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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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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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금병창 이영애/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8호(2014. 1. 19.)
    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이영애는 스승 박귀희 선생을 사사했다. 스승으로부터 가야금병창과 판소리를 익혔다. 그가 국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0살 때 국악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야금을 배우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가야금 병창은 민요나 단가短歌, 판소리 일부 대목을 가야금으로 연주하면서 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음악이다. 19세기 후반 남도에서 가야금 산조가 발생할 무렵 함께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명창인 신만엽申萬葉과 김제철金濟哲이 민요나 단가,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야금의 기악 특성에 실어 가야금 병창제를 창안했다. 이후 김창조, 오수관 등 초기의 가야금 산조 명인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심상건, 강태홍, 오태석, 정남희, 박귀희 등 명인들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이영애 예능보유자는 10살 때 1년 이상 가야금을 익혀 눈을 뜨자 아버지에 의해 동네 어르신들을 관객으로 연주 겸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뽐내곤 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가야금산조에 빠져 지냈다. 이때 기초를 다잡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고 한다. 3년간 피나는 연습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7년KBS 민속백일장에 광주. 전남 대표로 출전, 10월 첫째 주에 도전한데 이어 연말에 가야금산조로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계기로 향사 박귀희 및 안숙선과 함께 방송에 출연, 선후배로 연주하는 행운까지 잡을 수 있었다.이후 박귀희의 제자가 돼 일주일에 1∼2회씩 서울로 가야금병창을 배우기 위해 분주하게 오갔다. 하지만 이영애는 1년 정도 가야금을 멀리하는 일이 생긴다. 정신적 지주이자 영원한 지원자 역할을 자처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시련이 찾아왔고, 이는 깊은 슬럼프로 연결됐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운명과도 같았던 가야금을 1년 정도 멀리했다. 1년여를 보낸 뒤 어렵게 한 귀퉁이에 두었던 가야금을 꺼내 조율하고 어루만지면서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갔다. 20대 성년이 되어서는 광주시립국악원의 가야금 강사 활동을 시작했고, 그 후 1986년 전남도립국악단이 창단되자 창단멤버로 5년 동안 활동했다. 이어 광주시립국극단 단원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전주대사습에 7전8기 도전 끝에 장원을 일궈냈다. 그의 도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주대사습 장원의 기운을 이어 4년 만에 우륵전국가야금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그는 화순에 (사)한.얼가야금병창보존회를 설립, ‘제1회 향사 가야금병창대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08년 5월 순천시가 낙안읍성에서 열린 축제에서 가야금병창대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돼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를 설립했다.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을 맡아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고, 가야금병창의 최고봉인 전남 낙안 출신 오태석 명인(1895∼1953)의 현창사업을 위해 힘을 쏟아왔다. 임방울국악진흥회와 광주민속박물관회 이사를 역임했다.이영애 예능보유자는 제자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표명해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그 터전이 된 광주송원초등학교는 지난 2006년 남구로 옮겨갔으나 그 이전에는 서구 광천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25년간 꾸준한 애정을 갖고 인재를 배출해낸 곳이다. 2019.6.14. 수정
    2018-05-24 | NO.14
  • 강산제 심청가 이임례/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1998. 2. 21.)
    무형문화재 강산제岡山制 예능보유자 이임례는 이병규(판소리)와 춘향가 김상용(춘향가), 생전 목포시립국악원에서 강산제 소리를 했던 김흥남을 사사했다. 전형적으로 강산제 소리를 이어받은 이임례 예능보유자는 소리의 고장으로 불리는 1941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국악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일찍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키울 수 있었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 헌종. 철종.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 박유전朴裕全(1835~1906)으로부터 비롯된 강산제 소리를 전승한 그는 이병규에게 처음 판소리를 배운 뒤 김상용에게 춘향가를, 목포시립국악원에서 강산제 소리를 하는 김흥남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각각 배웠다. 박유전-정재근-정응민-성창순으로 이어지는 판소리 강산제(심청가)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마한 것이다. 그가 물려받은 성창순 창본 심청가는 대단히 정교한 기교가 요구되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 강산제는 전남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소리의 유파로, 서편제에 속하지만 그 기교가 뛰어나고 부침새가 정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계면조 창법에 있어 남자가 흐느껴 우는 듯한 처절하고 숙연한 ‘그늘진 목소리’로 판소리 주인공들의 소리마디 마디에 심력을 다해 갖가지 한을 표현, 고통 받는 서민들을 대신해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민중 예술로 인식되고 있다.판소리는 소리하는 사람(창唱.노래)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뤄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백白.말), 몸짓(발림)을 하며, 북을 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 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東便制를 비롯해 전라도 서남 지역의 서편제西便制,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中高制로 나뉜다. 이중 강산제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의 소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서편제의 일종을 말한다.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거의 사라졌고, 춘향가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현재 남아있다.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로 심봉사의 딸 심청이 공양미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졌으나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환생해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효도한다는 내용이다. 심청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 심청탄생, 심청어미 출상, 동냥을 다니는데 장승상댁, 공양미 삼백석, 범피중류, 인당수, 용궁, 심황후 자탄가, 뺑덕어미, 황성길, 부녀상봉, 뒤풀이의 순서로 짜여진다. 이임례 예능보유자는 그 소리를 제대로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4년 제10회 전주대사습놀이 일반부 장원을 차지한 뒤 1993년에는 제1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에서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89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졌으며, 1990년 성옥문화상 예술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1994년 이임례 원작소설 ‘휘모리’를 발간했으며, 이임례 심청가 ‘만가’ CD음반을 제작, 발표했다. 1990년 광주시립국극단 단무장을 역임했고, 1994년 전라남도립국악단 수석을 맡아 활동을 펼쳤다. 1993년 6월 그는 전주대사습 판소리 장원을 수상할 당시 서구 관할이었던 방림2동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아쟁연주자 이태백 씨가 그의 장남이다.
