㆍ직강(直講)을 거쳐 이조 정랑에 승진하여 교서관 교리를 겸했다. 잠시 뒤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예조 정랑ㆍ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인년(1566) 10월에 헌납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에 승진되었다.정묘년(1567)에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체직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제수되었다. 공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 누차 요직을 역임하였으면서도 항상 한직을 요구하였다. 정묘년 5월에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서 보내온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다. 때마침 명종이 승하하여 조사가 오는 길에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빈주(賓主) 간의 예의 절차에 변례(變禮)가 많았다. 두 조사가 모두 박식하고 예의에 정통한 유신(儒臣)들인 데다가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절차들이 대부분 일반 규정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는데, 공이 혼자서 그 응접을 담당하여 모두 그들의 뜻에 맞도록 하였다.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전직되었다. 경연에 입시하여 맨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죽었습니다. 중종 말기에 비로소 그 억울함을 알아서 동시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 가운데 혹은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 명종 )이 어린 나이로 막 즉위한 을사년(1545)에 소인들이 또 학행이 있는 사림을 무함하여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사화와 같은 못된 버릇을 다시 일으킨다.’라고 하며 몰아붙여 끝내 반역죄를 덮어씌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 드문 큰 선비였는데, 역시 죄를 얻어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야 이미 열렸다 할지라도 시비는 아직 분명치 않으니, 청컨대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해서 시비를 바르게 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으로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5, 6십 세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차례에 따라 승진시킨다면 크게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의당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하여서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 들어주었다.이윽고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었고,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하였다. 곧이어 품계가 통정(通政)으로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우부승지로 바뀌었으며, 겸직은 전례와 같았다. 그 후 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전위(餞慰)하고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체직하여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또 체직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당초에 인종의 재위(在位) 기간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원형이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시키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명종을 부묘하게 되자 사림의 여론이 이때를 계기로 인종까지 아울러 부묘시키려고 하였고, 공이 그 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신과 뜻이 서로 맞지 않아 공이 입시하여 앞의 조처가 잘못된 일임을 극력 논변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신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대사헌 김개(金鎧)는 오랫동안 폐해졌다가 다시 들어온 인물로, 마음속으로 사림의 여론을 꺼리던 터라 먼저 기묘사류(己卯士類)를 비난하고 이어서 조정에 또한 이런 기습이 있다고 배척하자 상의 마음이 꽤 그에게 쏠렸다. 이때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입대하기를 청하여 음험하고 사특하며 정인(正人)을 해치고자 하는 김개의 실상에 대해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앞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예관(禮官)이 관원을 보내 사친묘(私親廟)에 제향을 올리고 사친을 황백부(皇伯父)로 칭하자고 청하였다. 공이 밖에서 이 말을 듣고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태뢰(太牢)로 애왕(哀王)을 제사 지낸 일과 똑같은 잘못이다.” 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입시하여 예학(禮學)이 밝지 못해서 즉위 초년의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고 논하고 이어 황백부의 ‘황(皇)’ 자를 제후국에서 칭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의당 먼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간행ㆍ반포하여 사대부로 하여금 예학을 익혀 알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공은 전후로 경연에 입시하여 글을 대하고 강설(講說)할 때면 정미한 뜻을 깊이 분석하고 이를 시사(時事)에 관련시켜 임금을 선으로 인도하고 악을 징계하여 보필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으나 반면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이 무렵 수많은 인재가 한창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 급급하여 다양한 문제들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공은 ‘뜻을 세우고 어진 이를 구하여 임무를 맡겨서 성사하기를 책임 지우는 것’으로 대강의 선무(先務)를 삼았으니, 대체로 공의 뜻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기에 법제(法制)보다는 교화(敎化)를 우선으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경장파(更張派)의 의논과 상당히 어긋났고 대신들은 더욱 언짢아했다.이 무렵에 퇴계 선생은 이미 남쪽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공에게 편지를 보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공의 처지에 비겼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물러갈 것을 결심하였다. 뒤에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직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 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온 경중(京中)의 사대부들이 나와서 전송하였다. 