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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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봉 기대승 선생 연보(高峯先生年譜) 〔목판본〕

세종(世宗) 가정(嘉靖) 6년 중종대왕(中宗大王) 22년


○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갑진시(甲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니,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물재(勿齋) 선생 기진(奇進)이 아우 준(遵)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는데 아우가 논죄를 당하였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당세에 대한 뜻이 없었으며, 모부인(母夫人)마저 돌아가시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마침내 광주로 물러가 살았으므로 선생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보충〕 나는 가정 정해년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 -중종대왕- 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12년 계사(1533) 선생 7세

○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5, 6세부터 어른처럼 의젓해서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보충〕 계사년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13년 갑오(1534) 선생 8세

○ 모부인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른처럼 몹시 애통해하였다.

〔보충〕 갑오년 초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가군(家君)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았다.


14년 을미(1535) 선생 9세

○ 《효경(孝經)》을 읽었다. 손수 《효경》을 베꼈는데 자획이 해정(楷正)하였다. 선생의 백씨(伯氏) 참봉공(參奉公)이 교외에서 각저(角觝 씨름 ) 놀이를 구경하고자 하였는데, 물재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참봉공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피해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형의 손을 잡고 “아버지께서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형이 만약 피해 달아난다면 이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가중시키는 것이고 형의 잘못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붙들고 돌아왔다.

〔보충〕 을미년에 《효경》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15년 병신(1536) 선생 10세

○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한곳에 정좌한 채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하지 않았다.

〔보충〕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가군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


16년 정유(1537) 선생 11세

○ 물재공이 서울로 가면서 일을 맡아보는 계집종으로 하여금 선생의 형제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하루는 계집종이 그 남편과 함께 침실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똑바로 서서 눈여겨 살피더니 계집종이 밥을 먹으라고 해도 응하지 않고 울었다. 계집종이 야단을 치자 선생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더니 이튿날 새벽에 서당으로 가서 의탁하였다. 스승이 동몽(童蒙)이 배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청하여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일과 외에도 동몽이 배우는 것과 《중용(中庸)》, 《맹자(孟子)》 등의 책까지 아울러 외웠다.

○ 김공 집(金公緝)이 선생이 육갑(六甲)과 상생(相生)의 이치에 능통한 것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너의 계부(季父) 덕양(德陽) 선생이 성리학(性理學)을 궁구하여 사림(士林)의 영수가 되었는데, 네가 역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하는구나.” 하였다. 이어 ‘식(食)’ 자를 부르며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자 선생은 응하여 읊기를 “밥 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하니, 오래도록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12세에 《중용》, 《고문진보(古文眞寶)》, 《맹자》 등의 책을 읽었으며, 13세에 《사략(史略)》을 읽었는데 문리가 통창하였다.-

〔보충〕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 가을까지 가군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군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 및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었는데,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 및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이었다.

이 당시 나의 외조부의 첩(妾)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어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가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後集)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이었다.

이때 선배(先輩)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가군에게 《사략》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이요 달은 1월이었다.


19년 경자(1540) 선생 14세

○ 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여 날마다 한 권씩 끝까지 읽었는데, 문을 닫은 채 차분히 보았으며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보충〕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고찰하시고 또 그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


20년 신축(1541) 선생 15세


○ 늘 선대인(先大人)이 훈계한 말씀을 손수 기록하여 좌우에 써 두고 날마다 노력하면서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았으니 지금쯤에는 거의 성취되었어야 하는데도 기질이 범범하여 여전히 어리석으니, 생각할수록 통탄스럽다. 지난날의 잘못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소씨(邵氏)는 〈문견록(聞見錄)〉을 남겼다고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차기(箚記)를 써서 잊어버리지 않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에 들은 것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완미(玩味)하고자 한다.” 하였다.


○ 이해 늦봄에 〈서경부(西京賦)〉130구(句)를 지었다. 선생 16세.


〔보충〕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부터 신축년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가군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니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자로 삼아 오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들을 자식처럼 여겨,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시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를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을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告)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를 지었다. 용산(龍山)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22년 계묘(1543) 선생 17세


○ 선생은 선부인(先夫人)이 일찍 별세하시어 나이가 어려 복을 입지 못한 것을 슬퍼해 휘신(諱辰)이 다가올 때마다 한 달 전부터 백의(白衣)를 입고 소찬(素饌)을 하였다.


○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읽었다.


〔보충〕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詩賦)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종유하였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모두 100여 구(句)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서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에서 원부(元賦)의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길이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 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책을 싸 들고 산재(山齋)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6월 그믐에 회합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1일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맞았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다고 하겠다.


