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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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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상문에 나아가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 영조 24년
    금상문에 나아가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 영조 24년 무진(1748) 5월 25일(무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였다. 이지서를 신문하니, 이지서가 공초하기를,“당초에 진고(進告)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지난 봄 신의 육촌인 이지목과 길에서 만났는데, 이지목이 말하기를, ‘천변이 이러한데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지목이 말하기를, ‘비기에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似倭非倭自南而來]고 한 여덟 글자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단오에 이지양과 묘하에서 만났는데, 이지양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일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서울에서 투서한 것은 그것을 한 사람이 있다. 이 근처에도 오래지 않아 또 의당 알 수 있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금년을 편안히 넘긴다면 또 3백 년이 지나게 될 것이다. 임금과 가까이에 있는 신하 가운데 반신(叛臣)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전라 감사가 죽은 것이 매우 애석하다. 만일 살아 있었다면 한쪽을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의 아비인 이중경(李重庚)이 무주 부사(茂朱府使)로 있을 적에 짐바리로 싣고 온 것이 거의 1천 바리에 이르는데, 선자봉(扇子封) 같았지만 어떤 이는 조총(鳥銃)인가 의심하였다.’ 했는데, 어제 진달하지 못했던 것은 곧 이 말입니다. 소요스러운 일이 크게 일 적에 영장(營將)이 마침 이형곤(李衡坤)의 집에 가 있었는데, 병사(兵使)가 급히 불러서 들어갔다가 갑자기 나아왔으므로 마치 군사를 모으는 상황과 같았습니자. 이지양이 또 봉계(鳳溪)의 일을 말하였고, 이지억이 궐문에 투서한 일, 문의(文義)의 괘서에 대한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지양은 글에 능한 선비이어서 역모를 하려 했다면 지려(智慮)가 있습니다. 무신년의 적도들이 모두 그를 제갈 양(諸葛亮)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중경 부자는 얼굴을 모르고 또 세수(世讎)도 아닙니다. 이 일은 박민추ㆍ오명후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만, 신은 일가에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죽게 된 가운데서 살기를 도모하여 만든 계교가 아니고 장(杖)을 참지 못하여 직초(直招)한 것에 불과합니다.정월 이후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고서 양남(兩南)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1백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는데, 관인 같기도 하고 무사 같기도 하여 하나도 유생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또 어떤 거사(居士)들이 무수히 왕래했는데, 신의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옷은 소매가 좁은 것 같았는데, 면(綿)으로 만든 것도 있고 포(布)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거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에는 나이가 모두 5, 60이었는데, 지금 왕래하는 자들은 인물이 준수하여 병사나 수사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그 복색을 보면 화사스러웠으며 미녀를 데리고 있었고 각기 하나의 학동(學僮)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이지양이 말하기를, ‘너는 남을 통하여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 내가 병조 판서를 잃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신이 역모의 당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일가붙이와 친구들이 모두들 버렸기 때문에 당(堂)의 이름을 기재(棄齋)라고 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일가붙이로는 단지 이지억이 있을 뿐인데, 글도 능하고 힘도 있어서 그는 이지양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지양은 위인이 조금 치밀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 감사에 대해 애석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바로 충청 병사입니다. 지난번 이인좌(李麟佐)의 무리가 어찌 남태징(南泰徵)ㆍ이사성(李思晟)과 일가붙이였겠습니까? 역적을 모의하는 자들은 으레 통지(通知)하는 방법이 있는데, ‘애석하다.’는 말을 어찌 공연히 했겠습니까? 신의 육촌이 전라 감사와 평소 서로 친하게 지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 없습니다. 박민추의 소위뿐만 아니라 오명후도 반드시 괘서의 일에 동참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신이 이지양과 초사흗날 함께 유숙할 때 이런 수작이 있었던 것입니다.”