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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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천 權踐 세종 5년(1423) 7월 19일∼세종 6년(1424) 10월 7일 상경
- 권천 權踐 세종 5년(1423) 7월 19일∼세종 6년(1424) 10월 7일 상경권천(?∼1431)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수(伯修)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찬성사(議政 府贊成事)를 지낸 권근(權近)이다. 4형제 중 맏이로, 동생 권제(權踶)는 장원급제하고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권규(權跬)는 1403년 태종의 셋째 딸 경안공주와 혼인하였고, 권준(權蹲)은 세조 때 정난공신에 책봉되어 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1406년 지평을 시작으로 사헌부 장령, 판전농시사, 1419년 상호군, 1425년 우군동지총제가 되었는데, 1429년에 기한 내에 가묘(家廟)를 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천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당하였으나, 동생 권도(權蹈)가 상소하여 1430년 4월 8일에 석방되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의 아들인 이종선(李種善)과 권근의 아들 권천은 처남매부 사이였다. 『금 성일기』「계묘년 1423년」의 기록에 “판목사 권천이 7월에 나주에 왔다가 갑진(1424년) 10월 7일에 목사를 대행하다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묘(1423 년) 7월 19일 도임, 갑진(1424년) 10월 7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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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첨
- 권첨(權簷), 湖節3下-185-4,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권첨의 본관은 안동이고 생원시 문과에 급제했다.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은 권항(權恒).이고 동생은 권반(權磐)이다.
- 2020-04-01 | NO.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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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필
- 권필은 광해군(光海君)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을 보다 못한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그의 무도함을 공박하였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시의 원래 제목은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인데, 그 내용은 “궁궐의 버드나무 푸르고 버들개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장안에 가득 찬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첨하네. 온 조정 모두 태평성세를 축하하는데 그 누가 직언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하였는고.[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이다. 권필은 이 시에서 은연중에 유희분을 궁류에, 임숙영을 포의에 비유하였다가 임금을 무시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친국(親鞫)을 당하고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는데, 숭인문(崇仁門)을 나가 유배를 떠나다가 길가의 민가에서 44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石洲集 卷7 聞任茂叔削科, 韓國文集叢刊 75輯》 《明齋遺稿 卷43 童蒙敎官贈司憲府持平權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36輯》
- 2022-05-08 | NO.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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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협 權悏 선조 33년(1600) 2월 8일∼선조 34년(1601) 10월 19일
- 권협 權悏 선조 33년(1600) 2월 8일∼선조 34년(1601) 10월 19일권협(1553∼1618)은 1605년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앞서 1600년 2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601년 10월 19일 이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600 년) 3월 18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되어 있으나, 1601년 10월 19일에 체직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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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맹 權希孟 중종 11년(1516) 3월 27일∼중종 16년(1521)
- 권희맹 權希孟 중종 11년(1516) 3월 27일∼중종 16년(1521)권희맹(1475∼1525)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자순(⼦醇), 호는 수암(⽔庵)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권상(權詳)이다. 1498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등용되고 추성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어 승훈랑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어서 정언, 헌납, 지평, 장령을 거쳐 1516년 나주목사로 부임했다. 나주목사 재임 시 산신당(⼭神堂)에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무녀(巫⼥)들에게 퇴미세(退⽶稅)를 거두는 등의 방법으로 음사(陰祀)를 금지시킨 일을 전라감사 허굉(許硡) 이 보고하니, 중종이 칭찬하고 옷감 한 벌을 하사하였다. 또한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서 죽음을 당하자 연루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성심껏 지내 주었다 한다. 1521년 나주목사에서 장악원 정으로 옮겨 가 7 월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으며, 형조참의와 1524년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병자(1516년) 3월 27일에 도임하였고, 신사(1521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나주객관[금성관] 안에 「행목사권공희맹자혜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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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기효간(1530~1593)
- 기효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 또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로 추증된 고흥군(高興君) 기대유(奇大有), 어머니는 함양오씨이다. 기효근奇孝謹의 형이며 장성에 정착한 기원의 후손으로 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는 엄격하였다. 이는 소학의 법도를 널리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했다. 부친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기대승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기효간은 시간이 있는대로 종숙되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찾아가 학문의 의문점을 토의하였다. 기효간은 한평생 조용히 살았다. 이는 증조인 복재 기준의 기묘사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일생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여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로 불렸다. 특히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배웠는데 하서는 내 정통을 이을 사람은 오직 그대라 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하늘과 땅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공자의 참된 기운 주자에게 전하여졌네.학문에 잠긴 마음 의혹하지 말고병들어 쇠약한 이내 몸 위로하게.김인후가 그에게 지어준 "우주의 중간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는 원기이고, 주자는 참됨이다."라는 시는 도를 전해 받은 시로 알려졌다. 동문인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오희길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기효간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김경수(金景壽) 윤진(尹軫) 김홍우(金弘宇) 이수일(李守一) 등과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바 있다.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는데 1902년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한 남문창의(현 북일면 오산리) 에 77선열(승려 9명, 노복 1명) 이 기록돼 있다. 사후에는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장성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장성군 황룡면 이곡리(아치실)에 그의 제각과 유적비, 묘갈명 등이 있다.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82)의 옥봉시집玉峰詩集에 기효간에게 보내는 시가 있다.贈奇伯顧(증기백고)백고(伯顧) 기효간(奇孝諫)께相思幾歲隑音塵(상사기세개음진) 우리가 그리워 서신에만 의지한 지 몇 해든가요?千里空驚夢裡人(천리공경몽리인) (어젯밤엔 당신께서) 천리 먼 길을 건너 (제) 꿈에 나오시어 놀랐습니다.聚散元來無定算(취산원래무정산) (허나) 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은 (그렇게) 늘 뜻밖인 거지요海城花柳一番新(해성화류일번신) 바닷가 마을에서의 멋들어진 풍류(라) 더욱 새롭더이다
