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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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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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후
    고종후(高從厚, 1554~1593), 湖節1下-163-2, 光州, 壬辰, 孝烈公-《호남절의록》(1799)고종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부봉(阜峯)이다.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이어서 전적·감찰·예조좌랑을 거쳐 1588년 임피현령(臨陂縣令)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知製敎)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인 광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했다.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권율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이 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유체(遺體)를 수습하여 몰래 금산 산중에 묻어두었다가, 40여 일만에 다시 찾아서 고향 광주(光州) 창평(昌平)에 장사지냈다.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그때 고종후의 나이가 40세였다. 6~7만 명의 진주성 사람들이 거의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일부는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고종후의 유체(遺體)를 진주 남강에서 찾지 못하여 묘소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그를 도승지(都承旨)에 추증하였으며, 왕세자(王世子) 광해군(光海君)도 별도로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 뒤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고경명의 ‘포충사(褒忠祠)’에 함께 배향하였다. 숙종(肅宗) 때 시호를 ‘효열(孝烈)’이라 내려주었다.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약천집(藥泉集)』 권23 「증이조판서고공청시행장(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고종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정직하였다. 그의 문장은 준일(俊逸)하고 경발(警發)하며, 지필(紙筆)을 잡으면 지체 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의병을 일으킬 때 그가 쓴 격문이 사방에 전달되자 그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2020-04-01 | NO.636
  • 고한빙
    고한빙(高漢聘), 湖節5中-120-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635
  • 고한주(高漢柱)
    고한주(1871~1959)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방서(邦瑞)이고 호는 외당(畏堂)이다. 주요 거주지는 광주 장산리였다.부 : 高濟寅조 : 高亨鎭증조 : 高時瑾외조 : 鄭燦默처부1 : 忠州 朴源佑고한주는 1894년 장성 西二面의 유생 奇宇冕 朴義容 등과 함께 召募使에게 東學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지를 올렸다.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에게 수학하였다.만송재晩松齋를 경영했고 문집으로 외당유고畏堂遺稿가 있다.1922년에 고한주가 간재 선생의 상에 지어보낸 제문이 있다. 간재의 초명은 경륜(慶倫), 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추담(秋潭), 구산(臼山)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이 글은 고한주가 그의 스승인 간재 전우 선생이 종명한 지 23일이 지난 1922년 7월 27일에 지은 제문이다. 그는 간재 선생님의 영연 앞에 재배하고 통곡하면서 공경히 제사지냈다. 하늘이 선생님께 내린 성품은 인과 의요, 떳떳한 본성을 확립하니 사람에게 떨어지지 않네. 성인은 하늘을 근본으로 하고 군자는 성품을 높이시네. 도의가 확연한데 해처럼 밝으셨네. 여러 성인이 남기신 요결을 조심스럽게 책려하여 우리나라에 이르렀네. 아! 선생님은 남쪽지방에서 굴기하여 안연의 곤궁 속에서 스스로도 즐기어 일찍이 전재 임헌회 선생의 문하에 집지하여 예로써 극복하고 공자의 주자의 정맥을 이어 받고 율곡 이이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적전이 되셨네. 이는 샘에서 처음 물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고 불이 처음 불타오는 것과 같은 것이네. 그러나 세상은 말세로 빠져들어 인간과 짐승이 섞여 구분하기 어렵고 의관과 신발을 거꾸로 싣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네. 이에 선생님은 공자의 생각처럼 바다에 나가 중화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였네. 이에 사류들이 운집하여 문강(問講)이 이루어져 털끝과 실끝 처럼 분석하셨네. 아! 이제 선생님께서 없으시니 사문도 또한 없어지네. 그러나 주나라가 동천한 후 공자의 도가 밝아지고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 감에 주자가 태어났네. 이 땅은 무슨 땅인가. 오늘은 어느 때인가. 우리 선생님을 은미하게 하여 누가 부지하는가. 소자는 늦게 선생님의 문하에 나아가 선생님에 대한 추회를 더 이상 펼 수 없으나 공경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명하니 선생님의 수택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소자의 작은 정성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참고문헌 1894년 奇宇冕 등 所志 『畏堂遺稿』
    2020-02-24 | NO.634
  • 곽급(1603~?)
