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43
게시물 검색 폼
  • 개산송당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43세 때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았다. 방죽 위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이 정자에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성리학을 논했다. 그는 당대를 함께 산 광주 출신의 고봉 기대승(1527~1572)과는 소년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고봉은 1년 아래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의지교道義之交로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한다. 개산송당蓋山松堂은 명종 때 개금산 아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 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집의 당호堂號이다. 오늘날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이다. 30세 무렵인 1556년에 개산송당에 머물면서 제자를 기르고 도학道學(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1523~1589)과 제봉 고경명(1533~1592)과도 우의가 깊었으며, 23살이나 차이가 난 풍영정의 주인 김언거(1503~1584)와의 사이도 돈독했다. 극락강의 뱃길을 따라 풍영정을 자주 찾은 이유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이이李珥, 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 목사 유경임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 학규學規를 바로잡아 생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다음, 사전私田과 노비를 향교의 비용에 보탠다. 향교의 중수를 기념하여 흥학비興學碑를 세울 때 고봉은 비문을 짓고, 회재는 비석의 뒷면에 문장[碑陰記]을 새긴다. 이는 당시 고봉과 회재가 광주의 대표적인 학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2018-05-24 | NO.43
  • 경렴정
    서구 운천동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의 경렴정景濂亭이다. 주인은 경렴 탁광무卓光茂(1330∼1410)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익점, 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탁광무는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儀로서 신돈에 아부하여 행패를 부리는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신돈 일파의 전횡에 맞서다가 모함당하고 낙향했다. 이때가 1370년대로 보인다. 문헌에 나타난 경렴정 역시 탁광무의 문집인 '경렴정집景濂亭集' 권1 경렴정 편액이라는 초계 정씨가 지은 시구에 ‘해동형승천호남海東形勝擅湖南 상유렴정하유담上有濂亭下有潭’이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광주 고문학의 시조격에 해당한다. 이 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려했던 답답한 마음[遣悶]을 표현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싯구에서 ‘호남’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 제97권 설편說遍에 ‘경렴정명후설景濂亭銘後說’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이야기가 있다. 정도전은 1377년 가을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길에 전남 장성의 진원 불태산 취봉사鷲峯寺에서 “스님이 멀리 선생 댁을 가리키는데, 하얀 돌 맑은 샘 있는 골짜기가 그윽하군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탁광무가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생의 말년을 지냈다고 전한다. 하얀 돌[白石] 맑은 샘 골짜기[泉谷]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오늘날 광주시 북구 석곡동石谷洞 인근이라고 하고, 후손인 광주의 탁인석 박사는 운천호수 인근이라고 말한다. 정자 이름은 ‘염계濂溪를 경모景慕하라’는 뜻으로 익재 이제현이 지었다. 염계 주돈이는 ‘우주와 생명의 대서사’로 일컬어지는 ‘태극도설’로 성리학의 지평을 열었던 이다. 탁광무는 풍월을 벗 삼은 듯 우주에 안긴 듯, 홀가분하고 편안하였다.그의 아들인 문정공 죽정 탁신(1367∼1426)도 광산구 월계동 천곡에 정자를 지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기록에는 주춧돌만이 남아있는 데 노송이 있어 탁씨의 소나무가 있는 정자라는 뜻에서 탁송정卓松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탁신의 둘째부인은 광주 정씨로 이때 탁씨는 이미 광주 토반에 들었던 것 같다. 