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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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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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극추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1552년 4월 8일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사동 절골마을에서 참봉을 지낸 김필金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기 드물게 문무를 두루 갖춰 이름을 널리 떨쳤다. 당시 광주 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겨했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 향교 가는 길 오른 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스무개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 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중직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2018-05-28 | NO.28
  • 김세근金世斤(1550~1592)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광주에 오게 된 것은 1498년의 무오사화 연좌를 피해서이다. 그의 방조傍祖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으면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에 밀려 무오사화 때 참살을 당했다.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이러한 무오사화의 연좌에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광주시 서구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다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율곡 이이를 따라 양병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는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세하동 뒷자락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수련 연마를 한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함께 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국 최초로 6천여명의 연합의병이 모인 담양회맹군에 합류했다. 김덕령의 큰형인 김덕홍, 유팽로, 얀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을 따라 의병 대열에 합세하여 충북의 영동군 황간까지 진출해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 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그를 따랐다. 13년 뒤인 1605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며 병조참판을,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 그의 묘가 광주시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1952년 7월 10일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제향하고 있다.
    2018-05-28 | NO.27
  • 김원국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게 되었다. 이 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1906년 3월 원범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어 3백병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탈출,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여러 차례의 교전으로 일제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1908년 3월 영광 토산에서 패전, 불갑산으로 후퇴, 광주 어등산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2월 19일 무등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갔던 김원범이 1909년 2월 취조받던 중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발송,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에 취임하였다.일제가 의병 대토벌전을 펼치자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근거지로 광주.나주.능주.동복.창평.담양.장성.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나주 관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함평 오산면에서 일군과 접전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그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사지휘권을 곽진일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총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2018-05-28 | NO.26
  • 김원범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항일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로 일제 감옥에서 자결한 애국지인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다. 형인 원국이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헌병을 타살하고 피신하자,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 1906년 3월 형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이때 선봉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의 규모는 3백명이었다. 그 뒤 각처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던 중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접전 끝에 대패, 원국이 붙잡히는 등 적지 않은 인명피해로 의진은 해산되었다.다시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에서 매복 중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적의 대장 요시다 이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또한 장성 낭월산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3월 영광의 토산에서 패전하고 불갑산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광주 어등산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참패하였다. 6월 이대왕 의진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 격퇴하였으며, 그 뒤 오수산과 함평의 석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1월 어등산에서 적과 교전중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전기홍 의진과 합진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 중군장에 임명되어 광주.나주.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8-05-28 | NO.25
  • 김홍두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아호는 악포樂浦이며 서창동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 서당에서 글을 배운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였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유장열柳璋烈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하였다.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김정호金鼎浩, 권태진權泰鎭, 임병한林炳翰, 윤형중尹瀅重, 윤치성尹致晟, 이현李鉉. 박성태朴性泰, 기명섭奇明燮 등과 규합하여 다시 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단원들은 수백명으로 증가하였고 군자금 보급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김홍두는 1918년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 남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하여 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창 학동 본가에 근거를 두고, 군자금 조달과 국내 각지의 청년회 조직정비를 위하여 활동을 하던 중 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 함구하니, 1920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상진朴尙鎭, 안재홍安在鴻, 현익길玄益拮, 이기선李起選, 기산도奇山度 등과 같은 감방에서 형기를 마쳤다.출감 후 1926년에 다시 전남과 전북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 하다가 장성경찰서에 피체되어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서승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 1933년 6월 9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전 애국지사 제1묘역에 잠들어있으며, 서구 용두동 163-4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18-05-28 | NO.24
  • 류인대(유인대)
    류인대柳寅大(1895~1976)의 자는 國南, 호는 月湖이며 左相公派 大丞公 33世손이다.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후예로 농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용강 년영(龍崗 年永)의 3자인데 출계하여 백부인 소파 석영(小坡 碩永)의 계자(系子)가 되었다.광산군 본량면 동호리에서 태어났는데 풍채가 근엄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일용 행사(日用 行事)가 확실하였다. 일찌기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 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선생께서 침중과묵(沈重寡黙)으로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생양 양정(生養兩庭)을 섬기되 뜻을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여러 누이들로 더불어 우애 또한 독신하였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 제반 절차를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여재지성(如在之誠)을 다하며 친척간에 돈목(敦睦)을 위주하였다.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586-1에 대동사(大東祠)를 창건하는데 재목(材木)을 거의 독담하였다. 말년에는 문중도유사(門中都有司)로서 제반 종사(宗事)에 헌신하였다. 또한 임종에 유언으로 사우(祠字) 밑에 강당 부지(講堂 敷池)를 희사하라 하시어 돌아가신 후 그 손자 재천(在泉)이 그 뜻을 받들어 종중에 희사하여 지금 강당이 서게 되었다.향년 82세로 졸하니 동호리 월륜동 선영하에 안장하였다.배위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참봉 종만(參奉 鎭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종렬(種烈)이요, 사위는 전주 이동혁(全州 李東奕) ․ 천안 전종태(天安 全鐘泰) ․ 전주 이현권(全州 李鉉權)이다. 손자는 재천(在泉) ․ 증석(增奭) ․ 재원(在苑) ․ 재응(在應)이다.1981년에 종중에서 공의 위선지성(爲先之誠)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돌을 다듬어 대동사 사우(祠字) 밖에 공의 공적비(功績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유현 장재철(惟玄 張在鐵)이 지었으며, 공의 묘갈명은 족질 동강 류한상(東江 柳漢相)이 지었다.
