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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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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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
    옛날, 서구 매월동 개금산 동쪽 산골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동생은 착하고 선량했지만 형은 부자이면서도 늙은 부모를 가난한 동생에게 떠맡기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지독한 욕심쟁이었어요. 하루는 동생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개암나무 열매 한 알이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우는 이것을 주워 "이건 아버지 갖다 드려야지" 하며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개암이 또 떨어지자 "이것은 어머니 갖다 드려야지" 생각하며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주머니에 넣고 나자마자 서너 개가 연거푸 굴러 떨어졌습니다. 동생은 "이건 마누라 것", "이건 아들 것", "이건 딸 것" 그리고 "이건 내가 먹어야겠다"하고 생각하며 모두 주워 담고 있을 때 비가 내렸어요. 동생은 비를 피하기 위해 산속 다 쓰러져 가는 빈집에 들어갔습니다.비가 그치면 그 집에서 나오려 했으나 비가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심하게 쏟아져 밤을 그곳에서 날 수 밖에 없었어요. 숲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왔고 더 짙게 깔렸습니다. 으슥한 밤이 찾아오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난데없이 도깨비들 한 무리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어요. 동생은 무서워 대들보 위에 숨어 도깨비들을 지켜봤지요.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렸어요. 그들은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동생은 그 음식들을 보자 침이 고여 배고픔을 더 느껴야 했어요. 배고픔을 달래려고 호주머니에 든 개암나무 열매 하나를 입에 넣고 무심결에 깨물었는데 단단한 껍질이 으깨어지면서 ‘딱!’ 하고 큰 소리가 나자 도깨비들은 그 집 대들보가 부러지는 소리로 잘못 알고 모두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어요. 도깨비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동생은 대들보 위에서 내려와 도깨비들이 버리고 간 술과 고기, 밥과 떡, 그리고 도깨비 방망이까지 함께 들고 집에 돌아와 부자가 됐습니다. 동생은 그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겨 원하는 것을 모두 나오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도, 논밭도 생기고 해서 부자로 잘 살게 됐지요. 욕심쟁이 형은 그 소식을 들은 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동생에게 "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벼락부자가 되었느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형은 나무지게를 들쳐 메고 동생이 말한 산으로 갔습니다. 마침 산 속에 들어가자 개암 한 알이 형의 발 앞에 툭 굴러 떨어졌지요. 형은 첫 마디부터 "이건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어요. 또 한 개가 떨어지자 "이것도 내가 먹어야지" 하고 혼잣말을 내뱉어요. 형은 떨어지는 개암나무 열매마다 모두 다 자신이 먹겠다면서 호주머니에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비도 오지 않는데 그 빈집에 들어가 대들보 위로 숨었어요. 마침내 으슥한 밤이 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지난번 동생 때처럼 ‘술과 고기, 밥과 떡 나와라 뚝딱’ 하며 순식간에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는 그것을 먹으며 놀았습니다. 도깨비들이 정신없이 먹으며 놀고 있을 때 대들보 위에 숨었던 형이 개암 한 알을 딱 깨물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깨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가야 하는데 도망은커녕 "저번에 우리 방망이를 훔쳐간 놈이 또 왔구나. 이놈을 혼내 주자"하며 대들보 위에서 형을 끌어 내렸어요. 도깨비들은 형의 아랫도리만 홀랑 벗겨 ‘사타구니에 달린 귀중한 물건’을 붙잡고 늘이면서 "한발 늘어져라" 뚝딱, "두발 늘어져라" 뚝딱하며 방망이를 자꾸만 두들겨댔습니다. 그러자 형의 물건이 너무 커져버렸지요. 형은 그렇게 커져버린 자신의 물건을 보며 제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도깨비들에게 청했지만 아무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결국 형은 그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수 없어 계속 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개금산 도깨비 방망이는 주제넘게 너무 욕심을 부리면 패가망신할 수 있는 만큼 누구나 분수에 맞게 살 때 복과 행운이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2018-05-28 | NO.228
  • 고경명- 觀牧令試士于公庭
    帀月絃歌化武城 庠橫媚學恥肥輕似聞諸子彈冠喜 應體賢侯愛士情雲幙靜隨簷影轉 粉袍寒映日華晴盱江諗衆文堪誦 愧把殘詩較病聲
    2018-07-10 | NO.227
  • 고경명- 題周道茅亭
    監務官淸愜素懷 公餘寄傲小茅齋琅玕擁壁堪驅瘴 簷宇憑高不受霾犀柄拉賓風入坐 鶩行麾吏月侵階陶腰暫折何妨事 終勝香塵走九街-제봉집(霽峯集) 권3
    2018-07-10 | NO.226
  • 고경명- 경양 모정에서 국보를 위해(景陽茅亭 國保請賦 時爲察訪)
    客久同吾土 떠도는 신세 어디고 다 고향같지官閑似馬曹 일 없는 관직 마조보다 한적하구나郊墟紆井邑 넓은 들판은 정읍으로 통했는데亭沼面林皐 한 모퉁이 모정이 아담하네頓覺襟靈爽 문득 기분이 상쾌함을 느끼고深嗟意匠高 구상의 높음을 깊이 감탄하네紛紛坐馳者 분분하게 저 좌치만 일삼는 이는 終歲不知勞 죽을 때까지 괴로움도 모른다오 -제봉집(霽峯集) 권2-이항복은 “남쪽지방에 시인이 많지만, 고제봉이 제일이다”라고 평가했던 가치를 한 감흥의 시다.광주 평야의 젖줄이었던 경양방죽은  계림1~2동에 해당되며 무등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리 매머리봉과 동계천 하류 무드리들이 만나는 곳이다. 조선시대 들어1440년(세종22) 경양방죽이 축조되어 별칭으로 ‘경양(景陽)’도 쓰였다. 2004년까지 광주광역시청이 있었다. 시청 터 일대는 조선시대 경양방죽이 있었다.  팽·왕버들나무 숲을 이루던 여제단(勵祭壇)과 경양방죽 주위를‘서(새)벌’이라 부르다가 1946년부터 계림동이라 칭했다. 조선시대 광주목 경양면(景陽面)에 속했으며, 저수지와 역둔수전(驛屯水田)지대였다. 1946년 경호동(鏡湖洞)과 계림동(鷄林洞)으로 개칭되면서 이때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양방죽은 경호(鏡湖)라고도 불렸던 인공 호수로 광주의 무등산 보다 더 랜드마크였다.
