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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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순후
- 고순후(高循厚),는 고경명 장군의 넷째아들이다. 湖節4下-125-1, 光州,丁卯, 靜軒《호남절의록》(1799)1627년(인조5) 2월 7일에 고순후가 찰방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묘호란의 급박한 사정을 언급하고 호소사(號召使)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또한 호남의병장에 같이 천거된 안방준에게 의병전략과 출병 날짜를 묻고 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와 정묘호란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2020-03-31 | NO.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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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순후(高循厚)
- 고순후(高循厚, 1569~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靜軒)이다. 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洪鵬처부2 : 晋州 姜1591년(선조 24)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형조좌랑刑曹正郞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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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문
- 고영문(高永文, 1883~1948)의 본관은 장흥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윤회(允會)이며 호는 무위재(無謂齋)이다. (남구) 압촌동에 살았다.부 : 高琮錫 조 : 高在中 증조 : 高光國 외조 : 蔚山 金衡中 처부1 : 延日 鄭海成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했다.
- 2020-02-05 | NO.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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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후(高用厚)
-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선행(善行) 이고 호는 청사(晴沙) 이다.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李麟奇처부2 : 奇弘獻과거 : 1605년(선조 38)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다.1605년(선조 38)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증광 문과에 합격하였다. 佐郞 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 2020-08-08 | NO.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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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후(高用厚)
-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본관은 장흥(제주)이다. 제봉 충렬공 고경명( 高敬命)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조는 현감을 지낸 고자검, 증조는 기묘명현인 하천 고운(高雲), 조부는 하헌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울산 김씨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7년 선조 10년 (정축) 광주 압보촌 옛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큰형 효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79년 선조 12년 (기묘) 3세 가운데 형 의열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89년 선조 22년 (기축) 13세 의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90년 선조 23년 (경인) 14세 가운데 형 정자공(의열공)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갔다.1591년 선조 24년 (신묘) 15세 숙부 정헌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 16세 왜란이 일어났다. 충렬공이 의병을 일으켜 왕사(王事)를 도울때 선생은 겨우 15세를 지났는데,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가니 충렬공이 길에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는 울지 말라. 나라를 위해서 한 번 죽는 것이 나의 직분이니 너는 돌아가서 네 어머니와 잘 지내거라. 내가 저술한 시문 몇 편을 모두 너에게 줄터이니 너는 이것을 받아서 잘 간수해 두어라. 늙은 아비는 이번에 죽기를 기약하고 가니 부자가 서로 만날 것을 다시 바랄 수 없다. 오늘의 내 말을 너는 마땅히 뼈에 새기도록 하라"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 가버렸다. 7월 10일에 충렬공과 의열공이 금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3년 선조 26년 (계사) 17세 효열공이 상복을 입고 종군하였다. 효열공이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던 날 울면서 모부인에 작별하고 문을 나서다가, 다시 말을 세우고 내려 앉아서 선생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어머님 얼굴을 영결하느라고 너에게 일과(日課)의 학문을 가르쳐 주는 것을 잊었구나"하고, 조용히 일러주기를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너는 반드시 힘써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29일에 효열공과 증 주부 경형(贈 主簿 敬兄:선생의 庶叔)이 남강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4년 선조 27년 (갑오) 18세 흉년이 들자 선조가 전라감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고경명의 처자가 광주에 있다고 하니, 경은 그 곳 관원으로 하여금 월봉(月俸)을 지급하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나라 공사례(公事例)에 시행치 않았던 일이나 이번만은 반드시 착실히 시행토록 하라"고 했다.1597년 선조 30년 (정유) 21세 어머니를 모시고 안동으로 가서 난을 피했다. 겨울에 누님 노씨(盧氏)부인과 종매 안씨(安氏)부인이 칼로 자결했다는 흉음을 들었다.1598년 선조 31년 (무술) 22세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왔다.1600년 선조 33년 (경자) 24세 10월에 조카 월봉공(月峰公) 부천(傅川)과 함께 금강을 지나면서 시를 지어 감회를 읊었다.1603년 선조 36년 (계묘) 27세 원배(元配) 이씨(李氏)의 상을 당했다.1605년 선조 38년 (을사) 29세 사마시의 진사, 생원 두 시험에 합격했는데 진사는 장원이었다.1606년 선조 39년 (병오) 30세 문과의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1607년 선조 40년 (정미) 31세 여름에 권지정자(權知正字)에서 특별히 차례를 뛰어넘어 6품에 승진했고 공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이 해 겨울에 태인의 수령이 되기를 청해 얻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08년 선조 41년 (무신) 32세 여름에 「정기록」을 간행했다. 이 해 12월 12일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1609년 광해 원년 (기유) 33세 3월 경인에 충렬공의 묘를 장성 오동리 오좌원으로 이장하고 어머니를 왼편에 부장하였다.1610년 광해 2년 (경술) 섣달 12일에 어머니의 대상을 지냈다.1611년 광해 3년 (신해) 35세 조부 대간공에게 우의정이 증직되었다.1612년 광해 4년 (임자) 36세 생진회시(生進會試)에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다.1613년 광해 5년 (계축) 37세 하절사(賀節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14년 광해 6년 (갑인) 38세 이 해 봄에 서장관으로서 복명하였다.1616년 광해 7년 (병진) 40세 생진회시에 장시관이 되었다. 이 해 겨울에 병부랑(兵部郞)에서 외직으로 나가 남원의 수령이 되었다.1617년 광해 8년 (정사) 41세「제봉집」과 「서석록」그리고 「격초서(檄草書)」를 발간했다.1618년 광해 9년 (무오) 42세 겨울에 남원의 수령을 그만두고 돌아왔다.1620년 광해 10년 (무오) 43세 가을에 월봉공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24년 인조 2년 (갑자) 48세 영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체임되었다.1630년 인조 8년 (경오) 54세 판결사(判決事)로서 중국에 입조하였다. 서교(西郊)의 전별자리에서 술잔으로 김자점(金自點)의 뺨을 쳤다.1632년 인조 10년 (임신) 56세 11월에 안우산(安牛山) 방준(邦俊)이 이연평(李延平) 귀(貴)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3년 인조 11년 (계유) 57세 계배(繼配) 기씨(奇氏)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해 여름에 특명으로 진주에 유배되었다.1635년 인조 13년 (올해) 59세 또 특명으로 서울에서 가까운 임천(林川)고을로 옮겼다. 출발에 임하여 제문을 지어가지고 백씨를 촉석강가에서 제사지냈다. 제문은 효열공 유적 아래에 나온다. 이 해 11월에 안우산이 또 윤해창(尹海昌)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6년 인조 14년 (병자) 60세 6월에 조카 월봉공의 죽음을 곡하였다.1637년 인조 15년 (정축) 61세 봄에 석방되었다. 이 해에 조카 참봉공(효열공의 큰아들 傅立)의 상을 당했다.1640년 인조 18년 (경진) 64세 이 해 가을에 숙부 정헌공의 상을 당하였다. 겨울에 김숙도(淸陰金叔度)를 심양(瀋陽)으로 보내면서 시를 주었다.1648년 인조 26년 (무자) 72세 모월 모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 해 모월 모일에 장성 오동리 충렬공의 묘 계하(階下) 오른쪽 오좌원에 장사지냈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 2020-03-18 | NO.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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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高雲, 1479~1530)
