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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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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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구의 동(주민센터) 유래와 연혁
    광천동 광천동의 유래와 연혁광천동은 일제 때의 광천정光川町을 1947년부터 고쳐 부른 이름이다. 엣날에는 광주천가에 새로 방죽을 쌓았다고 해서 새방천 혹은 신방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광천동 지역은 광주목 군분면軍盆面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 광천동 지역인 군분면의 내동리.송정리.신방리.쌍촌리와 황계면黃界面의 대자리 각 일부는 내방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에 들어간다.1935년 광주읍이 33정에서 41정으로 구역이 확장되자, 극락면이었던 내방리 일부가 광주읍에 편입, 광천정이 된다. 다시 읍이 부府로 승격된 1935년 이후에는 광주부 관할 광천정이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법적 수속을 밟지 않은 채 광천동을 취락동就樂洞이라 고친 후 1947년 오늘날 행정동명과 같은 광천동이 된다.1948년 600호를 기준으로 36개 동회제를 운영할 때 광천동은 광천동회였다. 1952년 36개 동회제를 없애고 28개 운영동으로 통폐합하면서 광천동회는 다시 광천동이 된다. 1955년 광주 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 극락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내방동 가운데 신방리新防里가 광천동 관할로 들어온다.1961년 8개 출장소제를 실시할 때 광천동은 서부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7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광천동은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에 속했다. 2000년 유덕동 일부 지역이 광천동에 편입된 후 광천동은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채 오늘에 이른다. 광천동 주민센터는 서구 광천2길 9(광천동)에 위치하고 있다.광천동의 특징광천동은 동쪽으로 북구 임동, 서쪽으로 유덕동, 남쪽으로 화정1동.농성1동, 북쪽으로 북구 동운동과 각각 접해 있다. 광천동의 면적은 1.18㎢이다. 광천동은 광주천과 극락천의 퇴적물이 쌓여서 이루어진 자연제방 지형에 홍수방지를 위한 인공제방이 축조되면서 본격적인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광주의 관문인 유 스퀘어 종합버스터미널과 대형유통업체인 신세계백화점, 효광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교통.상업.교육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광산구 하남과 80m의 광로가 개설되어 있어 성장가능성이 어느 지역보다 높으며, 주민들 또한 변화된 주변 환경에 발맞춰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다. 일부 지역에 노후 불량주택이 밀집되어 있지만 재개발과 환경을 개선시키면 보다 살기 좋은 도심 내 주거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것으로 본다. 금호1,2동 금호1,2동의 유래와 연혁금호동은 금부리金府里에서 ‘금金’자, 만호리晩浩里에서 ‘호湖’자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금호동은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호구총수』에 따르면 마재, 금부, 만호, 망월, 심곡마을로 구성되어 광주목 서면 관할이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보면 금호동이 속했던 서창동은 광주군 당부면의 운리리.북촌리.금부리.신기리.마륵리.풍암리.만호리.벽진리.심곡리.망월리와 방하동면의 중촌리.송정리.대촌리.창촌리.사동리.마현리.신용리.구용리.원촌리.난산리.발산리.봉학리.내동리.구기리.신촌리.학동리, 선도면의 동하리.마산리.회산리.세동리.동산리.개산리.월산리.화개리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당부면 심곡리.만호리.금부리.망월리는 금호리金湖里가 되어 광주군 서창면 관할에 들어간다.1935년 광주읍이 부로 승격 독립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이름을 바꿀 때 서창동은 광산군 서창면 지역이었다. 1957년 광주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에 속했던 서창면 8개리가 광주시에 편입하여 각각 세하동.벽진동.매월동.마륵동.금호동.풍암동.용두동.서창동이 되었다.1957년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4개 출장소를 운영할 때 세하동.벽진동.마륵동은 서호동瑞湖洞의 법정동, 금호동.매월동.풍암동은 방하동芳荷洞의 법정동, 서창동.용두동은 신호동新湖洞의 법정동으로 통합되어 서창출장소 관할이었다.1988년 광산군과 송정시를 광주직할시에 편입시켜 광산구를 신설하자, 광산군 서창면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직할시 광산구 관할에 속한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광산구였던 서창출장소가 서구 서창동으로 관할구를 옮겼으며, 2001년 서창동은 다시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된다. 그리고 2003년 금호풍암동은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2005년 금호동은 다시 금호 1동과 금호 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금호1,2동의 특징금호1동 주민센터는 서구 운천로 31번 길 17(금호동)에 있고 CBS방송국과 금호우체국, 1924년 건립된 병천사와 금호중학교, 금부초, 만호초등학교 등이 있다. 금호1동의 면적은 1.86㎢이다.금호2동의 주민센터는 서구 풍금로 135(금호동)에 위치하고 있다. 금호2동에는 서구문화센터, 빛고을국악전수관, 서구문화원,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등 문화 관련 기관이 위치하고 있고, 광주중학교와 화개초.마재초등학교가 있다. 특히 금호 2동에는 서창농업협동조합(본소), 서창농업협동조합(마재지점), 풍암마재우체국, 광주은행(마재지점), 중소기업은행(금호지점), 국민은행(금호동지점), 우리은행(금호동지점), 신한은행 (금호동지점), 교보증권(서광주지점) 등 금융관련 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금호 2동의 면적은 1.19㎢이다.농성1,2동 농성1,2동의 유래와 연혁돌고개 남서쪽에 보성군수 정화가 막았다고 전해지는 보성보寶城洑가 있었다. 보가 막아진 뒤로는 이 지역의 농토가 수리안전답으로 변해 농사가 잘되었다. 그래서 지명을 농사의 ‘농農’자를 따고 보성보의 ‘성城’자를 따서 농성農城이라 했다.조선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농성동 지역은 광주목 군분면軍盆面에 속했고, 이곳에는 연예동延禮洞이 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농성동은 광주군 군분면 연예리와 신흥리 지역으로 나타난다. 당시 이 두 지역에 여녀리.당산거리.큰시암거리.아래더미.자투리.새터 마을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당시 군분면의 연예리와 신흥리 각 일부는 신예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의 관할에 속했다. 1935년 광주읍의 구역 확장으로 극락면 신예리가 광주읍에 편입하여 농성정이 되고, 광주읍이 부(府)로 승격된 이후에는 광주부 관할 농성정이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법적 수속을 밟지 않은 채 농성정을 권농동權農洞이라 고쳤다가, 1947년 오늘날의 행정동명과 같은 농성동이 된다. 1948년 600호를 기준으로 한 36개 동회제를 운영할 당시에는 농성동회가 되었고, 1952년 동회제를 없애고 28개 운영동으로 통폐합 할 때 다시 농성동으로 바뀐다.1961년 8개 출장소제를 실시할 때 농성동은 남부출장소 관할이었다. 1973년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농성동은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에 속했다. 1983년 농성동은 농성1동과 농성2동으로 나뉜다.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한 1986년 농성1동.농성2동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직할시 서구 관할이 된다. 1995년, 농성 1동에 광천동 일부 지역을 편입시켜 행정동 간의 경계를 조정한 후 농성1동.농성2동은 행정구역의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농성1,2동의 특징농성1동의 주민센터는 서구 상무대로 1189번길 23(농성동)에 있고 농성1동은 옛 서부경찰서 뒤 제봉산祭峯山(91m)에서 북쪽으로 내린 능선의 서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동 이름에 ‘농農’자가 들어간 것과 관련지을 수 있는 전라남도 농촌진흥원이 1992년 나주시 산포면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농성1동 250번지에 있었다. 이밖에도 농성동에는 서구청을 비롯하여 한국전력 서광주지점, 광주상공회의소, 농수산통계사무소, 전라남도 보건환경연구원, 조달청, 농성우체국, 농성파출소 등 각종 관공서가 들어서 있어 서부 방면의 부도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성1동의 면적은 0.768㎢이다.농성2동의 주민센터는 서구 화정로 314(농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농성2동은 경열로와 대남로에 인접된 남구와의 경계지역으로 일반상가와 단독주택 집단 주거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산층 및 일반기업체 임직원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다. 농성동은 동쪽으로는 양동, 서쪽으로는 화정동, 남쪽으로는 남구 월산동, 북쪽으로는 광천동과 각각 접해 있다. 농성2동의 면적은 0.64㎢이다.동천동2011년 북구 동림동(12개통), 운암 1동(3개통)을 서구로 편입시켜 동천동으로 개소하였다. 서구의 18개 행정동 중 막내 동이다. 광주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광주천의 동쪽 즉 ‘동천東川’을 동명으로 삼았다. 주민센터는 서구 유림로 98번길 8(동천동)에 위치하고 있다. 동천동은 도시와 농촌의 특성을 함께 지닌 도.농 복합지역으로, 택지지구 개발로 동천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휴먼시아, 호반 베르디움, 우미린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광주의 신흥 주거중심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광림.빛고을초등학교와 대자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하남대로, 빛고을로,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동천동의 면적은 1.17㎢이다.상무1,2동상무1,2동의 유래와 연혁상무동尙武洞이란 이름은 1995년 장성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상무 택지개발 지구에 있었던 육군전투병과 학교(상무대)에서 비롯되었다. 관할 법정동인 쌍촌동은 예전 이곳에 크고 오래된 버드나무 두 그루가 있어 쌍유촌雙柳村이라 불렀던 데서, 치평동은 노치리老雉里에서 ‘치雉’자와 평촌리平村里에서 ‘평平’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상무동 지역은 광주목 군분면에 속했고, 당시 이곳에는 쌍유촌.택동.노치촌이 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상무동은 광주군 군분면 택동리.유촌리.노치리.내동리.계수리.효사리 지역으로 나타난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황계면 죽림리, 내정면 하촌리, 군분면 택동리.내동리.쌍촌리.효사리.노치리 각 일부는 쌍촌리가 되고, 군분면 계수리.노치리, 내정면 하촌리.평촌리, 덕산면 서작리, 우산면 동작리, 당부면 마륵리 각 일부는 치평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에 들어간다. 1935년 광주읍이 부로 승격 독립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이름을 바꿀 때 상무동은 광산군 극락면 관할 쌍촌리.