- 2020-05-06 | NO.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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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호 임형수(1514~1547)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는 병마절도사 임준林畯의 아들로 1514년 나주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18세 때인 1532년(중종26) 진사과에 급제하고 1536년(중종30) 22세에 대과인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한림 시강원설서를 거쳐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다. 1537년에 중종이 서울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에서 시 한 편을 짓게 했는데 병조판서 소세양이 1위를, 임형수가 2위를 하여 임형수는 사서삼경과 말 1필을 하사받을 정도로 문예가 뛰어났다.그의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이나 '성수시화'에 실릴 정도로 걸작이었다. 허균은 임형수의 호방한 시를 칭찬하면서 그가 원통하게 일찍 죽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1538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고 1539년 명나라 사신 원접사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 고상한 인품과 건아발속한 시재는 외국 사신들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1542년 임형수의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는 3월 15일부터 21일까지의 비와 눈을 무릅쓴 산행 유람기이다. 칠보산은 함북팔경의 하나인데 그 이름에서 보듯 원래 일곱 개의 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섯 개의 산은 바다에 가라앉고 이 산만이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1544년(중종39)에 검상이 되었을 때 중종의 국상을 당하여 대제학 성세창 등 10인과 함께 대행왕의 행장을 짓는데 참여하였다.1545년(인종1)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에 올랐으며 사인이 되어 어명으로 중종의 묘지문과 명나라에 보내는 치적 및 시호를 청하는 대행왕의 시책문을 지었다.군기사정과 도감랑청으로서 왕릉의 묘역을 감독하였으며 그해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년이 다 못되어 1546년(명종1)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직되어 귀향하였다.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영의정 이기 등의 정권농락을 비난하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생기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소재 노수신, 미암 유희춘과 함께 절도안치하는 벌이 내려졌으나 벽서사건의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문정왕후에게 너무 가볍게 처벌한다는 상소가 있어 자택에서 사사되었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 의금부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임형수가 받는 장면은 유명하다. 퇴계 이황은 그를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호걸남아'라고 하였고 하서 김인후는 국가의 큰 인물이 원통하게 처형된 것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임형수는 34세로 임종 때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장남 구가 당시 8세였는데 훈계하기를 '글을 안배우면 무식한 사람이 되니 글을 배우되 과거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선조 초에는 제일 먼저 을사사화의 억울한 옥사에 대한 원통함을 풀게 하고 구관직이 회복 되었으며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직 받게 되었다. 사후에는 광산구 임곡동 등임사와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정부인 하동정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 2020-04-28 | NO.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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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경섭
- 기경섭(奇景燮, 1852~1916)의 본관은 행주이며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다. 자는 백행(伯行), 호는 벽서(碧捿)이다.부 : 奇東燁 조 : 奇夏麟 증조 : 奇師達 외조 : 昌寧 曺亨振 처부1 : 長興 高濟運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914년 6월 20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 2020-02-05 | NO.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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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근섭(奇近燮)
- 기근섭(1884~1978)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의경(毅卿)이며 호는 문강(聞江)으로 (북구) 누문리에 살았다.부 : 奇東準 조 : 奇昌鉉 증조 : 奇文國 외조 : 長興 高濟斗 처부1 : 蔚山 金琮煥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 2020-02-05 | NO.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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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만(奇東萬)
- 기동만(1856~1917)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사일(士一)이고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06년 6월 28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부 : 奇貞鉉조 : 奇命國증조 : 奇象默외조 : 南平 文在洙처부1 : 羅州 羅燾元처부2 : 錦城 羅承文
- 2020-02-24 | NO.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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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석(奇東奭)
- 기동석(1875~1950)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국로(國老)이고 호는 회계(晦溪)이다.부 : 奇琮鉉조 : 奇榮國증조 : 奇象憲외조 : 竹山 安命和처부1 : 長興 高濟喬처부2 : 光山 盧文奎기동석은 작은아버지인 기주현(奇周鉉, 1846~1907)의 양자로 입적됐다. 묘는 광산구 임곡동 노동마을에 있다가 이장하여 촌곡면 종산마을에 있다.1935년 吳東洙 등 通文에 따르면 1935년 4월에 병천사秉天祠의 일로 봉산정사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기동석은 겸재 기학경의 현손으로 <겸재집>에 '호상기문(湖上記聞) '을 찬했다.또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1860~1918)의 족제族弟로 1932년 기동준의 개인 문집인 《春潭文集》 10권에 행적을 정리한 家狀을 지었다. 춘담문집은 10권 5책 석인본으로 1966년 아들 기근섭奇近燮이 편찬했다.또 기언정(奇彦鼎, 1716~1797)의 1912년에 발간된 나와선생문집인 《나와집懶窩集》의 발문을 1912년에 썼다.또 나주 송정 출신 박봉혁(朴菶赫, 1873∼1935)의 1937년 간행된 8권 3책, 석인본인 《수재유고(守齋遺稿)》에 기동석(奇東奭)이 서문을 썼다. 박봉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때 역적들을 토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자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항일 투쟁을 기록한 의병록이며 역사서로 후석 오준선이 쓴 심남일실기인 《진지록盡知錄》의 발문을 썼다고 한다.