23년 갑진(1544) 선생 18세


○ 《심경(心經)》을 읽었다. 의리를 강구하는 한편 뜻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문장을 지을 적에는 오로지 과식(科式)만을 일삼지 않았다.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다.


〔보충〕 다음 해 갑진년에 목사 송공 순(宋公純)이 유생(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맞았는데,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었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정월 초하루가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햇수도 적은 햇수가 아니건만, 포기를 해 버리고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권면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써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24년 을사(1545) 선생 19세


○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림하고 소식하였다.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종일토록 식음을 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였다. 일찍이 책 한 편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25년 병오(1546) 선생 20세


○ 가을에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입격하였다. 선생 21세, 1월에 반궁(泮宮 성균관 )에 유학하였다.


27년 무신(1548) 선생 22세


○ 나주 충위(羅州忠衛) 함풍(咸豐 함평(咸平) ) 이임(李任)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8년 기유(1549) 선생 23세


○ 일재(一齋) 선생 -성은 이(李), 명은 항(恒)이다.- 을 배알하였다.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 )에 모두 2등을 하였다.


29년 경술(1550) 선생 24세


○ 8월 10일, 아들 효증(孝曾)이 태어났다.


30년 신해(1551) 선생 25세


○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다.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下等)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곧바로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26세, 27세-


33년 갑인(1554) 선생 28세


○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봄에 용산(龍山) 정 선생(鄭先生 정희렴(鄭希廉))을 곡(哭)하였다.-


34년 을묘(1555) 선생 29세


○ 1월 15일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하였다. 3월에 집 뒤 동쪽 언덕에 장례하였으며, 묘지(墓誌)를 지었다.


35년 병진(1556) 선생 30세


○ 3월에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의 묘를 옮겨 선고(先考)의 묘소 동쪽에 안장하였는데 봉분은 다르고 묘역은 같다. 〈천묘기(遷墓記)〉를 지었다.


36년 정사(1557) 선생 31세


○ 3월에 복제(服制)가 끝났다. 이달에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였다.


○ 《주자문록(朱子文錄)》이 완성되었다.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37년 무오(1558) 선생 32세


○ 4월에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였다.


○ 8월에 고양(高陽)으로 가서 선조의 묘소에 배알하였다.


○ 정추만(鄭秋巒)이 찾아와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대해 강론하였다.


○ 10월에 문과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달에 퇴계(退溪) 선생을 배알하고 처음으로 사단ㆍ칠정을 발론하였다.


○ 11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38년 기미(1559) 선생 33세


○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 )의 고과에서 하등을 받았다.


39년 경신(1560) 선생 34세


○ 8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사단ㆍ칠정을 논하였다.


40년 신유(1561) 선생 35세


○ 9월에 아들 효민(孝閔)이 태어났다.


○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 서울로 들어가 사은(謝恩)하였다.


○ 3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 5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 12월에 대교(待敎)로 천직(遷職)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에 또 봉교(奉敎)로 천직되었으며, 임금의 소명(召命)이 있었다. -36세, 검열(檢閱)에 배수되었으며 봉교(奉敎)로 승천하였다.-


42년 계해(1563) 선생 37세


○ 1월에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였다.


○ 3월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 4월에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주서에서 체직되었으며, 옮겨 제수되었다.


○ 5월에 예습(隷習)에 중등(中等)을 받았다. 봉교에서 체직되고 부사정(副司正)에 제수되었다.


○ 8월 17일에 논박을 당하였다. -이량(李樑)이 헌부(憲府)를 사주하여 선생과 박소립(朴素立),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을 논박하였는데, 선생을 괴수로 지목하여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였다. 며칠 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핵하여 그들을 축출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다시 명하여 서용(敍用)하였다.-


○ 19일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 9월에 예문관 봉교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 25일에 청궁(靑宮)의 부음을 듣고는 곡읍(哭泣)하는 예를 행하였다.


○ 10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으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갔다.


○ 11월에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배수되었다.


43년 갑자(1564) 선생 38세


○ 3월에 병으로 정사하여 수찬에서 체직되었으며, 전적(典籍)ㆍ지제교(知製敎)로 옮겨 배수되었다.


○ 6월에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에 배수되었다.


○ 10월에 병조 좌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12월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정사하여 체직되었으며, 병조 좌랑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44년 을축(1565) 선생 39세


○ 2월에 병조 좌랑에 배수되었다.