    2018-05-24 | NO.13
  • 광주 영산재/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3호(2014. 7. 28.)
    광주광역시 서구 화개1로 53 광주전통불교영산회불교 전통 천도의식으로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영산재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 영가를 극락으로 천도하는 의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른 죄업을 소멸하게 하는 불교의식인 영산재는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중생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부터 유래됐다. 광주 영산재靈山齋는 사단법인 광주전통불교영산회 주최로 서구 금호동 소재 태고종 법륜사 경내에서 주로 열려 왔다. 광주전통불교영산회는 1992년 창립된 이후 2018년 현재 태고종 광주 법륜사 주지 월인 스님이 회장직을 맡고 있다. 우리의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인 영산재 의식을 가꾸고 보존하기 위해 젊은 후학 발굴과 육성은 물론, 음과 무의 종합예술인 영산재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전수관 건립 등에 힘쓰고 있다. 영산회는 그동안 5.18민주항쟁 희생자 위령대재를 비롯해 종교음악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위령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수륙대재 등을 봉행해 왔다. 특히 영산재 전승과 보전에 힘쓰는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과 전수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매년 일반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산작법 시연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 시연행사는 범음범패와 바라춤, 그리고 작법 분야의 전문 스님이 각각 시연자로 나와 시련, 상단권공, 관음시식, 대령관욕, 중단퇴공, 봉송 등 주요 영산재 의식을 선보였다.대령관욕은 목탁을 치는 스님을 선두로 소라, 북, 좌발, 호적으로 구성된 취타대에 맞춰 연輦에 모신 영가를 도량으로 인도하는 시련과 부처님의 위신력과 감로의 법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의 하나이고, 중단퇴공은 신중단 기도를 위한 것이다. 시연회의 백미로 꼽히는 관음시식은 불법을 옹호하는 신중을 청해 모시는 의식이다. 고문헌에 따르면 본래 3일 동안 열리지만, 시연회는 3시간으로 간소화됐다. 이중 범음범패 분야의 혜령 스님과 바라춤 분야의 호산 스님, 그리고 작법분야의 월인 스님이 문화재 기능보유자로 각각 지정됐다. 영산재는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로 등록됐고,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만 문화재청 누리집에 내용이 등록되지 않아 전국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조치가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다. 광주영산재를 이끌며 보급 활동을 펼치는 월인 스님(광주 법륜사 주지, 광주전통불교영산회 회장)이 전승관 건립을 위해 광주 서구 벽진동 일대에 20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의 전수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2018-05-24 | NO.12
  • 눌재집 목판각/유형문화재 제16호(1990.11.15.)