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지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신의 형 이지양은 문의(文義)에 살고, 이지목은 정산(定山)에 삽니다. 신의 양가(養家)에는 편모(偏母)가 있는데,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지서와는 육촌이었는데, 이지서가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팔촌이 되었습니다. 이지서는 별로 좋지 않은 짓을 한 것이 없으나, 글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부의 사망일이 10월에 있기 때문에 해마다 왕래했습니다만, 이지서가 너무 가난하여 매양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러 갔기 때문에 만날 때도 있고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한 지가 3, 4년이 되었습니다. 무신년 겨울에 신이 생부의 상을 당하여 문의에 갔다가 3년이 지난 다음 돌아왔는데, 이지서와 친근하게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서로 만났었습니다. 이른바 오가(吳哥)는 천동(泉洞)에 살고 있었는데, 상세히 생각하여 보니 이름이 수만(遂萬)이었으며, 오래도록 좌수(座首)를 지냈습니다. 신의 형이 매우 가난하여 조곡(糶穀)을 얻기 위해 간혹 통정(通情)을 했었기 때문에 신도 또한 만났었는데, 오가의 아들 가운데 연소한 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신이 군부의 앞에서 어떻게 감히 속이겠습니까? 신은 대략 문자를 알고 이지서는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길이 같지 않게 되었는데, 신은 누차 발해(發解)했었기 때문에 이지서가 교만한 기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만나면 신이 그때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하는 일을 질책하였으므로, 이지서가 유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은 평생 글을 읽어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선업(先業)을 계승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지서가 반드시 생존해 있을 것이니, 면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형이 이지서와 쌓인 유감이 있는데, 그것은 신의 형이 전래(傳來)해 오던 여종 하나를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지서가 그것을 나누어 쓰자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항상 노여움을 품고 있었고 많은 욕설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신이 해명하기가 어렵겠습니다만, 동생이 언근(言根)이니, 이는 신의 다행인 것입니다. 쉽게 분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지난해 9월 이후 신은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원래 서로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의 형이 어디에서 들었단 말입니까?신의 둘째 숙부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이지서의 아들을 취하여 양자를 삼으려 했는데, 신이 저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원망을 맺게 된 단서인 것입니다. 만일 폐족(廢族)으로서 혹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투서하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신이야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이 궐문에 투서한 일이 있고 신의 형이 괘서한 일이 있다면, 이지서의 표독한 마음에 이미 반드시 고변(告變)했을 것입니다. 이지서가 남과 산송(山訟)을 하면서 묘도(墓道)에 흉측한 물건을 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와 절교했습니다. 이른바 병조 판서라는 말은 거의 아동(兒童)의 말에 가까운 것입니다. 궐문에 투서하는 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겠으며, 병조 판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팔다리가 매우 가는데 무슨 여력(膂力)이 있겠습니까?”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양자(養子)에 대한 일은 이지양이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려 했었습니다만, 후취(後娶)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3년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기운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했다는 일은 본래 듣지 못했던 일이고, 여종을 속량(贖良)시킨 일에 대해서는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이지억의 숙부가 후사가 없자 이종연(李宗延)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으나 또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종연이 신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려 했는데, 이지억이 임시로 그 제사를 주관하면서 그 물건을 다 팔아버리고는 후사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흉한 물건을 묻었다는 일은 권가(權哥)가 선산(先山)과 마주 보는 곳에 묘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신의 노가(奴家)에서 버드나무를 깎아서 신(神)의 이름을 쓴 일이 있습니다.”