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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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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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용후(高用厚)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선행(善行) 이고 호는 청사(晴沙) 이다.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李麟奇처부2 : 奇弘獻과거 : 1605년(선조 38)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다.1605년(선조 38)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증광 문과에 합격하였다. 佐郞 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2020-08-08 | NO.286
  • 고용후(高用厚)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본관은 장흥(제주)이다. 제봉 충렬공 고경명( 高敬命)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조는 현감을 지낸 고자검, 증조는 기묘명현인 하천 고운(高雲), 조부는 하헌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울산 김씨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7년 선조 10년 (정축) 광주 압보촌 옛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큰형 효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79년 선조 12년 (기묘) 3세 가운데 형 의열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89년 선조 22년 (기축) 13세 의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90년 선조 23년 (경인) 14세 가운데 형 정자공(의열공)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갔다.1591년 선조 24년 (신묘) 15세 숙부 정헌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 16세 왜란이 일어났다. 충렬공이 의병을 일으켜 왕사(王事)를 도울때 선생은 겨우 15세를 지났는데,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가니 충렬공이 길에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는 울지 말라. 나라를 위해서 한 번 죽는 것이 나의 직분이니 너는 돌아가서 네 어머니와 잘 지내거라. 내가 저술한 시문 몇 편을 모두 너에게 줄터이니 너는 이것을 받아서 잘 간수해 두어라. 늙은 아비는 이번에 죽기를 기약하고 가니 부자가 서로 만날 것을 다시 바랄 수 없다. 오늘의 내 말을 너는 마땅히 뼈에 새기도록 하라"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 가버렸다. 7월 10일에 충렬공과 의열공이 금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3년 선조 26년 (계사) 17세 효열공이 상복을 입고 종군하였다. 효열공이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던 날 울면서 모부인에 작별하고 문을 나서다가, 다시 말을 세우고 내려 앉아서 선생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어머님 얼굴을 영결하느라고 너에게 일과(日課)의 학문을 가르쳐 주는 것을 잊었구나"하고, 조용히 일러주기를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너는 반드시 힘써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29일에 효열공과 증 주부 경형(贈 主簿 敬兄:선생의 庶叔)이 남강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4년 선조 27년 (갑오) 18세 흉년이 들자 선조가 전라감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고경명의 처자가 광주에 있다고 하니, 경은 그 곳 관원으로 하여금 월봉(月俸)을 지급하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나라 공사례(公事例)에 시행치 않았던 일이나 이번만은 반드시 착실히 시행토록 하라"고 했다.1597년 선조 30년 (정유) 21세 어머니를 모시고 안동으로 가서 난을 피했다. 겨울에 누님 노씨(盧氏)부인과 종매 안씨(安氏)부인이 칼로 자결했다는 흉음을 들었다.1598년 선조 31년 (무술) 22세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왔다.1600년 선조 33년 (경자) 24세 10월에 조카 월봉공(月峰公) 부천(傅川)과 함께 금강을 지나면서 시를 지어 감회를 읊었다.1603년 선조 36년 (계묘) 27세 원배(元配) 이씨(李氏)의 상을 당했다.1605년 선조 38년 (을사) 29세 사마시의 진사, 생원 두 시험에 합격했는데 진사는 장원이었다.1606년 선조 39년 (병오) 30세 문과의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1607년 선조 40년 (정미) 31세 여름에 권지정자(權知正字)에서 특별히 차례를 뛰어넘어 6품에 승진했고 공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이 해 겨울에 태인의 수령이 되기를 청해 얻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08년 선조 41년 (무신) 32세 여름에 「정기록」을 간행했다. 이 해 12월 12일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1609년 광해 원년 (기유) 33세 3월 경인에 충렬공의 묘를 장성 오동리 오좌원으로 이장하고 어머니를 왼편에 부장하였다.1610년 광해 2년 (경술) 섣달 12일에 어머니의 대상을 지냈다.1611년 광해 3년 (신해) 35세 조부 대간공에게 우의정이 증직되었다.1612년 광해 4년 (임자) 36세 생진회시(生進會試)에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다.1613년 광해 5년 (계축) 37세 하절사(賀節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14년 광해 6년 (갑인) 38세 이 해 봄에 서장관으로서 복명하였다.1616년 광해 7년 (병진) 40세 생진회시에 장시관이 되었다. 