    2018-07-10 | NO.225
  • 고경명- 주관에서 술에 취해 안찰사 군망에게(州館醉吟 示君望按使)
    老向騷壇壯膽衰 나이 늙어 시 지을 근력 쇠해지니愁逢勍敵角雄雌 억센 이 만나서 대결하기 걱정이라.焉能賈勇嬰鋒鏑 무슨 용맹 가지고 잘 막아낼지只欲收兵偃鼓旗 그만 군사를 끌고서 달아나고 싶네.喜氣到君方奏凱 자네가 꼭 승리하려고 애를 쓴다면戒嚴如我費何誰 나도 하는 수 없이 계엄령 내려야지.書生事業眞堪笑 서생들 사업이란 참으로 우습지鍊得敲推鬢已絲 좋은 글귀 쓰려고 머리를 썩힌다오.寒力添多酒力衰 추위가 들어도 술 마실 힘이 없어孤城別樹怨羈雌 외로운 성 밑에서 찌푸리고 앉아 있었네.愁看短燭燒殘跋 짤막한 촛불은 어이 그리 잘 타는지怕聽嚴風獵凍旗 글 쓸 시간 닥쳐올까 겁이 났나봐.倦跡卽今成漫浪 아무렇게나 떠도는 이 나그네를舊遊寧復記伊誰 세상에 어느 친구 반갑게 여기랴.追思十載前時事 십년 전에 놀던 일 곰곰이 생각하니井底銀甁已斷絲 끈 떨어진 두레박처럼 되고 말았네.-제봉집*군망은 신응시의 자이다.
    2018-07-27 | NO.224
  • 고경명- 주관에서 하룻밤 쉬게 되자 군망에게 써서 드림(州館夜話 錄奉君望)
    宵旰憂南紀   밤낮으로 이 지방 일이 걱정이더니煩君試一陶   자네의 솜씨 한 번 시험하게 되었네珍烹麾楚膩   겉치레 하는 사치풍조 쓸어버리고荒瘴洗蠻臊  자욱한 악기도 걷히도록 해야겠지積縞攅峯凍  산 속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窮陰朔吹饕  금년도 벌써 다 저물어가네.王程應少暇  왕정에 별로 조용한 겨를 없겠지만仲蔚在蓬蒿  봉고에 누운 중울을 잠깐 찾아주게.壓倒風騷將  뭇 시인들 압도시키던 이 늙은 선비長驅力破溟  긴 바람 안고서 바다를 건너갔지.跨壇推獨步  한 시대에서만 손꼽힐 뿐이겠는가方駕軼前靈  옛 사람도 넉넉히 능가할 만 한데恣韻摐瀟碧  소상강 대나무도 울리는 듯하고豪鋒掣海靑  동정호의 넓은 물도 일렁거리듯佇看文柄本  나중에는 이 시가 더욱 드날려揮翰掞天庭  천정으로 들어가서 번쩍일거야. - 제봉집(霽峯集) 권3- 제봉집(霽峯集) 권3
    2018-07-27 | NO.223
  • 고경명-‘주관에서 상사 성척지가 서울로 돌아감을 작별하다(州館 贈別成上舍惕之還京)
    庚戌年中夏課時  경술년 하과 때百人今日幾人奇  백명이던 그 사람들 오늘날 남은 사람 몇 명이나 되느냐江湖復對一床雨  강호에서 다시 만날 때 비 흠뻑 내렸고樽酒相逢兩鬢絲  동이 술로 마주보니 구레나룻 희어졌네垂老關心難作別  늘그막에 정이 깊어 작별하기 어려운데斜陽握手重臨岐  석양에 손 잡고서 다시 갈림길에 섰구나茂珍城外樓門道  무진성 바깥 누문 앞 길에서 折柳歌殘無限悲  이별가 불러 파하니 슬픔을 금할 길 없네 - 제봉집(霽峯集) 권4
    2018-07-27 | NO.222
  • 고경명-聞白麓上官 戲疊前韻
    按節當年識使君 左轓重見入樓門粧臺喜色占蛾黛 俠窟寒心屛鼠群車幔高褰瞻百里 將壇雄跨壓諸軍公餘定理登山屐 千丈圭峯翠掃雲光牧爲中衛大將 故第六及之-제봉집(霽峯集)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자는 이순(而順)이며 호는 제봉(霽峯)이다.
    2018-07-10 | NO.221
  • 고경명-蘆洲風颭雪漫空
    蘆洲風颭雪漫空  갈대 섬에 바람이니 눈 흩날리고沽酒歸來繫短蓬  술 사사서 돌아와 뜸집에 배 매놓았네橫笛數聲江月白  몇 가락 피리소리, 강물에 달빛 밝아오고宿鳥飛起渚煙中  잠자던 새도 물가 안개 속에서 날아오르네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인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읊은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체없이 가장 먼저 광주(光州)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2018-11-01 | NO.220
  • 고경명-극락정에서 성덕구로부터 ~을 듣다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싯구가 이를 알려준다.성수익(成壽益, 1528∼1598)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이다. 1574년부터 1577년까지 광주목사로 있었다.
    2018-07-17 | NO.219
  • 고경명-동헌에서 서회하다(東軒敍懷)
    正坐乖慵不入城 이 내 몸 게을러져 입성하지 않았는데二天寧復意相輕 사또에 향한 정성 어이 소홀하여 그러하리蕭蕭霜鬢凋年恨 덧없는 백발 속에 모년 한탄 더해지고戀戀綈袍昔日情 제포 보내준 옛 정분 지금까지 못잊네車騎雍容侵雪夜 거마는 단란하게 눈 내리는 밤에 모였고樓臺次第眺春晴 번화한 누대는 봄날씨에 한결 아름답다降幡合向詩壇豎 갑을을 대결하는 시단에 흰 깃발 꽂았는데剛笑尊前吐款聲 술 항아리 앞에서도 항서 올린단 말인가 (暮年才盡酒戶亦減 故末句自嘆)- 제봉집(霽峯集) 권4
    2018-07-26 | NO.218
  • 고경명-무등산 풍경
    조수처럼 퍼지는 구름은 온 구렁을 메웠는데햇살에 따라 변하는 모양 더욱 볼 만하네아름다운 글 한 편 써 볼 테니바람아 구름을 걷어가지 마라
    2018-08-02 | NO.217
  • 고경명-부용정에서
    官裏文書綴亂絲 관청의 문서철이 어지럽게 엮여 있는데行春又到習家池 봄의 계절 또 다시 술 마시기 좋은 때(습가지)에 이르렀네非闕泥酒停騶御 술에 취해 마차를 지체한 것이 아니라問柳尋花故作遲 버들을 묻고 꽃을 찾느라 짐짓 더디었다네습가지(習家池)  :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에 있는 못 이름. 토호(土豪)인 습씨(習氏)의 원지(園池)로, 진(晉) 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 태수로 있으면서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술을 즐겨 마시던 곳으로 유명하다.
