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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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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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자계기적비
    광주시 북구 용전동 601-13(용전마을 입구)1981년이 갑자계기적비(甲子契紀蹟碑)는 朴來鎬 짓고 朴年在 쓰다.
    2018-11-13 | NO.237
  • 거오재양만용선생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 1986년據梧齋梁曼容先生神道碑는 박도빈(1828~1866)이 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는 오재 양공의 묘이다. 공의 7대손 찬영이 나의 선군자를 찾아 뵙고 비명을 부탁했었다. 선군자께서는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지금 찬영씨가 그의 장남 상기를 보내서 도빈에게 부탁했다. 도빈은 뜻이 계술에 있으니 어찌 감히 문장이 아니라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만용이요 자는 장경이다. 선조의 계통은 탐라에서 나왔고 증조 학포는 휘가 팽손인데 홍문과 교리로서 정암 조선생과 함께 기묘화를 당하고 나란히 죽수서원에 철향되었다. 조부 송천은 휘가 응정인데 대사성을 지내고 문장으로 일세를 복종시켰다. 고의 휘는 산축인데 율곡 이선생을 스승으로 받들고 경학에 전심하여 처사로 불리었다. 임진란 때 형 생원 산룡, 좌랑 산숙과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에 이르러 모부인 박씨를 모시고 창날을 피해 바다로 갔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서 나주 삼향포에서 순절했다. 효를 포상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비는 장흥 고씨인데 효열공 종후의 딸로서 부도를 지니고 서사에도 능했다. 정유년 부인은 바야흐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 가족과 함께 바다에 이르렀다가 계집종들이 구출하여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만력년간 무술(1598)년 3월 24일 공을 낳았다. 공이 5세 때 참새새끼를 얻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갑자기 죽어 버렸다. 공은 종이에 싸서 파묻고서 말하길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묻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죽었으니 이런 까닭에 묻는 것이다」라고 했다. 보는 사람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글을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웠고 시문을 짓는데 말이 곧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성품이 소탕하여 글 읽는 소리를 섬기지 않았는데 일찍이 외지스승인 수은 강항공에게 매를 맞아 피가 흐르고 종기가 생겼다. 그런데 구더기가 생기게 되도록 오히려 굴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공이 말하길 「글을 다독하면 소견이 좁아질까 두렵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오. 복종하고 다독하지 않으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며 장자를 속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강공이 또 썩은 새끼줄로 묶어서 깊은 못 위 누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두렵게 하고자 했는데 공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하루는 알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부인이 친히 그 종기를 씻어 주고 그날로 돌려보내자 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곧 자책하기를 「존사께 알리지도 않고 왔는데 또 자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사람인가?」하고선 즉시 스승의 집으로 갔다. 강공은 독려함이 지나치고 더욱 엄했는데 갖가지 방법으로 위협했다. 한 번은 옷을 벗겨서 더러운 연못 속에 집어넣으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으나 또한 날이 다 지나도록 굴복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면서 태연자약했다. 하루는 공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말했다. 「다독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공은 이로부터 공경하게 대하는 방책을 잠시도 거두지 않아서 여름에는 옷이 썩어 헐었다. 어떤 사람이 전후의 근면함과 게으름이 같지 않음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에는 뛰어난 기억력에만 의지했지만 지금은 곧 숙독하고 상세히 음미한 이후에야 궁리진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비로소 성동이 되어 문사가 크게 성취되었는데 강공이 그 문조를 몹시 칭찬하여 이르길 「등림의 큰 강물이 붓 적실 물 대기에 부족하네」라고 했다. 그의 자랑함이 이와 같았다. 청년이 되어 남곽 박동열공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경적에 침잠하고 성리를 탐색했다. 