치평리 지역이었다.1955년 광주시역을 확장하면서 광산군에 속했던 극락면 쌍촌리와 치평리가 광주시에 편입되어 광주시 쌍촌동과 치평동이 되었고, 유림출장소 관할이었다. 1957년 122개 동을 51개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쌍촌동.치평동은 현재의 행정동인 상무동의 관할 법정동이 된다. 이때 상무동은 쌍촌동.치평동.내방동.화정동의 4개동의 행정을 맡았다. 1973년 구제區制를 실시될 때 상무동은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에 속했다. 1979년 상무동은 쌍촌동(치평동.쌍촌동)과 화내동(화정동.내방동)으로 분동되면서, 상무동이란 이름은 없어진다. 1993년 광산구 금호동 일부 지역을 쌍촌동에 편입하여 자치구간의 경계를 조정한 후 쌍촌동을 상무1동과 상무2동으로 나눈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1995년 상무1동.상무2동은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상무1,2동의 특징상무동은 동쪽으로는 화정동, 서쪽으로는 유덕동.광산구 우산동, 남쪽으로는 서창동, 북쪽으로는 유덕동과 각각 접해 있다. 상무동은 일제 강점기 이후 광주.전남지역의 중추적인 군 주둔지였다. 상무동 일대는 1910년 한일병합 전후 무렵부터 일본 해군 항공대 소속 「요카렌」 훈련비행대가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지구가 되었다. 그 뒤 일본 육군 병원이 그 부근(현 국군통합병원 자리)에 들어섰고, 전라남북도를 위수지역으로 한 광주사관구光州師管區 휘하의 여러 부대가 이 지역에 주둔했다.광복이 된 뒤로는 1946년 창설된 제4연대가 주둔했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6일 육군 장교의 전투 기술 연마를 목적으로 군 교육기관이 들어서게 된다. 최초의 명칭은 광주비행장 상무대라 했으며, 상무대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52년 1월 7일 보병.포병.통신학교 개교식장에서였다. 당시 상무대 현판 글씨를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써 주었을 정도로 이곳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컸다.그러나 1980년 초 광주시가 확대되자 군부대로써의 입조조건이 좋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무대의 이전이 결정되었고, 1995년 장성군 삼계면과 삼서면 일대로 옮겨가게 된다. 상무대가 자리 잡은 이래 보병.기갑.포병.통신.항공학교 등의 각 병과를 거쳐 간 육군 장교는 60만이 넘는다.상무1동 주민센터는 서구 월드컵4강로 197번길 20(쌍촌동)에 있고 상무1동은 시청과 인근 택지개발지구로 진입하는 주요 교차로, 지하철이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서광.유촌초등학교, 동명중, 상일중, 상무고와 광주.전남 최초의 자율형 공립고인 상일여자고등학교 등이 있다. 5.18기념 문화 센터, 광주학생문화회관, 5.18기념공원이 있어 민주인권과 교육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상무1동의 심볼 마크는 소외된 계층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공동체의 의미를 담아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모양을 엄마가 아기를 안는 듯한 형태로 정형화 하였다. 주황색은 밝은 태양으로 교육을 의미하고, 초록색은 쾌적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의미하며, 군청색은 사랑으로 가득한 상무1동의 주민을 상징한다. 상무1동의 면적은 1.36㎢이다. 상무2동 주민센터는 서구 화정로 85번길 17(쌍촌동)에 위치하고 있다. 상무2동은 쌍촌종합사회복지, 시영복지관과 인근의 향림사 등 사회복지시설이 많다. 운천호수가 있어 시민들의 주요 힐링 장소가 되고 있으며, 상무로, 월드컵4강로, 화정로, 운천로 등 주요 간선도로 접경지역으로 상무신도심과 연계한 광주의 중심축으로의 발전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무초등학교, 금호초등학교, 상무중학교, 치평중학교, 효광중학교 등이 있다. 상무 2동의 면적은 1.87㎢이다.서창동 서창동의 유래와 연혁서창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때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인 서창西倉이 있었던 데서 비롯했다. 관할 법정동인 세하동細荷洞은 세동에서 ‘세細’자, 동하에서 ‘하荷’자를 땄다. 마륵동馬勒洞은 ‘말구레’라 부른데서, 벽진동碧津洞은 고려 때 이곳에 있었던 벽진 부곡에서, 매월동梅月洞은 개감산蓋甘山에 매화나무가 많았던 데서, 용두동龍頭洞은 용의 머리 형국에서 유래되었다.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서창동 지역은 광주목 서면의 방하동리.사동촌.이문촌.발산촌.창촌.신촌.신룡.두태촌.가음내.선도리.세동.개산.지촌.동산동.하촌.당부리.풍암.운리동.신기.심곡.금부촌.북촌.벽진.원촌.평촌.천변촌.망월촌 등이었다.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서창동은 광주군 당부면의 운리리.북촌리.금부리.신기리.마륵리.풍암리.만호리.벽진리.심곡리.망월리와, 방하동면의 중촌리.송정리.대촌리.창촌리.사동리.마현리.신용리.구용리.원촌리.난산리.발산리.봉학리.내동리.구기리.신촌리.학동리, 선도면의 동하리.마산리.회산리.세동리.동산리.개산리.월산리.화개리 지역이었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선도면 세동리.동하리, 방하동면 창촌리 각 일부는 세하리細荷里, 선도면 마산리.월산리.당부면 벽진리는 벽진리碧津里, 선도면 개산리.동산리.회산리.화개리.당부면 운이리.방하동면 사동리 각 일부는 매월리梅月里, 당부면 신기리.북촌리.마륵리.우산면 동작리.내정면 평촌리.하촌리 각 일부는 마륵리馬勒里, 당부면 심곡리.만호리.금부리.망월리는 금호리金湖里, 당부면 풍암리.운이리.선도면 화개리 각 일부는 풍암리楓巖里, 방하동면 대촌리.구기리.송정리.동각면 복호리.유림리.고내상면 수성리 각 일부는 송대리松大里, 방하동면 마현리.구용리.신용리.내동리.봉학리.학동리.신촌리.난산리.계남면 농막리 각 일부는 용두리龍頭里, 방하동면 원촌리.중촌리.발산리.난산리.창촌리.사동리.선도면 세동리.고내상면 수성리 각 일부는 서창리西倉里가 되어 광주군 서창면 관할에 들어간다.1935년 광주읍이 부로 승격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이름을 바꿀 때 서창동은 광산군 서창면 지역이었다. 1957년 광주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에 속했던 서창면 8개리가 광주시에 편입하여 각각 세하동.벽진동.매월동.마륵동.금호동.풍암동.용두동.서창동이 되었다. 이때 송대리는 편입에서 제외시켜 광산군 동곡면으로 관할을 넘겼다.1957년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4개 출장소를 운영할 때 세하동.벽진동.마륵동은 서호동瑞湖洞의 법정동, 금호동.매월동.풍암동은 방하동芳荷洞의 법정동, 서창동.용두동은 신호동新湖洞의 법정동으로 통합되어 서창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88년 광산군과 송정시를 광주직할시에 편입시켜 광산구를 신설하자, 광산군 서창면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직할시 광산구 관할에 속한다. 같은 해 광산군에서 편입한 9개면은 동명洞名 대신 서창출장소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함에 따라 광산구 서창출장소는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했다. 1995년 광산구였던 서창출장소가 서구 서창동으로 관할구를 옮겼으며, 2001년 서창동은 다시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서창동의 특징서창동 주민센터는 서구 눌재로 412(세하동)에 위치하고 있다. 서창동은 세하동.용두동.서창동.벽진동.마륵동.매월동의 6개 법정동을 거느린 도.농 혼합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상무동, 남쪽으로는 남구 대촌동, 동쪽으로는 남구 주월동.화정동, 서쪽으로는 광산구 신흥동과 각각 접해 있다. 화방산(213미터).금당산(290미터).송학산(208미터).백마산(159미터)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로 구릉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황룡강과 극락강이 합류되는 남서쪽에는 서석 평야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쌀농사 뿐 아니라 매론.방울토마토 등의 원예 농업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서창동에는 장창우가 건립한 만귀정(시 문화재자료 제5호)이 있다.서광주역세권, 매월동 제2농수산물도매시장, 자동차매매상가 등 유통단지가 개발되고 있지만, 공군탄약고 등 군사보호지역 및 그린벨트 지정 개발제한구역도 많다. 서창동의 면적은 19.69㎢이다.양동, 양3동 양동,양3동의 유래와 연혁양동은 일제 때 불렸던 이름인 천정泉町 2구를 양동良洞으로 고쳐 부른 이름이다. 어질 ‘양良’자를 쓴 것은 여러 직종의 드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터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일제 때의 이름 천정은 이곳에 큰 샘이 있어 ‘샘물’이라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양동 지역은 광주목 공수방면에 속했고, 이곳 산기슭에 덕림촌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양동지역인 공수방면 덕림리, 도천면 백운리, 군분면 연예리 지역이 광주군 효천면 관할의 교사리校社里가 된다. 당시 이 지역에는 석현石峴(돌고개), 못등, 샘 마을이 있었다.1923년 광주면의 구역이 확장됨에 따라 효천면 교사리는 광주면 관할의 교사리가 된다. 1931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광주읍 천정이 되고, 다시 광주읍이 부府로 승격된 1935년에는 광주부 관할 천정이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법적 수속을 밟지 않은 채 천정을 천정1구.천정2구로 나누고, 천정1구를 유동, 천정2구를 양동良洞이라 고치게 되면서 양동이라는 동 이름이 시작된다. 1947년 정町을 가街와 동洞으로 통일하자, 유동과 양동은 오늘날의 행정 동명인 양동으로 통합된다.1948년 600호를 기준으로 36개 동회제를 운영할 때에는 양동이 다시 둘로 나뉘어 양동1구동회.양동2구동회가 되었고, 1949년 광주부를 광주시라 고쳐 부른 지방자치제 실시 때는 광주시 양동1구동회, 양동2구동회라 했다. 1952년 36개 동회제를 없애고 28개 운영동으로 통폐합할 때 양동1구동회.양동2구동회는 양동1구.양동2구로 바뀐다.1961년 8개 출장소제를 실시할 때 양동 1구.양동 2구는 남부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70년 양동1구는 양동1구와 양동 3구로 나뉜다. 1973년 양동1구.양동2구.양동3구의 명칭을 양1동.양2동.양3동이라 고치고, 구제를 실시하면서 양1동.양2동.양3동은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에 속한다.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1995년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 양1동.양2동.양3동이 되었다가, 1999년 양1동과 양2동이 통합되어 양동으로 이름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양동,양3동의 특징양동 주민센터는 서구 천변 좌로 222번길 3-2(양동)에 있다. 양동을 상징하는 것은 양동시장이다. 1940년 양동 5번지에 새 터를 잡아 1,800여 평, 634개 점포를 갖춰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2년에는 복개상가까지 마련되어 더욱 장세가 커져 현재 광주.전남 최대의 상설시장이 되었다. 옛 한일극장 주변 천변로에는 400여개의 기계공구 상가들이 모여 있으며, 1997년 서구 천변좌로 268번지에는 호남 최대의 금호생명 빌딩이 준공되어 많은 업체가 입주해 있다. 지금의 양동 금호맨션 자리에는 1926년 설립된 전남제사주식회사가 있었다. 농협중앙회(양동지점), 광주은행(서부지점), 온누리 새마을금고, 삼애신용협동조합, 양동 신용협동조합, 우리 신용협동조합, 양동 새마을금고, 광주새마을금고, KDB생명(주) 등 시장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협동조합이나 새마을금고가 집중 위치하고 있다. 양동의 면적은 0.54㎢이다.양3동 주민센터는 서구 상무대로 1223번길 16(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양3동은 서구의 동쪽 관문이다. 