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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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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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 어진익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4권 / 신도비(神道碑)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내가 일찍이 선배 어른들을 종유하면서 삼가 이조 참판에 추증된 관찰사 겸재(謙齋) 어공(魚公)을 보았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절제함이 있고 곧으면서도 과격하지 않으며, 재주는 번잡한 사무를 처리하기에 충분했는데도 마치 무능한 것 같았고 청렴함은 세상을 경계시키기에 충분했는데도 명예를 바라는 데 가까울까 두려워하였으며, 변고와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옛날에 일컫던 현대부(賢大夫)였던가 보다.공의 휘는 진익(震翼)이요, 자는 익지(翼之)이다. 어씨는 상조(上祖) 화인(化仁)으로부터 비로소 함종(咸從)에 적(籍)을 두었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변갑(變甲)이란 분이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면서 누차 소명이 내려도 나가지 않았다. 효첨(孝瞻)은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세공(世恭)은 호조 판서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숙(襄肅)인데, 이분들은 모두 문장과 훈업으로써 대대로 명신이 되었다. 고조 휘 계선(季瑄)은 좌참찬으로 아선군(牙善君)에 봉해졌고, 증조 휘 운해(雲海)는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학행이 있어 율곡ㆍ우계 등 여러 선생들과 서로 친구로서 좋게 지냈으며, 조 휘 몽린(夢麟)은 동몽교관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고 휘 한명(漢明)은 세칭 명진사(名進士)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내고 좌참찬에 추증되었는데, 병자호란 때에 강도(江都)에서 충성을 바쳐 효종의 칭찬과 감탄을 받았다.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참봉 숙(俶)의 딸로 모두 4남을 길렀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공은 천계(天啓 명 희종) 을축년 11월 6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는 준걸하고 석대하였으며, 자라서는 위대하게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힘써 배우고 글을 잘 지어 겨우 15세가 되었을 때에 기예와 학업이 이미 진취되었으므로, 과시(科試)에 합격하여 매우 명성이 있었다. 무자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고 나서 임진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무술년에는 금오랑(金吾郞)에 천수(薦授)되었고, 차례에 따라 내자시 직장ㆍ호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임인년에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대책(對策)으로 합격하여 병조의 좌랑과 정랑ㆍ함경도 도사ㆍ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을사년에는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정언 이무(李堥)가 사사로운 은총을 받은 재상 허적(許積)을 논핵한 것 때문에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출되자, 공이 동료들과 함께 항쟁하니, 상이 진노하여 공을 먼 변방으로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공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여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함께 쟁론하고, 영부사 이공 경석(李公景奭), 영상 정공 태화(鄭公太和), 좌상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또다시 차자를 올려 공을 변호하니, 상의 뜻이 조금 풀리어 다만 삭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뒤에 또 대신 및 간관의 말로 인하여 마침내 서용(敍用)되었다. 이로부터 누차 사헌부에 들어가, 안치되어 있는 죄인 윤선도(尹善道)를 감형하여 이배(移配)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영남 사람 유세철(柳世哲)이 기해년 효종 승하시의 복제(服制)가 잘못되었다고 헐뜯어 무함한 죄를 논핵하였다.