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45건
-
- 곽해 郭海
- 곽해 郭海의 처음이름은 桓이고 호는 乾止堂이다. 고려 중반의 대문호 進賢館大提學 文憲公 元振(八世)의 玄孫으로 공민왕조에 벼슬이 사온동정좌우보승중랑장으로 麗史備略에 이르기를, 공민왕조에 좌우보승랑장 郭海는 나이23세에 아버지의 벼슬을 세습하여 총관중랑장이 되었다. 신사 거란(哈丹)의 난에 조지린과 함께 영안도 용진에 나아가 싸움에 이기고 조정에 승첩을 고하니, 이 때 나이 25세였다.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金袍와 玉帶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너는 아직 장가가지 않았으니, 이제 혼인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고, 대대로 왕실에 힘을 다하기를 네가 짐에게 하는 것 같이하라.”하였다. 병신년 仲孚의 난에 명을 받아 도총사부령직을 제수 받았다. 조소생, 임원거, 조천주와 쌍성 화주 화북 九月山사이에 출전하여, 적을 크게 이기고, 西京에 계속 머물면서 12城鎭의 紅巾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군공으로 초수수사구밀직사주국삼중의 직책을 제수 받았다. 圃隱 鄭선생과 함께 국맥을 도모하다가, 圃隱이 태조의 龍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으니, 끝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광주의 소고룡방이라 불리는 곳에 숨어서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일편단심 舊國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정상 부근 건지(西北方을 등진 방향)에 집을 얽고 살았으며 乾之는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함이니 건지라 칭한 뜻을 알겠다. 매일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사모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는 항상 겸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망국의 대부이니 남의 자녀를 가르칠 수가 없다.” 하였다. 후인 고경지가 그 산을 이름하여 건지라 하였고, 그 마을을 산막이라 하였다. 건지는 공의 집이 산의 건지방향인 뜻이고 산막은 공이 와서 처음 산에 막을 지은 뜻을 가리킨다.(衣山爲幕) 그 산과 마을의 명칭이 모두 공의 유적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가히 공의 절행이 백세에 이르기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묘는 광산군 임곡면 산막동 건지산 갑좌이고, 배는 郡夫人제주고씨(司온直長 坪 女)로 합장되어 있으며 비갈과 床石이 있다. 후손 孟奎가 갈명하고 撰하였다. 아들은 思安, 思寧 형제분이며 큰딸은 李自寶(함풍인 정룡랑장)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은 이극명, 이극해 이며 둘째사위 함성군 林碩住(나주인)는 군기사정에 추증 되었고, 외손 임귀연은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入鄕顯祖 郭 海 先生 (1958년 戊戌普 수록 내용) 初諱桓號乾止堂 文憲公 元振 玄孫 恭愍王朝 官司온同正左右保勝中郞將 麗史備略曰 恭愍王朝 左右保勝郞將郭海年二十三 襲父爵爲摠管中郞將 辛巳 哈丹之亂 與趙之璘同進于永安道龍津 勝捷獻 於朝 時年二十五 王大奇之 賜金袍玉帶曰 汝未有室服 此歸娶生嘉子 世世致力於王室 如汝之於朕也 及丙申 仲孚之亂召命拜都摠司部領 趙小生林原巨趙天住 出戰于雙城和州和北 九月之間 擊走勝捷 仍留西京 掃蕩紅巾殘賊十二城鎭 以軍功超授守司寇密直使柱國三重 封海美君 麗運告訖 與圃隱鄭先生 圖扶國맥 圃隱立槿太祖龍興 遂懷不二之志 遯于光州之召古龍坊 依山爲幕而居之 一片丹心不忘舊國之恩 遇且구一堂于附近山上扁之以乾之乾之盖取諸乾乾不息 知其所止之義 日日登臨望北號慕 終身不懈 時有人來請學子 公常自謙而言曰 余亡國之大夫不可以訓 迪人子弟云 後人高景之名其山曰 乾止號其洞曰 山幕乾止稱其公之肯堂于山扁之以乾止之義 山幕指其公之來胥始依山爲幕之意 其山與洞之稱名 皆由於公之遺蹟而至今不切於此可以知公之節行 白世而不朽 墓 光山郡林谷面山幕洞乾止山甲座 配郡夫人濟州高氏父司온直長坪 墓合不부有碣床石 後孫孟奎撰碣銘 子思安見下 思寧見夜 女李自寶咸豊人 精勇郞將 子李克明李克諧 咸城君林碩住羅州人 贈軍器寺正 子林貴椽贈戶曹參議 十二世 諱 海의 長子, 思安은 孫 謙山 曾孫 益晋, 滋貞으로 이어지고 益晋은 中郞將公派의 派祖 諱 奉訓郞行禮賓侍主簿를 지낸 主簿公派의派祖 諱 儀를 낳고 滋貞은 星州목사를 지내고 牧使公派의 派祖 諱 保君을 낳았다. 次男 思寧은 孫 宜山 曾孫 茂貞으로 이어져서 參奉公派 派祖 諱 球 참봉벼슬을 지낸 敬隱公派 派祖 諱 琳 효행으로 계공랑 광릉참봉에 제수된 啓功郞公派 派祖 諱 三兄弟를 낳아 山幕洞 五代문중을 거느리게 되었다.