    2018-08-02 | NO.216
  • 고경명-양과모정에서 짓다(題良苽茅亭)
    隣社招邀慣 이웃 사람들 초청하기 일쑤였으니 良辰幾上亭 좋은 시절 몇 번이나 이 정자에 올랐던고廚煙隔岸白 언덕 너머 부엌에 밥 짓는 하얀 연기 酒幔颭樗靑 주막의 깃발은 바람결에 푸르네 林表投雙鳥 수풀 속엔 한 쌍의 새 날아들고 槐根臥數甁 괴목 뿌리에는 술병 몇 개 놓여있네 村童齊拍手 마을 아이들이 함께 박수치니堪盡醉時形 그림보다 좋은 술취한 모습이구나問柳前村過 버들 숲을 찾고 앞 마을을 지나亭皐憩晚涼 서늘한 저녁 때에 정자에 올라 쉬네 黃雲村欲麥 마을마다 보리 누렇게 익어가고白水野分秧 논마다 가득한 물 모내기를 하네小雨園蔬嫩 가랑비에 밭나물 부드러워지고輕風市酒香 가는 바람에 저자의 술향기 풍겨오네自今來往熟 이제부터 오고가는 얼굴이 익어鷄犬亦相忘 지나가는 닭과 개도 못 본 체 하네 -양과모정은 광주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양과동정을 말하며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 12호로 지정되었다. 옛 부터 이 정자는 간원대, 또는 제봉의 별서라고 일러왔다. 간원대라 함은 조선조에 이곳 출신들이 많이 간관이 되어 중요한 나라일을 이곳에서 논의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집터 일대에 자리해 잠시 별서를 사용했다. 그리고 긴 운치를 남긴다.
    2018-08-02 | NO.215
  • 고경명-유서석록
    고경명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임훈 일행과 함께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동안 산사에서 유숙하며 무등산 권역을 유람했다. 널리 알려진 고경명의 유서석록은 그 시절 등산 관행과 산행 코스를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유서석록’이다. 서석은 산 이름인데 곧 무등산이니 광주에 있다. 만력 갑술년(1574) 초하에 목사 갈천 임선생(葛川 林先生, 이름은 薰, 安陰人)이 장차 겨를을 타서 손님과 수종을 이끌고 서삭산에 유람하기 위하여 서신으로서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어른과 기약하고 뒤늦게 갈 수 없으므로 20일 갑자에 등산장비를 갖추어 먼저 증심사(證心寺)에 가서 기다렸으니 서석산은 곧 우리 고을의 진산이다.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여러 번을 올라가 현애와 절벽과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두로 구경하여 발자국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범연히 보기만 하고 요령을 얻지 못한다면 초동 목수의 보는 바와 무엇이 다르며 혼자 올라 상심만 한다면 또한 유의(柳儀)와 조남간(曺南澗)의 슬픔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산의 경치를 소상히 안다면 옳거니와 산의 취미를 얻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선생의 뒤를 좇아 눈을 씻고 다시 관광하게 되어 황홀히 표륜과 우개로서 낭풍과 현포의 위에 노는 듯 했으니, 이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는가? 이에 흥취가 돋아나서 소매를 드날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해가 정오가 되기 전에 벌써 동문에 다다랐다. 누교(樓橋)를 거쳐 올라가니 수목은 더욱 울창하고 바위는 모두 기괴하였으며 시냇물 소리는 구슬이 구르는 듯 하였으니 점점 아름다운 지경에 들어갔을 깨달았다. 내가 이에 말에서 내려 옷을 벗고 맑은 물에 발을 씻으며 태고적 창랑의 가사를 외우고 소산(小山)이 지은 초은(招隱)의 곡조를 읊으니, 서늘한 기운이 가슴에 가득하고 번잡한 마음이 없어져 쇄연히 진세에서 벗어난 감상이 있었다. 해가 장차 저물매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앞에 조그만 다리가 있어 시내에 걸쳤으며 좌우에는 고목이 우거져 있었다. 그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한동안 두루 구경했는데 절의 중들은 내가 그곳에 올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취백루(翠栢樓)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였는데 취백루라고 이름한 것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栢樹庭前翠)라는 시구를 채택함이 아니겠는가? 벽상에는 권흥(權興) 등 제공의 시를 편액에 새겨 걸었는데 대개 홍무(洪武) 연간에 쓴 것으로 김공 극기(金公克己)의 시만이 유실되었으니 이 어찌 후인의 한탄할 바가 아니겠는가?조금 후 조선(祖禪)이 찾아와 비로소 자리를 쓸고 포단을 깔아주어 나는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다. 한식경 후에 일어나 보니 떨어지는 햇살은 서산에 너울거리고 붉은 아지랑이는 하늘을 뒤덮었는데 놀란 사슴은 죽림으로 달아나고 게으른 새는 수풀을 찾아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을 자아내게 했으니 옛 사람의 이른바 명승지에 임하면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는 것은 참으로 허언이 아니었다. 조선이 송료(松?)와 산나물로 나를 접대하고 이야기가 소재(蘇齋)의 옛 놀이에 미치니, 자못 구수하여 들을만 하였다. 조선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누교의 시내 위에 최송암(崔松巖) 응용(應龍)이 바위에 새긴 시가 있음을 알았는데 각자를 얇게 했기 때문에 이끼가 찌들어 알아볼 도리가 없었으니, 내가 한스럽게 여겼다.절 옆에 죽림이 있어 산과 연달았으니, 비록 위천(渭川)에 있는 천묘의 죽림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 하였다. 갑인년(1554) 봄에 내가 이 절에 왔을 때에는 그 마디의 길이가 일척이 넘고 둘레의 크기는 연목같은 대가 즐비했었는데, 이제는 쇠잔한 대가 쓸쓸하여 다시 옛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조선(祖禪)이 법당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법당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초엽에 이름난 도편수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제 장차 근 천년이 되었으나 동우와 계단과 초석이 조금도 기울지 않았습니다. 