    2018-11-21 | NO.23
  • 박광옥
    박광옥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자회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곤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국역된 ‘회재집’에 있다. 어릴 때부터 이미 동량이 커서 소꿉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통곡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형 광현은 성격이 엄격하여 아우를 가르치는데 총력을 다했고 회재도 형을 아버치처럼 섬기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면학에 힘썼다. 21세 때인 1546년 생원 진사에 합격했으나 형이 세상을 뜨자 가통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나주 선도면(지금의 매월동)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실시했다. 당대의 학자로 이름 난 기대승, 박순, 이이, 노사신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과 학규를 제정하였다.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1577년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사, 충청도사,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전주의 교수와 사예.사섬시정.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전장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 1581년 이경중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고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되었다.뒤에 응교(應敎)를 거쳐 1584년 집의(執義)에 이르렀으나, 대사헌 정철(鄭澈)과의 불화로 경상도 추쇄어사(推刷御史)로 좌천되었다가 밀양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589년정여립이 모반하여 패사하자, 유성룡(柳成龍)이 이경중의 예견이 사실화되었음을 상소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박광옥은 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왜병이 상주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달려가 정윤우 광주목사에게 근왕병을 일으켜 험악한 요새지를 차단하고 서울을 호위케 한 다음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정윤우(丁允祐)는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에게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냈다. 광주에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조달했다. 그런 와중에 복직하라는 어명이 내려오자 승문원 판교에 올랐다가 나주목사로 내려왔다. *承文院(승문원): 다른 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으로서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태종 十년에 창설되었는데 여기 관직으로서는 판교(判校), 참교(參校), 교감(校勘) 교리(校理), 교검(校檢),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부정자(副正字)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사양할 수 없어 어렵사리 부임했으나 겨우 껍질을 벗긴 곡식밥을 먹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울면서 “임금은 어디 계시며 이때가 어느 때냐”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방수령의 세력으로 재차 의병을 규합해 이전에 가졌던 뜻을 이루려고 했으나 병세가 위독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가를 내가 집에 돌아와 1593년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그에게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하였다. 박광옥은 시를 무척 잘 지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자리한 김언거의 풍영정에서 그의 시상을 펼쳤다. 그는 문학에도 재질이 뛰어나 호남에서는 박광옥, 기대승, 박상, 박순, 이도학 이어세라 하였다.1602년 나주 벽진촌(지금의 벽진동)에 세워진 의열사에 제향되었고 뒤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면의 용암서원에도 제향되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그 공을 기려 남구 칠석동에서 시작되어 서구 농산물유통단지-풍암지구 신암마을을 지나 남구 백운동까지의 길을 회재로라고 명명하였다. 음성박씨 문중에서는 풍암동에 운리사雲裏祠를 세워 영정을 모셨고 2018년 7월 벽진서원으로 바꾸었다. 저서로는 <회재유고懷齋遺稿>가 있다.