그 사이에 병조로 옮겨졌고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얼마 안 되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함평 현감이 되었다. 이때 대부인은 이미 백씨(伯氏)의 임소(任所)인 무안현에 있었으므로, 형제가 교대로 대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왕래하면서 한도가 없이 곡진하게 봉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다음해에 어떤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서용되어 정언ㆍ사서가 되고 사예ㆍ장령에 승진되었다.경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자 장령에 제수되고 종부시 정에 승진되었다. 공이 하루는 장령으로서 사헌부에 나가서 이미 전계(傳啓)하여 비답을 받았는바, 대사성 이공 민적(李公敏迪)이 일을 논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리어, 상이 특명으로 그를 외직에 보임시키면서 당일로 발견(發遣)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금문(禁門)을 곧 닫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공이 즉시 아뢰기를 “이민적이 소장을 올리자마자 견벌을 바로 가하여 그를 빨리 발견하도록 재촉하시니, 이는 사람을 내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는 제신들의 상소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상신(相臣)에게 관계가 되면 찬출이 잇따라서 조정이 거의 텅 빌 지경이니, 전하께서 장차 국사를 어디에 두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것은 상규에 어긋난다 하여 특명으로 파직 추고하였다.계축년에는 사복시 정ㆍ사서ㆍ문학을 역임하고 헌납에 옮겨졌다. 갑인년에는 사간ㆍ보덕에 승진되었다가 조정의 천거로 인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발탁 제수되었다. 이때 왜인(倭人)이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남방에 대한 근심이 한창 많았는데, 전 부사 권대재(權大載)가 자못 임상(任尙)의 정사를 썼던 터이므로, 공은 그 가혹했던 정사를 너그러움으로 대신하니,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행해져서 변경이 편안하였다. 그곳을 2년간 다스리는 동안에 절의 있는 이를 포창하고 군졸을 훈련시키고 낭비를 줄이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해 주니, 백성에게 은혜가 깊었다는 명성이 넘쳐흐르고 백성과 오랑캐들이 서로 다투어 칭송하였다. 그러자 순무사(巡撫使) 권대재 역시 여론에 따라 그 사실을 조정에 포양하여 보고했으나, 끝내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 의하여 접수되지 못했다. 이윽고 당로자의 뜻에 거슬리어 마침내 체포 파직되기에 이르렀다.정사년에 서용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 마침 가뭄을 만나 죄인을 심리(審理)할 때에, 유배된 소유(疏儒) 이세필(李世弼) 등을 석방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연석(筵席)에서 강력히 쟁론하여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렸다가 마침내 다른 일로 책망을 받고 파직되었다.뒤에 역적 윤휴를 이웃집에서 만났는데, 그의 만류를 받고서도 안색과 언사를 조금도 꾸미지 않고 즉시 옷을 떨치고 일어나버리니, 그가 크게 유감을 품었다. 이로 인해 그가 공이 동래부에 있을 때의 일을 다시 제기함으로써 공이 두 차례나 형리(刑吏)의 심문을 받고 끝내 도배(徒配)되기에 이르렀으나, 오래지 않아 방환되었다. 이에 앞서 참찬공이 양주(楊州) 마산(馬山)의 기슭에 별장을 짓고 손수 향나무와 잣나무 각각 두 그루씩을 심어 놓았는데, 공의 형제가 또 4인이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삼괴당(三槐堂)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 사이에 정자를 지어 사수정(四秀亭)이라 편액을 써서 걸고 여러 자제들과 함께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다.기미년에는 여주 목사가 되었다. 신유년에는 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남의 말에 의하여 사체(辭遞)되었다. 그러자 우암 송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어진익은 권간(權姦)이 임금을 속이던 때에 우뚝 서서 굴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는데, 지금 남의 말에 의해 사체되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대신에게 물어서 다시 앞서 내린 관직 임명을 거듭 내리시어 어진익으로 하여금 그대로 버려진 인재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고, 연해서 세 번이나 차자를 올려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해에 광주 목사(光州牧使)ㆍ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뒤에 병조ㆍ예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전임되었다.