좌우의 요사는 무릇 몇 번을 개수하였는지 알지 못하는데 이 법당만 남아있었으며, 옛날 이절에 대장경 원판이 있었고 또 불경도 여러 상자가 있어 한 전당에 간직하였으나 이제 전당만 남고 경서는 모두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이날 저녁에 이만인(李萬仁, 자는 一元)과 김형(金逈, 자는 叔明)이 함께 이르러 밤에 한 자리에게 유숙하였다. 늙은 고승이 촛불을 켜고 경석을 울려 부처에 예배를 올린 후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산중에 옛날 향반을 설치하였다가 연루로서 대체하였는데 시각마다 종을 울려 손님의 잠자리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세속에서 몸을 벗어나 잠깐 선경에 머물렀으니 맑은 밤에 눈만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작은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왔으니 실로 나쁜 소리가 아니요, 들으매 족히 경성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얼마 후 세 사람이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늙은 중의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급히 몰아치거늘 내가 비 올 조짐이 아닌가 염려하여 조선을 깨워 물으니 조선이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깃들어 비바람의 증후를 익숙히 아는데 비록 남풍이 불더라도 비 올 조짐은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21일 을축에 일기가 쾌청하였는데 늦은 아침에 선생의 행차가 당도하였다. 신형(愼衡, 자는 彦均)과 이억인(李億仁, 자는 長元)과 김성원(金成遠, 자는 剛叔)과 정용(鄭庸, 자는 子常)과 박천정(朴天挺, 자는 應須)과 이진(李?, 자는 汝正)과 안극지(安克智, 자는 公達) 등이 뒤를 따랐다. 나는 취백루에 올라가 선생을 뵈었다. 누대의 앞에는 해묵은 잣나무 두 그루가 있어 형상이 고괴하여 완상할만 했으니, 비록 고려시대의 유물은 아니었으나 또는 누대의 이름에 차착이 없었다.술이 몇 순배 돈 후에 선생이 식사를 재촉하여 먹게 하고 등산길을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잡인을 물리치고 종솔을 간단히 거느려 야복으로 죽여(竹輿)를 타고 사승 조선으로 하여금 전도를 삼아 증각사로 향하였다. 중도에 선생이 우거진 나무 그늘에 앉아 짐꾼들을 쉬게 하였다. 응수(應須)가 서쪽으로 한 봉우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사인암(舍人巖)인데 옛날 그 정상에 올라가 본즉 바위가 구름에 연달았고 절벽이 반공에 솟았으며 송골매의 깃들인 둥주리를 굽어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정오에 증각사에 당도하였는데 이날 뿌연 기운과 흙비가 내려 멀리는 바라볼 수 없으나 대나무 정자와 넓은 벌판과 비단결 같은 시냇물을 역역히 분별할 수 있었으니, 높은 데 오를수록 안계가 더욱 넓은 것을 비로소 알았다. 증각사의 북쪽에는 분죽과 오죽 두 가지 대가 있는데 분죽은 불에 쪼여 기름을 낸 뒤 지팡이를 만들면 심히 윤기가 있다고 하였다. 다를 마신 후에 곧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으로 지향하니 험준한 길이 곧장 올라가 드높기가 천계와 같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를 꿰미에 엮듯 서로 붙들고 개미가 기어가듯 하여 겨우 일척을 전진하면 십척을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가매 앞이 트여 안계가 활짝 열렸으니 쾌활하기가 떼우적을 걷어치고 백일을 보는 듯 하였다. 중령으로부터 산세를 따라 좌편으로 접어드니 수풀이 울창하여 햇살이 새어 들어오지 못했으며 비탈길이 절벽으로 돌아 한 웅큼의 흙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다만 푸른 바위옷 사이로 박쥐가 날아다닐 뿐이었다. 지팡이를 끌고 걸어가며 시를 읊으매 등산의 수고로움을 완전히 잊겠다. 중령에 오를 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벼운 수레를 타고 평탄한 길을 달리는 듯하였다.선생이 먼저 냉천정(冷泉亭)에 이르러 뒤에 오는 자들을 기다렸다. 샘이 나무 아래에 있어 바위틈에서 솟아났으니, 그 차가운 것은 도솔사(兜率寺)의 샘물에 미치지 못했으나 달콤한 맛은 월등하였다. (도솔사는 규봉의 동북방에 있는데 이제 헐려버렸고, 그 곳에 있는 샘물이 지극히 차가워 그 빛깔이 푸른 쪽과 같다고 하였다.) 이때에 여러 사람들이 바야흐로 갈증이 심하여 그 물에 콩가루를 타서 다투어 마셨으니 비록 금장 옥액이라도 그 시원함을 비길 수 없었다.해가 저물 무렵 입석암에 당도했으니 양사기(楊士奇)의 시에 이른바 ‘열여섯 봉우리가 절을 감싸주었네(十六峰藏寺)’라는 구절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암자의 뒤에는 기암이 뾰죽뾰죽 솟아 울밀한 것은 봄 죽순이 다투어 나오는 듯하였고 결백한 것은 부용이 처음 피는 듯 하였으며, 멀리 바라보면 의관을 정제한 선비가 홀을 들고 읍하는 것 같았고 가까이 보면 중관과 철성에 일만갑병을 나열한 듯하였다. 그 한 봉우리는 홀로 드높이 서서 형세가 외로이 빼어났으니 세속에서 초월한 선비가 군중을 떠나 홀로 달리는 듯 하였다.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네 귀퉁이가 옥을 깎아 세운 듯 층계가 첩첩하여 먹줄로 친 것 같았으니 생각건대 천지가 개벽할 초두에 아무런 뜻이 없이 결합되어 우연히 기관을 이룩한 것인지 또는 신공과 귀장이 바람과 우레를 불러 이 교묘한 솜씨를 농락한 것인지. 아! 누가 이를 만들었으며 누가 이를 다듬었던가? 아미산의 옥국이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이 아닌지 성도의 석순에서 나온 해안이 아닌지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바위의 형세를 보니 참차하고 떨기로 솟아 비록 공교한 역산가라도 손꼽아 헤아릴 도리가 없었으니, 그 열여섯 봉우리라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볼만한 것을 근거삼아 대략만을 말한 것이었다. 그 형세가 양편으로 뻗어내려 사람이 두 팔을 벌린 듯 하였는데 암자가 정중에 있었으며 위태로운 바위를 우러러 보매 장차 굴러 떨어질 듯 했으니 모골이 송연하여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바위 아래에는 두 샘이 있어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하나는 암자의 서쪽에 있었는데 비록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으니 또한 한 가지 이상한 일이었다.