이제현이 탁광무의 정자에 경렴정이란 이름을 붙여준 사실은 탁광무의 문집 <경렴정집景濂亭集>에 올라 있다. 탁광무의 싯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경렴정익제소명 景濂亭益齊所名 라향인전강작안 懶向人前强作顔 사람들 앞에서 억지 웃음 짓기 싫어수정종일대청산 水亭終日對靑山 온종일 물위 정자에 앉아 청산만 바라보네오가기호여시이 吾家嗜好與時異 우리 집 기호는 시속과는 다르고차지청유비세한 此地淸幽非世閒 이 땅의 맑고 그윽함이 한가한 세상은 아닐세풍월무사수처족 風月無私隨處足 풍월은 누 구 것도 아니니 어디서나 마음 따라 만족하고건곤대도방여한 乾坤大度放予閑 천지는 도량이 커서 한가한 나를 놓아두네소요자적망기리 逍遙自適忘機裏 만사를 다 잊고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와간장공권조환 臥看長空倦鳥還 누워 바라보는 먼 하늘에 게으른 새 돌아오네     景濂亭集跋少學於光山金文正先生之門矣 遂卜地於光州瑞石之陽。築一小室。與光山鄭先生文景公爲友作亭于光州別墅。鑿地種蓮。築島池中。一嘯一詠。自得逍遙焉。李益齋 齊賢 文忠公。題其扁曰景濂亭景濂亭銘後說 謙夫卓先生 光茂 於光州別墅。鑿池種蓮。築土池中爲小島。構亭其上。日登以樂。益齋李文忠公命其亭曰景濂。蓋取濂溪愛蓮之義。欲其景慕之也。未見其物則思其人。思其人則必於其物致意焉。感之深而厚之至也。嘗謂古人之於花草。各有所愛。屈平之蘭。陶潛之菊。濂溪之於蓮是也。各以其中之所存。而寓之於物。其意微矣。然蘭有馨香之德。菊有隱逸之高。則二子之意可見。且濂溪之言曰。蓮。花之君子也。又曰。蓮之愛。同予者何人。夫以其所樂。與人共之。聖賢之用心也。而嘆時人之莫己知。以俟後來於無窮。苟知蓮之爲君子。則濂溪之樂。庶乎得矣。然因物而得聖賢之樂。亦豈易言哉。黃魯直曰。周茂叔胸中灑落。如光風霽月。程子曰。自見周茂叔。每令尋仲尼顏子樂處所樂何事。自是唫風詠月。以歸有吾與點也之意。道傳私竊以爲景濂有道。須要識得灑落氣象。有與點之意。然後可以言至。文忠公之銘曰。鉤簾危坐。風月無邊一句。截斷古人公案。安得一登其亭。與謙夫同參。경렴정 명의 후설[景濂亭銘後說] 겸부謙夫 탁卓 선생 광무光茂께서 이 광주 별장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오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이제현을 말함)이 그 정자를 경렴景濂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대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호에서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그를 경앙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리라.대저 그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 물건에 마음을 쓰게 된다. 이것은 느낌이 깊고 후하기가 지극한 것이다.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에게는 각기 사랑하는 화초가 있었다 한다. 굴원의 난초와, 도연명의 국화와 염계의 연꽃이 그것으로 각각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물건에 붙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하겠다. 그러나 난초에는 향기로운 덕이 있고, 국화에는 은일의 높은 것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의 뜻을 볼 수가 있다. 또 염계의 말에 “연꽃은 꽃 중의 군자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연꽃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 라고 했다. 대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남과 함께 하는 것은 성현의 용심이며,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을 탄식하고 뒤에 오는 무궁한 세상을 기다렸으니, 진실로 연꽃의 군자됨을 알면 염계의 즐거움을 거의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인하여 성현의 낙을 아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황노직黃魯直이 이르기를 “주무숙周茂叔(염계의 자)의 흉중은 쇄락灑落하여 맑은 바람과 갠 달 같다.”고 하였다.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무숙을 본 뒤로,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거운 곳과 즐거워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를 찾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는 풍월을 읊으며 돌아오는 것이 ‘나는 증점曾點을 허여한다.’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정도전은 혼자 생각하건대, 염계를 경앙하는 방법이 있으니 모름지기 쇄락한 기상을 알아 얻고, ‘증점을 허여한다.’ 하는 뜻이 있은 연후에야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충공文忠公이 명하기를 ‘발 걷고 꿇어앉으니[구렴위좌 鉤簾危坐] 풍월이 가이 없네[풍월무변 風月無邊]’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옛사람이 단정한 공적인 안문案文이다. 어떻게 해야 그 정자에 한 번 올라 겸부謙夫와 같이 참여할 것인지 모르겠다.