공은 고향에 돌아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하여 ‘낙암(樂菴)’이라 편액을 걸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종유하는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재차 소장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며 대죄(待罪)하였다. 그리고 성현이 제시한 출처의 의리를 말하고 또 대신의 뜻을 거슬러 의리상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신미년(1571)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르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임신년(1572)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 때문에 공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하고 그대로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공은 사신이라는 직무의 중요함 때문에 부득이 조정으로 나아갔다. 도중에서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들어간 즉시 사직하여 체직되었고, 사행(使行)도 다른 일 때문에 정지되었다. 뒤로도 계속하여 공조 참의와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볼기에 종기가 나더니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유사(儒士) 김점(金坫)은 공의 맏며느리의 친정아버지였다. 그가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괘념치 마시오. 다만 젊어서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쓰다가 또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얻은 것이 있기는 하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날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만일 옛 성현의 얼굴을 뵙고 토론하는 경우라면 나 역시 부끄러울 게 없을 것입니다만, 학문이 고인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나의 수명을 늘려 주어 산림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며 학자들과 더불어 성현의 도를 강구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또한 하나의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가사(家事)에 대해 묻자, “척박한 토지나마 몇 경(頃)이 있으니 자손들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하고, 또 “그대의 집에서 며느리를 보았으니 내 집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곧 죽을 것 같은데, 병이 비록 위중하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이튿날 속히 출발하라고 명하자 시자(侍者)가 병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내가 공관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관(冠)을 바르게 쓰고 가마에 올랐다. 김공의 집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넘기고 세상을 마쳤다. 임종시에 아들 효증(孝曾)에게 이르기를 “너는 성질이 경박하니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말고 속에 깊이 간직한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거하니, 11월 1일이었다. 이날 밤 공이 숨을 거두려 할 적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상께서 공이 길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하게 하고 어찰(御札)로 위문까지 하였으나, 모두 생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상께서는 공의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관례적으로 하사하는 부의(賻儀) 외에 수의(襚衣)까지 더 내려 주었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슬퍼하며 공의 옛 우사(寓舍)에 찾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소견이 뛰어나서 이황(李滉)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전현(前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진술한 말들은 모두가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의 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유종(儒宗)으로 추앙했는데, 불행하게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차에 중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청빈하여 장사를 치를 수가 없으니, 관청에서 상례와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이듬해인 계유년(1573, 선조6) 2월,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공을 안장했다. 이곳은 공이 평소에 정해 놓았던 곳이다. 원근에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 녹훈할 때에 이르러 공이 일찍이 종계변무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고 주문(奏文)을 찬술했던 것 때문에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되었다.공은 천품이 뛰어나고 기상이 고상하여 나이 겨우 15세쯤 되자 문득 옛 성현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그래서 경전(經傳)을 널리 종합하면서도 미묘한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였고, 고금의 역사와 전기(傳記)에도 두루 통하여 무엇이든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天)ㆍ인(人)ㆍ성(性)ㆍ명(命)에 관한 이치를 눈앞에 보듯 환하게 알았고, 국가의 흥망과 인물의 득실에 대해서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분명하게 알았다.그중에서도 예학에 더욱 조예가 깊어 조정으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형식, 상례(常禮)와 변례(變禮), 의절(儀節)과 도수(度數)에 대해 연구하고 검토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구류백가(九流百家)와 같은 이단(異端)의 학문 또한 광범하게 섭렵하여 요지를 탐구하였다. 특히 산법(算法)에 가장 정통하여 비록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가라 할지라도 모두 공을 따를 수 없었다. 이는 대체로 총명함이 남달라 보고 들으면 무엇이든 얼음 녹듯 이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공은 마음 씀이 고명하고 몸가짐이 방정하여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반드시 옳은 방도로 하였다. 청렴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무절제한 데로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영기(英氣)가 흘러넘쳤지만 처신과 행사를 항상 겸손하게 하여 중도(中道)에 맞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또 지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였는데 몇 가지만 말해 보자면 이렇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어 미처 복(服)을 입지 못했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여겨 휘일(諱日)이 돌아오면 반드시 한 달 동안 소식(素食)을 하며 애모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다. 