이 해 겨울에 병부랑(兵部郞)에서 외직으로 나가 남원의 수령이 되었다.1617년 광해 8년 (정사) 41세「제봉집」과 「서석록」그리고 「격초서(檄草書)」를 발간했다.1618년 광해 9년 (무오) 42세 겨울에 남원의 수령을 그만두고 돌아왔다.1620년 광해 10년 (무오) 43세 가을에 월봉공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24년 인조 2년 (갑자) 48세 영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체임되었다.1630년 인조 8년 (경오) 54세 판결사(判決事)로서 중국에 입조하였다. 서교(西郊)의 전별자리에서 술잔으로 김자점(金自點)의 뺨을 쳤다.1632년 인조 10년 (임신) 56세 11월에 안우산(安牛山) 방준(邦俊)이 이연평(李延平) 귀(貴)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3년 인조 11년 (계유) 57세 계배(繼配) 기씨(奇氏)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해 여름에 특명으로 진주에 유배되었다.1635년 인조 13년 (올해) 59세 또 특명으로 서울에서 가까운 임천(林川)고을로 옮겼다. 출발에 임하여 제문을 지어가지고 백씨를 촉석강가에서 제사지냈다. 제문은 효열공 유적 아래에 나온다. 이 해 11월에 안우산이 또 윤해창(尹海昌)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6년 인조 14년 (병자) 60세 6월에 조카 월봉공의 죽음을 곡하였다.1637년 인조 15년 (정축) 61세 봄에 석방되었다. 이 해에 조카 참봉공(효열공의 큰아들 傅立)의 상을 당했다.1640년 인조 18년 (경진) 64세 이 해 가을에 숙부 정헌공의 상을 당하였다. 겨울에 김숙도(淸陰金叔度)를 심양(瀋陽)으로 보내면서 시를 주었다.1648년 인조 26년 (무자) 72세 모월 모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 해 모월 모일에 장성 오동리 충렬공의 묘 계하(階下) 오른쪽 오좌원에 장사지냈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2020-03-18 | NO.285
  • 고유상(高維相)
    고유상(高維相, 1870~?)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도관(道貫)이고 호는 남애(南涯) 이다. 광주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濟六조 : 高燦鎭증조 : 高時大외조 : 尹敬學처부1 : 曺秉模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昭義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84
  • 고의후
    고의후(高依厚, 1569~?), 湖節4中-041-1,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고의후의 자는 여식(汝植)이고 본관은 장흥이다. 생원(生員) 고중영(高仲英)의 손자이고, 유학(幼學) 고경선(高敬先)의 아들이나 광주목사(廣州牧使) 고경조(高敬祖)가 그의 생부이다.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문장과 행의가 높아 당대에 유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발하자 거의유사(擧義有司)가 되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들 고부필(高傅弼)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의병을 모집하였다.
    2020-04-01 | NO.283
  • 고의후(高依厚)
    고의후(高依厚, 1569~1640)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여식(汝植) 이고 호는 호은(湖隱) 이다.부 : 高敬先생부 : 高敬祖조 : 高仲英증조 : 高雲외조 : 靈光 金之達처부1 : 全州 李禧覃1606년(선조 39)에 식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82
  • 고인후
    고인후(高因厚, 1561~1592), 湖節1上-04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고인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열(毅烈)이다.고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지조가 강개하여, 세속의 영욕과 이해득실에는 항시 초연하고 조금도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번 글을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서 임진왜란 때에 지은 격문(檄文)은 고경명의 수초(手草)가 아니면, 고인후 형제의 손에서 많이 나왔었다. 의병을 일으킬 적에 고경명은 스스로 자기 옷 위에다 이름을 썼는데, 고인후 형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대개 이것은 뒷날 시체를 찾는 데 증표가 되게 하려는 것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이 이미 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0-04-01 | NO.281
  • 고일립
    고일립(高日立), 湖節5上-088-3, 光州, 丙子, 安邦俊倡義 -《호남절의록》(1799)정묘·병자호란 때는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고일립은 병자호란 때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소식을 듣고 모은 곡식을 영에 납입하고 돌아왔다 한다.
    2020-04-01 | NO.280
  • 고재련(高在鍊)
    고재련(高在鍊, 1892~?)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연술(鍊述) , 호는 후봉(後峰) 이다. 광주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光龍조 : 高榮柱증조 : 高濟鎰외조 : 李采柱처부1 : 金堯翊향교전교鄕校典敎를 지냈다.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79
  • 고재붕
    고재붕(高在鵬1869~1936)의 본관은 제주이며 제주고씨(濟州高氏)이다. 자는 윤거(允擧)이고 호는 익재(翼齋)이다.부 : 高光奎 조 : 高應柱 증조 : 高濟元 외조 : 尹藝烈 처부1 : 金善中艮齋에게 수학하였다.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奠祝을 맡았다.