    2018-05-24 | NO.42
  • 경의당
    경의당은 학산사鶴山祠 경내에 있는 강당이다. 경내에는 사우인 학산사와 경의당,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다. 서창동 불암마을 외진 곳에 있는 학산사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을 모시는 사당이다.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는 학산사 동문간에 만취영당晩翠影堂이 있어 만취 김용희를 제향했다 한다.경의당敬義堂은 정면 4칸의 측면 2칸으로 내실을 두고 쪽마루를 설치했다. 건립 때 경의당과 학산사의 현판은 전북 김제 출신인 강암 송성용(1913-1999)이 썼다.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학산사를 건립했다.
    2018-09-10 | NO.41
  • 계정
    서구 유촌동 (옛 극락면)한말 효자였던 정석동鄭碩東이 지었다는 계정溪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고 여러 사람의 제영이 있다고 했다. 정석동은 하동정씨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鄭守忠(1401~1496)의 후손이다. 주역, 소학 등의 경서와 산수를 좋아하여 찾아다니며 시를 읊었다. 병환 중인 부모의 생사를 알기 위해 대변을 입으로 맛을 보고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입에 혈지血指하는 등 효도를 다했다. 『광주지』 효행편에 정석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농은 이돈식의 시가 있는가 하면 정자 주인이 계정에서 읊은 원운에 당시의 풍치를 나타내고 있다. 시에서 말하는 계천은 어디쯤일까. 광주천에서 극락강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많아 짐작이 어렵다. 정석동의 원운은 다음과 같다.옥후송균함외천 屋後松筠檻外川 집 뒤에는 솔과 대밭이요 난간 밖은 계천溪川인데영구어아유기연 靈區於我有奇緣 아름다운 이 신기한 곳에서 좋은 기연 맺었도다.사양로입평사우 斜陽鷺立平沙雨 비 내리는 모래 개펄 위에 하얀 백로가 서 있고장일우경광야연 長日牛耕廣野烟 연기 끼인 넓은 들에 누런 황소가 밭을 가네수영단단명월야 樹影團團明月夜 겹겹이 덮은 나무 그림자에 밝은 달밤 깊어지고산광점점권운천 山光點點捲雲天 여기저기 산빛 위에 하늘 구름 사라지네금오자무가오화 琴吾自撫歌吾和 내 스스로 거문고 타며 화음 맞춰 노래하는 데항리생애송백년 巷裡生涯送百年 한가로운 길거리에서 백년세월 보냈도다.
    2018-05-24 | NO.40
  • 관간정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유덕동 마을의 원래 명칭은 덕산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흥으로 부르게 됐다. 마을의 역사는 500여년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한씨 성촌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나주 오씨와 남평 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야트막한 덕산德山(해발 35m) 정상에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북쪽으로 대동여지도에 ‘칠천漆川’이라고 명명했던 극락강極樂江을 앞에 두고 산의 능성이에 관간정觀澗亭이 있었다. 정자 이름에서 보면 간澗은 산골 물 산골짜기를 나타내는 말로 물길에 정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대는 산간수도山間水道란 말처럼, 산과 산 사이의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곡류가 흐르고 있다.마을 뒷편 광주시의 서구 치평동과 쌍촌동 사이의 영산강 구간을 일컫는 지명 극락강변은 오래전부터 주변 초등학생 소풍지역으로 유명하다. 도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특히 낚시터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 인근에 운암雲岩 정태만丁泰晩이 생전에 유유자적하며 세운 정자 운암정雲岩亭도 있었다. 1990년에 정찬규 등이 지은 낙류정樂流亭이 유촌동에 있다.