계해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본도의 전제(田制)가 소루함이 많아 조정에서 공에게 균전(均田)의 정사를 맡기므로, 공이 실시한 일이 많았으되 한결같이 요역을 균등히 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일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병의 위중함 때문에 해면을 요청하여 갑자년 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5일에 백동(栢洞) 집에서 작고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부의와 조문을 의식대로 하였다. 처음에 고양(高陽)의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가 그로부터 27년 뒤인 경인년에 풍덕(豊德)의 망포리(望浦里) 건좌(乾坐)의 언덕으로 개장(改葬)하였다.공은 키가 크고 풍채가 훌륭하여 바라보면 걸출하게 보였다. 성품은 활달 솔직하고 호탕하여 간격이 없었다. 처음 공이 대각(臺閣)에 들어갔을 적에는 현모(賢母)의 교훈을 받고 더욱 스스로 격려하여, 무슨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말을 해서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았고, 비록 임금의 엄한 견책을 받더라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너그럽고 간이하게 백성을 대하고, 청렴하고 신중하게 몸을 단속하였으며, 삼가고 힘써 법을 지키어 오직 직사(職事)만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공이 조정에 들어가 행사하는 사이에서 드러난 언론과 풍채가 이와 같았다.평상시에는 효우하고 돈목하여, 홀로된 자씨(姊氏)가 연로하여 병들었으므로 그를 모셔다가 봉양해서 뜻에 맞게 해드렸고, 여러 아우들과 의식(衣食)을 분담해서 자씨의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냈으며, 이 마음을 종척(宗戚)에까지 미루어 또한 반드시 빈궁한 이를 구휼하고, 재(才)와 선(善)을 장려하여 성취시켰으므로, 모두가 공의 덕에 감복하여 귀의(歸依)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는 매우 엄격하였고, 가속들을 거느리는 데는 법도가 있었으므로, 문정(門庭) 안에 존비의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이는 또 공이 집에 있을 때의 행의가 종족들에게 칭도된 것들이다.공은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문재 또한 뛰어나서 사부(詞賦)를 짓는 데 있어 붓만 들면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갔고, 또 초서(草書)ㆍ예서(隷書)를 잘 썼으나, 평소의 뜻이 겸손하여 일찍이 시부나 글씨에 능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또 담박하고 조용함을 스스로 지키고 출세의 길을 좇아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을 향모하였는데,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ㆍ서하(西河 이민서(李敏叙))ㆍ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 등 제공이 더욱 공과 친밀했다고 한다.배(配)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통사랑 휘 빈(玭)의 딸인데, 타고난 자품이 단장하고 정순하여 효성과 공경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 사이에 처해서나 여러 조카들을 무양하는 데 있어 매우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며, 평소에 함부로 웃으며 말하지 않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다. 나이가 8, 90세에 이르러서도 총명과 근력이 소장 시절보다 줄지 않았는데, 임종시에도 정신이 환하여 마치 평상시처럼 자제들을 훈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고, 유서(遺書)를 써서 자손들에게 제전(祭奠)을 힘써 간략히 하도록 경계하였다. 공과 동년생으로서 을미년 7월 1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91세였다. 이해 9월에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1남 2녀를 낳았는데, 남 사형(史衡)은 지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어 추은(推恩)으로 공에게 참판이 추증되었고, 장녀는 영의정 이유(李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참판 이의현(李宜顯)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돈녕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유봉(有鳳)은 집의가 되었는바 경학으로 사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고, 그 다음 유귀(有龜)는 문과에 급제하여 유수가 되었으며, 그 다음 유붕(有鵬)은 낭천 현감(狼川縣監)이다. 