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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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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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봉 기대승(1527~1572)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스물여덟에 「주자대전」 100여 권을 탐독한 후 네 권의 「주자문록」을 남겼다. 경연에서 선조에게 전한 말을 묶은 「논사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몰재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의 딸 사이에서 1527년 光州 召古龍里 松峴洞에서 5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대승의 집안은 조선조에 서울 청파동에 세거하였는데, 기묘사화로 인해 복재 奇遵이 화를 당하자 기준의 형이자 기대승의 아버지인 기진이 광주의 소고룡리로 낙남하면서부터 줄곧 광주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기대승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도와 주위 사람들의 기대로 사림정치에 대한 뜻을 키우고 매우 부지런하게 공부했다. 18세 되던 해에는 당시 조정의 훈구대신들에게 축출되어 향리에 은거하였던 龍山 鄭希濂로부터 문장을 지도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29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루면서 주자의 사상과 경륜에 깊이 침잠하였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32세에 넉넉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고,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출사할 무렵 이미 金麟厚와 사상적인 교감을 하였고, 李恒과는 이기불상잡의 측면에서 토론을 벌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李滉에게 성리학이나 출처의 의리를 묻는 등 거의 사제나 다름없는 관계로 가르침을 받게 되어 그의 사상이 더욱 성숙해졌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던 중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관료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특히 퇴계 이황과 나눈 12년간의 편지,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로 유명하다.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단칠정이 모두 다 정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을 주장, 주기설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과 맞섰다.기대승의 사상은 사단칠정이기론과 사림정치론, 예학사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대승은 이황과 8년간 논쟁을 통해 그의 성리학을 깊이 심화시켰는데, 그는 이기불상리를 중시하여 사단도 정이라고 봄으로서 사단과 칠정의 發을 다 같이 理와 氣의 共發로 보는데 비해, 이황은 이기불상잡의 측면을 존중하여 사단을 이의 발, 칠정을 기의 발로 각각 分對하여 설명한 것이다. 기대승의 이기공발설은 후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로 발전되어갔다. 또한 기대승은 사림정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是非’를 바르게 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정치 이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道統’ 즉 정치운영론, 현인등용론, 위민경제론, 언로개방, 교화교육을 통해 사림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기대승은 예학에 조예가 깊어 각종 예서를 섭렵하고 예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으며,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종의 지위를 높여 중종 -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확고히 하고, 사림들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대승 등의 노력으로 선조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 숭례론, 언로통색론으로 되어 있다.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고 일생을 마치었다. 그는 학행이 겸비된 사유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인 탁견을 진주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다. 광주 임곡에 위치한 월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1책, 『왕복서』3책, 『이기왕복서』1책, 『주자문록』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2020-03-25 | NO.301
  • 고봉별집 부록 제1권 / 제문(祭文)- 민철명
