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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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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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진서원
    서구 송풍로 42(풍암동)벽진서원壁津書院은 선조 때의 문신인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의 영정과 문집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1999년에 준공한 운리사雲裏祠로 개원한 서원이다.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본관은 음성이며, 광주에서 사예司藝 박곤朴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조광조의 문인 유헌遊軒 정황丁潢(1512~1560)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향리에서 동지들과 개산향약을 정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하였다.그는 직언을 잘하는 선비로 당시 윤원형의 죄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선조가 즉위하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이 되었다. 종부시 주부에서 운봉현감이 되어 태조의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49세에 문과에 합격하고 전라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어 언관으로 대사헌을 논박하는 계문을 올려 이로 인하여 영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밀양도호부사가 되었는데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광주향교 교수가 되었다. 64세에 성균관 사예 겸 지제교에 부임하였다가 사임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김천일 의병과 고경명 의병을 출병케 하고, 자신은 군량 조달을 담당하였다. 또 계속해서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이루게 하였다. 권율의 추천으로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1602년(선조 35) 지방 유림들이 회재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벽진동에 사우를 짓고 1604년 벽진서원壁津書院이라 하였다. 1681년에 도승지에 증직되고, 1796년에 김덕령을 추향하면서 의열사義烈祠로 바뀌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이 되고, 영정은 1927년 운리영당雲裏影堂에 보존되었다. 1996년 운리영당이 도시개발로 훼철되자 다시 짓기 시작해 1999년에  운리사로 완공되었다. 현재 이곳은 홍살문을 세우는 등 2018년 6월에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 개원했다. 현재 규모는 경내 및 관리사 등이 674평이고 연건평은 77평이다. 사당과 본숭당 제각, 내삼문, 외삼문, 동문, 관리사 등이 있다.회재 문집 목판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18-05-24 | NO.6
  • 병천사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秉天祠는 지방 세력가로 알려진 지응현池應鉉(1868∼1957)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사당으로 충주 지씨들의 사우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해 전라도도원수를 지냈던 지용기(1330∼1392), 고려 명장 정지의 9대손인 정충신(1576∼1636), 서흥부사를 지냈던 지계최(?∼1636), 지용기의 8대손이자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인 지여해(1591∼1636)등 5명을 모시는 배향 공간이다. 지응현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뒤 선조들의 절의와 애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사당을 건립했다. 이 사당은 경내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가운데 강당인 존심당 1동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가운데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병천사는 다른 사당처럼 대대로 내려오던 마을에 있었다. 그 마을 이름은 심곡마을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전통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심곡마을도 도심 속 금호지구로 편입되어서다. 심곡마을로 불린 데는 이곳에 이현문李顯文이 1859년 건립한 심곡재心谷齋가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광주 부자로 소문 난 지응현이 이 마을에 사당을 짓기 시작해 1930년대에 마무리 할 무렵 심곡재가 금호동 564번지로 이전해 일신당日新堂과 함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자료에는 병천사가 1924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병천사는 여러 채의 건물로 이뤄져 있고, 그 가운데 위패를 모신 사당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병천사는 이 해에 완성, 그해부터 훗날 봉안될 인물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지응현의 사위인 서양화가 오지호의 막내딸인 오난이씨가 그려놓은 영정도 있다. 병천사에 모신 이들은 정몽주 지용기 정충신 지여해 지계최 등 5명이지만 지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배향되는 것은 병천사가 기본적으로 지응현에 의해 건립된 충주 지씨의 사당이라는 점 때문이다. 병천사는 ‘천리天理를 병집秉執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 뜻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모은다’는 의미이다. 사우는 위쪽에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역祠廟域과 아래쪽에 교육하는 강학역講學域을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본 형태를 갖추었다. 건립 초기의 입지형태는 문중 소유의 병천사산도秉天祠山圖에 있다고 한다. 앞뒤의 죽림竹林과 연못을 배경으로 신문神門 1동과 병천사 현전賢殿1동, 영당 1동, 존심당存心堂(강당) 1동, 동재東齋(숭인재) 1동, 서재西齋(집의재) 1동, 거경재居敬齋 1동이 배치됐다. 존심당 오른편에는 사우의 대문격인 광제문光霽門이 있다. 이처럼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병천사는 광주 도심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사당으로 충주지씨忠州池氏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비개방 사당으로 남았다. 수시 접근이 어려워 아쉬움이 남는다. 전통혼례식이나 달빛음악회 등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과 접촉면을 넓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2018-05-24 | NO.5
  • 봉산사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봉산사가 있었다.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었다고 해서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현와 고광선이 지낸 곳이다.주변 숲속에 읍궁암泣弓菴이 있다,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다. 국권회복을 획책하다가 슬픔 속에 가신 고종 임금을 몹시 흠모하며 큰 바위에 읍궁암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고종임금의 능묘로 삼아 조석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곡하기를 3년,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고광선은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이며 고박주高璞柱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복촌復村 출신이다. 1864년에 부모를 12세에 일찍 여의고 노사 기정진과 덕암 나도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봉산사鳳山祠는 650여명에 달한 고광선의 문인들이 고광선의 유풍을 추모하여 엄이재 옆에 영당을 건립하여 제향했던 곳이다. 1934년 그의 사후에 문인들과 후손들에 의해 1936년 영당으로 유지되었다. 1964년 향교 유림들의 논의로 봉산사鳳山祠로 이름을 고치고 그의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봉산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관리가 전혀 안되어 훼손되고 허물어져 결국은 2016년 여름 흔적도 없이 터만 남아 있다.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져 아쉬움만 남는다. 현재 봉산정사라 간판을 붙인 곳은 보살절로 운영되는 듯 해 보인다. 연등이 처마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의 행적은 <현와유고(弦窩遺稿)>에 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16권 8책으로 된 방대한 개인 문집인 석인본이다. 그의 시문은 1686편에 달한다. 문집은 서, 기, 비명, 행장, 찬, 발, 잡저 등으로 이루어졌다.권1에 시 165수, 권2·3에 서(書) 442편, 권4에 잡저 107편, 권5에 서(序) 99편, 권6·7에 기(記) 283편, 권8에 발(跋) 37편, 명(銘) 4편, 찬(贊) 5편, 사(辭) 5편, 혼서(婚書)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 비(碑) 57편, 권10·11에 묘갈명 109편, 권12에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에 행장 103편, 권16에 실적(實蹟) 26편, 전(傳) 14편, 부록으로 언행록(言行錄)·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2018-05-24 | NO.4