○ 6월에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이달에 또 이조 정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10월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겸직하였다.


○ 11월에 휴가를 청해 남쪽으로 귀향하였는데, 그 길에 전비(前妣) 방씨(房氏)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묘는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는데, 왕래할 때마다 매번 성묘하였다.-


○ 12월에 노소재(盧蘇齋)가 양이(量移)되어 진국원(鎭國院)을 지나갈 때 선생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논하였는데, 소재는 정암(整菴)의 소견을 적확하다고 하였다. 뒤에 선생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논변하였다.


45년 병인(1566) 선생 40세


○ 4월에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예조 정랑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6월에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와서 ‘이주(二主 두 신주 )’의 뜻에 대해 물어 선생이 논변하여 대답하였다. 뒤에 〈이주설(二主說)〉을 지어 보냈다.


○ 이조(吏曹)에서 선생이 일찍이 본조를 거쳤다고 하여 두 자급을 초수(超授)하였는데, 선생은 기어이 고칠 것을 청하였다.


○ 10월에 통선랑(通善郞)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에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지제교에 배수되었으며, 재차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이달에 또 사인(舍人)으로 승천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융경(隆慶) 원년 정묘(1567) 선생 41세


○ 2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3월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4월에 사인ㆍ지제교에 배수되었으며, 이달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배수되었다.


○ 5월에 홍문관 응교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 10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배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융경 2년 무진(1568) 선생 42세


○ 1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고 홍문관직제학 겸 교서관판교(弘文館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배수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 2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에 배수되었다. -당시 표종형(表從兄) 박충원(朴忠元)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대(兼帶)하고 있었으므로 겸춘추는 하비(下批)하지 않았다.- 이달에 또 우부승지로 승천하였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 3월에 전위사(餞慰使)로 의주(義州)로 갔다가 이달에 복명(復命)하였다.


○ 4월에 병으로 승지에서 체직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 7월에 퇴계 선생을 우사(寓舍)에서 배알하였다.


○ 8월에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고 공조 참의에 배수되었다.


○ 11월에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배수되었다.


○ 12월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천하였다.


융경 3년 기사(1569) 선생 43세


○ 3월에 퇴계 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여 강가의 농막에서 함께 유숙하였으며, 봉은사(奉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였다. 배 위에서 한 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퇴계 선생과 작별하다〔奉別退溪先生〕〉를 드리자, 퇴계 선생 역시 화운(和韻)하여 답하였다. 퇴계 선생이 여덟 수의 칠언절구로 된 〈매화시(梅花詩)〉를 꺼내어 선생에게 보여 주며 화답을 요구하였다. 선생이 또 퇴계 선생을 저자도(楮子島)까지 따라가 송별하였다. 이달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 4월 16일에 문소전(文昭殿)을 봉심(奉審)한 뒤 예궐(詣闕)하였다. 이달에 좌승지에 배수되었다.


○ 6월 4일 오시(午時)에 문정전(文政殿)에서 면대(面對)할 것을 청하여 김개(金鎧)의 일에 대해 분명하게 논변하였다.


○ 7월에 병으로 정사(呈辭)하여 승지에서 체직되었다.


○ 8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다.


○ 9월에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었다.


융경 4년 경오(1570) 선생 44세


○ 2월에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도성을 나와 한강에서 유숙하였는데 온 조정이 와서 전별하였다. 김계 회숙(金啓晦叔)과 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이 강가에서 유숙하자 선생이 절구 2수를 보여 주었는데,


천 리 길 돌아가려니 넋이 끊어지는데 / 千里歸程欲斷魂
종남산의 안개는 대궐 문을 가렸네 / 終南烟霧掩修門
성명하신 우리 임금 빠짐없이 비추나니 / 吾君聖明無遺照
비방 두려워 번거로이 아룀을 꺼리지 말라 / 恐被人譏不憚煩



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 / 歲月悠悠水共流
천기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 / 天機如許不曾留
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하던 곳 / 前年惜別傷心地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 / 今日南歸亦自愁


하였다. -지난해 퇴계 선생을 송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한 것이다.-


○ 5월에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다. -낙암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있다. 그 아래 동쪽에 또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동료(東寮)’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편지에 “집에서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초암(草庵)을 새로 지었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쉴 곳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낙(樂)’ 자로 현판을 걸고자 하는데, 이는 전에 보내 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원하고 사모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 6월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생은 의리가 이미 부합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귀향하였는데 조정에서 부경사에 충원하였다. 이 때문에 소장(疏章)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 7월에 재차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 12월에 퇴계 선생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곡읍하는 예를 행하고 몹시 슬퍼하였다.