    2018-05-28 | NO.22
  • 박광조
    박광조朴光祖(?~1592)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말굽 아래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큰 뜻을 세우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고경명장군이 참가했던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던 의인이다. 본관이 음성이며 시영市榮, 호는 지봉砥峯이다. 정랑正郞을 지낸 박번朴蕃(1469~1542)의 아들이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고경명, 김천일 막하에서 군량수송부부장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하였다.월파 유팽로 장군 의병일기 임진 6월 초6일편에 양공이 내일 행군을 하겠다고 편지로 담양의 창의소로 알려왔고 광주의 전 첨사 신건申健과 첨정 하정河丁, 선비 김세근金世斤과 무안의 전 주부 박광조朴光祖 박광종朴光宗의 형제와 해남의 전 부장 고몽룡高夢龍과 장성의 전 첨정 강염姜恬이 전후하여 잇따라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초토사 고경명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부인이 가솔을 이끌고 전장을 찾아가 그의 시신을 찾았는데, 상투에 자신의 성명을 써넣은 종이를 넣어놨다고 전한다. 죽음을 불사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사후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2018-05-28 | NO.21
  • 박대수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행이 돈독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무략을 겸비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금곡사지』에 임진왜란을 만나자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참모관이 되어 충북의 금산 이치梨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박광옥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의 참모가 되어 좋은 전략을 내놓았다. 적량만호梁萬戶가 되었다.광주 의병소에 참모로 있으면서 고경명과 더불어 협력성원하고 있을 때 감사 이광이 금강에서 왜적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촌동생인 박희수朴希壽와 더불어 달려가 장검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뜨며 이광의 두려움을 힐책했다. 이광은 이 때 한편으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죽음은 두렵지 아니하나 박대수 형제가 두렵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광산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지효之孝, 지충之忠, 지신之信 3형제를 두었다. 부인 광산김씨는 숙인이 되었다. 묘소는 화순군 도암면 동막동에 위치한다.
    2018-05-28 | NO.20
  • 박봉주
    박봉주(朴鳳柱, 1868~1936) 호(號)는 초은(樵隱). 조선(朝鮮) 때 진사가 된 후 음보(蔭補)로 이조참판(吏曹參判)․장례원경(掌禮院卿)에 이르렀다. 1868년(고종 5)∼1936년 9월 29일. 일제 강점기 관료. 호는 초은(樵隱)이다.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부(光州府) 남정(南町)이다.서창 동북쪽, 발산마을 뒷등에 조선말 이조참판을 지낸 박봉주 대감 저택터가 있다.1899년(광무 3) 12월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을 시작으로 1907년(융희 1)까지 중추원의관‧비서원승‧내장원경‧봉상사제조‧사직서제조‧궁내부특진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20년 송정금융조합 조합장, 1921년 호남물산주식회사 이사, 1923년 조선기업주식회사 상무이사와 전남번영회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21년 4월부터 1924년 4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활동하였다. 1922년 전라남도 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를 발기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부를 발기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신일본주의를 내걸고 참정권 운동을 펼친 국민협회 전라남도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유교단체 대성원(大聖院) 전라남도 총지원장을 지냈다.*확인이 필요함
    2018-07-17 | NO.19
  • 박상朴祥(1474~1530)
    박상朴祥(1474~1530)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호남 사림의 대부이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진사 박지흥의 차남이다. 학업을 큰형인 하촌 박정에게서 닦았다. 1496년 진사시, 1501년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교서관 박사를 지냈다.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서른 두살에 오늘날 전라도 부지사인 전라도사가 되었다. 성정은 참으로 곧았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을 위해 아낌없는 선정을 행했다. 전라도사 시절 나주의 우부리가 연산군의 후궁으로 있는 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자 그의 죄상을 물어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그 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센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세른 세 살 때인 1506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사헌부와 더불어 임금의 내척과 외척 등의 성급한 발탁을 간언하는 등 간관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였다. 당시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과 재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왔다.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 등의 전관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사헌부가 대간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하여 곧 종묘서령, 소격서령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이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임피현령으로 3년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했다.서른여덟 살 되던 1511년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담양부사가 되었다. 마흔 두 살인 1515년 봄 또 다시 필화에 얽혔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상빈上賓 문제로 바른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순창군수 충암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전 왕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려 바른말을 하였다.