단독 주택이 밀집되어 있으며,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양동 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선 후 그린파크, 전방사원, 동산아파트, 초원파크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신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양동의 동쪽으로는 광주천을 경계로 북구 누문동.유동과, 서쪽으로는 농성1동.남구 월산1동.월산3동과, 남쪽으로는 남구 서2동.사구동과, 북쪽으로는 북구 임동과 각각 접해 있다. 양3동의 면적은 0.29㎢이다. 유덕동    유덕동의 유래와 연혁유덕동은 유촌柳村과 덕흥德興의 머리글자인 ‘유’와 ‘덕’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유촌은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은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유덕동 지역은 광주목 내정면과 덕산면에 속했고, 당시 이곳에는 평촌.동작.서작 마을이 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유덕동은 광주군 내정면의 신촌리.평촌리.하촌리와 덕산면의 동작리.서작리 지역으로 나타난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덕산면의 동작리.서작리.황계면의 동배리.내정면의 신촌리.평촌리 각 일부 지역이 덕흥리, 내정면 신촌리.군분면 쌍촌리.황계면 죽림리.동배리.덕산면 동작리.서작리 각 일부 지역이 유촌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35년 광주읍이 부(府)로 승격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이름을 바꿀 때 유덕동은 광산군 극락면 관할의 덕흥리.유촌리 지역이었다. 1955년 광주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에 속했던 극락면 덕흥리.유촌리가 광주시에 편입하여 유림출장소 관할의 유촌동柳村洞과 덕흥동德興洞이 되었다. 1957년 122개 동이 51개 동으로 축소됨에 따라 유촌동.덕흥동은 현재의 행정 동명인 유덕동의 관할 법정동이 된다.그 뒤 1961년 8개 출장소제를 실시할 때 유덕동은 서부출장소 관할이었고, 1973년 구제區制를 실시할 때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한 서구에 속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지만 유덕동은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1965년 유덕동 모습유덕동의 특징유덕동 주민세터는 서구 유덕로 24(유촌동)에 위치한다. 유덕동은 극락강과 광주천이 만나는 곳으로 홍수가 만들어 놓은 퇴적지인 자연제방 위에 마을이 들어섰다. 광주시로 편입되었지만 아직 농촌의 지역성을 갖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도 이곳은 ‘미나리’ 주생산지였다. 극락강과 광주천이 합류하는 곳에 평촌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 자체가 사라지고 없다. 현재 상무4지구 개발로 주공아파트 및 호반아파트, 동남아파트, 진성아파트, 삼우아파트, 주공1단지, 주공2단지, 호반아파트, 부건빛고을아파트, 중도다이아빌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도시와 농촌지역의 혼재로 행정 수요가 다양화되고 있다. 또한 광주시의 관문이 되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국제공항과 연결되는 폭 80m의 무진대로 및 호남고속도로와 연결하는 폭 35m의 빛고을로에 인접해 있어 발전 잠재력이 높다.유촌.덕흥.치평.내방.쌍촌동을 법정동으로 거느린 유덕동은 동쪽은 광천동, 서쪽은 광산구 우산동, 남쪽은 상무동, 북쪽은 동촌동과 각각 접해 있다. 유덕초등학교와 극락초등학교, 유덕중학교, 세광학교 등이 있다. 유덕동의 면적은 5.49㎢이다. 풍암동 풍암동의 유래와 연혁풍암동 신암마을은 마을 뒷산 금당산의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신암이라 했으며, 운리 마을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보면 풍암동이 속했던 서창동은 광주군 당부면의 운리리.북촌리.금부리.신기리.마륵리.풍암리.만호리.벽진리.심곡리.망월리와 방하동면의 중촌리.송정리.대촌리.창촌리.사동리.마현리.신용리.구용리.원촌리.난산리.발산리.봉학리.내동리.구기리.신촌리.학동리, 선도면의 동하리.마산리.회산리.세동리.동산리.개산리.월산리.화개리 지역이었다.1957년 광주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에 속했던 서창면 8개리가 광주시에 편입하여 각각 세하동.벽진동.매월동.마륵동.금호동.풍암동.용두동.서창동이 되었다. 이때 최초로 풍암동이 등장한다. 1957년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4개 출장소를 운영할 때 금호동.매월동.풍암동은 방하동의 법정동으로 통합되어 서창출장소 관할이었다. 1963년 광주시역이 축소될 때 서창출장소 관할이던 방하동은 다시 광산군으로 넘어가 광산군 서창면이 된다.1988년 광산군과 송정시를 광주직할시에 편입시켜 광산구를 신설하자, 광산군 서창면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직할시 광산구 관할에 속했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광산구였던 서창출장소가 서구 서창동으로 관할구를 옮겼으며, 2001년 서창동은 다시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된다. 그리고 2003년 금호풍암동은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풍암동의 특징풍암동 주민센터는 서구 풍암1로 27(풍암동)에 위치하고 있다. 풍암동의 남쪽에는 금당산(304m)이 있다. 4.6km에 달하는 등산로와 4개 코스의 순환 산책로가 개설되어 있고, 경관녹지가 조성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동의 서쪽에는 중앙공원, 염주체육관, 월드컵경기장, 서구 국민체육센터, 생활체육공원, 생태학습 어린이도서관이 조성되어 있어 문화, 체육활동을 즐길 수 있다. 최근에는 풍암호수 일원이 정비되어 산책뿐만 아닌 분수쇼 및 음악회가 열리고 있어 서구 지역민의 힐링처가 되고 있다. 풍암동의 면적은 4.83㎢이다. 인구수가 많아 금당초.신암초.풍암초.운리초등학교와 풍암.운리중학교, 풍암고등학교 등 학교가 유독 많다.치평동치평동의 유래와 연혁동 이름 치평동治平洞은 자연 마을인 노치리와 평촌리에서 ‘치’와 ‘평’자를 따 이름 붙여진 동명이다. 조선 후기 이 지역은 광주군 군분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분면 계수리.노치리, 내정면 하촌리.평촌리, 덕산면 서작리, 우산면 동작리, 당부면 마륵리의 일부가 합하여 극락면 치평리가 되었다.1955년 광주시역이 확장되면서 광산군에 속해 있던 극락면 쌍촌리와 치평리가 광주시에 편입되어 쌍촌동과 치평동이 되었고, 유림출장소의 관할이었다. 1979년 상무동이 쌍촌동(치평동.쌍촌동)과 화내동(화정동.내방동)으로 분동될 때 쌍촌동에 속하였다.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하자, 쌍촌동은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와 광주직할시 서구의 관할이 된다. 1993년 광산구 금호동 일부 지역이 쌍촌동에 편입된 후, 쌍촌동은 상무 1동과 상무 2동으로 나뉜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1995년 이후 상무1동과 상무 2동은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하였다. 이후 쌍촌동.마륵동.유촌동을 포함하는 상무신도심이 개발되었고, 2003년 서구조례에 의해 상무 1동은 상무 1동과 치평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치평동의 특징치평동 주민센터는 서구 상무공원로 62(치평동)에 위치하고 있다. 2003년 상무1동에서 분동된 치평동은 젊디젊은 동이다. 그러나 오늘 치평동은 상무 신도심의 핵심으로 150만 광주의 행정.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주시청을 비롯하여 한국은행, KBS방송국, 대한지적공사, 여성발전센터, 광주.전남선관위, 가정법원, 서부경찰서, 호남지방통계청 등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컨벤션센터와 홀리데이 광주호텔, 라마다 플라자 광주호텔도 위치한다.광주시청 뒤로는 광주천과 맞닿아 있고 상무대교와 어등대교 사이는 영산강이 있어 주변 경관이 빼어나며, 5.18자유공원, 상무조각공원, 평화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운천초.치평초.계수초등학교와 전남중.고등학교가 있다. 면적은 3.27㎢이다. 화정1,2,3,4동화정1,2,3,4동의 유래와 연혁 화정동이란 이름은 1735년 건립된 하동정씨 사당으로 정희와 아들 정초, 손자 정수충 등을 모신 사우인 화담사花潭祠에서 ‘화花’자를 따고 마을 이름인 송정松亭의 ‘정亭’자 취해 붙여졌다. 송정이라 한 것은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화정동 지역은 광주목 군분면에 속했으며, 이곳에 군분리.택동.송정촌.내동촌이 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화정동은 광주군 군분면의 택동리.내동리.신흥리.중작리.신기리.송정리 지역으로 나타난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는 군분면의 신흥리.중작리.신기리 각 일부 지역이 화정리花亭里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35년 광주읍이 부府로 승격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이름을 바꿀 때 화정동은 광산군 극락면 관할의 화정리 지역이었다. 1955년 광주시역이 확장되자 광산군에 속했던 극락면 화정리는 광주시 유림출장소 관할의 화정동이었다가, 1957년 122동이 51개동으로 축소됨에 따라 본청 직할의 상무동으로 편입되었고, 1961년 8개 출장소제를 실시할 때 상무동은 서구 출장소 관할이었다. 197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자 상무동은 서구에 속했다. 1979년 상무동을 쌍촌동雙村洞과 화내동花內洞으로 나누고 상무동이란 이름을 없앴으며, 1983년 화내동을 화정1동과 화정 2동으로 나누면서 또 화내동이란 이름도 없어진다. 1990년 화정2동은 화정2동과 화정3동으로 분동되고, 1994년 화정3동을 화정3동과 화정4동으로 또 분동된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함에 따라 화정1동.화정2동.화정3동.화정4동은 행정구역 조정 없이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화정1,2,3,4동의 특징화정동은 본디 논밭과 염주골로부터 북쪽으로 완만하게 뻗은 능선의 솔밭이었다. 1970년대부터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으로 신흥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화정4동은 풍암 택지 개발지구와 연계되고 있다. 화정동은 동쪽으로는 농성동.남구 월산4동, 서쪽으로는 상무동, 남쪽으로는 서창동, 북쪽으로는 광천동.유덕동과 각각 접해 있다. 화정1동 주민센터는 서구 내방로 338번길 11(화정동)에 있고, 화정1동은 광주광역시 주요 간선도로인 상무로와 죽봉로의 주요 간선도로에 인접하고 있으며, 금호전자랜드와 E마트 등이 위치하여 대형 상권이 혼재되어 있다. 단독주택 뿐 아닌 내방마을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삼익, 무등파크, 해태아파트 등이 건립되어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이 되었다. 면적은 1.20㎢이다.화정2동 주민센터는 서구 화문로 94(화정동)에 있고, 화정2동은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이, 자연녹지와 인공녹지가,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완벽하게 잘 어우러진 광주의 대표 주거지역일 뿐 아니라 광주광역시 교육청과 주월초등학교, 화정중학교, 광덕중.고등학교, 서석중.고등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어, 광주 최고의 교육지역 중 하나다. 면적은 0.81㎢이다.화정3동 주민센터는 서구 월드컵4강로68번길 21(화정동)에 있고, 화정3동에는 광주중앙교회, 화정초등학교, 염주초등학교와 광주여고가 있다. 면적은 0.74㎢이다.화정4동 주민센터는 서구 염화로 83번길 3(화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화정4동은 상가 및 음식점이 밀집된 도시지역으로 주변에 중앙공원 및 염주체육관과 월드컵 경기장이 있어 체육기반이 양호한 지역이다. 관내에는 광주광역시 청소년 수련원을 비롯,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있고, 최근 백일초등학교에서 이름을 바꾼 성진초등학교가 있다. 면적은 1.02㎢이다.