    북구 용봉동 1004-4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보관 중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선생의 시문집의 목판각이다. 원래는 박상의 출생지인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의 송호영당에 영정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으나 송호영당을 1728년에 광산구 소촌동으로 이전 건립하면서 옮겼다가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눌재집訥齋集』은 원집 7권 속집 5권 동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다. 목판은 모두 370매이며 각 목판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가로 34㎝, 세로 20㎝, 두께 4㎝ 내외이다. 1판에 4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으며 크기는 모두 일정치 않다.초간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86~1568)이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1547년(명조 2)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그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속집 4권을 추록하였다. 이것은 원집과 함께 1684년(숙종 10)에 당시 호남방백이며 병조판서를 지내던 포암蒲菴 이사명李師命(1647~1689)과 녹천鹿川 이유李濡(1645~1721)에게 부탁하여 판각이 시작되어 1689년 기사사화로 일컫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694년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650~1734)가 완간하였다.1795년(정조 19)에는 도백 서정수徐鼎修가 어명을 받들어 중간하였으며, 이 판본은 광주향교 명륜당에 보관되었다가 1841년(헌종 7)에는 판본이 불에 탔다. 2년 뒤에 광주목사 조철영趙徹永(1777~1853)이 다시 중각하고 이어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도합 18편이 되었다. 유고는 시詩, 부賦, 서序, 기記, 발跋, 제문祭文, 문文으로 나누어지며 즉흥적, 직설적인 면보다 내면적 여과를 거친 차분하고 완곡한 서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목판은 광주광역시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8-05-24 | NO.11
  • 만귀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1984. 2. 29.)
    서구 동하길 10(세하동)만귀정晩歸亭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1704∼1774)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일제강점기 정자이다. 원래 건물은 소실됐으나 1934년에 다시 중건됐고, 1945년에 고쳐지었다.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시문과 만귀정을 포함한 현판 23개가 걸려 있다. 만귀정은 큰 연못에 세운 정자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墨庵精舍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중건상량문을 비롯해 중건기, 중수기, 만귀정원운晩歸亭原韻과 만귀팔경 등의 시문현판이 걸렸다. 그 중의 이곳 풍광을 이야기하는 효우당 장창의 시문 한편을 읖어본다만귀8경瑞石明月(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황룡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馬山淸風(백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낙포 농장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漁燈暮雲(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錦城落照(나주 금성산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 野外長江(들 밖에는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의 유래는 효우당이 자신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1934년 고광선이 쓴 중건기에는 ‘그 이름을 만귀라 한 것은 만년에 이곳에서 노닐며 한가히 풍류를 즐긴다’고 밝히고 있어 만귀의 정확한 어원을 짐작할 수 있다. 1750년경 극락강이 바라 보이는 곳에 초당이 있었다.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이것이 만귀정의 시초였다. 옛터에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34년에 연못(4600㎡)을 파고 인공적으로 동산을 만들어 중건했다. 고광선이 만귀정 중건기를 작성한데 이어 같은 해 이병수李炳壽가 상량문을 기록했다. 중수기는 1945년에 후손인 묵암默庵 장안섭張安燮이 기술했다. 특히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내의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를 통해 당대 시인 묵객들이 방문해 시를 짓는 등 풍류와 한시 활동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박장주를 중심으로 만귀정시회晩歸亭詩會라는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도 활용된 곳이다. 습향각은 1940년 장창우의 7세손인 묵암 장안섭이 연못 중앙에 사방 1칸으로 지은 정자로 ‘연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는 사방 한 칸의 팔작지붕으로, 송정읍장을 지냈던 장안섭의 덕행을 기려 1960년 광산군민과 친척,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마당에는 왕버들 나무가 우거져 있고,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건너가는 다리 옆에 한 쪽은 취석醉石이, 다른 쪽에는 성석醒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놓여 있다. 이 글의 의미는 ‘들어갈 때는 술에 취하더라도 나올 때는 술에 깨어 나오라’는 것이다.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들어가는 목교에는 큰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허리를 숙여 통과해야 한다. 봄(벚꽃)과 여름(창포꽃), 가을(상사화), 겨울(설경) 등 사계절과 조화가 잘 이뤄져 서구 8경 중 한곳으로 꼽힌다.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한때 스크린을 호령했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영화 ‘꽃상여’와 ‘탈선 춘향전’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인동장씨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전 조선대 교수인 시인 김종金鍾(1948~ )은 만귀정을 이렇게 노래했다.“그대 보는가/눈동자 맑은 연못의 몸/구름 탄 하늘이 꽃을 달고 내려와/허공의 갑사댕기 꼬리 사이로/우리 사랑 쏟아지게 날아오르는 꽃그늘을//그대 듣는가/손잡고 얼굴만 바라봐도/꽃대궐 차려놓고 환하게 웃는 집/집 하나를 악기처럼 껴안고 연주하면/햇빛 푸른 등지느라미로 떠다니는 노래를//그대 기다리는가/세상의 불빛 모아/호수가 손수 등불 걸어둔 자리/늦은 밤 귀가하는 주인을 반색하며/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물소리를.” 2019.4.30. 수정
    2018-05-24 | NO.10
  • 병천사 존심당/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1979. 8. 3.)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秉天祠는 지방 세력가로 알려진 지응현池應鉉(1868∼1957)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사당으로 충주 지씨들의 사우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해 전라도도원수를 지냈던 지용기(1330∼1392), 고려 명장 정지의 9대손인 정충신(1576∼1636), 서흥부사를 지냈던 지계최(?∼1636), 지용기의 8대손이자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인 지여해(1591∼1636)등 5명을 모시는 배향 공간이다. 이 사당은 경내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가운데 강당인 존심당 1동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가운데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존심당은 병천사와 마주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존심存心의 의미는 맹자 진심盡心편 1장 첫 머리글로 나온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키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에서 비롯됐다. 존심당에 또 다른 한송죽寒松竹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기록에는 있다. ‘혹독한 추위가 왔을 때도 소나무와 대나무만이 변함없는 푸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온 구절 ‘겨울이 온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에서 따른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 현판은 없다.광주 부자로 소문 난 지응현이 이 마을에 사당을 짓기 시작해 1930년대에 마무리 할 무렵 심곡재가 금호동 564번지로 이전해 일신당日新堂과 함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자료에는 병천사가 1924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018-05-24 | NO.9
  • 석아정 오방정 현판/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1997. 7. 3.)