    2020-02-05 | NO.278
  • 고재화(高在華)
    고재화(高在華, 1881~19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성관(聖觀) 이고 호는 송곡(松谷) 이다. 남구 압촌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光祿생부 : 高光壽조 : 高炳柱증조 : 高濟應외조 : 朴源國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에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77
  • 고제만(高濟萬)
    고제만(高濟萬, 188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동섭(東燮) 이고 호는 성심(誠心) 이다. 남구 석정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廣鎭조 : 高時丙증조 : 高廷玟외조 : 李曾根처부1 : 林相包처부2 : 崔士範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76
  • 고종후
    고종후(高從厚, 1554~1593), 湖節1下-163-2, 光州, 壬辰, 孝烈公-《호남절의록》(1799)고종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부봉(阜峯)이다.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이어서 전적·감찰·예조좌랑을 거쳐 1588년 임피현령(臨陂縣令)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知製敎)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인 광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했다.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권율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이 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유체(遺體)를 수습하여 몰래 금산 산중에 묻어두었다가, 40여 일만에 다시 찾아서 고향 광주(光州) 창평(昌平)에 장사지냈다.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그때 고종후의 나이가 40세였다. 6~7만 명의 진주성 사람들이 거의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일부는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고종후의 유체(遺體)를 진주 남강에서 찾지 못하여 묘소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그를 도승지(都承旨)에 추증하였으며, 왕세자(王世子) 광해군(光海君)도 별도로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 뒤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고경명의 ‘포충사(褒忠祠)’에 함께 배향하였다. 숙종(肅宗) 때 시호를 ‘효열(孝烈)’이라 내려주었다.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약천집(藥泉集)』 권23 「증이조판서고공청시행장(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고종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정직하였다. 그의 문장은 준일(俊逸)하고 경발(警發)하며, 지필(紙筆)을 잡으면 지체 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의병을 일으킬 때 그가 쓴 격문이 사방에 전달되자 그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2020-04-01 | NO.275
  • 고한빙
    고한빙(高漢聘), 湖節5中-120-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274
  • 고한주(高漢柱)
    고한주(1871~1959)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방서(邦瑞)이고 호는 외당(畏堂)이다. 주요 거주지는 광주 장산리였다.부 : 高濟寅조 : 高亨鎭증조 : 高時瑾외조 : 鄭燦默처부1 : 忠州 朴源佑고한주는 1894년 장성 西二面의 유생 奇宇冕 朴義容 등과 함께 召募使에게 東學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지를 올렸다.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에게 수학하였다.만송재晩松齋를 경영했고 문집으로 외당유고畏堂遺稿가 있다.1922년에 고한주가 간재 선생의 상에 지어보낸 제문이 있다. 간재의 초명은 경륜(慶倫), 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추담(秋潭), 구산(臼山)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이 글은 고한주가 그의 스승인 간재 전우 선생이 종명한 지 23일이 지난 1922년 7월 27일에 지은 제문이다. 그는 간재 선생님의 영연 앞에 재배하고 통곡하면서 공경히 제사지냈다. 하늘이 선생님께 내린 성품은 인과 의요, 떳떳한 본성을 확립하니 사람에게 떨어지지 않네. 성인은 하늘을 근본으로 하고 군자는 성품을 높이시네. 도의가 확연한데 해처럼 밝으셨네. 여러 성인이 남기신 요결을 조심스럽게 책려하여 우리나라에 이르렀네. 아! 선생님은 남쪽지방에서 굴기하여 안연의 곤궁 속에서 스스로도 즐기어 일찍이 전재 임헌회 선생의 문하에 집지하여 예로써 극복하고 공자의 주자의 정맥을 이어 받고 율곡 이이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적전이 되셨네. 이는 샘에서 처음 물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고 불이 처음 불타오는 것과 같은 것이네. 그러나 세상은 말세로 빠져들어 인간과 짐승이 섞여 구분하기 어렵고 의관과 신발을 거꾸로 싣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네. 