이때 혼조를 당하여 나설 뜻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 때문에 억지로 과거시험에 나갔다. 인조가 개옥한 이듬해 역적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가 파천했다. 공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곧 적을 칠 의거를 부르짖고 병량을 모을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계획을 그쳤다. 이로부터 과거시험에 나가지 않고 날마다 주자서를 강론했다. 정묘년 금나라 오랑캐가 평산에 이르자 호소사 사계 김 선생이 양호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공은 다시 거병하여 그 모임에 응했다. 그러나 조정과 오랑캐가 화해하여 곧 돌아갔다. 숭정 계유년 생원과 진사에 장원 합격하고 또 문과에 뽑혀서 그날로 한림에 배수되었다. 갑술년 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에 배수되었다. 이때 적신 김자점이 전권으로 징병하니 여러 관료들이 두려워서 위축되었다. 공이 홀로 말하여 죄줄 것을 청했다. 양파 정태화공이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 직신이 있구나」하였다. 얼마 안 있어 호당에 추천되고 예문관 대교와 봉교로 승진되고 예조좌랑과 겸설서로 임명되었다. 한림과 주서로서 날마다 경광을 모시면서 진퇴가 민첩하고 기주가 물 흐르는 듯했다. 상께서 그 고아한 용의를 사랑하여 그 손을 잡고 그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오랑캐 사신이 와서 인정전에서 불러 보았는데 따라온 오랑캐들이 난입함이 많았다. 공은 몹시 분노하여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했는데, 그 상소에 「호전은 작은 조정에 차마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병자년 겨울 오랑캐가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공은 호남의 수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서로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구획을 이미 정했는데 이때 널리 알리는 교서가 남한산성이 포위된 가운데서 왔다. 공은 그것을 읽고 통곡하다 실성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격문을 쓰고 여러 의사들과 여산에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모부인과 이별하니, 모부인이 말하길 「힘껏 하여라.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정축년 시산에 도착하여 시를 쓰기를 「마땅히 남한산성의 달은 고신의 한 조각 충성을 비추리라」고 했다. 그것은 공의 스스로의 맹서였다. 청주에 이르니 적병이 점점 가까이 왔다. 공은 몇 명의 기병을 따라 적을 살폈다. 적은 산골짜기에 모여 소를 잡아서 먹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쳐서 9명을 목 베고 그 적의 물자들을 취했다. 바야흐로 군사를 옮겨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의사들과 함께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즉시 달려가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항소하여 대의를 밝혔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표창했다. 이로부터 물러나서 선롱을 지키면서 세상일에 뜻을 끊어 버렸다. 항상 주자의 내수외양의 의리를 강론함으로써 충분의 마음을 드러냈다. 말이 병자, 정축의 일에 이르면 칼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언에 배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무인년 전남도사에 배수되어 숙명 하고서는 곧 돌아왔다. 조정에서 재학으로서 전량으로 추천했다. 이때 대각에서 원망을 품고 무고하는 상소가 있어 연서찰방으로 강등하여 제수했다. 기묘년 흥양현을 맡아서 모든 일을 맑게 다스리니 이민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사년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윈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계미년 홍문관 수찬에 배수되고 갑신년 거듭 배수된 후 정언에 배수되었다. 그러나 연이어 나가지 않았다. 또 부수찬에 배수되어 여러 번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한 차례 사례드린 후 곧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정언에 배수되었는데 이 해에 명나라의 운명이 끝나고 청인이 연경에 들어와 점거했다. 공은 명나라가 임진년 두 차례 군대를 보내 준 은혜와 정축년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를 설욕할 것을 말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연경 가는 사신을 전송하며 「의관과 문물이 모두 새로 보는 것이고 성곽과 우정도 옛날과 다르다 하는데 만약 황금대 아래 길을 지나거든 나를 위해 모름지기 여러 군신들에게 위문해 주시오」라는 시구절을 썼다. 을유년 교리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때 척화제신의 무리가 조정을 떠나감이 많아서 성지가 엄절하여 끝내 교체되어 돌아올 수 없었다. 