    서구 풍암동 (개인 소장품)석아정石啞亭 오방정五放亭 현판은 일제강점기 광주를 상징하는 세 인물의 삶과 정신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현판에는 이들 세 인물의 자취가 그대로 서려 있어서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산파역할을 했던 애국지사이자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석아石啞 최원순崔原淳(1891~1936)과 광주 최초의 목사이자 광주YMCA 창설자 및 나환자와 빈민의 아버지로 일평생을 헌신했던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1880~1966), 남종화의 거두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남다른 사연이 양각돼 있다. 이 현판은 허백련 춘설헌春雪軒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다. 문화재 자료 제22호인 이 현판은 가로 94㎝×세로 46㎝이고, 두께는 3㎝이다. 앞면에는 석아정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오방정이라고 돋을새김 돼 있다. 최원순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서리를 역임한 뒤 건강악화로 광주로 낙향, 춘설헌 자리에 석아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요양생활을 했다. 현판 글씨는 1919년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자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팔분체八分體의 오른쪽이 올라가는 예서隸書에 능했던 일제강점기의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가 맡았다. 이를 오방 최흥종 목사가 물려받아 오방정이라 이름 짓고, 기거하며 생활을 했다. 그 이후 1986년 다시 건물의 이름을 허백련 춘설헌이라고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흥종이 석아정을 물려받았을 때 의재 허백련이 현판 뒷면에 오방정이라고 새겼으며, 오방정 글자 바로 윗부분에 매화그림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해방 이후 1946년 의재는 오방정을 물려받아 건물을 벽돌조로 고쳤다. 제주 서귀포 출신의 한국 근현대 서단書團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받는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1907~1997)가 춘설헌이라는 현판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재는 벽돌조 개조와 관련해 1950년에 이르러 종래의 낡은 집을 허물고 다시 벽돌 조적식 구조의 건물을 지은 뒤 집의 이름을 춘설헌으로 바꾸었다. 춘설헌은 허백련이 타계한 1977년까지 30여 년 동안 머물며 활동했던 곳으로 남종화의 산실로 통했다. 석아정 오방정 현판의 소유자는 광주시 서구 풍암동 한 개인의 소장품으로 돼 있다. 현재 의재미술관이 보관, 전시 중에 있다.
    2018-05-24 | NO.8
  • 용두동 고인돌/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1984. 2. 29.)
    서구 용두학동 길 15(용두동)용두동 고인돌[支石墓]은 광주 소재 청동시대의 대표적 지석묘이다. 이곳의 고인돌군은 남북 방향으로 3줄이 배치돼 있는데 현재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10기에 불과하다. 주위에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2∼3기 정도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서창동주민센터에서 대촌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다 그 중간쯤 왼쪽 송학산(208.9m)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반대편에는 봉황산과 봉학제가 보인다. 이곳은 약간 높은 지대로, 주변은 밭인데 묘역은 길이 40m, 너비 7m 정도의 긴 사각형의 잡종지다.용두동 고인돌은 군집형태를 이뤄 남북 방향으로 3줄이 배치돼 있는데 우측열의 보존상태가 가장 완전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10기로, 받침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만큼 이곳 고인돌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보존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10개의 고인돌 중에는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북방형 탁자식 고인돌이 1기가 있고, 3기는 남방형의 바둑판식이다. 나머지 6기는 굄돌이 없는 형식인 개석식蓋石式, 무지석식無支石式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1.5m, 너비 0.65m이며, 3개의 받침돌이 지탱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의 덮개돌은 이곳에서 1㎞ 떨어진 송학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광주 지역에서는 모두 400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매월동, 지석동 등의 17개 군집에 103기가 있다. 용두동에서 탁자식 고인돌 1기가 발견된 것이 특징적이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전남지역은 고인돌이 전국에서도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겉 형식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 포함)으로 나눠지고, 무덤 내부 형식에 따라 석관형, 석곽형, 위석형, 토광형으로 나누어진다.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다만 안내 이정표 확충이나 주차 공간 확보 등을 통해 방치된 문화유적이 아닌, 시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유적으로 거듭나도록 체계적인 관리가 요구된다.