아버지를 섬길 때는 안색을 잘 살펴 봉양하였는데 자랄수록 효성이 더욱 독실하였다. 백형(伯兄)인 대림(大臨)이 공보다 한 살 위였는데, 그 형을 마치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집안일에 대해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집에 있을 때 상례와 제례를 일체 고례(古禮)로 지냈고, 집안이나 마을 사이에서 처신할 때 마음은 정직하고 외모는 온화하였으므로 공을 비방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명종 말년에 위의를 엄정히 갖추고 벼슬길에 나가니 사대부들이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처럼 우러르며 공에게 의지하여 매우 중히 여겼다. 선조(宣祖)를 만나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게 되어서는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삼대(三代)와 같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입대할 때면 언제나 마음을 다해 지적하여 진달하되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면 거론하지 않았다.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근본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정책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시속의 관습에 구애되지도 않고 공허한 이상론에 빠지지도 않아서, 반드시 제반 여건을 충분히 준비하여 때가 된 뒤에야 시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로 변통하는 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아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간쟁하여 논하기를 “이 일은 뒤에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웅굉한 강령과 커다란 쓰임을 평소에 본디 정해 놓아서 그런 것이다.선조 초기 퇴계가 조정에 있을 적에 사친을 추봉(追奉)하는 전례와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을 본디 모두 공이 강구하여 제정하였고 퇴계가 공의 의견을 많이 따랐다. 그때에 “공의전(恭懿殿 명종의 형인 인종의 왕비 )은 명종과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 퇴계도 그렇게 여겼다.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왕통을 계승하여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으면 곧 부자간과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조정에 글을 보내어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변례(變禮)에 통달한 공의 학식을 훌륭히 여기고 신속하게 선(善)을 따르는 퇴계의 태도를 칭찬하였다.권신과 간신이 조정을 혼탁하고 어지럽게 만든 이후라 사기(士氣)가 시들시들 기운을 펴지 못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진 이들을 사우(師友)로 삼고 후진들을 인도하여 물길을 막는 제방처럼 혼탁한 물줄기를 배격하고 맑은 물줄기를 가득 넘치게 한 지 몇 해에 당시 사람들이 공을 소기묘인(小己卯人)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공이 선조 초년의 정치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컸으나, 이윽고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잊은 적이 없었다.임신년(1572, 선조5)에 다시 조정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비록 종계변무란 특수한 일로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처음 먹은 뜻을 잊지 않고 조금 시험해 보아 가능 여부의 조짐으로 삼아 보려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서 가만히 상하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국사(國事)는 이미 글렀다.” 하였다. 이후로 벼슬하는 데 더욱 뜻이 없었고, 장차 포부를 감추고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면서 평소 부족했던 것을 더욱 보충하는 한편 후진들을 가르치고 글을 저술하여 후세에 덕을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이루지 못했으니, 애석하다.공이 돌아가신 뒤에 세도(世道)가 바로 어그러져서 동인과 서인의 당론(黨論)이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공이 건의하여 세워 놓았던 제반 정책들이 모두 시행되지 않았으며, 사대부 사이에 알력이 생기고 현인과 소인이 한데 뒤섞여 조정이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의논들이 마구 기승을 부려 당적(黨籍)을 만들고 상대편을 금고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당론을 조정하고 고쳐 보려는 노력을 하였던 선진(先進)의 명현들도 또한 당고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에 공을 추급하여 당적에 넣으려는 자가 있었으나, 바른 의논을 가진 자가 있어 “당론을 고봉에게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식견 있는 이가 이 사건을 계기로 논하기를 “공이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당론을 조정하여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국가에 관계됨이 이와 같이 중하였다.공은 자품이 현덕(賢德)하여 도의 본체를 환히 꿰뚫어 알았다. 퇴계와 토론한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은 정통하면서도 해박하여 퇴계의 논리를 가지고 퇴계의 오류를 비판하였으니, 퇴계가 여러 번 자신의 견해를 굽혀 공을 따르면서 “홀로 도의 밝은 근원을 보았다.”라고 칭찬하였다. 주자 이후 여러 유학자들이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이비 견해를 통렬하게 반박한 내용들을 퇴계가 절충하다가 의심스럽고 막힌 데가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는데, 다른 문인들은 바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와 더불어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의 오류에 대해 설(說)을 지어 변론하고 밝혀 퇴계의 뜻을 완결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모두 《퇴계집(退溪集)》에 자세히 실려 있다.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적에 선조 임금이 조정의 신하 가운데 누가 학문을 제대로 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당시 뭇 현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퇴계가 감히 알 수 없노라고 사양하다가 오직 아뢰기를 “기대승은 문자를 널리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이를 만합니다.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실천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자,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의로써 임금을 섬기고 예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는데, 어떻게 실천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퇴계가 영남에서 도를 제창하여 선도할 무렵부터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기에 퇴계와 서울에서 세 차례 만났을 뿐 그 밖에는 오직 편지만 주고받았다.