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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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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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은 호남(湖南) 사람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영남(嶺南)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선비 숙부인 고씨의 세계와 행적〔先妣淑夫人高氏世系行蹟〕 - 목재집 제8권 / 행장(行狀) :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선비(先妣)의 성은 고씨(高氏)로 그 선대는 제주(濟州) 고씨에서 나왔다. 고려 말에 이르러 장택(長澤)을 관향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장흥(長興) 고씨가 되었는데, 지금의 광산(光山) 고씨이다. 나라의 기초를 닦고 업적을 쇄신한 일은 역사에 실려 있으며, 대대로 집안을 빛낸 일은 보첩(譜牒)에 수록되어 있다. 5대조 자검(自儉)은 증 참의(贈參議)이며, 비(妣)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도헌(都憲) 자아(自阿)의 딸이다. 도헌공이 영남 도사(嶺南都事)가 되었을 때 우리 문광공(文匡公)이 시를 주었는데, 양친(兩親)의 안부를 시에 가탁(假託)한 것이다. 고조부 운(雲)은 형조 정랑이고, 기묘사류(己卯士流)였으며, 증 예조 참판(贈禮曹參判)이다. 비(妣)는 광주 이씨(光州李氏) 제학(提學) 선제(先齊)의 증손녀이다. 증조부 휘 맹영(孟英)은 사간원 대사간이고, 증 좌의정(贈左議政)이다. 비(妣)는 남평 서씨(南平徐氏) 진사(進士) 걸(傑)의 딸이다. 조부 휘 경명(敬命)은 공조 참의(工曹參議) 지제교(知製敎) 겸 초토사(兼招討使)이고, 증 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겸 홍문관 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이며,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비(妣)는 울산 김씨(蔚山金氏) 부제학(副提學) 백균(百匀)의 딸이다. 고(考) 휘 종후(從厚)는 임피 현령(臨陂縣令)이고,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다. 비(妣)는 철성 이씨(鐵城李氏) 충의(忠義) 복원(復元)의 딸이자 부원군(府院君) 원(原)의 후손이며, 부제학(副提學) 박승임(朴承任)의 외손녀이다.선비(先妣)는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11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어났는데, 문열공과 태어난 날이 같기에 문열공이 기특해하며 사랑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문열공이 전쟁에서 죽자 참판공은 의병을 일으켜 원한을 갚으려 했다. 당시 이부인은 안동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선비(先妣)를 박씨 집에 머무르게 했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두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낮에는 숨고 밤에 달리는데, 여러 번 위태로움을 겪은 뒤에야 광주(光州)에 이를 수 있었다. 참판공은 군중(軍中)으로 나간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기에 의리상 가솔들과 얼굴을 대면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을 데려오게 해서 만나보고 작별인사하기를 “두 아들은 호남(湖南) 사람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영남(嶺南) 사람에게 시집보내라.”라고 하면서 결국 떠났다.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어 그곳에서 죽자, 이부인은 유명(遺命)을 따랐다.갑진년(1604, 선조37)에 선비가 선군에게 시집오니, 선군은 문광공(文匡公)의 현손이다. 선비는 시부모를 섬기면서 시부모를 매우 기쁘게 했고, 초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을 섬기면서 부드럽고 상냥하며 공경하고 순종하여 남편의 뜻을 어기는 모습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고, 자기만 안일하고 편안하려는 뜻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친척들에게 화목하였고, 비복(婢僕)들에게 자애로웠다.집이 가난하여 옷가지와 음식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집안일 처리가 매우 여유로웠으며, 선군이 벼슬하는 데 같이 있어도 정숙하면서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안음(安陰) 고을살이에서 돌아온 뒤로 읍인(邑人)들이 선군의 맑은 덕을 사모하여 많은 전별금을 주려고 했지만 선비께서 모두 사양했다. 일찍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데 힘을 다하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겼으니, 왜화(倭貨)나 기이한 장신구를 물리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10)에 선군(先君)께서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이 되어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렸다. 한 달이 지나 선비께서 문득 개연(慨然)히 말씀하시길, “남편이 만 리 길을 배를 타고 떠났으니, 살아서 서로 만남을 기필(期必)할 수 있으랴.”라고 하며 즉시 행장(行裝)을 꾸려 서울로 달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근심과 연민이 병이 되어 이듬해 계유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음 달에 선군이 돌아왔다. 갑술년(1634, 인조12) 1월에 안동부 남쪽 10리에 장례 지냈으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갑신년(1644, 인조22) 4월에 상주(尙州) 의곡(蟻谷) 을향지원(乙向之原)으로 이장했다.선비는 일찍이 2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죽고, 뒤에 2녀 2남을 낳았다. 딸은 김벽(金璧)과 김섭(金燮)에게 시집갔다. 장남 여렴(汝濂)은 선비가 돌아가신 뒤에 죽었다. 차남은 여하(汝河)이며, 내외손은 10여인이다. 선비의 평소 아녀자로서의 모범과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겠지만, 내가 어려서 잘 알지 못하기에 선군에게 들은 것을 근거로 해 오른쪽처럼 대략 기록한다. 특별히 외가 고씨(高氏)를 상세히 기록함은 후손들로 하여금 내외로 쌓인 선비의 덕이 그 유래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슬픈 마음 하늘과 같아 다할 길 없으니, 오호 통재라.[주-D001] 도헌공이 …… 것이다 : 문광공(文匡公)은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가리킨다. 홍귀달이 홍자아에게 보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함창 서편 푸른 산모퉁이에, 세 칸 낡은 건물이 바로 우리집이로다. 집 안에는 두 어버이 모두 백발이시니, 오늘의 안부는 정히 어떠하신지.〔咸昌西面碧山阿 老屋三間是我家 堂上兩親皆白髮 卽今安否定如何〕” 《虛白亭集 卷1 寄慶尙道都事洪君自阿》*홍여하는 영남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외증조부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봉 고경명이다.
    2020-10-08 | NO.717
  • (김장생과 김집) 액호를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서원등록(書院謄錄)
    액호를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 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광주(光州)의 생원(生員) 박상진(朴尙眞) 등이 올린 정문(呈文)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은 도덕과 학문이 온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는 만큼, 그분의 영향이 미친 곳에서는 모두가 그분께 보향(報享)하기를 숭상합니다. 더구나 본주(本州)는 바로 선생의 향관(鄕貫)으로서, 휘주(徽州)의 여러 사우(祠宇)에서 주자(朱子)를 향사하는 일과 비교됩니다. 우리나라를 상고해 보더라도 퇴계(退溪) 선생을 진보(眞寶)에서, 율곡(栗谷) 선생을 덕수(德水)에서 모두 향관인 이유로 향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본주만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본주의 서원은 일찍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 세 선생을 향사하여, 이미 은액(恩額)을 받은 곳이어서, 감히 조정에 아뢰지 않고 사사로이 향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정문에 의거하여 본조(本曹)에 있는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24)에 숭현서원(崇賢書院)과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10)에 창주서원(滄洲書院)에 합향할 때, 모두 공문(公文)을 점련(粘連)하여 임금의 재결을 받은 뒤에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본주는 이미 두 선생의 향관으로서, 많은 선비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도리가 있어 합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전례를 살펴보니, 이미 병술년과 기유년 두 해에 숭현서원과 창주서원에 합향한 전례가 있으므로, 정문에 따라 거행하되, 이 뜻을 알리어 시행하소서.”라고 하였다.
    2020-12-17 | NO.716
  • 3면(面)의 풍헌(風憲)이 농간을 부려 환자(還上)를 도적질한 일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영조(英祖) 42년(1766) 정월 초6일 3면(面)의 풍헌(風憲 각 면(面)의 일선 행정 실무를 주관하는 직임) 등이 농간을 부려 환자(還上)를 도적질한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조적(糶糴 곡식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것)의 법이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데, 본주(本州)의 면임(面任)이 이를 빌미로 삼아 농간을 부려 한도 끝도 없이 도적질을 하였습니다. 유등곡 풍헌(柳等谷風憲) 고희(高曦), 고내상 풍헌(古內廂風憲) 이세창(李世昌), 성내 풍헌(城內風憲) 조흥국(趙興國) 등이 작년 봄에 환자를 나누어 줄 때 혹은 가명(假名)을 만들어서 주기도 하고 혹은 가호(假戶)를 만들어서 받기도 하였는데, 고희가 도적질한 쌀ㆍ콩ㆍ나락은 도합 1백 83석이었고, 이세창이 도적질한 쌀ㆍ콩ㆍ나락은 도합 1백 25석이었으며, 조흥국이 도적질한 쌀ㆍ콩ㆍ나락은 도합 80석이었습니다.임오년(壬午年, 1762, 영조38) 이후로 본주(本州)의 곡물 장부의 수량이 크게 감축되어 백성에게 나누어 줄 때 조금씩 이리저리 둘러맞추었으나 분기를 잇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희 등이 농간을 부려 이처럼 많이 곡물을 훔쳐 먹어 그 피해가 다른 수십 호(戶)까지 미쳤으니, 그 비통하고 놀라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곡물을 받아들일 때에 그 피해가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미쳐서 소요를 많이 초래하였으니, 그들의 죄상(罪狀)을 따져본다면 더욱더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이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징계할 수 없기에 고희ㆍ이세창ㆍ조흥국 등을 수금(囚禁)해 놓고 첩보(牒報)하오니, 각별히 엄하게 형벌을 가할 것을 지시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곡물을 대여하고 받아들일 적에 이속(吏屬)과 이임(里任) 무리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이 실로 백성이 부지하기 어려운 근본이다. 이러한 무리가 만약 형장(刑杖)을 피한다면 장차 한 명을 징계하여 백 명을 면려(勉勵)할 수 없을 것이니, 각별히 엄하게 형벌을 가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낱낱이 상고하고 살펴서 먼 지방의 간교한 무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국법(國法)을 알게끔 해야 할 것이다.
    2023-08-17 | NO.715
  • 〈양파정〉 시에 차운하다〔次揚波亭韵〕- 운양속집
    〈양파정〉 시에 차운하다〔次揚波亭韵〕 학산화상(鶴傘和尙)이 서석산(瑞石山) 약사암(藥師庵)으로부터 와서 방문하여 〈양파정〉 시를 내게 보여주면서 화답을 요청했다. 이 정자의 주인은 광주(光州)의 시인인 정낙교(鄭洛敎)인데 또한 아정한 선비이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런 유명한 정자 있어 돌아갈 곳 얻을 수 있으니 / 有此名亭得所歸자진이 어찌 세상과 서로 등지려 했겠나 / 子眞豈欲世相違거울 같은 봄 호수에 물고기의 즐거움 구경하고 / 鏡湖春水觀魚樂버드나무 정자 가을안개에 학이 날도록 놓아주네 / 柳墅秋烟放鶴飛꿈속의 공명 모두 환상이니 / 夢裡功名都是幻가슴 속의 산과 골짝을 의지할만하리 / 胸中邱壑可堪依은거의 좋은 점 아는 사람 없으니 / 幽居勝事無人識오직 이웃 승려 대사립 문 두드림을 허락하리 / 惟許隣僧欵竹扉[주-D001] 학산화상(鶴傘和尙) : 1912년 11월 22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95호에 ‘주지취직인가(住持就職認可)’라는 제목의 기사에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보림사(寶林寺)의 주지로 김학산(金鶴傘)이란 이름이 있다. 1915년 8월 20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제915호에 ‘주지이동(住持異動)’이라는 기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주-D002] 서석산(瑞石山) : 호남 광주 무등산의 옛 이름이다.[주-D003] 자진(子眞) : 서한(西漢) 때 인물 정박(鄭璞)으로, 자는 자진이다. 성제(成帝) 때에 외척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곡구에서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했다. 《漢書 卷72 高士傳中》[주-D004] 물고기의 즐거움 : 장자(莊子)가 친구인 혜자(惠子)와 호량 위에서 함께 노닐 적에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놀고 있으니, 이는 저 물고기의 낙(樂)이네.”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낙을 안단 말인가.” 하니, 장자가 다시 말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낙을 모른다는 것을 안단 말인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주-D005] 학이 날도록 놓아주네 : 동진의 명승 지둔(支遁)이 어린 학 한 쌍을 선물 받았다. 날개가 조금 자라 날아가려고 하니 날갯죽지를 조금 잘라 날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이 늘 날개를 흔들며 괴로워하는 빛이 있었다. 지둔이 말하기를 “이미 하늘로 솟구치려는 뜻이 있는데 어찌 사람의 노리개가 되겠는가.” 하고 날개를 자라게 하여 놓아주었다. 《世說新語 卷2 言語》
    2020-12-31 | NO.714
  •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 동강유집 제10권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 동강유집 제10권 :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주역》 〈고괘(蠱卦)〉 효사(爻辭)에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하였는데, 고(蠱)는 일이고, 갑(甲)은 때이니, 앞의 3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뒤의 3일은 마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번번이 일을 만나는데 일은 천만 가지가 있다. 평상시에나 변화를 만났을 때나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성현도 어렵게 여기신 것인데 하물며 난세의 끝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는 왕좌(王佐)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주군에게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難平者事也〕”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선갑삼일 후갑삼일’의 은미한 뜻을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내가 태어난 지 겨우 43년인데, 참으로 천지가 뒤바뀐 때를 만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느라 전후로 근 천년 동안 만나기 어려운 일이 모두 목전에 모여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러한 때 나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책임이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뜻이 약해져 마치 장님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으니 큰 길에서도 쉬이 길을 잃을 판인데 태항산(太行山) 험한 길에 수레가 부서진 이러한 상황에서야 어떠하겠는가.이 때문에 우울해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옛 책을 가져다 옛사람이 먼저 얻은 것을 찾았다. 그러나 주공(周公) 이후로 더 이상 선정이 없었고 사변이 일어나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서, 무지한 나로서는 늦게 태어났다는 한탄만 더할 뿐이었다. 매번 책에서 위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마치 묵은 병을 가진 사람이 의서(醫書)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리석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덮은 책도 읽지 않은 것 같을 정도이니, 마음에 드는 글을 볼 때마다 쪽지에 적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아들 정(晸)이 옆에 있다가 깨끗이 써서 책으로 엮을 것을 청하고 또 표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고갑신편(蠱甲新編)’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고괘(蠱卦)의 뜻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한 것은 모두 전국 시대 칠웅(七雄) 이후 쇠퇴한 말세의 문헌이니 고(蠱)를 만나 고괘의 도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10월은 모두 음효(陰爻)인데 선유들이 도리어 양월(陽月)이라고 부른 것은 양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표제를 지은 의도는 음(陰)을 억제하는 뜻을 담은 것이고 또 일을 다스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 스스로 힘쓰고자 한 것이다. 뒤에 보는 사람들이 나의 이 뜻을 참람하게 여기지 않고 안타깝게 여겨줄지 모르겠다.정해년(1647, 인조25) 겨울, 일헌도인(一軒道人)은 광산(光山)에서 이 글을 쓴다.[주-D001] 고갑신편의 서문 : 1647년(인조25), 저자 나이 43세에 쓴 글이다. 이때 저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내고 있었다.[주-D002] 다스리기 …… 일입니다 :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주-D003] 태항산(太行山) …… 부서진 : 태항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으로 매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백낙천(白樂天)의 〈태항로(太行路)〉란 시에, “태항산 길이 능히 수레를 부수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평탄한 길이요, 무협의 물이 능히 배를 전복시키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안온한 흐름이다.〔太行之路能摧車, 若比君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하였다.
    2020-10-07 | NO.713
  • 《고봉집(高峯集)》 해제(解題) 2- 생애와 학문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는 부분적으로 누락된 자료가 있었고 국역한 시기가 18년 저편의 일로 그동안 맞춤법이나 문체 역시 얼마간 달라졌다. 여기에 새로운 자료를 수습하여 번역하고 각주를 보충한 다음 역문(譯文)을 전체적으로 윤문, 교정하여 《국역 고봉전서(國譯高峯全書)》로 펴내게 되었다. 이 사업의 배경에는 후손가의 열의와 후원도 적지 않았다.고봉은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로서 퇴계와 함께 사단(四端)ㆍ칠정(七情)에 관한 논변을 주고받으며 조선 성리학의 심화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고봉이 포은(圃隱)에서 정암(靜庵)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도통(道統)을 경연에서 언급한 적이 있거니와, 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학문으로서의 체계와 깊이를 엄밀하게 갖춘 편은 못 되었다. 주자 문집의 경우만 하더라도 문종조에 이르기까지 3차례 부분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기록이 있을 뿐 국내에서 간행되고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단 한 차례도 발견할 수가 없다. 몇 차례의 구체적 간행 사실이 확인되는 《성리군서구해(性理群書句解)》와 《성리대전(性理大全)》 및 《근사록(近思錄)》이 주자학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저작이었던 셈인데, 그에 대한 연구도 그나마 철저하지 못했던 듯하다.조선에 있어서 주자학의 본격화는 중종 계미년(1523)에 교서관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간행ㆍ반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으며,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요컨대 고봉은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심화한 학자로서 조선 전기 학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에 본고는 《국역 고봉전서》를 펴내면서 그 서지 사항 및 고봉의 생애와 학술에 대해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2. 고봉의 생애와 학문1) 생애고봉의 자는 명언(明彦),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고봉의 선친 물재(勿齋) 기진(奇進)은 아우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유학하였다. 그러나 복재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죄를 받는 것을 보고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은 데다 모부인마저 돌아가시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광주로 내려와 살았다.고봉은 7세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다. 9세에 《효경(孝經)》을 읽고 손수 베꼈다. 10세 때 선친을 따라 산사에 가서 글을 익혔다. 이로부터 13세에 이르기까지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사서를 익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사략(史略)》, 《한서(漢書)》를 읽었다. 고봉은 당시를 회상하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지었다고 술회했다.14세 때부터는 《강목(綱目)》에 잠심하였으며, 여기에서 쌓은 문리를 바탕으로 《논어(論語)》와 《서전(書傳)》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이어서 《시전(詩傳)》과 《주역(周易)》을 읽었다. 16세 무렵에는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고 스스로 회고하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 시절의 고봉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과부(科賦)에도 힘을 쏟은 듯하다. 17세에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었으며, 곧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부(詩賦) 창작에 한동안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뿐더러 과거 공부에 그다지 재미를 붙이지도 못했던 것 같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한다. 과거 공부를 지향하던 고봉의 공부는 이 어름에서 조금 방향을 틀게 된다. 과부 수업에 끝을 맺고 성리학에 눈을 뜬 것이다.고봉은 나이 18세에 《심경(心經)》을 읽는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의 문장에서 과문의 투식은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송순(宋純:1493~1582)을 찾아가 《맹자》와 한유(韓愈)의 글을 읽고 용산(龍山) 정희렴(鄭希廉:1495~1554)을 찾아가 부를 짓는 등 과거에 대한 지향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20세에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21세 되던 해 정월에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다. 23세에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을 배알하고, 사마 양시(司馬兩試)에서 모두 2등을 하였다. 25세에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하지만 28세에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29세에는 선친인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하였다.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이 시기를 과거에 대한 지향 시기로 볼 수도 있겠다. 다섯 차례 전후로 치른 과거시험과 몇 차례의 장원은 고봉이 분명 이 시기 동안 일정 부분 과거에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에 상당하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대 말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10여 년의 이 시기에 고봉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과거공부보다는 성리학이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대전》에 관심을 가졌을 터인데, 고봉의 나이 31세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20대의 고봉이 주자학에 얼마만큼 잠심하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주자대전》 가운데 시편(詩篇)을 제외한 여타의 부분에서 학문과 출처에 관한 중요한 글을 꼼꼼하게 가려 뽑은 이 저작은 《주자대전》에 깊이 정통하지 않고는 이루어 내지 못할 업적물이기 때문이다.30대의 고봉은 본격적으로 도학 선배들과 교유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퇴계(退溪)와 사칠이기(四七理氣)에 관한 논변을 통해 조선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심화하는 데 획기적인 공로를 이룩했다. 