    2018-05-24 | NO.7
  • 운천사마애여래좌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1986. 11. 1.)
    서구 금호운천길 85-15 운천사(쌍촌동) 운천사雲泉寺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은 금호지구 푸르지오 아파트 뒤편에 자리한 운천사내 석불로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다. 불상 높이가 2.1m, 무릎 폭이 2.1m에 이른다. 광주에서는 보기 드문 실내 마애불이라는 점이 역사적인 가치를 높여준다. 높이가 4m, 길이가 5.6m에 이르는 자연 암벽에 불상을 양각하고 불상 외 나머지 부분을 깎아서 파냈는데 형상을 돌출시켜 만든, 일종의 석굴 불상像이다. 그 불상 위에 건물을 지었다. 이를 전각이라는 하는데, 불보살이 모셔진 곳을 의미한다.중국 운강석굴에 늘어선 대불 가운데 하나를 연상시키는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불상에 비해 법당의 규모가 작다. 보물 제48호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北彌勒庵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과 같은 고려시대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불상에 비해 정제미나 예술미 대신, 다소 투박하고 서민적인 느낌이 다분하다. 조각양식은 32상 80종호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타원형의 넓적한 얼굴에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두터운 입술, 길게 늘어진 귀 등을 통해 근엄한 얼굴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 굵은 목과 벌어진 어깨, 결가부좌한 자세 등은 안정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어깨와 손이 크다.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뜨고 있다.머리에는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마애불에서 보기 드문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다. 윗부분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긴 하지만 이마에는 백호공이 얇게 보인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한 옷 주름으로, 다소 이완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평행계단식의 옷 주름을 형식적으로 표현했다.어깨는 넓은 편이나 앞가슴이 발달하지 못해 평범한 느낌을 준다. 팔이 유난히 긴데다 손.발의 표현이 크고, 손가락이 놓인 위치는 다소 어색하다. 불상의 손(수인手印)을 보면 다섯 손가락을 편 양손을 대일여래(비로자나불)가 자주 취하는 선정인禪定印처럼 보인다. 복부에 양손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불상 뒤로는 한 줄의 신광身光과 세 겹의 두광頭光이 있다. 가장 안쪽 두광에 연꽃무늬가 새겨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세 겹의 두광은 부처님의 빛이 나와 부처님을 새겼다는 전설과도 일치되는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빛이 나오는 듯 외곽에 둥그런 선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약그릇이라면 약사여래불이다. 그런데 약그릇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이에 대한 근거는 있다. 오래 전부터 많은 환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약사여래를 뒷받침하는 것은 또 있다. 운천사의 옛 이름은 정토사였다. 이 마애불을 약사여래라고 하는 것은 정토사라는 이름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병 치료에 영험하다는 약사여래가 동방만월세계라는 정토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하게 된 데는 원효대사가 무등산 원효사에 머물던 어느 날, 서쪽 하늘에 상서로운 기가 가득함을 보고 제자 보광화상을 그곳에 보냈더니 뜻밖에 큰 바위에서 빛이 솟아 나오므로 그곳에 이 불상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고증할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아쉽다. 이처럼 불상의 가치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점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애초 불상을 만들 때 법당 문을 열면 예전에는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을 것이지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무등산도 가려지고, ‘백팔번뇌’를 상징했을 보호각 앞에서 절까지 108계단마저 사라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2018-05-24 | NO.6
  • 유촌동 석조여래좌상/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1996. 3. 19.)