  • 학산사
    광주시 서구 서창동 1서구 서창동 불암마을 외진 곳에 있는 학산사鶴山祠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을 모시는 사우이다. 경내에는 학산사와 경의당敬義堂, 창렬문,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 사우는 정면 4칸의 측면 2칸으로 내실을 두고 쪽마루를 설치했다. 건립 때 경의당과 학산사의 현판은 전북 김제 출신인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이 썼다.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인 김세근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김일손의 무오사화 때문이다. 그의 방조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라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참살을 당했다. 김세근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연좌의 화를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서구 세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한다.김세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동 백마산 수련곡(속칭 수련골)에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창의한 추성회맹秋城會盟에 참가했다. 김덕령 큰형 김덕홍, 유팽노, 안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의 대열에 합세하여 영동과 황간에서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 요병 중 스승인 호서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해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고 있었다.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가서 부장部將으로 싸우던 중 와평臥坪에서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도 “지아비는 충忠에 죽고 지어미는 열烈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며 그를 따랐다. 선조는 1605년 김세근 의병장에게 병조참판,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그의 묘가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학산사를 건립하면서 창열문으로 바뀌었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는 학산사 동문간에 만취영당晩翠影堂이 있어 만취 김용희를 제향했다 한다.
    2018-05-24 | NO.3
  • 화담사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 화담사花潭祠는 하동 정씨 사당이다. 1776년(영조52)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우다. 화담사는 1458년 문절공 정수충鄭守忠(1401∼1469)에 대한 집을 지어 영정을 모시라는 왕의 교시가 내려졌고, 1478년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鄭和(1434∼1505)가 군분으로 이사,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만들면서 출발한다. 하동 정씨 집성촌이 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뒤 1776년 화담사 사우 건축을 발의했다. 1868년(고종5)에 있었던 서원철폐령 때 위기를 맞았으나 지붕을 덮어 은폐, 보존함으로써 철훼를 피할 수 있었다. 제례만을 중단했다가 1905년 광주향교의 발의로 복설復設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조선시대 때는 서원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사립학교처럼 2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묵은공 정희鄭熙(?∼1348)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그의 아들 문경공 정초鄭招(?∼1434).손자 문절공 정수충과 약포공 정오도鄭吾道(1647∼1736), 충장공 민제장閔濟章(?∼1728)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처음에는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었다. 1784년에 그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게 됐다. 1796년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민제장을, 1809년에는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그의 할아버지인 정희와 세종 때 학문 및 예술, 과학, 기술 등에 업적을 남기고 청렴했던 그의 아버지인 정초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905년 다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1906년 송시열의 제자로 충효가 뛰어났던 정오도의 위패를 추가하고,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지금의 틀을 갖추게 됐다.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화담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앞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洋洋門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廳之齋와 서재悅乎齋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2018-05-24 | NO.2
  • 황산사(黃山祠)
    황산사(黃山祠)는 광주시 남구 원산동에 송설정공(松雪亭公) 고영중(髙瑩中), 고경조(髙敬祖), 고성후(髙成厚) 등을 배향하고 있다. 제일(祭日) : 음(陰) 3월 3일1725년 경열사 초건. 1868년 훼철. 1957년 황산사로 재건. 황산사는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다. , 건립 경위를 보면 영조원년(1725)에 유림들이 고중영, 고경조 유풍을 추모하여 광주에 경열사를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광복후 1957년 현재의 위치에 사우를 중건하여 황산사라 부르게 되었으며 1960년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공기와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황산사에서 배향되고 있는 인물은 조선 중종 때 절신으로 이름난 송설정 고중영, 청백리 고경조, 임란공신 고성후 3부자와 함께 임난공신 청계 위덕의를 제향하고 있다.  고중영은 중종 35년(1540)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 갔다가 모함으로 진도로 귀향갔으며, 그의 아들 고경조는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목사에 이르렀다. 고성후는 경조의 아들로서 1583년 전중어사를 지냈으며 1592년 금마군수에 임명되어 권율의 휘하에서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이원 위덕의는 1573년 사마시에 합격 임진왜란 때 주부를 제수하여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진원현감을 지내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별세하였다.
    2018-10-21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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