    곽급(郭岌, 1603~?), 자는 경첨(景瞻)이고 본관은 해미(海美)이다. 현풍 곽씨(玄風郭氏)라고도 한다. 광산(光山)에 거주하였다.1627년(인조5) 사마시 식년시 3등, 1648년(인조26)에 식년시 문과 병과 10위였다.부친은 곽지유(郭之維), 처부는 장보(張譜)이다.
    2024-11-18 | NO.633
  • 곽해 郭海
    곽해 郭海의 처음이름은 桓이고 호는 乾止堂이다.  고려 중반의 대문호 進賢館大提學 文憲公 元振(八世)의 玄孫으로 공민왕조에 벼슬이 사온동정좌우보승중랑장으로 麗史備略에 이르기를, 공민왕조에 좌우보승랑장 郭海는 나이23세에 아버지의 벼슬을 세습하여 총관중랑장이 되었다.  신사 거란(哈丹)의 난에 조지린과 함께 영안도 용진에 나아가 싸움에 이기고 조정에 승첩을 고하니, 이 때 나이 25세였다.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金袍와 玉帶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너는 아직 장가가지 않았으니, 이제 혼인하여 훌륭한 자식을 낳고, 대대로 왕실에 힘을 다하기를 네가 짐에게 하는 것 같이하라.”하였다.  병신년 仲孚의 난에 명을 받아 도총사부령직을 제수 받았다. 조소생, 임원거, 조천주와 쌍성 화주 화북 九月山사이에 출전하여, 적을 크게 이기고, 西京에 계속 머물면서 12城鎭의 紅巾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군공으로 초수수사구밀직사주국삼중의 직책을 제수 받았다.  圃隱 鄭선생과 함께 국맥을 도모하다가, 圃隱이 태조의 龍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으니, 끝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광주의 소고룡방이라 불리는 곳에 숨어서 산에 막을 치고 살았다.  일편단심 舊國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정상 부근 건지(西北方을 등진 방향)에 집을 얽고 살았으며 乾之는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함이니 건지라 칭한 뜻을 알겠다. 매일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사모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배우기를 원했으나 그는 항상 겸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망국의 대부이니 남의 자녀를 가르칠 수가 없다.” 하였다. 후인 고경지가 그 산을 이름하여 건지라 하였고, 그 마을을 산막이라 하였다.  건지는 공의 집이 산의 건지방향인 뜻이고 산막은 공이 와서 처음 산에 막을 지은 뜻을 가리킨다.(衣山爲幕) 그 산과 마을의 명칭이 모두 공의 유적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가히 공의 절행이 백세에 이르기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묘는 광산군 임곡면 산막동 건지산 갑좌이고, 배는 郡夫人제주고씨(司온直長 坪 女)로 합장되어 있으며 비갈과 床石이 있다.  후손 孟奎가 갈명하고 撰하였다. 아들은 思安, 思寧 형제분이며 큰딸은 李自寶(함풍인 정룡랑장)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은 이극명, 이극해 이며 둘째사위 함성군 林碩住(나주인)는 군기사정에 추증 되었고, 외손 임귀연은 호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入鄕顯祖 郭  海 先生  (1958년 戊戌普 수록 내용) 初諱桓號乾止堂 文憲公 元振 玄孫 恭愍王朝 官司온同正左右保勝中郞將 麗史備略曰 恭愍王朝 左右保勝郞將郭海年二十三 襲父爵爲摠管中郞將 辛巳 哈丹之亂 與趙之璘同進于永安道龍津 勝捷獻 於朝 時年二十五 王大奇之 賜金袍玉帶曰 汝未有室服 此歸娶生嘉子 世世致力於王室 如汝之於朕也 及丙申 仲孚之亂召命拜都摠司部領 趙小生林原巨趙天住 出戰于雙城和州和北 九月之間 擊走勝捷 仍留西京 掃蕩紅巾殘賊十二城鎭 以軍功超授守司寇密直使柱國三重 封海美君 麗運告訖 與圃隱鄭先生 圖扶國맥 圃隱立槿太祖龍興 遂懷不二之志 遯于光州之召古龍坊 依山爲幕而居之 一片丹心不忘舊國之恩 遇且구一堂于附近山上扁之以乾之乾之盖取諸乾乾不息 知其所止之義 日日登臨望北號慕 終身不懈 時有人來請學子 公常自謙而言曰 余亡國之大夫不可以訓 迪人子弟云 後人高景之名其山曰 乾止號其洞曰 山幕乾止稱其公之肯堂于山扁之以乾止之義 山幕指其公之來胥始依山爲幕之意 其山與洞之稱名 皆由於公之遺蹟而至今不切於此可以知公之節行 白世而不朽 墓 光山郡林谷面山幕洞乾止山甲座 配郡夫人濟州高氏父司온直長坪 墓合不부有碣床石 後孫孟奎撰碣銘 子思安見下 思寧見夜 女李自寶咸豊人 精勇郞將 子李克明李克諧 咸城君林碩住羅州人 贈軍器寺正 子林貴椽贈戶曹參議    十二世 諱 海의 長子, 思安은 孫 謙山 曾孫 益晋, 滋貞으로 이어지고          益晋은 中郞將公派의 派祖 諱          奉訓郞行禮賓侍主簿를 지낸 主簿公派의派祖 諱 儀를 낳고          滋貞은 星州목사를 지내고 牧使公派의 派祖 諱 保君을 낳았다. 次男 思寧은 孫 宜山 曾孫 茂貞으로 이어져서          參奉公派 派祖 諱 球          참봉벼슬을 지낸 敬隱公派 派祖 諱 琳          효행으로 계공랑 광릉참봉에 제수된 啓功郞公派 派祖 諱 三兄弟를 낳아 山幕洞 五代문중을 거느리게 되었다.
    2020-08-11 | NO.632