수찬에 배수되고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는데 회곡 조한영공의 삭직 사건에 상소하여 구하려다 뜻에 거슬려서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그리고 다시 수찬과 시강원 보덕에 차례로 배수되었다. 병술년 여러 번 집의, 부수찬, 부교리, 부응교, 응교, 사복시정에 배수되고 영국원종공신 이등 제이로 녹훈되고 여러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무자년 천재가 거듭 이르러 인정이 흉흉하고 소란스러웠다. 공은 사간으로서 소를 올려 궁궐을 규탄했는데 말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나주 옛집으로 돌아와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 기축년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이 즉위하여 부수찬을 배수했다. 그런데 대각에서 소를 올려 국애사에 오지 못한 것을 언급하여 파직되었다. 한때의 명공들이 많은 소를 올려 구원하였다. 경인년 청풍군수에 배수되었다. 관용에 관련하여 민폐를 끼친 사람은 모두 견책하고 파면했다. 그리고 곳간을 헐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묘년 8월 26일 관사에서 고종하니 향년 54세였다. 공은 풍자가 영위하고 기량이 굉박했으며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서 흠양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퇴연하게 스스로 영욕에 굴신하지 않고 처신이 여유로웠다. 대개 남의 착한 점을 좋아하고 나쁜 점을 치지 않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갑자, 정묘의 난에 포의로서 창의하였으나 미처 어려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곧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라의 다행이었다. 그러나 공의 충성은 이미 병자년 난리에서 드러났으니 바야흐로 수백의 오합지졸로써 수백만의 사나운 올빼미 같은 적을 당하여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갔는데 갑자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계책을 쓰지 못했으나 그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대절에 임했을 때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이 또한 이미 환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금에 있어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궁궐의 신하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곧 통곡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의리를 지키고 강학을 자정의 요체로 삼았다. 비록 은륜이 여러 번 내려와서 끝내 열심히 직책을 받들게 되었지만 그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마음은 시종 한결같았다. 시남 유계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연에 만약 양학사를 얻어온다면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공도 「장경은 지절이 있으니 그가 기꺼이 출사하겠는가?」하였다. 그로 인해 유공을 시켜 출사의 의리로써 타이르게 했다. 대개 공을 알아 준 사람은 김, 유 두 분인데 공의 일어남은 또한 도량과 의리가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혹 병자, 정축년 후의 관함을 척화신의 허물로 여겨 격론을 하였다. 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고 배필은 광주 이씨 현감 태남의 딸이며 우의정 인손의 후손이고, 문화 유렴의 외손이다. 순의단장하고 부도가 갖춰짐이 지극했다. 묘소는 나주 장본면 서쪽 기슭 계좌이다.공은 처음엔 동복 대원산에 묻혔다가 나중에 부인 묘 아래 계좌에 옮겨 묻혔다. 2남 4녀가 있는데 장남 화남은 요절했다. 차남 세남은 참봉으로 종사를 받들었고 장녀는 송지하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최거옹에게 시집가고 3녀는 군수 이정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진사 임치에게 시집갔다. 화남에게는 딸 한 명이 있는데 이분에게 시집갔고 세남의 아들은 극가와 대가이고 송지하의 아들은 기재, 기창, 기백이다. 최거옹은 아들이 여일이고 장녀는 윤유 동추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노주에게 시집갔다. 이정룡의 아들 오는 부사이고, 택은 생원 문과로 참판이었고, 협은 진사, 집은 문과로 감사였고, 딸은 박태정에게 시집갔다. 임치의 아들은 규와 예와 기이고 딸은 참봉 윤시교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현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에 다음과 같이 쓴다.사람을 보는 데는 술이 있으니출처와 사생이어렵고 쉬울 때 이 생을 저울질하여 처함에 쉬운데로 나아가면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렵고시대의 조처를 삼가 생각하고사는 바에 오묘한 뜻을 밝혀서나가야 할 때 나가고마땅히 살아야 할 때 사니누가 그러하였던가?오재선생은충문에서 빼어나와사는 바를 더럽히지 않고어린 시절의 우뚝함을평생 지켜 이루었네.간혹 시대적 처신에 있어스스로 생을 기약하지 않았네마땅히 이 명을 거울삼을지어다.모든 후생들이여.
    2018-12-02 | NO.236
  • 겸재김령김공유허비
    광주시 북구 신룡동 62-26(복룡마을 입구)1969년이 겸재김령김공유허비(謙齋金寧金公遺墟碑)는 盧文永 짓고 金鎭哲 쓰다.