하였다. 이지서와 이지억을 면질시키게 하였다. 이지억이 이지서에게 말하기를,“네가 나를 궐문에 투서한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네가 누구의 말을 듣고 고했는가?”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너의 형이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종당에는 알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의심한 것이다.”하였다. 이지억이 말하기를,“이것이 어떠한 일인데 나의 형이 말하지 않은 것을 네가 장전(帳殿)에서 질언(質言)했단 말인가?”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나도 모르게 너라고 대답했다. 무신년 초봄에 네가 속리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왕래할 때 문의의 수재(守宰)가 논하여 보고하려 하자 애걸하여 겨우 면하였었다. 너의 형 이지양은 적보(賊報)를 듣고서 기뻐하면서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어찌 광주(光州)나 나주(羅州)의 목사(牧使)가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하자, 이지억이 말하기를,“네가 지금 죽을 지경에 빠져 살아나려고 이런 말을 하는데, 내가 무신년 2월에 회시(會試)의 강(講) 때문에 보은(報恩)의 절에 가 있으면서 보름 동안 글을 읽었었다. 3월 초6일에는 절이 텅 비고 사자(士子)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었다.”하였다. 죄인을 잡아 오는 사이에 우선 친국을 정지한다고 명하였다. 지평 이중조(李重祚)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다시 친국하였다. 이지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신은 이지서와 팔촌 형제가 됩니다만, 본생(本生)으로는 육촌입니다. 그러나 원래 찾아다닌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사(人事)가 평인(平人)과 같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했기 때문에 신과는 서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안엽(安熀)과 한두 번 만났었는데, 외가(外家)의 원족(遠族)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정(安????)은 안엽의 아우인데 갑진년에 신과 함께 속리산에 갔었습니다. 박민추는 금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3월에 이지서가 한 번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왜변(倭變)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책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집이 길가에 있어서 매우 두렵다.’ 하였습니다. 그의 여섯 아들은 모두 개ㆍ돼지 같은데, 장자는 이승연(李升延)이고, 차자는 이항연(李恒延)입니다. 금산(金山)의 정가(鄭哥)에 관한 일은 이지서가 말하기를, ‘금산에 봉황이 있어 알을 낳았는데 하루는 그것이 저절로 터졌으니, 이는 실로 재변이다.’ 하였습니다.”하자, 형추(刑推)를 시행하여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였는데, 공초하기를,“전라 감사 이중경(李重庚)과 병판(兵判)에 대한 이야기는 허망한 말입니다.”하였다. 또 이지양과 이지서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서로 쟁변(爭辨)하면서 굴하지 않았으므로, 막(幕)에 내리게 하였다. 이지목을 신문하고 다시 이지서와 면질시키니, 또 서로 힐난하는 것이 이지양과 하는 것과 같았다. 이지목을 막에 내리게 한 뒤에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이지억의 일은 신이 과연 면질할 때 꿀렸었습니다만, 금산(金山) 정가(鄭哥)의 이야기는 이지양에게서 들었습니다. 충청 병사ㆍ전라 감사는 모두 국가에 이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무고하였습니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니라는 말은 신이 했습니다. 황진기(黃鎭紀)에 대한 이야기도 신이 그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여겨 한 말이고, 울릉도 곁의 섬이라는 이야기는 신이 과연 인심을 광혹(誑惑)시킬 계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는 속으로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倭)가 온다느니 호(胡)가 온다느니 금산의 봉계라느니 한 등등의 이야기는 모두 신이 지어낸 말입니다. 이지양ㆍ이지억은 신이 과연 무인(誣引)한 것이고, 문의(文義)의 괘서는 신이 과연 한 것이므로, 이는 모두 지만(遲晩)합니다만 궐문에 투서했다고 한 일절(一節)은 과연 허망한 것이었습니다.”하였다. 네 번 형문하고 난 다음 형장을 정지하였다. 이지양ㆍ이지억ㆍ이지목은 방송(放送)하고 친국은 정지하되, 추국(推鞫)을 당일 거행하라고 명하고 나서 말하기를,“이지서가 나라를 원망하여 부도한 짓을 하고 말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은 이미 지만(遲晩)했으나, 가슴속의 역심을 다 실토하지는 않았다. 우규장(禹圭章)은 첩의 아우의 혼사를 위하여 소요스런 말을 전파한 것을 이미 자복하였다. 그러나 국체(鞫體)에 있어 곧바로 먼저 처단할 수는 없으니, 다시 엄형을 가하여 기어이 취복(取服)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43 집 295 면【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주-D001] 발해(發解) : 주현(州縣)의 고시(考試)에 급제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초시(初試)에 합격한 것을 말함.[주-D002] 갑진년 : 1724 경종 4년.