조광조와 교유했던 박상은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후 남평 오림역烏林譯으로 유배를 가자 조광조가 박상을 옹호하며 유배를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조광조는 1519년에 능성(현재 화순 능주)으로 유배를 가며 광주를 거치자 박상은 광주 읍성 남문 밖 10리에 있는 분수원에서 그를 만나 면회하였다.박상은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고, 광산 출신의 하서 김인후와는 교분이 깊었다. 임억령, 송순, 정만종 등이 박상의 문하에서는 직접 사사했다. 임억령과 깊은 교유를 한 사람이 고경명이고, 송순의 문하에서 정철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호남지방에 성리학을 보급하고 호남사림을 형성.발전한 대표적 인물이다. 박상은 호남사림의 원조인 셈이다.1516년에 대한발로 인해 석방되어 향리에 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의빈부도사,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중앙부처에 염증을 느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26년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에 장원급제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승진하지 못하고 나주목사로 선정을 베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다 1530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간공으로 하였으며 광주의 월봉, 순창의 화산, 담양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여러 차례의 혹독한 변고를 당하였어도 위엄이 사그러들지 않았으니 퇴계 이황은 그의 고상한 기품과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다며 ‘하늘이 내린 완인’이라 하였다. 청백리로 추천받았고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성신 신광한, 황정욱과 더불어 서거정 이래로 사가로 높이 칭송되었다. 정조의 시문과 논음, 교지 등을 모아 만든 홍재전서에서 조선 5백년의 으뜸가는 시인이라 일컫는 읍취헌 박은과 비교하면서 눌재 시의 우월함을 찬양하기도 했다.당대의 명현인 사암 박순과 숙질간이다. 저서는 <눌재집訥齋集> 8권이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
    2018-08-19 | NO.18
  • 박선홍
    박선홍朴墡洪(1926~2017)은 근대도시 광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무등산을 연구하고 집필해 광주학의 기초를 다진 동시에 무등산의 산증인이다. 광주상공회의소 재건과 중흥에도 공로가 크다. 1952년부터 1993년 퇴직하기까지 서구 농성동의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사무국장과 상근부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 산업 및 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환경운동가로 전 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던 박선홍은 1955년 광주 최초의 산악회인 ‘전남산악회’를 결성한 그는 창립 멤버로서 무등산보호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1989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2001년 무등산공유화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누구보다 무등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2001년 무등산 공유화 운동은 10만여명이 참여해 약 16만평을 매입하고 이를 광주시에 기증하면서 무등산 난개발을 막았다. 50세이던 1976년 무등산의 유래.전설.경관을 정리한 인문지리지인 『무등산』 초판을 낸 뒤 2011년 증보판(7판)을 냈다. 무등산의 역사, 문화, 지리 등을 기록한 이 책은 직접 무등산을 돌면서 일일이 조사하고 찾아내 기록한 책으로 무등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무등산에 대한 남다른 박선홍의 사랑과 노력 덕분에 2013년 광주 무등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박선홍은 향토사학자로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에 대한 다각도의 기록을 『광주 100년』(1994년)에 담아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근 1세기에 이르는 광대한 광주의 이야기를 기혹했다. 근대 광주의 역사.문화.지리 등이 이 한권에 책에 수록된 것이다. 『광주 100년』은 이후 사료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어판이 출간되었다. 2012년 『무등산』과 『광주 100년』의 지적재산권을 광주문화재단에 기증했다.지역 최초로 보이스카우트를 창립, 청소년 사회교육과 리더십 지도에 힘썼고 광주민학회 이사장과 조선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에 헌신했다.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만들어 소외계층 돕기에도 앞장섰다. 대통령 표창, 국민포상, 철탑산업훈장, 광주시민대상, 대한민국 산악대상 환경상을 받았다.
    2018-05-28 | NO.17
  • 박원명
    서구 서창동에는 농민전쟁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박원명(朴源明)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원명은 농민전쟁의 발발 직전에 일어난 만석보 사건의 원흉인 조병갑이 군수에서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고부군수에 임명된 사람이다. 당시 그는 격렬한 고부 군민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호남농민들의 날로 커져가는 항쟁의식을 꺾을 수는 없었고 이것이 몇 년 뒤 전면적인 농민전쟁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광주에서 농민전쟁은 1894년 말과 이듬해 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박원명(朴源明) 자(字)는 덕홍(德弘). 조선 때 7개 군(郡)의 수령(守令)을 역임한 후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2018-06-27 | NO.16
  • 박지효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은 데 기여했다.1627년 정묘호란 때 김장생金長生이 삼남호초사三南號苕使로 광주에 내려와 그에게 모병유사의 책임을 맡기자 75세의 노구로 병사와 식량을 모으는 데 큰 성과를 올렸다. 전주에 피난중인 세자를 맞아들여 여산까지 호송하니 인조가 이를 칭찬하여 장례원사간掌禮院司諫, 사헌부임제司憲府臨製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2018-05-28 | NO.15
  • 박희수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면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의 직을 받고 형조좌랑에 이르렀고 함열현령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2018-05-28 |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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