  • 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 어진익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4권 / 신도비(神道碑)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내가 일찍이 선배 어른들을 종유하면서 삼가 이조 참판에 추증된 관찰사 겸재(謙齋) 어공(魚公)을 보았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절제함이 있고 곧으면서도 과격하지 않으며, 재주는 번잡한 사무를 처리하기에 충분했는데도 마치 무능한 것 같았고 청렴함은 세상을 경계시키기에 충분했는데도 명예를 바라는 데 가까울까 두려워하였으며, 변고와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옛날에 일컫던 현대부(賢大夫)였던가 보다.공의 휘는 진익(震翼)이요, 자는 익지(翼之)이다. 어씨는 상조(上祖) 화인(化仁)으로부터 비로소 함종(咸從)에 적(籍)을 두었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변갑(變甲)이란 분이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면서 누차 소명이 내려도 나가지 않았다. 효첨(孝瞻)은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세공(世恭)은 호조 판서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숙(襄肅)인데, 이분들은 모두 문장과 훈업으로써 대대로 명신이 되었다. 고조 휘 계선(季瑄)은 좌참찬으로 아선군(牙善君)에 봉해졌고, 증조 휘 운해(雲海)는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학행이 있어 율곡ㆍ우계 등 여러 선생들과 서로 친구로서 좋게 지냈으며, 조 휘 몽린(夢麟)은 동몽교관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고 휘 한명(漢明)은 세칭 명진사(名進士)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내고 좌참찬에 추증되었는데, 병자호란 때에 강도(江都)에서 충성을 바쳐 효종의 칭찬과 감탄을 받았다.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참봉 숙(俶)의 딸로 모두 4남을 길렀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공은 천계(天啓 명 희종) 을축년 11월 6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는 준걸하고 석대하였으며, 자라서는 위대하게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힘써 배우고 글을 잘 지어 겨우 15세가 되었을 때에 기예와 학업이 이미 진취되었으므로, 과시(科試)에 합격하여 매우 명성이 있었다. 무자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고 나서 임진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무술년에는 금오랑(金吾郞)에 천수(薦授)되었고, 차례에 따라 내자시 직장ㆍ호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임인년에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대책(對策)으로 합격하여 병조의 좌랑과 정랑ㆍ함경도 도사ㆍ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을사년에는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정언 이무(李堥)가 사사로운 은총을 받은 재상 허적(許積)을 논핵한 것 때문에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출되자, 공이 동료들과 함께 항쟁하니, 상이 진노하여 공을 먼 변방으로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공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여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함께 쟁론하고, 영부사 이공 경석(李公景奭), 영상 정공 태화(鄭公太和), 좌상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또다시 차자를 올려 공을 변호하니, 상의 뜻이 조금 풀리어 다만 삭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뒤에 또 대신 및 간관의 말로 인하여 마침내 서용(敍用)되었다. 이로부터 누차 사헌부에 들어가, 안치되어 있는 죄인 윤선도(尹善道)를 감형하여 이배(移配)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영남 사람 유세철(柳世哲)이 기해년 효종 승하시의 복제(服制)가 잘못되었다고 헐뜯어 무함한 죄를 논핵하였다.그 사이에 병조로 옮겨졌고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얼마 안 되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함평 현감이 되었다. 