입석암을 떠나 약간 북쪽으로 가다가 우쪽 입석을 끼고 돌아 불사의(不思議. 암자 이름)로 들어갔는데 방장이 겨우 수척 평방에 지나지 않았으니 좌선이 아니면 거처할 도리가 없었다. 방장의 남쪽에는 평탄한 석대가 있어 몇 사람이 앉을 만 했으며, 옆에는 큰 고목이 있어 석대의 위에 그늘이 덮혀 있었다. 입석암은 여러 사찰 가운데에서 지형이 가장 높아 산해의 그윽하고 기이한 풍경을 한 눈에 역력히 볼 수 있었는데, 다만 차가운 바람이 뼈에 스며들어 찾아온 자가 오래 견딜 수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이에 석문을 걸어나와 배회하며 사방을 돌아보니, 마음이 창망하여 옛 친구와 이별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석암으로부터 동쪽으로는 길이 험준하지 않고 도처에 반석이 있어 자리와 같이 평탄하기도 하고 옆으로 삐뚤어진 것도 있었는데, 지팡이 소리는 그윽하게 울리고 나무 그늘은 듬성듬성하였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여 마음의 지향하는 대로 맡겼는데, 이에 낭선(浪仙)의 시에 이른바 ‘나무 그늘가에서 자주 쉬어가는 몸이로세(數憩樹邊身)’라는 구절이 정경을 그려내는 데 교묘함을 알았으니, 천재의 옛일이 완연히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해가 저물어 염불암(念佛庵)에 투숙하였는데 일원(一元)이 피곤하여 숨결이 매우 촉급하거늘 강숙(剛叔)이 묻기를 ‘오늘 험준한 길을 멀리 발섭하여 피로하지 않은가’라고 한 즉 일원이 눈을 감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피곤하지 않다’하니 일행이 모두 웃어댔다. 판관 안공(判官 安公 彦龍)과 찰방 이공(察訪 李公 元禎)이 청첩을 받고 먼저 화순에 있다가 만연으로부터 향로봉을 돌아나와 장불사를 거쳐 황혼에 이 염불암으로 찾아왔다. 이 암자는 원래 강월(江月)이 창건한 바로서 중간에 황폐된지 오래였는데 정덕(正德) 을해(1515)에 일웅(一雄)이 중창하였고 융경 임신(1572)에 보은(報恩)이 중수했으며 옆에 조그만 원우를 설치했으니 이는 결하(結夏)할 때 참석하는 곳이었다. 일찍이 눌재가 일웅을 위해 중창기를 지었는데 글자의 잔결된 곳이 많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암자의 동쪽에 돌더미 쌓인 것이 바라보였는데 지공력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어지러운 돌이 서로 버티어 산과 같이 첩첩하고 그 가운데는 텅비어 밑이 없어졌으니, 어느 사람이 그릇 도끼를 빠뜨리고 귀를 기울여 들은 즉 굴러가는 소리가 한식경 후에 바야흐로 끊어졌다고 한다. 이 산 가운데에 역(礫)이라고 명칭하는 곳이 둘인데 증각사(證覺寺)의 동북방에 있는 것을 덕산력(德山礫)이라고 이름하였다. 매양 소나기가 새로 개이면 잠복하였던 이무기가 나와 햇빛을 쪼이는데 몸을 서리서리 도사리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산승(山僧)이 일찍이 목격한 이야기인데 노루 한 마리가 그곳을 지나니 한 괴물이 물고 굴 속으로 들어가는데 눈의 광채가 번쩍거려 참으로 두려웠다고 하였다. 홀로 이 지공력(指空礫)은 뱀이나 독충의 종류가 없고 가을에 낙엽이 산에 가득할 때에도 항상 말끔하여 한 잎새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승도들의 전설에 의하면 지공선사(指空禪師)가 그 신도들과 더불어 설법한 곳이라고 하였다.22일 병인에 일기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판관과 찰방이 먼저 일어나 입석암을 찾아갔으니 어제 날이 어두워 미처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곧장 상원등(上元燈, 절이름)으로 올라갔다. 조그만 암자를 새로 지었는데 얕고 누추하여 휴식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선생이 암자의 서쪽 단상에 앉아 휴식을 취했는데 그 서편에 회목 두 그루가 마주 서있고 그 아래에는 반석이 있어 몇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조금 후에 판관과 찰방이 뒤쫓아 당도하여 관령(官伶)으로 하여금 천왕봉과 비로봉에 올라 젓대 몇 곡조를 부르니 그 음운이 표묘(??)하여 생황과 옥퉁소의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했으며 마침 한 승도가 있어 절조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니, 족히 한 웃음거리가 되었다.상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천왕봉이요 가운데 있는 것은 비로봉인데, 그 사이가 백여척이 되며 평지에 서서 바라보면 쌍궐(雙闕)과 비슷한 것이 이것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반야봉인데 비로봉과 더불어 정상과의 거리가 거의 포목 일필의 길이가 되고 그 아래는 겨우 일척 남짓 됐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과 같은 것이 이것이었다. 정상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두견과 철쭉이 바위 틈에서 소복하게 나와 길이는 일척 가량 되고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 쏠려 깃발과 비슷했다. 그 지형이 높고 기후가 차가운 때문에 풍설에 시달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때에 산향과 두견화는 반쯤 떨어지고 철쭉화가 처음 피었는데 나뭇잎도 무성하지 못했으며, 정상에서 평지까지의 거리가 대략 40리가 되기 때문에 그 기후의 차이가 이와 같았다.반야봉의 서쪽은 지형이 매우 평탄했는데 봉우리의 형세가 갑자기 끊어져 천척의 단애(斷崖)가 땅에서 까마득하였고 멀리 정상의 나무를 바라본즉 냉이와 비슷했다. 진남산(鎭南山)의 시에 이른바 ‘송삼(松杉)과 죽림(竹林)의 앙증함을 노여워했네(杉篁?蒲蘇)’라는 구절은 이를 지적한 것이었다. 단애에 열지어 앉아 술잔을 들어가며 질탕히 마셨으니 표연히 공중에 날아 신선이 되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단애의 서쪽에 총석(叢石)이 즐비하게 섰는데 높이가 모두 백척이 넘었다. 이른바 서석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은 뿌연 토우(土雨)가 약간 개어 어제의 험악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되나 멀리 사방을 조망할 수는 없었으며 가까운 산과 큰 시냇물은 대략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남해를 뚜렷이 볼 수 없어 한라산 등 여러 섬을 역력히 지점하며 거센 바람이 물결을 헤치는 광경을 감상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이에 다시 전일에 오던 길을 되찾아 반야봉과 비로봉의 아래를 돌아 상원등의 동쪽으로 나와 삼일암(三日庵)의 월대(月臺)에 당도했다. 