    2018-05-23 | NO.3
  • 옛 지도 속 서구는 어떻게 생겼나
    언젠가 ‘고산자 대동여지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지도에 목숨 걸고 지도 때문에 딸도 잃는 일들이 벌어진다. 지도는 문물이 소통하며 사람이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위성지도나 내비게이션 등으로 길 찾는 일이 쉬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지도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지도는 삼국시대 때부터 그려진다. 하지만 광주를 그린 지도는 조선시대 것만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광주를 그린 지도는 대략 40여 점이 알려져 있다. 서구만을 따로 그린 지도가 없지만 광주 지도 속에서 서구의 옛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40여 점의 광주 지도 중 옛 마을 이름을 많이 기록한 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방지도 속 광주지도를 통해 당시 서구 지역의 옛 마을을 살펴본다. 지금과는 위치도 다르고 명칭도 달라졌지만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지역을 적었다는 점에서 오차가 있음은 물론이다.1872년 발행된 규장각 지방지도 속 광주는 무등산 서석대 입석대를 조각처럼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지도다. 다른 지도는 북쪽이 상단인데 비해 광주는 남쪽이 지도의 상단인 점도 남다르다. 진산인 무등산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광주읍성의 성벽은 성가퀴를 단 정사각형으로, 네 방향의 성문에는 각기 고유의 이름도 그려져 있다. 동쪽 성문은 서원문瑞元門, 서쪽 성문은 광리문光利門, 남쪽 성문은 진남문鎭南門, 북쪽 성문은 공북문拱北門이 그것이다.1872년 지방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오늘날 서구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으로는 군분면, 내정면, 당부면, 덕산면이 대부분이며 공수방면, 도천면, 방하면, 선도면, 황계면은 일부 지역이 서구에 포함된다.  규장각 '지방지도' 속 서구의 마을들군분면(軍盆面)①은 택동, 내동, 쌍류 마을이 표시되어 있다. 오늘날 광천동, 치평동, 상무동, 쌍촌동, 화정동 일대이다. 지금까지 모든 기록에는 군분면의 ‘분’자는 ‘동이 분(盆)’자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적 의미를 담아 해석하기를 비행장이 있고 상무대가 있었던 군사가 있는 지역이라는 당위성을 설명한다.* 1918년 일본의 천재 비행사 야마가타(山縣豊太朗)가 광주에 비행기를 몰고 와 착륙했다. 그 때 광주 사람들이 받은 놀라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합방 직후에 현재 상무지구가 들어선 광주군 군분면 쌍촌리에는 이른바 요카렌 해군 비행장이 건설됐다. 요카렌은 예과련(豫科練)의 일본 발음으로 일종의 비행조종사 견습과정을 의미했다. 그 뒤 상무지구는 오랫동안 광주 지역의 거의 유일한 비행장이었다. 한편 1920년대까지 비행은 대개 모험가들의 몫이었다. 장흥군 출신의 이상태(李商泰)는 1924년 2월 광주 상공에서 펼쳐진 이상태의 비행시범에는 3만명이 몰려들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행은 점차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8년 5월 광주 땅에 내린 창공의 특급열차인 신용욱의 4인승 여객기 주변에는 물경 10만여 인파가 몰려들었다. 물론 당시의 항공여행이란 지금과는 퍽 달랐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오는 데 네다섯 시간이 걸렸고 비행기엔 조종사를 합해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승객만이 탔다. 그래도 당시 최고의 특급열차보다 거의 1.5배나 빠른 속도였고 이 때문에 신문들은 홍길동 얘기에나 나오는 축지법이 실현됐다는 듯이 떠들어대곤 했다. 이 지도를 유심히 보면 ‘향기 분(芬)’으로 적혀 있다. 예전에 쌍촌동 화정동 일대가 도시 외곽지역이었고 꽃밭이 많았다는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곁들어보면 이해되는 부분이다. 화담사(花潭祠)가 이 지역에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당부면(當夫面)②이 군분면 바로 왼쪽 위에 있다. 벽진, 마륵, 풍암, 북촌 마을 등이 표기되어 있다. 오늘날 서창동, 금호동, 풍암동 일대이다. 서창동은 세하동, 용두동, 서창동, 벽진동, 마륵동, 매월동 등 6개동을 거느린 행정동명으로 오늘날 서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광활한 지역이다. 1872년 지방지도 속 광주지도에는 풍암을 제외하고는 금호동과 풍암동의 옛 마을 이름인 심곡, 만호, 금부, 망월, 운리 등 자연마을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으로는 의병장 김원국(1873)과 김원범(1876)이 당부면 북촌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읍 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죽이고 피신했다가, 1906년 3월 동생 원범과 함께 광주 무등촌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1909년 12월 5일 영광 불갑산으로 이동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된 뒤 1910년 대구감옥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김원범도 무등산전투에서 붙잡혔는데, 광주에서 취조를 받던 중 혀를 물어 끊고 자결하였다. 김원국 의병장 손자인 김복현씨는 할아버지 생가는 광산군(지금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리 134라고 말한다. 다른 문헌에는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로 이는 할아버지가 왜놈 순사에게 취조중 가명과 거짓 주소를 말한 게 계속 전해온 탓으로 여겨진다. 그 생가 터는 일본군에게 몰수되어 비행장으로 사용돼 오다가 현재는 5·18 공원이 조성된 곳이다.이 지도는 또 당부면의 ‘부(夫)’를 ‘마을 부(府)’로 표기하고 있다. 당부면 지역이 주로 평야지대에서 곡식을 많이 생산하고 유동인구도 많았던 큰마을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 있는 글자라 할 것이다. 특히 마륵에는 검바웃들, 깜박들, 모래대, 모랭이, 조푼들 등의 들판이 있었다. 모래대는 현재 비행장으로 변하였다. 이 지도에서 풍암은 영산강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적혀 있다. 오늘날 풍암동 지역과는 맞지 않다. 벽진도 멀리 위쪽으로 떨어져 있다. 지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주변 지역과의 관계, 다른 지도를 참고하는 과정에서 왕왕 벌어지는 일이다.도천면(陶川面)③은 군분면 아래쪽에 있는데 군분면 풍암과 염주마을과는 한참 떨어진 지역으로 표기되었다. 도천면에는 오늘날 봉선동 일대 조봉은 조봉초등학교가 지역명을 유지하고 있고 월산은 월산동 지역이다.* '광주읍지'의 '충신전'에는 총 14분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과 김덕령, 그리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전상의 장군만이 나라로부터 충신의 정려를 받고 있다. 이 세 사람만이 충신의 정려를 받았기 때문에 광주의 3충신으로 불린다. 3충신 중 전상의(全尙毅, 1575~1627)는 고경명, 김덕령에 비해 너무도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선조 8년(1575), 광주군 도천면(현 광주광역시 구동)에서 태어난다. 1985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가 준공되어 단독 배향된다. 그의 순절한 지 358년이 지난 후였다. 충민사는 준공 이후에도 전두환과 관련된 오해에 시달린다. 전상의 장군과 광주 5ㆍ18 학살의 주범 전두환과는 전씨라는 성만 같을 뿐 파가 달랐고,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건립 시점이 문제였다. 지금 충민사에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활과 칼 등 장군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유물관, 그리고 충신정려를 명한 현판을 보관하고 있는 정려각 등이 있다.구한말에는 광주군 도천면(陶泉面) 옹정리(翁井里), 이선리, 용정리(龍井里), 조봉리(朝鳳里), 불노리, 신기리(新基里)가 있어 1914년 4월 1일 도천면과 부동 방면의 방림 일부, 유안, 운용리가 합쳐져 효천면 봉선리가 되어 처음으로 봉선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이후 1935년 4월 1일 광주군 효천면과 지한면(池漢面)이 합병되어 孝池面 鳳仙里가 되었고,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역의 확장에 따라 광산군 효지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광주시 봉선동이 되어 공식적으로 봉선동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방하면(方下面)④은 당부면과 극락교를 사이에 두고 있다. 창삼촌, 사동 마을과 대촌, 송정리 등이 보인다. 대촌, 송정리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서창동, 용두동 일대로 생각된다. 특히 방하면에서 ‘서창’이라는 창고가 있는 데 이 지역의 세곡을 모아 중앙정부에 바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집하장인 나주의 영산창까지 세곡을 운송했다. 그 출항지가 바로 지금의 서창동 산4번지 서창이었다. 말 그대로 광주의 서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를 끼고 번창하던 포구 마을이었다. 서창나루가 영산강 하류지역과 뱃길을 연결하는 포구였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많지 않다. 대체로 현존하는 기록이나 구전은 서창이 나루터였음을 더 보여준다. 서창엔 세곡이나 물건들만 모여드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도 붐볐다. 이곳에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나루는 나주 북문거리(현재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산구 평동 일대)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동국문헌비고』(1770년)에는 서창장의 장날이 5일과 10일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광주 읍내 사람들이 소금이나 어물을 사려면 대개 이곳에 와서 장을 봤다.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은 박호련으로 알려져 있다.   군분면 오른쪽의 덕산면(德山面)⑤은 신기리와 동작, 서작이 보인다. 오늘날 유덕동 일대이다. 유덕동은 유촌동과 덕흥동을 거느린 행정동명이다. 그리고 더 오른쪽의 내정면은 하촌, 하신촌, 다채태 등이 보인다. 오늘날 치평동과 유덕동 일대이다. * 남쪽 덕산(德山·35m) 기슭이 덕흥동(德興洞)이다. 극락강과 광주천 사이 범람원 가운데 면적 6ha에 달하는 덕산이 있다. 주민들은 평야에 있는 덕산의 형국을 호랑이로 보고 있다. 세봉우리로 남동쪽이 머리고, 북서쪽이 꼬리다. 풍영정 칠개(漆川)가 덕뫼에 부딪치니 그 밑이 덕호(德湖)다. 벼랑에 1937년 지은 나주 오씨 제각 덕호재가 있다. 맑은 물과 함께 백사장도 펼쳐졌으니 물놀이욕장과 화전놀이터가 됐다. 극락강역에서 줄나룻배나, 9번 버스를 타고 온 시내학생들의 소풍터로도 유명했다. 오늘날 송산유원지와 버금간 곳이다.덕산은 나주오·남평문씨가 많이 살고 있다. 처음 청주한씨가 들어온 뒤, 선조 때 평동에서 나주오씨 와헌공(臥軒公) 이수(以壽)가 입촌한다. 이후 남평문·수원백씨가 이사 오면서 동작, 서작, 가운데뜸이 형성되었다. 열두 당산을 모신 300호 대촌으로 마을 샘이 여섯 곳에 있었다. 454번지에는 높이 22m 둘레 5.3m 크기의 수령 400년 느티나무가 서 있다. 동작의 상당으로 할머니다. 근처에서 길이 10.2㎝, 너비 2.3㎝ 크기의 세형동검이 나왔다. 서작의 상당은 팽나무로 할아버지다. 공통으로 소신을 모신 우당산도 있었다. 극락강변 벼랑에는 김덕령 전설이 깃든 손·치마바위와 함께 상무대 급수장터도 있다. 옛 배후습지에는 ‘정구렁’이란 땅이름도 남아있다.내정면 위의 황계면(黃界面)⑥은 대자리와 대동, 죽림 등이 있는 데 대자리 일부가 광천동에 포함된다. 나머지는 북구 운암동과 동림동이다.* 황계면(黃鷄面) 일대는 운암산(131m)과 대마산(92m)으로 이어지는 ‘진등’ 서편에 해당된다. 대마산(大馬山)은 서구 동천동 죽림마을 서남쪽에 위치한 산이다(고도:92m)). 운암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광주천과 들판으로 이어져 있다. 여지도서에 왕조대(王祖臺)가 “관아 서쪽 30리로 견훤대(甄萱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징벌할 때 군진(軍陣)을 친 곳이다. 백성들이 무지하여 ‘왕건대’라 불렀으나, 태조의 성씨를 피해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대를 건국동 관할 생룡동 뒷산 죽취(대포리)봉으로 보는 설과 함께 대마산(大馬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지도서에 “방목평(放牧坪)은 견훤대 아래로 견훤이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견훤대와 군마를 기른 곳이라 해서 대마산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은 채석을 하여 ‘석산(石山)’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남쪽으로 경전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서강고등학교 남쪽에 운암(북광주)역이 있었고, 1940년대 운모 채굴과 그 운반을 위해 건설된 것이다. 1980년대까지 극락강 유역의 농토를 일구며 살아가는 근교 농촌이었으나, 1990년부터 도시화된 곳이다. 조선시대 광주목 황계면(黃黃界面)에 속했고, 배곡·죽림촌·대내동(안짝)·대자리(황계)·율곡촌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내정면 아래쪽의 공수방면(公須坊面)⑦에 교촌, 상하촌, 천변리 등이 있다. 지금의 양동이 있었고 이곳 산기슭에 덕림마을이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석현石峴(돌고개), 못등, 샘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동구 충장동과 남구 월산동과 백운동이 이 지역에 속한다.*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는 새로운 지방제도에 따라 광주에 읍장을 두었다. 광주 성벽 안을 성내면이라 부르고 성밖을 기례방(奇禮坊:현재의 대인동 일대), 공수방(公須坊:현재의 수기동 일대), 부동방(不動坊:현재의 삼성동 일대)이라 하여 1면3방을 합병하여 1911년 광주면이라 했다. 공수방은 관청의 필수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많았다. 공수전(公須田)은 본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관리의 숙박, 접대 등에 드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각 주(州)에 나누어진 토지이다. 일제 초기부터 주단 포목 모자 문구 등 각종 잡화도매상이 모여 성시를 이룬 곳이다. 광주의 향토사학자 박선홍 선생의 '광주1백년'을 보면 옛 현대극장 주변의 큰 장을 공수방(公須坊)이라 했고, 현 부동교 근처의 백사장에 열리는 작은 장은 부동방(不動坊)이고 했다. 선도면(船道面)⑧은 개산, 회산, 세동, 화개 마을이 있는데 오늘날 매월동과 세하동이다. 일부는 남구 송암동이다. 그런데 지도상에서는 아주 엉뚱한 곳에 있다. 장성 경계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세동(細洞)이다. 그동안 김세근 장군과 연계시켜 ‘세동(世洞)’이라는 일부 주장이 있었지만 지도로 보면 아닌 것 같다.* 선도면은 나주의 관할이었다. 화재 박광옥이 개산송당을 지었는데 매월동에 속한다. 조선 명종(明宗) 때 박광옥(朴光玉)이 전라도 나주(羅州) 선도면(船道面)에 지은 집의 당호(堂號)로 이곳에서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했다.