먼저 고봉은 32세인 1558년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배알하였다. 8월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1509~1561)이 고봉을 찾아와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대해 강론하였는데, 정론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고봉이 논쟁하였다. 이때 퇴계는 고향에 있었다. 10월에 문과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한 고봉은 그달에 서울에서 퇴계를 배알하고, 처음으로 사단ㆍ칠정을 발론하였다. 이때의 토론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33세에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11월에 태극과 음양에 대해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와 토론을 벌였다. 12월에 박순(朴淳:1523~1589) 편에 편지를 보내 추만의 〈천명도〉에 퇴계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정정한 것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고봉의 나이 33세 되던 1559년 3월 퇴계가 답장을 해옴으로써 논쟁이 발발한다. 고봉은 이어 34세에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사단ㆍ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였으며, 이 논쟁은 고봉이 마흔이 되는 1566년까지 지속된다. 39세 되던 1565년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양이(量移)되어 진국원(鎭國院)을 지나갈 때 고봉은 그를 찾아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때 소재는 정암(整菴)의 소견이 적확하다고 하였다. 뒤에 고봉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이기일물(理氣一物)을 주장한 정암의 논리에 반박하였다.한편 이 시기는 고봉이 여러 선배들과 끊임없이 논변에 열을 올리는 한편 출사하여 자신의 경세관을 펴던 출사기에 해당한다. 35세에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37세 4월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체직되고 주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8월에 이량(李樑)이 헌부를 사주하여 고봉과 박소립(朴素立),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을 논박하였는데, 고봉을 수괴로 지목하여 문외출송(門外出送)하였다. 19일에 남쪽으로 귀향간 고봉은 10월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 11월에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40세 되던 1566년에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과 지제교에 배수되었다. 고봉은 이때 은둔하여 고향에 있으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나, 재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이어 41세 되던 1567년에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나갔다. 돌아오자 공의전(恭懿殿 명종의 형인 인종의 왕비)의 복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에 “공의전(恭懿殿)은 명종과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고 퇴계도 이에 찬동하였다. 이때 고봉이 “형제가 왕통을 계승하여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으면 곧 부자간과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기명언 덕분에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했노라고 했다.42세 되던 1568년에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에 배수되었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다. 이 무렵 고봉은 경연의 강의에서 인사(人事), 시무(時務), 교육(敎育) 등에 관하여 평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경세관을 편다. 명종 19년인 1564년에서 선조 2년인 1569년까지 경연에서 강연한 이 내용은 뒤에 《논사록(論思錄)》 상편으로 묶이게 된다. 43세 되던 1569년 3월에 고봉은 배 위에서 송별시를 주고받으며 저자도(楮子島)까지 따라 나와 퇴계를 송별하였다. 이달에 대사간(大司諫)에 배수되었다. 4월에 차자를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으나 9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고봉은 44세 되던 1570년 2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돌아오자마자 5월에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낙암(樂庵)을 짓고 신진 학자들을 맞아 학문 세계로 침잠한다. 낙암의 ‘낙(樂)’은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다[貧當益可樂]’는 퇴계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무렵의 고봉이 지향하던 정신세계가 암자의 이름에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6월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월에 퇴계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곡읍의 예를 행하였다. 45세 되던 1571년 2월 무렵 귀전암(歸全庵)에 유람하였는데, 이때 자제 효증(孝曾)에게 장례지를 일러주었다.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弘文館副提學兼經筵修撰官藝文館直提學)에 배수되었으며 소명이 있었으나 5월에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고, 문인들과 〈태극도(太極圖)〉에 대해 강론하였다. 선조 2년(1568) 5월부터 선조 5년까지 조정에서 강론한 내용은 《논사록》 하편에 묶인다.46세 되던 융경 6년 임신년(1572)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어 상경하였다가 대사간(大司諫)에 배수되었다. 5월에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가 9월에 다시 대사간에 배수되었는데, 그날 곧바로 병으로 정사(呈辭)하였다. 10월 3일에 남쪽으로 귀향하여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병을 앓기 시작했다. 15일에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는데, 병이 더욱 악화되어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였다. 25일에 병이 위중하여 사돈인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11월 1일 4경에 졸하였다. 계유년(1573)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1578년(선조11)에 호남의 유생들이 낙암 아래에 사당을 세워 위패(位牌)를 모시고는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는데, ‘문(文)’은 도덕과 박학을 상징한 것이고 ‘헌(憲)’은 기록할 만한 선행의 표상을 상징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에 서원을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가로 옮겼는데, 낙암과는 20리 떨어진 곳이다. 1654년(효종5) 월봉서원(月峯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2) 학문고봉이 퇴계에게 질문을 시작하여 주고받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는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쟁단(爭端)을 제공하여 한국 사상사의 가장 큰 흐름의 시원(始源)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고봉과 퇴계 이전에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체계화된 것은 아무래도 두 사람 간의 논변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이것이 《사칠서변(四七書辨)》으로 묶였으며, 성호(星湖)의 《사칠신편(四七新編)》, 우담(愚潭)의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한수재(寒水齋)의 《사칠이기변》, 대산(大山)의 《사칠설(四七說)》, 한주(寒州)의 《사칠원위설(四七原委說)》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관련 저술이 조선 후기까지 족출(簇出)하였다. 고봉과 퇴계의 논쟁은 조선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이런 중요성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다각도의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① 논변의 발단계축년(1553) 가을,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은 자신이 작성한 〈천명도설〉을 가지고 퇴계에게 질정을 구했다. 이에 퇴계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추만의 설을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 주었다. 그 후 추만은 퇴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정한 도설을 가지고 와서 퇴계에게 보여 주었고, 퇴계가 그것을 다시 교정하여 완전히 정리함으로써 〈천명도설〉은 새롭게 완성되었다. 12월에 퇴계는 〈천명도설 후서(天命圖說後敍)〉를 지어 추만에게 주었고, 이듬해 정월 추만은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를 지었다. 고봉이 이 〈천명도설〉을 접한 것은 그의 나이 32세인 1558년 가을이다. 추만이 〈천명도설〉을 가지고 고봉을 찾아와 함께 토론한 것이다. 고봉은 이때 위에 언급한 퇴계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퇴계는 추만과 고봉의 논쟁 전말을 전해 듣고 논리를 정정해 편지를 보낸다.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ㆍ악이 있다.[四端純理故無不善 七情兼氣故有善惡 如此則無病否]”는 것이 그 골자인데, 이것이 사칠 논변의 시발점이다. 1559년 고봉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다. 고봉은 퇴계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요지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이다. 다만 사단은 칠정 가운데서 선한 일부분만 떼어낸 것으로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의 묘맥[發而中節者之苗脈也]’이다.○ 사단과 칠정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키면 이는 이와 기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논리에 어긋난다.○ 이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재료여서 본래 구분되지만 사물에 있어서는 혼륜(渾淪)하여 나눌 수가 없다.○ 칠정의 발현은 기의 과불급(過不及)으로 인해 선악으로 갈라지므로 이가 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기가 과불급 없이 자연히 발현되는 것은 마침내 이의 본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고봉의 주장은 사단 역시 정(情)이고, 따라서 기가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칠정이 발하여 중절(中節)한 것, 성이 발할 때 기가 아직 용사하지 않아 본연의 선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 기가 자연스럽게 발하여 과불급이 없는 것, 기가 이에 순응하여 발하되 한 터럭이라도 장애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사단 역시 정이라는 고봉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은 소종래(所從來)가 다르다고 한다. 사단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질지성(氣質之性)에 근원한다는 말이다.고봉은 다시 편지를 보내 여기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한다.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논의하는 것은 좋지만 도식화하여 대거(對擧)하면 마치 두 가지의 대별되는 정이 있는 것 같고, 정에 또 두 가지의 선이 있어 하나는 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기에서 근원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퇴계의 주장에 반박하는 고봉의 견해는 이러하다. 먼저 기질지성은 그 자체로 이미 본연지성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정은 성의 발함이다.’라는 논리대로 말하자면 칠정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발하는 것이다. 셋째, 사단의 정을 느끼는 것은 기(氣)이고, 그 소이연은 이(理)이다. 넷째, 사단 역시 중절하지 못하면 선하지 않다. 이런 이유들을 근거로 퇴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② 논변의 전개와 성격고봉의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사람과 말[馬]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대별하여 말하든 하나로 말하든 고봉이 지적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여전히 사단과 칠정의 소종래는 다르다고 논박하였다. 이는 퇴계가 고봉의 문제 제기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기본 논리를 굽히지 않은 것인데, 이때 퇴계가 내놓은 논리가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四端理發氣隨之 七情氣發理乘之]”는 것이다.[가] 대개 혼합하여 말할 경우 칠정이 이ㆍ기를 겸하였다는 것은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분명하지만, 칠정을 사단과 대거(對擧)하여 각각 구분하여 말하면 칠정과 기의 관계가 마치 사단과 이의 관계와 같아 그 발하는 데 각각 혈맥이 있고, 그 이름에 모두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주된 바에 따라 이ㆍ기에 분속할 수 있습니다. 나도 칠정이 이(理)와 관계없이 외물이 우연히 서로 모여 감동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진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지만,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입니다.[나]“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는 두 글귀가 매우 정밀하지만, 저의 생각에는 이 두 구절의 뜻이 칠정은 이ㆍ기를 겸유(兼有)하고 사단은 이가 발한 한쪽만을 가진 것이 될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두 글귀를 “정이 발할 때는 혹 이가 움직여 기가 함께하기도 하고, 혹 기가 감응하여 이가 타기도 한다.”라고 고치고 싶은데, 이와 같이 말을 만드는 것이 또 선생의 생각에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가]는 퇴계가 고봉에게 답한 제2서이고, [나]는 이른바 제3서라고 하는 고봉의 답장이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봉은 퇴계가 펴는 호발론(互發論)의 논리에 수긍하는 한편 ‘이발기수 기발이승(理發氣隨 氣發理乘)’을 ‘이동기구 기감이승(理動氣俱 氣感理乘)’으로 고치고 싶어 한다. 여기에 대해 퇴계는 답장을 썼으나 보내지 않았고, 고봉이 뒤에 〈후설(後說)〉과 〈총론(總論)〉을 지어 보냄으로써 논쟁은 마무리되었다.간단하게 두 논리의 성격에 대해 그간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결과를 가지고 도식화해 보자면 이렇다.퇴계의 이론:호발(互發)ㆍ불상잡(不相雜) 강조, 이원론적, 대거(對擧)ㆍ수평적, 횡간(橫看), 실천 지향적, 분개간(分開看).고봉의 이론:상순(相循)ㆍ불상리(不相離) 강조, 일원론적, 인잉(因仍)ㆍ수직적, 수간(竪看), 논리 지향적, 혼륜간(渾淪看).편지를 통한 논쟁은 8년 동안 진행되었다. 고봉은 퇴계의 주장을 수용하며 자신의 논리와 절충했고, 퇴계 역시 고봉의 주장을 수용하여 자신의 학설을 일정부분 수정 보완하였다. 그 결과 퇴계가 “처음에는 의견이 들쭉날쭉하여 달랐으나 끝내는 난만(爛慢)하게 의견이 같아졌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처럼 논쟁은 마무리 되었다.③ 논변의 의의와 후대에 미친 영향이 논쟁은 자체 정합성에 약간의 모순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다고 기왕의 연구에서 간간이 지적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논쟁은 우리 철학사에서 이(理)ㆍ기(氣), 심(心)ㆍ성(性)ㆍ정(情), 본연지성(本然之性)ㆍ기질지성(氣質之性) 등 성리학에 관련된 핵심 용어의 개념 정립과 외연 설정이 가지는 중요성을 각성시켰고, 나아가 이기심성과 관련한 수많은 논쟁의 단서를 제기하였다는 데에 학술사적 의의가 있다. 고봉이 제기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퇴계에 의해 상당 부분 수용된 것도 사실이지만, 종국에 고봉이 전개하는 입론 방식이 또한 퇴계의 호발설(互發說) 구조와 닮아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고봉의 학설이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는 기호학파 성리설의 근간이 되었음에도, 영남학파 학자들의 경우는 언제나 고봉이 결국 퇴계의 설에 승복하였다는 것으로만 결론을 내리는 독특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율곡은 고봉의 논리를 계승 발전시켜 퇴계의 주장을 논파했다. 그 대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봉과 율곡 모두 사단(四端)은 칠정(七情)에 포함된다고 하였으며, 이기(理氣)를 혼륜(渾淪)하여 보아야 한다고 했다.○ 퇴계의 호발설은 마음 안에 두 가지의 근원이 있는 것처럼 곡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도 고봉과 율곡의 공통된 주장이다.○ 고봉은 사단도 칠정처럼 기의 작용이라 하였으며, 그 예로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사유 맥락과 예시 논증의 방법은 율곡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봉의 입론 방식을 율곡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근원은 하나이나 흐름은 두 갈래[源一而流二]’라는 논리를 제기했다.퇴계의 혼륜간(渾淪看)을 반박하는 고봉의 논리는 이후 기호학파에 전승되어 우암(尤庵), 남당(南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고수되었고, 영남학파는 이와 기,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퇴계의 분개간(分開看) 논리를 계승한다. 뒤에 조선 후기 성주(星州)의 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퇴계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논리에 근거하여, 고봉이 대체로 퇴계의 주장에 승복했고 퇴계도 매우 중요한 쟁점에서 고봉의 설을 수용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칠왕복서〉의 이해에서 기존 영남학파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이례적으로 고봉의 견해가 가지는 논리적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3. 《고봉집》의 간행 경위와 내용 1) 간행 경위《고봉집》은 1629년(인조7) 고봉의 손서(孫婿)이자 선산 부사인 조찬한(趙纘韓:1572~1631)이 선산에서 3권 3책의 목판(木板)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인 이 문집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에 앞서 고봉의 사망 직후인 1572년 12월에 선조(宣祖)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篈)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말을 《기거주일록(起居注日錄)》에서 초출ㆍ편집한 후 《논사록》 2부를 만들어 1부는 고봉의 집에 보내 주었다. 조찬한이 《고봉집》을 간행한 다음 해인 1630년(인조8)에 이를 선산에서 목판 2권 2책으로 간행하고 속집(續集)이라 하였다. 《고봉집》 원집과 《논사록》 속집을 모아 만든 5권 5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양 선생 왕복서》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이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모아 날짜순으로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에 퇴계가 사망한 후 고봉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이 별세하자, 고봉의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누락되었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기효증의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6) 봄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 선생 왕복서》라 이름하였다.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1727~1789)의 협조로 1786년(정조10)에 중간하였고, 《양 선생 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의 도움을 받아 1788년에 중간하였다.1907년(순종1)에는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의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및 후현(後賢)의 글을 수집ㆍ편차한 속집(續集:속집 2권, 부록 1권) 3권 2책과 별집 부록(別集附錄) 2권 1책을 《고봉집》 원집, 《논사록》, 《양 선생 왕복서》,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와 합편하여 목판본 15권 11책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이 중간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1970년에 15대손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 행주기씨(幸州奇氏) 종중(宗中)에서 중간본에 따라 석인(石印)으로 삼간(三刊)하였다. 이 간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2) 《국역 고봉전서》의 내용《고봉집》 본집은 원집 3권, 속집 2권, 부록 1권, 별집 부록 2권, 《논사록》 2권 합 10권 8책으로 되어 있다. 원집은 권수(卷首)에 1629년에 쓴 장유(張維:1587~1638)와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서문이 있고, 그 뒤에 목록과 〈연보〉가 있다. 본집의 저본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연보〉 뒤에 부록이 있으나 속집의 부록과 중복되기에 본집에서는 제외하였다. 이중 원집은 10행 18자이고, 〈연보〉ㆍ속집ㆍ별집 부록ㆍ《논사록》ㆍ《양 선생 왕복서》ㆍ《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등은 10행 20자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집권수(卷首):고봉 연보(高峯年譜)권1:시(詩) 원집 161제 273수, 외집 45제 59수, 보유 3제 4수, 도합 209제 336수권2:표(表) 10편, 전(箋)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주(奏) 2편, 서계수답(書契修答) 1편, 의(議) 2편, 설(說) 2편, 소(疏) 4편, 장(狀) 6편, 비(碑) 1편, 차(箚) 1편, 논(論) 3편, 기(記) 7편, 제문(祭文) 9편, 악장(樂章) 1편, 축문(祝文) 1편 등권3:묘갈명(墓碣銘) 6편,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묘갈기(墓碣記) 1편, 묘지명(墓誌銘) 2편, 묘기(墓記) 1편, 천묘기(遷墓記) 1편, 광명(壙銘) 1편, 선정비(善政碑) 1편, 행장(行狀) 3편, 서(書) 9편, 발(跋) 2편 등권미(卷尾):조찬한의 발(1629)○ 속집권1:시 227제 340수권2:서(書) 6편, 잡저(雜著) 4편, 서(序) 1편, 발 1편, 제문 1편, 논 1편, 책(策) 1편. 부록으로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과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 등○ 별집 부록권1:제문 20편권2:만장(挽章) 55편, 청향소(請享疏), 춘추 제향 축문(春秋祭享祝文) 등권미:기동준(奇東準)의 후지(1907)① 원집권1에는 외집과 보유를 포함하여 209제(題)의 시가 시체의 구분 없이 수록되어 있다. 경술년(1550)인 24세 때의 작품부터 42세 때인 무진년(1568)경까지의 작품이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1561년에 지은 〈추만을 애도하다(悼秋巒)〉부터 다시 연대순으로 편차하였다. 특히 후반부에는 1567년 이산해(李山海),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었을 때 주고받은 시들이 모여 있다. 또 외집과 보유가 권내에 함께 편차되어 있다. 외집은 《퇴계집》의 예에 따라 편차한 것으로 보이는데, 배열 원칙은 불분명하며 역시 종사관 시절 차운하여 지은 시가 다수 실려 있다. 보유는 조여심(曺汝諶), 김경우(金景愚)와 나눈 시 3수로서 원집 간행 뒤 1907년 이전에 추각(追刻)된 것으로 추측된다. 외집과 보유 부분 외에도 원집에서 포판(補板)된 곳은 글자체가 확연히 달라서 한눈에 알 수 있다.고봉의 시는 내용상 시인의 감흥을 읊은 기흥시(記興詩),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차운시(次韻詩)와 증별시(贈別詩), 이취를 읊은 이취시(理趣詩), 주변 인물에 대한 만시(挽詩) 등이 있다. 그의 시 〈녹음에 꾀꼬리 소리 유창하다[綠陰鶯語滑]〉에 “기후가 재촉하니 조화롭게 지저귀고, 천기가 움직이니 마음껏 노래하네.[氣候競催仍恰恰, 天機自動謾嚶嚶]” 한 것에서는 봄날의 흥취에 순수하게 감응하는 고봉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고봉이 차운한 시들을 통해 교유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는데, 송순(宋純), 오겸(吳謙:1496~1582), 박개(朴漑:1511~1586), 양응정(梁應鼎:1519~1581), 정탁(鄭琢:1526~1605) 등의 인물과 교분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음침한 비 갑자기 개니 / 陰雨忽云霽석양이 창가에 들어온다 / 夕陽來入窓옷깃을 여미고 스스로 살피며 / 斂襟獨自省이 한 마음을 시험해 보았네 / 驗此一團腔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시에 차운하여 준 〈박화숙의 시에 차운하다[次朴和叔韻]〉라는 시이다. 1구와 2구는 궂은비가 개고 저녁 햇살이 창으로 비쳐 드는 풍경을 묘사했다. 맑고 깨끗한 저녁은 그 이미지만으로 서정적 시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이다. 그러나 고봉이 이 소재를 가지고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한 내용은 ‘심(心)’에 대한 성찰이다. 궂은비라는 인욕을 걷어내어 발함이 중절(中節)이 될 때만 저녁 햇살이라는 본연의 성이 가려지지 않고 잘 발현될 수 있다는 그의 성리 철학이 시로 형상화된 것으로, 박순과의 교유가 어떠한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시로서도 좋은 예라 하겠다.