    민철명(閔哲命)세차 계유년 2월 8일 기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민철명은 맑은 술과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삼가 고 부제학 고봉 선생의 영전에 제사 드립니다.산악이 신을 내려 / 維岳降神호걸이 태어났네 / 鍾生豪英호학하긴 안자 같고 / 好學幷顔검속하긴 정자 같아 / 斂束同程조예가 정심하니 / 造詣精深마침내 대성하여 / 終就大成문장은 한구에다 / 文比韓歐도통은 염락일세 / 道傳濂洛우매한 자 거절 않고 / 不拒空空선으로써 인도했네 / 誘掖式穀인정해 준 사람 있어 / 相許有人덕불고를 알았어라 / 知德不孤지방 달라도 한마음 / 地異心同영호남 뉘 나눌쏘냐 / 孰分嶺湖서찰을 주고받으며 / 往來書尺연비어약 다 캐고 / 究極魚鳶오성과 칠정에다 / 五性七情양지와 삼천까지 / 兩地參天철저히 궁구하여 / 直窮到底귀촉마냥 환했어라 / 理若龜燭더구나 조정에 올라서는 / 况登朝堂바른 자만 들어 쓰고 / 措枉擧直진퇴에 정도 지키니 / 進退持正누구나가 존경하여 / 莫不欽服사람들은 사표로 알고 / 人指蓍龜나라는 기둥에 비겼지 / 國擬柱石장차 세도 바로잡고 / 方期扶世임금 보필 하렸더니 / 永輔袞職어인 일로 불행하여 / 云胡不淑이 세상을 떠나셨나 / 曾簀遽易수명은 인에 아니 맞고 / 壽不稱仁벼슬은 덕에 아니 찼네 / 位不滿德선한 사람 돌아가니 / 善人云亡내 아픔 곡한 게 아니요 / 非哭吾私나라의 흥망성쇠 / 國之休戚실로 이에 달렸어라 / 實繫於斯도의 명맥 병이 들고 / 道脉俱瘁선비는 갈 곳 없으니 / 士失依歸명색이 유림이라면 / 凡在儒林그 누가 아니 슬프리 / 孰不含悲교분은 비록 없으나 / 縱無素分슬픔을 가누지 못해 / 難堪痛傷한 잔 술 부어 올리니 / 把奠單杯눈물이 줄줄 흐르네 / 雙淚浪浪아 슬프오이다 / 嗚呼哀哉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주-D001] 산악이 신을 내려 : 고봉 같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은 산천과 하늘이 주관한다는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내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고, 《장자》〈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도를 얻어……죽은 뒤에 천상의 별이 되어서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걸터타고서 뭇별과 나란히 있다.〔傅說得之……乘東維騎箕尾 而比於列星〕” 하였다.[주-D002] 호학(好學)하긴 안자(顔子) 같고 : 안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학문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연(顔淵)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때 공자는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대답했다. 《論語 雍也》[주-D003] 검속하긴 정자(程子) 같아 : 정자는 이천(伊川)을 말한다. 그는 단정하게 검속함을 중요시하여 ‘정제엄숙(整齊嚴肅)’을 강조했다. 그래서 마음이 분란한 것을 학자의 공통된 병폐로 지적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고 외면을 정제하고 엄숙하게 하면 마음이 전일하게 된다.〔一者無他 只是整齊嚴肅則心便一〕” 하였다. 《近思錄 卷4》[주-D004] 한구(韓歐) :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대표적 인물인 한유(韓愈 : 768~824)와 구양수(歐陽脩 : 1007~1072)를 말한다. 고봉이 이들의 문학을 계승하여 조선의 문단을 일신했다는 말이다. 한유는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신이다.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수사에 치중하는 변려문을 반대하고,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고문(古文)을 창도하였다. 저서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구양수는 송나라의 문학가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10세 때 한유의 문집을 읽고 매료되어 서곤체(西崑體)가 유행하던 송나라 초기의 문단을 혁신한다. 저서에 《신오대사(新五代史)》, 《신당서(新唐書)》, 《모시본의(毛詩本義)》 등이 있다.[주-D005] 염락(濂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이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봉이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주-D006] 인정해 준 사람 : 퇴계 이황을 말한다.[주-D007] 덕불고(德不孤)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다.[주-D008] 연비어약(鳶飛魚躍) :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솔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다.[주-D009] 오성(五性)과 칠정(七情) : 오성은 사람이 타고난 다섯 가지 선한 본성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주-D010] 양지(兩地)와 삼천(參天) : 삼천양지(參天兩地)와 같은 말로 하늘의 숫자는 홀수인 3이고 땅의 숫자는 짝수인 2라는 뜻인데, 《주역》 괘(卦)에서 숫자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는 천지간의 모든 이치를 말한다. 《주역》〈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은 3이고 땅은 2로서 서로 숫자가 어울린다.〔參天兩地而倚數〕” 하였다.[주-D011] 귀촉(龜燭) : 거북과 촛불을 말한다. 거북은 점을 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이고, 촛불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즉 깊은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분명하고 확실히 알았다는 말이다.[주-D012] 수명은……맞고 : 어진 사람은 잡념이나 욕심이 적어 항상 편안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흔히 장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봉이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마쳤다는 말이다. 《논어》〈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 하였다.[주-D013] 벼슬은……찼네 : 고봉이 지닌 덕이 높으므로 지위가 높아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고 지위가 낮아 덕에 걸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맹자가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엔 작은 덕을 지닌 사람이 큰 덕을 지닌 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天下有道 小德役大德〕”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닦아 지위가 반드시 덕의 크기에 걸맞았다.〔有道之世 人皆修德 而位必稱其德之大小〕”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位’ 자가 원문에는 ‘仁’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022-04-29 | NO.300