이때 대부인은 이미 백씨(伯氏)의 임소(任所)인 무안현에 있었으므로, 형제가 교대로 대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왕래하면서 한도가 없이 곡진하게 봉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다음해에 어떤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서용되어 정언ㆍ사서가 되고 사예ㆍ장령에 승진되었다.경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자 장령에 제수되고 종부시 정에 승진되었다. 공이 하루는 장령으로서 사헌부에 나가서 이미 전계(傳啓)하여 비답을 받았는바, 대사성 이공 민적(李公敏迪)이 일을 논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리어, 상이 특명으로 그를 외직에 보임시키면서 당일로 발견(發遣)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금문(禁門)을 곧 닫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공이 즉시 아뢰기를 “이민적이 소장을 올리자마자 견벌을 바로 가하여 그를 빨리 발견하도록 재촉하시니, 이는 사람을 내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는 제신들의 상소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상신(相臣)에게 관계가 되면 찬출이 잇따라서 조정이 거의 텅 빌 지경이니, 전하께서 장차 국사를 어디에 두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것은 상규에 어긋난다 하여 특명으로 파직 추고하였다.계축년에는 사복시 정ㆍ사서ㆍ문학을 역임하고 헌납에 옮겨졌다. 갑인년에는 사간ㆍ보덕에 승진되었다가 조정의 천거로 인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발탁 제수되었다. 이때 왜인(倭人)이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남방에 대한 근심이 한창 많았는데, 전 부사 권대재(權大載)가 자못 임상(任尙)의 정사를 썼던 터이므로, 공은 그 가혹했던 정사를 너그러움으로 대신하니,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행해져서 변경이 편안하였다. 그곳을 2년간 다스리는 동안에 절의 있는 이를 포창하고 군졸을 훈련시키고 낭비를 줄이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해 주니, 백성에게 은혜가 깊었다는 명성이 넘쳐흐르고 백성과 오랑캐들이 서로 다투어 칭송하였다. 그러자 순무사(巡撫使) 권대재 역시 여론에 따라 그 사실을 조정에 포양하여 보고했으나, 끝내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 의하여 접수되지 못했다. 이윽고 당로자의 뜻에 거슬리어 마침내 체포 파직되기에 이르렀다.정사년에 서용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 마침 가뭄을 만나 죄인을 심리(審理)할 때에, 유배된 소유(疏儒) 이세필(李世弼) 등을 석방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연석(筵席)에서 강력히 쟁론하여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렸다가 마침내 다른 일로 책망을 받고 파직되었다.뒤에 역적 윤휴를 이웃집에서 만났는데, 그의 만류를 받고서도 안색과 언사를 조금도 꾸미지 않고 즉시 옷을 떨치고 일어나버리니, 그가 크게 유감을 품었다. 이로 인해 그가 공이 동래부에 있을 때의 일을 다시 제기함으로써 공이 두 차례나 형리(刑吏)의 심문을 받고 끝내 도배(徒配)되기에 이르렀으나, 오래지 않아 방환되었다. 이에 앞서 참찬공이 양주(楊州) 마산(馬山)의 기슭에 별장을 짓고 손수 향나무와 잣나무 각각 두 그루씩을 심어 놓았는데, 공의 형제가 또 4인이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삼괴당(三槐堂)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 사이에 정자를 지어 사수정(四秀亭)이라 편액을 써서 걸고 여러 자제들과 함께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다.기미년에는 여주 목사가 되었다. 신유년에는 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남의 말에 의하여 사체(辭遞)되었다. 그러자 우암 송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어진익은 권간(權姦)이 임금을 속이던 때에 우뚝 서서 굴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는데, 지금 남의 말에 의해 사체되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대신에게 물어서 다시 앞서 내린 관직 임명을 거듭 내리시어 어진익으로 하여금 그대로 버려진 인재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고, 연해서 세 번이나 차자를 올려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해에 광주 목사(光州牧使)ㆍ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뒤에 병조ㆍ예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전임되었다.