    2018-05-23 | NO.2
  • 광주를 이끌어온 광주의 중심
    서구의 이름과 연혁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으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45개 동으로 구성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가 신설되었다. 남부출장소의 사·구·양·월산·농성·백운 등 14개 동, 서부출장소의 유·누문·북·임·상무 등 15개 동, 지산출장소의 본촌·우치·삼소 등 16개 동을 합해 광주시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구라 하였다. 청사는 1979년 임동의 옛 청사에서 농성동 현 청사의 뒷편 자리로 이전하였다. 1980년 4월 1일 북구의 분리 개청으로 관할구역을 변경하였다. 지산출장소 3개동과 유동·누문동·북동·동운동·용봉동을 북구로, 동구 관할 양림·방림1·2동을 서구로 편입하여 22개동이 되었다. 1983년에는 농성동을 농성1·2동으로, 화내동을 화정1·2동으로 분동하였고, 1985년에는 월산4동을 월산4·5동으로, 백운동을 백운1·2동으로, 주월동을 주월1·2동으로 분동하였다.1986년 11월 1일 광주시의 직할시 승격으로 광주직할시 서구로 개칭하였고 1988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12444호에 의해 27개동을 관할하는 자치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 3월 1일 남구가 신설되면서 서구의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양림·방림·주월·백운·봉선동이 남구로 분리되었고 1995년 4월 20일자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한 관할구역 변경으로 광산구 서창출장소 관할 전역을 서구로 편입하고 1999년 양1동과 양2동을 양동으로 통합했다.2001년 서창동을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하였다. 2003년 상무1동을 상무1동과 치평동으로, 금호풍암동을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2005년 금호동을 금호1·2동으로 분동하여 17개 행정동이 되었다.현재의 서구 신청사는 농성동 옛 소방본부 부지에 499억원을 투입, 2009년 3월 착공해 2011년 8월25일 준공, 9월 23일 개청식을 가졌다. 대지면적 1만7천여㎡에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로 본청을 중심으로 보건소와 의회가 날개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다.광주광역시의 주민들은 오랜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현재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1980년 5월의 대규모 시민항쟁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과 공원은 모두 광주광역시 서구에 소재하고 있다. 서구 상징 마크의 전체적인 도형은 하늘, 산, 강을 표현하여, 아름다운 생활 터전인 서구의 전원적인 자연 환경을 나타낸다. 역동적인 태양은 광주의 새 심장으로서의 서구, 쾌적하고 여유 있는 서구, 편리하고 기능적인 서구, 정감 있고 따뜻한 서구, 튼튼하고 생산적인 서구를 이루어 나가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뜻한다.마스코트 이름인 ‘해오리’는 백로의 우리말인 해오라기의 준말로, 떠오르는 서구와 환경 친화적인 아름다운 생활 터전의 의미를 담아 살기 좋은 서구의 이미지를 함축시켰으며, 친근감 있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다.서구의 지리적 조건서구는 광주광역시에 포함된 5개 자치구 가운데서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와 경계를 접하지 않고 광주의 중심부를 점하고 있어 행정구역명과는 달리 중앙구라 할만하다. 서구는 남쪽으로 무등산 줄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금당산, 개금산, 송학산의 수려한 산악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북으로는 광주천, 서로는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휘돌아 나가며 이웃 자치구와 경계를 이루며 비옥한 평야가 상당하다. 백마산·사월산·짚봉산 등의 구릉성 산지가 산재하여 지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구가 자리한 광주광역시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축조된 광주읍성이 근대도시로 발전한 것이며 약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문화 역사의 도시이다. 광주읍성은 축조 당시부터 격자형 도로를 건설하는 등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현재 서구가 자리 잡은 곳은 구 광주읍성의 서문 밖 일대로서 서구는 광주읍성과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광주 분지를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관류하는 광주천 남쪽에 위치하며, 남동부의 금당산을 제외하면 구릉성 산이거나 대부분 평지이다. 북부는 광주천을 중심으로 평지가 넓게 분포하고, 서쪽의 극락강과 합류하는 지점은 넓은 범람원으로 자연제방이 길게 발달해 있다.서구는 광주의 공업지구 및 주택지구로 발전해 왔다. 광천공단은 1961년 자동차의 국산화계획이 입안되고, 아세아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한 기초 조사가 착수되면서 조성되었다. 1973년 지방공업개방 장려지구로 지정되었고, 총 입주업체의 반 이상이 조립금속업체로서 자동차부품과 관련된 기계류를 생산하는 업체가 많다. 그러나 계속적인 도시화로 주택지가 팽창해 광천공단이 시가지에 인접하게 됨으로써 공해업소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있다.서구의 발전은 광주천을 따라 길게 발전하다가 점차 서부로 확장되고 있는데, 광주천 부근은 주거지로 비교적 일찍부터 개발되어 주거환경이 불량하다. 광주천에서 2㎞ 정도 떨어진 근래 개발된 지역은 신흥주택지 및 아파트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농성동은 관공서들이 대거 이전함으로써 급속히 고급주택지화 되었다. 화정동은 아파트지구를 이루며 최근에 금호동과 풍암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인구의 유입이 활발해졌다. 군 장교 교육기관이던 상무대가 이전한 장소에 광주의 새로운 중심지인 상무지구가 조성되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과 김대중 컨벤션센터를 잇는 흐름의 한가운데에 5·18기념공원이 있는 이곳은 광주광역시청을 비롯한 많은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중심업무지구와 주거기능이 결합된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현재 광주 제일의 시장인 양동시장은 상설시장이긴 하지만 아직도 정기 재래시장의 특성이 남아 있다. 100여년 전만 해도 갈대밭을 이루던 지역으로 1914년 이 지역의 덕림리와 도천면의 백운리, 군분면의 연례리가 효천면 교사리가 되었고, 1923년에는 광주면 교사리가 되었다. 1935년 광주부 천정泉町이 되었다가 1946년 천정2구가 현재의 양동이 되었다. 양동良洞이라는 이름은 동네에 큰 샘이 있어 샘몰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상설 장터라는 특성을 감안하여 어질게 살라는 의미에서 8·15광복 뒤에 이처럼 지어졌다. 그러나 양동은 시 중심에 있으면서도 개발이 낙후되어 도시기반 시설이 미비하고 영세민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7년 호남지역 최대 높이의 금호생명 빌딩(현 KDB생명보험 빌딩)이 들어섰고 광주은행·농협·국민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다.광천동에는 도심에 분산되어 있던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합한 광주종합버스터미널이 들어서 버스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록회관(구 농촌진흥원)에서 상무대 앞을 지나 송정역에 이르는 상무로가 있고, 아르헨티나 살타시와 자매결연한 기념으로 이름을 정한 농성동 살타공원에서 백운광장을 지나 남광주역에 이르는 대남로는 순환도로의 일부로서, 1968년 광주시와 자매도시를 결연한 타이완의 대남시의 이름을 명명하여 거리 이름을 지었다. 서구의 환경  운천, 풍암, 전평호수 등 도심 곳곳에 자리한 호수는 도시의 운치를 더하며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쾌적하고 살기 좋은 녹색도시로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월드컵경기장, 생활체육공원, 국민체육센터, 시민공원, 5․18 기념공원, 서구문화원, 서구문화센터 등 주민의 질 높은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문화․체육시설은 살기 좋은 도시로서 서구가 가진 매력을 뽐내게 하는 요소들이다. 상무·풍암·금호지구는 광주에서 가장 쾌적한 주거환경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역시 청사 입주로 광주행정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터미널 등이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로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한다. 광천종합터미널과 서구를 가로지르는 제2순환도로 등 충실하게 다져진 교통기반은 광주가 서구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게 하는 교통요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특히 지하철 1호선은 김대중 컨벤션역, 상무역, 운천역, 쌍촌역, 화정역, 농성역, 돌고개역, 양동시장역 등 8개역이 서구지역에 걸쳐 있고 제2순환도로 등이 경유하고 도심철도가 건설예정으로 있어 도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우리나라 60만 군 장교 양성의 요람이었던 옛 상무대 부지를 개발하여 광주광역시청을 비롯하여 광주의 공공기관 대부분이 입주하였다. 시청 이외에 한국은행, 가정법원, 광주지방법원 등기국, KBS광주방송총국, 대한지적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광주도시공사, 광주여성발전센터 등 각종 공공기관들이 들어선 밀집지역이다. 반대편에는 현대, 대우, 한국, 중흥파크, 호반, 쌍용금호 등 굴지의 아파트 단지가 입주해 있다. 또 인근에 상무시민공원과 5.18자유공원을 비롯하여 김대중컨벤션센터나 홀리데이인호텔 등 여러 대형 시설물이 들어서 있어 각종 전시행사 및 숙박시설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서구는 호남 최고의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지역보다 주민의 행정수요가 다양하다는 지역 특성을 가지고 있다.서구의 자치 여건은 호남 제일의 전통 재래시장으로서 여전히 그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양동시장 뿐 아니라 상무시장, 서부시장 등이 있고 광주신세계와 같은 현대적인 대형백화점 및 e마트와 롯데마트 등 할인점과 문구와 완구 전문도매상가 등이 대거 자리하고 있어 광주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신․구 유통시장에 더하여 지역의 대기업들도 서구에 있어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보태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특히 양동시장은 원래 1910년대에 광주교 아래 백사장에 2일·7일마다 열리던 광주 큰장이 1928년 광주천의 직강공사를 실시하면서 현재의 태평극장 앞에 광주의 작은 장과 큰장을 묶어서 사정시장을 개장하였으나, 1940년 신사 주변에 장이 서면 시끄럽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천정시장(현 양동시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그 후 양동시장은 광주의 시장을 대표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생활용품이 넉넉지 못한 시절 군피복에서 시작하여 각양각색의 물품이 산적해 있던 곳이 양동시장이며, 명절준비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던 삶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순대, 튀김집이 한 곳에 몰려 즐비하고, 특히 닭전머리는 예부터 널리 알려진 가금류 시장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열기가 한창일 때 시장의 상인들이 학생과 시민들에게 주먹밥과 음식들을 제공하여 후덕한 시장 인심의 표상을 보여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은 지금도 따뜻한 광주의 인심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양동시장에 연한 광주천을 1972년에 복개하고 그 위에 상가가 들어섰다. 그러나 복개상가 밑으로 지나는 광주천의 수질도 좋지 않고 주변 환경과도 어울리지 않아 서울의 청계천이 고가도로를 헐고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듯이 광주천을 덮어 도로와 상가로 만든 양동복개상가를 철거하고 예전처럼 복원하자는 논란이 있다. 한때 이곳 복개구간을 복원해 생태하천으로 조성한다는 대통령 후보의 공약도 있었지만 670여 곳에 달하는 점포주인 간에 이해관계가 엇갈린 데다 보상비 등의 문제가 겹쳐 있어 현실에 옮겨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또한 서구는 양동, 광천동, 농성동 등 구 도심권과 도시기반 시설이 잘 갖춰진 화정, 염주, 상무, 금호, 풍암 지구의 신도심 그리고 개발 여지가 많은 서창동과 유촌동의 농촌지역이 혼재되어 전원의 아름다움을 갖춘 도․농 복합지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상무지구, 금호․풍암 지역은 광주의 행정, 상업, 교통, 문화, 교육, 정보 등의 중심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주변에 금당산, 중앙공원, 상무시민공원과 월드컵경기장, 국민체육센터, 풍암․전평․운천호수 등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그 역할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들과 행정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들이 어우러져 광주광역시 서구는 20년 전부터 도시의 주거평가가 있을 때마다 전국에서 1,2위로 부상되었고 2008년에는 살기 좋은 도시평가에서 평가대상 232개의 도시지역 중 가장 살기 좋은 8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016년 아동․여성이 안전한 우리골목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민-관 업무 협약식을 갖는 등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다.