- 2020-02-24 | NO.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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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운(奇東雲)
- 기동운(1855~1919)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국(明國)이다.부 : 奇德永조 : 奇師九증조 : 奇商浚외조 : 晋州 姜東桓처부1 : 全州 崔正煥『蘆沙執紼錄』에 따르면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 2020-02-24 | NO.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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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익(奇東益)
- 기동익(1829~1897)은 본관이 행주이며 자는 노일(魯一), 호는 수곡(水谷)이다. 광주 우치동에 거주했다. 부 : 奇正鉉조 : 奇思淳증조 : 奇商師외조 : 咸陽 吳漢應처부1 : 光山 金江稷처부2 : 全州 李培煥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참고 眉巖先生墓下會案 , 『蘆沙門人錄』
- 2020-02-21 | NO.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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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준(奇東準)
- 기동준(1869~1918)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평중(平仲), 호는 춘담(春潭)으로 진사를 지냈다.부 : 奇昌鉉조 : 奇文國증조 : 奇象德외조 : 海州 崔煥潤처부1 : 長興 高濟斗1860년 11월 17일 奇大升의 후손인 昌鉉의 아들로 光州 廣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나 잦은 질병에 시달렸다. 평소 어버이 섬기기를 극진히 했으며, 항상 『小學』의 가르침으로 몸을 검속했다. 18세에 奇正鎭을 배알한 뒤 인고의 노력으로 제자백가서를 탐독했다. 선조인 文憲公 奇進이 己卯士禍로 인해 光州의 古龍에 내려와 卜居했는데, 1877년 기동준은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講學을 하면서 선조의 業을 이었다. 1880년 勉庵 崔益鉉을 만났으며, 1888년 한 달에 한 차례 講會를 열자, 사방의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894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다시 기정진에게 귀의하여 松沙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두문불출했으며, 1896년에는 송사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鰲城 李恒福에게 가서 계책을 진술했다. 1901년 9월 11일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고, 1903년에는 문헌공의 문집을 새로이 간행했고, 기봉선생의 續集 2권과 別集, 附錄 1권을 1907년 간행했다. 1910년에는 나라의 변고에 통한하면서 『春秋』한 권을 들고서 산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이 따랐다. 항상 諸葛亮의「出師表」, 司馬遷의 「俠客傳」과 杜甫의 「古栢行」 등을 읽으면서도 『대학』에 심취했다. 1913년 도산서원을 방문했고 이해 이황의 『陶山及門錄』을 찬집하면서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1916년 기우만 선생 장례를 지낼 때[襄禮] 참석하였다. 1918년 9월 29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봉 기대승의 <고봉속집 논사록 발高峯續集論思錄跋>을 쓴 조찬한趙纉韓의 글에 따르면 "사칠이기 속편(四七理氣續篇)은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별도로 간행하였으나 중간에 유실되었는데, 정조 병오년(1786)에 관찰사인 조공 준(趙公竣)이 의연금을 내어서 거듭 중간한 것이었다. 속집(續集) 2권과 별집(別集) 부록(附錄) 1권은 족조(族祖)이신 춘담공(春潭公) 기동준(奇東準)이 나의 조고(祖考)와 더불어 고종(高宗) 정미년(1907)에 비로소 간행하니, 모두 11권이었다."는 내용이 있다.*참고: 『澹對軒重建扶成錄』 『蘆沙門人錄』 『眉巖先生墓下會案』 1901년 기동준(奇東準) 서간『春潭文集』
- 2020-02-21 | NO.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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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직(奇東稷)
- 기동직(1869~1919)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중백(仲百)이다.부 : 奇中鉉조 : 奇師贒증조 : 奇商胤외조 : 南平 文世憲처부1 : 咸平 李台範1916년 송사 기우만 선생 장례를 지낼 때[襄禮] 참석하였다.*참고 『澹對軒重建扶成錄』
- 2020-02-21 | NO.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