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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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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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근섭(奇近燮)
    기근섭(1884~1978)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의경(毅卿)이며 호는 문강(聞江)으로 (북구) 누문리에 살았다.부 : 奇東準 조 : 奇昌鉉 증조 : 奇文國 외조 : 長興 高濟斗 처부1 : 蔚山 金琮煥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05 | NO.16
  • 김남주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인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태생으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73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창작과비평》에 발표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문학 활동 이외에도 전남‧광주 지역에서 활발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석방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 이사를 맡으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사회참여 활동을 병행했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수감 후유증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운명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1974년 《창작과비평》에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1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 1992년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상, 1993년 제3회 윤상원상, 1994년 제4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시집으로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솔직히 말하자》(1989), 《사상의 거처》(1991),《이 좋은 세상에》(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이 있다. 시선집으로 《학살》(1988), 《사랑의 무기》(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1991), 《꽃 속에 피가 흐른다》(2004)으며, 번역서로 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1978),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88), 하이네 《아타 트롤》(1991)가 있다.
    2020-03-24 | NO.15
  • 김진현(金珍鉉)
    김진현(1878~1966)의 본관은 광산이며 서방면 반용리, 현재의 북구 풍향동에서 살았다. 자는 경유(景儒)이며 호는 운파(雲坡)이다. 김진현은 광산(光山) 김씨이며 자는 경유(景儒), 호는 운파(雲坡)며 광주(光州) 서방(瑞坊)에서 출생하여 송사(松沙)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그의 거처에서 율계栗溪 정기鄭琦(1879~1950)의 寄贈鄭栗溪, 경당 최윤환의 呈崔敬堂(二首), 이용희李熙容의 花卉賦謹呈李雙石丈, 윤종림 尹宗林의 擊壺放歌賦奉呈尹竹下, 고언주 高彦柱의 夢遊楓岳賦寄高春坡, 범형식의 宿范善仲書齋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다지마(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기도 했던 강직한 지식인이요 처사였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고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오늘날 장성 고산서원인 1924년 담대헌澹對軒의 중건 때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24 | NO.14
  • 김희수(金喜洙)
    김희수(1891~?)의 본관은 광산이다. 자는 창술(昌述)이고 호는 하은(荷隱)이다. 당시 서방면 하백동에 거주했는데 오늘날 북구 매곡동306 일대이다.부 : 金永德연파정과 하은정을 경영하였다. 현재도 있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澹對軒重建扶成錄』
    2020-02-24 | NO.13
  • 류인대(유인대)
    류인대柳寅大(1895~1976)의 자는 國南, 호는 月湖이며 左相公派 大丞公 33世손이다.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후예로 농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용강 년영(龍崗 年永)의 3자인데 출계하여 백부인 소파 석영(小坡 碩永)의 계자(系子)가 되었다.광산군 본량면 동호리에서 태어났는데 풍채가 근엄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일용 행사(日用 行事)가 확실하였다. 일찌기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 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선생께서 침중과묵(沈重寡黙)으로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생양 양정(生養兩庭)을 섬기되 뜻을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여러 누이들로 더불어 우애 또한 독신하였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 제반 절차를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여재지성(如在之誠)을 다하며 친척간에 돈목(敦睦)을 위주하였다.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586-1에 대동사(大東祠)를 창건하는데 재목(材木)을 거의 독담하였다. 말년에는 문중도유사(門中都有司)로서 제반 종사(宗事)에 헌신하였다. 또한 임종에 유언으로 사우(祠字) 밑에 강당 부지(講堂 敷池)를 희사하라 하시어 돌아가신 후 그 손자 재천(在泉)이 그 뜻을 받들어 종중에 희사하여 지금 강당이 서게 되었다.향년 82세로 졸하니 동호리 월륜동 선영하에 안장하였다.배위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참봉 종만(參奉 鎭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종렬(種烈)이요, 사위는 전주 이동혁(全州 李東奕) ․ 천안 전종태(天安 全鐘泰) ․ 전주 이현권(全州 李鉉權)이다. 손자는 재천(在泉) ․ 증석(增奭) ․ 재원(在苑) ․ 재응(在應)이다.1981년에 종중에서 공의 위선지성(爲先之誠)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돌을 다듬어 대동사 사우(祠字) 밖에 공의 공적비(功績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유현 장재철(惟玄 張在鐵)이 지었으며, 공의 묘갈명은 족질 동강 류한상(東江 柳漢相)이 지었다.