서구의 자연산과 구릉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서구는 어디에 가나 광주 전역을 내다볼 수 있어 산에 오르는 맛이 나는 곳이다. 금당산金塘山은 풍암동에 자리한 산으로 높이가 304m이며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산 정상에서 좌우로 옥녀봉(222m)과 황새봉이 위치하고 있다. 정상의 정자에는 금초 정광주 선생이 쓴 ‘옥녀봉대玉女峰臺’라는 빗돌 글씨가 오르는 사람을 반긴다. 멀리 무등산이 친근한 앞산처럼 보인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노약자와 어린이도 쉽게 오를 수 있고 넉넉잡고 2시간이면 여유있게 완주할 수 있는 산이다. 산 이름인 금당金堂은 말 그대로 ‘금, 황금 집’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금당은 본래 불교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을 모신 건물인 사찰의 전각을 말한다. 부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기에 불상을 조성할 때 금 옷을 입힌다. 그래서 금 옷을 입고계신 분이 주석하고 있는 건물을 금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빛고을 광주가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고 계시는 극락정토이고, 서구의 진산인 금당산이 부처님 집, 금당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산 아래에는 풍암호수가 있어 하루에도 수많은 시민이 찾는 도심 속의 안락한 휴식공간이다. 매년 5월이면 만개한 장미화원에서 장미축제가 열린다. 발전적으로 호수에 연한 여의주 형상의 이곳을 야생찔레 단지로 조성하여 전국적으로 만연한 장미축제 대신 찔레축제를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동쪽을 향하여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는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붉은 악마 응원의 함성이 드높았고 4강 신화의 기적을 보여주었던 역사적인 광주월드컵경기장이 있다. 개금산蓋金山은 서창 관내 매월동에 있으며 높이는 142m이다. 산봉우리가 세 갈래로 크게 갈라져서 마치 닭의 볏[鷄冠]과 같다 해서 ‘개관산’이었는데 지금은 개금산이라 부른다. 이산 남쪽은 주로 솔밭으로 이루어지고 경사가 완만하여 그 자락에 많은 민가와 음식업소가 들어서 이 근방의 수려한 경관을 찾는 광주시민들이 줄을 잇는다. 광주에서 오리구이를 먹고 싶을 때 ‘매월농원’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 유명 대중음식점이다. 개금산 입구에 있는 전평호수는 잘 가꾸어진 연꽃호수라는 점에서 이곳에서 연꽃축제를 열어도 될 정도로 각양각색의 연꽃을 볼 수가 있다. 산책로 수준의 구간으로 매월동 전평호수-매월농원-개금산전망대-정상-구룡사-서광주역을 잇는다. 이곳 정자에서는 월드컵경기장과 금당산과 옥녀봉이 보이고 그 뒤로 무등산이 자리한다. 송정동 쪽으로 우측에 어등산이 바라보인다.백마산白馬山은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있으며 최근까지 군사보호구역이었던 이 산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심 속에서도 그렇게 때 타지 않은 순정한 산이다. 서창 향토마을 바로 옆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샛길이 있다. 이 길이 백마산 들어가는 입구다. 높이는 162m이고,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화방산을 거쳐 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 동편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여 솟아있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비행기가 오르고 내리는 광주공항과 송정동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왕건이 진을 쳤다는 왕조대가 이곳에 표기되어 있다. 그 터로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뒷산과 백마산이란 설이 함께 존재한다. 백마산은 ‘우뚝 선 뫼’로 몰매>말매>마산>백마산으로 변했다. 조선시대엔 이 산 위에서 삽봉 김세근揷峰 金世斤(1550~1592)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적에 대항하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나라 사랑하는 일을 위해, 한 사람을 사모하는 일보다 당연히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값지게 알고 살았던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의 함성이 가득했던 곳이다.백석산은 쌍촌동에 있으며 광주의 서호西湖이 부르는 운천호수가 있다. 원래는 저수지였다가 호수로 사용됙 있는 데 2011년 12월 28일 서호포럼 탁인석 대표가 현장에서 200여 시민들과 함께 서호명명식을 가진 바 있다.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을 남대문, 흥인문興仁門을 동대문으로 부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호수는 산책로가 연계될 뿐 아니라 금호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코스가 개설되어 있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나 노약자들이 활용하기 좋은 장소이다. 운천호수를 빙 둘러 산책로 500m 구간에 조형물과 음악분수, 실개천, 지압로, 정자 등이 있고, 여름에는 홍련이 호수를 가득 메우며, 논병아리 흰뺨검둥오리 등의 조류가 찾아 드는 도심 속 명소가 되었다. 2010년부터는 음악분수와 야간경관이 조화를 이뤄 무더운 여름날 시민들에게 시원한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홍련과 백일홍이 활짝 핀다. 운천호수 - 남광병원 뒤(향림사) - 상무초등학교 뒤 - 금호성당까지 총 연장거리는 4.5 km이다. 2012년 4월에 내 집 앞 마을가꾸기 사업의 하나로 조성한 백석산 녹차단지에 녹차나무 4,000주를 식재했다.짚봉산은 풍암동에 있으며 높이가 128m로 낮은 산책로인 탓에 1일 약 1,500여명의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특히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짚봉산 샘터는 수질이 좋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많은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짚봉산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열려 전망이 좋다. 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서 광주시내의 동서남북이 모두 관측되고 무등산을 비롯하여 멀리 펼쳐진 산과 들이 넓게 보인다. 염주체육관 - 짚봉산 - 노인고개 - 풍암제 - 염주체육관에 이르는 총 연장거리는 5.5km이다. 필요하다면 등산로가 연결된 옥녀봉을 지나 금당산 정상에도 오를 수 있다.송학산(208m)은 서구 서창과 남구 대촌에 걸쳐 있는 데 불암마을 팔학산(한생이산)과 잇대어 있는 산이다. 산 전체의 모습이 무등산의 축소판처럼 둥글고 산 곳곳에 큰 바위가 박혀있다. 서구 용두동 25에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6호인 지석묘군이 있는데 위치는 서창출장소에서 대촌으로 가는 고개 넘어 왼쪽 송학산 자락에 있다. 이 지석묘군은 남북을 축으로 10개의 지석묘가 3열로 배치되어 있다. 서창의 강 길을 따라 청동기 사람들이 입주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서구의 멋과 풍류- 서구 5경 생활터전으로서 서구는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녹색 환경도시’이자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기 좋은 도시’이다. 광주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쪽으로 북구, 동쪽으로 동구, 서쪽으로 광산구, 남쪽으로 남구에 접하며,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룬 쾌적하고 살기 좋은 전원 도농지역이다. 광주의 한 중앙에 자리 잡은 중심이면서 산자수명한 전원적 농촌을 끼고 있어 대도시의 활달함도 있고 시골마을의 순후한 인심이 함께 숨 쉬는 이상적인 도농 복합공간이다. 오래 전에 서구 5경이 있었다.제1경 - 德興泓澄(덕흥홍등) 덕흥마을 곁을 흐르는 맑고 깊은 강물江頭宿霧午猶重(강두숙무오유중)  강물 위에 머문 안개는 한낮에도 무거운데隔岸叢中聞仙語(격안총중문선어)  언덕 저편 억새떨기 속에서 신선의 말소리가 들린다潭深洞口龍眠慣(담심동구용면관)  마을 앞 깊은 못속에 용이 누워 잠을 자고風傳綠野鐵馬嘶(풍전녹야철마시)  푸른 들녘 부는 바람은 철마의 울음소리를 전한다 옛날의 덕산마을은 들 건너 말뫼마을(광산구 우산동)과 같이 이 근방 자연부락으로서는 가장 큰 마을로 부촌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맑고 넉넉했으며 들은 넓고 기름졌다.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광주천과 담양에서 시원하는 극락강이 합류하는 이 지점은 홍수 때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만들어진 토사가 덕산뫼라는 둥근 언덕을 만들었는데 전라선 기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을을 돌아 흐르는 파란 냇물과 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이 마치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큰 함정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모습이었다.그리고 덕산뫼의 경사면에 반원형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고 그 언덕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는 장관이었고 그 밑에서 <덕흥당산제>라는 민속행사가 열렸는데 그 유래가 이 백년에 이른다. 한동안 덕흥당산제가 치러지지 않다가 2018년 정월 보름부터 다시 복원되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이 거목은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 고목으로 높이 18m, 둘레가 4.4m이고 수관넓이는 무려 1백평이 훨씬 넘는 것으로 마치 무슨 큰 파도를 보는 것 같은 위용을 보여준다. 이 거목이 건재해 있는 한 덕 마을의 길고 탄탄했던 역사를 감출 수는 없으며 그 명성은 더욱 빛날 것이다.특기한 것은 마을회관 입구에 특별하고 거룩한 추도비 하나가 서 있다. 1991년 12월 13일 공군 작전임무 비행중 이 마을 상공에서 기체 고장으로 추락의 비극을 맞자 기체를 버리고 낙하산으로 충분히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는데 주민의 피해를 염려해서 고장 난 기체를 마을 상공 밖으로 조종을 계속하다가 기체와 함께 추락사한 이상회 공군대위의 거룩한 의행을 기려 세운 것으로 이 마을의 명성과 같이 구원의 생명을 갖는 마을의 보감이다. 제2경 - 晩歸荷薰(만귀하훈) 만귀정의 연꽃향기滿塘蓮葉萬介傘(만당연엽만개산)  못 속에 가득한 연잎은 일만개의 우산이요遠而益濃花香抒(원이익농화향서)  멀리서 더욱 짙은 꽃향기를 쏟아 놓는다須將鼓笛催皓月(수장고적최호월)  피리 불며 밝은 달 떠오르기 기다리니堤列嬌櫻堪折取(제열교앵감절취)  둑 위에 늘어선 예쁜 벚꽃나무 꺾을 만하네만귀정은 서구 서창동 동하마을 앞 연못 안에 있는 수중정자이다. 이 마을의 흥성장씨 효우당 장창우 공이 후학을 가르친 옛터에 그 유덕을 기리는 후손들이 1930년에 지었다. 광주도심지에서 10km 남짓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정자는 봄이면 호반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벚나무가 터뜨린 분홍빛 고운 꽃은 마치 채색구름을 보는 듯하고 온통 수면을 뒤덮은 연잎을 때리는 소나기 빗소리는 장중한 관현악을 듣는 것 같다.여름철에는 우거진 수풀이 지어낸 짙은 그늘과 물가를 노랗게 수놓는 창포 꽃의 애련하고 얌전한 자태가 삼복더위를 말끔히 씻어 준다. 가을에는 상사화의 붉은빛이 푸른 호반을 뒤덮고 겨울에는 밤새 노송가지에 내려앉은 석화가 또한 별유천지다.이래서 춘하추동 이곳을 찾는 행락의 인파가 끊이지 않으며 이 정자에는 일제강점기 때 시사회詩社會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도내 일원의 지식인 시인 묵객들이 모여 한시를 짓고 청류를 즐기는 매우 고아한 모임이었다. 이 나라의 원로시인 노산 이은상과 초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일본육군대장이 특별회원으로 가입할 정도였다. 이 모임은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순한시동인純漢詩同人이다.   제3경 - 楓岩桂月(풍암계월) 단풍바위에 걸친 달빛鷄冠三峰影投水(계관삼봉영투수)  계관산 세 봉우리는 그 그림자를 물속에 던지고彩霓橫亘架淸穹(채예횡긍가청궁)  오색무지개는 옆으로 가로질러 맑은 하늘에 뻗쳐있네峽裏紫崖屹矗立(협이자애흘촉입)  산골짜기 자줏빛 낭떠러지 우뚝 솟아 있고 霜餘紅葉正飄浮(상여홍엽정표부)  서리맞은 붉은 잎들 바람에 나부끼네풍암과 매월은 구 서창과 광주 중심부의 접경에 있는 산촌이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당산과 개금산 등 근교에서는 드물게 보는 높은 산과 풍암호수와 전평호수 등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경치 좋은 곳이다.회산마을 뒤에 있는 개금산은 그 모습이 마치 닭의 볏처럼 봉우리가 셋으로 갈라져 있고 그 산자락에 자리 잡은 회산마을은 임진왜란 때의 공신 회재 박광옥 선생의 탄생지로 선생에 대한 갖가지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신암마을 뒤에 있는 금당산과 옥녀봉은 가을단풍이 곱고 개금산 밑에 있는 전평호수(속칭 매월리방죽)는 물이 맑고 교통이 좋아 일제강점기 이래 낚시터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금지구역이다. 호수 근처 주막에서는 일제 말에 일본인 주재소 수석과 조선인 동경유학생이 ‘女子정신대문제’로 크게 다툰 피 끓는 조선남아의 항일발분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다.운리마을은 이름 그대로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깊숙한 마을로 한때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경천신앙인 무을교의 본거지로 그 교당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쇠정이라는 조그만 주막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시장이 설만큼 번창하였다. 서창, 대촌, 남평 등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광주시민에게 팔리는 상거래의 장소이었다.