  • 고봉별집 부록 제1권 / 제문(祭文)- 정염
    정염(丁焰) 만헌(晩軒)임신년(1572, 선조5) 12월 27일에 능성 현령(綾城縣令) 정염은 삼가 고봉 기 선생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아, 강학(講學)의 공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해 저는 굳이 옛 시대에서 근거를 찾아 알아볼 것도 없이 당장 오늘에 경험하였습니다. 세상 사람 중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초야에 물러나 자기의 존재를 숨기기에 힘쓰는 자는 그 덕이 참으로 훌륭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넓지 못할 것이 당연합니다.공께서는 높은 재기(才器)와 큰 역량으로 처음에는 문자(文字)의 공을 바탕으로 하셨으나, 뒤에 자못 도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선각(先覺)을 만나 더욱 그 길을 단단히 믿으셨습니다. 고증은 극도로 해박하게 하고 논변은 지극히 자상하게 하셨으며, 나아가 자신이 얻은 도의 정수를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기꺼이 남들에게 일러 주셨으니, 여느 사람들처럼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서 명예를 구하는 도구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은 거론할 것도 못 됩니다. 게다가 벼슬길이 창창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뜻이 없으셔서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애써 본심을 억누르면서까지 억지로 벼슬하지는 않았으니, 잠시 사이에 나왔다 물러갔다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대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문(斯文)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기에 머뭇거리며 관망하는 뜻이 없고 과감하고 호탕한 기운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사람들 가운데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 자도 있었으나 차츰차츰 믿게 되어 질문할 내용이 있을 때면 반드시 공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습속이 더럽고 잘못된 줄을 알고 옛 도가 행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공의 힘이 많이 작용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강학의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더 긴 수명을 누리셨다면 그 성취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저는 실로 외람되고 천박하여 도의(道義)의 벗은 되지 못했지만 버리지 않고 거두어 주신 은혜를 오래도록 입은 덕에 얼굴을 뵙고 말씀을 나누었으니, 저로서는 큰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번잡한 공무에 매여 사모하는 마음을 펴지 못했는데, 이제 그 모습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애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어찌 산 자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에 조촐한 제물로 거칠게나마 보잘것없는 정성을 표합니다. 아, 슬프오이다. 부디 흠향하소서.[주-D001] 정염(丁焰) : 1524~1609.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회(君晦), 호는 만헌(晩軒)이다. 23세 때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성균관 직강을 거쳐 안성 군수(安城郡守), 광주 목사(光州牧使),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지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1590년(선조23)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저서에 《만헌집》이 있다.
    2022-04-29 | NO.299
  • 고봉별집 부록 제1권 / 제문(祭文)- 정철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士類)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이 세상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망천(望川) 사우(祀宇)에 유풍만 방불합니다.[주-D001] 정철(鄭澈) : 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저서에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주-D002] 망천(望川) 사우(祀宇) : 월봉서원(月峯書院)을 가리킨다.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1578년(선조 11) 김계휘(金繼輝)의 주도로 광주(光州)에 망천사(望川祠)가 건립되었고, 1654년(효종 5) '월봉(月峯)'이라 사액되었다. 1671년(현종 12) 송시열의 건의로 덕산사(德山祠)에 배향 중이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의 위패를 옮겨 합사하였고, 1683년(숙종 9)에 김장생(金長生), 1769년(영조 45)에 김집(金集)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2022-04-29 | NO.298
  • 고봉별집 부록 제2권 / 만장(挽章)- 신광필