선바위가 심히 기이하였으며 그윽하고 상쾌한 풍경이 여러 암자 가운데에서 가장 특출하였는데 선사의 말에 ‘이 암자에서 삼일을 머무르면 도를 깨달을 수 있으므로 금탑(金塔. 사찰의 이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삼일암의 동쪽에 수십척 되는 바위가 있어 홀로 반공에 드높이 솟았으니, 세속에서 떠도는 전설에 의하면 그 가운데에 9급 상륜(相輪)을 간직한 때문에 사찰의 이름을 이에서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은적사(隱迹寺)는 또 금탑사의 동쪽에 있는데 정치 옹성(瓮城. 적벽의 동북방에 있음)과 마주 대했으며 샘이 바위 틈에서 나와 경인년의 가뭄에 이 산 가운데 샘이 모두 고갈되었으나 홀로 이 샘만은 도도히 흘러 마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석문사(石門寺)는 금탑사의 서쪽 80보쯤에 있는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문주와 같이 쌍으로 서 있어 들고 날 때에 이를 경유하였다.금석사(錦石寺)는 석문사의 동남방에 있으니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른 바 ‘고개의 흰 구름 산문을 함봉했구나(門仗嶺雲封)’라는 구절은 곧 이곳을 지적한 것이며, 암자의 뒤에는 수십조의 기이한 바위가 수북하게 솟아있었고 그 아래에는 샘이 있는데 지극히 차가왔다. 대자사(大慈寺)의 폐지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는데 옛 우물이 심히 맑아 이끼가 끼지 않았으며 뜰 위에는 산단화(山丹花)가 바야흐로 활짝 피어있었다. 길가에 석실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만 했으니 세속 사람들이 소은굴(小隱窟)이라고 칭호하였다.이날은 내가 상봉에서 이미 술에 만취하여 조용히 살펴보지 못하고 명승을 유람함에 있어 말을 달려 비단을 구경하듯 눈에 언뜻 스쳐지내어 한갓 그 휘황하고 찬란한 풍경만 보았을 뿐이요, 그 문채와 격조의 현묘함은 알지 못하였다. 청운 높은 선비의 뒤를 추종하여 그 대략만을 이와 같이 기록했으니 가을을 기다려 다시 행장을 수습하여 오늘의 미진함을 보상할 예정이다. 금석사를 경유하여 산기슭을 돌아 동쪽으로 나온 즉 여기가 곧 규봉암(圭峰庵)이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괴석은 비단을 오려내어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石形裁錦出峰勢琢圭成)’라는 구절은 참으로 허언이 아니었다. 바위의 기괴한 것은 입석암과 더불어 비등한데 그 위치의 훤칠한 것과 형상의 특출함은 또한 입석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소상함은 권공 극화(權公 克和)의 기문에 나와있어 ‘여지승람’에 실렸으므로 여기에 생략하는 바이며,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신라시대 김생(金生)이 이 암자의 편액 삼대자(三大字)를 써서 걸었는데 그 후에 도둑이 훔쳐갔다고 했다. 광석대(廣石臺)는 암자의 서쪽에 있는데 바위 모습이 깎은 듯 하였으며 넓고 평탄하여 둘러 앉으면 수십명을 용납할 수 있었다. 당초에는 서남방의 귀퉁이가 약간 낮았던 것을 승도들이 여러 인부를 데리고 낮은 부분을 들어올려 큰 바위로 밑을 괴어 반듯하게 바로잡았다 하니 그 어마어마한 작업을 살펴보건대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닌 듯하였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은 광석대의 정남에 있는데 그 높이가 수림의 위에 나와 창연히 솟아있으니, 광석대의 장엄한 기세를 더욱 도와주었다. 열 아름이나 되는 늙은 고목이 광석대 위에 비스듬이 서있어 나뭇잎이 우거지고 그늘이 두터웠으니 서늘한 바람이 스스로 이르러 비록 삼복 더위에 있어서도 단삼(單衫)을 입은 자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천관, 팔전, 조계, 모후의 여러 산이 모두 눈 아래에 나열되었으니 규봉암의 승경이 이미 서석산에 있는 여러 사찰의 으뜸이 되었고, 이 광석대의 풍치는 또 규봉암에 속한 십대의 위에 뛰어났다. 비록 남중의 제일경이라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최학사(崔學士)와 같은 자가 난(鸞)과 학을 타고 이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며 진(晉)나라의 척계(?溪)와 협산사(峽山寺)의 홍류시(紅流詩)와 같이 자암(紫巖. 규봉의 별명)의 정상에서 한번 취필(醉筆)을 휘두를 수 없는 것이 애석하였다. 광석대의 서쪽에 바위가 길을 막아 문설주와 비슷했는데 그곳을 넘어 조금 걸어가니 곧 문수암(文殊庵)이었다. 암자의 동쪽에 오목하게 파인 바위가 있고 그 중앙에서는 샘이 솟아 나왔으며 그 둘레에는 석창포(石菖蒲)가 수북하게 자라났는데, 앞에는 두어 길 높이 되는 석대가 있었고 너비도 높이와 비등하였다. 광석대에서 서북방으로 접어들어 비탈길을 몇 굽이 지나 자월암(慈月庵)에 당도했는데 암자의 동쪽에는 풍혈대(風穴臺)가 있었고 바위 밑에 구멍이 있었으니 풀을 그 구멍에 스치면 약간 팔랑거림을 느꼈다. 암자의 서쪽에 병풍같은 바위가 서 있었고 별달리 땅에 돌을 깔아 그 위에 늙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니, 이는 곧 장추대(藏秋臺)이며 그 아래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매 모골이 송연하였다. 장추대에서 서쪽으로 행하여 비탈길을 따라 남으로 접어드니 오솔길의 너비가 일척을 넘지 않았고 길이 패인 곳에는 돌로 덮여 있었다. 발로 밟으니 딸가닥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래로 절벽을 굽어보매 칠흑 같이 컴컴하여 비록 백혼무인과 같이 탐험에 능숙한 자라도 또한 다리를 꼬눌 수 없을 것이다. 비탈길이 다하고 오목한 곳에 당도했다. 원숭이 같이 나무를 더위잡고 올라가니, 그 남쪽에 은신대(隱身臺)가 있었는데 옆에는 오종종한 소나무 4~5주와 철쭉 두어 떨기가 모두 거꾸로 서 있었다. 은신대의 서쪽에는 바둑판같이 네모진 바위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좌선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 북쪽에는 청학대(靑鶴臺), 법화대(法華臺) 등이 있었는데 도처에 바위 구멍이 뚫려 있어 배와 등을 땅에 대고 엉금엉금 기어 절정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손으로 땅을 짚고 팽조(彭祖)가 우물을 굽어보듯 하였다. 