- 고운(高雲, 1479~1530)의 본관 장흥(長興). 자 종룡(從龍). 호 하천(霞川). 아들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손자는 선조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교가 있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된 적이 있었으나 후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그림에 뛰어나 남화풍(南畵風)의 〈맹호도〉를 잘 그렸는데 《백액대호도(白額大虎圖)》 등 몇 점이 전한다. 뒤에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호랑이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호랑이그림은 간송미술관과 박종화(朴鍾和)가 소장하였던 2점이 전하고 있는데, 두 그림의 화풍상의 차이가 심하여 어느 것이 그의 진필(眞筆)인지 결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 2024-11-18 | NO.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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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상(高維相)
- 고유상(高維相, 1870~?)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도관(道貫)이고 호는 남애(南涯) 이다. 광주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濟六조 : 高燦鎭증조 : 高時大외조 : 尹敬學처부1 : 曺秉模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昭義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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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의후
- 고의후(高依厚, 1569~?), 湖節4中-041-1,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고의후의 자는 여식(汝植)이고 본관은 장흥이다. 생원(生員) 고중영(高仲英)의 손자이고, 유학(幼學) 고경선(高敬先)의 아들이나 광주목사(廣州牧使) 고경조(高敬祖)가 그의 생부이다.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문장과 행의가 높아 당대에 유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발하자 거의유사(擧義有司)가 되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들 고부필(高傅弼)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의병을 모집하였다.
- 2020-04-01 | NO.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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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의후(高依厚)
- 고의후(高依厚, 1569~1640)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여식(汝植) 이고 호는 호은(湖隱) 이다.부 : 高敬先생부 : 高敬祖조 : 高仲英증조 : 高雲외조 : 靈光 金之達처부1 : 全州 李禧覃1606년(선조 39)에 식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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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후
- 고인후(高因厚, 1561~1592), 湖節1上-04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고인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열(毅烈)이다.고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지조가 강개하여, 세속의 영욕과 이해득실에는 항시 초연하고 조금도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번 글을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서 임진왜란 때에 지은 격문(檄文)은 고경명의 수초(手草)가 아니면, 고인후 형제의 손에서 많이 나왔었다. 의병을 일으킬 적에 고경명은 스스로 자기 옷 위에다 이름을 썼는데, 고인후 형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대개 이것은 뒷날 시체를 찾는 데 증표가 되게 하려는 것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이 이미 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2020-04-01 | NO.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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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일립
- 고일립(高日立), 湖節5上-088-3, 光州, 丙子, 安邦俊倡義 -《호남절의록》(1799)정묘·병자호란 때는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고일립은 병자호란 때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소식을 듣고 모은 곡식을 영에 납입하고 돌아왔다 한다.
- 2020-04-01 | NO.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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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련(高在鍊)
- 고재련(高在鍊, 1892~?)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연술(鍊述) , 호는 후봉(後峰) 이다. 광주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光龍조 : 高榮柱증조 : 高濟鎰외조 : 李采柱처부1 : 金堯翊향교전교鄕校典敎를 지냈다.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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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붕
- 고재붕(高在鵬1869~1936)의 본관은 제주이며 제주고씨(濟州高氏)이다. 자는 윤거(允擧)이고 호는 익재(翼齋)이다.부 : 高光奎 조 : 高應柱 증조 : 高濟元 외조 : 尹藝烈 처부1 : 金善中艮齋에게 수학하였다.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奠祝을 맡았다.
- 2020-02-05 | NO.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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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화(高在華)
- 고재화(高在華, 1881~19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성관(聖觀) 이고 호는 송곡(松谷) 이다. 남구 압촌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光祿생부 : 高光壽조 : 高炳柱증조 : 高濟應외조 : 朴源國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에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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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제만(高濟萬)
- 고제만(高濟萬, 188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동섭(東燮) 이고 호는 성심(誠心) 이다. 남구 석정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廣鎭조 : 高時丙증조 : 高廷玟외조 : 李曾根처부1 : 林相包처부2 : 崔士範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8 | NO.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