    2021-04-12 | NO.353
  • 인정전에 나아가 죄수를 국문하다 - 영조 16년
    인정전에 나아가 죄수를 국문하다 - 영조 16년 경신(1740) 2월 17일(무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이때 양찬규(梁纘揆)의 일을 아직 다 밝혀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잇달아 염탐하였는데, 광주(光州)에 사는 백성 최태원(崔太元)과 이덕방(李德芳)이라는 자가 평소에 양찬규와 서로 친하다는 말을 듣고 그가 정상을 알았으리라고 의심하여 잡아서 물으니, 최태원이 말하기를, ‘이덕방이 양찬규와 서로 친한데 일찍이 주머니 속을 보니 어떤 글이 있는데 원국사(怨國詞)라고 제목한 것이었다.’ 하였다. 드디어 두 사람을 잡고 그 말을 감사(臨司)에게 고하니, 감사가 장문(狀聞)하고 잡아보냈다. 임금이 친히 물으니, 최태원ㆍ이덕방이 서로 미루며 변명하고 또 다른 사람을 끌어댔다. 이튿날 임금이 또 친히 물었으나, 전과 같이 공초(供招)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태원ㆍ이덕방을 가두고 관련된 사람들은 정배(定配)하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대개 무신년의 여얼(餘孼)로서 나라를 원망하는 자인데 다 상한(常漢)이나 미천한 무리이었다.【원전】 42 집 654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주-D00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2021-04-12 | NO.352
  • 광주 목사 이병상의 출보된 일을 아뢰다 - 영조 10년
    우의정 김흥경이 비로소 출사하고, 광주 목사 이병상의 출보된 일을 아뢰다 - 영조 10년 갑인(1734) 6월 18일(임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무릇 네 번에 걸쳐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니, 김흥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병상(李秉常)은 애초에 좌죄(坐罪)된 바가 단지 관직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먼 고을에 출보(黜補)하여 한 해가 이미 지났습니다. 일찍이 총재(冢宰)를 역임한 사람을 오랫동안 출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내직(內職)에 비의(備擬)할 것을 명하였다.【원전】 42 집 442 면【분류】 인사(人事) / 사법(司法)[주-D001] 총재(冢宰) :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 : 1676~1748.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여오(汝五), 호는 삼산(三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검열을 거쳐, 정언ㆍ수찬을 역임하고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이조 좌랑ㆍ교리ㆍ대사간ㆍ대사성ㆍ이조 참의ㆍ대사헌ㆍ이조 참판 등을 지냈고, 노론으로 소론에 맞서다가 신임사화 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1) 대제학을 역임하고, 1727년 지의금부사로 있을 적에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한성부 판윤으로 기용되었고, 탕평책 반대의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가 형조 판서ㆍ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공조 판서ㆍ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기로소에 들어가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를 받았다.
    2021-04-12 | NO.351
  • 유엄이 양역변통에 대해 상소하다 - 영조 9년
    유엄이 양역변통에 대해 상소하다 - 영조 9년 계축(1733) 12월 22일(기사)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엊그제 차대(次對)에 8인의 많은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입시(入侍)한 것은 근래 보지 못하던 바였으므로, 신은 반드시 장차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건백(建白)한 바가 끝내 사람의 눈과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없었으니, 신은 가만히 개연스레 여겼습니다.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은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다섯 가지 일을 벗어나지 않으니 성상께서 호포(戶布)ㆍ결역(結役) 등의 이해(利害)를 순문(詢問)하시어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있게 하실 것이며, 사소하게 견제되는 단서는 다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양역의 변통은 여러 해를 지났으나 끝내 좋은 계책이 없다. 호포(戶布)는 위로 왕자(王子)ㆍ대군(大君)부터 아래로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일체 시행한 연후에야 대동(大同)의 역(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호포는 시행할 수 있는 법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또 이 봉조하(李奉朝賀)의 흑립(黑笠)에 대한 말을 듣고 보니,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어지러움을 재촉하는 계제가 되겠으므로 호포 한 가지 일은 다시 유의하지 않겠다. 