    2018-11-13 | NO.235
  • 경렬사복원기실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 경렬사 경렬사복원기실비는 1984년 11월에 하동정씨경렬공파종회에서 세웠다.  정지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인 1381년부터 1386년까지 해도원수와 해도도원수 등 6번의 수군 최고 지휘관을 지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 해군의 최초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당시 명장으로 활약한 이성계와의 나이 차이는 정지장군이 12살 아래고, 최영과는 32살 아래이며, 당시 최영이 도통사를 지낼 때 이성계는 육군을, 정지는 수군을 지휘하였다. 정지장군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최초로 수군 창설과 전함 건조 상소를 올렸으며, 전함에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장착하였다. 그가 왜구와의 접전에 대승을 거둔 주요 전적은 1378년 그의 나이 32세 때의 미라사대첩(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마전리)과 1383년 5월(우왕 9년) 남해 관음포대첩이다.   정지장군은 나주 죽곡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하동이며 시호가 경렬(景烈)이다. 19세에 사마장원,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중랑장을 거쳐 전라도 안무사가 되어 왜구 토벌과 수군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전라도 순문사, 해도원수(海道元帥)를 역임하였고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를 지냈다. 장군은 24번의 전투를 치루면서 대부분 승전하였고, 임금으로부터 11번의 포상을 받았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렬사는 공민왕 때 전라, 경상 양도에 걸쳐 왜구를 격퇴시킨 정지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는 최초로 수군을 창설하고 전함을 건조하자는 상소를 올렸던 바다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경렬사는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한 분토마을 뒷산에 있다. 군왕봉 자락 아래의 양지바른 곳이다.
    2018-06-11 | NO.234
  • 경렬사유허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1893년이 경렬사유허비(景烈祠遺墟碑)는 망월동에 있는 경렬사에 있다. 사당에는 고려 말의 무신 정지(鄭地)장군을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안에 1893년 행주인 奇宇萬  선생이 쓴 경렬사유허비가  옛 사지에서 1979년 경열사 경내로 이건해 자리하고 있다.
    2018-06-11 | NO.233
  • 경은유공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1960년이 경은유공효행비耕隱柳公孝行碑는 동호교 옆 신촌마을 입구에 유인옥(柳寅玉, 1850~1919)의 효행을 기록한 비이다. 경자년 정월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정종원이 편찬하고 나승만이 글을 썼다.광산구 덕림동 산 37-2 수성마을 덕림사 德林祠에 일당(逸堂) 유절(柳節, 1517~1580)과 그의 둘째 아들 농포(弄圃) 유희달(柳希達),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유시필(柳時必),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유인옥(柳寅玉) 등을 배향하고 있다. 자 학선(學善). 호 경은(耕隱). 서산 자미(西山 自漏)의 I5대손이요, 롱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춘영(春永)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용영(龍永)이다. 철종(哲宗) 원년 庚成 7월 23일 광산군 본량면 동호리 금호(光山郡 本良面 東湖里 琴湖)에서 태어나 겨우 4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 성장 하였다. 일찍 서당(書堂)에 다니면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을 읽었는데 효우(孝友)에 대한 글귀가 나오면 반드시 심중에 새기고 말하기를 『옛 사람은 효제(孝悌)를 인(仁)의 근본으로 삼았다. 만약 효제를 먼저 힘쓰지 않으면 마침내 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실천하지 않아서 되겠는가?』하였다. 이렇듣 효우를 천성으로 타고나 모친을 섬기고, 형들을 받듬에 효성과 우애가 독실함으로 향당에서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종가(宗家)로 출계(出系)하였는데 가세가 본래 빈한하여 부모 공양이 어려운지라 글공부를 폐하고, 몸소 농사 지어 자신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지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그리고 조석으로 거처를 살피어 문안을 드리고 집을 나가거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아뢰고 낮을 보이며, 뜻을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고종(高宗) 13년 丙子(1876) 3월, 출행중 정읍(井邑)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놀래어 땀이 흐르는지라, 이상히 여기고 밤 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령(蘆嶺)을 넘는데 범 한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여 새벽녘에 집에 당도하니 부친께서 병환이 위독하여 사경(死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의 회귀(回歸)를 이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공의 효성을 산 신령이 강복함이라.』