    신광필(申光弼)호남에서 인걸이 태어났으니 / 湖海生人傑사문 책임 진실로 그에 있었네 / 斯文儘在玆사우로 말미암아 얻지 않았고 / 不由師友得혼자 힘으로 성현을 기약하였네 / 獨與聖賢期등용함과 물리침은 내 일 아니고 / 用舍非吾事염량세태 이러한 때 어찌하리오 / 炎凉奈此時반생 동안 하많은 한일랑 / 半生多少恨오로지 촌심만이 알아주리라 / 只應寸心知하늘 마음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나 / 天心那得聞세상일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지 / 世事只堪驚오랫동안 동량 되길 기대했는데 / 久矣期時棟마침내 나라 기둥 꺾이었어라 / 居然毁國楨공명이야 우연하게 얻은 거라면 / 功名從邂逅의리야말로 평생토록 짊어졌다오 / 義命任平生지하로 돌아가신 저 도산로의 / 地下陶山老그 전형을 이제는 잃어버렸네 / 于今失典刑도산로는 찾아뵙지 못하였으나 / 不及陶山老이제 비로소 공을 알았는데 / 於今始見知하늘이 사문을 재차 망하게 하니 / 天敎文再喪사람과 도가 어디에 의탁할 건가 / 人與道何依남극의 못 이룬 꿈 허사가 되고 / 南極空殘夢서림의 묵은 기약 등져 버렸네 / 西林負宿期한 백 년 우리들의 슬픔이어니 / 百年吾輩慟이제 덕음(德音)을 받들 길 없네 / 無路奉音徽[주-D001] 신광필(申光弼) : 1553~?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인경(隣卿), 호는 교봉(郊峯)이다. 외교 문장에 능하다 하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26)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주청사(奏請使)의 자문(咨文)을 이로(李魯), 정경세(鄭經世), 신흠(申欽) 등과 짓기도 하였다. 접반사 윤선각(尹先覺)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주-D002] 도산로(陶山老) : 퇴계 이황을 말한다.[주-D003] 남극(南極) : 고봉의 고향 광주(光州)가 남쪽 끝에 있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주-D004] 서림(西林) :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절 이름이다. 주자(朱子)가 이곳에 머물면서 승려인 가사(可師)와 학문을 강론하였다. 《朱子大全 卷2》 여기서는 고봉이 학문을 정진한 사찰을 가리킨다.
    2022-04-29 | NO.297
  • 고봉별집 부록 제2권 / 만장(挽章)-김언거
    김언거(金彦琚) 칠계(漆溪)어릴 적부터 문장 솜씨 뭇사람에 뛰어나니 / 出衆文華自妙年한 시대 드날린 명성 뉘라서 앞설 건가 / 蜚英一代孰能先대배 될 재주라고 사람 모두 바랐는데 / 才堪大拜人皆望오랜 수명 못 누리니 세상 함께 슬퍼하네 / 天嗇脩齡世共憐문 밖에서 학이 날아 조객을 놀래고 / 門外鶴飛驚吊客무덤 앞에 새가 모여 찾아온 이 감동시키네 / 墳前鳥集感來賢흰머리로 아니 죽고 고개 숙여 만사 쓰니 / 白頭未死叩題挽이로부터 공의 모습 구천 멀리 막히리 / 從此音容隔九泉[주-D001] 김언거(金彦琚)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계진(季珍), 호는 풍영(豊咏)이다. 1531년(중종26)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입격하여 사헌부 장령ㆍ헌납, 금산 군수(錦山郡守), 연안 부사(延安府使) 등을 지냈다.[주-D002] 대배(大拜) : 정승에 제수되는 것을 말한다.
    2022-04-29 | NO.296
  • 고부량(高傅良)
    고부량(高傅良, 1583~1621)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군거(君擧)이다. 부 : 高處厚생부 : 高因厚조 : 高敬命증조 : 高孟英외조 : 咸平 李璥祖처부1 : 全州 李曄1606년(선조 39)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6 | NO.295
  • 고부립
    고부립(高傅立), 湖節4下-129-1, 光州, 丁卯, 高循厚 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94
  • 고부민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호는 탄음(灘陰)이다. 湖節4下-130-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강수은에게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유학과 문예를 크게 성취했기 때문에 영광과의 인연이 깊다.그는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高傅弼)과 삼종 고부립(高傅立)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하며 "금산의 순절과 진주성의 함몰은 비록 시변이라고는 하나, 그 국치를 아직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쪽 오랑캐가 다시 창궐하여 이 땅에 이르니, 이 나라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몸을 살피지 않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진주성과 금산에서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는 병사들을 모아,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죽어 천하에 대의를 밝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하고 의병을 모으기에 앞장섰다.이때, 탄음 고부민의 재종숙인 정헌공 고순후가 김장생의 추천을 받아 호남의병장이 되었는데, 탄음은 동지 수십명과 그 막부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기세를 얻어 북으로 행하던 중, 완산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고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을 머금고 물러나 두문불출했다.또, 병자호란 때에도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은 시가 애절하다.(幽居述懷)탄음 고부민은 충절이나 덕망 학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연구하고 펴서, 크게는 천인과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작게는 아주 미세한 사물도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다. 방손인 고공진은 탄음의 행장에서 "고부민 선생은 호란이 강화를 하게 되어 공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의열은 충분히 기에 새기어 찬사할 만하다. 그 근원으로 말하면 사계의 학문을 바로 배워 정자와 주자를 쫓았고, 가정으로 말하면, 죽촌공의 문장과 행업을 백세에 떨칠 만하고 집안으로 말하면, 충열공의 충성심과 의정이 천고에 빛나니, 고부민 같은 사람은 그 충열을 이어 후통을 빛낸 사람이 아니겠는가?"탄음 고부민은 유평과도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다.