    2018-05-24 | NO.39
  • 괘고정(괘고정수)
    광주시 남구 원산동 579-3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이다. 이 정자는 실존건물이 아닌 노거수로 이나무를 가리켜 정(亭)이라 한 것은 원래 광산이씨 중조인 필문 이선제( 畢門 李先齊 ; 1389 ∼ 1454)가 손수 심은 것으로 그 모양이 정자의 지붕처럼 뚜렷하고 또 피서의 적지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 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이다. 수관(樹冠)의 너비는 13m 내외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필문 이선제는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쇄락해지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선제의 후손들은 과거에 등제하게 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89년 이선제의 5대손 이발(李潑)이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일컬어지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하였다. 그후 이발의 억울함은 밝혀지게 되었고, 죽은지 300여년이 흐른 뒤에 다시 잎을 피워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 나무를 광산이씨문중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고 있다.
    2018-10-21 | NO.38
  • 극락정
    서구 서창동『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에는 극락원極樂院이라고 하고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대에는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왼쪽에는 서창교 일대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조선 중엽까지 한양길 중 하나였다.극락원은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라진 역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에서는 영산강을 극락강이라 부르는 관행이 남아 극락원이란 단어가 이어졌다.路出光山縣 길을 나섰더니 어느덧 광산현行登極樂亭 내친 김에 극락정을 오르는데江分平野闊 강은 둘로 나뉘고 들은 광활하고雨洗遠峯靑 비는 먼발치 푸른 산을 씻어내네宇宙身如葉 드넓은 세상에 이네 몸은 한낱 작은 잎새風塵鬢欲星 풍진에 살쩍만 희어갈 뿐浮生長役役 떠도는 인생 모질게도 길기만 하여猶記昔曾經 옛일을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재촉할 뿐이네.河陰先生文集 卷之三 題光山極樂亭  경북 상주 출신 하음河陰 신즙申楫(1580~1639)이 호남기행湖南紀行 중 광산의 극락원에 달린 극락정極樂亭에서 읊은 시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인 서창西倉은 원래 극락원極樂院 자리였다.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원院은 하급관리나 여행자를 위한 여관으로, 초기에는 절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운영했다. 조선시대 역원의 운영이 활발하던 시절, 광주에는 경양역과 선암역 등 2개의 역과 함께 10여개의 원이 있었다. 극락원도 그 중 하나였다. 서창도 한때는 ‘극락창’으로 불렸다. 서창 창고 자리에 위치했던 여관 극락원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마저 극락강(영산강의 별칭)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 강을 건너는 나루는 극락진極樂津, 지금의 서창나루이다.지금 극락원과 극락진은 어디일까? 광ㆍ송간 도로가 지나는 곳에 놓인 다리가 극락교다. 그러나 극락진이 있었던 곳은 그 한참 아래쪽, 지금의 신 서창교 일대다. 신 서창교 입구 부분(서창동 594번지)이 서창 나루터 자리로 극락진이 있었던 곳이고, 그 뒤 야트막한 언덕자리(서창동 산4번지)에 극락원이 있었다. 극락원은 어느 시점엔가 세곡을 보관했던 극락창(후에 서창으로 불림)으로 바뀐다. 서창에 보관된 세곡은 첨단지구 무양공원 근처의 동창東倉의 세곡과 함께 영산강을 이용하여 영산포의 영산창으로 옮겨지고, 서울서 내려 온 대형 세곡선에 의해 서울 경창京倉으로 올라간다. 세곡창고가 극락원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나루터도 한몫을 했다. 조선 초기부터 극락진 일대는 광주읍내와 송정리를 잇는 길목으로 각광을 받았다. 실제로 극락진은 남쪽이나 서쪽 지역에서 광주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극락정極樂亭은 극락원에 딸린 누정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들려 그들의 속트림의 시문을 남기고 떠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 영의정에는 두 번이나 올랐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도 158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 순찰시 들려 누정에 오르고 조망하며 그 감흥을 시로 풀어냈다.