계해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본도의 전제(田制)가 소루함이 많아 조정에서 공에게 균전(均田)의 정사를 맡기므로, 공이 실시한 일이 많았으되 한결같이 요역을 균등히 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일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병의 위중함 때문에 해면을 요청하여 갑자년 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5일에 백동(栢洞) 집에서 작고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부의와 조문을 의식대로 하였다. 처음에 고양(高陽)의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가 그로부터 27년 뒤인 경인년에 풍덕(豊德)의 망포리(望浦里) 건좌(乾坐)의 언덕으로 개장(改葬)하였다.공은 키가 크고 풍채가 훌륭하여 바라보면 걸출하게 보였다. 성품은 활달 솔직하고 호탕하여 간격이 없었다. 처음 공이 대각(臺閣)에 들어갔을 적에는 현모(賢母)의 교훈을 받고 더욱 스스로 격려하여, 무슨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말을 해서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았고, 비록 임금의 엄한 견책을 받더라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너그럽고 간이하게 백성을 대하고, 청렴하고 신중하게 몸을 단속하였으며, 삼가고 힘써 법을 지키어 오직 직사(職事)만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공이 조정에 들어가 행사하는 사이에서 드러난 언론과 풍채가 이와 같았다.평상시에는 효우하고 돈목하여, 홀로된 자씨(姊氏)가 연로하여 병들었으므로 그를 모셔다가 봉양해서 뜻에 맞게 해드렸고, 여러 아우들과 의식(衣食)을 분담해서 자씨의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냈으며, 이 마음을 종척(宗戚)에까지 미루어 또한 반드시 빈궁한 이를 구휼하고, 재(才)와 선(善)을 장려하여 성취시켰으므로, 모두가 공의 덕에 감복하여 귀의(歸依)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는 매우 엄격하였고, 가속들을 거느리는 데는 법도가 있었으므로, 문정(門庭) 안에 존비의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이는 또 공이 집에 있을 때의 행의가 종족들에게 칭도된 것들이다.공은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문재 또한 뛰어나서 사부(詞賦)를 짓는 데 있어 붓만 들면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갔고, 또 초서(草書)ㆍ예서(隷書)를 잘 썼으나, 평소의 뜻이 겸손하여 일찍이 시부나 글씨에 능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또 담박하고 조용함을 스스로 지키고 출세의 길을 좇아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을 향모하였는데,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ㆍ서하(西河 이민서(李敏叙))ㆍ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 등 제공이 더욱 공과 친밀했다고 한다.배(配)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통사랑 휘 빈(玭)의 딸인데, 타고난 자품이 단장하고 정순하여 효성과 공경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 사이에 처해서나 여러 조카들을 무양하는 데 있어 매우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며, 평소에 함부로 웃으며 말하지 않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다. 나이가 8, 90세에 이르러서도 총명과 근력이 소장 시절보다 줄지 않았는데, 임종시에도 정신이 환하여 마치 평상시처럼 자제들을 훈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고, 유서(遺書)를 써서 자손들에게 제전(祭奠)을 힘써 간략히 하도록 경계하였다. 공과 동년생으로서 을미년 7월 1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91세였다. 이해 9월에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1남 2녀를 낳았는데, 남 사형(史衡)은 지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어 추은(推恩)으로 공에게 참판이 추증되었고, 장녀는 영의정 이유(李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참판 이의현(李宜顯)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돈녕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유봉(有鳳)은 집의가 되었는바 경학으로 사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고, 그 다음 유귀(有龜)는 문과에 급제하여 유수가 되었으며, 그 다음 유붕(有鵬)은 낭천 현감(狼川縣監)이다. 