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하였으며 공은 호협(豪俠)하고 빼어나 기상이 또 같지 않았으나, 공은 퇴계를 존경하고 섬겨 언행과 몸가짐에 대해 오직 퇴계만 본받았다. 퇴계 문하에 종유한 인물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마음이 통하여 인정하고 추천한 이로는 공이 제일이었다. 이는 대개 부드러움과 팽팽함이 서로 도움이 되고 궁성(宮聲)과 치성(徴聲)이 서로 어울리는 것처럼 세상에 드문 만남이었다. 이런 까닭에 뒷날의 선비들이 “공만이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퇴계 또한 공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고, 또 “공과 퇴계의 관계는 마치 횡거(橫渠 장재(張載) )와 정자(程子) 또는 서산(西山)과 주자(朱子)의 관계와 같다.”라고 하니, 이 말은 옳은 것이다.아, 우리 동방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시작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네 현인이 차례로 계승했다. 그러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는 뜻과 잘못된 행동을 막고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한 공은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퇴계에 이르러 학문의 표준이 비로소 바르게 확립되어 이단(異端)의 학문과 사특한 학설이 말끔히 없어지게 되었다.공의 도는 퇴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진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정치하는 시대에 경륜을 펴는 행운을 얻지 못해 오직 학문을 강구하고 밝혀서 정치를 보좌하려 했던 내용만 서책에 실려 있을 뿐이다. 이는 실로 횡거와 정자 같은 송대의 명현들이 처했던 경우와 같으니, 우리 유학의 흥망성쇠가 어찌 우연한 운수이겠는가. 공이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알고 있는 것이라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는 경우라면 극진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는 소장을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그 마음에 지위에서 벗어난 무익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공이 세상을 마친 뒤 허봉(許篈)이 사관이 되어 비로소 공이 주대(奏對)한 말들을 뽑아내어 《논사록(論思錄)》 2권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퇴계와 문답한 책3권과 문집 약간 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그 글은 모방하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기력이 크고 법도가 준엄하다. 그 가운데서도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 더욱 뛰어났으니, 진실로 덕 있는 군자의 말이었다.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함풍(咸豐)이 관향으로 19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공이 가훈을 잘 신칙하였는데, 부인은 오직 삼가서 뜻을 잘 받들었다. 부인은 식견과 사려가 남보다 뛰어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부지런하였으며, 홀로되고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할 때 올바른 교육 방법이 칼로 자른 듯 반듯하였으니 가정 훈육의 감화에서 배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효증(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다음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했는데, 정유왜란(丁酉倭亂) 때 효민, 효맹과 함께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承旨)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했으며 차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했다.공의 언행에 대한 자료로는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있고 국사(國史)의 기록과 여러 유현들의 평가도 있다. 그래서 모두 싣기 어려우므로 이제 그 큰 것들만 모아서 시호(諡號)를 내리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주-D001] 이식(李植) :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광해조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대사간, 대제학을 역임하고,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4대가로 꼽혔다. 저서에 《택당집》, 《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이 있다.[주-D002] 사친묘(私親廟)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를 모신 사당이다. 이름은 소(岧)이다.[주-D003] 창읍왕(昌邑王)이……일 : 창읍왕은 한나라 창읍애왕(昌邑哀王) 부(髆)의 아들로, 이름은 하(賀)이다. 한 소제(漢昭帝)가 죽은 뒤 후사가 없어 곽광(霍光) 등 대신에 의해 창읍왕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즉위한 지 27일 만에 폐해지고 말았는데,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자기 생부(生父)인 애왕(哀王)에게 태뢰(太牢)로 제사 지냈다. 《前漢書 卷68 霍光傳》[주-D004] 장남헌(張南軒)이……고사 : 장남헌은 남송의 학자 장식(張栻 : 1133~1180)이다. 남헌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ㆍ낙재(樂齋), 시호는 선(宣)이다. 호굉(胡宏 : 1106~1161)에게 정자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맹자해(孟子解)》, 《남헌역설(南軒易說)》 등이 있다. 우윤문(虞允文)은 남송의 중신으로 자가 빈보(斌父)이다. 효종(孝宗) 앞에서 금나라를 쳐서 나라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말하여 재상이 되었다. 장식이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재직하던 중에 근신(近臣)인 장열(張說)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임명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장식이 소를 올려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한편, 묘당에 나아가 재상인 우윤문을 대면하고서 “환관의 집정(執政)이 경(京)과 보(黼)에서부터 시작되더니, 근신의 집정이 또 상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질책하였다. 이 뒤로 장식은 우윤문의 미움을 받아 원주(袁州)로 쫓겨났다가 급기야는 시골로 돌아가 수년간 집에서 거처하였다. 《宋史 卷429 張栻列傳》[주-D005] 구류백가(九流百家) : 구류는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하고, 백가는 유가 이외에 일가(一家)의 설을 세운 수많은 학파와 학자를 가리킨다.[주-D006] 제일의(第一義) :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주-D007]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 : 문소전의 소목(昭穆) 위치와 인종(仁宗)의 부묘(祔廟)에 대해 고봉이 의견을 피력한 일을 말한다.[주-D008] 소기묘인(小己卯人) : ‘작은 기묘인’이란 뜻으로 고봉을 조광조(趙光祖)에 비겨 표현한 말이다. 