하였다. 급히 의원을 모셔다가 진찰한 후 약을 다려 드리고 한편 하늘에 기도하여 자신을 대신해 주도록 간절히 빌었으나 환후(患候)가 더욱 위독하므로 자기의 손가락을 깨어 피를 흘려 드리니 4일을 연명하고 드디어 운명하시었다. 공께서 망극의 슬픔을 다하고 장례를 모신 후 궤전(饋奠)의 절차를 예제에 쫓아 3년을 하루 같이 행하고, 기일에는 초종(初終)과 같이 슬픔을 다함은 물론 촛불을 밝히고 날을 새우면서 살아 계시는것 같이 지성을 다 하였다. 31년 甲午(1894)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사설(邪說)이 횡행하고 인심이 흉흉하거늘 공께서 출입을 금하고 자정(自靖)하여 자질들을 경계하고 이웃을 회유하니 온 마을이 그에 힘입어 안정하였다. 己未 4월 6일 향년 70으로 졸하시니 본량면 동호리 후록 수영동 선영 을좌(本炎面 東湖里 後麓 水永洞 先瑩 乙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광산정씨(光山鄭氏)는 류(?)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갖추어 구고(舅姑)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부군(夫君)을 받들어 공경을 다하였으며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홍렬(洪烈)이요, 따님은 금성나상운(錦城羅尙運) ? 수성최작현(隋城崔灼鉉)에게 출가하였다. 향당에서 공의 효행을 기리어 庚子(1960) 3월에 공께서 생장하신 금호(琴湖)마을 앞에 효행비 (孝行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오천정종원(烏川鄭琮源)이 지었다. 이로부터 유림(儒林)의 공론이 일어나 호남(湖商) 각 향교(鄕校)의 천장(薦狀)이 있어 乙巳(1965) 9월에 광산 덕림사(光山 德林祠)에 추배(追配)하였다. 공의 묘갈명은 술암 송재성(述菴 宋在晟)이 지었다. 자손이 본량면 덕림리(本良面 德林里)에 살고 있다. ※ 孝行碑銘, 德林祠誌 (비문 정리중)耕隱柳公孝行碑蔭記孝爲百行之源也子識之所當行而世敎之所先務也然?古令而能之者幾人乎志體供養父母安之宗族鄕黨稱之而爲稔慕者其惟耕隱柳公諱寅玉字學善其庶幾乎公以 哲廟庚戌二十三日生于高巖里弟賊性淳厚用心近仁自幼能知愛親而溫淸?省之節不敎而能及就學也至於孝友等文句沈潛反覆常以愉婉承順而未嘗有?其親意矣年至十人以父命出系于族叔春永后而事所后慈親如事所生甘旨之供靡不庸極而家貧躬耕以供子職負米百里極力營辨而嘗欲上京至于井邑忽心驚而星夜還程至族蘆嶺遇席同行及未明而還家親?危谷尤祈斗禱天以不怠至於本生孰喪如一人皆稱之以小大連之居喪也至于忌日則以致如枉可謂終身慕者也旣有鄕道剡薦而未蒙棹?之典可歎也己未四月六日卒葬于水永洞己坐原柳氏系出文化以高麗大承公諱車達爲鼻祖而圭組火?爀可謂三韓巨族矣入本朝而有諱自湄 端廟遜位葉官入山而世稱西山先生諱軒大司憲諡文簡定公之十五世祖也和錫命百興民春永高曾祖補諱也?咸平李氏李生考諱龍永?靈光丁氏齊光山鄭氏擧一男二女男洪烈女適羅尙運崔灼鉉余?之洪烈男枉薦在鎬嗣孫在萬克趾其義爰謀代石以圖不朽要余記實世好難慧累辭不獲而?述便槪以?後人之弓今式云爾庚子正月上元 鳥川 鄭琮源 謹撰金城 羅承萬 謹書
    2018-11-18 | NO.232
  • 계산유공인교효행비
    광주시 광산구 동림동 구룡마을1982년이 계산유공인교효행비(桂山柳公寅敎孝行碑)는 문화유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계산 유인교(桂山 柳寅敎)
    2018-12-01 | NO.231
  • 고경명-고씨삼강문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길 66(압촌동 산14)광주시 기념물 제12호. 1985년 2월 25일 지정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삼강문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다. 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있다. 보호구역 66㎡이며 장흥고씨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을 비롯하여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4년에 세운 것으로 1층, 3효, 2열, 1절로 표창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종후(從厚), 차남 인후(因厚), 손자 부금(傅金), 2열은 딸 노상룡(盧尙龍)의 처와 질부인 거후(居厚)의 처 광산정씨(光山鄭氏), 1절은 동생 경형(敬兄)이다.충렬공 제봉 고경명(1533-1592)은 압촌동에서 태어나 여러 관직을 거쳐 1501년 동래부사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곳에는 고경명을 비롯하여 진주성에서 전사한 효열공 종후, 금산에서 전사한 의열공 인후 등 효자 두 아들과 열녀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한 그의 딸 영광 유생 노상룡의 처와 고거후의 처로 그의 질부인 광산정씨,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 고부금과 절의로 죽은 동생 고경형 등 일가 7명이 기록되어 있다. 1595년에 고경명·고경형·고종후·고인후, 1597년에 노상룡의 처, 1655년고부금, 1844년광산정씨가 정려를 받았다.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뒤 이열로 정려 현판을 걸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을 세웠다.