제4경 - 尙武茂林(상무무림) 상무대에 우거진 수풀(빌딩의 숲)瑞石山下第一區(서석산하제일구)  서석산 밑에서 으뜸가는 좋은 지역에高廈林立萬家春(고하임입만가춘)  높은 집이 숲처럼 늘어서니 만 집의 봄이로다雲泉沼中鳧鳴絶(운천소중부명절)  운천방죽에 물오리 울음소리 그쳤지만秋月山上踊彩雲(추월산상용채운)  담양 추월산 위에 비단구름이 춤을 춘다 구 상무대 부지는 개발과 발전으로 이제 광주시의 중핵지점으로 축복받은 곳이지만 쓰라린 과거를 갖는 수난의 땅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동양침략의 전초기지인 군용비행장으로 만들 때부터 이 지역주민들을 강제동원 등으로 괴롭혔으며, 5.18 광주민주항쟁 때는 무고한 광주시민을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가 되었다.평범한 농촌지대였던 이곳이 군사기지로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한말 때 일제침략군의 호남지역 우리 의병의 진압작전이 계기가 되었다. 1907년 가을부터 전남지방, 특히 광주 장성 영암 함평 등 서부지역에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투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우선 광주에 주둔시켰던 수비대를 동원하여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 의병투쟁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증강된 14연대 병력과 헌병경찰 특설부대 등이 총동원되었는데 이 상무대에 그 주력이 주둔하였다. 상무대 지역이 일본의 군사기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대동아 전쟁이 차츰 가열화 되면서 일본군 항공대가 주둔하게 되고 군용비행장이 된 것은 이 지역 사방이 열린 평탄한 지형으로 항공기 이착륙이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지역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계엄분소가 이곳에 설치되고 진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불의와 폭거에 맞선 정의의 시민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광주시의 발전 팽창에 따라 상무대 군사교육시설이 옮겨가고 신도심 개발사업이 진행되어 빌딩의 숲을 이루어 시청, 시 경찰청, 체신청 등 중요한 공공시설 건물이 들어섰고 구 상무대 동편 야트막한 언덕을 곱게 다듬어서 아름다운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도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5경 - 常祿櫻霞(상록앵하) 상록원의 벚꽃노을凌風古院櫻香盈(능풍고원앵향영)  풍파를 이긴 옛정원에 벚꽃향기 가득하니倣霞花下成人山(방하화하성인산)  노을을 본뜬 꽃 아래에 사람의 산을 이룬다入極天遊超汗漫(입극천유초한만)  하늘위에서 노니는 마음 상쾌하기 그지없는데來如棠花近又姸(래여당화근우연)  찾아오는 해당화(美人)는 가까워질수록 더욱 곱구나 농성동 상록원에 있던 농촌진흥원은 일제 때의 농사시험장으로 이곳에서는 식민통치의 투영이 없는 단순한 벼의 품종개량과 농사기술의 연마와 보급을 담당한 친화농촌 기관이었다. 광주시가지에서 떨어진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곳에 벚꽃나무가 심어진 것은 농사시험장이 설치된 직후의 1940년대 초로 벌써 수령 80년의 노목이 다 된 셈이다. 벚꽃군락지가 적은 이 지역에서는 으뜸가는 ‘봄철 꽃놀이의 명소’로 매년 4월이 되면 이곳 광주시민의 마음이 온통 이곳으로 쏠리기도 했다.만개를 기다리지 못하고 모여드는 상춘 인파는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차를 타고 지나는 외지인들에게는 광주가 온통 화려한 ‘꽃의 도시’로 비춰지면서 한때 광주의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록회관이 들어서면서 상당한 벚꽃나무가 잘려나갔고 최근 아파트 부지로 확정되어 개발될 예정이어서 옛 모습을 갈수록 찾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멋과 풍류 - 서구 8경   최근에는 서구에는 그 자체로 꽃이나 벌 나비보다 아름다운 ‘서구 8경’을 서구청에서 정하여 홍보하고 있다. 서구 8경은 만귀정, 금당산, 풍암호수, 서창들녘의 낙조, 용두동 고인돌, 운천사 마애여래 좌상, 양동시장, 5.18기념공원이다.제1경은 ‘만귀정’이다. 서구 8경 중 제 1경은 전북 남원에 살던 만귀(또는 효우공) 장창우가 세하동 동하마을로 주거지를 옮긴 후 후학을 기르며 만년을 보내기 위해 세운 만귀정(시 문화재자료 제5호)이다. 정자의 명칭 ‘만귀晩歸’는 장창우가 이곳에서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해석된다. 원래의 건물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져 없어졌고, 후손들에 의해 1934년 중건과 1945년 중수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정면 두 칸의 규모이고 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동.서.남의 세 방향에 난간을 돌렸다. 큰 연못 가운데 세워진 수중 정자인데, 그 옆에는 1940년 만귀 선생의 7세손 장안섭이 지은 습향각과 송정 읍장이었던 장안섭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묵암정사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늘어서 있다. 만귀정에는 많은 시문이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그 중 중건기는 1934년 고광선이 썼으며, 중건상량문은 같은 해에 이병수가 썼고, 중수기는 1945년에 후손인 묵암 장안섭이 썼다. 또한 경내에는 1939년에 송광세가 쓴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무대로 결성된 ‘만귀정시사’의 시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귀정 4계의 경관은 정말 대단했다. 봄이면 호반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벚나무가 터뜨린 분홍빛 고운 꽃이 마치 채색구름을 보는 듯하고, 온통 수면을 뒤덮은 연잎을 때리는 소나기 빗소리는 장중한 관현악을 듣는 것 같다. 여름철에는 우거진 수풀이 지어낸 짙은 그늘과 물가를 노랗게 수놓는 창포 꽃의 애련하고 얌전한 자태가 삼복더위를 말끔히 씻어 준다. 가을에는 상사화의 붉은빛이 푸른 호반을 뒤덮고, 겨울에는 밤새 노송가지에 내려앉은 석화가 또한 별유천지다. 이곳 만귀정을 보기 위해 행락 인파가 끊이질 않는 이유다.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유명 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 ‘꽃상여’, ‘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했다.현대 시인 김종은 “만귀정”을 이렇게 노래한다.“그대 보는가/ 연못의 맑은 몸/ 하늘 내려와 구름 띄우고/ 갑사댕기 허공의 꼬리 사이로/ 사람 세상 깨우며 흔들리는 그늘을/ 그대 듣는가/ 비단처럼 환해지는 집/ 소리 내지 않고도/ 햇빛 푸른 등지느라미로 떠다니는 노래를/그대 만났는가/ 밤늦게 귀가하는 주인 기다리며/ 세상의 불빛 모아/ 등불 걸어둔 자리/ 낭랑한 음성으로 글 읽는 물소리를.” 만귀정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시사회라는 문인들의 시회詩會가 결성되었는데, 이 시회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도내 일원의 지식인 시인 묵객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시회의 이름이 나자 원로시인인 노산 이은상과 초대 조선군사령관인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일본 육군대장도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만귀정시회는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순 한시동인漢詩同人이었다. 회원들이 지은 작품 가운데 묵암 장안섭과 노산 이은상의 두 편을 골라 감상해 보자. 하일단 夏日短(짧은 여름날) / 묵암 장안섭汗衫泥踵洗心淸  땀에 밴 적삼과 진흙 묻은 발꿈치는 되레 마음을 씻어 맑게 하고送暑迎風夏日短  무더위를 보내고 서늘바람 맞으니 긴 여름날이 오히려 짧다.知足身家老泰平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몸은 늙어서도 마음 태평하고荷鋤如有陶翁情  쟁기 짊어진 것은 마치 도연명의 고상한 마음과 같네.춘불로 春不老(봄은 늙지 않아) / 노산 이은상四面綠陰眼界斜  사방 녹음은 눈가는 데까지 펼쳐있고濃熏佳氣數三家  짙은 향기 좋은 기운은 서너집을 넘나들고埰女荷簪春不老  나물 캐는 여인 금비녀에 봄이 늙지 않아서牧兒萊笛渺無涯  목동의 풀피리 소리 높은 들보에 싱그러운데樹密止知黃鳥歌  울창한 숲 그 속에서 꾀꼬리 노랫소리 들려오네回首更看塵像好  고개를 돌려 다시 보니 세상 모습이 좋고階前芳草織如紗  섬돌 앞 향기로운 풀이 비단 짜놓은 것 같구나.제2경은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이다. 금당산은 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옥녀봉과 황새봉이 우뚝 솟아 있다. 해발 304m의 나지막한 산으로, 곳곳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계절이 만드는 금당산의 사계 풍경도 빼어나지만, 팔각정, 다목적 쉼터, 체육시설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휴식처로도 안성맞춤이다. 또 수많은 나무와 야생화 등이 자생하고 있고, 산책로 주변에는 나무이름표(소나무 등 64종 170개)를 설치하여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자연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광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 중 도심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산으로 야간조명시설이 잘 되어있어 야간에 올라 광주시내 야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현대 시인 전원범은 ‘금당산’을 이렇게 노래한다.“그리운 사람 찾아가듯 금당산에 오르면/ 언제나 팔을 벌려 따뜻이 안아 주는구나/ 여는 것이 문이요 막는 것이 벽이라는 데/ 이리로 오면 막는 것도 여는 것도 없다/ 구름도 풀어 가다가 되돌아오는 자리/ 내 마음 한 가운데에 탑으로 선 산이여/옥녀봉 황새봉이 머리에 인 저 하늘/ 쓰리고 아픈 삶을 바람으로 씻어주는구나/ 산에서 산을 배우고 나무에서 나무를 배우며/ 나도 금당산처럼 산으로 서고 싶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말이 없이/ 저렇게 온몸으로 서서 다가오는 산이여.”    제3경은 ‘풍암호수’이다. 풍암호수는 하늘이 광주를 보려고 이 호수를 눈동자 삼았다 할 만큼 주변경관이 자연의 삽상한 기운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웃하여 2002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일군 월드컵경기장이 연한 관계로 두 명소의 관광 상승효과는 가히 환상적이다. 풍암호수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6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축조한 인공호수다. 이후 풍암 택지 개발과 더불어 이용객이 증가함에 따라 1999년부터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으로 전통정자와 나무다리 등을 설치하여 물과 전통이 어우러지는 광주의 상징적 쉼터로 개발되었다.풍암호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주위의 송림과 어우러진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물이 맑고 수심이 깊기 때문에 물에 비치는 풍경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주요시설로는 2.2km의 일주 산책로, 분수와 물면이 리듬을 일으키는 조경 시설, 나무다리, 정자, 야외 공연장을 겸한 음악당이 있다. 주말 밤 트럼펫이나 색소폰 연주회 등은 풍암호수를 더없이 아름답게 만든다. 최근에는 풍암호수의 풍광에 맞춰 진시영 작가의 금속 조형물 ‘Hamony(화합)’이 설치되어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 특히 장미원은 갖가지 장미들의 쟁염爭艶의 현장으로 장미의 향기가 시민들을 유혹하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장미공원에 이어진 소나무 숲 야산은 찔레단지 조성을 구상하기도 하여 이마저 실현되면 관광과 힐링 차원에서 풍암호수의 명성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목교 5개소, 한식 정자 1동, 연식파고라 1동, 그리고 야외 공연장을 겸한 음악당이 있어 주간 시간은 물론이고 환상으로 물들인 밤 시간의 트럼벹이나 섹소폰 연주회 등은 풍암호수를 더없이 아름답게 한다. 제4경은 ‘서창들녘 낙조’이다. 서창들녘에다 ‘낙조’를 붙여 명명한 이곳은 이름만으로도 환상성이 그려지는 명소다. 극락강과 황룡강이 만나면서 형성된 영산강 상류 지역의 서창들녘은 광주에서 가장 너른 들판이다. ‘서창西倉‘이란 조선시대에 세곡을 수납하는 ’서쪽의 창고‘라는 의미다. 서창동 향토마을 일대에서 해 질 무렵 낙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너른 들판과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야 말로 그림 그 자체다. 특히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가을철에는 황금 들녘과 석양이 지는 노을의 모습이 어우러져 경이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매년 7월 백중 무렵이면 ‘서창 만드리 풍년제’가 열려 다양한 전통문화와 전통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쓸쓸한 날에는 들판으로 나가자. 아주 쓸쓸한 날엔 들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걸어가 보자.” 공항로를 따라 극락교 아래로 접어들면 어느 새 서창들녘이 다가와 낙조를 배경으로 길손을 부른다.제5경은 ‘용두동 고인돌’이다. 용두동은 ‘용의 머리’로 이곳 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청동기 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광주를 대표하는 고인돌 중 하나는 북방식 고인돌이 있는 서구 용두동 학동 마을이다. 광주~송정간 도로의 극락교 앞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서창 동사무소를 지나 대촌 동사무소 쪽으로 가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왼쪽 송학산(209m) 기슭에 있다.고인돌은 남북으로 3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열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현재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10기이며, 덮개돌이 없는 굄돌 7개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는 2~3기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높이가 대부분 50센티미터 정도이나 입구에 자리 잡은 고인돌은 가로 14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폭이 50센티미터로 가장 크다. 