딸은 교관 김순행(金純行)에게 시집갔다. 영의정의 2남은 현응(顯應)ㆍ현숭(顯崇)이고 2녀는 윤혜(尹寭)와 참군 원명일(元命一)에게 시집갔다. 유봉의 1남 도응(道凝)은 관례(冠禮)를 하고 나서 요절하였고, 계자(繼子)는 석윤(錫胤)이며, 2녀 중에 장녀는 홍상한(洪象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유귀는 6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김시교(金時敎)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보상(李普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홍계구(洪啓九)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석윤은 출계(出繼)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외증손 남녀가 또 약간 명이다.아, 공 같은 재기와 국량으로 나라의 큰 계책을 하는 자리에 처하여 자신의 포부를 다 펼 수 있었더라면 그 계책을 세운 것이 반드시 크게 볼 만하였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기국대로 다 쓰이지 못하고, 평생 동안 시행한 것이 겨우 안으로는 대간, 밖으로는 관찰사로서의 면모만을 드러낸 데서 그쳤으니, 어쩌면 그리도 불행하였는가. 아, 세상에는 큰 재주를 지니고도 불우한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많으므로, 지금 이 묘문(墓文)을 지으면서 거듭 슬픔을 느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아, 빛나는 어씨 종족이여 / 於赫魚宗창성한 조정에 갑자기 일어나 / 勃興昌朝문신이며 훈신으로 / 乃文乃勳대대로 고관을 지냈는데 / 世服大僚평창은 행실이 돈독하였고 / 平昌行篤운판은 명성이 높았었네 / 運判名高공에게 이르러서는 / 式至于公진실로 재덕이 뛰어나서 / 允矣俊髦대간으로 직간하는 상소 올려 / 袖簡臺坡수리가 하늘 높이 오르듯 뛰어났고 / 一鶚雲霄임금의 비위 자주 거슬렀으나 / 尺鱗屢攖성상께서 곧음을 받아들였네 / 聖主容直남쪽 변진에 나갔을 땐 / 出鎭南邊오랑캐도 공의 덕을 사모했는데 / 蠻人懷德엉뚱한 모함을 받아 / 曰車載鬼죄 없이 유배되었으나 / 匪罪而謫겁화가 곤륜산을 다 태워도 / 劫火燒崑타지 않는 건 옥뿐이었네 / 不燼唯玉때 만나 동류와 같이 나가서 / 際時彙征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 望歸湖嶽누가 그 길을 막았던고 / 誰其尼之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배척했으나 / 大老疏斥끝내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 而違不通백성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네 / 亦曰殆哉그러다가 동녘 토지 균전하기 위해 / 屬蕝東田다시 강원 관찰사를 제수 받아 / 復畀外臺장차 큰일을 하게 되었는데 / 若將有爲병 때문에 이루지 못했네 / 病未克濟대개 공은 세상과 잘 맞지 않아 / 盖公寡合세상에 쓰이기도 버려지기도 해서 / 呑吐於世공의 펴이거나 굴한 것이 / 其所伸屈시운의 비색과 형통을 점쳤네 / 占時否泰깨끗한 명성과 곧은 그 절조 / 淸名直節세상에 누가 공과 맞설꼬마는 / 世孰與京애석하게도 크게 쓰이지 못해 / 惜不大用나라의 기둥이 되지 못하였네 / 爲國榦楨덕수의 산 언덕의 / 德水之原초목이 무성한 묘역에 / 有欝佳城내가 비명 새기어 / 我銘桓楹천년 후에까지 밝게 보이노라 / 昭示千齡[주-D001] 임상(任尙)의 정사 : 엄혹(嚴酷)한 정사를 뜻한다. 후한 때 임상이 반초(斑超)의 후임으로 도호(都護)가 되어 반초에게 백성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반초가 말하기를 “변방의 이사(吏士)들은 본디 효자 순손(孝子順孫)이 아니요, 오랑캐들은 본디 금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그대의 성품은 너무 엄하고 급하니, 의당 간이한 정사를 펴서 이민들에게 작은 과실은 용서해 주고 중요한 일만을 총괄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임상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뒤에 과연 낭패를 당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7》[주-D002] 삼괴당(三槐堂)의 고사 : 송(宋) 나라 때 왕우(王祐)가 회화나무[槐] 세 그루를 뜰에 심고서 “내 자손 가운데 삼공(三公) 지위에 오르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고 예언을 했는데, 과연 그의 아들 단(旦)이 재상에 올랐으므로, 뒤에 그의 자손들이 거기에 삼괴당을 세웠던 고사이다.[주-D003] 평창(平昌) : 어진익(魚震翼)의 증조로서 평창 군수를 지낸 어운해(魚雲海)를 가리킨다.[주-D004] 운판(運判) : 어진익의 아버지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낸 어한명(魚漢明)을 가리킨다.
