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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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 행장- 고봉집 부록 제1권

정홍명(鄭弘溟) 기암(畸菴)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 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졸하였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된 것 때문에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모부인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구애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객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객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계부(季父) 덕양공(德陽公 기준(奇遵) )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선친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범상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차기(箚記)를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문(科文)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을묘년(1555)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원근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 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체직되어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 독서당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체직되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에 이량(李樑)이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는 대관(臺官)을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삭출(削黜)하기까지 하였다.
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서용되어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이 체직되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 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누차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달려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며, 헌부에서 장령이 두 번이나 되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선생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관서(關西)에 갔다. 두 조사는 모두 중국 조정의 이름난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기자 선생은 응수와 대답을 모두 알맞게 해냈다.
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하는 때에 다음과 같이 진계(進啓)하였다.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법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정사(政事)가 전도됩니다. 지난날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고 밝혀서 당대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처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악한 소인배의 모함을 입고 귀양 가서 죽기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 받았고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가 바르고 순수하여 아무 흠이 없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로 억울하게 죄를 덮어쓰고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인의 장부에 오른 채 오래도록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하신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으니, 의당 먼저 그분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 대고 머뭇거리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典翰兼藝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제향을 올리라고 의견을 올렸다. 이에 대해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고부터는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가벼운 법이니,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를 초월해서 제향을 올리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에게 명하여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21)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에 각각 두 번씩 제수되었다.
경오년(1570)에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명(召命)이 이른 것으로 말미암아 수백 언(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작은 암자를 지어 ‘귀전암(歸全庵)’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노년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누차 부제학, 이조 참의, 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조정에서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하고자 하여 선생을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발탁하니, 선생은 부득이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했다. 이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별하였다. 이때 배 안에 앉아 있던 어떤 객이 선생에게 “사대부가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이에 대해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대체로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병이 나서 고부(古阜)의 사돈댁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주위의 사람들에게 “명이 길고 짧은 것이야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품은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약을 올려도 들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새벽 4경(更)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다.
상께서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원이 도착해 보니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고 특별히 내리는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서울에 사는 선비와 서민들은 선생이 예전에 거처했던 남산 밑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였는데, 모두 탄식하며 서로 조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니, 이황(李滉)과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여 앞 시대 사람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많이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임금을 인도하기 위해 진달했던 말들은 모두가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의 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떠받들어 유종(儒宗)으로 삼았습니다만,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의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 2월 8일에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선생을 안장했다.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지정해 둔 곳을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궁벽한 시골구석에 거처하여 스승으로 섬길 만한 분이 없었음에도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전에 침잠하여 깊고 오묘한 뜻을 연구하고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아서 고금의 일에 널리 통달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게 되어서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를 의리에 꼭 맞게 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임금을 정도(正道)로 인도하고 왕도정치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간곡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입시할 때마다 한갓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의리를 따져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곁들였는데,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면밀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점이 있었다.
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경우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며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 선악 )에 관계되는데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는 것을 볼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뭇사람의 의심을 해결했다.
몇 가지 사례로 이런 것을 들 수 있겠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곧장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며 왕께 아뢰어 윤허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이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을 바로잡았다. 또 명종의 초상 때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이 대행왕(大行王)과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 복(服)이 없었다.” 하자, 선생이 “형제가 나라를 전하고 왕위를 계승할 경우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법이니,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계승하는 일과 거기에 따른 복제례(服制禮)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
선생이 우리 유학의 도를 존숭하고 믿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 )의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든든하게 북돋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 줄을 알게 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과 의리를 논변할 때, 처음에는 의견이 서로 부딪치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따른 것이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에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고봉(高峯)은 실천이 앎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자, 퇴계가 “예(禮)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義)로써 나아가고 물러났거늘 어째서 앎과 실천이 다르다고 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이 시대에 학문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여 아뢰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요즈음 세상에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견줄 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평소 주상께 아뢰거나 대답했던 말들을 당시의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하고 초록(抄錄)해서 2권의 책자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을 붙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주고받았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따님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효증(孝曾)이고 차남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게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1597) 때에 효민과 효맹은 길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주-D001] 권람(權擥) :
1416~1465.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본관은 안동,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의 감수 책임을 맡았다. 저서에 《소한당집》 등이 있다.
[주-D002]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 :
강희맹(1424~1483)을 말한다.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선 초기 의례와 행정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문학에도 재주를 보였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
[주-D003] 위기(爲己)의 학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
[주-D004] 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받아서 지낸다.
[주-D005] 사가독서(賜暇讀書) :
학자 양성의 한 방법으로 젊은 관료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주-D006] 이문(吏文) :
중국과 교환하던 특수 관용 공문서로 자문(咨文)이나 서계(書契) 등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한문과 달리 중국 속어가 더해진 것이 특징이다. 승문원에 이문학관(吏文學官) 3명과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두었다.
[주-D007] 이량(李樑) :
1519~1563. 자는 공거(公擧),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이다. 명종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으며 비리를 저질렀다. 1563년(명종18)에 사림을 숙청하려 계획하였으나 심의겸(沈義謙)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기대항(奇大恒)에게 탄핵받고 강계(江界)에 유배된 뒤 죽었다.
[주-D008] 대원군(大院君)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가리킨다. 이름은 소(岧)이다.
[주-D009]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 건국 초기 왕실의 종계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전회전(大典會典)》에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던 일이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조선은 명나라 측에 수없이 정정을 요청했고 선조 17년(1584)에 가서야 뜻을 이루게 된다.
[주-D010] 목숨을……한다 :
공자(孔子)의 말로 《논어》〈태백(泰伯)〉에 나온다.
[주-D011] 내려오는……들어갔다 :
〈고봉 선생 연보〉와 택당이 지은 〈시장(諡狀)〉에는 태인(泰仁)에 이르러 볼기에 종기가 났으며 고부(古阜)에서 사돈 김점(金坫)이 문병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점은 고봉의 큰며느리 친정 부친으로 호가 매당(梅塘)이다.
[주-D012] 이준경(李浚慶) :
1499~1572.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이고, 본관은 광주(廣州),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문관 직제학과 대사헌 등을 지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 영의정에 올랐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등이 있다.
[주-D013] 허엽(許曄) :
1517~1580. 자는 태휘(太煇),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과 《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慶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초당집》과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주-D014] 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 1514~1577)의 존호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따님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
[주-D015] 대행왕(大行王) :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호칭이다. 여기서는 명종을 가리킨다.
[주-D016] 변무주문(辨誣奏文) :
1577년(선조10) 고봉이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가 되었을 때 중국 조정에 조선의 종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지은 주문을 말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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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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