주변에 채석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인근 송학산에서 채석해 온 것으로 보인다.용두동 고인돌군의 가장 큰 특징은 북방식(탁자식) 고인돌 1기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3호 고인돌로 불리는 북방식 고인돌은 모두 3기의 굄돌이 있는데, 대부분의 북방식 고인돌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게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방식 고인돌을 대표하는 강화도 고인돌과는 달리 남부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북방식 고인돌의 굄돌 높이가 낮아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제6경은 ‘양동시장’이다. 서구 천변좌로 238에 위치한 양동시장은 1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일대가 휘휘한 갈대밭이었다. 다른 고을의 오일장처럼 양동시장이 서는 날은 장꾼들에게는 일종의 축제였고 시장 한쪽에서 씨름판이 열릴 만큼 흥청거렸다. 주로 농수산물의 집산 매매지였던 양동시장은 호남지역 최대의 재래시장이었고 일찍부터 ‘통샘거리’라 불리던 천정泉町에 큰 샘이 있어 일명 ‘샘몰’로도 불렸던 곳이다. 서민의 애환과 정서가 살아 숨 쉬는 양동시장은 1910년부터 동구 불로동 광주교 아래 하천변 백사장에서 큰 장이라는 이름으로 3일과 8일장을 열다가, 광주천이 직강화되고 1940년 광주공원의 신사가 국폐신사로 승격되면서 신사주변 정리 차원에서 새 터를 잡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800여 평에 634개의 점포로 설립인가를 받아 출발한 후, 1972년 하천복개로 장세가 확장되어 오늘의 상설시장이 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호남 최대다. 양동시장에서는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 등 다양한 품목의 물품을 취급하며, 특히 혼수제품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양동문화센터가 들어서 문화관광형 시장으로서 발돋움하고 있다.이곳 지명이 양동良洞이 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기 위해 마을 이름을 바꾸면서부터인데, 여러 부류의 드센 사람들이 어울리는 장터이니 서로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제7경은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이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시 유형문화제 제4호)은 서구 쌍촌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석굴 불상으로 2미터 크기다. 운천사는 원래 ‘정토사淨土寺’로 불렸던 사찰이었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넓적한 얼굴에 긴 눈, 우뚝 솟은 코와 두터운 입술, 길게 늘어진 귀 등 특이한 형상의 얼굴에다 굵은 목, 벌어진 어깨, 결가부좌한 자세 등을 취하고 있는데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48호)과 흡사하다. 얼굴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어깨와 손이 비례에 맞지 않게 크다.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약 그릇을 쥔 것을 볼 때 약사여래좌상으로도 보인다. 근엄하고 경직된 얼굴과 딱딱한 형상의 신체, 우견편단을 한 옷 주름의 형식적이고 이완된 처리 등이 기존의 마애불상과 다른 독특함이다. 커다란 자연 암벽에 불상을 양각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불당으로 삼았다가, 2002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실내로 모셨다. 법당의 마애여래좌상은 야외의 불상과는 달리 실제 호흡하는 입체감과 생동감이 느껴져 실내 마애불만의 특별한 생동감을 준다.운천사마애여래좌상에는 원효대사와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무등산 원효사에 머무르던 어느 날 서쪽 하늘에 서기가 가득해 제자를 보내 살펴보았더니 커다란 바위에서 빛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 빛을 보고 그곳에 불상을 새긴 것이 바로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설과는 달리 불상의 양각 양식을 보면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작품이다. 전설이 잘못되었다거나 억지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다.제8경은 5.18 기념공원이다. 5.18기념공원은 5.18민주화운동의 참뜻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조성된 시민 휴식공간이다. 상무대 이전 부지 일부를 시민공원으로 무상양여 받아 조성하였는데, 넓이는 20만 4,985㎡다.5.18기념공원에는 5.18자료실과 공연.행사시설을 갖춘 5.18기념문화관, 시민군 조각상.추모 공간과 5.18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원형 분수공간을 갖춘 대동광장이 있다. 5.18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던 군법정.영창은 망월동 5.18묘지와 연계, 민주성지 순례코스로 운영되고 있다.5.18민주화 운동 학생기념탑과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도 있으며, 공원 정상에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3층 누각인 오월루가 있다. 그밖에 사찰 무각사와 잔디광장, 산책로 등이 있다. 오월루에서 바라보는 상무지구의 야경이 장관이다.서구지역민의 삶서구는 영산강변을 제외하면 큰 강이 없다. 광주천, 극락천(현재는 복개) 등 소하천이 흐르기는 했지만, 수량이 많지 않았고 그마저 변덕이 심했다. 그래서 늘 물이 귀했다. 이는 서구를 관통하는 하천들의 길이가 워낙 짧았고, 주변에 높다란 산이 적어 물을 품을 만한 지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열악한 물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처에 수리시설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수리시설이 운천저수지였다. 흔히 운천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4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원래 이 저수지는 조선시대에 조성되어 내정제內丁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당시 이 저수지가 내정면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나온 <광주읍지>에는 하촌제荷村堤로 나오는데, 이는 저수지 건너편 즉 훗날 상무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마을 이름인 하촌에서 딴 것이었다. 이밖에도 서구 지역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염주제念珠堤는 염주마을에 있었던 저수지였다. 1990년대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매립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구 매월동의 전평제前坪堤는 16세기에 살았던 회재 박광옥이 축조한 것인데,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다. 몇 해 전 수변공원으로 단장되었다. 또한 개천을 막아 관개용수를 담았던 보洑도 있었다.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가 쌓았다고 해서 보성보寶城洑라 일컬어지던 보가 돌고개 남서쪽에 있었다. 이제백이 쌓았다는 안보雁洑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저수지와 보 같은 수리시설에도 불구하고 심한 가뭄이 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손을 놓고 기다릴 수 없어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냈다. 예전 기우제는 무우제舞雩祭 또는 무제舞祭라고도 불렀다. 무우제와 무제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물을 기원하는 제사 즉 물제에서 받침인 'ㄹ'이 탈락해 무제로 변했고, 무제가 다시 무우제로 변형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기우제의 또 다른 이름이 무우제 또는 무제였고, 우제雩祭라고도 했다. 중앙공원의 짚봉산, 벽진동의 사월산, 양동초등학교 뒤편의 양동 제봉산 등이 기우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산 이름에서도 기우제 장소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짚봉산이나 제봉산은 제사+봉우리+산의 의미가 함축된 젯봉산, 짓봉산에서 온 지명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서구의 자연은 오늘과 매우 달랐다. 조선시대에 광주의 문화와 생활을 기록한 <광주읍지>에는 “당차면 주민들로 하여금 광주 관아에서 소용되는 시탄柴炭, 즉 땔나무와 숯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광주의 옛 지명 당차면은 없다. 지금의 금호동 일대를 일컫던 옛 지명 당부면當夫面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금호동은 울창한 숲을 예상할 만큼 큰 산은 없지만, 광주 관아의 땔나무와 숯을 마련했다는 기록은 이 일대 산지의 수목이 울창했음을 보여준다.20세기 초엽에 이르면 자연환경도 많이 바뀐다. 특히 허허벌판에 가까운 강변지역 사람들은 목재를 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덕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유덕동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도 주변에 변변한 산이 없어 멀리 무등산까지 가서 땔나무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일부 마을을 제외하고는 서구지역의 전반적인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택지 개발 직전인 1990년대 중반 금호 지구에서도 목재 수급의 어려움은 간접적으로 파악된다, 당시 금호동 일대에는 상당수의 전통적인 민가들이 남아 있었는데, 대개 정면 3~4칸의 소박한 집들이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도 넓지 않았고, 기둥도 두께 15cm를 넘지 않았다. 이는 주변에서 튼실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던 사정 때문으로 추정된다.서구지역 내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은 꽤 큰 차이가 있었다. 금호동 금부마을의 경우 전체 주민들이 소유한 농경지 7만여 평은 대부분 논이었다. 인근 심곡마을은 전체 농경지 8만여 평 가운데 논은 3천여 평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밭이었다. 농경지도 가구당 3천 평을 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생활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주로 짓는 농작물은 벼와 보리였는데 수리시설이 부족하여 소출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시 1마지기 당(200평 기준) 벼 3섬 정도를 수확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적은 양이었다. 부족한 농사를 보충하기 위해 주민들은 목화와 고구마 농사를 지었고, 무명베를 짜서 양동시장에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벼농사는 봄에 논갈이로 시작했는데, 1970년대까지는 쟁기와 경운기를 병용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는 트랙터를 사용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농업용 기계는 많지 않았다. 100여 호가 사는 심곡마을의 경우 1990년대에 경운기 2대, 트랙터 2대가 고작이었다. 대다수 농가들은 농업용 기계를 소유한 농가로부터 마지기당 5만원을 주고 빌려 써야 했다. 논갈이가 끝나면 거름을 넣었다. 사육하는 가축이 많지 않아 두엄의 사용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화학비료를 사용했다. 못자리 설치는 4월 중순부터 시작했는데, 볍씨는 마지기당 3되 반 내지 4되를 사용했다. 통일벼 재배 이전에는 노지에 못자리를 만들었으나, 통일벼를 재배한 이후에는 보온못자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금부마을에서는 못자리에 볍씨를 뿌릴 때 찰밥을 지어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그 해 농사가 찰지게 잘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내기는 5월 25일경까지 마쳤는데, 기계식 이앙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금부마을과 심곡마을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면 이웃 마을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기도 했다. 모내기를 마치고 수확 전까지는 보통 세 차례의 김매기를 했는데, 1990년 대 쯤에는 손으로 제초하는 대신 농약을 사용하는 집이 많아졌다고 한다. 추수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했다. 추수 전에 논물을 빼고 베어낸 나락 다발은 논바닥에 깔아 말리고, 3일 쯤 지나 뒤집었다. 이렇게 나락이 마르면 한 뭇씩 묶어 쌓아 집으로 가져와 탈곡을 했다. 트랙터가 등장한 뒤부터는 바로 논에서 탈곡을 하여 알곡만 집으로 가져왔다. 주로 쌀과 보리 위주의 농사를 짓는 동네에서는, 겨울철은 가장 한가로운 절기였다. 1970년대까지는 빠듯한 농사 살림을 보충하기 위해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꽈서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삶은 1990년대 중반 택지개발이 되면서 아릿한 기억에만 남게 됐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농경지들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이 사라져갔고, 옛 토박이 마을마저도 아파트 숲에 갇혀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2018-05-23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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