    2018-11-21 | NO.12
  • 류재천
    류재천(柳在千, 1914~? )의 자는 성천(誠千) 호는 송호(松湖), 광주 송정읍에서 출생했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후예로 만은공 도장(晩隱公 道長)의 16대 종손, 육유당 사경(六有堂 思敬)의 11대손,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된 서은 인열(瑞隱 仁烈)의 장자이다. 광주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음성박씨 필수(陰城朴氏 必修)의 따님이다. 장성하면서 유학의 깊은 뜻을 정숙(精熟)하여 수제(修齊)하는 도를 깨닫고 종중사(宗中事)를 관장하였다. 광산구 수정동에 율수재(聿修齋), 나주에 금산재(衾山齋)를 건축하고 전대(前代)에 이루지 못한 선영(先塋)에 석의(石儀)를 갖추는 한편 율수지(聿修誌)를 편간하였다. 문화류씨 종의(宗議)로 1981년 경앙재(景仰齋) 낙성과 더불어 그의 숭조사행(崇祖事行)을 비에 새겨 칭송했다. 대한시우회 전남도지회장으로 6년 동안 재임하면서 시조(時調)의 보급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노력하고 송정동에 황강정(黃江亭)을 축조하여 노인들의 소영자적(嘯詠自適)하는 곳으로 이용케하고, 각시군지회(各市部支會)를 육성강화했다.대회장(大會長)으로서 라구지회 주최 전국시조경창대회(全國時調競唱大會)를 마련하고 전남지부주최 전국경창대회 및 전국시조가사가곡경창대회(全國時調歌詞歌曲競唱大會)를 광주에 유치하여 대성황을 이룩하였다. 이리하여 광주지역에서 국창 1인 시조명인 7인이나 배출하였으며 전남문화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중앙본부총회(中央本部總會)에서 공로패(功勞牌)를 수여함과 동시에 본부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후 1985년 3월 전국시조명인급 인사들이 의합(議合)하여 총회에서 송호 류재천선생공적비(松湖柳在千先生功績碑)를 5월에 광주시 남구 봉선동 984에 건립했다. 비문은 대한시우회본 부회장 인간문화재 석암 정경태(石庵 鄭坰兌)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고광열(高光烈)이 썼다. 부인은 광산정씨 판서 응종(光山鄭氏 判書 應鐘)의 후손으로 덕재공 기림(德齋公 琪林)의 장녀로 슬하에 3남2녀로 상선(相善), 필선(弼善), 경선(景善)이며 큰 딸은 나주김씨 두연(羅州金氏 杜衍)에게 작은 딸은 광산 김씨 춘현(光山金氏 春鉉)에게 출가하였다.
    2020-03-27 | NO.11
  • 박선홍
    박선홍朴墡洪(1926~2017)은 근대도시 광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무등산을 연구하고 집필해 광주학의 기초를 다진 동시에 무등산의 산증인이다. 광주상공회의소 재건과 중흥에도 공로가 크다. 1952년부터 1993년 퇴직하기까지 서구 농성동의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사무국장과 상근부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 산업 및 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환경운동가로 전 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던 박선홍은 1955년 광주 최초의 산악회인 ‘전남산악회’를 결성한 그는 창립 멤버로서 무등산보호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1989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2001년 무등산공유화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누구보다 무등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2001년 무등산 공유화 운동은 10만여명이 참여해 약 16만평을 매입하고 이를 광주시에 기증하면서 무등산 난개발을 막았다. 50세이던 1976년 무등산의 유래.전설.경관을 정리한 인문지리지인 『무등산』 초판을 낸 뒤 2011년 증보판(7판)을 냈다. 무등산의 역사, 문화, 지리 등을 기록한 이 책은 직접 무등산을 돌면서 일일이 조사하고 찾아내 기록한 책으로 무등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무등산에 대한 남다른 박선홍의 사랑과 노력 덕분에 2013년 광주 무등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박선홍은 향토사학자로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에 대한 다각도의 기록을 『광주 100년』(1994년)에 담아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근 1세기에 이르는 광대한 광주의 이야기를 기혹했다. 근대 광주의 역사.문화.지리 등이 이 한권에 책에 수록된 것이다. 『광주 100년』은 이후 사료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어판이 출간되었다. 2012년 『무등산』과 『광주 100년』의 지적재산권을 광주문화재단에 기증했다.지역 최초로 보이스카우트를 창립, 청소년 사회교육과 리더십 지도에 힘썼고 광주민학회 이사장과 조선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에 헌신했다.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만들어 소외계층 돕기에도 앞장섰다. 대통령 표창, 국민포상, 철탑산업훈장, 광주시민대상, 대한민국 산악대상 환경상을 받았다.