    서구 유덕로 24 유덕동주민센터 마당(유덕동)유촌동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광주광역시 서구 유촌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유덕동주민센터 앞 화단에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은 불상이나 보살상을 안치하는 자리인 대좌臺座와 등 뒤에서 일어나는 빛인 배광背光을 갖추고 있는데 네모난 대좌는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고, 광배는 심하게 훼손돼 본래의 형태와 무늬가 선명하지 않아 애초 불상이 보여줬던 조형미학의 근간은 많이 흐트러져 있다. 그나마 얼굴선이 선명한 점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애초 원형이 보존되지 못하고 변형돼 모습이 파괴되면 가치가 훼손된다. 유촌동 석조여래좌상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눈 코 입의 형상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뿐더러 어깨와 허리, 무릎이 너무 크게 조각돼 불상의 위엄이 상당부문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체 균형이 맞지 않은 점과 광배의 무늬에 근거해 조선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서구 쌍촌동 운천사에 있던 석불이었다 한다. 1939년 현 위치인 유덕동주민센터로 옮겨왔다. 다분히 기복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동해 좌상의 거처가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극락면이었던 유촌동은 사람의 왕래가 잦고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원을 빌 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운천사 소재 불상을 옮겨 와 소원을 비는 쪽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합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게 됐다는 것이다. 앞서 눈 코 입이 선명하지 않다 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부처님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코를 깎아가는 바람에 현재 얼굴 윤곽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염무늬와 연꽃봉오리로 장식하고 있으나 통통한 얼굴은 훼손이 심해 윤곽만 남아있다.머리 뒤쪽에 일부 남아있는 무늬나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 그리고 목에는 굵은 세 줄로 삼도三道가 표현돼 있으며, 옷은 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 가운데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다.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쥐고 있는 오른손의 모습 등은 뚜렷하게 남아 아미타불의 상생인上生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마모돼 모양을 판단하기 어려워 아쉽다. 신체는 당당한 어깨에 비해 팔이 짧고 허리가 가늘어 움츠려진 듯한 인상을 주며, 무릎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표현됐다. 다리와 대청을 이루고 있는 양쪽 발바닥, 옷자락은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며 직사각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가 있다. 이러한 신체 모습은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으로 꼽힌다. 그래서 유촌동 석조여래좌상은 불교 조각 분야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더 이상 파손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문제는 두고두고 숙제가 될 전망이다.
    2018-05-24 | NO.5
  • 천주교 광주대교구청 브레디관/광주광역시 등록문화재 제681호(2017. 4. 20.)
    서구 상무대로 980 광주가톨릭평생교육원 브레디관은 1961년 대건신학교 기숙사로 건립된 건물로 현재까지 신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장식요소가 배제된 단순한 형태와 기능주의적인 공간 배치, 붉은 벽돌 외벽 등 1960년대 모더니즘 건축 형태를 보존 중이다. Y자 형태의 중복도 평면구조로 지어진 브레디관은 호주 신부의 설계에 따라 호주 기후에 맞는 북향으로 설계됐으며, 옥상에 아스콘을 깔고, 일정한 양의 물을 채워 여름철에 실내온도를 낮추는 수조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따라서 여름에는 건물 온도를 내려 조금 더 시원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런 설계 기법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신학교 건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점은 아쉽다. 가령 외벽창호는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나 공동침실이 개별 침실로 바뀌면서 변형이 가해졌다. 외벽 창호의 경우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방범 새시나 모기장, 오르내리창(상하창上下窓)의 철물, 멈추는 장치 등이 변형 없이 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개방형 공동침실의 경우 개별 침실로 바뀌면서 바닥과 내부 벽이 일률적으로의 변형이 진행돼 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1958년 서울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졸업생들만으로는 한국에서 필요한 성직자 수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3대 주한 교황대사인 에가노 람베르티니(Egano Righi Lambertini)가 지방에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안해 1959년 교황청으로부터 광주에 신학교 설립을 허가받은 것이 광주가톨릭대학의 오늘날 모태가 됐다. 설립 허가를 받음에 따라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가 미국에서 학교부지 마련과 교사신축을 위한 모금을 하고 1960년 부지확보를 한 뒤 1961년 교사신축을 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62년 신입생 모집을 통해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에 돌입할 수 있었다. 대건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처음에는 문을 열었다. 1994년 교명을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바뀌었고 1998년 나주 남평으로 학교가 옮겨가기 전까지는 캠퍼스로 활용됐다. 헨리 주교의 이름을 딴 헨리관도 교구청 안에 자리하고 있다. 나주로 학부가 빠져나가자 이곳 캠퍼스는 사회교육원으로 사제와 신자 재교육 및 지역사회 평생 교육시설로 활용됐다. 영화 ‘검은 사제들’과 ‘화려한 휴가’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을 정도로 미관상으로도 국내 건축기법이 아닌, 서양의 기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어서 독특하고 아름답다. 그만큼 보존가치가 높다는 것을 입증한다. 천주교광주대교구 사제 양성 요람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브레디관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현재 교구청 건물로도 활용되고 있다.