- 2020-08-11 | NO.45
-
- 김리 ⾦履 우왕 12년(1386) 9월∼우왕 13년(1387) 7월
- 김리 ⾦履 우왕 12년(1386) 9월∼우왕 13년(1387) 7월김리(?∼?)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그의 행적은 『고려사』 1392년 (공양왕 4) 5월 17일 기록에 보인다. 사헌부 겸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예조판서 김리(⾦履)는 젊어서부터 권세가에 붙어서 별다른 재행이 없는데도 외람되게 관작을 받아 육부(六部)까지 이르렀습니다. 모두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진심으로 힘을 다해서 성은에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정몽주와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충량한 자들을 모함하여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여 국문하고 논죄 하여 후세에 감계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설장수와 김리를 파직 하여 전리(⽥⾥)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금성일기』 「병인년 1386년」에 “목사 김리가 9월에 도임하였다가 정묘(1387년) 7월에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 지』에는 “병인(1386년) 9월 도임, 정묘(1387년) 7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44
-
- 김원국
-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게 되었다. 이 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1906년 3월 원범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어 3백병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탈출,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여러 차례의 교전으로 일제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1908년 3월 영광 토산에서 패전, 불갑산으로 후퇴, 광주 어등산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2월 19일 무등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갔던 김원범이 1909년 2월 취조받던 중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발송,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에 취임하였다.일제가 의병 대토벌전을 펼치자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근거지로 광주.나주.능주.동복.창평.담양.장성.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나주 관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함평 오산면에서 일군과 접전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그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사지휘권을 곽진일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총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2018-05-28 | NO.43
-
- 김인연(金仁沇) -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옛 은거지가 큰 바다를 누르는 곳 / 舊隱壓滄海신선을 찾아 자줏빛 구름을 넘어갔구려 / 仙游凌紫煙지금까지도 강좌의 명망 있는 가문 / 至今江左望오직 연연산에 비석 세우기를 기다린다네 / 唯待勒燕然성을 나와 백 리쯤 되는 곳 / 出城百里地바다 곁 한 층의 누각 / 傍海一層樓어진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賢相今何處신선의 학을 타고 표연히 노닐리라 / 飄然笙鶴游이상은 이상(二相) 김인연(金仁沇)의 청암장(靑嵒莊)에 대해 쓴 시이다.강좌는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진(晉)나라가 중원을 외적에게 빼앗기고 강좌 지역에 와서 동진(東晉)을 세웠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江左望〕으로는 왕씨(王氏)와 사씨(謝氏)가 있었다. 당시 공경(公卿) 장상(將相)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이 이 두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김인연(金仁沇)의 가문을 광주(光州)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칭송한 것이다.김인연(金仁沇) : 대본에는 ‘金仁衍’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의 문신 ‘김인연(金仁沇)’으로 보인다. 김인연은 화평부(化平府) 즉 광주(光州) 출신으로, 밀직사로 있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왕의 환국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왕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밀직사와 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숙왕이 죽은 뒤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청원하였다. 충혜왕 복위 시에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 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2022-05-03 | NO.42
-