딸은 교관 김순행(金純行)에게 시집갔다. 영의정의 2남은 현응(顯應)ㆍ현숭(顯崇)이고 2녀는 윤혜(尹寭)와 참군 원명일(元命一)에게 시집갔다. 유봉의 1남 도응(道凝)은 관례(冠禮)를 하고 나서 요절하였고, 계자(繼子)는 석윤(錫胤)이며, 2녀 중에 장녀는 홍상한(洪象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유귀는 6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김시교(金時敎)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보상(李普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홍계구(洪啓九)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석윤은 출계(出繼)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외증손 남녀가 또 약간 명이다.아, 공 같은 재기와 국량으로 나라의 큰 계책을 하는 자리에 처하여 자신의 포부를 다 펼 수 있었더라면 그 계책을 세운 것이 반드시 크게 볼 만하였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기국대로 다 쓰이지 못하고, 평생 동안 시행한 것이 겨우 안으로는 대간, 밖으로는 관찰사로서의 면모만을 드러낸 데서 그쳤으니, 어쩌면 그리도 불행하였는가. 아, 세상에는 큰 재주를 지니고도 불우한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많으므로, 지금 이 묘문(墓文)을 지으면서 거듭 슬픔을 느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아, 빛나는 어씨 종족이여 / 於赫魚宗창성한 조정에 갑자기 일어나 / 勃興昌朝문신이며 훈신으로 / 乃文乃勳대대로 고관을 지냈는데 / 世服大僚평창은 행실이 돈독하였고 / 平昌行篤운판은 명성이 높았었네 / 運判名高공에게 이르러서는 / 式至于公진실로 재덕이 뛰어나서 / 允矣俊髦대간으로 직간하는 상소 올려 / 袖簡臺坡수리가 하늘 높이 오르듯 뛰어났고 / 一鶚雲霄임금의 비위 자주 거슬렀으나 / 尺鱗屢攖성상께서 곧음을 받아들였네 / 聖主容直남쪽 변진에 나갔을 땐 / 出鎭南邊오랑캐도 공의 덕을 사모했는데 / 蠻人懷德엉뚱한 모함을 받아 / 曰車載鬼죄 없이 유배되었으나 / 匪罪而謫겁화가 곤륜산을 다 태워도 / 劫火燒崑타지 않는 건 옥뿐이었네 / 不燼唯玉때 만나 동류와 같이 나가서 / 際時彙征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 望歸湖嶽누가 그 길을 막았던고 / 誰其尼之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배척했으나 / 大老疏斥끝내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 而違不通백성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네 / 亦曰殆哉그러다가 동녘 토지 균전하기 위해 / 屬蕝東田다시 강원 관찰사를 제수 받아 / 復畀外臺장차 큰일을 하게 되었는데 / 若將有爲병 때문에 이루지 못했네 / 病未克濟대개 공은 세상과 잘 맞지 않아 / 盖公寡合세상에 쓰이기도 버려지기도 해서 / 呑吐於世공의 펴이거나 굴한 것이 / 其所伸屈시운의 비색과 형통을 점쳤네 / 占時否泰깨끗한 명성과 곧은 그 절조 / 淸名直節세상에 누가 공과 맞설꼬마는 / 世孰與京애석하게도 크게 쓰이지 못해 / 惜不大用나라의 기둥이 되지 못하였네 / 爲國榦楨덕수의 산 언덕의 / 德水之原초목이 무성한 묘역에 / 有欝佳城내가 비명 새기어 / 我銘桓楹천년 후에까지 밝게 보이노라 / 昭示千齡[주-D001] 임상(任尙)의 정사 : 엄혹(嚴酷)한 정사를 뜻한다. 후한 때 임상이 반초(斑超)의 후임으로 도호(都護)가 되어 반초에게 백성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반초가 말하기를 “변방의 이사(吏士)들은 본디 효자 순손(孝子順孫)이 아니요, 오랑캐들은 본디 금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그대의 성품은 너무 엄하고 급하니, 의당 간이한 정사를 펴서 이민들에게 작은 과실은 용서해 주고 중요한 일만을 총괄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임상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뒤에 과연 낭패를 당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7》[주-D002] 삼괴당(三槐堂)의 고사 : 송(宋) 나라 때 왕우(王祐)가 회화나무[槐] 세 그루를 뜰에 심고서 “내 자손 가운데 삼공(三公) 지위에 오르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고 예언을 했는데, 과연 그의 아들 단(旦)이 재상에 올랐으므로, 뒤에 그의 자손들이 거기에 삼괴당을 세웠던 고사이다.[주-D003] 평창(平昌) : 어진익(魚震翼)의 증조로서 평창 군수를 지낸 어운해(魚雲海)를 가리킨다.[주-D004] 운판(運判) : 어진익의 아버지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낸 어한명(魚漢明)을 가리킨다.