권2는 잡저(雜著)로 표(表), 전(箋), 상량문(上樑文), 주(奏), 서계수답(書契修答), 의(議), 설(說), 소(疏), 장(狀), 비(碑), 차(箚), 논(論), 기(記), 제문(祭文), 악장(樂章), 축문(祝文) 등이다. 고봉은 여러 차례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한 관계로 중국에 보내는 표(表)와 전(箋)을 다수 지었으며, 〈변무주(辨誣奏)〉는 1572년 종계 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소명(召命)을 받았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제교를 지낼 무렵 문장에 대한 고봉의 자부심은 대단했는데, 《어우야담(於于野談)》의 한 대목을 들어 보면 “문학가의 경우 작품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기뻐하며 흔쾌히 받아들여 시원하게 개선하는 자가 있고, 벌컥 화를 내며 스스로 문제점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자가 있다. 고봉 기대승은 자신의 문장을 자부하여 남들 아래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지제교로서 응교문(應敎文)을 올릴 때 승정원의 승지가 잘못된 부분에 부표를 붙여 지적하면 화를 내어 하리(下吏)를 꾸짖으며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그 무렵 지은 것으로 〈왜국의 서계에 대한 답서[倭書契修答]〉라는 일본 관련 외교문서가 있다.〈이주에 대한 설[二主說]〉은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가례(家禮)》 중 ‘이주(二主)’의 뜻을 물어 오자 그 뜻을 밝힌 것이다. 〈문소전에 대한 의[文昭殿議]〉와 〈문소전을 논한 차자[論文昭殿箚]〉는 선조 2년(1569)에 인종과 명종의 문소전 부묘(祔廟)와 관련한 방안을 제시한 글로서, 그 결과 의논이 정해져 명종대왕의 부묘 때 쓸 악장을 짓기까지 하였다. 이런 글에서 번잡하게 일을 만들지 않고 옛것을 따르면서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고봉의 현실관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고봉의 주장을 들어 보자.의논하는 자들이 만일 “태조의 남향은 선왕 이래로 오래 지켜 온 규칙이니 가벼이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신의 뜻에는 전우(殿宇)를 트는 것도 사체가 지극히 중하옵고 경솔하게 가벼이 움직이는 것도 뒤에 후회가 있을까 두려우니, 북쪽 벽을 트고 뒤 퇴(退)를 전 안에 통하게 해서 현재 종묘(宗廟)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태조의 신어(神御)가 바로 두 기둥 안에 있게 되고, 소목의 위차도 북쪽에 가까이 배열할 수가 있어서 명종의 부위(祔位)도 장차 용납할 공간이 없음을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고쳐 만드는 시끄러움이 없고,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편안함이 있어서 이치와 형편에 지극히 마땅하오니, 다시 의심스러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일설(一說)이오니, 이 역시 성명(聖明)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상께서는 재결하시기 바랍니다.〈곤지기를 논하다[論困知記]〉는 기(氣)를 이(理)로 인식하고 심(心)을 성(性)이라고 논한 불교의 논리를 수용하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고 논했던 나정암(羅整菴)의 학문이 선학(禪學)의 말장난에서 나온 것이라고 논박한 글이다. 고봉은 이에 대해 “세속에서는 그의 학설의 신기(新奇)함을 좋아하고 그의 실상을 연구하지 않으니, 그를 높이고 숭상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에는 일찍이 ‘나씨(羅氏)의 학문은 실로 선학에서 나왔는데 얼굴을 바꾸어 성현의 말씀으로 문식(文飾)하였으니, 바로 피음사둔(詖淫邪遁)이 심한 경우이다. 가령 맹자(孟子)가 다시 태어나신다면 반드시 그의 죄를 성토하여 인심을 바로잡을 것이요 진실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하고 성토하였다.젊은 시절 문장 스승인 송순의 면앙정(俛仰亭)에 써 준 〈면앙정기(俛仰亭記)〉가 2편이 실려 있고, 〈광주향교 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가 있다. 제문(祭文)은 목종황제(穆宗皇帝)와 퇴계 등에 대한 것이다. 또 〈죽수서원에 대한 축문[竹樹書院祝文]〉, 〈조 문정공에 대한 제문[祭趙文正公文]〉이 있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에 대한 각별한 존경을 엿볼 수 있다.권3은 묘갈명, 신도비명, 묘갈기, 묘지명, 묘기(墓記), 천묘기, 광명(壙銘), 선정비, 행장 3편, 서(書), 발 등이다.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1463~1502)에 대한 묘갈명과 퇴계에 대한 광명,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1491~1553)을 위해 쓴 신도비명,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을 위해 쓴 묘지명 등이 있다. 행장은 기대항(奇大恒:1519~1564),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에 대한 것이다. 서(書)는 김계(金啓), 이정(李楨), 정철(鄭澈) 등과 나눈 편지, 퇴계의 문목(問目)에 답하는 편지 등이 있다. 정철에게는 상제(喪制)에 관한 물음에 답한 것이고, 퇴계와의 편지는 《양 선생 왕복서》와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에 실리지 않았던 예제(禮制), 인물평(人物評), 심성설(心性說) 등이 주요 내용이다. 발(跋)은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서절요 서(朱子書節要序)〉에 대한 것이다. 보유(補遺)에 만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효자(孝子) 정문손(鄭文孫)에 대해 읊은 시의 서(序) 및 서(書)가 실려 있다.권미(卷尾)에는 조찬한의 발문(1629)이 있다. 조찬한은 이 글에서 “문장은 그 여사인데도 웅심하고 아건하여 한결같이 혼연천성(渾然天成)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장편시는 한퇴지와 유사하고, 단편은 도연명에 가까우며, 변론한 것은 구양수ㆍ한퇴지와 같았다.”라고 평하였다. 다소 과장이 없지 않은 비평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봉의 문학이 결코 범범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다.② 속집《논사록》은 상ㆍ하 2권으로 명종 19년(1564)과 22년, 선조 1년과 2년 그리고 5년에 저자가 경연에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며 임금에게 자신의 경세관을 피력한 내용을 모은 것으로, 고봉의 현실관과 정치관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고봉은 경연의 강석을 통해 임금에게 학문에 힘을 쏟도록 권장하고 군덕의 수양을 당부하였으며 언로의 개방과 재용의 절약을 진달하였다. 《대학》과 《중용》의 핵심 내용인 성(誠)과 경(敬)을 강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요순(堯舜)부터 정주(程朱)에 이르는 도학의 연원과 제왕(帝王)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말하는가 하면, 그 위에 정몽주(鄭夢周)에서 퇴계에 이르는 동방 도통의 연원을 말한 뒤 이들을 높여야 국가의 덕과 기강이 바로 선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禮)를 밝히고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문소전의 논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끝에 조찬한의 발문(1630)이 있다.속집은 2권으로 각 권수에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 227제이다. 시체 구분 없이 편차되어 있으나 소주(小註)로 시체를 표시해 놓은 것이 많다. 속집의 간행이 늦어진 관계로 〈송별(送別)〉과 같이 결구(缺句)가 있는 시가 다수 있다. 〈관찰사에게 주다[贈道伯]〉처럼 증시 대상자의 성명을 고증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제목을 잃은 작품도 보인다. 〈화신풍(花信風)〉 등의 응제시(應製詩), 〈호당으로 향하다[向湖堂]〉 등 호당에 있을 때 지은 시, 〈삼강령 팔조목을 읊다[詠三綱八目]〉 등 《대학》, 《중용》 등의 내용을 읊은 시, 기타 차운시, 만시, 제시, 증시가 다수 실려 있다.《존재만록(存齋謾錄)》은 저자 자신이 1569년(선조2)부터 기록을 시작하여 1572년에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주로 퇴계, 정유일(鄭惟一), 노수신(盧守愼) 등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퇴계에게 올리려던 것인데, 고봉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퇴계의 〈매화시(梅花詩)〉에 대한 차운시가 있고, 예천(醴泉) 동헌에서 매화를 보고 ‘매화에게 묻다[問梅]’, ‘매화가 답하다[梅花答]’라고 하여 스스로 매화와 시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 도산서원(陶山書院)과 그 주위의 암서헌(巖棲軒), 탁영담(濯纓潭), 천연대(天淵臺), 반타석(盤陀石) 등 퇴계의 장구지소(杖屨之所)를 읊은 시도 있다.고봉과 퇴계는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32세에 처음 만나 사단ㆍ칠정에 관해 논변을 주고받으며 고봉은 당대 어느 학자보다도 퇴계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43세 되던 해, 고봉은 낙향하는 퇴계를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며 다음과 같은 시로 전송한다.한강수 도도히 만고에 흐르는데 / 江漢滔滔萬古流선생의 이번 걸음 어찌하면 만류할꼬 / 先生此去若爲留백사장 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 / 沙邊拽纜遲徊處이별의 아픔에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 不盡離腸萬斛愁 퇴계 또한 이 시에 화운하여 답하고, 이어 여덟 수의 칠언절구로 된 〈매화시〉를 꺼내어 선생에게 보여 주며 화답을 구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 고봉은 남쪽으로 귀향하던 길에 한 해 전 퇴계와 이별하던 때를 그리며, “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年惜別傷心地 今日南歸亦自愁]” 하였다.권2는 서(書), 잡저, 서(序), 발, 제문, 논, 책(策)이 실려 있다. 서(書)는 먼저 이태백이 두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 자신의 회포를 문학적으로 편 글이 제일 앞에 실려 있고, 종형 기대항, 미암(眉巖) 유희춘(枊希春) 등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특히 〈덕양유고를 보내 주신 데 사례하는 글[謝惠德陽遺稿書]〉은 종부 기준(奇遵)의 문집을 받아보고 기대항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편지이다. 잡저는 10대에 지은 〈과정기훈(過庭記訓)〉과 〈자경설(自警說)〉을 비롯하여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질문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학문 등에 답변한 〈천사 허국ㆍ위시량의 문목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天使許國魏時亮問目條對]〉 등이다. 이 외에 〈퇴계 선생의 도산기문에 대한 발[退溪先生陶山記文跋]〉과 하서 김인후에 대한 제문 등이 있다.부록으로는 1630년대에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行狀)과 1646년경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이 있다.③ 별집 부록별집 부록은 권1에 유홍(兪泓) 등 주변 인물과 최경회(崔慶會) 등이 지은 제문, 그리고 이호민(李好閔)과 정철(鄭澈)이 지은 제문이 있다. 권2에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양사기(楊士奇), 구봉령(具鳳齡), 윤두수(尹斗壽), 정유일(鄭惟一), 허엽(許曄) 등 동년배의 학자들이 지은 만장과 이이(李珥), 정탁(鄭琢), 김성일(金誠一), 오건(吳健), 윤근수(尹根壽) 등 후배 학자들의 만장이 있다. 만가를 지은 이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고봉의 교유 범위와 사림에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겠다. 이어 월봉서원 사실(月峯書院事實)에 고용후(高用厚)와 정예환(鄭禮煥) 등이 종사 제향을 청하며 올린 〈청향소(請享疏)〉,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이 쓴 〈춘추 제향 축문(春秋祭享祝文)〉 등이 실려 있다. 퇴계를 비롯하여 유희춘, 박순, 장현광, 송시열 등이 고봉을 평한 글이 마지막 〈서술(敍述)〉에 실려 있다. 맨 끝에는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지은 후지가 있다.④ 《양 선생 왕복서》,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양 선생 왕복서》는 편지를 처음 교류하기 시작한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일상의 안부, 공부의 방법, 출처와 진퇴, 국상(國喪)의 의례, 학문의 교류, 그리움의 정회 등 다양한 주제로 주고받은 편지 114통을 순서에 따라 엮은 것이다.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는 그 가운데 사칠ㆍ이기 논변에 관한 글만 골라내어 따로 묶은 것으로, 고봉과 퇴계의 논변 과정을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봉은 〈사단ㆍ칠정 후설(四端七情後說)〉에서 “주자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이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말을 반복하여 참고해 보고서야 끝내 부합하지 않음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어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곧 저의 전일의 설에 상고한 것이 자세하지 못하고 살핀 것이 극진하지 못함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여 최종적으로 퇴계의 설을 수긍하면서도, 칠정 가운데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당초 사단과 다르지 않다는 종래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며 이점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제까지의 논의를 집성하여 고봉은 결론을 내려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단ㆍ칠정 총론(四端七情總論)〉인데, 중요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고봉과 퇴계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논변의 합의점을 제시하고자 한다.주자가 또 말하기를 “사단은 바로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바로 기가 발한 것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사단은 이가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이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로 의심할 바 없겠으나, 칠정은 이ㆍ기를 겸하고 선ㆍ악이 있는 것이고 보면 그 발하는 것이 오로지 기만은 아니지만 기질(氣質)의 섞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 말은 바로 기질의 성[氣質之性]의 설과 같습니다.대체로 성이 본래 선하다 하더라도 기질 속에 떨어져 있으면 편벽되고 지나침이 없지 않기 때문에 ‘기질의 성’이라 하고, 칠정이 비록 이ㆍ기를 겸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약하고 기가 강하여 이가 기를 통섭할 수 없어 쉽게 악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정 중에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사단과 애당초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단은 오로지 이가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의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확충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학자가 사단의 발함에 대해 깊이 인식하여 확충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칠정은 이ㆍ기의 발함을 겸유(兼有)하였으나, 이의 발함이 기를 주재(主宰)하지 못하기도 하고 기의 유행이 도리어 이를 가릴 때도 있는 것이니, 학자가 칠정의 발함에 대해 성찰하여 잘 다스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또 사단과 칠정의 명의(名義)에 각각 소이연(所以然)이 있는 것이니, 학자가 진실로 이로 말미암아 확충하기를 구한다면 도움이 많을 것입니다. 이번에 간행하는 《국역 고봉전서》는 1630년에 간행된 목판본을 번역대본으로 하여 총 5집으로 묶었다.(5집은 전체 원문) 1집에 원집을 실었는데, 권1 〈고봉 선생 연보〉에 〈자경설(自警說)〉의 내용을 보충하였고 석인본 〈고봉 선생 연보〉를 번역하여 함께 실었으며, 기영환(奇永桓)의 〈후지〉를 덧실었다. 2집에는 《논사록》과 속집 권1을 실었는데, 《논사록》의 경우 조경(趙璥)이 쓴 〈중간 고봉 선생 《논사록》 서(重刊高峯先生論思錄序)〉를 보충 번역하여 실었다. 또 1907년에 간행된 목판본의 〈효종대왕 치제문(孝宗大王致祭文)〉, 〈정종대왕 치제문(正宗大王致祭文)〉, 〈고봉 선생 《논사록》을 중간한 뒤의 전교[高峯先生論思錄重刊後傳敎]〉, 김종수(金鍾秀)의 〈고봉 선생 《논사록》 발(高峰先生論思錄跋)〉, 조찬한(趙纘韓)의 〈고봉 선생 《논사록》 소지(高峯先生論思錄小識)〉와 석인본에 있는 기세훈(奇世勳)의 〈후지(後識)〉를 추가로 실었다. 3집에는 속집 권2, 부록 권1, 별집 부록 권1과 권2를 실었다. 그리고 문집에 누락된 시 가운데 《명가필보(名家筆譜)》에 실린 2수와 《고봉 선생 유묵(高峯先生遺墨)》에 실린 5수, 〈고봉 선생 신도비명(高峯先生神道碑銘)〉, 〈월봉서원 묘정비명(月峯書院廟庭碑銘)〉을 추가 번역하여 실었다. 4집에는 《양 선생 왕복서》와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를 실었으며, 김종수의 〈사칠속편변 발(四七續編辨跋)〉을 추가로 실었다.4. 맺음말그간 고봉에 대한 연구는 사상과 철학을 중심으로 문학, 교육학, 경세론, 윤리관 등 여러 면모에 대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고봉학술원에서 《전통과 현실》을 발간하면서 고봉에 대한 연구가 그 깊이와 넓이를 날로 더해 가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서양의 철학자 및 심리학자의 논리와 연관 지어 연구한 서적까지 나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저변에는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국역 고봉집》이나 1998년 허경진 선생이 낸 《고봉 기대승 시선》, 2003년 김영두 선생이 낸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와 같은 관련 서적의 번역물이 큰 힘이 되었음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고봉의 문학과 철학이 조선 문학사와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누락된 자료를 수습하여 《국역 고봉전서》를 내는 지금, 이 국역서가 앞으로 전개될 고봉 연구에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참고문헌이동희, 〈율곡 성리학과 고봉 성리학 비교〉,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 2005.김동준, 〈고봉 기대승의 시세계〉, 한국한시학회, 《한국한시작가연구》, 2001.황의동, 〈고봉의 인간관〉,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1999.윤용남, 〈기대승론〉, 동악어문학회 편, 《조선조 한시작가론》, 1993.황의동, 〈고봉(高峰)의 성리학(性理學)〉,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호서문화연구》, 1992.이진표, 〈고봉 기대승의 유학사상〉,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연구》, 1985.友枝龍太郞, 〈사칠논변에 있어서의 퇴계 고봉의 입장〉, 퇴계학연구원, 《퇴계학보》, 1981.전병재, 〈퇴계 고봉의 사칠논변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1979.유명종, 〈퇴고사칠논변(退高四七論辯)과 고봉(高峯)의 논거〉, 퇴계학연구원, 《퇴계학보》, 1976.이상은, 〈사칠논변과 대설(對說)ㆍ인설(因說)의 의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연구》, 1973.윤사순, 〈고봉 심성설의 이기론적(理氣論的) 특색〉,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아세아연구》, 1973.이필수, 〈고봉 기대승의 시세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6.이상하, 〈한주 이진상 성리설의 입론 근거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2003.정병련, 〈고봉 기대승의 생애와 학문〉, 행주기씨문헌공종중, 1998.이종은ㆍ정민 공편, 《한국역대시화유편(韓國歷代詩話類編)》, 아세화문화사.유몽인, 《시화총림(詩話叢林)》, 《어우야담(於于野談)》, 아세아문화사, 1973.홍만종, 《홍만종전집(洪萬宗全集)》 하, 〈시평보유(詩評補遺)〉 하, 태학사, 1997.2007년 12월 일[주-D001]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노수신이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다가 이때 괴산(槐山)으로 양이되는 길이었는데, 고봉이 진국원(鎭國院)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주-D002] 정암(整菴) : 명나라 때의 학자인 나흠순(羅欽順)의 호이다. 자는 윤승(允升)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20여 년간 시골에서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에 전념하고 《곤지기(困知記)》를 지었으며, 문집에 《정암존고(整菴存稿)》가 있다. 《明史 卷282 羅欽順列傳》[주-D003] 소재(蘇齋)……반박하였다. : 이 내용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자세히 보인다.[주-D004] 계축년(1553)……구했다 : 퇴계가 추만을 만난 정황에 대해 퇴계의 〈천명도설 후서(天命圖說後敍)〉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滉)이 처음 벼슬한 뒤로부터 한양의 서쪽 성문 안에 우거(寓居)한 지가 전후에 걸쳐 2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웃에 사는 정정이(鄭靜而 추만)와 서로 알고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조카인 교(㝯)가 어디에서인지 이른바 〈천명도(天命圖)〉라는 것을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도식과 해설에 잘못된 부분이 꽤 있었다. 나는 교에게 누가 만든 것이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차츰 수소문하고서야 비로소 정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이에 나는 사람을 통하여 정이에게 본도(本圖)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정이를 직접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는데 모두 편지를 두서너 차례 왕복한 뒤에야 허락받았으니, 내가 지난날에 궁벽하고 누추하여 남과 교제가 적었음이 부끄러울 만하였다.”[주-D005] 사단이……선ㆍ악이 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 p. 313.[주-D006] 대개……것입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고봉이 사단ㆍ칠정을 이ㆍ기로 나누는 것을 그르다고 변론한 데 대해 퇴계가 답한 제2서〉, p. 356. “蓋渾淪而言 則七情兼理氣 不待多言而明矣 若以七情對四端 而各以其分言之 七情之於氣 猶四端之於理也 其發各有血脈 其名皆有所指 故可隨其所主而分屬之耳 雖滉亦非謂七情不干於理 外物偶相湊著而感動也 此四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耳.”[주-D007] 사단은……모르겠습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퇴계가 사단ㆍ칠정을 재론한 것에 대해 고봉이 답한 편지〉, p. 385. “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兩句亦甚精密 然鄙意以爲此二箇意思 七情則兼有 而四端則只有理發一邊爾 抑此兩句 大升欲改之 曰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 如此下語 又未知於先生意如何.”[주-D008] 퇴계의……계승한다 : 이와 관련하여 이동희 교수는 그의 논문 〈율곡 성리학과 고봉 성리학 비교〉에서 “퇴계의 호발설과 율곡의 기발이승론이 부딪친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율곡의 이기론은 존재론으로서 성립되고 퇴계의 호발설은 도덕론으로서 성립되는 것이며, 양자는 영역이 다른 데서 성립한 것인데 다만 ‘이-기’ 개념이 공통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주-D009] 간행 경위와 내용 : 이 부분은 신승운(辛承云) 선생이 작성한 《한국문집총간해제》 〈고봉집 해제〉의 내용을 골간으로 하여, 필요에 따라 중요 사항을 인용ㆍ보충하였음을 밝혀 둔다.[주-D010] 문학가의……하였다 : 유몽인, 《시화총림》, 《어우야담》, 아세아문화사, 1973, p. 282.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峯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주-D011] 의논하는……바랍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1집, 〈문소전(文昭殿)에 대한 의(議)〉, p. 304. “若議者以爲太祖南向 自先正以來永久之規 不宜輕變 則臣意以爲 拆動殿宇 事體極重 率然輕擧 恐貽後悔, 不若拓展北壁 通後退于殿內 如今之宗廟之制 則太祖神御正在兩楹之內 而昭穆位次 可以近北 挨排明宗祔位 將不患於無地之可容矣 如此則無改作之擾 有仍舊之安 理勢至順 更無可疑 此一說也 亦願聖明之留意焉 伏惟上裁.”[주-D012] 세속에서는……생각하였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서》 1집, 〈곤지기(困知記)를 논하다〉, p. 337. “世俗悅其新奇 而不究其實 宜乎尊尙之也 然愚之淺見 竊嘗以爲羅氏之學 實出於禪學 而改頭換面 文以聖賢之語 乃詖淫邪遁之尤者 使孟子而復生 必當聲罪致討 以正人心 固不悠悠而已也.”[주-D013] 〈곤지기를 논하다[論困知記]〉……성토하였다 : 〈곤지기(困知記)를 논하다〉에 대해 미암(眉巖)은 “참으로 통쾌하다. 참으로 핵심을 찔렀다고 할 것이니, 전에 내가 변박한 것은 그저 지엽에 불과할 뿐이다.[快哉 眞所謂攻其心腹 向我所辨 特枝葉耳]”라고 극찬한 바 있다. 유희춘, 《국역 고봉전서》 3집, 〈서술(敍述)〉, p. 304.[주-D014] 보유(補遺)에……있다 : 효자(孝子) 정문손(鄭文孫)에 대해 읊은 시는 《국역 고봉전서》 1집 권1 p. 83에 실려 있다.[주-D015] 문장은……같았다 : 조찬한, 《국역 고봉전서》, 〈발(跋)〉, p. 534. “文章乃其餘事 而雄深雅健 一出於渾然 長詩逼韓 短篇近陶 辨論如歐韓.”[주-D016] 주자가……알았습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집》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사단ㆍ칠정 후설(後說)〉, p. 416. “以朱子所謂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參究反覆 終覺有未合者 因復思之 乃知前日之說 考之有未詳 而察之有未盡也.”[주-D017] 주자가……것입니다 : 기대승, 《국역 고봉전집》 4집, 《양 선생 사칠ㆍ이기 왕복서》, 〈사단ㆍ칠정 총론(總論)〉, p. 418. “朱子曰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夫四端發於理而無不善 謂是理之發者 固可無疑矣 七情兼理氣有善惡 則其所發 雖不專是氣 而亦不無氣質之雜 故謂是氣之發 此正如氣質之說也……七情兼有理氣之發 而理之所發 或不能以宰乎氣 氣之所流 亦反有以蔽乎理 則學者於七情之發 可不省察以克治之乎 此又四端七情之名義 各有所以然者 學者苟能由是以求之 則亦可以思過半矣.”