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고 계곡谿谷 묵소默所 장유張維(1587~1638)가 1629년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의 전횡을 질타했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내려가며 극락원에서 머물며 읊었던 시는 시공간을 넘어 당시의 감회를 느끼게 만든다. 極望平郊豁 광활한 들녘 한눈에 들어오고通流二水長 가로질러 흐르는 두 물줄기 장대하여라雲山分歷歷 또렷이 보이는 구름 덮인 산들煙樹暗蒼蒼 푸르스름 어두운 자욱한 물안개 낀 나무들湖海饒形勝 좋은 경치 넉넉한 호수와 바다光羅接土疆 광주와 나주의 접경이라네郵亭駐征蓋 가던 수레 잠시 역참에 멈춰 서니滿路野棠香 길가엔 찔레꽃 향기가 가득하여라谿谷先生集 卷之二十八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던 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1580∼1656)은 우부승지를 지내다 1638년 나주목사로 부임 받고 “好在金支使 김 지사 그동안 잘 있었는지 / 春來得寄聲 봄철 들어서야 소식 전할 수 있게 됐소”하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친했던 계곡 장유의 시가 극락원에 있어 반가운 나머지 차운하여 읊는다.次光州極樂院谿谷韻暫卸征鞍駐 登臨感慨長 詩魂已漠漠 山色尙蒼蒼古壁留殘墨 遺珠落遠疆 悲吟續淸響 無復襲蘭香竹所集 卷之二   극락원 근처에 살았던 전라도 머슴아를 의리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했던 인물 제봉 고경명도 서창나루를 오가면서 극락정에 자주 올랐음이 분명하다. 그의 싯구가 이를 알려준다.皀蓋行春到野亭 鶯花遲日鬧林埛 和風颺幙關三面 好雨隨車擁百靈繡畛滿添陂水白 螺鬟齊矗海山靑 遙知嘯傲登臨處 閱遍三農喜色形霽峯集 卷之三 詩 聞地主成德久在極樂亭
    2018-05-24 | NO.37
  • 금호정사
    서구 금호동 광주읍 명치정明治町의 최원택崔元澤이 지냈던 곳이 금호동의 금호정사錦湖精舍이다. 명치정은 지금의 금남로 일대이다. 최원택의 자는 도경道京, 호는 금호錦湖, 본은 탐진이며 벼슬은 참봉이다. 당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 유인석柳麟錫은 항일투쟁을 위해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통고한다.격문의 내용은 “…… 무릇 우리 종실宗室 세신世臣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 및 선비 농부 공장 상공 서리 승려까지도 일제히 분기하여 마음과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그 머리를 베고 그 사지를 찢어서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고, 비색한 끝에 통태가 와서 인류가 짐승되는 것을 면해야 할지니, 적이 강하다고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정의의 군사가 아니냐. 감히 이와 같이 통고하노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병오丙午 윤 4월 일 초10일 정축丁丑. 격문을 받고 분발하여 동맹에 가입하기를 자원한 자가 더욱 많았다. 마침내 문인을 명하여 서신으로 맹약을 맺은 동맹록이 만들어졌다. 이때 최원택이 동맹했다는 기록이 있다.금호정사의 원운은 한성부윤 청우당聽雨堂 민경호閔京鎬(1863~1930)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던 정자로 보인다. 이 시에는 금부마을, 만호마을, 운리마을, 월산마을 등의 이름이 보인다.錦府西邊是晩湖居然泉石一邱隅洞廻雲裏欽先哲墅近月山懷永圖甕O能淸閒永竹琴書宜對老窓梧有時士友來相訪戀闕論衿素肚輸   민경호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민유중閔維重의 6세손이자 민치순閔致純의 아들이다. 188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85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으며, 188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91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고 1899년 일시 면직되어 고군산古群山으로 유배되었으나 1900년 사면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3년에는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1906년에는 시강원첨사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2018-05-24 | NO.36
  • 낙류정