    2023-08-10 | NO.271
  • 관해 임회(1562~1624)
    임회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임만근林萬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준林晙(?~1548)이고 문천으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4남매 중 넷째인 아버지는 형조좌랑으로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이며 어머니는 이진남李震男의 딸이다. 둘째 숙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임정수의 형은 금호 임형수林亨秀(1514~1547)이다.태어나면서부터 체구가 크고 어려서는 총명하고 스스로 언어를 깨우치고 문자를 해독했었다. 자라서는 시문을 잘 짓고 가는 곳마다 이름을 날렸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일찍이 1582(선조15)년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선조26)년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곧 사직하였다. 1611년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후 바닷가에 있는 옛집에 돌아와 스스로 호를 관해라 하였다.1613년 다시 전적에 기용되었으나 제관으로 장연(長淵)에 갔었는데 이듬해 이이첨, 정인홍의 모함으로 임서,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양산에 유배되고 아들 임득붕林得朋은 곤양에 유배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예조정랑에 복직되었으며 군기시첨정을 거쳐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신흠申欽의 추천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을 독려하였다.1624(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 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반군에 잡혔다.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이괄을 꾸짖다가 혀를 잘려 전사하였다. 임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68년(고종 5) 나라에서 내린 정려가 있다. 정면·측면 각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정자로, 1939년 중수되었다. 관련자료로는 1939년 기록된 '관해선생 정려 중수기'가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송현마을에 있다. 저서로는 관해집觀海集 1권이 전해지며 사후에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5-08 | NO.270
  •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명희(李命熙)
    영조 4년 무신(1728)이광좌가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명희(李命熙)는 제수된 지 이미 오래됐는데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광주는 재읍(災邑)이 아니므로 말을 지급하여 보낼 것을 청하지 않았지만 지체하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해당 조에 분부하여 재촉해서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그대로 하라.”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2022-05-07 | NO.269
  • 국재 오겸(1496~1582)
    오겸吳謙의 본관은 나주. 자는 경부(敬夫), 호는 지족암(知足庵), 국재(菊齋),  시호 정간貞簡으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오신중吳愼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자치吳自治이고, 아버지는 부사 오세훈吳世勳이다. 어머니는 진첨 신말평申末平의 딸이다.1522(중종17년)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3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의령현감으로 나갔다가 예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장령ㆍ집의ㆍ교리ㆍ부응교ㆍ내섬시첨정을 거쳐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1550(명종5년)년 금양군에 봉해졌고, 곧 담양부사ㆍ광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ㆍ병조참판ㆍ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경주부윤ㆍ한성부 좌윤을 거쳐 1557년 호조참판, 1559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뒤에 이조ㆍ병조ㆍ호조의 판서를 거쳐 지경연사를 지냈다.1564년 우찬성이 되고 이듬해  치사를 청원하였으나 궤장을 하사받고 의굼부판사를 거쳐 1571(선조4년)년 좌찬성으로 춘추관지사가 되어 그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중종, 명종, 선조 3조에 걸쳐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정직 청렴하고 권력과 부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권흉 윤원형이 꺼리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율곡 이이가 말하기를 청백하고 절조있는 신하였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격자라 하였다.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에 있는 설강 유사(雪江 柳泗 1502~1571)의 호가정(浩歌亭)에서 교유하며 지내기도 했다. 오겸의 묘지명은 율곡 이이가 썼다. 87세의 일기로 별세하고 나라에서 정간이란 시호를 내렸다.
    2020-04-28 | NO.268
  • 권첨
    권첨(權簷), 湖節3下-185-4,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권첨의 본관은 안동이고 생원시 문과에 급제했다.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은 권항(權恒).이고 동생은 권반(權磐)이다.