대저 2필(疋)은 원래 고역(苦役)이 아닌데, 단지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을 능히 가려 뽑지 못한 데서 비롯되어 인족 침징(隣族侵徵)의 폐단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만약 능히 수령을 잘 가려서 결원(缺員)이 생기는 대로 채워 인족에게 침징하는 일이 없다면, 앞서 혼자 10필의 포(布)를 낸 자가 단지 2필만 내게 될 것이니, 그 효과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일시에 변통할 수 없는 것이니 상하가 오랫동안 공부(工夫)를 쌓고 도신과 수령 또한 가려서 보낸 뒤에야 효과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차대(次對)처럼 느슨하다면 무슨 일을 해 나갈 수 있겠느냐? 만약 이와 같으면 비록 1필의 역(役)으로 하더라도 인족 침징의 폐단은 마땅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개벽(開闢)’이니 ‘초의(草衣)ㆍ초식(草食)’이니 하는 분부는 대개 양역(良役)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조종조(祖宗朝)에서 고려(高麗)의 사치한 풍속을 한결같이 씻어버리고 전적으로 검약(儉約)을 숭상하였으나, 기자(箕子)가 8조(八條)로 가르친 때와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부유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은 전혀 나라에 기강이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기자(箕子)의 시대와 같이 한다면 비록 1필을 징수해도 또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1필의 역을 2필을 비교한다면 어찌 갑절이나 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전과 같은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군부 당상(軍部堂上)을 경솔하게 앞질러 차출(差出)한 것이 도리어 민망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주달(奏達)한 바가 진실로 그러하다. 비록 1필을 감한다 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백성들이 반드시 반 필로 감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하였다. 유 엄이 말하기를,“신이 남번(南藩)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에 하도(下道)를 순찰해 보았더니, 지방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백성들의 풍속이 매우 완악(頑惡)하였습니다. 광주(光州)ㆍ금성(錦城) 등지(等地)에 한 개의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때때로 혹 가서 머물면서 왕화(王化)를 선포(宣布)하게 한다면 거의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만약 행영을 설치한다면, 또 한 개의 감영(監營)이 생기는 것이니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하였다.【원전】 42 집 402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재정(財政)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역(軍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2021-04-12 | NO.350
  • 광주의 전 목사 이의록에게 정배를 명하다 - 영조 5년
    전 이조 판서 심택현의 파직과 광주의 전 목사 이의록에게 정배를 명하다 - 영조 5년 기유(1729) 2월 25일(경자)        공산(公山)의 전(前) 현감(縣監) 유두기(兪斗基)의 천주(薦主)인 전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택현(沈宅賢)을 파직(罷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유두기는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알려졌는데, 이조(吏曹)에서 유두기의 망단(望單)을 본조(本曹)의 천거라고 주(註)를 달아 앙품(仰稟)하니, 비답하기를,“천법(薦法)을 거듭 엄하게 하려면 마땅히 정관(政官)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하고, 또 광주(光州)의 전 목사(牧使) 이의록(李宜祿)을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이의록은 불법(不法)한 일이 많았는데, 의금부(義禁府)에서 의계(議啓)하니, 비답하기를,“치대(置對)한 뒤에 사계(査啓)로 인해 무죄로 벗어나거나 의처(議處)로 인해 구차하게 모면하는 자를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하게 여겼다. 불법률(不法律)로써 감률(勘律)하라.”하였다.【원전】 42 집 106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주-D001] 정관(政官) : 전관(銓官).
    2021-04-12 | NO.349
  • 죄인의 배소를 나쁜 곳을 가려 보내는 의금부 당상은 처벌하도록 하다 - 영조 2년