    2022-04-30 | NO.712
  • 《고봉집(高峯集)》 해제1 -가계와 행력 등
    1. 저자기대승(奇大升) : 정해년(1527, 중종22)~임신년(1572, 선조5).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2. 가계3. 행력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 11월 18일,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 학업을 시작하다.중종 29년(갑오 1534년, 8세) ◦ 모친 진주강씨(晉州姜氏) 상을 당하다.중종 30년(을미 1535년, 9세) ◦ 효경(孝經)을 읽고 필사하다.중종 32년(정유 1537년, 11세) ◦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배우다.중종 35년(경자 1540년, 14세)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애독하여 매일 한 권씩 읽다.중종 36년(신축 1541년, 15세) ◦ 선대인(先大人)의 훈계를 손수 기록하여 첩을 만들어 스스로 면려하다.◦ 서경부(西京賦) 130구를 짓다.중종 37년(임인 1542년, 16세) ◦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연구하다.중종 38년(계묘 1543년, 17세) ◦ 전한서(前漢書)와 후한서(後漢書),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다.중종 39년(갑진 1544년, 18세) ◦ 중종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다.인종 원년(을사 1545년, 19세) ◦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 승하 때와 같이 곡림하고 소식하다.◦ 사화(士禍) 소식을 듣고 두문불출하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다.명종 원년(병오 1546년, 20세) ◦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을 하다.명종 2년(정미 1547년, 21세) ◦ 1월,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다.명종 3년(무신 1548년, 22세) ◦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인 함평이씨(咸平李氏)와 혼인하다.명종 4년(기유 1549년, 23세) ◦ 사마양시(司馬兩試)에 응시하여 모두 2등을 하다.명종 5년(경술 1550년, 24세) ◦ 8월,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출생하다.명종 6년(신해 1551년, 25세) ◦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낙제하다.명종 9년(갑인 1554년, 28세) ◦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장원하다.◦ 용산(龍山) 정즐(鄭騭)의 상에 조곡(弔哭)하다.명종 10년(을묘 1555년, 29세) ◦ 1월, 부친 기진(奇進) 상을 당하다.◦ 3월, 선고(先考)를 장례하고 묘지(墓誌)를 지었으며, 선비(先妣) 진주강씨의 묘를 옮겨 부장(祔葬)하고 천묘기(遷墓記)를 짓다.명종 12년(정사 1557년, 31세) ◦ 3월, 삼년상을 마치고,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다.명종 13년(무오 1558년, 32세) ◦ 4월,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7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다.◦ 상경길에 태인(泰仁)에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논하다.◦ 10월,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경저(京邸)에서 배알하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보여 주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를 배알하고 전일의 의론을 재론하다.명종 14년(기미 1559년, 33세) ◦ 3월, 퇴계 선생에게 답서를 보내다.◦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짓다.◦ 8월,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출처거취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다.명종 15년(경신 1560년, 34세) ◦ 3월, 하서 김인후를 조문하다.◦ 5월, 정지운과 천명도에 대하여 서신으로 논하다.◦ 8월,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사단칠정에 대하여 논하다.명종 16년(신유 1561년, 35세) ◦ 9월, 아들 기효민(奇孝閔)이 태어나다.명종 17년(임술 1562년, 36세) ◦ 5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2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옮겼다가 다시 봉교(奉敎)로 옮기다.명종 18년(계해 1563년, 37세) ◦ 1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謝恩)하다.◦ 3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다.◦ 4월, 병으로 상소하여 주서에서 체직되고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5월, 학습시험(學習試驗)에서 중등(中等)을 차지하다.◦ 봉교에서 체직되고 부사정(副司正)에 제수되다.◦ 8월, 논박을 받아 귀향하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동궁(東宮)의 부음을 듣고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다.◦ 10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였는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가다.◦ 11월,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명종 19년(갑자 1564년, 38세) ◦ 2월, 경연에 입시하여 재상(宰相)과 경연의 중요성을 아뢰고, 또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라고 아뢰다.◦ 3월, 병으로 상소하여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典籍)ㆍ지제교(知製敎)로 옮겨 제수되다.◦ 6월,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제수되다.◦ 10월, 병조 좌랑ㆍ지제교에 제수되다.◦ 12월, 경현당기(景賢堂記)를 짓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고, 병조 좌랑에 옮겨 제수되다.명종 20년(을축 1565년, 39세) ◦ 2월, 병조 좌랑에 제수되다.◦ 6월,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고 성균관 직강ㆍ지제교에 임명되다.◦ 이조 정랑ㆍ지제교에 제수되다.◦ 10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는 전비(前妣) 남양방씨(南陽房氏)의 묘를 참배하다.◦ 맏형 승지공 기대림(奇大臨)이 별세하다.◦ 12월,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가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하여 논하다.명종 21년(병인 1566년, 40세) ◦ 4월,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예조 정랑ㆍ지제교에 임명되다.◦ 6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이주(二主)의 뜻을 물어와 이주설(二主說)을 짓다.◦ 10월, 통선랑(通善郞)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다.◦ 사간원 헌납ㆍ지제교에 임명되고, 소명(召命)으로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고 사인(舍人)으로 승진하다.명종 22년(정묘 1567년, 41세) ◦ 2월, 사헌부 장령ㆍ지제교에 제수되다.◦ 3월, 성균관 사예ㆍ지제교에 제수되다.◦ 아우 기대절(奇大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기효증을 보내 상례와 장례를 맡아보게 하다.◦ 4월, 사인ㆍ지제교를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다.◦ 5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다.◦ 원접사 종사관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영접하다.◦ 7월, 복명하고 수숙(嫂叔)간에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잘못임을 논하다.◦ 8월, 전위사(餞慰使)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복명하다.◦ 10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다.◦ 11월, 석강(夕講)에서 예기(禮記)를 강하고, 사친(私親)에게 치제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뢰다.선조 원년(무진 1568년, 42세) ◦ 1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고 홍문관직제학 겸 교서관판교에 임명되다.◦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다.◦ 우부승지로 승진하다.◦ 4월, 신병으로 승지에서 체직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7월, 퇴계 선생이 상경하자 가서 인사드리다.◦ 8월, 신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다.◦ 12월, 우승지로 승진하다.◦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하여 논하다.선조 2년(기사 1569년, 43세) ◦ 3월, 퇴계 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고, 보은사(報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다.◦ 4월, 차자를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대하여 논하다.◦ 6월, 문정전(文政殿)에서 대사헌 김개(金鎧)의 간사함을 논하다.◦ 7월, 신병으로 상소하여 승지에서 체직되다.◦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9월,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다.선조 3년(경오 1570년, 44세) ◦ 2월, 귀향하였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모두 나와 전송하다.◦ 5월,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는데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에서 그 뜻을 취하다. 퇴계 선생이 기문을 짓고 편액을 써 주다.◦ 도산기문발(陶山記文跋)을 짓다.◦ 6월, 부경사(赴京使)의 소명이 있자 상소하여 사양하다.◦ 12월,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다.선조 4년(신미 1571년, 45세) ◦ 1월,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 지내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신도비명을 짓다.◦ 2월,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귀전암(歸全庵)을 구경하다.◦ 퇴계 선생의 묘갈명과 묘지를 짓다.◦ 3월, 서석산을 유람하다.◦ 4월,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고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하여 면직을 요청하다.◦ 문인들과 함께 태극도(太極圖)를 논하다.◦ 9월,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를 짓다.◦ 이조 참의에 제수되다.선조 5년(임신 1572년, 46세) ◦ 2월, 아들 기효맹(奇孝孟)이 태어나다.◦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소명을 받아 조정에 나갔는데, 도중에 대사간에 제수되다.◦ 5월,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다.◦ 7월, 공조 참의ㆍ지제교에 제수되다.◦ 9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발문을 짓다.◦ 10월 3일,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니, 서울의 선비들이 한강에서 전별하다.◦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나다.◦ 15일, 태인(泰仁)에 도착한 후,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 머물며 치료하다.◦ 25일, 사돈 김점(金坫)이 와서 문안하자 관청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여 매당(梅塘)으로 숙소를 옮기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보내고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다.◦ 11월 1일, 운명하다.◦ 12월, 선조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篈)이 《논사록(論思錄)》을 편찬하다.선조 6년(계유 1573년) ◦ 2월 8일, 나주(羅州)의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에 안장하다.선조 11년(무인 1578년) ◦ 호남 유생들이 낙암 아래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다.선조 23년(경인 1590년) ◦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 받다.광해군 6년(갑인 1614년) ◦ 영암 군수(靈巖郡守) 조찬한(趙纘韓)이 영암에서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를 간행하다.인조 7년(기사 1629년) ◦ 선산 부사(善山府使) 조찬한이 선산에서 《고봉집》 원집을 초간하다.인조 8년(경오 1630년) ◦ 조찬한이 선산에서 논사록을 간행하다.효종 5년(갑오 1654년) ◦ 월봉서원(月峯書院)에 사액하다.정조 10년(병오 1786년) ◦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중간하다.정조 12년(무신 1788년) ◦ 기언정이 양선생왕복서를 중간하다.순종 1년(정미 1907년) ◦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집》 속집과 별집부록을 편찬하고, 원집과 합편하여 중간하다.1970년 ◦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이 중간본을 석인(石印)으로 삼간하다.1989년 ◦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삼간본을 대본으로 《고봉집》을 국역하다.4. 편찬 및 간행《고봉집(高峯集)》은 1629년(인조7) 고봉의 손서(孫婿)이자 선산 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선산에서 목판(木板)으로 3권 3책을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9)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7 기대승-고-판)에 소장되어 있다.이에 앞서, 고봉이 죽은 직후인 1572년 12월에 선조(宣祖)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篈)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말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초출ㆍ편집한 후 논사록 2부를 만들어 1부는 고봉의 집에 보내 주었다. 이를 조찬한이 《고봉집》을 간행한 다음 해인 1630년(인조8) 선산에서 목판으로 2권 2책을 간행하고 속집(續集)이라 하였다. 《고봉집》 원집과 《논사록》 속집을 모아 5권 5책으로 만든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奎1475)에 소장되어 있다.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이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 퇴계가 돌아가신 후, 고봉은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이 별세하자, 고봉의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빠졌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기효증의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6) 봄에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선생왕복서라 이름하였다.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初名은 趙준)의 협조로 1786년(정조10)에 중간하였고, 양선생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의 도움을 받아 1788년(정조12)에 중간하였다.1907년(순종1)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의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및 후현(後賢)의 글을 수집ㆍ편차한 속집(續集 속집 2권, 부록 1권) 3권 2책과 별집부록(別集附錄) 2권 1책을, 《고봉집》 원집ㆍ논사록ㆍ양선생왕복서ㆍ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와 합편하여 15권 11책을 목판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만송 D1-A154A)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4)에 소장되어 있다.1970년 15대손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 행주기씨(幸州奇氏) 종중(宗中)에서 중간본에 따라 석인(石印)으로 삼간하였다.(삼간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古819.52-G347g),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64a) 등에 소장되어 있다.본서의 번역대본은 1970년에 간행된 삼간본이다.5. 저본의 구성과 내용《고봉집》은 원집(연보 포함) 3권 3책, 속집 3권 2책, 별집부록 2권 1책, 논사록 2권 1책, 양선생왕복서 3권 3책,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 2권 1책 합 15권 11책으로 되어 있다. 이중 원집은 10행 18자이고, 연보ㆍ속집ㆍ별집부록ㆍ《논사록》ㆍ양선생왕복서ㆍ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 등은 10행 20자이다.원집은 권수(卷首)에는 장유(張維)와 장현광(張顯光)의 서문(1629년) 및 고봉연보(高峯年譜)가 있다. 권1에는 시(詩) 209제 336수가 시체(詩體)의 구분이 없이 내ㆍ외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권2에는 표 9편ㆍ전 1편ㆍ상량문 1편ㆍ주 2편ㆍ서계수답 1편ㆍ의 2편ㆍ설 2편ㆍ소 4편ㆍ장 6편ㆍ비 1편ㆍ차 1편ㆍ논 3편ㆍ기 7편ㆍ제문 9편ㆍ악장 1편ㆍ축문 1편 등이 있고, 권3에는 묘갈명 6편ㆍ신도비명 1편ㆍ묘갈기 1편ㆍ묘지명 2편ㆍ묘기 2편ㆍ광명 1편ㆍ선정비 1편ㆍ행장 3편ㆍ서(書) 9편ㆍ발 2편 등이 있다. 권미(卷尾)에는 조찬한의 발문(1629년), 기영환(奇永桓)의 후지(後識 1970년)가 있다.속집은 권1에 시가 227제 340수가 있고, 권2에 서(書) 6편ㆍ잡저 4편ㆍ서(序) 1편ㆍ발 1편ㆍ제문 1편ㆍ논 1편ㆍ책 1편이 있다. 부록으로 정홍명(鄭弘溟)이 쓴 행장과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이 있다. 조찬한은 《고봉집》 발문에서 “장편시는 한유(韓愈)와 유사하고 단편은 도연명(陶淵明)에 가까우며 변론은 구양수(歐陽脩)ㆍ한유(韓愈)와 같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으며 사서(史書)에 해박하여 널리 원용하고 고증하여 남김없이 다 분석하였다.”고 고봉의 시문을 평가하였다.별집부록은 권1에 제문 20편, 권2에 만장 55편ㆍ월봉서원사실ㆍ청향소 등이 있으며, 권미에 기동준(奇東準)의 후지(1907년)가 있다.논사록은 고봉이 경연에서 진계한 내용(명종 때 1회, 선조 때 18회)을 모은 것으로 고봉의 정치적 식견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렸다 하여 재상과 경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언로를 열어 언제나 대간을 통하여 여론을 들을 것, 재용을 절약하고 그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할 것, 예의를 숭상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견고히 할 것 등이다. 논사록은 상ㆍ하편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부록에는 효종(孝宗)의 치제문, 정조(正祖)의 치제문과 전교가 있고, 김종수(金鍾秀)의 발문(1786년), 조찬한의 소지(小識 1630년), 기세훈의 후지(1970년)가 있다.양선생왕복서는 고봉이 퇴계와 13년간 서로 왕복한 편지를 모은 것이다. 기효증은 후지에서 “왕복서에는 학자들의 학문하는 공정과 사군자의 출처의 도리, 조정의 예제(禮制) 등을 논하였으며, 또 의리를 분변하고 이단을 물리친 학설을 모두 상고하였으므로 쉽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권미에 기효증의 후지(1614년)와 김익(金熤)의 발문(1788년)이 있다.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는 고봉이 퇴계와 왕복한 편지 중에서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에 관한 서간을 모은 것이다. 권미에 부록으로 ‘고봉이 추만에게 답한 글(高峯答秋巒書)’ 2편과 정추만의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 기형섭의 변록(辨錄 1970년), 기우흥(奇宇興)의 후지(1970년)가 있다.사칠논쟁은 한국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퇴계가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 發於理 七情 發於氣]”라고 한 것을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 理之發 七情 氣之發]”라고 수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고봉이 “사단과 칠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비시키고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사단과 칠정에 분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퇴계는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라고 제시하고, 이기불리(理氣不離)의 견해에서 이발(理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봉의 입장은 이허설(理虛說)로 빠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고봉도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자신의 학설은 인설(因說)로 퇴계의 학설은 대설(對說)로 구별하고, 사단에 있어서 이발은 인정하지만 성정(性情)은 기(氣)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주장하여 이기를 분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후 퇴계는 논변을 더 이상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논쟁을 중지하였다.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은 당시의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칠논쟁으로 학계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고 다양해졌고, 이후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의 논변을 거치며 조선시대 성리학에 큰 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1997년 11월 일
    2022-04-30 | NO.711
  • 《고산유고(孤山遺稿)》 해제(解題)
    1. 머리말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번역한 것이다.고산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함께 한국 고전 시가 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는 데에 이견이 없게 하였다. 이 평가 과정에서 그의 국문 시가에 대해서는 이미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연구 업적이 축적되었다. 그런데 그의 한시와 산문의 한문 작품은 국문 문학 중심의 연구열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하지만 우선 수적으로만 따져 보아도 한시가 국문 시가 작품의 4배가 넘을 정도로 많고, 창작 시기도 10대부터 70대 이후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고산 문학에서 한문 작품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울러 한시 작품은 국문 시가에 못지않은 미학적 성취와 시적 형상성을 담고 있어 문학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며, 산문 작품도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굽히지 않고 소신을 밝힌 것과 예송(禮訟) 등 당대 주요 논쟁에 소견을 피력한 것이 많아 사상사적으로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따라서 이번 《고산유고》의 번역은 고산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고산이 살아간 조선 중기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요긴하리라 판단된다.2. 고산 윤선도의 삶과 행적고산의 삶과 문학을 구체적인 역사적 계기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그가 살았던 17세기 전반기의 시대적 상황, 특히 붕당(朋黨)과 관련된 정치적 혼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75년(선조8) 무렵부터 시작된 동서(東西)의 대립적 붕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가속되었고, 그 결과 당파 간의 사화(士禍)로 확대되어 수많은 인물들의 몰락을 가져왔다.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고, 임란 이후에는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념의 차이에 따른 학파(學派) 간의 대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붕당의 추세는 점차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1606년부터는 주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 간에 치열한 쟁투가 벌어졌다. 이때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고 소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모든 권력은 대북에게 돌아갔다.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정인홍(鄭仁弘),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발탁되면서 새로운 정권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광해군을 추대한 대북 정권은 반대 세력의 재기를 염려하여 곧바로 말살책을 기도한다. 우선 임해군(臨海君)에게 불궤(不軌)를 도모했다는 죄목을 씌워 진도(珍島)에 유배시켰다가 다시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그 뒤에도 대북의 중진들은 그의 처형을 적극 주장하였다. 끝내 임해군을 제거한 정인홍ㆍ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에게도 박해를 가하였다. 1613년(광해군5) 4월 조령(鳥嶺)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을 서얼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대역죄를 범한 것이라고 모함하고, 그의 외조(外祖) 김제남(金悌男)도 관련되었다고 누명을 씌웠다. 결국 그들은 김제남을 살해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였으며, 이이첨의 명을 받은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하기에 이른다.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대북 세력은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고산은 1587년(선조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로 입양되어 호남 제일의 갑부인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東人) 가문이다.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쟁의 와중에 1590년 정개청(鄭介淸) 옥사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전해의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서 기인한 기축옥사의 연장으로, 호남 연고의 동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여기에 고산의 조부 윤의중(尹毅中), 이발(李潑 윤의중의 외조카), 정언신(鄭彦信 고산의 사돈인 정세관(鄭世觀)의 조부)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옥사 사건 때 서인이 보인 행동을 해석하는 시각차로 후에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고산의 가문은 남인의 길을 선택한다.당시 남인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었는데, 고산이 26세인 1612년(광해군4)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정계에 나설 무렵 남인의 세력은 왕권의 강화와 북인(北人)과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은 쉽게 옮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적(政敵)에 의해 집중적으로 탄핵을 당하여, 그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다.그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즉 대북 정권하에서 당대의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된다. 한갓 유생에 불과하던 30세인 1616년(광해군8)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일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오히려 이이첨과 그 세력들의 무함을 입고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유배 경험의 시작이었다.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갔는데, 김제남 사건으로 상당한 희생을 당했던 서인들은 이를 근거로 〈병진소〉가 소북(小北)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몰아붙인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 정권이 무너지자, 비로소 고산은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중앙 정계에서 여전히 배제되어, 곧바로 출사의 기회를 잡지는 못하였다. 고산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의 견제로 겨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는다. 고산으로서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후 의금부 도사, 안기 찰방, 사포서 제조에 계속적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가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42세인 1628년(인조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당대의 유력한 정치가인 이조 판서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도움으로 뒷날의 효종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에 제수되고, 이후 공조 좌랑ㆍ한성부 서윤ㆍ시강원 문학 등의 주요 관직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숱한 정적들의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1634년(인조12)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결국 고향인 해남(海南)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산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1636년의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50세의 나이로 해남에 머무르던 고산은 난리 소식을 듣자 가복(家僕)들을 이끌고 강화로 향했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된 뒤였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으로 향하다가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고산은 남한산성에 있는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로부터 지속적인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하지만 이 일은 그의 삶의 새로운 전기이기도 하였다. 제주도로 가다가 보길도(甫吉島)에 이르러 유려한 풍광에 압도된 그는 그곳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은거한다. 부용동(芙蓉洞)은 보길도에 자리한 산간 지역으로, 산세가 연꽃처럼 포개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금쇄동(金鎖洞)은 그 이듬해 정적들의 모함으로 1년간 영덕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해남에 은거하던 중에 발견한 곳이다. 그는 이후 약 17년간을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지냈다.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고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효종은 대군 시절 자신의 사부였던 고산을 대우하고자 성균관 사예와 동부승지를 거듭 제수한다. 고산은 조정의 상황을 고려하여 사퇴하는 소를 올리고 고산에 머무르다 왕의 특명을 어길 수 없어 예조 참의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를 올려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붕당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실력자인 원두표(元斗杓)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리는데, 이 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를 통해 보건대 30세 때 올린 〈병진소〉가 한때의 혈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불의 앞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던 것이다. 69세인 1655년(효종6)에 고산은 다시 서용(敍用)되어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릴 기회를 얻게 되고, 71세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는다. 이듬해 공조 참의로 승진하지만 정적의 끊임없는 반대로 효종도 어쩔 수 없이 고산의 퇴직을 허락하고 만다.