    서구 유촌동 388-1서구 유덕동주민센터로부터 덕흥마을 방향으로 약 2백m 쯤 떨어진 곳에 있다. 길 왼편 낙류정樂柳亭 입구入口라는 한자로 써진 바위가 시멘트 기단 위에 가로로 있다. 1백m 들어가면 주변은 각종 창고들로 어수선하다. 그 사이에 1990년에 서광농업협동조합 이한영李漢榮 조합장 등이 지은 낙류정이 있다. 현판은 가암柯巖이 썼다.정자 앞에 낙류정 건립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옛 광산군 극락면 유촌리(새말)가 이제 호남의 웅도 광주 유덕동으로 개편 변천됨에 따라 우리 유촌은 불원한 장래 시의 중심부를 이루게 될 것인 바 촌로 유지 등의 발기로 노후한 기존의 회로정會老亭을 철거하고 초분골 풍치림 경승에 고전적인 정각을 재건하자는 중의를 모아 추진위원회를 구성, 촌민 다수의 자발적인 협찬으로 1990년 7월 23일 극락과 유촌을 상징하는 낙류정을 준공하였다"고 했다.낙류정은 유리문을 만들어 내부를 거실처럼 꾸며 의자며 책상, 선풍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근 노인들이 모여 소일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했다.주변에는 팽나무 3그루와 버드나무 1그루가 있다. 수령이 350년 쯤 되어 두 그루는 서구청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18-05-24 | NO.35
  • 납량정
    서구 화정로309번길 45 (농성동)농성공원은 서구 농성동 사거리에 있다. 살타공원이라 불렀던 이곳은 지금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래전에 아르헨티나의 살타(Salta)시와 서구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기념으로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농성공원에는 예전에 세워진 모정과 함께 하나의 정자가 있다. 납량정納凉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라는 납량특집이라는 말처럼 여름철에 더위를 피해 서늘함을 맛보라는 곳이다. 기문이 없어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마카오에 한 부자가 1925년에 만들었다는 오문노원澳門盧園을 1970년대초 마카오정부가 사들여 노렴약공원盧廉若公園이라 하는 데 중앙에 같은 이름의 정자가 있다.또 중국 저장성[浙江省] 후저우시[湖州市] 궁위안로[公園路]에 있는 전업회관錢業會館은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인 1903년 건립되었는데 민간금융업계 인사들이 집회를 열어 사무를 논의하고 재신財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회관의 정원 안에는 태호석太湖石으로 조성한 가산假山이 우뚝 솟아 있고, 가산의 동굴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가면 산꼭대기에 같은 이름의 납량정納凉亭이 있다. 이곳엔 지하철 농성역이 있다. 1번 출구로 나오면 우뚝 선 동상이 하나 보인다. 의병장 죽봉竹峰 김태원金泰元 장군의 동상이다. 화승총을 손에 든 채 한 손으로 어등산 봉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굳센 얼굴이다.
    2018-05-24 | NO.34
  • 농은정1
    서구 쌍촌동광주 쌍유리雙柳里에서 출생한 전의이씨 이엽李曄(1729~1788)의 은거터 농은정이 있었다. 그는 1779년 유광천, 기국진과 함께 북한산과 도봉산을 유람하고 쓴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峰山遊記'가 있다. 이엽은 176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7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사과가 되었다. 이어 영묘실록랑英廟實錄郎, 선조보감찬집랑先朝寶鑑纂輯郎, 전적, 공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문장재행文章才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이기경李基敬, 홍낙명洪樂命, 서배수徐配修 등과 교유, 학문을 깊이 토론하였다.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으며, 목민후생牧民厚生의 실학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다.이엽의 아버지는 이상규李相奎, 할아버지는 이윤李潤이다. 그의 저서로는 농은집農隱集 7권이 있으며, 이밖에도 학고집學古集, 전거록田居錄, 낙하록洛下錄 등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농은집은 1960년 족후손族後孫 이도형李道衡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기완李起完과 이도형의 발문이 있다. 권7은 부록으로 가장, 행장, 묘지명, 묘갈명, 제문, 농은당기農隱堂記, 농은당운이십영農隱堂韻二十詠, 만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쌍유리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로부터 유래한 지명이다. <호구총수>(1789)에 ‘쌍류촌雙柳村’이라 했다. 1914년에 ‘쌍촌리雙村里’로 개칭되어 극락면에 편입했고 1973년 쌍촌동이 되었다. 쌍촌마을의 원래 위치는 한국병원 뒤 현대아파트 자리이며 400여년 전 전의이씨가 마을을 개촌했다.