이에 선생님은 공자의 생각처럼 바다에 나가 중화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였네. 이에 사류들이 운집하여 문강(問講)이 이루어져 털끝과 실끝 처럼 분석하셨네. 아! 이제 선생님께서 없으시니 사문도 또한 없어지네. 그러나 주나라가 동천한 후 공자의 도가 밝아지고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감에 주자가 태어났네. 이 땅은 무슨 땅인가. 오늘은 어느 때인가. 우리 선생님을 은미하게 하여 누가 부지하는가. 소자는 늦게 선생님의 문하에 나아가 선생님에 대한 추회를 더 이상 펼 수 없으나 공경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명하니 선생님의 수택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소자의 작은 정성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참고문헌 1894년 奇宇冕 등 所志 『畏堂遺稿』
    2020-02-24 | NO.273
  • 곽해 郭海
    곽해 郭海의 처음이름은 桓이고 호는 乾止堂이다.  고려 중반의 대문호 進賢館大提學 文憲公 元振(八世)의 玄孫으로 공민왕조에 벼슬이 사온동정좌우보승중랑장으로 麗史備略에 이르기를, 공민왕조에 좌우보승랑장 郭海는 나이23세에 아버지의 벼슬을 세습하여 총관중랑장이 되었다.  신사 거란(哈丹)의 난에 조지린과 함께 영안도 용진에 나아가 싸움에 이기고 조정에 승첩을 고하니, 이 때 나이 25세였다.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金袍와 玉帶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너는 아직 장가가지 않았으니, 이제 혼인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고, 대대로 왕실에 힘을 다하기를 네가 짐에게 하는 것 같이하라.”하였다.  병신년 仲孚의 난에 명을 받아 도총사부령직을 제수 받았다. 조소생, 임원거, 조천주와 쌍성 화주 화북 九月山사이에 출전하여, 적을 크게 이기고, 西京에 계속 머물면서 12城鎭의 紅巾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군공으로 초수수사구밀직사주국삼중의 직책을 제수 받았다.  圃隱 鄭선생과 함께 국맥을 도모하다가, 圃隱이 태조의 龍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으니, 끝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광주의 소고룡방이라 불리는 곳에 숨어서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일편단심 舊國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정상 부근 건지(西北方을 등진 방향)에 집을 얽고 살았으며 乾之는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함이니 건지라 칭한 뜻을 알겠다. 매일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사모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는 항상 겸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망국의 대부이니 남의 자녀를 가르칠 수가 없다.” 하였다. 후인 고경지가 그 산을 이름하여 건지라 하였고, 그 마을을 산막이라 하였다.  건지는 공의 집이 산의 건지방향인 뜻이고 산막은 공이 와서 처음 산에 막을 지은 뜻을 가리킨다.(衣山爲幕) 그 산과 마을의 명칭이 모두 공의 유적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가히 공의 절행이 백세에 이르기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묘는 광산군 임곡면 산막동 건지산 갑좌이고, 배는 郡夫人제주고씨(司온直長 坪 女)로 합장되어 있으며 비갈과 床石이 있다.  후손 孟奎가 갈명하고 撰하였다. 아들은 思安, 思寧 형제분이며 큰딸은 李自寶(함풍인 정룡랑장)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은 이극명, 이극해 이며 둘째사위 함성군 林碩住(나주인)는 군기사정에 추증 되었고, 외손 임귀연은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入鄕顯祖 郭  海 先生  (1958년 戊戌普 수록 내용) 初諱桓號乾止堂 文憲公 元振 玄孫 恭愍王朝 官司온同正左右保勝中郞將 麗史備略曰 恭愍王朝 左右保勝郞將郭海年二十三 襲父爵爲摠管中郞將 辛巳 哈丹之亂 與趙之璘同進于永安道龍津 勝捷獻 於朝 時年二十五 王大奇之 賜金袍玉帶曰 汝未有室服 此歸娶生嘉子 世世致力於王室 如汝之於朕也 及丙申 仲孚之亂召命拜都摠司部領 趙小生林原巨趙天住 出戰于雙城和州和北 九月之間 擊走勝捷 仍留西京 掃蕩紅巾殘賊十二城鎭 以軍功超授守司寇密直使柱國三重 封海美君 麗運告訖 與圃隱鄭先生 圖扶國맥 圃隱立槿太祖龍興 遂懷不二之志 遯于光州之召古龍坊 依山爲幕而居之 一片丹心不忘舊國之恩 遇且구一堂于附近山上扁之以乾之乾之盖取諸乾乾不息 知其所止之義 日日登臨望北號慕 終身不懈 時有人來請學子 公常自謙而言曰 余亡國之大夫不可以訓 迪人子弟云 後人高景之名其山曰 乾止號其洞曰 山幕乾止稱其公之肯堂于山扁之以乾止之義 山幕指其公之來胥始依山爲幕之意 其山與洞之稱名 皆由於公之遺蹟而至今不切於此可以知公之節行 白世而不朽 墓 光山郡林谷面山幕洞乾止山甲座 配郡夫人濟州高氏父司온直長坪 墓合不부有碣床石 後孫孟奎撰碣銘 子思安見下 思寧見夜 女李自寶咸豊人 精勇郞將 子李克明李克諧 咸城君林碩住羅州人 贈軍器寺正 子林貴椽贈戶曹參議    十二世 諱 海의 長子, 思安은 孫 謙山 曾孫 益晋, 滋貞으로 이어지고          益晋은 中郞將公派의 派祖 諱          奉訓郞行禮賓侍主簿를 지낸 主簿公派의派祖 諱 儀를 낳고          滋貞은 星州목사를 지내고 牧使公派의 派祖 諱 保君을 낳았다. 次男 思寧은 孫 宜山 曾孫 茂貞으로 이어져서          參奉公派 派祖 諱 球          참봉벼슬을 지낸 敬隱公派 派祖 諱 琳          효행으로 계공랑 광릉참봉에 제수된 啓功郞公派 派祖 諱 三兄弟를 낳아 山幕洞 五代문중을 거느리게 되었다.
    2020-08-11 | NO.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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