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 이처럼 고산의 일생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하였다.3. 고산의 시 세계의 특징적 국면1) 이분법적 세계 인식과 현실 지향 의지 고산의 한시를 일별해 보면, 그가 강호(江湖)와 세속(世俗)을 양분하여 배타적인 구도로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문학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의 한시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외형적으로는 유사하더라도 시대적 정황과 개인의 현실적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산의 경우 강호의 생활이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긴장을 끊임없이 지속한다는 점이다.다음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러한 고산의 세계 인식의 틀을 찾아볼 수 있다.눈에는 청산이요 귀에는 거문고 소리 / 眼在靑山耳在琴이 세상 어떤 일이 내 마음에 들어오랴 / 世間何事到吾心가슴 가득 호연지기 알아줄 사람 없어 / 滿腔浩氣無人識한 곡조 미친 노래 혼자서 읊노매라 / 一曲狂歌獨自吟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樂書齋偶吟〕〉 1, 2구에서 화자인 고산은 자신의 관심이 각각 청산과 거문고로 대표된 자연과 음악에 있으며, 세속의 현실 문제와는 유리된 상태로 지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3, 4구를 보면 이러한 모습이 현실에 대한 관심의 단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내심은 여전히 세속적 현실에서 펼쳐야 할 ‘호연(浩然)한 기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다만, 문제는 그러한 그의 심정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산은 혼자서 강개한 심정을 ‘자유분방한 노래〔狂歌〕’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산이 겉으로는 현실로부터 초연한 자세를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현실 지향의 꿈은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이런 표현들에는 고산의 강한 정치적 지향성이 역으로 투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삶의 역정에서 겪는 정치적 부침은, 이 시가 창작되던 시점은 물론,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정치 현실과의 거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그 이면에는 그것에 의해 강하게 견인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고산의 생애는 끊임없는 붕당정치로 인한 유배, 강호 자연에로의 은거, 그리고 정치 현실로의 복귀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이처럼 격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출처(出處)를 반복했던 것은, 사실 당대 대다수의 사대부가 겪은 일반적 행로이기도 하다. 고산처럼 정치적 관심과 참여가 많은 인물일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대부분 자전적(自傳的)인 고산의 한시에는 불우한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지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꿈꾸는 마음을 노래하는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의 문면만을 보면, 불우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연에서 고고하게 자신을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을 바랐던 것으로 읽힌다.인간 세상 높은 벼슬 결코 바라지 않고 / 人間軒冕斷無希오직 소원은 강호에 일찍 돌아가는 것 / 惟願江湖得早歸고산에 작은 집 이미 지어 놓았는데 / 已向孤山營小屋언제나 마름과 연잎 옷을 입어 볼까 / 何年實着芰荷衣 〈겸보 숙장의 영회 시에 차운한 두 수〔次韻謙甫叔丈詠懷 二首〕〉 이 작품은 고산이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 인용되는 시이다. 1, 2구를 보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희구하는 벼슬살이는 꿈꾼 일이 없고, 다만 강호에 일찍 돌아가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술회한다. 4구의 ‘연잎 옷〔芰荷衣〕’은 은자들이 입는 옷이다. 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은자의 생활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귀공명과 입신양명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강호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은자의 삶을 동경하는 현실도피적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도피는 은둔과 거의 동의의 개념으로서,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권외에 은퇴하여 고답적(高踏的) 삶을 지향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자기를 지키려고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고산이 실제로 그러한 은둔을 실천하고 탈속적 경지의 신선적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두 구를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경의 차원에 머무를 뿐 구체적인 실행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록 그가 은거를 위해 고산에 벌써 작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그것을 이룰지는 알 수 없다는 의문형으로 시상을 맺는 것을 보면 그의 귀거래는 불분명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실제로 이 작품은 고산이 〈병진소〉를 올렸던 30세에 지은 것이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8) 12월 21일에 올린 것으로, 고산이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주 내용은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나 이이첨의 권세에 눌린 승정원ㆍ삼사ㆍ관학 등이 오히려 김제남의 반역 사건과 연루된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12월 23일에 고산은 절도(絶島)에 안치되는 처분을 받고, 이듬해 1월에 함경도 경원으로 압송된다. 이는 그가 아직 벼슬에 오르기도 전의 일로, 자신에게 닥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한 소신 있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유자(儒者)로서의 소명의식(召命意識)을 실천한 고산이 은둔을 희구하는 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강개한 회포의 토로에서 나온 것으로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다.다음의 작품도 같은 관점으로 이해된다.나는 해은도 아니고 산은도 아니지만 / 吾非海隱非山隱산과 바다에 평생토록 마음이 끌렸다네 / 山海平生意便濃처신이 졸렬하니 세상길 어긋날 수밖에 / 用拙自違今世路우연히 옛사람들처럼 은거하게 되었다오 / 幽居偶似古人蹤흰머리 삼천 장도 과히 싫지 않나니 / 不嫌白髮三千丈일만 겹 붉은 구름에 기쁨이 넘치니까 / 剩喜彤雲一萬重소하를 노예로 부리는 일도 오히려 가능한데 / 奴隷少霞猶可得먼지 낀 얼굴 치켜드는 고대광실이 부러울까 / 朱門誰羨抗塵容 〈차운하여 한화숙에게 부치다〔次韻寄韓和叔〕〉 고산이 65세에 지은 이 시도 아름다운 정경이 존재하는 강호 자연인 ‘산과 바다〔山海〕’와 불합리한 현실인 ‘세상길〔世路〕’이라는 양분된 세계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화자인 고산은, 수련에서 자신이 은자의 삶을 평소에 자주 동경해 왔음을 말하고, 함련에서는 현실로부터 떠나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가 자신의 귀거래를 세속과 절연하고 산이나 바다에 은거하며 사는 은자들의 삶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에게 은자의 삶은 결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은거는 자발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외적 조건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이해 가을에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서 유명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를 지었다. 고산의 시에 보이는 은둔 희구에 담긴 현실적 논리는 〈어부사시사〉에서도 발견된다. 실제로 고산이 부정적 현실로 인하여 몸은 은거하였지만, 시적 주체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든, 이상적 질서 회복에 대한 바람이든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다른 시 〈동하각(仝何閣)〉에서 스스로 ‘내가 어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오, 세상이 지금 나와 맞지 않아서지.〔我豈能違世 世方與我違〕’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강호와 세속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지만, 강호에 있을 때에도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지향은 멈추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2) 자연친화적 태도와 심미적 몰입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산에게 강호의 생활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고산의 일생은 오히려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흥취를 얻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은 그에게 시작품을 통해 자연 경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동기와 여건을 아울러 얻게 해 주었다.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그는 집을 완성한 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초청할 필요 없이 청산이 문에 들어오고 / 入戶靑山不待邀산 가득 화초들이 용모 다듬고 인사하네 / 滿山花卉整容朝앞 여울 항상 요란하다 저어하지 마오 / 休嫌前瀨長喧耳세상의 소음 언제나 듣지 않게 해 주니까 / 使我無時聽世囂 〈낙성한 뒤에 절로 흥이 나서〔堂成後漫興〕〉 이 시는 고산이 30세에 처음 유배를 당하여 함경도로 옮겨가던 때의 작품이다. 그는 지금 새로 온 집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에 좌절한 자신의 처지에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유배지로 가 있으면서도, 그의 시에 나타난 자연은 쓸쓸하고 서글픈 모습이 아니라, 이렇듯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푸른 산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 인사하고, 산을 가득 메운 온갖 꽃들은 단정한 용모로 자신에게 조회한다. 그리고 문 앞에 흐르는 여울물도 어지러운 세상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도록 돕는다. 이처럼 자연 경물은 그에게 삶의 위안과 정신적 안식을 주는 정다운 대상이다.다음에 살펴볼 세 편의 연작도 유사한 정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궤안에 기대니 산창엔 맑은 저녁 풍경 / 隱几山窓晴景晩봄바람 속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시절 / 春風正是浴沂時앞 강물에 가벼운 돛 지나가거나 말거나 / 前灘遮莫輕帆過한가로이 푸른 솔 보며 시냇가 거니노라 / 閑看蒼松澗畔遲 우연히 백구와 친해졌을 뿐 / 偶與白鷗親나는야 진짜 은자가 아니라오 / 吾非隱者眞강 언덕에 지팡이 짚고 서니 / 江皐倚杖立꽃버들도 봄날을 못 이기는 듯 / 花柳不勝春 하나의 방이 비좁지 않으니 / 一室非爲小일천 산도 많은 줄 모르겠네 / 千山未覺多숨어 사는 이 베개에 기대 누우니 / 幽人欹枕臥지는 햇빛이 물가의 꽃에 비껴 있네 / 斜日在汀花 〈해민료에서 우연히 읊으며 다시 앞의 운을 쓰다〔解悶寮偶吟復用前韻〕〉 시제(詩題)에 달린 자주(自註)에는 “해민료(解悶寮)는 고산(孤山)의 명월정(明月亭)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민료는 ‘현실의 온갖 번민〔悶〕’을 ‘풀어 주는〔解〕’ 안식처이다. 이곳에서 고산은 일시적이나마 힘겨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주변 정경을 완상하면서 얻은 감흥을 편안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이 대목에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고산의 강호 자연에 대한 지향이 결코 정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산의 태도는, 근대의 낭만주의적 시인들이 흔히 보여 주는 꿈과 현실이라는 양분된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태도와는 분명 궤를 달리한다. 즉, 그의 강호 지향적 태도는 미화되고 이상화된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감상적 탐닉이 아니라, 강호에서의 삶을 긍정하면서 거기에서 감흥을 얻고 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강한 자긍심을 가지며 나아가 그러한 체험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강호 생활에서의 흥취와 강한 자긍은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황원포 안에 자리한 부용동 / 黃原浦裏芙蓉洞오두막 세 칸이 내 머리 덮어 주네 / 矮屋三間蓋我頭보리밥 두 끼에 동동주 한 잔 / 麥飯兩時瓊液酒종신토록 이 밖에 또 무얼 구하랴 / 終身此外更何求 〈실제의 일을 기록하다〔記實〕〉 이 작품은 고산이 해배(解配)되어 부용동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황원포(黃原浦)는 보길도의 바다이다. 여기서 화자인 고산은, 작은 초가삼간에 보리밥을 먹는 빈궁한 삶이라도 편안히 여기겠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가난한 삶은, 물론 그가 당시에 소유하였던 경제적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강호 생활의 자긍심이 소박한 삶에 대한 긍정적 수용으로 변주되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그가 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얻은 감흥은 때로 심미적인 경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고산의 즉물적 감흥과 그 심미적 고양이 어떠한 양상으로 형상화되는지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되어 강한 유대 내지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물고기와 물새는 서로 친하고 / 魚鳥自相親강과 산도 안색이 진실하여라 / 江山顔色眞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 人心如物意이 세상 어디나 봄빛이련만 / 四海可同春 세상 안에는 지기가 적어도 / 人寰知己少세상 밖에는 우우가 많다네 / 象外友于多우우가 또 어떤 것들이냐고 / 友于亦何物그거야 산새와 들꽃이지 뭐 / 山鳥與山花 〈병으로 고산에 돌아오다가 배 위에서 감흥이 일기에〔病還孤山舡上感興〕〉 이 작품은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三水)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는 길에 지은 시로, 세 편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이다. 그는 지금 긴 유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살아서 다시금 강호의 흥취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술회한다. 첫 작품의 1, 2구를 보면, 자유로이 자신의 천성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물고기와 새, 그리고 늘 제자리를 지키며 변함없이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는 강과 산 등의 자연 사물에, 화자인 고산은 깊이 심취하고 있다. 이러한 심미적 감흥은 3, 4구에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미 의식으로 전이되어 표출된다. 그는 사람〔人心〕과 사물〔物意〕이 하나로 통할 수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축복인 ‘봄’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임을 노래한다.시상의 맥락이 이어지는 다음 작품을 보면, 그러한 의식이 보다 심화 내지는 확장되어 나타난다. 고산은 산새와 꽃과 같은 평범한 자연 사물을 우애가 있는 자신의 형제의 위상으로 설정할 정도로 심미적 감흥이 드높게 고양되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 세상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한 그는 일상적 사물의 자재(自在)를 관찰하면서 그 생동감 넘치는 경물의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하고 있는 것이다.3) 일상적 사물에의 성찰과 삶의 관조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 원리이다. 한시에서 계절의 순환, 사물의 생동(生動) 등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리학을 학습하고 삶의 이법과 지표로 받아들였던 당대에서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만한 일반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물(觀物)의 자세는 이론적으로는 서로 유사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개인이 서 있는 시대와 처지에 따라 그 주목하는 바가 상이하게 나타난다.고산도 많은 시작(詩作)에서 다양한 경물을 제재로 하여 형상화하였다. 다만 고산의 경우는 사물의 본래적 의미에서 화석화되고 관념화된 경물, 예컨대 흔히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지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운영천광(雲影天光)’ 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위에 함께 공존하는 세계 속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물들이다.꽃 지자 숲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 花落林初茂봄이 가니 해가 더욱 길어지누나 / 春歸日更遲하나의 원기(元氣)를 조용히 살필지니 / 一元宜靜覩사계절은 순서대로 바뀌건 말건 / 四序任遷移장미의 시렁에는 제비의 지저귐이요 / 燕語薔薇架양류의 가지에는 꾀꼬리의 노랫소리 / 鶯歌楊柳枝풍광이 어딜 가나 좋기만 한데 / 風光隨處好멋진 흥치를 아는 사람 적어라 / 佳興少人知 〈차운하여 어떤 이에게 답하다〔次韻答人〕〉 화자는 지금 계절의 변화에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경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남들이 무심코 지나칠 만한 작은 사물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그것들을 정감 어린 모습으로 바라본다. 이때의 자연 사물은 관념화되거나 상투적으로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 가득 찬 대상으로서 시적 자아인 고산과 마주한다.여기서 우리는, 고산이 이러한 데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고산은 평소 시의 실용적인 측면, 즉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의 효용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용론적(效用論的) 시관(詩觀)은 다음과 같은 〈송일대군방장무서(送一大君房掌務書)〉의 언급에 나타나 있다.시란 성정(性情)을 음영하여 정신을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상도(常道)와 사물의 이치에 관한 것은 읽으면 이롭게 행하는 이익이 있으며, 인정(人情)이나 물태(物態)를 잘 말한 것은 열람하면 많이 아는 바탕이 됩니다. 하지만 그 악함이 경계가 되기에 부족한 것과 그 선함이 법도가 되기에 부족한 것은 다 정자(程子)가 이른바 ‘쓸데없는 말〔閑言語〕’이니 진실로 볼 것이 없습니다. 이 인용문은 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기준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고산은, 좋은 시로 ‘백성의 상도(常道)와 사물의 이치에 관한 것’과 ‘인정(人情)이나 물태(物態)를 잘 말한 것’을 꼽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모두 일상적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 체험들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좋은 시가 산생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관(詩觀)은 그의 시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다음의 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소빙화가 압록강 언저리에 돋아났나니 / 消氷花在鴨江潯짧디짧은 줄기 하나 바늘처럼 가늘어라 / 短短單莖細似針일천 자 눈 속에서 살기를 몰아내고 / 千尺雪中排殺氣한 떨기 꽃잎 안에 천심을 보듬었네 / 一錢葩裏保天心옥황상제 뜰 앞에서 자라나야 제격인데 / 端宜玉帝庭前植못가에서 읊조리는 시인과 어이 짝했는가 / 底伴騷人澤畔吟봄소식을 관새 밖에 부쳐 주어 알리려는 / 春信寄傳關塞外동군의 세심한 배려를 비로소 알겠도다 / 東君用意始知深 〈소빙화(消氷花)〉 이 시는 소빙화(消氷花)라는 꽃을 주제로 한 4수의 연작인데, 인용한 시는 두 번째 작품이다. 화자는 수련에서 먼저 이 꽃의 외적인 생태를 요약하고, 함련에서는 그가 이 꽃에 주목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꽃이 살기가 가득한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이 계절의 시적 소재로는 주로 국화나 매화가 주로 다루어진다. 국화는 흔히 늦가을의 서리에 피어난다고 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로, 매화는 겨울의 눈을 견디어 내고 빼어난 기품을 자랑한다고 하여 ‘빙자옥질(氷姿玉質)’, ‘아치고절(雅致孤節)’ 등의 성어로 상투화되어 시제(詩題)에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지금 고산이 주목하는 것은 유배지인 변방에서 우연히 본 보잘것없는 평범한 꽃풀이다. 그런데 이름처럼 ‘얼음을 녹이고 피어나는〔消氷〕’ 이 꽃에서 고산은 정쟁의 시련과 고난을 지나온 자신의 삶과 유사한 점을 본 것이다.자연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인간의 삶의 원리와 질서를 반조(返照)하는 것은, 물론 고산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러한 태도를 꾸준히 지속하면서 자연 사물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 체험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시선으로 시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고산 시 세계의 개성적 면모 가운데 하나로 일상 사물에의 성찰(省察)과 삶의 관조(觀照)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다음의 시에서 고산은, 자신의 경험과 거기에서 얻은 감상을 장편의 고시(古詩) 형식을 사용하여 근체시(近體詩)의 형식적 제한을 벗어나 자유롭게 술회한다.길 가다 만난 한 마리의 개 / 途中逢一犬꼬리는 길고 색깔은 흰데 / 尾長而色白이틀 동안 내 말을 따라다니며 / 兩日隨我馬말에서 내리면 내 발을 맴돌았네 / 下馬繞我舃손을 저어도 끝내 경계하지 않고 / 麾之終不懋꼬리 흔들면서 뭔가 구하려는 듯 / 掉尾如有索노비들도 기꺼이 밥을 던져 주며 / 奴婢欣投飯토끼 쫓을 꾀를 다투어 생각했는데 / 爭思逐兔策오늘 아침에 홀연히 보이지 않아 / 今朝忽不見일행이 깊이 탄식하며 아쉬워했네 / 一行深歎惜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왔다가 / 來何不待招쫓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떠났는가 / 去何不待斥인간 세상에 조물이 하는 짓이란 / 造物於人世백 가지 일이 죄다 희극일 뿐이니 / 百事渾戲劇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 得之不足喜잃었다고 한탄할 것도 없네 / 失之不足嘖사람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도 / 人之生與死이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으랴 / 與此何殊跡이에 알겠도다 세상 떠난 미아(尾兒)는 / 乃知化去兒팔 년 동안 내 곁에 머문 객이었음을 / 是我八年客이로 인해 갑자기 깨치며 / 因此頓有悟가슴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렸나니 / 塡胸氣始釋그동안 함께 놀아 준 신선의 짝이 / 無乃舊仙侶너무 슬퍼하는 나를 애달피 여겨 / 哀我悲懷迫특별히 이 동물을 나에게 보내 / 爲之遣此物미혹을 깨우치려 함이 아니리오 / 以開迷惑膈길가의 모래톱 물 밝게 비치나니 / 路傍沙水明나의 뜻 다시 향할 곳이 있어라 / 我意還有適 〈마음을 달래다〔遣懷〕〉 이 시의 창작 동기는 고산이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개와의 일화에서 기인한다. 첫 구에서 12구까지는 그 일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여정에서 길거리를 떠도는 개와의 만남은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일상적 상황이다. 하지만 고산은 이러한 평범한 일상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다음의 13구부터는 이 일에서 깨달은 자신의 감상이 표출되어 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얻음과 잃음’,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 등은 자연의 이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이 일에 앞서 같은 해 그는 아끼고 사랑하던 서자(庶子)인 미(尾)를 8살의 어린 나이에 잃고 깊이 상심하고 있었다. 마흔여섯에 얻은 늦둥이인 미는, 늘 그를 따르며 재롱을 부리는 귀염둥이였기에 상심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떠돌이 개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아들 미의 죽음과 관련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15구부터 18구까지에서 보이듯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득실은 그다지 마음에 둘 일이 아니며, 삶과 죽음의 문제도 결국 무상(無常)한 것으로 슬픔이나 괴로움에 빠질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이처럼 평범한 일상적 체험을 자아 성찰의 계기로 삼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태도는 그의 여러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산의 시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적 국면으로 보인다.4. 고산 산문의 내용과 특성현전하는 고산의 산문 작품은 운문 작품과는 달리 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도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 참여적인 데에 초점을 둔 실용문이다. 그렇지만 고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운문이 아니라 바로 이 산문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의 문장은 수준이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기록에서도 ‘능문(能文)’으로 인정될 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우선 그의 대표작인 〈병진소〉(《고산유고》 권2)를 통해 고산의 산문 세계가 가지는 특징적 국면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신하 된 자가 만약 나라의 권세를 한 손에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여 위복(威服 상벌(賞罰))의 권한이 자기에게서 나오게 할 것입니다. 설사 어진 자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인데, 더군다나 어질지 못한 자가 이렇게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 임어(臨御)하시어 군군신신(君君臣臣)하는 때이니 당연히 이와 같은 사람은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이첨(李爾瞻)이 하는 짓을 보건대, 불행히도 여기에 근사(近似)하기에,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글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산이 아직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기 전인 30세에 지은 것이다. 진사(進士)로서 이이첨, 박승종(朴承宗) 등의 주벌을 청한 이 글은 고산의 문명(文名)을 널리 알린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은 글의 첫머리 부분인데, 문면에서 보듯 고위관직에 있는 상대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아, 선비의 기풍은 바로 국가의 원기(元氣)인데 이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군부(君父)를 뵐 때에 그만 이와 같이 하고 보면, 다른 날 조정에 서게 되었을 때에, 얻으려 안달하고 잃을까 걱정하는〔患得患失〕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역적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면 반드시 이들 무리에서 나올 것이요,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사람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면 반드시 이들 무리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선유(先儒)의 시에 “이런 사람을 쓰고 이런 방도를 행하니, 어느 날 태평시대가 올는지 모르겠네.〔所用是人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라고 하였는데, 신은 항상 이 시구를 외우며 천장을 쳐다보고서 혼자 탄식하곤 합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총애를 저토록 독점하고 있고, 국정(國政)을 저토록 오랫동안 맡고 있는데도, 재변(災變)이 저와 같고 나라의 형세가 저와 같고 백성의 원망이 저와 같고 풍속이 저와 같고 사습(士習)이 저와 같다면, 이자가 과연 현능(賢能)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위의 인용문은 스스로 불의(不義)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고산의 강직한 성품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병진소〉와 아울러 중앙 정계로부터 삭출(削黜)되는 계기가 된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와 정개청(鄭介淸)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국시소(國是疏)〉도 정치적 소신과 절의(節義)를 강조한 고산의 삶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어 함께 참조할 수 있다.고산 산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무(時務)에 관련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1635년(인조13)에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서 양전(量田)의 문제점을 논한 〈을해소(乙亥疏)〉, 나라의 급선무를 여덟 가지 조목으로 제시한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 등이 대표적이다. 다음의 인용은 〈진시무팔조소〉의 시작 부분이다.삼가 아룁니다. 신이 매우 걱정스러운 인사(人事)와 지극히 두려운 천변(天變)을 목격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서 공연히 슬프고 놀라운 마음이 들기에, 여관(旅館)의 차가운 등불 아래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한 지 몇 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사(人事)가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고, 천변(天變)이 다행히 노여워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 전이(轉移)의 기틀이 단지 전하가 하시기에 달려 있다고 여겨지기에, 감히 시무(時務) 팔조(八條)를 진달하오니 성명(聖明)께서 한번 봐 주셨으면 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이 형편없다고 말까지 무시하지 마시고, 유념하여 성찰해 주소서. 이러한 말씀을 듣지 않으시면, 앞으로 후회하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치적 쇄신을 요청하는 신하로서의 마음뿐만 아니라 세자 시절부터 지켜봐 온 효종의 안정된 국정을 바라는 사부로서의 애정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고산이 제시한 8가지 시무는 다음과 같다.1. 하늘을 두려워하소서〔畏天〕 2. 마음을 다스리소서〔治心〕 3. 인재를 잘 분별하소서〔辨人材〕 4. 상벌을 분명히 하소서〔明賞罰〕 5. 기강(紀綱)을 떨쳐 일으키소서〔振綱紀〕 6. 붕당을 깨뜨리소서〔破朋黨〕 7. 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强國有道〕 8. 학문을 함에는 요령이 있습니다〔典學有要〕 고산은 각 조목을 들고 그에 대한 전거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 대해 부정적인 실록(實錄)의 평가도 있으나, 효종은 고산의 충심 어린 마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효종실록》 3년 10월 22일 조에 “소(疏)를 보고서 말한 뜻을 모두 잘 알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나니, 말마다 절실하고 글자마다 간절해서 두 번 세 번 읽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언외(言外)에 흘러넘치니, 깊이 느꺼워 탄식할 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불민(不敏)하기는 하지만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소장(疏章)을 올려 나의 과실(過失)을 지적하고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사직하지 말고 얼른 나와서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라고 한 기사가 전한다.