융경 5년 신미(1571) 선생 45세


○ 1월에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 조제(弔祭)하였다.


○ 2월에 도산으로 사람을 보내 전제(奠祭)하였다. 이달 19일에 종가(宗家)에서 시사(時祀)를 지낸 뒤 저녁 무렵에 귀전암(歸全庵)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孝曾)과 유은(柳溵), 김경생(金景生), 이운홍(李運鴻), 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이 산중턱을 둘러보더니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해 보이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모름지기 나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록 해라.” 하였다.


○ 3월 13일에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서석산(瑞石山)으로 가서 유람하였는데 따라간 문인들이 몹시 많았다. 이달에 돌아와 가묘에 배알하였다.


○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弘文館副提學兼經筵修撰官藝文館直提學)에 배수되었으며, 소명이 있었다.


○ 5월에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다. 이달에 다시 상이 소명을 내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였는데 소장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다. 이달에 문인들과 〈태극도(太極圖)〉에 대해 강론하였다.


○ 8월에 순천(順天)의 사인(士人) 허사증(許思曾)이 와서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를 부탁하였다.


○ 9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융경 6년 임신(1572) 선생 46세


○ 2월에 아들 계업(啓業)이 태어났다. 이달에 성균관 대사성에 배수되었다. 25일에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27일에 소명에 달려갔다. -당시 선생이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었기 때문에 길을 떠난 것이다.- 이달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 4월 2일에 지나가는 길에 이일재(李一齋 이항(李恒) )를 배알하였다. 3일에 소명이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청주(淸州)로 가서 전모(前母) 방씨(房氏)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이달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은하였다.


○ 5월에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 7월에 공조 참의ㆍ지제교에 배수되었다.


○ 9월에 대사간에 배수되었는데 그날 곧바로 병으로 정사(呈辭)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 10월 3일에 남쪽으로 귀향하니 온 조정이 와서 전별하였다.


○ 10일에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15일에 태인(泰仁)에 도착하였는데, 병이 더욱 악화되어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였다. 25일에 병이 위중하였는데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급히 달려와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길고 짧은 것은 명운(命運)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개의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넉넉하여 문장에 진력하다가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터득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공부가 부족한 나머지 늘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 엄숙하게 날마다 반성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강석(講席)에서 옛 성현의 면모를 접하여 강론한 것으로 말하면 저도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학문이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몹시 송구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몇 년이라도 더 살아서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며 학자들과 함께 끝까지 강론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크나큰 다행일 텐데,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이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집안일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척박한 전지 몇 마지기가 있으니 자손들이 자연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제가 그대의 집으로 가서 죽고 싶으니 내일 떠나야겠습니다. 그대의 집에서 며느리를 봤으니 이는 우리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제 병이 비록 중하긴 하지만 힘을 다해 나아가 거기에서 마치렵니다.” 하였다. 28일에 시중드는 사람에게 길을 재촉하여 매당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병을 돌보던 사람들이 힘들게 거동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대로 머물며 조리하기를 청하자 선생은 “내가 곧 죽을 것인데 내 어찌 공해(公廨)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가마에 오르기에 앞서 부축을 받아 서서 옷을 정제하고는 갓을 가져와 씌우라고 명하였다. 시중들던 사람이 바로 올리지 않자 억지로 씌우라고 재촉한 다음 가마에 들어갔다. 저녁에 매당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린 뒤 다시 갓을 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병을 돌보던 사람들이 들어가 문후(問候)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이곳에 도착하니 기운이 살아나는 것 같다. 객이 많아 주인집이 폐를 당하니 자네들은 머무를 필요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상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고 승정원의 서장(書狀)까지 보냈는데, “지금 듣건대 그대가 태인현(泰仁縣)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까지 앓고 있다 하니 실로 내 마음이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吳忭)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조리하도록 하라.”는 유지였다. 오변이 오는 도중이었는데 선생은 이미 별세하였다. 30일 저녁에 선생은 아들 효증에게 명하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가 잠시 뒤에 다시 누웠다. 효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경박스러우니 진중한 의사를 지닌다면 내 걱정이 없겠다.” 하고는 말이 끝나자 눈을 감았다. 밤 2경에 기증(氣症)이 치솟아 시중을 들던 사람이 약을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4경에 큰 바람이 일고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선생께서 졸하였다. 닭이 이미 운 뒤였으니 이날은 곧 11월 1일이었다.