    2018-05-28 | NO.10
  • 신태호
    성암晟巖 신태호申泰浩(1922~2012)는 광주상공회의소 9~12대 회장을 4번이나 연임하며 광주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경제인이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독립운동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신태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서 경제와 법률 공부를 한 뒤 귀국해 광주에서 평생을 기업인으로서 지역 경제부흥에 힘써 왔다.1952년 대광산업을 설립, 일본으로 우뭇가사리 수출하는 등 수출업에 뛰어들어 지역경제를 세웠으며 1968년에는 동화석유(현 소모석유)를 설립해 지역 에너지 산업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소모석유는 '정량공급·신속배달'을 모토로 창사 5년 만에 광주·전남 유류시장 점유율 55%를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소모석유는 소모홀딩스엔테크놀로지, 소모옵티칼, 성암산업, 소모농산 등을 거느린 소모그룹의 모태가 됐다.신태호는 1976년 광주상공회의소 제9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본촌산단, 송암산단 등의 조성에 힘써 ‘광주권 생산도시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생산도시운동을 앞장섰다. 그에 그치지 않고 하남산단 대기업 유치 등에도 적극 나서 지역산단 활성화에 박차를 기했으며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5년이란 긴 시간 동안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행했다. 고령 성암문화재단을 설립해 문화사업을 통한 지역 문화예술 부흥에 기여했으며 만대학원 광주 광덕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2018-05-29 | NO.9
  •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徐舒平)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은 독일 비스바덴 출신이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임종 후 미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간다. 미국에서 그녀는 간호학을 전공했고 개신교로 개종을 했다.서른둘이 되던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 의료인으로 지원해 한국에서 간호선교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군산 예수병원을 거쳐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에서 근무했다. 기독병원 전신인 제중병원 간호부장으로 부임하면서 광주와 인연이 되었다.광주에서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고아들이었다. 아름다운 동네였고 할 일이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조선말이 서툴렀고, 조선의 모든 풍속들이 낯설었다. 조선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름부터 바꾼다. 성은 서徐씨, 이름은 ‘천천히 할 서舒’, ‘평평할 평平’. 그녀가 붙인 새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이었다. 다소 급한 성격과 모난 성격을 다독이는 의미를 담았고, 자신의 본명 세핑의 발음을 살렸다.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의지했던 최흥종 목사의 생각을 보태준 이름이었다.양림동 길 언덕에서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은 서서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오갈 곳 없는 고아가 업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을 한 적 없는 처녀 선교사는 그렇게 양림동 아이들의 엄마로, 선생님으로 살았다.최흥종 목사가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수용소로 수시로 의료봉사를 나갔으며 헐벗은 한센인들을 만나면 옷과 밥을 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어린 거지나 여성 거지들을 보면 지나치질 못했다.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이는 일을 수시로 했다. 선교활동의 하나였던 금주 금연운동에 앞장서고, 금주동맹을 조직한 후 충장로 일대와 시장, 상가들을 돌면서 금주 금연의 의미를 설명했다. 마음을 바꾸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했던 것은 여성들의 처지였다. 여성들을 잡아다가 파는 인신매매 금지, 축첩금지, 성매매 금지 등을 주장하며 사창가에 묶여있는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애썼다.서서평의 당시 일기장에는 “한 달 동안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성한 사람이 없없다.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모두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서서평은 여성들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등으로 불리는 것에 분노했다. 왜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는가, 하며 일일이 새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었다.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한 번은 만주로 팔려가는 열아홉 살 처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고, 사창가에서 억류된 여성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사창가 여성들을 구해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도움으로 세운 ‘이일학교’로 불러 공부를 하게 했다.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매년 수많은 여성들을 교육의 장으로 끌어들였다.그녀에게는 자녀가 열네 명이나 있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 아이들을 자녀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과부 서른여덟 명을 집에 머물게 했다. 그녀가 제중병원에서 받는 급여는 대부분 이와 같이 고아와 여성들, 그리고 한센환자들을 위해 쓰여졌다.우리말에 자신이 붙자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로 간호교과서와 실용간호학, 간호위생법 등의 책을 저술하고 간호사업사와 같은 전문서 등의 번역에도 힘쓴다. 1923년 그녀는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 전신)의 결성을 주도한다. 초대회장이 되어서는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사 간호협회에 가입한다.고된 일에 쫓겨온 탓에 풍토병의 일종인 스프루병이 그녀를 덮친다. 면역력이 있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병이었건만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몸은 이겨내지를 못했다. 1934년 그녀는 눈을 감는다.