고산 산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론(禮論)에서 찾을 수 있다. 1660년(현종1)에 자의대비 복제(服制)의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한 〈논예소(論禮疏)〉와 〈예설〉 2편 등 이른바 ‘예송(禮訟)’ 논쟁에 직접 참여하여 소견을 제시한 글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예송은 주지하듯이 효종의 사후에 계모 자의대비 조씨(趙氏)가 어떤 복(服)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었다.그 배경에는 왕가의 의례에 대해 종법(宗法)을 적용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에서는 효종은 왕통상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 둘째 아들이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산 등의 남인 계열에서는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되는 것이며,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한 고산의 글들은 단순한 예론의 차원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17세기의 조선 사회에서 이념적 규정성이 정치적 내지 사상적으로도 큰 변수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5. 《고산유고》의 판본과 내용고산의 원고는 측실의 둘째 아들로 학관(學官)을 지낸 윤직미(尹直美)와 손자인 윤이후(尹爾厚) 등이 주도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윤직미는 고산의 연보 초고를 작성하였고, 윤이후는 홍우원(洪宇遠)에게 시장(諡狀)을, 허목(許穆)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부탁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집안에서 소장하던 초고를 바탕으로 6권으로 나누어 목판으로 간행한 뒤 가장(家藏)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초간본의 간행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대략 저자에게 시호가 내려진 1678년(숙종4)을 전후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있다.그 이후 정조(正祖)는 1796년(정조20) 전라 감사 서정수(徐鼎修)에게 명하여 개간본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서정수가 6권 6책으로 15질을 새로 인쇄하여 올렸다. 이 판본은 현재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1898년(고종35)에는 10대손 관하(觀夏)의 발문이 붙은 연보 등의 부록 1권이 인쇄되었고, 1935년에는 12대손 윤정현(尹定鉉)의 주도로 연보가 새로 목판으로 간행되고 문집이 보각되었다.본 번역본의 저본은 1796년에 보각된 후쇄본으로 규장각 소장본이고, 원집(原集) 6권과 부록(附錄)이 합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권1은 시 250여 제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여러 시편에 주석이 붙어 있어 고산의 개인사와 관련한 시 세계의 변모 양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4세에 지은 〈국도에서 배를 돌리며〔自國島廻舟〕〉를 시작으로 평생에 걸친 삶의 부침 속에 경험한 사실과 깨달음을 주제로 다룬 시들이 실려 있다.권2와 권3상은 소(疏) 25편으로, 시와 마찬가지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본격적인 벼슬에 오르기 이전 진사(進士)로서 이이첨 등의 주벌을 청한 〈병진소〉, 양전(量田)의 문제에 대해 논한 〈을해소〉, 새로 즉위한 효종(孝宗)에게 진언한 〈기축소(己丑疏)〉, 삭출(削黜)의 계기가 된 〈논원두표소〉, 정개청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국시소〉, 자의대비 복제의 삼년설을 주장한 〈논예소〉와 〈예설〉 2편 등이 실려 있다. 권3하에서 권5상은 서(書) 107편과 단자(單子) 1편이 있다. 역시 연대순 편차로 안부 편지와 특정 사안의 문답이 많다. 정유악(鄭維岳)의 《대학(大學)》 문목(問目) 등에 대한 답서, 효종 승하 후 간산(看山)의 명을 받고 총호사(摠護使) 심지원(沈之源)에게 올린 서간 등이 실려 있다. 권5하는 제문(祭文) 등 13편과 서(序) 4편, 기(記) 1편, 설(說) 2편, 비명(碑銘) 5편, 잡저(雜著) 5편, 의(議) 1편, 잡록(雜錄) 3편이다. 해남에 있으면서 지은 〈금쇄동기(金鎖洞記)〉, 복제(服制) 문제로 삼수(三水) 유배 때 지은 〈서회(敍懷)〉, 효종의 산릉을 정하기 위해 명을 받아 간산하고 나서 올린 〈산릉의(山陵議)〉가 수록되어 있다. 권6은 별집(別集)으로, 장편(長篇) 시 8수와 각종 과제(科製)로 지은 산문 17편을 모아 놓았다. 가사(歌辭)는 연대순 편차로, 영덕(盈德) 유배 후 해남 금쇄동에서 지낼 때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과 〈고금영(古琴詠)〉,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은 〈어부사시사〉, 〈몽천요(夢天謠)〉 등이 있고, 끝에 경원(慶源) 유배 때 지은 〈견회요(遣懷謠)〉와 〈우후요(雨後謠)〉가 있다. 부록에 1677년(숙종3) 홍우원(洪宇遠)이 지은 시장(諡狀)이 있다.2011년 12월참고문헌 윤선도, 《고산유고》, 한국문집총간 91,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1992.문영오, 〈고산 윤선도의 한시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82.조동일, 〈고산 연구의 회고와 전망〉, 《고산연구》 창간호, 고산연구회, 1987.성범중, 〈윤고산 한시 연구〉, 《고산연구》 제2호, 고산연구회, 1988.윤영표, 《녹우당의 가보》, 미상, 1988.원용문, 《윤선도문학연구》, 국학자료원, 1989.정운채, 《윤선도, 연군지정과 이념의 시세계》,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5.신영훈, 《윤선도와 보길도》, 朝鮮日報社, 1999.이형대ㆍ이상원ㆍ이성호ㆍ박종우 옮김, 《국역 고산유고》, 소명출판, 2004.김경희, 《고산유고》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2022-04-30 | NO.710
  • 《고운집(孤雲集)》 해제(解題)
    최치원의 저술과 고뇌, 그리고 역사 탐구 -1. 최치원의 생애와 저술신라 말의 격동기에 살았던 최치원은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재당 시절과 귀국한 뒤 관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1_ 가계와 출생최치원은 헌안왕(憲安王) 1년(857)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해운(海雲), 호는 고운(孤雲)이며,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며, 여러 기록을 통하여 일부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아버지 최견일(崔扁逸)이 사찰의 중건 활동에 관계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형제로는 승려인 대덕(大德) 현준(賢俊)과 정현사(定玄師)가 있으며, 종제(從弟)로 최서원(崔棲遠)이 있다.최치원의 가문은 육두품(六頭品)에 속한다. 그는 〈무염 화상 비명(無染和尙碑銘)〉에서 육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이를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왕족인 진골(眞骨) 다음가는 육두품으로는 흔히 신라의 육성(六姓)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가문이 대표적이므로, 분명히 얻기 어려운 귀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각 행정 관부의 장관인 영(令)에는 취임할 수 없는 신분이어서 능력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육두품은 신라 사회에서 주도 세력의 일부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신분층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이들은 주로 학문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중국 유학생의 대부분이 이 계층에 속한다.2_ 입당 유학과 재당 시절최치원도 경문왕(景文王)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때 아버지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 또한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가서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라.〔十年不第進士 則勿謂吾兒 吾亦不謂有兒 往矣勤哉 無隳乃力〕”라고 하여 격려하였다. 이를 깊이 새긴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하여 유학한 지 6년 만인 경문왕 14년(874) 과거에 합격하였다.이때의 시험이 외국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빈공과(賓貢科)로 알려져 있는데, 상세히 검토한 결과 당(唐)나라에서는 빈공과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방에서 인재를 천거받아 입경(入京)하여 과거를 치르게 했다. 그 합격자들을 향공진사(鄕貢進士)라 불렀으며, 신라와 같이 이역(異域)에서 온 사자(士子)들이 급제하면 빈공진사(賓貢進士)라 불렀다. 이로 인해 ‘빈공’은 점점 이역의 공사(貢士)를 두고 말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 사료를 통한 상세한 고증이 이루어진 것으로 신뢰할 수 있고 이로써 최치원의 위상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그의 문재(文才)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최치원은 2년 뒤 선주(宣州) 율수현 위(凓水縣尉)가 되어 지방 치안을 맡았다. 《계원필경집》에 나타난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결백한 모습을 보여준다. 1년여 뒤에는 대과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사직하였다. 하지만 저축한 봉록이 다함에 따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면서 중도에 포기하고 당시 회남 지역의 절도사였던 고변(高駢)에게 자신을 천거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그러한즉 공자의 당중에도 타향의 제자들이 있었으니, 맹상군의 문하엔들 어찌 먼 지방의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然則尼父堂中 亦有他鄕之子 孟嘗門下 寧無遠地之人〕”라고 하여 외국인이라도 재주가 있다면 발탁하여 쓸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결국 고변에게 발탁되어 표(表)ㆍ장(狀)ㆍ서계(書啓)ㆍ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할 때에 그가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문명을 천하에 떨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그는 헌강왕 11년(885)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당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문재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규보(李奎報)는 〈당서(唐書)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열전(列傳)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의(議)〉에서 《당서》 열전에 그의 전기가 빠진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문재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재당 시절에 이룬 그의 저술로는 대략 다음의 것들이 있다.《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금체시(今體詩)》 5수(首) 1권《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잡시부(雜詩賦)》 30수 1권《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이상 《계원필경》 서)《계원필경》 20권, 《사륙집(四六集)》 1권(《신당서》 예문지)《계원필경집》 서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계원필경집》은 최치원이 당으로부터 귀국한 뒤, 그가 고변의 종사관이던 시절의 저작들을 주로 하고 귀로에서 지은 것까지 모아 편집하여 국왕에게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위 저술들 중 앞의 셋은 당의 동도(東都)에 있을 당시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며, 《중산복궤집》은 율수현 위로 있을 당시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저술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집》뿐이다.《계원필경집》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내력은 알 수 없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1834년(순조34)에 서유구(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홍석주(洪奭周)의 집에 소장된 옛 책을 얻어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1930년에 들어와 충청북도 음성의 경주최씨문집발행소(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계원필경집》은 고변을 위한 대필과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지만, 재사(齋詞)는 당대(唐代)의 도교 연구에,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사(越南史) 연구에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변을 과대평가하여 그를 중국 역대의 영웅들과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記德詩)〉의 경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신당서》에 《사륙집》 1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위의 서문에 들어 있는 책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미처 수록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혹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시들의 일부가 유전(流傳)되어 《고운집》에 수록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3_ 귀국 후 관료 시절헌강왕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당시의 신라는 이미 골품제 사회가 무너져 가는 많은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대두해 올라오는 호족 세력 때문에 중앙 정부는 지방 주군(州郡)의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재정이 궁핍하게 되어 사자를 보내 독촉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신분제의 과감한 개혁을 포함한 혁신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집권층인 진골 귀족들은 황룡사 9층탑의 중수, 창림사지 석탑의 조성, 대숭복사의 중창 등과 같은 불사(佛事)를 통한 전통적인 종교적 권능에 힘입으려는 고식적인 정책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야주(大耶州 합천(陜川))에 은둔한 왕거인(王巨人)이 붙였다는 괘서(掛書) 이야기는 집권층에 대한 지식층의 반항으로 이해되는데, 최치원 또한 마찬가지 위치에 서는 것이다.최치원은 재주가 많은 만큼 질시도 많이 받았다. 그는 이를 피하는 방편으로 외직(外職)을 원했다. 890년(진성여왕4) 전후로 태산군(太山郡 태인(泰仁),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 나아간 뒤, 이후 천령군(天嶺郡 함양(咸陽))과 부성군(富城郡 서산(瑞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그가 지방에 내려가게 된 것은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 2월에 그를 끌어 주던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죽은 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미장부(美丈夫)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천권(擅權)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이제는 그를 끌어 주던 헌강왕과 정강왕은 물론 위홍마저도 죽은 것이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였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진성여왕 8년(894)에 최치원은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린다. 여기에는 그의 정치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원문이 전하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그 윤곽을 추측해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위로는 강수(强首)나 설총(薛聰)의 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최승로(崔承老)의 모범이 되었을 이 시무책은 중앙 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지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국왕보다는 현명한 재상에 의해 유지되는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는 결국 고려왕조에서 왕족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는 문벌 귀족 사회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최치원이 생각한 중앙 귀족이란 진골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육두품까지 포섭하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층의 폭을 넓히다 보면 신분보다는 학문을 토대로 한 인재 등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 개혁안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보다 개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추측되지만, 한편 그가 지방 호족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이었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이 간다.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 최치원은 육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치원은 호족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는 그가 시무책을 올리기 이전에 지은 글에 길을 묻는다는 ‘문진(問津)’이나 갈림길을 뜻하는 ‘기로(岐路)’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최치원은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인용된 고사(古事)에 양호(羊祜)가 조상의 무덤에 서린 제왕의 기운을 파냄으로써 충성의 의리를 극명히 드러낸 것과 안녹산(安祿山)이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친 것이 미치광이의 짓이라고 한 내용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다.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은 즉위 11년 만에 정치 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孝恭王)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른다.최치원은 문한관으로 재임하면서 왕명을 받아 표ㆍ기ㆍ소 등을 저술하였으며, 그 일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들 저작을 묶어 그의 생존시에 편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들이 훗날 문집으로 구성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진감 화상 비명(眞鑑和尙碑銘)〉〈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무염 화상 비명(無染和尙碑銘)〉〈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이상 《사산비명》)〈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삼국사기》 권11, 진성왕 8년)《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삼국사기》 권4, 지증마립간 원년)먼저 위의 네 비명은 진감 화상ㆍ무염 화상ㆍ지증 화상 등 세 분 선사의 업적과 왕실의 대숭복사 중창 불사를 기리는 사적비인데, 본래는 독립된 글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하나로 묶어 유통되면서 《사산비명》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사산비명》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것이어서 그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조심스레 비추었다. 또한 이 글은 그가 혈기 왕성하게 활동할 때인 30대의 젊은 시절에 지은 것이어서 그의 자신감과 자부심 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의 정치적 이상도 살필 수 있는데, 점차 신라 사회가 혼란에 이르게 되면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 또한 역력히 살필 수 있다.〈시무십여조〉는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으로, 당시 현실의 문제를 논의하고 그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의견을 잘 알 수 있는 이 귀중한 문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제왕연대력》은 《삼국사기》의 사론(史論)에 “신라 말의 명유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에서 모두 모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 말이 야비하여 칭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본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 책 이름으로 짐작건대 연표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4_ 해인사 은거 시절《동사강목》에 따르면 그는 효공왕 4년(900)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산천을 유람하게 된다. 그가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마산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 밖에도 동래의 해운대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만년에는 형인 승려 현준,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합천군 고적 독서당(讀書堂)〉에 의하면,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을 수풀 사이에 남겨 두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우성(李佑成)은 그가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주장하여 왔다.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신라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이상은 훗날 그의 문제(門弟)들에 의하여 고려에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왕조에 들어 왕족이 배제되고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가 실현된 것이다.최치원은 정치에서 물러나 해인사에 은거하면서도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주로 승려들의 전기를 지었다.《의상전(義湘傳)》(《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안함전(安含傳) 및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권50 사전부(史傳部))《석이정전(釋利貞傳)》(《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 건치연혁(高靈縣建置沿革))《석순응전(釋順應傳)》(《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합천군 고적(陜川郡古跡))〈보덕전(普德傳)〉(《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3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앞의 두 승전의 주인공인 의상과 법장은 각각 신라와 중국의 화엄종을 대표하는 거장(巨匠)이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지엄은 의상에게 의지(義持)의 호를, 법장에게 문지(文持)의 호를 내렸다. 이는 두 제자의 재주를 보아 내린 것인데, 최치원이 이들의 전기를 지은 것은 두 사람을 대비시키려는 어떤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법장화상전》은 완전한 내용이 전하고 있으나, 《의상전》은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일부 편린이 전하고 있을 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양자에 대한 최치원의 입장을 정확히 알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법장화상전》은 대안(大安) 8년(1082, 문종36) 고려 대흥왕사(大興王寺)에서 판각되어 배포되었는데,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송(宋) 소흥(紹興) 19년(1149) 의화(義和)에 의하여 재간행되었다. 이것이 다시 필사(筆寫)되어 일본 고산사(高山寺)에 소장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과 《대정신수대장경》에 활자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최문창후전집》에 수록하여 놓았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다시 돌아온 셈이다.《석이정전》과 《석순응전》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편린만 나올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이정과 순응이 가야 왕실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으로 〈보덕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멸망기에 활동한 보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도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게 되자 남쪽 완산주(完山州 전주(全州))로 망명하여 불교를 폈던 승려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일부 들어 있을 뿐 저술 내용이 모두 전하지 않아 최치원이 이를 지은 의도를 알기 어려우나, 멸망기의 모습을 전하려 한 것 같다.이 승전들이 저술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천복(天復) 4년(904, 효공왕8) 해인사에서 《법장화상전》을 저술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나머지도 이를 전후한 시기에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많은 승전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난세(亂世)에 처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새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해인사에 은둔한 최치원은 난세인 당시의 현실을 꿈으로 보았지만, 그 꿈을 새 시대의 도래로 인식하고 있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인물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 이념이 요구된다. 따라서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던 그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승전을 저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그가 지향한 새 시대의 모습은 뛰어난 군주보다는 훌륭한 재상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것이었다. 이는 상(商)나라 고종(高宗)이 꿈속에서 본 부열(傅說)을 찾아서 그를 재상으로 삼고 그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발전시킨 고사(《서경(書經)》 〈열명(說命)〉)를 인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5_ 최치원에 관련된 위서류(僞書類)다음은 최치원의 저술로 잘못 전해 오는 것들이다.첫째는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인데,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에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들 권별(權鼈)이 편찬한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계승되어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해동고승전》 〈아도전(阿道傳)〉에 인용된 바와 같이 박인량(朴寅亮)의 저서라고 해야 옳다. 《수이전》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설화가 실려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시 당나라의 분위기로 볼 때 최치원 자신이 이를 저술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전설의 출처가 고운이 고변의 막료로 있던 선주 지방의 전설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둘째로 《경학대장(經學隊仗)》이 그의 저술로 일컬어져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 목록 권외서목(卷外書目)에도 들어 있고, 최근에는 《계원필경집》과 합본으로 출판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성리학에 대한 것이어서 최치원의 저술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이외에도 《강산유가곡(江山遊歌曲)》이라는 비기농설(秘記弄說)이 화산(華山)의 소장본에 있고, 또 《아양진결(蛾洋眞訣)》이 청분실(淸芬室)의 소장본에 있다고 하나 모두 믿을 수 없는 위서(僞書)에 속한다.2. 《고운선생문집》의 편찬과 역주최치원의 저술은 《계원필경집》과 《사산비명》, 《법장화상전》만이 온전히 전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여러 책에 흩어져 그 일부만 전하고 있다. 또 위에서 서명으로 제시된 것 외에도 관료로 재직하면서 작성한 글들이 따로 묶여 편찬되었을 법한데 알 수가 없다.1_ 문집(文集) 30권이 책은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을 통하여 편찬된 사실이 확인되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이 문집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편찬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고려 초의 일로 짐작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이 책이 남아 있어서 참조하였다. 30권이라고 하면 적지 않은 양이므로 이것이 남아 있다면 풍부한 그의 문장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30권의 문집이 온전히 전하지 않아 세조(世祖) 5년(1459) 최항(崔恒) 등에게 명해서 12권의 문집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마저도 전하지 않는다.2_ 최국술본(崔國述本) 《고운선생문집》(연세대 소장)1926년 6월에 이르러 최국술이 악부(樂府)ㆍ《동문선》ㆍ야사(野史)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고운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본 번역서의 대본으로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1926년, 목판본, 3권 2책, 10행 20자, 19.8×15.7㎝,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권수제 고운선생문집판심제 고운선생문집이 《고운선생문집》은 3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서문과 목록 그리고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이 실려 있다. 서문은 노상직(盧相稷)과 책을 편찬한 후손 최국술이 썼다. 목록에는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저술 목록인 권외서목(卷外書目)이 첨부되어 있는데, 승전류(僧傳類)는 수록되지 않았다. 사적은 《삼국사기》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의 사서류(史書類)와 가승(家乘), 그 밖에 저자의 유적ㆍ사원(祠院)ㆍ치제문(致祭文)ㆍ축문(祝文)ㆍ《단전요의(檀典要義)》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자료를 채집하여 수록하였다. 내용이 광범위하여 편찬자가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는데, 책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이다.권1에는 부(賦) 1편, 시 32제(題), 표(表) 8편, 장(狀) 6편, 계(啓) 1편, 기(記) 3편이 실려 있으며, 대부분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고시 4제, 오언절구 2제, 칠언절구 10제, 오언율시 4제, 칠언율시 6제, 칠언시구 3제, 칠언절구 1제, 칠언율시 1제가 시체별(詩體別)로 편집되어 있는데, 재당 시절과 귀국 이후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다. 표와 장은 귀국 후에 지은 신라왕의 대작(代作)으로, 당에 보낸 국서(國書)이다. 이 가운데 〈백제견사조북위표(百濟遣使朝北魏表)〉는 백제왕의 대작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저자의 글이 아님이 분명하다. 기 2편은 불교와 관련된 글이다.권2와 권3에는 〈무염 화상 비명〉, 〈진감 화상 비명〉, 〈대숭복사 비명〉, 〈지증 화상 비명〉이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비명은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리는데, 귀국 후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으로, 당시에 유행한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으로 쓰였다. 