    2023-08-10 | NO.631
  • 관해 임회(1562~1624)
    임회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임만근林萬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준林晙(?~1548)이고 문천으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4남매 중 넷째인 아버지는 형조좌랑으로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이며 어머니는 이진남李震男의 딸이다. 둘째 숙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임정수의 형은 금호 임형수林亨秀(1514~1547)이다.태어나면서부터 체구가 크고 어려서는 총명하고 스스로 언어를 깨우치고 문자를 해독했었다. 자라서는 시문을 잘 짓고 가는 곳마다 이름을 날렸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일찍이 1582(선조15)년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선조26)년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1611년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후 바닷가에 있는 옛집에 돌아와 스스로 호를 관해라 하였다.161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제관으로 장연(長淵)에 갔었는데 이듬해 이이첨, 정인홍의 모함으로 임서,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양산에 유배되고 아들 임득붕林得朋은 곤양에 유배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정랑에 복직되었으며 군기시첨정을 거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을 독려하였다.1624(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 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반군에 잡혔다.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이괄을 꾸짖다가 혀를 잘려 전사하였다. 임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68년(고종 5) 나라에서 내린 정려가 있다. 정면·측면 각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정자로, 1939년 중수되었다. 관련자료로는 1939년 기록된 '관해선생 정려 중수기'가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송현마을에 있다. 저서로는 관해집觀海集 1권이 전해지며 사후에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5-08 | NO.630
  •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명희(李命熙)
    영조 4년 무신(1728)이광좌가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명희(李命熙)는 제수된 지 이미 오래됐는데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주는 재읍(災邑)이 아니므로 말을 지급하여 보낼 것을 청하지 않았지만 지체하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해당 조에 분부하여 재촉해서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그대로 하라.”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2022-05-07 | NO.629
  • 구봉서 具鳳瑞 인조 15년(1637) 8월 12일∼인조 16년(1638) 7월 25일
    구봉서 具鳳瑞 인조 15년(1637) 8월 12일∼인조 16년(1638) 7월 25일구봉서(1596∼1644)는 1638년(인조 16)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637년 8월 서천군 수에서 8월 12일 나주목사로 도임하였고 1638년 7월 25일 전라도관찰사로 승진되어 떠났다. 『금성읍지』에는 “정축(1637년)에 서천군수에서 8월 12일 도임하였고 무인 (1638년) 7월 25일에 본도 관찰사로 승진되어 이임하였다.”라 되어 있다. 1638년에 세운 「행목사 구공봉서 청덕선정비」 두 개가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서 있다. *상세이 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28
  • 구택규 具宅奎 영조 9년(1733) 6월 11일∼영조 11년(1735) 9월
    구택규 具宅奎 영조 9년(1733) 6월 11일∼영조 11년(1735) 9월현감 구택규(1693∼1754)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초명은 구명규(具命奎)이다. 아버지는 내승(內乘) 구혁(具爀)이다. 1714년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0년 고산찰방, 1731년 진주목사·경상도사, 1732년 부사직, 1733년 5월 12일 금성현감으로 제수하여 6월 11일 부임하였다. 1736년 부호군, 1737년 공조참의, 동래부사, 1739년 호군·승지, 1740년 영월부사, 1742년 우부승지, 1743년 회양부사, 1744년 좌부승지, 1745년 영변부사, 1746년 동지중추부사, 1747 년 병조참판·우윤, 1748년 형조참판, 1753년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금성현감으로 올때 전라도관찰사의 추천이 있었음을 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실록』에 “전라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 ‘금성(錦城)은 생산되는 물품이 많고 지역이 큰데, 구택규는 자못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청컨대 구택규를 차송토록 하소서.’ 하자,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계축(1733년) 6월 11일 도임하였고 을묘(1735년) 9월에 동지서장관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627
  • 국재 오겸(1496~1582)
    오겸吳謙의 본관은 나주. 자는 경부(敬夫), 호는 지족암(知足庵), 국재(菊齋),  시호 정간貞簡으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오신중吳愼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자치吳自治이고, 아버지는 부사 오세훈吳世勳이다. 어머니는 진첨 신말평申末平의 딸이다.1522(중종17년)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3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의령현감으로 나갔다가 예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장령ㆍ집의ㆍ교리ㆍ부응교ㆍ내섬시첨정을 거쳐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1550(명종5년)년 금양군에 봉해졌고, 곧 담양부사ㆍ광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ㆍ병조참판ㆍ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경주부윤ㆍ한성부 좌윤을 거쳐 1557년 호조참판, 1559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뒤에 이조ㆍ병조ㆍ호조의 판서를 거쳐 지경연사를 지냈다.1564년 우찬성이 되고 이듬해  치사를 청원하였으나 궤장을 하사받고 의굼부판사를 거쳐 1571(선조4년)년 좌찬성으로 춘추관지사가 되어 그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중종, 명종, 선조 3조에 걸쳐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정직 청렴하고 권력과 부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권흉 윤원형이 꺼리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율곡 이이가 말하기를 청백하고 절조있는 신하였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격자라 하였다.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에 있는 설강 유사(雪江 柳泗 1502~1571)의 호가정(浩歌亭)에서 교유하며 지내기도 했다. 오겸의 묘지명은 율곡 이이가 썼다. 87세의 일기로 별세하고 나라에서 정간이란 시호를 내렸다.