    2018-05-24 | NO.33
  • 농은정2
    서구 화정동농은정農隱亭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참판 농은農隱 이돈식李敦植(1847~1920)이 세웠고 춘담 기동준의 기문과 현와 고광선의 명문이 있다. 옛 광주은행 화정동지점과 보성보寶城堡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주인 이돈식은 시문에 능했다.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1852∼1918)이 제영 시를 남겼다.오늘날의 이 정자가 임천林泉 위에 자리하니    지난 옛날 선세유적 계승하기 어렵도다봄이 깊은 동산 위에 맑은 화죽 가득하고          비가 내린 하늘 아래 많은 상마 자라도다참된 재미 얻으려고 이 가운데 은거하고           모든 물욕 멀리하여 맑은 신선 되었도다밭을 갈고 글 읽으며 모든 효성 다하지만          지난 옛날 선인들을 어찌 감히 따를손가
    2018-05-24 | NO.32
  • 덕흥정
    서구 덕흥동 454-1덕흥마을 야트막한 35m 정도의 덕산德山 꼭대기에 있는 정자를 덕흥정德興亭이라 한다. 여기엔 서구청 보호수인 덕흥동 느티나무가 수령 450세 정도이다. 흉고는 557cm, 높이는 약 22m이다. 250여년 전부터 동작의 상당인 할머니 당산나무로 신격화되어 덕흥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덕흥마을의 당산은 원래 12당산이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조사에서 동작의 상당 하당(2) 당샘, 서작의 상당 하당 자손당 당샘, 우마당, 짐대 등 10개이다. 동작과 서작을 합하여 6개의 당산만 남았다. 동작의 상당과 하당, 서작의 상하당과 자손당, 그리고 동작과 서작이 합제로 지내는 우마당이다. 동작의 하당 중 하나는 자손 당산으로 경지정리 때 없어졌다. 이곳 당산제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치러졌으나 그 이후로는 중단되었다.이 느티나무는 2012년 가을까지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고향마을의 감성을 일깨워주었다. 2012년 당시 서구청의 덕흥동 주거환경개선사업의 하나로 소방도로를 개설했다.이 와중에 느티나무가 자라는 덕산을 절개하고 소공원을 조성했다. 문제는 그 후부터 느티나무 한쪽이 급격하게 고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산 정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생육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산 부근을 절개하면서 뿌리 일부를 잘라내 생육에 지장을 준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행히 느티나무는 생존해 덕산을 지키고 있으며 정인서 서구문화원장과 오광교 서구의회 의장의 지원과 마을주민들이 합심하여 2018년 정월대보름부터 덕흥당산제를 부활시켜 새로운 마을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한편 서구 광신대교 부근 천변에서 일부 궁사들이 활을 쏘는 장소를 덕흥정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2018-05-24 | NO.31
  • 돈의당
    서구 금호만호길 45-5돈의당敦義堂은 이희범李喜範 이재범李在範 형제가 우의를 이어 받기 위해 이희범의 아들 이회춘 등이 1935년 앞면 2칸 옆면 1칸의 무실대청으로 일신당 앞에 있는 효정자이다. 이들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살림에 토지를 희사하며 우의를 다지며 돈의계敦義契를 만들었고 계의 자산을 문중으로 넘겨 자손들의 화목을 도모하는 재단으로 활용했다. 당내에는 당시에 명필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가 쓴 심곡재원운心谷齋原韻, 성석醒石 이희범李喜凡의 사내계서私內契序, 심곡재기心谷齋記, 심곡지心谷誌, 심곡재이건상량문心谷齋移建上樑文, 심곡재이건운心谷齋移建韻 등 14개의 기문 현판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2017년초까지지 황폐화되어 일신당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 결국 그해 여름에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성석醒石 이희범李喜凡이 지은 원시에는 그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이곳에서 지은 이 집 물 동쪽 가까우니     새로운 문안 골목 하늘처럼 넓어졌네.부모 은혜 저버리니 평생 한이 맺혔으나   이 집 지은 그 공로는 백세까지 전해지길서석산의 맑은 달은 먼 산위에 비쳐있고   만호마을 맑은 바람 나는 연기 오고가네.고명사의顧名思義 그 마음이 한이 없이 간절하니   천년 만년 오래 살아 이 가운데 즐겼으면 송사 기우만의 동생인 도남산인道南散人 기노선奇老善(1895~1937)이 이곳에서 원운에 차운한 시가 전하고 있다.돈의하는 형동생이 서쪽 동족에 거주하며    돈의당을 새로 지어 한 이불에 함께 자네.화목 위한 장씨 인자 밝은 교훈 남기었고     자선 위한 번씨 의장 많은 공적 쌓았도다.어지러운 이 세상은 상해처럼 변해가고        아름다운 옛날 풍속 찾아보기 어렵도다.정주이씨 한 종파가 이곳에서 장착하여        만호마을 일월 중에 한가로이 가고 오네.