이 글들은 많은 고사를 인용하여 주인공들의 업적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고전에 밝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사산비명》은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철면노인(鐵面老人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고운집》 10권 속에서 4편의 비명을 뽑아 주석을 붙여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만들었으며,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내용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후에 몽암 매영(蒙庵昧穎, ?~?)의 《해운비명주(海雲碑銘註)》(1783년)와 각안 범해(覺岸梵海, 1820~1896)의 《사산비명》(1892년) 등으로 계승되어 주해(註解)가 보완되었는데, 이는 지금도 전한다. 이들은 모두 지리산 권역 사찰에 주석한 승려들이다. 이후 순조(純祖) 연간에 호남에 내려온 처사 홍경모(洪景謨)가 새로운 주해를 더했으며,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이 보다 정밀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1931년)을 만들었다. 이본(異本)에 따라 주해가 약간씩 다르다. 이본은 《문창집(文昌集)》(규장각본), 《사갈(四碣)》(고려대 도서관본),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洙 소장본) 등 여러 표제로 되어 있다.3_ 최면식본(崔勉植本) 《고운선생문집》(고려대 소장)6개월 뒤인 1926년 12월, 또 다른 후손인 최면식이 이상영(李商永)의 서(序)를 받아 역시 똑같은 이름의 《고운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계원필경집》을 포함하여 권1에는 시 86수, 표(表) 20수, 장(狀) 73수가, 권2에는 소(疏) 2수, 계(啓) 8수, 격(檄) 4수, 위곡(委曲) 20수, 거첩(擧牒) 50수, 서 18수, 기(記) 2수, 재사(齋詞) 15수가, 권3에는 별지(別紙) 95수, 제문(祭文) 5수가 실려 있다.4_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1972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선생의 자료를 모아 새로이 《최문창후전집》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여기에는 위의 최국술이 간행한 《고운선생문집》과 서유구가 간행한 《계원필경집》을 영인 수록하였다. 또 이 두 책에 실리지 않은 자료들 특히 불교관련 자료들을 모아 속집을 편집하여 〈고운선생속집(孤雲先生續集)〉 항목을 추가하였다. 이 〈고운선생속집〉에는 《고운선생문집》에서 누락되었거나 새로 발견된 한시와 금석문 그리고 《법장화상전》 등과 같은 불교 관련 내용이 수록되었다. 이로써 최치원의 저술을 하나로 모으게 되었고, 불교 관련 내용이 빠진 것을 보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후 최치원 사상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바탕이 되었다.5_ 《고운선생문집》의 역주洪震杓 譯, 〈四山碑文〉, 《韓國의 思想大全集》 3, 同和出版公社, 1972.崔濬玉 編, 《國譯 孤雲先生文集》 上ㆍ下, 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ㆍ1973.崔英成, 《註解 四山碑銘》, 亞細亞文化社, 1987.淨光, 《智證大師碑銘小考》, 經書院, 1992.李智冠, 《譯註 歷代高僧碑文》 新羅篇, 伽山文庫, 1993.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編,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3,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3.李佑成 校譯, 《新羅 四山碑銘》, 亞細亞文化社, 1995.崔英成, 《崔致遠全集 1 四山碑銘》, 아세아문화사, 1998.崔英成, 《崔致遠全集 2 孤雲文集》, 아세아문화사, 1999.위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치원 문집은 일찍부터 번역이 나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최준옥의 주도로 여러 전공 학자들이 각 분야별로 나누어 처음으로 완역이 이루어졌다. 상권에는 《계원필경집》을, 하권에는 《고운선생문집》 외에 〈고운선생속집〉과 사적을 싣고 역주를 달았다. 이는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최문창후전집》을 완역한 것인데, 여기에서도 빠진 내용을 추가로 수록하여 그 가치를 더하였다. 이는 편저자 최준옥의 정성 어린 노력의 값진 산물로, 이로써 최치원 사상을 연구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이후 최영성이 《고운선생문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상세한 역주 작업을 했다. 이는 《사산비명》을 연구하려는 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일정 영향을 주었다.불교계와 역사학계의 연구도 이어졌다. 먼저 정광이 《지증대사비명소고》를 출판했다. 정광은 지증대사비가 소재한 문경 봉암사(鳳巖寺)에 주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러 해에 걸친 판독과 선학들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분석을 통하여 마멸된 글자를 복원하는 한편 우리말 번역과 상세한 주해를 곁들였다. 이외에도 《사산비명》의 다른 비명(碑銘)은 물론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비명(靜眞大師碑銘)〉과 〈상봉대사 비명(霜峯大師碑銘)〉을 비롯하여 우리 불교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록하여 불교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이지관의 역주가 나왔는데, 이것은 난해한 불교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역사 학계의 원로인 이우성은 《사산비명》에 대한 모든 집주(集註)와 번역본을 망라하여 정리하면서 오자와 탈자에 대한 교감(校勘)과 잘못된 주석을 산정(刪整)하는 한편 자신의 신주(新註)는 제한하고 참고할 만한 선학의 주석을 수록하였다. 평이한 번역으로 독자들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함과 동시에, 원문의 용어를 되도록 많이 살려서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책은 《사산비명》을 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이 특색이다.이같이 새로운 역주가 시도되면서 새로운 내용이 보태져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된 것은 유익한 일이다. 《고운선생문집》에 대한 역주는 최영성에 의해 다시 한 번 정리가 이루어졌다. 최영성은 《고운선생문집》 가운데 〈고운 선생 사적〉 부분을 빼고 대신 대동문화연구원본의 〈고운선생속집〉을 추가하였다. 여기에서는 앞서의 역주에서 미진한 점을 보완 개선하였는데, 이는 학계의 발전에 또 다른 기여를 한 것이다.이번에 역주되는 것은 세 번째의 완역서가 된다. 역주자 이상현은 이미 《목은집(牧隱集)》, 《도은집(陶隱集)》 등의 문집은 물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서책들을 역주하여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는 유학과 문학에 대한 지식은 물론 불교학을 전공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추었으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주석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불교의 난해한 문구는 이해도 어려울 뿐더러 설명 역시 쉽지 않은데, 이 책에서는 이를 무리 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가령 〈희랑 화상에게 증정하다〔贈希朗和尙〕〉에는 화엄 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이를 상세하게 잘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또 과거의 번역이 직역을 위주로 하여 다소 딱딱한 분위기였다면, 이 책은 문장의 맛을 잘 살려 읽기 쉽게 번역하였다. 다만 〈고운선생속집〉의 내용을 더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3.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고운선생문집》에는 《사산비명》을 비롯하여 재당 시절과 신라로 귀국한 뒤의 저술이 모두 들어 있다. 이런 까닭에 양국의 역사는 물론 정치와 사회를 살피는 데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재당 시절에 지은 한시는 당시의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새벽의 노래〔詠曉〕〉는 날이 밝아 오면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면서 뭇 인간들의 활동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화정(華亭)의 학 울음소리, 파협(巴峽)의 애잔한 원숭이 울음소리, 엄격한 군율을 자랑하는 세류영(細柳營)의 조두(刁斗) 소리, 군대가 주둔한 고성(孤城)에 울리는 호각 소리 등은 엄중한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강남의 여인〔江南女〕〉에서는 사치스러운 풍조를 즐기고 절박한 생산 활동을 경시하는 강남의 습속을 비판하고 있다. 전반부의 사치스럽고 놀기를 좋아하는 여인은 당나라의 상층 문화를 상징하며, 후반부의 베 짜는 여인은 서민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최치원이 겪었던 당시의 강남은 농업 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부유층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국왕을 대신하여 중국에 올린 여러 표와 장은 신라사는 물론 나당교류사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사료이다.〈사은표(謝恩表)〉에는 경문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로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부〔求賢才賦〕〉 1편과 〈황제의 교화를 찬미하는 시〔美皇化詩〕〉 6운을 지었는데, 유능한 인재를 구하여 등용했다는 내용과 화합을 다지며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조서 두 함을 내린 것을 사례한 표문〔謝賜詔書兩函表〕〉에서는 헌강왕이 《노자(老子)》와 중국어에 익숙한 사실, 그리고 문장이 뛰어나 당나라에 보내는 상주문(上奏文)의 초고를 직접 작성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하는 숙위(宿衛) 학생들과 관련된 여러 편의 장문(狀文)에는 학생들의 명단과 그들의 활동상 그리고 양국이 교류한 상황과 수업 기간이 10년인 점 등 우리 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실들이 서술되어 있다.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효공왕을 대신하여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를 지었다. 전자에서 흑수(黑水)는 발해를, 녹림(綠林)은 궁예와 견훤을 빗대어 나타냈으며, 그들로 인하여 당나라에 인사도 못 가는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후자에서 전횡(田橫)이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가던 중 남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결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부하들도 따라서 자결한 고사를 인용하였다. 이 같은 고사의 인용은 사실상 신라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불교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오늘날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어 신라 불교사의 공백을 메우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산비명》에서는 선종사와 경문왕대의 불사 활동을, 〈선안주원 벽의 기문〔善安住院壁記〕〉에서는 순응과 이정 화상이 해인사를 창건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선덕여왕 당시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의 불교를 빛낸 승려로 지영(智穎)과 승고(乘固)가 있었는데, 이들이 대덕(大德)의 첫 시작이었다. 더불어 대덕이라는 승려의 지위는 나이 50에 이르러야 허락되며, 임기는 7년이라는 사실을 적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알기 어려운 신라의 불교 제도에 대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으로 국학을 설치해 5경과 《문선(文選)》을 가르쳤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讀書三品)이 시행되어 졸업 성적에 따라 3품으로 차등을 두었는데, 그중 상품(上品)은 5경과 《문선》에 모두 통달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이에 더하여 3사(史)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한 자는 특품이라 하여 등급을 뛰어넘어 등용하였다. 최치원의 학문은 그것에 더하여 개인 문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학들이 《사산비명》을 집주(集註)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이같이 제자백가를 뛰어넘는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를 필자가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최치원의 사상을 잘 알아낼 수 있는 분석 방법론을 제시하여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고자 한다.최치원은 글을 지을 때 고사를 인용하여 글의 주인공이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여 그 의미를 빛나게 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용된 고사의 내용을 알아본 뒤 다시 본문의 문장을 살펴 취지를 파악해 나가야 한다.1_ 각 문장에 표현된 용어의 사용문장 속에 사용된 용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서로 만나 며칠 만에 또 헤어지려 하니 / 相逢信宿又分離갈림길에 또 갈림길 보는 것이 시름겹다 / 愁見岐中更有岐손안에 계수 향은 다 녹으려 하는데 / 手裏桂香銷欲盡이제 그댈 보내면 얘기할 지기(知己) 없다 / 別君無處話心期- 〈유별서경김소윤준(留別西京金少尹峻)〉위 시는 최치원이 태산군으로 나간 891년(진성여왕5)경이나 그 뒤 김준과 같이 하정사로 가기 전의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892년경에 지은 것이다. 이 시기의 신라는 889년 농민 봉기 이후 혼란이 확대되면서 후삼국 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착잡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갈림길을 뜻하는 ‘기(岐)’를 거듭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치원에게 선택의 기로가 중요한 화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던 시절부터 진로 선택과 관련된 글귀인 ‘기로(岐路)’와 ‘문진(問津)’을 자주 사용해 왔는데, 이는 그가 그 당시에도 힘든 역경 속에서 지내 왔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귀국한 뒤에도 위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진로 선택의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 ‘지기(知己)’가 사용되었음도 주목된다. 2_ 비유나 은유를 위해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을 통한 이해그의 문장에서 비유나 은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주 작업이 필수적이다. 역주를 해야 인용 구절이 어느 책에 실려 있고,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이것은 모든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혀 돈을 내게 되는 것으로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땅히 비통해할 것입니다.〔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남사(南史)》 권70, 순리열전(循吏列傳) 우원(虞愿)비록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혔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하더라도〔雖保無賣兒貼婦之譏〕- 〈대숭복사 비명〉위의 예는 남조 시대 송(宋)나라 명제(明帝)가 상동(湘東)의 옛집을 사찰로 만들어 큰 공덕을 세우고자 했을 때, 우원이 위와 같이 백성들의 곤란한 형편을 들어 도리어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간언(諫言)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불사에 대한 공덕은 좋은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한다면 도리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사실상 무모한 불사의 공덕을 반대한 것이다. 이러한 고사를 최치원이 〈대숭복사 비명〉을 지으면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신라에서 곡사(鵠寺)를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중창(重創)하는 일이 위의 사례처럼 백성에게 세금 부담을 준다는 비난은 없다고 하여 최치원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찬양하면서 굳이 좋지 않은 사례에 비유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본래 3교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가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그는 남조 송의 명제와 같이 백성을 괴롭히는 공덕 활동에 대해서는 역시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용문의 내용을 통해 분석해 보면 그가 지닌 사상적 경향을 파악할 수가 있다.3_ 비슷한 뜻의 고사를 반복 인용하여 강조한 취지의 이해최치원은 고사를 인용하면서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뜻을 담은 내용을 하나의 글 속에 여러 번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이를 잘 분류하여 살펴보면 글의 또 다른 특성을 살필 수 있다. 〈무염 화상 비명〉의 경우를 보자.〈무염 화상 비명〉에 인용된 중국 역사 중 장량 사례비문원문 출전(《한서(漢書)》 권40 〈장량전(張良傳)〉)不能致商山四老人以此四人曰 陛下輕士善罵 臣等義不辱 故恐而亡匿憶得西漢書留侯傳尻云 良所與上 從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所與 從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果能白日上昇去 於中止 得爲鶴背上一幻軀爾家世相韓……封萬戶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族矣 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游耳 乃學道 欲輕擧圯上孺子 盖履迹焉良嘗閒從容步游下邳圯上 有一老父 衣褐……讀是則爲王者師 後十年興 十三年 孺子見我표에서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은 한(漢)의 개국 공신인 장량과 관련된 고사를 하나의 글에서 네 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이는 최치원이 장량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최치원은 자신도 장량처럼 일을 여유 있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두 번째 사례에서 천하의 존망 외에는 기록하지 않겠다고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장량전〉 말미에 있는 이 내용은 본래 사관(史官)이 장량의 전기를 찬술할 때에 천하의 존망과 관계된 것 외의 작은 일은 제외했다고 한 것이다. 이유인즉, 장량의 업적이 많아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들어 최치원 자신도 그러한 태도로 〈무염 화상 비명〉을 찬술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 역시 스스로가 장량과 같이 천하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려고 한 것임을 보여 준다.더불어 최치원이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역시 군주는 인재를 존중하고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은 빛이 나는 옥구슬이 많다고 자랑하다가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나라의 보배는 구슬이 아니라 단자(檀子)ㆍ전반자(田盼子) 등과 같은 명신들의 능력이라고 말하자 할 말을 잃었다. 조(趙)나라의 지사(志士) 예양(豫讓)은 조양자(趙襄子)를 세 번이나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조양자에게 자신이 섬기던 지백(智伯)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 이는 지백이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으므로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전자는 군주가 인재를 중시해야 함을, 후자는 신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나아가 군주는 인재들로부터 간언(諫言)을 잘 듣고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진섭(陳涉)과 항우(項羽)는 천하를 얻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례들을 들어 최치원은 자신과 같은 인재의 등용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하였던 것이다.이상에서 살핀 바 1의 각 문장에 표현된 용어의 사용은 한시의 문장에 직접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독자들이 주의 깊은 관심을 갖는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의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을 통한 이해와 3의 비슷한 고사를 반복하여 인용한 것은 《사산비명》의 찬술에 인용된 고사들이다. 이 두 비명은 대숭복사를 중창한 것에 대한 사적비와 무염 화상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모두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비명에서 최치원은 자신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명 찬술에 인용된 고사의 원전(原典) 내용을 찾아 정리하고 주제별로 묶어 보면 또 다른 특성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역주 작업이 절실하다. 잘못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論)을 지어 말하기를 “여래가 주공과 공자와 더불어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각각 자교(自敎)에 국집(局執)하여 (교체가 지극하면)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故廬峰慧遠著論 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하였다.- 〈진감 화상 비명〉이 기사는 혜원(慧遠)이 지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에 나오는 내용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체극불겸응자 물불능겸수(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의 설명인데, 일부 역주에서,“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물(物)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한 때문이다.”“극치를 체득함을 겸하지 못했음은 물이 아울러 받지 못하는 때문이다.”등으로 잘못 번역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 부분은 위 해석처럼 각자의 교(敎)에만 국집하게 되면 불교는 유교와 통하지 못하고 유교는 불교와 통하지 못하니, 이는 만물을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이 같은 오류는 역주자가 불교에 밝지 못하고 변려문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문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역주는 물론이요, 합동으로 읽어 나가면서 새로운 역주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4. 사산비명의 찬술과 젊은 최치원의 사상 동향최치원의 저술에 나타난 사상적 경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서는 젊은 시절의 대표적 저작인 《사산비명》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재당 시절에 저술된 《계원필경집》과 해인사에 은둔한 이후에 저술된 《법장화상전》은 본 해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제외한다.다음의 내용은 최치원이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여러 고사(古事)를 인용한 것 가운데, 중국 역사 사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에서 제시한 분석 방법론, 즉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이다. 그 결과 그의 관심 대상이 변화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회 변화의 흐름과 밀접하였다.889년(진성여왕3) 농민 봉기 이전에 찬술된 〈진감 화상 비명〉에서는 최치원이 평소 마음에 새겨 두고 있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여기서는 먼저 군주로서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적절하게 해야 원망이 없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사례와 더불어 군주의 잘못에 대하여 올바르게 간언해야 하는 신하의 도리를 살피고 있다. 다음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 시기를 잃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드러냈다. 이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내용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개혁이 필요한 때는 적극 도모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최치원의 뇌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잘 알려 주고 있다.최치원은 현실 문제에 대해 신라 사회에 어떠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개혁은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 없이 호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가 당으로부터 귀국을 결심하면서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이어서 찬술한 〈대숭복사 비명〉에서 최치원은 제왕들이 사치를 억제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충신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면 그 나라는 흥할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 준다.한 효문제(漢孝文帝)는 궁궐을 짓는 비용이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에 해당되므로 사치스럽다 하여 중지시켰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신하의 간언을 듣고 결단을 내린 뒤 노력을 통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성현을 존숭한 공자 자산(子産)이 유씨(游氏)의 사당을 헐지 않은 것과 한 효경제(漢孝景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집을 헐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사례였다. 이 같은 성현의 존숭을 미루어 훌륭한 인재를 찾아 중용해야 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융족(戎族)의 사신 유여(由余)가 훌륭한 인재임을 알아보고 계책을 써서 자신의 휘하로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진나라는 융족을 물리치고 안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제왕들을 보좌할 수 있는 훌륭한 신하들의 활동도 중요하다. 한나라 건국 공신인 장량(張良)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일을 결정지었고, 한신(韓信)은 싸우면 백전백승했다. 무제의 책문에 응하여 활동하였던 동중서(董仲舒)는 유학을 중흥시켰으며, 선제(宣帝) 때의 병길(丙吉)은 재상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나라를 계속 발전시켰다.이 사례들은 최치원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내용들을 담으려고 노력한 일면을 보여 준다. 특히 한나라와 관련된 사실이 비교적 많은 것으로 볼 때, 그가 한나라를 모범적인 사례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농민 봉기 이후에 찬술된 〈무염 화상 비명〉에서는 군주들의 역량에 대해 인재를 살피어 등용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장량을 비롯한 명신(名臣)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방의 혼란에 따른 대책으로 지방관에 대한 관심도 표명했다. 이는 지방의 안정에 수령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민(逸民)에 대한 관심도 보이고 있다. 그는 당에 있을 때 인재는 소보(巢父)나 허유(許由)와 같이 은둔하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무염 화상 비명〉에서도 다시 언급하고 있다.최치원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국가 발전이나 개혁의 적절한 모범 사례를 역사 속에서 찾았는데, 한(漢)나라가 가장 모범적이었다. 한신을 장군으로 임명할 때 어린아이처럼 부르는 행동을 말린 소하(蕭何)와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인 고조, 미워하면서도 후임 재상 직에 조참(曹參)을 추천한 소하, 재상에 올라 소하가 제정한 법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여 혼란이 없게 한 조참, 천하의 존망을 좌우한 장량 등의 활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중 더욱 주목되는 것은 소하가 제정한 법을 조참이 고치지 않고 꾸준히 계승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 건국된 나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법을 다시 고치게 되면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새 왕조가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기보다는 도리어 혼란이 조성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최치원은 한나라 왕실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단순한 미담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중요 핵심 사안을 파악하고 탐구했다. 나아가 이 같은 한나라 초기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새로 건국되는 나라가 어떻게 해야 잘 정착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흐름을 살핀 것으로, 최치원이 정치가와 행정가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음을 잘 알게 해 준다.그렇다면 이처럼 국가의 발전 단계를 꿰뚫고 있던 최치원이 생각하는 정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장량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점, 한의 건국과 발전에 공헌한 소하나 조참 등과 같은 재상들의 활동, 더불어 진(晉) 왕조에서 활동한 재상들에 관심을 두었던 점 등 여러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최치원의 정치적 지향점은 아무래도 군주보다는 재상의 보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 쪽이었다.그는 신라가 진골 왕족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어 오면서 격심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폐단을 우선적으로 주목했을 것이다. 현명한 군주들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는 경우, 재상들이 잘 보필하여도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진나라의 경우, 사실상 왕권이 안정을 이룬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왕조가 유지된 것은 충신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손작(孫綽)은 권신(權臣) 환온(桓溫)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맞서서 사직을 지켜 냈다. 군주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의 도움 없이는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무리가 없다면, 최치원은 군주보다는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았다.〈지증 화상 비명〉에 인용된 중국 역사 사례의 경향은 이전과는 달랐다. 최치원은 한(漢)나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위진 남조(魏晉南朝)는 물론 당 왕조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주요 관심 대상에서도 군주나 재상 외에 은둔하는 일민(逸民)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관심사의 확대는 당시 혼란한 현실에 부딪치면서 난국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보는 한편, 자신의 진로 선택과도 관련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그렇다면 최치원이 살펴본 위진 남조의 흥망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매한 군주들 때문인가, 아니면 반역을 꾀한 신하들에게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왕조 초창기에는 권력 쟁탈이 일어나므로 안정을 이룰 수 없었음을 살폈을 것이다. 진(晉)나라의 장화(張華)는 한(漢)의 제도와 견식에 밝아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8왕의 난 때에 희생당했다. 남제(南齊)의 사초종(謝超宗)은 간신들의 핍박을 받고 불만을 토로하다가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받았고, 결국은 죽음을 당했다. 이들은 왕조 초기에 황족과 황후 세력들 간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된 충신들이다. 불의에 반대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려다가 희생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왕조의 수명 또한 연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왕조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을 이룬 것도 아니어서 희생의 대가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이같이 건국 과정에서 나타나는 흥망성쇠의 고찰을 통해 최치원은 새로운 국가 건설이 현실의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건국이 아니라, 개혁이 올바르게 추진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최치원은 어디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은둔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할 수 있다.〈지증 화상 비명〉 찬술을 마치고 난 뒤, 최치원은 이듬해인 진성여왕 8년(894) 2월에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그는 중국 역사를 고찰하고 고민한 끝에 판단을 내린 희망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았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이에 최치원은 해인사로 은둔하러 들어간다.결국 그는 새로운 건국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하고 일생을 마쳤다. 최치원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현실 상황에 직면하여 경서(經書)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 사례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2009년 10월참고문헌李仁榮, 〈太平通載殘卷小考〉, 《震檀學報》 12, 1940.李基白, 〈최문창후전집 해제〉, 《崔文昌侯全集》,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2; 《한국고대사론》, 일조각, 1995.崔濬玉 編, 《國譯 孤雲先生文集 》 上ㆍ下, 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ㆍ1973.崔英成, 《註解 四山碑銘》, 亞細亞文化社, 1987.金圻彬, 〈고운집(孤雲集) 해제〉, 《韓國文集叢刊解題 1》, 민족문화추진회, 1991.金知見, 《四山碑銘 集註를 위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4.梁基善, 《孤雲崔致遠硏究》, 한불문화출판, 1995.崔英成, 《崔致遠全集 1 四山碑銘》, 아세아문화사, 1998.崔英成, 《崔致遠全集 2 孤雲文集》, 아세아문화사, 1999.李劍國ㆍ崔桓, 《新羅殊異傳 考論》, 중문출판사, 2000.劉永奉, 〈몇 개의 頻出詩語로 본 崔致遠의 詩〉, 《漢文學報》 7, 우리한문학회, 2002.당인핑 저, 마중가 역, 김복순 감수, 《최치원 신연구》,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4.郭丞勳,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 한국사학, 2005.郭丞勳, 〈신라 말기 최치원의 승전 찬술〉, 《佛敎硏究》 22, 한국불교연구원, 2005; 《신라 고문헌 연구》, 한국사학, 2005.[주-D001]  : 당인핑 저, 마중가 역, 김복순 감수, 《최치원 신연구》,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4.[주-D002] 당서(唐書)에서 …… 의(議) : 이 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2 〈잡문(雜文)〉에 실려 있다.[주-D003]  : 이인영, 〈태평통재잔권소고(太平通載殘卷小考)〉, 《진단학보》 12, 1940.[주-D004]  : 이검국ㆍ최환, 《신라수이전고론(新羅殊異傳考論)》, 중문출판사, 2000.[주-D005]  : 《나려예문지(羅麗藝文志)》 참조.[주-D006]  : 이인영, 〈태평통재잔권소고(太平通載殘卷小考)〉, 《진단학보》 12, 1940.[주-D007]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진성왕 원년.[주-D008]  : 최남선, 《조선상식문답속편(朝鮮常識問答續篇)》, 1947, 276쪽.[주-D009]  : 유영봉, 〈몇 개의 빈출시어(頻出詩語)로 본 최치원의 시〉, 《한문학보(漢文學報)》 7, 우리한문학회, 2002.[주-D010]  : 김지견, 《사산비명 집주를 위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2022-04-30 | NO.709