도학을 일으키고 사류들을 진작시킨 공이 조광조에 버금간다는 의미이다.[주-D009] 퇴계의……비판하였으니 : 원문은 “창을 잡고 방에 들어오다.〔操戈入室〕”로, 하휴(何休)의 고사를 빌린 것이다. 후한(後漢)의 하휴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한 3책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이를 읽고 논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 하고 탄식했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10] 육구연(陸九淵) : 1139~1192. 남송(南宋)의 사상가로, 자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 또는 상산(象山)이다. ‘심즉리(心卽理)’ 설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유교의 고전인 육경(六經)조차도 ‘내 마음의 주각(註脚)’이라 하여 주자와 대립하였다.[주-D011] 왕수인(王守仁) : 1472~1528. 명나라의 사상가로,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출신의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의 시조이다. 저술에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가 있다.[주-D012] 노소재(盧蘇齋) : 노수신(盧守愼 : 1515~1590)을 말한다. 소재는 호이고 자는 과회(寡悔), 또 다른 호는 여봉노인(茹峯老人)ㆍ암실(暗室)ㆍ이재(伊齋) 등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주-D013] 나정암(羅整菴) : 명나라 때의 유학자 나흠순(羅欽順 : 1465~1547)을 말한다. 정암은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이다.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및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투신하였다. 처음에 불교의 선학(禪學)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주자학(朱子學)으로 돌아섰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속기(續記)》, 《나정암집》 등이 있다.[주-D014] 곤지기(困知記) : 나흠순(羅欽順)의 저작이다. 일찍이 자신이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공부하여 깨달아서 심성(心性)의 참된 이치를 보았음을 스스로 서술한 내용이다. 대체적으로는 주자학을 신봉하면서도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주-D015] 부드러움과……되고 : 성질이 급했던 서문표(西門豹)는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지녀 관대함을 유지하고, 성질이 느슨했던 동안우(董安宇)는 팽팽한 시위〔弦〕를 몸에 지녀 긴장함을 유지했다. 《韓非子 觀行》 여기서는 성격이 관유한 퇴계와 자질이 강명한 고봉이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었다는 말이다.[주-D016] 서산(西山) : 채원정(蔡元定 : 1135~1198)의 호이다. 자는 계통(季通),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 채발(蔡發)에게 정자의 학문을 배웠으며, 뒤에 주희에게 찾아가 수학하여 그의 이학(理學)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권신 한탁주(韓侂胄)가 이학을 위학(僞學)이라며 금하자,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학문과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채연(蔡淵), 채항(蔡沆), 채침(蔡沈)에게 가학으로 계승되었다. 저서에 《홍범해(洪範解)》, 《팔진도설(八陳圖說)》 등이 있다.[주-D017] 허봉(許篈) : 1551~1588.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저서에 《하곡집(荷谷集)》,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
    2022-04-29 | NO.290
  • 고봉 기대승 행장- 고봉집 부록 제1권
    정홍명(鄭弘溟) 기암(畸菴)선생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 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졸하였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된 것 때문에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모부인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부짖었다.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구애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객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객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계부(季父) 덕양공(德陽公 기준(奇遵) )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선생은 일찍이 선친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범상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차기(箚記)를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문(科文)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을묘년(1555)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원근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무오년(1558)에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계해년(1563)에 승정원 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체직되어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 독서당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체직되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에 이량(李樑)이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는 대관(臺官)을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삭출(削黜)하기까지 하였다.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서용되어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이 체직되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 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누차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달려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며, 헌부에서 장령이 두 번이나 되었다.명종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선생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관서(關西)에 갔다. 두 조사는 모두 중국 조정의 이름난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기자 선생은 응수와 대답을 모두 알맞게 해냈다.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하는 때에 다음과 같이 진계(進啓)하였다.“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법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정사(政事)가 전도됩니다. 