    죄인의 배소를 나쁜 곳을 가려 보내는 의금부 당상은 처벌하도록 하다 - 영조 2년 병오(1726) 3월 10일(임인)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론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서종급(徐宗伋)이, 광주(光州)의 백성이 자사(刺史)를 쫓은 일로써 문의(文義)를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의종(懿宗) 때 혼암(昏暗)한 임금이 당조(當朝)하여, 군소(群小)가 횡행하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오직 가렴 주구(苛斂誅求)에 힘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먼저 무너짐이 이와 같았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무리로 모여 도둑질함은 사세(事勢)가 절박(切迫)하여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니, 정상이 실로 딱하다. 현재 삼남(三南)은 재황(災荒)이 매우 참혹한데도 탐학(貪虐)의 풍습이 크게 떨치어 수령(守令)된 자가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갈 길이 없게 만드니, 광주 백성의 작란(作亂)이 바로 오늘의 근심이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어느 고을의 석채(釋菜) 때에 제물(祭物)을 훔쳐 먹은 사람이 있어서 제사를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굶주림이 몸에 절박함으로 인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못한 때문이다. 이것을 만약 용서한다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법에 의하여 조처하였지만 측은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수령이 진정(鎭定)하여 통솔하는 방도에 만약 마음을 다한다면 어찌 이같은 폐단이 있겠는가?”하였다. 또 하교하기를,“지난번에 대신(大臣)이 이선행(李善行)을 좋은 곳을 가려 보낼 것을 말하므로,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따랐다. 무릇 찬배(竄配)의 죄인은 이미 죽음을 감하여 살리려는 뜻인데, 근래에 의금부(義禁府)에서 배소(配所)를 정할 때에 한결같이 그 좋아하고 미워함에 맡기니, 지극히 한심하다. 하물며 극변(極邊)의 찬배는 스스로 마땅히 보낼 곳이 있으니, 어찌 나쁜 곳을 가려서 보내랴? 이제부터 이후로 특별한 전교(傳敎) 이외에는 만약 나쁜 곳을 가려 보낸다면 의금부의 당상(堂上)은 마땅히 반좌(反坐)의 율(律)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함이 옳다.”하였다. 시독관 서종급이 말하기를,“반좌(反坐)의 하교는 법례(法例)를 헤아리고 사리(事理)로 참작하건대, 단정코 지나친 줄로 압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반좌의 율도 오히려 가볍다. 위에 있는 사람이 살리고자 하는데 밑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려고 한다면, 장차 나로 하여금 당(唐)나라 희종(僖宗)이 되게 하려는 것인가? 극히 무엄(無嚴)하다. 한(漢)ㆍ당(唐)의 임금이 어찌하여 미약(微弱)하였는가? 이는 권병(權柄)을 아랫사람들에게 빼앗긴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능히 삼대(三代)로 면려(勉勵)하여 경계하지 못할망정 어찌 나로 하여금 난망(亂亡)의 임금을 본받게 한단 말인가?”하였다.【원전】 41 집 586 면【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주-D001] 의종(懿宗) : 당(唐)나라의 임금.[주-D002] 석채(釋菜) : 석전제(釋奠祭).
    2021-04-12 | NO.348
  • 광주 목사 이의저를 탄핵하다 - 영조 1년
    사간원에서 이사상과 광주 목사 이의저를 탄핵하다  - 영조 1년 을사(1725) 5월 25일(임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이의천(李倚天)이다.】 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사상(李師尙)에 대한 논계(論啓)에 이르러서는 <중략>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의저(李宜著)는 부임한 처음에 주공(厨供)을 성대하게 진설하게 하고 나서 며칠 뒤에는 반수(盤數)를 줄이게 하고는 그 찬품(饌品)을 계산하여 전화(錢貨)로 값을 정하였는데, 1개월에 거두어 들인 것이 거의 수백 냥을 넘었습니다. 기타 백성을 침탈하여 자신을 살찌운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의 경내(境內)에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이의저가 군졸을 보내어 그 사우를 헐고 재목은 관가로 실어다가 마구(馬廐)를 지었습니다. 그가 탐욕을 부리고 정인(正人)을 해친 일에 대해 엄한 징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원전】 41 집 519 면【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주-D001] 영얼(嶺臬) : 경상 감사.[주-D002] 주원(厨院) : 사옹원(司饔院).[주-D003] 정유년 : 1717 숙종 43년.[주-D004] 왕망(王莽) : 왕망은 전한(前漢) 때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성제(成帝)ㆍ애제(哀帝)ㆍ평제(平帝) 때에 정권(政權)을 잡고 자기 딸로 평제의 황후를 삼아 조정을 호령하다가 평제를 시해(弑害)한 뒤에 왕위를 찬탈하여 신(新)이라 국호를 고쳤으나 법령(法令)이 번가(煩苛)하여 민생이 궤란하므로 광무(光武)가 기병(起兵)하여 토벌하니 패하여 피살됨.[주-D005] 동탁(董卓) : 동탁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장군으로,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영제가 죽은 뒤 태가(太子) 변(辯)을 폐하고 헌제(獻帝)를 세운 다음 하태후(何太后)를 죽이는 등 흉폭이 자심하였는데,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그의 부하인 여포(呂布)를 시켜 살해하였음.