    2018-05-24 | NO.30
  • 동강정사
    동강정사 東岡精舍남구 양촌길 21남구 양림동은 선교사들의 활동무대였던 사직공원을 중심으로 우일선 선교사 사택, 수피아 홀과 윈스보로우 홀, 배유지 기념예배당, 오웬 기념각 등 곳곳에 근대 서양식 건축물들이 흩어져 있다. 또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 등 우리나라 전통한옥도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904년 목포를 거쳐 1905년 일부가 광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은 교회를 열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광주의 예루살렘’, ‘서양촌’이란 말을 들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기독교 유적과 우리네 전통문화 유적이 좁다란 골목을 따라 오롯이 남아 있어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이라고 부른다.양림동의 정자로는 1914년 양파 정낙교(1863~1938)가 광주공원 입구 양림동 치안센터 뒤 능선에 지은 양파정楊波亭과 이장우가옥 내 동강정사가 있다. 동강정사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된 전통 상류가옥이다. 1899년 정병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한 것을 1965년 나주 동강대학교 설립자인 이장우가 매입한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까지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못과 주변에 수령이 1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와 멋스런 향나무 등 정원수와 오죽烏竹 숲이 있고 작지만 거북이의 석조물 상지上池와 정원수를 가득 담은 하지下池가 있다.정내에는 현판 3개와 주련은 김굉필의 후손으로 시문에도 능했던 고당 김규태가 썼다. 편액은 중앙에 동강정사東岡精舍(동강선생이 여기에 배움의 터를 세우니) 왼쪽에 산해숭심山海崇深(학문이 산과 바다 보다 높고 깊게 융성하여), 오른쪽에 봉저난상鳳翥鸞翔(봉황처럼 높이 날아오르고 난새처럼 비상하리라)은 성인군자에 이르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리라는 교육자의 염원을 담고 있다.동강東岡은 동쪽의 산 언덕으로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을 의미하며 어원은 후한서後漢書 주섭전周燮傳에, “선세先世 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에서 유래했다.동강정사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을 석지에 거북이가 달을 읊으니. 달이 비친 돌못에 거북이는 수영하고(石池龜泳月) 소나무 밭에서 학이 바람을 읊으니(松圃鶴吟風), 대나무에서 많은 표제를 글귀로 얻는다(得句多題竹), 책을 읽다 반쯤 소나무에 기대 바라보니(觀書半倚松), 한 뜰이 추색으로 그려져 있고(一庭秋色畵), 가을빛 물든 정원은 한 폭 그림과 같다(萬戶夕陽鍾)고 적었다. 정자주인 동강東岡 이장우李章雨(1919~2002) 박사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동강유치원과 동신중ㆍ고등학교, 동신여중ㆍ여고,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하여 호남 지역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던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유지였다.안채가 1989년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곳간채는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에 복원되었다. 안채는 ㄱ자 형태의 2고주 5량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왼쪽부터 툇마루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있고 꺾인 곳에 작은방이 배치되어 있다.
    2019-12-03 | NO.29
  • 광주광역시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