지난날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고 밝혀서 당대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처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악한 소인배의 모함을 입고 귀양 가서 죽기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 받았고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가 바르고 순수하여 아무 흠이 없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로 억울하게 죄를 덮어쓰고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인의 장부에 오른 채 오래도록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하신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으니, 의당 먼저 그분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 대고 머뭇거리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이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典翰兼藝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당시에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제향을 올리라고 의견을 올렸다. 이에 대해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고부터는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가벼운 법이니,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를 초월해서 제향을 올리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에게 명하여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무진년(1568, 선조21)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에 각각 두 번씩 제수되었다.경오년(1570)에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명(召命)이 이른 것으로 말미암아 수백 언(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작은 암자를 지어 ‘귀전암(歸全庵)’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노년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누차 부제학, 이조 참의, 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조정에서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하고자 하여 선생을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발탁하니, 선생은 부득이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했다. 이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별하였다. 이때 배 안에 앉아 있던 어떤 객이 선생에게 “사대부가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이에 대해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대체로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내려오는 길에 병이 나서 고부(古阜)의 사돈댁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주위의 사람들에게 “명이 길고 짧은 것이야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품은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약을 올려도 들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새벽 4경(更)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다.상께서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원이 도착해 보니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고 특별히 내리는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서울에 사는 선비와 서민들은 선생이 예전에 거처했던 남산 밑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였는데, 모두 탄식하며 서로 조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니, 이황(李滉)과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여 앞 시대 사람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많이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임금을 인도하기 위해 진달했던 말들은 모두가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의 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떠받들어 유종(儒宗)으로 삼았습니다만,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의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 2월 8일에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선생을 안장했다.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지정해 둔 곳을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궁벽한 시골구석에 거처하여 스승으로 섬길 만한 분이 없었음에도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전에 침잠하여 깊고 오묘한 뜻을 연구하고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아서 고금의 일에 널리 통달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게 되어서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를 의리에 꼭 맞게 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임금을 정도(正道)로 인도하고 왕도정치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간곡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입시할 때마다 한갓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의리를 따져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곁들였는데,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면밀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점이 있었다.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경우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며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 선악 )에 관계되는데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는 것을 볼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뭇사람의 의심을 해결했다.몇 가지 사례로 이런 것을 들 수 있겠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곧장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며 왕께 아뢰어 윤허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이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을 바로잡았다. 또 명종의 초상 때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이 대행왕(大行王)과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 복(服)이 없었다.” 