    2020-04-01 | NO.267
  • 권필
    권필은 광해군(光海君)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을 보다 못한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그의 무도함을 공박하였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시의 원래 제목은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인데, 그 내용은 “궁궐의 버드나무 푸르고 버들개지 어지러이 흩날리는데 장안에 가득 찬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첨하네. 온 조정 모두 태평성세를 축하하는데 그 누가 직언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하였는고.[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이다. 권필은 이 시에서 은연중에 유희분을 궁류에, 임숙영을 포의에 비유하였다가 임금을 무시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친국(親鞫)을 당하고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는데, 숭인문(崇仁門)을 나가 유배를 떠나다가 길가의 민가에서 44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石洲集 卷7 聞任茂叔削科, 韓國文集叢刊 75輯》 《明齋遺稿 卷43 童蒙敎官贈司憲府持平權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36輯》
    2022-05-08 | NO.266
  • 금강 기효간(1530~1593)
    기효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 또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로 추증된 고흥군(高興君) 기대유(奇大有), 어머니는 함양오씨이다. 기효근奇孝謹의 형이며 장성에 정착한 기원의 후손으로 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는 엄격하였다. 이는 소학의 법도를 널리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효성도 지극했다. 부친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기대승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기효간은 시간이 있는대로 종숙되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찾아가 학문의 의문점을 토의하였다. 기효간은 한평생 조용히 살았다. 이는 증조인 복재 기준의 기묘사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일생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여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로 불렸다. 특히 하서 김인후(1510~1560)에게 배웠는데 하서는 내 정통을 이을 사람은 오직 그대라 하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하늘과 땅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공자의 참된 기운 주자에게 전하여졌네.학문에 잠긴 마음 의혹하지 말고병들어 쇠약한 이내 몸 위로하게.김인후가 그에게 지어준 "우주의 중간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는 원기이고, 주자는 참됨이다."라는 시는 도를 전해 받은 시로 알려졌다. 동문인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오희길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기효간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김경수(金景壽) 윤진(尹軫) 김홍우(金弘宇) 이수일(李守一) 등과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바 있다.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金齊閔)을 의병장으로 삼았는데 1902년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한 남문창의(현 북일면 오산리) 에 77선열(승려 9명, 노복 1명) 이 기록돼 있다. 사후에는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장성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장성군 황룡면 이곡리(아치실)에 그의 제각과 유적비, 묘갈명 등이 있다.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82)의 옥봉시집玉峰詩集에 기효간에게 보내는 시가 있다.贈奇伯顧(증기백고)백고(伯顧) 기효간(奇孝諫)께相思幾歲隑音塵(상사기세개음진)  우리가 그리워 서신에만 의지한 지 몇 해든가요?千里空驚夢裡人(천리공경몽리인)  (어젯밤엔 당신께서) 천리 먼 길을 건너 (제) 꿈에 나오시어 놀랐습니다.聚散元來無定算(취산원래무정산)  (허나) 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은 (그렇게) 늘 뜻밖인 거지요海城花柳一番新(해성화류일번신)  바닷가 마을에서의 멋들어진 풍류(라) 더욱 새롭더이다
    2020-05-06 | NO.265
  • 금호 임형수(1514~1547)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는 병마절도사 임준林畯의 아들로 1514년 나주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이다. 18세 때인 1532년(중종26) 진사과에 급제하고 1536년(중종30) 22세에 대과인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한림 시강원설서를 거쳐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다. 1537년에 중종이 서울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에서 시 한 편을 짓게 했는데 병조판서 소세양이 1위를, 임형수가 2위를 하여 임형수는 사서삼경과 말 1필을 하사받을 정도로 문예가 뛰어났다.그의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이나 '성수시화'에 실릴 정도로 걸작이었다. 