    2021-05-04 | NO.8
  • 오지호(吳之湖 ; 1905~1983)
    오지호(吳之湖 ; 1905~1983)는 화순 출신으로 인상주의 회화 양식을 우리 나라에 토착화시켜 구상화만을 고집하면서 독특한 회화세계를 보여준 우리 나라 현대 회화사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예술원종신회원이며, 국전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양화의 원로였던 오지호는 망국을 재촉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에 화순군 동복에서 오재영의 아들로 태어났다.오지호는 애국애족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미술에 대한 취미와 함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심을 가졌다. 그는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고영동의 지도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 뒤 고려미술회관 미술연구소에서 계속 공부하였다.그 후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후기인상파의 기법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산하를 한국적 색채감으로 담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28년에 신미술운동을 표방하고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미전에 대항하여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고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작품 활동을 펴나가자고 했다. 한때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광주로 돌아와 지산동 초실(草室)에 정착하여, 4·19혁명을 계기로 학원민주화에 앞장서다가 5·16군사정권 때에 조선대학교를 그만두고 야인으로 예술 활동과 한자교육 부활운동에 전념하였다.시에서는 오지호의 서양화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회화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전국규모의 ‘오지호미술상’을 시상해오고 있으며, 지산동의 생가인 초실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화단에서 소위 ‘남도화단’이라고 일컬어지는 화맥을 형성하였다. 「사과밭」, 「야생화」, 「금강산」등의 작품과 저서로는 1968년 「현대회화의 근본문제」, 「알파벳 문명의 종언」 등이 있다.광주시에서는 오지호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에서 무등파크호텔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호로라 명명하였다.
    2021-04-08 | NO.7
  • 유진벨(배유지, 裵裕祉)
    광주 수피아여고 내에 배유지기념예배당이 있다. 미국 남장로회의 헌금으로 지어진 예배당이다. 가장 많은 헌금을 낸 코넬리아 커티스 여사를 기념하여 커티스메모리얼홀이라 이름을 지었다. 1층은 살림집, 2층은 강당으로 이뤄졌다. 커티스메모리얼홀에서 배유지기념예배당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55년 선교사들의 뜻이었다. 예배당의 주인인 배유지, 본명 유진벨(Eugene Bell)은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였다. 1868년에 태어난 그는 켄터키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를 나와 1894년에 목사가 되었다.이후 부인과 남장로교 선교사 2진으로 임명되고 1897년에 전라도에 들어와 나주, 목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1년 임신 7개월이던 부인이 선교활동을 하다가 군산에서 숨을 거둔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유진벨은 미국으로 건너가고, 2년 뒤 마가렛트 벨과 혼인한 후 다시 목포로 돌아온다.목포로 돌아온 유진벨은 교육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서당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일본식 식민교육에도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펼쳤다. 1903년 목포 양동 목사관에서 ‘영흥서당’이라는 배움터를 연 것이 시작이었다. 영흥서당은 1905년에 영흥소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1907년에는 중등부까지 규모를 넓힌다. 학제도 개편을 해서 정부의 인가를 얻는다. 한편 목포 양동에는 선교사 부속건물을 이용한 정명여학교도 생겨난다. 목포에서 교육사업의 씨앗을 뿌리던 중에 광주에도 선교부가 설치된다. 유진벨은 1904년 광주로 옮겨와 광주선교의 책임을 맡는다. 광주교회를 운영하던 유진벨 목사는 교회 신도의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운다. 자신의 사택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주 작은 학교로 광주에서의 교육사업을 시작한다.1908년, 호남지역 여성교육의 산실이 되는 수피아여학교를 세운다. 1911년 미국 남장로회 신도인 스턴스 여사(Mrs. M. L. Sterns)가 세상을 떠난 여동생 제니 스피어(Jannie Speer)를 추모하기 위해 5천 달러를 기증했고, 이 헌금으로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수피아여학교 설립자인 유진벨 목사는 1914년에는 보통과 4년과 고등과 4년제로 정식인가를 받는다.수피아여학교 외에도 숭일학교를 설립했던 유진벨은 의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광주 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인 제중원(현 광주 기독병원)을 건립하고, 고통에 처해있던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유진벨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몇 차례 불행이 닥친다. 두 번 째 부인인 마가렛트 벨여사가 일제의 방화로 수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한 제암리 교회를 둘러보고 오던 중에 교통사고로 숨진 것이다.그는 잠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21년 유진벨은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와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으로 지역민들을 살피던 그는 1925년 9월, 뜻하지 않게 세상을 뜬다.유진벨의 유해는 양림동산에 먼저 묻힌 오웬 목사의 곁에 안장됐다.