    2018-06-17 | NO.230
  • 고광선-현와고선생묘비명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문을 써주었고 월호정의 찬기와 일산당의 중수기를 써주기도 했다.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농은정農隱亭 에 명문이 있었다 한다.
    2018-05-31 | NO.229
  •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2(광주노씨삼능단 입구)2003년이 고려광주군노공신도비(高麗光州君盧公神道碑)는 高光善 짓고 吳駿善(전면) 奇琮燮 쓰다.(추기) 盧在九 짓고 奇浩仲 쓰다. 광주노씨광주군파종회가 건립했다.1960년대 북구 삼각동에 세웠으나 2003년 비를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웠다.
    2018-11-13 | NO.228
  • 고려한공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 서봉마을1962년이 고려한공신도비(高麗韓公神道碑)는 청주한씨이다.
    2018-12-01 | NO.227
  • 고봉기대승묘역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452, 광곡마을빙월당에서 북쪽으로 약 200m 가파른 산 중복에 있는 기대승의 묘역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덕성군 기진(寄進)의 아들로 광산구 신룡동에서 출생하였고, 1558(명종 13년) 문과 급제후 선종때 大司諫(대사간)에 이르렀다. 고봉 선생은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선학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학설을 제시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퇴계 이황(李遑)과 사단칠청(四端七淸)을 주제로 하고 상호자기 학설을 주장한 서신왕복(書信往復)이 8년간 계속되어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 논쟁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퇴계의 학설은 4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 심리작용은 理에서 발동한 것이며 칠정일선,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감정작용은 기질에서 발동한다고 하였고, 고봉학설은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 공발설(共發說)을 역설하였다.월봉서원 뒤쪽으로 나있는 산길로 10여분을 오르면 그곳에 고봉묘역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산길을 중심으로 백우산 일대에는 고봉선생이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2018-12-02 | NO.226
  • 고부군수박원명묘지
    광주시 서구 서창동 506-7고부군수 박원명朴源明 묘지가 있다. 서창동 곽창기씨의 증언이다.당시 문제를 일으킨 조부갑이 체포 압송된 이후 용안현감이었던 박원명이 신임군수로 파견되어 이 전후사정을 잘 알고 설득하는 적절한 조치로 군중은 자진해산한 바 있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인 이용태의 무자비한 조치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박원명의 묘지가 있던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려 묘지가 방치된 상태이다.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묘는 아직 이장이 안된 상태이다.박원명은 충주박씨로 우리나라 최고 증권투자사 회장의 증조부로 알려져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2018-11-29 | NO.225
  • 고양현후부군한사기공묘표
    광주시 광산구경인년高陽縣侯府君韓謝奇公墓表는 청주한씨 한기흥 짓고 한섭 쓰다.한사기는 중국 고양현후이며 1257년 송정 서봉리에 출생, 원나라에 특사로 가서 수훈을 세워 세상을 떠난 후 고양현후에 추증됐다.
    2018-12-02 | NO.224
  • 고재정-긍헌거사고공유적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이 긍헌거사고공유적비는 남구 대촌동 석교마을에 있는 고재정 유적비로 오병익이 찬했다.
    2018-06-17 | NO.223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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