- 김종연 ⾦宗衍 우왕 9년(1383) 1월 16일∼우왕 10년(1384) 7월
- 김종연 ⾦宗衍 우왕 9년(1383) 1월 16일∼우왕 10년(1384) 7월 [1차]김종연(?∼1390)의 본관은 광산(光⼭)이다. 김정(⾦精)의 아들이다. 김정은 신돈의 암살을 도모하다 처형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된 뒤에야 벼슬을 시작하였다. 1388년 전라도부원수, 전라도도절제사, 1389년 전라도원수를 역임하면서 전라도 지방의 왜구를 격퇴하였다.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에도 참전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고려인 남녀 100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1390년 12월 이성계 제거 모의사건으로 적발되어 심문 중 옥사하였다. 『금성일기』 「신유년 1381년」에 “목사 김종연이 1월 16일 도임, 갑자(1384년) 7월에 정무를 마치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고, 『금성읍지』에는 “계해(1383년) 5월 도임, 갑자(1384년) 7월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41
-
- 김종연 ⾦宗衍 창왕 1년(1389) 10월 12일∼공양왕 1년(1389) 12월 6일 [2차]
- 김종연 ⾦宗衍 창왕 1년(1389) 10월 12일∼공양왕 1년(1389) 12월 6일 [2차]1383년(우왕 9)에 이어 두 번째 부임이다. 『금성일기』 「기사년 1389년」에 “병마도절 제사 목사 김종연이 10월 12일 도임하였다가 12월 6일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기사(1389년) 10월 12일 도임, 동년 12월 6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40
-
- 김희선 ⾦希善 우왕 7년(1381) 4월 8일∼우왕 8년(1382) 2월 8일
- 김희선 ⾦希善 우왕 7년(1381) 4월 8일∼우왕 8년(1382) 2월 8일김희선(?∼1408)은 개국원종공신으로 본관은 광산(光⼭)이며, 아버지는 개국원종공신 김천리(⾦天理)이다. 전라도호조전서, 전라도안렴사, 노비변정도감 판사, 동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경상도도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1393년(태조 2)에 전라도 안렴사 때각도에 의학원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集成⽅)』, 『우마의방(⽜⾺ 醫⽅)』을 저술하였다. 1408년 2월 19일 별세하자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시호를 원정(元靖)이라 내려 주었다. 『금성일기』 「신유년 1381년」 “목사 봉익대부 김희선이 4 월 8일 도임하였다가 임술(1382년) 2월 8일에 정무를 마치고 갔다.”는 기록과『금성읍 지』에는 “신유(1381년) 4월 8일 도임, 임술(1382년) 2월 8일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9
-
- 동국여지지 제3권; 양원준(梁元俊) 광주 감무(光州監務
- 서리(胥吏)에서 시작하여 광주 감무(光州監務)가 되었다. 인종(仁宗) 때 누차 옮겨서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외직으로 나가 상주 부사(尙州副使)가 되었다가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하며 순박하고 솔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가 한결같았다. 생업을 일삼지 않고 접대나 선물을 받지 않아서 문 앞이 쓸쓸하였다.
- 2022-05-06 | NO.38
-
- 마천린 ⾺天麟 공양왕 13년(1364) 4월 20일∼공양왕 14년(1365) 2월 21일
- 마천린 ⾺天麟 공양왕 13년(1364) 4월 20일∼공양왕 14년(1365) 2월 21일마천린(?∼?)의 본관은 장흥(⾧興), 자는 운화(雲華), 호는 초암(草巖)이다. 한림원 학사, 예부시랑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자, 1362년 대호군으로서 수복하였다. 1363년 수복경성이등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왕과 태후를 수종한 공이 인정되어 호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작위에 봉해졌으며, 아들은 7품의 벼슬을 받았으며, 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 았다. 평장사, 삼중대광, 판삼사부사를 지내고, 회성군(會城君)에 봉해졌다. 『금성일기』 「갑진년 1364년」에, “신임 목사 마천린이 4월 10일 부임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을사년 1365년」에는 “목사 마천린이 2월 11일에 근무기한을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1364년(갑진) 4월 20일 부임하였고, 1365년(을사) 2 월 21일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忠)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7
-
- 문세봉 ⽂世鳳 우왕 1년(1375) 2월 11일∼우왕 1년(1375) 7월
- 문세봉 ⽂世鳳 우왕 1년(1375) 2월 11일∼우왕 1년(1375) 7월문세봉(?∼?)의 본관은 남평(南平), 아버지는 형조참판 문근(⽂瑾)이다. 문장과 도학이 뛰어났으며, 1375년 나주목사를 거쳐 판전농시사에 이르렀다. 『금성일기』 「을묘년 1375년」에는 “목사 문세봉이 2월 11일 도임하였다가 7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 다.”라고 기록되었고, 『금성읍지』에는 “신우 을묘(1375년) 2월 11일 부임하여 동년 7 월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강헌(康獻)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6
-
- 민적 閔頔 충렬왕 28년(1302, 임인)∼?