한식경 후에 다시 비탈길을 타고 내려와 밤에 선생을 모시고 문수암에서 유숙하였다.23일 정묘에 일기가 청명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흰 구름이 무럭무럭 올라와 일만 골짜기가 모두 평평하였고 일천 봉우리가 아득한 운해 가운데에 드러났다. 정히 만경 바다위에 파도는 고요한데 여러 섬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과 같았다. 조금 후에 흰 구름이 바람에 따라 몰려 들어와서 두 언덕을 분변할 수 없었으며 아침 햇발이 비치는 곳에 가닥가닥 가루와 같이 풍겨서 붉은 상서의 기운이 혹은 서리고 혹은 나부껴 경각 사이에 만 가지 형태로 변했다.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 때로는 평평하게 어렸네(橫雲時平凝)’라는 구절도 족히 그 기묘함을 형용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선생이 머리에 폭건(幅巾)을 두르고 난간 앞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며 이상히 여겨 절귀일수(絶句一首)를 지었다. 해가 서너발 올라오니 구름의 형세가 점점 엷어지다가 잠깐 사이에 홀연히 흩어져 환연히 홍몽(鴻?)이 열려 천지가 비로소 정해진 듯 하였으니 참으로 일대장관이었다. 선생이 광석대(廣石臺)로 자리를 옮길 것을 분부하고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시를 화답하게 했으며 시를 이루지 못하는 자는 벌주 일대백(一大白)을 마시기로 드디어 시령(詩令)을 내렸다. 서석산의 대략은 이미 매일 일기에 실렸은즉 더 논평할 것은 없을 듯한데 서봉사의 풍수동(風水洞)과 향적사(香積寺)의 고목과 불영암(佛影庵)의 기암과 보리암(菩提庵)의 석굴도 그 그윽한 풍경이 금석사(錦石寺) 등 여러 사찰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저것은 활달하고 이것은 아늑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날 선생이 장차 적벽에 유람하려 했으나 탐승의 겨를이 없어 산천초목으로 하여금 돌아보며 애완하는 영광을 입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갓 우리의 유감만 되겠는가? 또는 이 산의 불행일 것이다.광석대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니 여기가 송하대(送下臺)이며 이로부터 동으로 지향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영신동(靈神洞)에 다다른 즉 오솔길이 가느다란 선과 같이 굽이굽이 얽혀 있다. 참으로 동파(東坡)의 시에 이른바 ‘길은 산허리를 감아 삼백 굽이쳐 돌았구나(路轉山腰三百曲)’라는 구절은 이 같은 곳을 지적한 것이리라. 영신동으로부터 방석보(方石洑)에 당도한즉 그 사이의 마을은 모두 시냇물을 끼고 있었고 돌밭과 띠집의 풍경은 소슬하며 닭과 개는 손님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비록 무릉의 주진촌(朱陳村)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동구에서 나와 시냇물을 따라 남으로 거의 백보를 달리니 중첩한 봉우리가 벽적과 같았는데 늙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그 정상을 덮었으며 석벽이 마주 얽힌 사이로 한가닥 길이 겨우 통하여 주민들이 이 길을 경유하여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불천(長佛川)이 그 아래를 감돌아 깊은 연못을 이루어 밑을 측량할 수 없었으며 띠집과 흰 용마루가 푸른 수풀 밖으로 은은히 보였으니 완연히 일폭화경이었다. 그 마을의 이름이 몽교(夢橋)이니 명칭도 또한 아담하여 시의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시냇물을 격하여 동쪽을 바라본즉 푸른 석벽이 수백보를 연달아 채색병풍을 전개한 듯 했으며 그 위에 한 가닥 조그만 길이 있었는데, 이른바 노루목 고개였다.노루목을 넘어 남으로 접어들매 푸른 신나무와 늙은 소나무가 석벽에 비껴 그림자가 거꾸로 연못에 잠겨있다. 옛날 남장포(南張甫, 자는 彦紀)가 이곳을 지나다가 창랑이라 명칭하였다. 남령(藍嶺)과 장불(長佛) 두 시냇물이 이곳에서 합류되는데 장불천은 야공(冶工)이 쇠를 달구어 물에 담그는 때문에 때로는 물빛이 흐리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층암으로 된 언덕이 준급하게 연못 가운데로 뻗어 들어가 층계를 이루었고 한 떼의 큰 물고기가 바야흐로 그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을 뚫고 바위 위에 그림자가 일렁거리매 비단결같이 찬란했으며 은어 수십마리가 또한 활발하게 뛰고 놀았다. 내가 비록 물고기는 아니었으나 또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적벽에 당도하니 현령 신군 응항(縣令 申君 應亢)이 먼저 이르러 장막을 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이 보건대 옹성의 산은 순전히 바위로 되어 첩첩한 봉우리가 혹은 낮고 혹은 높아 형세가 마치 진마(陣馬)가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이 절벽이 된 듯 홀연히 높이 솟았다. 그리하여 수리를 뻗어내려 종횡으로 뒤얽힌 형세가 위로는 하늘에 연달았고 아래로는 티끌세상을 진압했으니, 만약 조화의 원기가 뭉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장엄할 수 있겠는가? 그 높은 곳은 대략 눈어림으로 거의 70장이 되며 창랑의 물이 굽이쳐 돌아 물빛이 검푸르니 마음에 두려워 굽어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이 적벽은 가운데가 텅 비어 속삭이는 말과 조그만 소리도 문득 메아리친다’고 하였다. 동복현감이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퉁소를 불게 하고 또 돌을 굴러 내리게 하니 서로 맞부딪혀 진동이 심하게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일렁거려 노기가 치솟으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적벽은 고을과 상거가 10여리 떨어져 땅과 궁벽지고 사람의 자취가 드물었다. 늑대와 호랑이가 들끓고 족제비와 박쥐가 우글거리니 화전민들만이 그 사이에서 구차히 살고 있었다. 장원(長源, 金濤의 자로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이 한번 세상을 떠난 후에 뒤를 이어 감상할 자가 없으니 풍류객의 자취가 끊어진지 거의 수백 년이 되었다. 최사인 신재(崔舍人 新齋, 이름은 山斗)가 중종 기묘사화에 걸려 이 고을로 정배되었는데, 하루는 손님과 동반하여 달천(達川)으로부터 물의 원류를 더듬어 이 명승을 찾아내는 데 이르렀다. 