허균은 임형수의 호방한 시를 칭찬하면서 그가 원통하게 일찍 죽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1538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고 1539년 명나라 사신 원접사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 고상한 인품과 건아발속한 시재는 외국 사신들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1542년 임형수의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는 3월 15일부터 21일까지의 비와 눈을 무릅쓴 산행 유람기이다. 칠보산은 함북팔경의 하나인데 그 이름에서 보듯 원래 일곱 개의 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섯 개의 산은 바다에 가라앉고 이 산만이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1544년(중종39)에 검상이 되었을 때 중종의 국상을 당하여 대제학 성세창 등 10인과 함께 대행왕의 행장을 짓는데 참여하였다.1545년(인종1)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에 올랐으며 사인이 되어 어명으로 중종의 묘지문과 명나라에 보내는 치적 및 시호를 청하는 대행왕의 시책문을 지었다.군기사정과 도감랑청으로서 왕릉의 묘역을 감독하였으며 그해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년이 다 못되어 1546년(명종1)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직되어 귀향하였다.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영의정 이기 등의 정권농락을 비난하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생기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처음에는 소재 노수신, 미암 유희춘과 함께 절도안치하는 벌이 내려졌으나 벽서사건의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문정왕후에게 너무 가볍게 처벌한다는 상소가 있어 자택에서 사사되었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 의금부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임형수가 받는 장면은 유명하다. 퇴계 이황은 그를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호걸남아'라고 하였고 하서 김인후는 국가의 큰 인물이 원통하게 처형된 것을 슬퍼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임형수는 34세로 임종 때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장남 구가 당시 8세였는데 훈계하기를 '글을 안배우면 무식한 사람이 되니 글을 배우되 과거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선조 초에는 제일 먼저 을사사화의 억울한 옥사에 대한 원통함을 풀게 하고 구관직이 회복 되었으며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직 받게 되었다. 사후에는 광산구 임곡동 등임사와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정부인 하동정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2020-04-28 | NO.264
  • 기경섭
    기경섭(奇景燮, 1852~1916)의 본관은 행주이며 행주기씨(幸州奇氏)이다. 자는 백행(伯行), 호는 벽서(碧捿)이다.부 : 奇東燁 조 : 奇夏麟 증조 : 奇師達 외조 : 昌寧 曺亨振 처부1 : 長興 高濟運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914년 6월 20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2020-02-05 | NO.263
  • 기근섭(奇近燮)
    기근섭(1884~1978)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의경(毅卿)이며 호는 문강(聞江)으로 (북구) 누문리에 살았다.부 : 奇東準 조 : 奇昌鉉 증조 : 奇文國 외조 : 長興 高濟斗 처부1 : 蔚山 金琮煥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05 | NO.262
  • 기동만(奇東萬)
    기동만(1856~1917)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사일(士一)이고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06년 6월 28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부 : 奇貞鉉조 : 奇命國증조 : 奇象默외조 : 南平 文在洙처부1 : 羅州 羅燾元처부2 : 錦城 羅承文
    2020-02-24 | NO.261
  • 기동석(奇東奭)
    기동석(1875~1950)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국로(國老)이고 호는 회계(晦溪)이다.부 : 奇琮鉉조 : 奇榮國증조 : 奇象憲외조 : 竹山 安命和처부1 : 長興 高濟喬처부2 : 光山 盧文奎기동석은 작은아버지인 기주현(奇周鉉, 1846~1907)의 양자로 입적됐다. 묘는 광산구 임곡동 노동마을에 있다가 이장하여 촌곡면 종산마을에 있다.1935년 吳東洙 등 通文에 따르면 1935년 4월에 병천사秉天祠의 일로 봉산정사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기동석은 겸재 기학경의 현손으로 <겸재집>에 '호상기문(湖上記聞) '을 찬했다.또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 1860~1918)의 족제族弟로 1932년 기동준의 개인 문집인 《春潭文集》 10권에 행적을 정리한 家狀을 지었다. 춘담문집은 10권 5책 석인본으로 1966년 아들 기근섭奇近燮이 편찬했다.또 기언정(奇彦鼎, 1716~1797)의 1912년에 발간된 나와선생문집인 《나와집懶窩集》의 발문을 1912년에 썼다.또 나주 송정 출신 박봉혁(朴菶赫, 1873∼1935)의 1937년 간행된  8권 3책, 석인본인 《수재유고(守齋遺稿)》에 기동석(奇東奭)이 서문을 썼다. 박봉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때 역적들을 토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자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항일 투쟁을 기록한 의병록이며 역사서로 후석 오준선이 쓴 심남일실기인 《진지록盡知錄》의 발문을 썼다고 한다.