    2018-05-24 | NO.4
  • 향림사 소장본 조상경/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2012. 11. 26.)
    서구 마륵복개로150번길 22 향림사(치평동)향림사香林寺 소장본所藏本 조상경造像經은 국내 최초로 1595년 담양 용천사에서 판각돼 인쇄된 초간본이다. 국내 3책만 발견된 희귀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상경은 불상을 조성할 때 복장물의 단식과 점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불상을 조성할 때 필요한 복장의 구성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의식을 구체화한 자료다. 1595년 담양 용천사에서 판각돼 인쇄된 초간본이며 목판본 3책 중 1책으로 알려졌다. 이 판본은 지면의 네 둘레를 하나의 선으로 둘렀다는 사주단변四周單邊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이 있으며, 내용은 9항 20자씩 배열돼 있다. 책자 가운데 접히는 판심版心의 상하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가 있다. 조선시대 승려인 용허聳虛가 여러 경전에 산재해 있는 불보살상의 조성에 대한 제반 의식과 절차에 관한 내용을 모아 편찬했다. 현존 조상경 판본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됐으며, 불보살상 조성에 대해 고려 초 13세기 중엽에 간행한 불교 경전인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등에서 불상 조성 연원 및 공덕에 대해 인용해 싣고 여러 예시를 들고 있다.부처가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의 청으로 도리천에 올라가 여름 석 달 동안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하느라 계시지 않으므로, 우전왕이 부처를 흠모한 나머지 부처와 똑같은 등상을 조성하여 경배한 것이 불상의 시초임을 밝혔다. 불상을 조성해 봉안하는 공덕이 크다는 것과 이어서 제불의 복장단의 의식절차를 설명하고 그 의식을 집행할 때 독송하는 진언을 범어梵語Sanskrit와 한문, 한글로 병기했다. 조상경은 불보살상 조성에 관한 의의와 의식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 책이며, 불상 조성에 필요한 경전과 같은 책이다. 경 이름을 차용한 현재도 사용하는 불교의식집으로 가치가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지질 및 인쇄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는 것이다.
    2018-05-24 | NO.3
  • 화담사/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1993. 3. 20.)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광주지하철 화정역 4번 출구로 나와 하동정씨 추선회관 쪽으로 내려오다 왼쪽 골목으로 꺾어 조금 걸어 들어가면 도심과는 낯선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아파트를 담벼락과 병풍 삼아 자리하고 있는 화담사花潭祠가 그곳으로, 하동 정씨 사당이다. 1776년(영조52)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우다. 하동 정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보성군수(1472∼1477)를 역임한 9세손 정화가 퇴직한 뒤 머물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화담사가 있는 이 지역은 ‘옛부터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무리지어 피어난다’고 하여 군분群芬이라 했다(광주읍지에는 ‘군분’ 한자가 軍盆으로 기록됨). 군분은 향기香氣를 비롯해 아름다운 덕행이나 명성名聲 혹은 향기香氣롭다, 향香내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 서구 도로명 군분로軍盆路는 여기서 기인했다. 화담사는 1458년 문절공 정수충鄭守忠(1401∼1469)에 대한 집을 지어 영정을 모시라는 왕의 교시가 내려졌고, 1478년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鄭和(1434∼1505)가 군분으로 이사,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만들면서 출발한다. 하동 정씨 집성촌이 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뒤 1776년 화담사 사우 건축을 발의했다. 1868년(고종5)에 있었던 서원철폐령 때 위기를 맞았으나 지붕을 덮어 은폐, 보존함으로써 철훼를 피할 수 있었다. 제례만을 중단했다가 1905년 광주향교의 발의로 복설復設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조선시대 때는 서원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사립학교처럼 2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묵은공 정희鄭熙(?∼1348)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그의 아들 문경공 정초鄭招(?∼1434).손자 문절공 정수충과 약포공 정오도鄭吾道(1647∼1736), 충장공 민제장閔濟章(?∼1728)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처음에는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었다. 1784년에 그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게 됐다. 1796년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민제장을, 1809년에는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그의 할아버지인 정희와 세종 때 학문 및 예술, 과학, 기술 등에 업적을 남기고 청렴했던 그의 아버지인 정초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905년 다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1906년 송시열의 제자로 충효가 뛰어났던 정오도의 위패를 추가하고,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지금의 틀을 갖추게 됐다.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화담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앞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洋洋門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廳之齋와 서재悅乎齋를 두고 그 밑에 외삼문인 입덕문入德門을 배치하는 등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2018-05-24 | NO.2
  • 회재유집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1996. 3. 19.)