- 민적 閔頔 충렬왕 28년(1302, 임인)∼?민적(1270∼1336)의 본관은 여흥이며 자는 낙전(樂全)이다. 찬성사 민종유(閔宗儒)의 아들이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첨의주서, 비서랑을 거쳐 군부정랑, 판도정랑, 세자궁문랑 등을 거치었다. 1298년 비서소윤이 되었으나,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1302년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이후 전의부령, 선부의랑지제교, 평양윤을 거친 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순(⽂順)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5
-
- 박임종 朴林宗 공민왕 20년(1371) 9월 25일∼공민왕 22년(1373) 1월 1일
- 박임종 朴林宗 공민왕 20년(1371) 9월 25일∼공민왕 22년(1373) 1월 1일박임종(?∼1392)은 1380년 8월 남원 황산전투에 삼도도순찰사 이성계를 따라 우인열, 도길부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참여하여 승리하였으며, 1381년 2월에는 서경도순문사로 임명된다. 상주목사, 첨지중추부사, 문하평리를 역임하였다. 『금성일기』 「신해년 1371년」에는 “새 목사 박임종은 9월 25일 도임하여 계축(1373년) 1월 1일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 는 내용과 『금성읍지』에 “신해(1371년) 9월 25일에 부임, 계축 (1373년) 1월 1일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4
-
- 배인우 裵麟祐 우왕 1년(1375) 8월 29일∼우왕 2년(1376) 7월
- 배인우 裵麟祐 우왕 1년(1375) 8월 29일∼우왕 2년(1376) 7월배인우(?∼?)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금성읍지』와『금성 일기』에 “목사 배인우가 8월 29일 도임하였다가 병진(1376년) 7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3
-
- 백진 ⽩瑨 공민왕 12년(1374) 8월 9일∼우왕 원년(1374) 12월 26일
- 백진 ⽩瑨 공민왕 12년(1374) 8월 9일∼우왕 원년(1374) 12월 26일백진(?∼?)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금성일기』에 “목사 백진은 8월 9일 도임하였다가 12월 26일에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갔다.”라고 되어 있어 목사 재임기간과 고향이 제주인 것만 알 수 있다. 양촌 권근의 「예천 사불산 미륵암중창기」에도 “전 판사 백진(⽩瑨)이 1383년 어머니를 여의자 명복을 빌기 위해 1388년 미륵암 터에 새로 절을 지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육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의 「복장발원문」에 따르면 “1395년(태조 4년)에 영해부사 백진과 주민들의 시주로 조성하였다.”라 되어 있어 조선에서도 벼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금성읍지』에는 “갑인(1374) 8월 9일 부임하여 동년 12월 26일에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2
-
- 범세동(范世凍 : ?~?)
-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이성계가 이곳에 불을 지르자 고향 땅인 광산군 본량면 복만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태종은 선생을 대사성(국립대총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저술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살폈으며,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를 저술하여 동방의 인물들을 소개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들이라는 허왕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환단고기》에서는 범장(范樟) 혹은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가 〈북부여기〉를 썼다고 언급되어 있다.선생의 충절은 조선시대의 사육신이나 퇴계 이황 그리고 상촌 신흠의 칭송을 받으며 선비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광주 생룡동 복룡사(伏龍祠)에 모셔 매년 추모하고 있다.
- 2021-04-08 | NO.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