선생이 태인에 있을 때 원근에서 문병하러 온 문인들이 몹시 많았는데 매당에 도착한 뒤 일찍 돌아가도록 하였으며, 머물던 수십 명은 호상(護喪)까지 하고 돌아갔다. 부음이 서울에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였고, 서울 사람들은 종남산에 있는 선생의 우사(寓舍)에 모여들어 조곡(弔哭)하였으며, 조정은 관(官)에서 상례와 장례를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이듬해 계유년(1573, 선조6)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생이 잡은 터를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모여들어 장례에 참례한 이들이 수백 명이었다.


[주-D001] 준(遵) : 1492~1521.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ㆍ양덕(陽德),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에 《복재집》,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으며, 시에도 능하여 《해동시선(海東詩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1545년(인종1)에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주-D002] 〔보충〕 : 이하 이 표시를 하고 왼쪽 여백을 두어 문단을 구분한 부분은 속집 2권 〈자경설(自警說)〉의 내용을 해당 시기별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D003] 나의……외조모 : 뒤의 문맥과 연관 지어 볼 때 외종조모가 되어야 할 듯하다.

[주-D004] 소씨(邵氏)는……하니 : 소씨는 소옹(邵雍)의 아들 소백온(邵伯溫)을 가리킨다. 소백온이 〈문견록(聞見錄)〉을 지었는데, 그의 작은아들 소박(邵博)이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문견후록(聞見後錄)〉을 남겼으므로 후세에 소백온의 〈문견록〉을 〈문견전록(聞見前錄)〉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주-D005] 용산(龍山) : 정희렴(鄭希廉 : 1495~1554)의 호이다. 본관은 서녕(瑞寧)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주-D006] 서정부(西征賦) :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작품이다

.[주-D007] 휘신(諱辰) : 기일(忌日)이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주-D008] 과식(科式) : 과거의 형식이다. 수 양제(隋煬帝)가 진사과(進士科)를 제정하여 시부(詩賦)와 책론(策論) 같은 시험 과목을 정하였는데, 이것이 과거의 형식을 갖춘 시초이다

.[주-D009] 곡림(哭臨) : 왕이나 왕비의 초상 때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곡하는 예식이다.

[주-D010] 일재(一齋) 선생 : 일재는 이항(李恒 : 1499~1576)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에 《일재집》이 있다.

[주-D011] 정추만(鄭秋巒) : 추만은 정지운(鄭之雲 : 1509~1561)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이다. 저서에 《천명도설(天命圖說)》이 있다.

[주-D012] 청궁(靑宮) : 동궁(東宮)을 이른다. 오행(五行)의 설에서 청(靑)은 동쪽〔東〕 또는 봄〔春〕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궁을 청궁 또는 춘궁(春宮)이라고도 한다.

[주-D013] 노소재(盧蘇齋) : 소재는 노수신(盧守愼 : 1515~1590)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주-D014]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노수신이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다가 이때 괴산(槐山)으로 양이되는 길이었는데, 고봉이 진국원(鎭國院)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주-D015] 정암(整菴) : 명나라 때의 학자인 나흠순(羅欽順 : 1465~1547)의 호이다. 자는 윤승(允升)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벼슬을 사양하고 20여 년간 시골에서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에 전념하고 《곤지기(困知記)》를 지었으며, 문집으로는 《정암존고(整菴存稿)》가 있다. 《明史 卷282 羅欽順列傳》

[주-D016]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논변하였다 : 노소재는 《곤지기》를 옳다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그의 잘못을 통박하였다. 그 후 무진년(1568, 선조1) 5월 노소재와 또다시 《곤지기》의 내용을 논하면서 그것이 옳은 것 같으나 잘못되었음을 논척하였으며, 기사년(1569)에는 〈곤지기론〉을 지어 논변하였다. 이 내용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자세히 보인다.

[주-D017] 김계(金啓) : 1528~1574.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회숙(晦叔), 호는 운강(雲江)이다. 1552년(명종7) 문과에 급제한 후 헌납을 거쳐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 도의를 강론하였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주-D018] 박충원(朴忠元) : 1507~1581.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ㆍ정관재(靜觀齋),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저서에 《낙촌유고》가 있다.

[주-D019] 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 : 1526~?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경주, 자는 이정(而精), 호는 정암(靜庵)ㆍ잠재(潛齋)이다. 퇴계의 문인이다.[주-D020] 김점(金坫) : 본관은 부안, 자는 경숙(敬叔), 호는 매당(梅塘)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고봉의 큰며느리의 부친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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