    서구 풍암동 769-1 음성박씨문중회재유집목판懷齋遺集木板은 조선 선조 때 사헌부 시평 등을 지낸 문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이 남긴 유집의 목판으로 18세기에 제작됐다. 현재 가로 54.5㎝×세로 33㎝의 69매가 남아있다. 판면은 좌우 쌍변으로 가로 34.5㎝×세로 21㎝이고, 반곽은 가로 16.5㎝×세로 21㎝에 계선이 있고, 반엽에 글씨는 10항 20자로 되어 있다. 책지冊紙의 접혀진 한가운데에 물고기꼬리를 반으로 접은 모양인 하향흑어미下向黑魚尾가 있으며, 판심제版心題가 있다. 문집은 임진왜란 이전과 전쟁 당시의 기록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참여한 박광옥의 관련 기록과 호남사림의 교유관계 및 인쇄술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부록(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 수적을 새긴 별부로 되어 있으며, 총 137면이고, 양면으로 판각돼 있다. 임진왜란 전후를 연결하는 시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과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으로써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부록 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 별부는 수적을 새긴 것이다. 목판 내용은 목록 16면, 1권 59면, 2권 10면, 부록 상 20면, 부록 하 22면, 별부 10면으로 총 137면이고, 양면으로 판각되어 69매로 되어있다. 목판의 규격을 살펴보면 가로 54.5cm×세로 33cm로 되어 있으며, 판면은 좌우 쌍변이 있는데, 가로 34.5cm, 세로 21cm이다. 반곽半廓은 가로 16.5cm , 세로 21cm에 유계有界가 있고, 반엽半葉에 글씨는 10행 20자로 돼 있다. 가운데 하향흑어미下向黑魚尾가 있으며, 판심제版心題는 ‘회재유집’懷齋遺集이라 했다. 1799년에 종8대손 박성일朴性一이 목판본으로 간행했고, 1847년에 종7대손 박승언朴承偃이 부록을 추가했다. 종9대손인 박난혁朴蘭赫이 홍직필洪直弼의 서문을 받았으나, 이 서문은 목판본으로 판각되지 않은 상태다. 1983년 홍직필과 김호영金鎬永의 서문, 강인환康仁煥의 발문이 추가돼 회재영당에서 발행한 ‘회재유집’ 중간본이 현존한다.회재유집 판목은 목록 16면, 1권 59면, 2권 10면, 부록 상 20면, 부록 하 22면, 별부 10면 등으로 이뤄져 있다.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부록(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 수적手蹟(친필)을 새긴 별부別附로 돼 있다. 총 137면이며, 양면으로 판각돼 69매로 돼 있다.1권에 실린 시는 기대승, 고경명, 김언기, 이항 등 수많은 교우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이중 만사와 친지들과 화답한 시, 각 지역 방문 때 감회를 시로 표현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풍영정팔경시’風詠亭八景詩를 비롯한 광주 무등산과 증심사. 희경루. 선암역, 고창 방장산, 나주 불회사, 광양 증흥사 등을 방문한 느낌을 노래했다.잡저는 한문수양재이설漢文隋煬帝異說과 오공설蜈蚣說, 서는 족보서, 선도향약서船道鄕約序, 기는 향교비음기鄕校碑陰記, 봉서封書인 임진행재소상소壬辰行在所上疏 등이다. 부록 하권은 임인도내유사청정포상소문壬寅道內儒士請旌褒上疏文, 임인건사시유생상순찰사서壬寅建祠時幼生上巡察使書, 의열사김충장공배향시제문義烈祠金忠壯公配享時祭文, 의열사중수상량문義烈祠重修上樑文, 청시상소請諡上疎, 그리고 행장行狀과 묘표墓表 등이다. 별부는 11편의 친필을 목판에 새긴 것으로 이 본문은 앞 시문의 내용 중에 있는 시들이다.부록은 상하로 구분해 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과 선생 사후 사우건립 및 시호를 청하는 상소문 등이며, 별부는 친필을 수록한 것이다. 회재 박광옥은 1546년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나주에 집을 짓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했다. 1574년 다시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후에는 영광과 밀양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권율 장군을 지원해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회재 박광옥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서구 풍암동 769-1 운리사雲裏祠(2018년 6월부터 벽진서원)에 보존되어 오다가 지금은 음성박씨 문중회관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2018-05-24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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