하자, 선생이 “형제가 나라를 전하고 왕위를 계승할 경우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법이니,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계승하는 일과 거기에 따른 복제례(服制禮)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선생이 우리 유학의 도를 존숭하고 믿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 )의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든든하게 북돋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 줄을 알게 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과 의리를 논변할 때, 처음에는 의견이 서로 부딪치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따른 것이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에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고봉(高峯)은 실천이 앎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자, 퇴계가 “예(禮)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義)로써 나아가고 물러났거늘 어째서 앎과 실천이 다르다고 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이 시대에 학문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여 아뢰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요즈음 세상에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견줄 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선생이 평소 주상께 아뢰거나 대답했던 말들을 당시의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하고 초록(抄錄)해서 2권의 책자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을 붙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주고받았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경인년(1590, 선조23)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따님이다.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효증(孝曾)이고 차남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게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1597) 때에 효민과 효맹은 길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주-D001] 권람(權擥) : 1416~1465.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본관은 안동,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의 감수 책임을 맡았다. 저서에 《소한당집》 등이 있다.[주-D002]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 : 강희맹(1424~1483)을 말한다.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선 초기 의례와 행정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문학에도 재주를 보였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주-D003] 위기(爲己)의 학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주-D004] 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받아서 지낸다.[주-D005] 사가독서(賜暇讀書) : 학자 양성의 한 방법으로 젊은 관료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주-D006] 이문(吏文) : 중국과 교환하던 특수 관용 공문서로 자문(咨文)이나 서계(書契) 등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한문과 달리 중국 속어가 더해진 것이 특징이다. 승문원에 이문학관(吏文學官) 3명과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두었다.[주-D007] 이량(李樑) : 1519~1563. 자는 공거(公擧),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이다. 명종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으며 비리를 저질렀다. 1563년(명종18)에 사림을 숙청하려 계획하였으나 심의겸(沈義謙)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기대항(奇大恒)에게 탄핵받고 강계(江界)에 유배된 뒤 죽었다.[주-D008] 대원군(大院君)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가리킨다. 이름은 소(岧)이다.[주-D009]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 건국 초기 왕실의 종계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전회전(大典會典)》에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던 일이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조선은 명나라 측에 수없이 정정을 요청했고 선조 17년(1584)에 가서야 뜻을 이루게 된다.[주-D010] 목숨을……한다 : 공자(孔子)의 말로 《논어》〈태백(泰伯)〉에 나온다.[주-D011] 내려오는……들어갔다 : 〈고봉 선생 연보〉와 택당이 지은 〈시장(諡狀)〉에는 태인(泰仁)에 이르러 볼기에 종기가 났으며 고부(古阜)에서 사돈 김점(金坫)이 문병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점은 고봉의 큰며느리 친정 부친으로 호가 매당(梅塘)이다.[주-D012] 이준경(李浚慶) : 1499~1572.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이고, 본관은 광주(廣州),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문관 직제학과 대사헌 등을 지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 영의정에 올랐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등이 있다.[주-D013] 허엽(許曄) : 1517~1580. 자는 태휘(太煇),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과 《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慶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초당집》과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주-D014] 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 1514~1577)의 존호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따님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주-D015] 대행왕(大行王) :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호칭이다. 여기서는 명종을 가리킨다.[주-D016] 변무주문(辨誣奏文) : 1577년(선조10) 고봉이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가 되었을 때 중국 조정에 조선의 종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지은 주문을 말한다.
    2022-04-29 | NO.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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