    2021-05-04 | NO.6
  • 임방울(林芳蔚, 1905~1961)
    임방울(林芳蔚, 1905~1961)은 1905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나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어려서 울지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설과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해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협률사를 조직해 활동했던 당대의 국창 김창환이 외숙으로, 어려서부터 외사촌형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 박재실의 창극단에 들어가 무대에 섰으며, 박재실로부터 춘향가, 흥보가 등을 전수받았다. 이후 공창식 선생과 유성준 선생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의 소리를 배웠다. 임방울은 1929년 25세가 되던 해 상경,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참가해 그의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를 불러 청중을 사로잡았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가운데 ‘옥중가(獄中歌)’의 한 대목으로 당시 암울한 시대상과 연결되며 관객의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우는 소리’를 잘해 ‘쑥대머리’ 외에 홍보가의 ‘가난 타령’도 대중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임방울은 1960년 봄 부산에서 공연하다 무대 위에 쓰러진 뒤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그 해 가을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쓰러졌다. 결국 이듬해인 1961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어 당대 소리꾼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켰다.배연형, 임방울 흥보가의 바디 연구, 국악교육 제32집, 2011.
    2021-04-09 | NO.5
  • 최윤환崔允煥(1898~1979)
    근대의 한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선(德善). 호는 경당(敬堂). 상정(相廷)의 아들로 광산구 양과동 야평마을 출신이다. 1898년 광주 이장리에서 출생하여 죽파(竹坡) 최기룡(崔基龍)에게 경전을 배우고,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다. 우정(愚汀) 고광익(高光益), 지암(芝菴) 박재원(朴載元), 운파(雲坡) 최수화(崔洙華) 등과 학문을 강론하였고, 효당(嘵堂) 김문옥(金文鈺), 성지재(誠之齋), 송재직(宋在直),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와 시문을 강마하였다. 그는 1918년 고종황제가 승하(昇遐)한 이후 밤낮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산림에 숨어살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양과동 향약에 깊이 참여하여 동정 보수에 참여 중수기를 찬(撰)하는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저서로 《경당만록敬堂漫錄》이 있다.송사(松沙) 기우만의 제자로 경술국치(1910) 후 두문불출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던 그의 형 인재(忍齋) 최인환(崔仁煥, 1878∼1958)과 함께 경당서실에서 시회를 열었다. (族弟敬堂(允煥)書室雅會)
    2020-10-03 | NO.4
  • 최홍종(崔興琮 ; 1880~1966)
    YMCA 창시자인 최홍종(崔興琮 ; 1880~1966) 목사는 광주 불로동 출신이다. 본명은 최영종이다. 광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시기는 조선왕국의 패망의 시기로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 등등의 외세의 힘이 밀물처럼 들이닥치던 시기였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19세 때에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면서 방황의 시절이 시작된다. 광주의 무쇠주먹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건달로 20대의 초반을 보낸다. 25세 때 대한제국 광주경무청 소속의 순검이 된다. 대한제국의 실상은 일본인 상관의 지시를 받은 일종의 매국적인 행위였다. 당시 그에게는 이러한 민족감정은 부족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검 생활을 하면서 심정에 변화가 생긴다. 그는 의병 12명을 호송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를 따돌리고 이들을 풀어주었으며, 잠복중인 의병장에게는 내통하여 도망치게 하였고, 감방 안에 갇힌 의병장 백난구와는 남의 눈을 피해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최영종을 의심하던 일본인 경무 고문은 그에게 광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의 주모자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사직서를 내고, 이어 일본계 농공은행 토지조사원으로 3개월을 일하다 이 또한 그만 둔다. 