  • 《광산 이씨 족보(光山李氏族譜)》 서문〔光山李氏族譜序〕- 서형수
    명고전집 제7권 / 서(序)《광산 이씨 족보(光山李氏族譜)》 서문〔光山李氏族譜序〕족보의 간행은 위진 시대 이후로 성행했다. 박학한 선비들이 왕왕 전문가가 되어 종족을 단합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근본을 잊지 않게 했다. 이는 본디 주관(周官) 소사(小史)가 하던 직무를 계승한 것이다.그러나 관직을 숭상하고 성씨를 숭상하는 폐단이 일어나 관직에는 대대로 물려받는 주손(胄孫)이 있고, 성씨에는 대대로 물려받는 관직이 있다. 나라에서는 왕실의 보첩(譜牒)을 간행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역사가는 씨족의 계보를 기록한 책을 전하였으니, 가보(家譜)를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 족보 간행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자로 말하면 공물(公物)을 몰래 가로채어 개인의 사유물로 만든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그러나 계보와 씨족의 역사는 가문에서 채록하고 전문가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이 없다. 가문과 전문가가 없다면 최씨, 노씨, 이씨, 정씨가 무엇을 근거로 원류를 상세히 밝힐 수 있겠는가. 문헌이 국사를 증명해주는 일에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조선의 풍속은 가문으로 우열을 다투어, 산동(山東)의 인척과 강좌(江左)의 인물, 관중(關中)의 벼슬을 아울러 숭상한다. 이 때문에 고관대작의 집안에는 예외 없이 족보가 있고, 전문가가 또 가첩(家牒)을 종합하여 전보(全譜)를 만든다.내가 일찍이 여러 족보들을 읽어보니, 가학(家學)이 전해 내려오는 문헌고가(文獻故家)는 문장과 조행을 지닌 인물이 성대하였고, 정승과 목민관을 배출한 주문세가(朱門勢家)는 영화와 부귀가 혁혁하였다. 그러나 몇 세대가 채 되지 않아 자후(子厚)가 순공(郇公)을 더럽히고 채경(蔡京)과 채변(蔡卞)이 단명(端明)을 욕보인 것과 같은 사례가 어느 집안이고 없는 집안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책을 덮고 “대대로 덕을 간직한다는 것이 이만큼이나 어렵구나. 어떻게 하면 시종일관 덕을 오롯이 지킨 집안의 족보를 구해 읽을 수 있을까?” 하고 탄식하였다.올해 정사년(1797) 광주 목사로 내려와, 정무를 돌보는 여가에 즐겁게 고을의 수재들과 《예기》를 강독하였다. 하루는 이덕인(李德仁) 군이 그의 족보를 가져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광산 이문은 세상에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한과 벼슬이 오래전부터 대대로 이어졌으니 실로 한 지방의 명문입니다. 계보를 밝히고 소목(昭穆)을 서술하여 당세의 전문가에게 질정을 받으려 하니, 부디 선생께서 한 마디 말로 품평해주십시오.”내가 족보를 읽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훌륭하다. 그대 집안의 족보여. 고려조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백 년에 이르도록 덕으로 이름난 분도 있고,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한 분도 있고, 절개가 있는 분도 있고, 공훈을 세운 분도 있어 농서 이씨(隴西李氏)에 부끄러운 불초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 조선의 명문가에 드문 사례이다. 전문가로 하여금 이 족보를 편찬하게 한다면 불태워지지 않고 국사에 보탬을 줄 수 있으리란 것을 내 장담할 수 있다. 어찌 벌열가보다 못하겠는가. 속담에 ‘높은 벼슬을 이룰 수도 있고 명성을 널리 떨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대로 가학을 돈독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였다. 힘쓸지어다. 이 족보가 숭상하는 것은 벼슬도 아니고, 성씨도 아니다. 바로 전래의 가학이다.”이덕인이 수긍하기에 이윽고 써서 돌려보냈다. 이 글을 《광산 이씨 족보》의 서문으로 삼는다.[주-D001] 광산 이씨 족보(光山李氏族譜) 서문 : 【작품해제】 저자는 1796년(정조20) 7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여, 고을의 유생들과 《예기》를 강독하였다. 그러던 중 이덕인(李德仁)이라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1797년에 이 글을 써주었다. 보학과 서지학에 관해 전문적 정보는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를 참고한 듯하다.[주-D002] 족보의 …… 것이다 : 족보의 기원은 하ㆍ은ㆍ주 왕실의 계보를 기록, 정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주례》 〈소사(小史)〉에 “소사는 나라의 기록을 관장하여 세계를 정하고 소목을 밝힌다.[小史掌邦國之志, 奠系世, 辨昭穆.]”라고 한 기록이 그 실상을 보여준다. 이후 후한에서 위진(魏晉)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가(世家)와 대족(大族)의 가족 제도가 형성되면서 족보의 편찬이 본격화되었다.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집안을 일으킨 대표 인물의 전기를 모아놓은 가전(家傳) 형태이다. 대표적으로 《순씨가전(荀氏家傳)》, 《원씨가전(袁氏家傳)》 등이 있다. 둘째는 한 가문의 계보를 정리한 단성(單姓) 족보이다. 대표적으로 《완씨보(阮氏譜)》, 《곽씨보(郭氏譜)》, 《원씨세기(袁氏世紀)》, 《왕씨가보(王氏家譜)》 등이 있다. 셋째는 국중의 망족(望族)을 집대성하여 만든 백가보(百家譜) 류이다. 대표적으로 《백가보(百家譜)》, 《십팔주보(十八州譜)》, 《천하망족보(天下望族譜)》 등이 있다. 특히 서진에서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문벌의 고하가 요직으로 진출하는 중요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대를 이어 보학에 필생의 노력을 기울이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위진남북조 시대의 가필지(賈弼之), 가비지(賈匪之), 가연(賈淵) 3대와 왕승유(王僧孺) 일가를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보학과 족보 간행이 크게 성행했다. 첨언하자면 보학이 발달하고 족보 간행이 성행하게 된 데에는 새로운 문벌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물론 있었다.[주-D003] 관직에는 …… 있다 : 특정 성씨는 특정 관직을 세습하는데, 그 관직은 장손에게로 승계된다는 의미이다. 이로 인해 관직명이 성씨로 정착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사마씨(司馬氏), 사공씨(司空氏), 사도씨(司徒氏), 윤씨(尹氏)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문장은 당나라 유방(柳芳)의 〈성계론(姓系論)〉에 “관직은 대대로 이어받는 주손이 있고, 보학은 대대로 전담하는 세관이 있다.[官有世胄, 譜有世官.]”라고 한 것을 변용한 표현이다.[주-D004] 나라에서는 …… 설치하고 : 왕실의 세계와 계보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관장한다. 도제조(都提調)는 2인으로 종실(宗室)의 존장이 맡는다. 《大典會通》[주-D005] 역사가는 …… 전하였으니 : 앞 시대 왕조의 역사서를 정리하는 사관(史官)들은 주요 인물들에 대해 가문 단위로 열전을 편찬하여 해당 인물의 가계를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또 정사의 경적지(經籍志)나 예문지(藝文志)나 총서류의 예문부 등에도 족보 및 총보류의 서적을 정리, 소개하였다.[주-D006] 조선의 …… 숭상한다 : 이 부분의 문장은 중국의 속담에 “산동 지방 사람들은 질박하기 때문에 인척을 숭상하니, 미더움을 인정할 수 있다. 강좌 지방 사람들은 문아하기 때문에 인물을 숭상하니, 지혜로움을 인정할 수 있다. 관중 지방 사람들은 호방하기 때문에 벼슬을 숭상하니, 현달함을 인정할 수 있다.[山東之人質, 故尙婚婭, 其信可與也; 江左之人文, 故尙人物, 其智可與也; 關中之人雄, 故尙冠冕, 其達可與也.]”라고 한 것을 인용한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인 관계와 인물과 벼슬을 모두 중시하기 때문에 가문의 우열을 더더욱 따지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자연히 족보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주-D007] 가학(家學)이 …… 성대하였고 : 원문의 청상(靑箱)은 뛰어난 자제가 가학을 잇는 문헌가(文獻家)를 상징하는 말이다. 《송서(宋書)》 권60 〈왕준지열전(王准之列傳)〉에 “증조 왕표지(王彪之) 때부터 집안 대대로 강좌(江左) 지방의 고사에 정통하여 사실(史實)을 푸른 궤[靑箱]에 넣어 대대로 전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왕씨 청상학(王氏靑箱學)’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의문(義門)은 대대로 가문의 전통을 고수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유서 깊은 고가(故家)를 상징하는 말이다. 절강(浙江) 지방의 고가인 사인(士人) 정만습(鄭萬習)의 집안은 9대가 함께 살았다. 한 집안의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면서도 화목하기 그지없기에 천자가 그 집안의 문에 정려를 세워 ‘의문(義門)’이라 했다. 《孤臺日錄》[주-D008] 자후(子厚)가 …… 사례 : 자후는 장돈(章惇, 1035~1106)의 자로 건주(建州) 포성(浦城 지금의 복선성) 사람이다. 순공(郇公)의 후예라는 설이 있고, 먼 일족의 족항이라는 설이 있다. 순공을 욕보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을 추측할 수 있다. 먼저 하나는 장동이 진사시에 응시하러 경사에 올라와 순공의 집에 머무를 때 그의 첩과 사통하다 들통이 났다는 이야기로, 사마광의 《온공쇄어(溫公瑣語)》에 실려 있다. 둘째는 장돈이 순공의 후예라는 《오중기문(吳中紀聞)》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장돈이 말재주와 아첨으로 장순(張峋)의 천거를 받아 왕안석(王安石)에게 중용되고 그로 인해 뒷날 목주(睦州)로 유배 가 죽은 것이 결과적으로 순공에게 욕을 끼친 것이 된다.단명은 송나라 채양(蔡襄, 1012~1067)을 가리킨다. 자는 군모(君謨), 호는 보양거사(莆陽居士)로, 19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가 되었으므로 흔히 채 단명이라 불린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채경과 채변은 모두 채양과 같은 집안의 사람이고 채양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러나 뒤에 간신이 되어 정권을 농단하고 재물을 착취하여 간신과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되어 채양의 이름에 먹칠하였다.본문의 표현은 “자후는 못된 행실로 순공을 더럽혔고, 채경과 채변은 간사함으로 채 단명의 명성을 빌렸다.[子厚無行, 有玷郇公; 京卞憸人, 借名端明]”라고 한 《만성통보(萬姓統譜)》에 실린 문장을 변용한 것이다. 《만성통보》의 이 말은 명나라 능적지(凌迪知, 1529~1600)의 《씨족박고(氏族博攷)》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만성통보》는 18세기 이전 시기 어느 때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인용 서목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주-D009] 정사년 : 정조 21년으로 저자의 나이 49세 때이다.[주-D010] 농서 이씨(隴西李氏) : 이씨 성을 가진 모든 가문이란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천하의 이씨는 모두 농서를 본으로 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농서 이씨의 시조는 노자(老子)라고도 하고, 이백의 선대 세거지가 농서이기 때문에 이백을 농서 이씨라고도 한다. 농서는 중국의 감숙성(甘肅省)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이래 농서 이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으레 이씨를 농서 이씨에 비겨 불렀다. 또 당나라 왕실이 농서 출신에 성이 ‘이(李)’이기 때문에 조선 왕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2023-12-04 | NO.708
  • 《금호집》 발문〔錦湖集拔〕 -문곡집
    《금호집》 발문〔錦湖集拔〕 -문곡집 제26권 / 제발(題跋) : 김수항(金壽恒, 1629~1689)금호(錦湖) 임공(林公)께서 재앙을 만난 지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학사대부(學士大夫)들은 공의 죽음을 언급할 적마다, 여전히 기가 막히고 목이 메어 심지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이 어찌 그 앙화가 애통하고 그 사람이 애석해서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공이 남긴 작품들을 사람들이 아끼고 보배로 여김 또한 위대한 걸작 정도일 뿐만 아니었으니, 비록 자투리 문장이나 쪼가리 원고라도 반드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공의 후손들은 영락하고, 세상에는 더 이상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여 공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선비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상론(尙論)하는 사람조차 한탄하였다.내가 남쪽 땅에 죄인의 몸으로 거처하는데 유생 응수(柳生應壽)가 찾아왔으니, 그는 공의 외손이었다. 그는 소매에 넣어 온 시문 1책을 내보이며 내게 뒤섞이거나 잘못된 걸 바로잡고, 또한 공의 유사(遺事)를 엮어 권말에 첨부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서 부끄러웠지만, 또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침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외직을 맡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왔는데, 얼른 이를 가져다 목판에 새기고 또 서문을 지어 책머리를 장식해서 세상에 드러냈다. 참으로 이공 같은 사람은 이른바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일을 마치자 유생(柳生)은 또 내게 한마디 말을 요청하였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공의 글에서 이미 다 해 버렸으니, 어찌 내가 췌언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내게는 남몰래 가슴속에 감동을 받은 것이 있었다.공의 호탕한 재주와 곧은 기상은 당대에 우뚝 빼어났는데, 세상에서 공을 아끼고 중시하던 사람들이 모두 명현이나 승류(勝流 명사(名士))들이었음은 부록의 여러 시문을 보면 알 수가 있으니, 공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하는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심지어 오랑캐 부락의 추한 무리들까지 오히려 공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공의 죽음을 탄식할 줄 알았으니, 또한 우뚝하고 더욱 기이하지 않은가. 하물며 공께서 세상을 뜨신 지 백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히려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심지어 자투리 문장이나 쪼가리 원고라도 또한 아끼고 완미(玩味)해서 반드시 세상에 전하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는가?이는 다름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양심을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똑같기에, 풍속이 다르거나 시대가 뚝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혀 차이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같은 조정에 나란히 서서 의관을 차려입고 시서(詩書)를 암송하다가, 도리어 원수처럼 여기고 물여우처럼 엿보아 필연코 베어 죽이고서야 유쾌하게 여겼으니, 유독 무슨 마음인가.아, 구양수(歐陽脩)의 말에 “선비의 삶과 죽음이 어찌 그 한 몸의 일이겠는가?〔士之生死, 豈其一身之事哉?〕”라고 하였다. 공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세도(世道)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살아서 사랑을 받고 죽어서도 아깝다고 여긴 것은 또한 공 혼자만의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현인을 원수처럼 여기고 앙화를 즐거워하는 무리들의 경우, 호오(好惡)의 천성이 어찌 여느 사람과 유독 다르겠는가. 오로지 자기 한 몸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데 급급하여 다른 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말류(末流)의 앙화가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니, 뒷날 이 문집을 보는 사람은 또한 경계해야 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나도 이로 인해 거듭 탄식하노라.공의 묘소는 금강 가에 있지만, 아직까지 두어 자 정도의 묘갈문도 묘도(墓道)에 세워져 있지 않으니,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공처럼 의리를 사모하고 현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시금 나와 묘갈 세울 방도를 도모해서, 백 세대의 후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공의 몸이 이곳에 묻혔음을 알게 한다면, 어찌 더욱 내세에 풍성(風聲 풍교(風敎))을 세우고 후세에 덕을 밝힘이 아니겠는가. 이공이 벌써 앞에서 이끌었으니, 그 뒤를 이을 사람으로 어찌 적임자가 없으랴? 나는 장차 그를 기다리노라.[주-D001] 금호(錦湖) 임공(林公) : 임형수(林亨秀, 1504~1547)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임준(林畯)의 아들이다.[주-D002] 걸작 : 원문의 ‘길광지우(吉光之羽)’에서 길광은 신마(神馬)라고 한다. 《십주기(十洲記)》에 “한 무제(漢武帝) 천한(天漢) 3년에 서국왕(西國王)이 길광의 모구(毛裘)를 바쳤는데, 색이 황백으로 대개 신마의 일종이다. 그 모구가 물에 들어가서 여러 날이 되어도 가라앉지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하였다. 그 후 문인(文人)의 시장(詩章) 가운데 잔여(殘餘)에서 겨우 발견된 진품이나 걸작을 길광편우(吉光片羽)라고 일컬었다.[주-D003] 상론(尙論) : 고인(古人)의 언행이나 인격을 논하는 것을 뜻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학자들과 벗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여 다시 위로 옛사람을 논의한다.〔以友天下之善士, 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4]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 드러냈다 : 이민서의 서문은 《서하집(西河集)》 권12에 〈금호유고서(錦湖遺稿序)〉로 남아 있다.[주-D005] 오랑캐 …… 알았으니 : 임형수가 회령 판관으로 있을 때의 치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역 중종실록》 34년(1539) 7월 13일 회령 판관에 임형수를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주-D006] 물여우 : 물여우는 물속에 사는 독충(毒蟲)으로, 사람 몰래 그림자를 보고서 독기를 쏘아 병들게 한다는데, 보통 음모를 꾸며 남을 해치는 자를 비유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나 물여우는 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너는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서, 끝없이 사람을 보는구나.〔爲鬼爲蜮, 則不可得. 有靦面目, 視人罔極.〕”라는 말이 나온다.[주-D007] 선비의 …… 일이겠는가〔士之生死, 豈其一身之事哉?〕 : 이 말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권44 〈오대사당육신전론1(五代史唐六臣傳論一)〉에 나온다.[주-D008] 충성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 원문의 ‘화벽(化碧)’은 충성을 다하다가 살신(殺身)함을 이르는 말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인 장홍(萇弘)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피를 보관한 지 3년 만에 푸른 옥으로 변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莊子 外物》
    2020-12-14 | NO.707
  • 《손재집》 발문〔遜齋集跋〕 [이민보(李敏輔)]
    《손재집》 발문〔遜齋集跋〕 [이민보(李敏輔)] 호남(湖南)의 학문은 하서(河西)와 고봉(高峯)에게서 말미암아 백여 년이 되었는데, 고(故) 징사(徵士) 손재(遜齋) 박공(朴公, 박광일朴光一 : ?~?)이 일어났다. 공은 우헌공(寓軒公)의 아들로 나이 겨우 약관의 나이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호(號)) 노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오가며 질문을 하니, 벌써 영특하기가 남달랐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고 은미한 이치를 탐색하고 연구하여 정밀하게 사유하고 자세히 논하였다.저술이 모두 이십 편으로,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괘상(卦象)의 이치에서부터 의문(儀文)과 도수(度數)의 세밀함에 이르기까지, 그 견해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말이 물샐틈없는데, 대부분 질박(質朴)하여 문식(文飾)을 가함이 없고, 광범위하면서도 연원이 있었다. 요컨대 경(經)과 예(禮)의 본지(本旨)를 천명하고자 함이었으니, 문사(文辭)는 애초부터 달가워하지 않았다.답문(答問)이나 소(疏)ㆍ변(辨) 등은 또한 장중하면서도 바르고 넉넉하면서도 무성해서, 사문(斯文)의 흥망(興亡)과 크게 관련이 있었기에, 당시 동문(同門)의 제공(諸公)들도 마음으로 허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남의 선비들도 우르르 그를 따르면서 노선생의 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편파적인 말에 현혹되지 않았으니, 공(公)의 공(功)이 많았도다. 오호라! 비록 하서와 고봉의 뒤를 이은 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어찌 지나치다 하겠는가?공의 손자 하진(夏鎭)이 공께서 남긴 글을 장차 인쇄하고자 하면서, 다듬고 손보는 역할을 내게 맡겼다. 삼가 9편으로 거칠게나마 정하고 나서, 외람되이 그 아래에다 한마디 말을 붙인다.“문(文)의 전승(傳乘)은 적을수록 더욱 오래 전해지는 법이지만, 공(公)에 관해 전할 만한 실상(實相)은 또한 문(文)에 있지 않도다. 공의 글이 귀한 까닭은 공허한 말[虛言]이 아니기 때문이다.”연안(延安) 이민보(李敏輔)는 삼가 쓰다.[주-D001] 하서(河西)와 고봉(高峯) : 하서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이다.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제자로 정철(鄭澈), 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오건(吳健) 등이 있다. 1796년(정조20)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하서집》ㆍ《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ㆍ《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ㆍ《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고봉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주-D002] 징사(徵士) : 학문과 도학이 높아, 조정의 천거로 부름을 받은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주-D003] 우헌공(寓軒公)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
    2020-12-28 | NO.706
  • 《오산동 향약》 서문〔鰲山洞鄕約序〕 -손재집
    《오산동 향약》 서문〔鰲山洞鄕約序〕 -손재집 제8권 / 서(序)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옛날에는 향약(鄕約)을 모두 한 나라에 시행하였기 때문에 폭넓게 시행되고 멀리까지 파급되었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이것으로 말미암았다. 후대로 내려와 말세가 되면서 교화가 쇠퇴하고 풍속이 무너지자 남전(藍田)에 남긴 법이 쓸쓸히 사라졌으니, 옛날의 이른바 ‘풍속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위에서 편안하고 아래에서 순종한다’는 것을 오늘날 다시 볼 수 없으니, 아, 슬퍼할 만하다.지금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향약의 법(法)을 정하는데, 다만 우리 광주(光州)는 면적이 커서 하루아침에 일제히 옛것을 회복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우선 우리 오산동(鰲山洞)에만 시행하여 주변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도 간혹 시의(時宜)를 따르는 한 방도가 될 것이다. 이에 나에게 향약의 조항을 수정하여 보완하라고 부탁하니, 내가 감히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율곡(栗谷) 선생이 가감한 향약을 참고해서 수정하였다.대개 그 규모의 큰 틀은 《여씨향약》을 본받았고, 절목(節目)과 조례(條例)는 율곡 선생이 가감한 향약을 대부분 취하였지만, 또한 내가 가감한 부분도 없지 않다. 이는 번잡한 부분은 간략히 하고 소략한 부분은 자세히 만들며,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은 없애고 오늘날에도 적합한 것은 남겨 두어 마침내 고쳐서 한때의 법을 만든 것이다. 주제넘은 행동에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지만, 우리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는 진실로 《여씨향약》을 가감할 적에 단지 고금의 마땅한 것을 헤아려 그 중도를 얻게 하였을 뿐이었고, 율곡 선생이 가감한 향약도 대체로 이런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가감한 것이 중도를 얻었다고 내가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해서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도에 있어서는 아마도 큰 하자는 없을 듯하다.[주-D001] 남전(藍田)에 남긴 법 : ‘남전’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이다. 송(宋)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휼한다[患難相卹].”라는 등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6 善行》 본문에 보이는 《여씨향약》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주-D002] 주부자(朱夫子)는 …… 않았다 : 향약의 발단은 송대(宋代)의 〈남전여씨향약〉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주희(朱熹)에 의해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이 제정되어 향약을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희의 〈증손여씨향약〉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통치이데올로기였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실천 모형이 되었다. 1571년(선조4) 이이(李珥)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재편성하였다. 《유성선, 율곡 향약에 나타난 사회사상 연구, 철학탐구 제18집,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2005, 9쪽》 우리나라에는 주자의 향약이 고려 말 이래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던 조선 시대 16세기 이후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각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중앙 정계에서 사림파를 형성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향약에 대한 관심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그 주체인 재지사족층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사림세력을 형성하는 16세기에 이르러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진영, 향약, 퇴계가 꿈꾼 이상사회, 안동학연구 제1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 58쪽》
    2020-12-28 | NO.705
  • 上從叔父 (乙巳八月二十一日)- 가암유고(可庵遺稿) 권10 / 書
    上從叔父 (乙巳八月二十一日)- 가암유고(可庵遺稿) 권10 / 書여범(汝範), 호는 이다. 之何哉。惟是區區戀慕之情。不可禁抑。則只有瞻望北雲。長發太息而已。溽暑已過。節届新凉。不審玆際。軆候動止一向萬安。此中許多怪事時作。季父書輒請轉上。想皆覽悉。而最是四月封書事。乃千古所無之大變。五日囚禁。必待廵題許入。已極萬萬無嚴。至於使吏校坼皮封。送妖妓見書辭。則雖以昔日䟽請管束慈殿之嗣基,宇遠。必不敢萌此心作此擧也。然是豈一在文所能爲哉。盖皆在朝凶徒之所使耳。當此時。不忍使御札重受罔極之辱。付來伻還納。自此以後。痛心疾首。如不欲生。病亦因此轉添。得已使億兒朴校。自首待罪於官前。此亦辱之甚者。而彼旣名爲法官。則我之自辱。似無所愧。與上所云云者。煞不同矣。伊時四門。發卒把守。刑具大設。有若執大贓治凶盜。忽有廵營急報。事遂得已。然所入衣粮。不可因仍冐受。故付億兒還送。此等處義。自謂皆有所據。未知或無過中失正者否。漫以仰禀耳。務安丁醫者。亦被本倅貽書務宰。慫惥廵伯。重刑滯囚。竟至瘐死。伯仁由我。寧不悲憐。以是不願頑喘之久延。使無辜者殆無孑遺也。仲父䟽擧。儘是大辦得。夏賊凶書。旣有不滿聽政之意。而朝廷之上。寂無一人光牧甞對羅牧。問本州謫客尙在否。羅牧往告廵伯。廵伯曰此大妄發也。曰無母之逆。義所當討。慈聖不可顧小嫌云爾。則慈聖本無刑政之責。勢必陳告上前而處分之矣。國家刑政。不由於朝廷上請討。而由於簾闈內私酬酢者。恐啓日後無窮之弊。而或爲慈殿聖德之纍也云云。未知渠更以爲如何也。
    2023-07-31 | NO.704
  • 偕光牧李子壽 喜聃。宿于錦城之琴鶴軒。話間次主倅韻- 오재집(寤齋集) 권2
    偕光牧李子壽 喜聃。宿于錦城之琴鶴軒。話間次主倅韻- 오재집(寤齋集) 권2신상(申祥), 정이(定而)이다. 樽酒琴軒信宿期。可堪斜日獨歸時。春光已着江邊柳。繫得離愁箇箇枝。*이자수(李子壽)는 이희담(李喜聃, ?~?) 광주목사이다. 1714.8.28 광주목사로 제수됐다.
    2023-07-31 | NO.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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