    2020-02-24 | NO.260
  • 기동운(奇東雲)
    기동운(1855~1919)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국(明國)이다.부 : 奇德永조 : 奇師九증조 : 奇商浚외조 : 晋州 姜東桓처부1 : 全州 崔正煥『蘆沙執紼錄』에 따르면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2020-02-24 | NO.259
  • 기동익(奇東益)
    기동익(1829~1897)은 본관이 행주이며 자는 노일(魯一), 호는 수곡(水谷)이다. 광주 우치동에 거주했다. 부 : 奇正鉉조 : 奇思淳증조 : 奇商師외조 : 咸陽 吳漢應처부1 : 光山 金江稷처부2 : 全州 李培煥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참고 眉巖先生墓下會案 , 『蘆沙門人錄』
    2020-02-21 | NO.258
  • 기동준(奇東準)
    기동준(1869~1918)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평중(平仲), 호는 춘담(春潭)으로 진사를 지냈다.부 : 奇昌鉉조 : 奇文國증조 : 奇象德외조 : 海州 崔煥潤처부1 : 長興 高濟斗1860년 11월 17일 奇大升의 후손인 昌鉉의 아들로 光州 廣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나 잦은 질병에 시달렸다. 평소 어버이 섬기기를 극진히 했으며, 항상 『小學』의 가르침으로 몸을 검속했다. 18세에 奇正鎭을 배알한 뒤 인고의 노력으로 제자백가서를 탐독했다. 선조인 文憲公 奇進이 己卯士禍로 인해 光州의 古龍에 내려와 卜居했는데, 1877년 기동준은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講學을 하면서 선조의 業을 이었다. 1880년 勉庵 崔益鉉을 만났으며, 1888년 한 달에 한 차례 講會를 열자, 사방의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894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다시 기정진에게 귀의하여 松沙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두문불출했으며, 1896년에는 송사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鰲城 李恒福에게 가서 계책을 진술했다. 1901년 9월 11일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고, 1903년에는 문헌공의 문집을 새로이 간행했고, 기봉선생의 續集 2권과 別集, 附錄 1권을 1907년 간행했다. 1910년에는 나라의 변고에 통한하면서 『春秋』한 권을 들고서 산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이 따랐다. 항상 諸葛亮의「出師表」, 司馬遷의 「俠客傳」과 杜甫의 「古栢行」 등을 읽으면서도 『대학』에 심취했다. 1913년 도산서원을 방문했고 이해 이황의 『陶山及門錄』을 찬집하면서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1916년 기우만 선생 장례를 지낼 때[襄禮] 참석하였다. 1918년 9월 29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봉 기대승의 <고봉속집 논사록 발高峯續集論思錄跋>을 쓴 조찬한趙纉韓의 글에 따르면 "사칠이기 속편(四七理氣續篇)은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별도로 간행하였으나 중간에 유실되었는데, 정조 병오년(1786)에 관찰사인 조공 준(趙公竣)이 의연금을 내어서 거듭 중간한 것이었다. 속집(續集) 2권과 별집(別集) 부록(附錄) 1권은 족조(族祖)이신 춘담공(春潭公) 기동준(奇東準)이 나의 조고(祖考)와 더불어 고종(高宗) 정미년(1907)에 비로소 간행하니, 모두 11권이었다."는 내용이 있다.*참고: 『澹對軒重建扶成錄』 『蘆沙門人錄』 『眉巖先生墓下會案』 1901년 기동준(奇東準) 서간『春潭文集』
    2020-02-21 | NO.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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