인생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였던 시기였다.그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양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때 최흥종으로 개명을 한다. 바울의 뒤를 따른 것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듯이 최흥종은 예수를 믿고 유진벨 선교사의 지도로 성서를 공부하게 된다. 교회 전도사의 일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濟衆院)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최홍종은 31세에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 YMCA 결성에 적극 지원하였고 32세에는 김윤수 집사와 함께 북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되면서 애국하는 길을 적극 찾게 된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의 길을 걷는다. 당시 신학교육은 3개월의 강의와 9개월의 현장실습으로 진행이 되었기에 전도에 열심을 내어 <북문밖교회>를 개척한다.그는 광주지역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김철 선생과 같이 전남의 총책임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거사일을 장날인 3월 8일로 잡았는데, 그는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인력거를 타고 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일경에 체포를 당한다. 그가 광주의 독립만세항쟁의 주도자임을 안 일제는 중형에 해당하는 3년형을 언도한다.14개월의 옥고를 마친 그는 41세에 목사 안수를 받아 자신이 개척한 ‘북문밖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교회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시베리아에 있었다. 그래 다시금 지원하여 2년동안 시베리아에 머물게 된다.1928년 신간회 전남지회장의 책임을 맡아 좌우 협력의 길을 모색하면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과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해방이 되자 전남광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를 받지만, 17일 만에 이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 만다. 당시 미군정은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었고 좌우 이념 대립이 점점 심화되던 시기였다. 최흥종 선생은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끼어들지 않고 한센씨병 예방협회 일과 농민지도자 양성학교(삼애학원)를 세우는 일 그리고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을 세운다.목사로서 YMCA회장이 되어 청년운동을 지도하고 나환자와 빈민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최흥종 목사는 도덕경과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제도적 종교를 초월한 십자가의 도를 통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리를 터득했다. 여기에는 성자 이세종의 영향은 물론 류영모, 이현필, 함석헌, 효봉 선사 등등과 깊은 사상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다른 종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하는 진리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2021-04-08 | NO.3
  • 허백련(許百鍊 ; 1891~1977)
    허백련(許百鍊 ; 1891~1977)은 진도 출신으로 한국 근․ 현대 회화사에서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전승한 화가이다. 호는 의재이다.  「계산청하」, 「산수 11경」, 「산수춘추」, 「달마 1」, 「하경」 등의 작품이 있다.조선시대 말기 남종화풍을 토착화 시켰던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년)의 방손(傍孫)이다. 허련의 아들 허영(許瀯)(1850~1931년)에게서 기본적인 필법을 익히고 상경, 도일을 통하여 화업을 쌓았으며 전통 남종화의 화풍과 정신을 고수하는데 전력하였다. 1938년 광주에 정착한 뒤 연진회를 발족시키고 전통 서화의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켰다. 그 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농촌지도자의 육성에 뜻을 두고 삼애학원(三愛學院)을 설립하였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기 위하여 단군신전건립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지역사회발전에도 공이 컸다. 또한 광복 후에는 농촌지도자 육성에 뜻을 두고 증심사 부근 춘설헌(春雪軒, 지방기념물 제5호) 곁에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다. 이곳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로서 잘 활용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남화의 맥을 잇고자 하는 많은 한국 화가들이 드나들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한편 전통녹차 (춘설차)의 재배 제조에도 힘을 기울였다. 학동삼거리에서 증심사에 이르는 도로를 의재로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2021-04-08 |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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