    2020-04-28 | NO.626
  • 권반 權盼 광해군 8년(1616) 1월 27일∼광해군 8년(1616) 2월
    권반 權盼 광해군 8년(1616) 1월 27일∼광해군 8년(1616) 2월권반(1564∼1631)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명(仲明), 호는 폐호(閉⼾), 다른 이름으로 권분(權昐)이 있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화(權和)이다. 영의정 윤국형(尹國馨)의 사위가 되었다. 동생 권흔(權盺)과 아들 권경(權儆)이 문과에 급제하였 다. 1594년 음직으로 군자감 참봉이 되었고, 159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좌랑, 1601년 직강·사간원 정언·예조정랑·대동찰방, 1602년 시강원 문학, 1603년 경상도 암행어사·홍문관 부교리, 1606년 안주목사, 1612년 강화부사, 161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행정을 잘 다스려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1616년 1월 2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으나 2월에 강화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1617년 함경도 순검사, 1619년 공흥도순검사·호조참판, 1624년 도승지, 1625년 경기감사, 1626년 충청도관 찰사, 1628년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직무에 있어 공평무사하고 합리적이어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616년) 2월 23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강화부사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25
  • 권순 權純 선조 4년(1571) 2월 2일∼*선조 4년(1571) 12월
    권순 權純 선조 4년(1571) 2월 2일∼*선조 4년(1571) 12월권순(1518∼1586)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일(景⼀) 또는 수초(守初),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권인(權仁)이다. 1543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다. 1558년 강원도 도사, 1562년 시강원 문학, 필선, 사헌부 지평, 1563년 사헌부 장령, 종부시 첨정, 시강원문학,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다. 1571년 2월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6월 20일 『선조 실록』 기록에 강직하고 명백하게 사건을 심리하여 옥송(獄訟)을 판결할 수 있는 전라도 관리로 논의되는 내용이 있다. 1573년 진주목사가 된다. 『금성읍지』에는 “신미(1571 년) 2월 2일 도임하였는데, 살옥 죄인을 체포하지 못한 일로 파직을 당하여 돌아갔는데 그 일자를 모른다.”라고 되어 있다. 다음 목사의 부임일이 1572년 2월인 것으로 보아 1571년 12월 즈음으로 여겨진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624
  • 권율 權慄 선조 25년(1592) 7월 13일∼선조 25년(1592) 7월 20일
    권율 權慄 선조 25년(1592) 7월 13일∼선조 25년(1592) 7월 20일권율(1537∼1599)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7월 22일 전라도관찰사감사로 제수되어 전란 지휘를 맡게 된다. 1599년 병이 들어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금성읍지』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선조실록』에 나주목사 제수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623
  • 권인행
    권인행(權仁杏)의 자는 석과(碩果),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거주지는 광주이다. 증조부는 권극화(權克和)[文], 조부는 권기(權琦)[文], 부친은 권은영(權恩榮)이다.1507년(중종2) 증광시 진사 3등 5위였다.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2024-11-18 | NO.622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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