이에 남방 사람들이 비로소 적벽을 알게 되어 시인 묵객의 노는 자취가 잇달게 되었으니 임석천(林石川)이 명(銘)을 짓고 김하서가 시를 지어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아! 무창(武昌)의 적벽은 황강(黃岡) 만리 밖에 있어 남만지대(南蠻地帶)의 장연(?烟)이 자욱한 곳이었으나 다행히 소동파의 전후 적벽부(前後赤壁賦)를 힘입어 마침내 천추에 명성을 떨쳤으니, 시운은 통달하고 비색함이 있으며 지리도 밝고 어둠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적벽의 동쪽에 오봉사(五峰寺)가 있는데 선생의 수종자에 희경(希慶)이라는 자가 있어서 시를 짓는데 조예가 있어 명구가 많았다. 오후에 동복현감과 작별하고 참현(岾峴)을 넘어 이참(耳岾)을 지나니 시내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는 마을 사람 정필(鄭弼)이 세웠고 민응소(閔應韶. 이름은 德鳳)가 수령으로 있을 때에 이구암(李龜巖, 이름은 楨)과 더불어 감상했는데 지금도 시판이 벽상에 걸려있다고 하였다.이날 찰방은 용무가 있어 동복으로 향하고 해가 저물어 창랑의 유정(柳亭, 진사 丁?壽의 별장)과 무염(無鹽)의 석탄(石灘)을 관상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이번 유람길의 한 가지 결흠이었다.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소쇄원에 투숙했다. 이는 양산인의 옛 농장이었다. 시냇물이 정사의 동쪽으로부터 흘러왔는데 담장을 뚫고 끌어들여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뜰 아래로 감돌았으며 맑은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하였다. 그 위에는 조그만 다리가 놓여 있었고 다리 아래에는 바위가 오목하게 패여 조담(槽潭)이라고 이름했는데 그 물이 조그만 폭포가 되어 쏟아내리니 그 소리가 영롱하여 거문고를 울리는 듯 하였다. 조담의 위에는 노송이 굽어서 일산을 편 듯 연못을 걸쳐 비껴있었고 조그만 폭포의 서쪽에는 아담한 서재가 있었으니 완연히 화방(畵舫)과 비슷하였다. 그 남쪽에는 돌을 높게 쌓아 조그만 정자를 세웠는데 형상이 일산과 같았으며 처마 앞에는 벽오동이 서 있는데 고목이 되어가지고 반쯤 썩어 있었다. 정자 아래에는 조그만 연못을 파고 나무 홈통으로 시냇물을 이끌어 대었으며 연못의 서쪽에는 죽림이 있어 큰 대 백여 그루가 옥롱과 같이 서 있었다. 참으로 완상할 만하였다. 죽림의 서쪽에는 연지가 있는데 둘레를 돌로 쌓고 시냇물을 끌어들여 조그만 연못을 이루었다. 죽림 아래를 거쳐 연지의 북쪽을 지나니 또 물방아 한 채가 자리잡아 보이는 바가 소쇄하지 않음이 없었다. 김하서의 40영에 그 아름다운 풍치가 모두 그려져 있다. 주인 양군(梁子亭)이 선생을 위하여 간소한 연회를 베풀었다.이날 저녁에 비로소 식영정에 당도하였으니 곧 강숙(剛叔)의 별장이었다. 선생이 난간에 의지하여 한가로이 감상했으며 밤에는 서하당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질탕히 놀다가 흥이 다하매 자리를 파했으니, 이 또한 일시의 거룩한 일이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두 편액은 모두 박공(朴詠)의 글씨로서 정자는 팔분(八分)이요, 당은 전자(篆字)로 되어 있었다. 무릇 식영정과 서하당의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석천의 기문에 소상히 실려 20영과 8영 가운데에 섞여 나와 있으니 이제 어찌 새삼스레 말을 첨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당후에는 돌로 몇 계단을 쌓아 모란, 작약, 월계화, 일동, 철쭉 등을 심었는데 모두 특수한 품종으로서 번화하지 않고 청수하여 자연의 미를 갖추고 있었다. 서하당의 서북방에는 10여평 되는 연못이 있는데 4~5줄기의 백련이 심어져 있었고 대 홈통으로 샘물을 이끌어 뜰 아래를 거쳐 연못으로 끌어왔으며 연못의 남쪽에는 벽도(碧桃) 한 그루가 있었고 그 서쪽에는 금앵수(金櫻樹) 몇 그루가 있어 담장 위로 뻗어있었다.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날아갈 듯한 정자가 있었고 그 앞에는 큰 반석이 시냇물을 가로막았으며 아래에는 맑은 웅덩이가 있었다. 이는 곧 김사문(金斯文) 윤제(允悌)의 고택으로서 환벽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신영천(申靈川, 이름은 潛)이 쓴 글씨라고 했다.24일 무진 일기가 청명하였다. 아침에 창평현령 이공(李公, 이름은 孝?)이 찾아와 선생을 배알하고 인하여 서하당에서 연회를 열었다. 일원(一元)이 소쇄원으로부터 뒤에 이르러 대백으로서 몇 잔을 연거푸 기울였으며 술이 거나하게 취하매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여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판관이 최후에 일어나거늘 나와 강숙이 이를 만류하고 식영정에 올라가 다시 술자리를 열매 술잔이 오가며 환담과 해학이 벌어졌으니, 장자의 이른바 ‘불을 쪼이는 자는 아궁이를 다투고 관부에 있는 자는 자리를 다툰다’는 말이 과연 틀림없었다. 내가 만취하여 소나무 아래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나 보니, 이에 남가일몽이었다. 빈 산은 쓸쓸하고 소나무 소리는 그윽한데 우두커니 서서 허전한 느낌이 있었으며 상봉을 돌아보매 드높은 봉우리는 변함없이 푸르렀다. 명승에 유람한 일을 추상하건대 이미 옛 자취를 이루어 다시 알 수 없었다.이에 유람의 전말을 대략 서술하여 기행문을 삼았다. 다른 날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뵈올 연분이 없을 때에 이 기행문을 펼쳐본다면 바로 옆에서 선생의 음용(音容)을 받드는 듯할 것이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산이요, 만났다가 헤어지기 쉬운 것은 인생인데 60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올라 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금할 길이 있겠는가? 조만간 마땅히 죽장 망혜로 선생을 갈천의 고택으로 찾아가 뵈옵고 물러나와 여정(汝正) 등 제군으로 더불어 수송(愁送)의 높은 대를 더위잡고 지량의 붉은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 맑은 폭포수에 머리를 씻음으로서 내 지원을 모두 이루어볼까 하는 바이다. 선조 7년(1574)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長澤散人) 고경명(高敬命)은 기록하다.
    2018-08-01 | NO.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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