    2020-03-31 | NO.293
  • 고부민(高傅敏)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무숙(務叔), 호는 탄음(灘陰) 이다.부 : 高成厚조 : 高敬祖증조 : 高仲英외조 : 咸陽 朴星精처부1 : 光山 金蘊德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2020-08-06 | NO.292
  • 고부천
    고부천(高傅川, 1578-1636)의 자는 군섭(君涉)이며 호는 월봉(月峯)이다. 湖節4中-039-2,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91
  • 고성후
    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의 자는 여관(汝寬), 본관은 장흥(長興). 목사 경조(敬祖)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54년(명종 9) 6세 때부터 조부 고중영(高仲英)에게 수학하여 글을 빨리 깨우쳐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1497-1579) 문하에서 수업하였다.1592년(선조 25) 금마군수로 있을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당숙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아들 인후(因厚)를 도와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군량을 운송하던 중에 당숙인 고경명이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흩어진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광주목사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이치(梨峙)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고성후(高成厚), 湖節1上-063-2, 光州, 高敬命 同倡1593년(선조 26)에 권율이 도원수가 되어 행주싸움에서, 그는 익산군수로서 해상과 육로로 군량미 운송 업무를 맡아 행주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리고 영남에 주둔한 명나라 군영지 군량을 운송하여 명군(明軍) 제숙(提叔) 이여송(李如松), 참군(參軍) 여응종(呂應鍾) 등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고 함께 많은 시를 화창(話唱)하기도 하였다.1594년(선조 27)에 익산군수에서 내직으로 훈련원봉사를 거쳐 그해에 종부시첨정이 되었다.1601년(선조 34) 선산현감을 거쳐 안성군수로 재임 중 이듬해 세상을 등졌다.그가 죽은 후 1605년(선조38)에 선무공신 2등에 녹선 되고, 1609년(광해 1)에는 예조참의겸지제교(禮曹參議兼知製敎)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죽촌집(竹村集)이 전하며, 1902년에는 금산 금곡사, 광주 남구 황산사(黃山祠)에 제향 되었다. 그의 문집 《죽촌집(竹村集)》이 있다.
    2020-03-31 | NO.290
  • 고순후
    고순후(高循厚),는 고경명 장군의 넷째아들이다.  湖節4下-125-1, 光州,丁卯, 靜軒《호남절의록》(1799)1627년(인조5) 2월 7일에 고순후가 찰방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묘호란의 급박한 사정을 언급하고 호소사(號召使)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또한 호남의병장에 같이 천거된 안방준에게 의병전략과 출병 날짜를 묻고 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와 정묘호란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2020-03-31 | NO.289
  • 고순후(高循厚)
    고순후(高循厚, 1569~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靜軒)이다. 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洪鵬처부2 : 晋州 姜1591년(선조 24)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형조좌랑刑曹正郞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88
  • 고영문
    고영문(高永文, 1883~1948)의 본관은 장흥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윤회(允會)이며 호는 무위재(無謂齋)이다. (남구) 압촌동에 살았다.부 : 高琮錫 조 : 高在中 증조 : 高光國 외조 : 蔚山 金衡中 처부1 : 延日 鄭海成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했다.
    2020-02-05 | NO.287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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