    2021-04-12 | NO.347
  • 청풍 부사 이익명이 자현하게 하다 - 영조 1년
    청풍 부사 이익명이 그의 종손 이봉상의 피란한 실정을 고하고 자현하게 하다 - 영조 1년 을사(1725) 4월 25일(임진)        청풍 부사(淸風府使) 이익명(李益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신의 형 이이명(李頤命)은 불쌍하고 측은했던 일을 깨끗이 씻어 은혜가 천고(千古)에 융성하였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결초 보은(結草報恩)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인데,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신이 임인년 6월에 광주(光州)에 유배되어 있었을 때 신의 종손(從孫) 이봉상(李鳳祥)은 그의 아비 이기지(李器之)의 노적(孥籍)을 역당들이 아뢰어 윤허받았으므로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단지 3세(世)가 함께 죽게 된 것만 마음 아팠을 뿐 다른 근심은 없었습니다. 뒤에 북예(北裔)로 이배(移配)되어서는 오직 빨리 죽어 세상일에는 아는 바가 없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석방(釋放)의 전지(傳旨)를 받들고 넘어지고 엎어지며 길을 떠나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홀로 된 형수의 편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봉상이 실은 죽지 않고 도망하여 숨어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의 곡절은 형수가 있는 곳이 멀어서 미처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그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것을 분명합니다. 이봉상은 마땅히 즉시 자현(自現)해야 하겠지만, 아직도 있는 곳을 몰라서 지금 가동(家僮)을 시켜 두루 숨은 곳을 찾아내어 조만간에 직접 자현(自現)하여 대죄(待罪)하게 할 것입니다. 그도 또한 오늘 일을 볼 수 있으면 비록 내일 죽음에 나가더라도 반드시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집안이 화란을 당하던 날에 신은 이미 멀리 유배되어 있었고 이봉상은 미약하니, 그의 조모와 어미가 가혹함이 억울하여 하늘에 울부짖을 즈음에 단지 일점 혈육을 보존하려고 옛날 조무(趙武)와 이섭(李燮) 및 본조(本朝)의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손자 김천석(金天錫)의 일과 같이 하는 것만 알았지 중법(重法)을 범하는 데에 돌아감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실정과 그 죄상은 오직 성감(聖鑑)이 굽어 통촉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그대 형의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은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다. 지난날 군간(群奸)의 무함으로 인하여 마음속을 밝히지 못하고 갑자기 저승의 신하가 되었으니, 오늘날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슬퍼진다. 그리하여 후사(後嗣)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대가 끊어진 것을 더욱 탄식하였는데,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고는 못내 기쁘고도 위로됨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는 그대 형의 해를 꿰뚫을 듯한 충심(忠心)이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일로 본다면 진(晉)나라 때의 사람들이 천도(天道)를 함부로 헤아렸다는 말을 알 수 있겠다. 해조로 하여금 특히 녹용(錄用)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대죄하지 말라.”하였다.당초에 이기지(李器之)를 수노(收孥)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이봉상은 당시 나이가 16세였고, 집은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었다. 이이명(李頤命)의 누이는 군수(郡守) 김도제(金道濟)의 처(妻)인데, 명이 내려진 것을 듣고 밤에 가동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이봉상에게 알려주게 하였다. 그때는 한밤중이었는데, 이봉상의 조모(祖母) 김씨(金氏)가 급히 이봉상의 유모(乳母)를 불러 귀에 대고 말을 하였다. 유모에게 아들이 있어 나이와 모습이 이봉상과 비슷하였다. 드디어 그가 이봉상의 최복(衰服)을 입고 즉시 그 밤으로 강가에 나아가 짚신을 모래밭에 벗어 놓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웃 마을에는 ‘이봉상이 강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졌다. 하늘이 밝은 무렵에 사자(使者)가 이르러 시체를 강에서 건져 살펴보고는 돌아가 이봉상이 이미 죽었다고 상주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봉상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봉상은 늙은 종과 도망하여 낮에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가 무주(茂朱)의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도착하였다. 재물도 있고 의리를 좋아하는 이만득(李晩得)이라는 사람이 이봉상을 보고 마음으로 의심하였으나 받아들여 살게 하였다. 한동안 살고 나서 이봉상이 사실대로 고하자 이만득은 더욱 불쌍히 여겨 더욱 후하게 대우해 주었다. 이 때에 이르러 이봉상이 비로소 죽지 않았다고 자수하니, 임금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고는 임조(臨朝)하여 여러 차례 차탄(嗟歎)하였다.【원전】 41 집 507 면【분류】 인사(人事) / 사법(司法)[주-D001] 임인년 : 1722 경종 2년.[주-D002] 노적(孥籍) : 중죄(重罪)를 지었을 경우 본인을 극형(極刑)에 처하고, 그 처자(妻子)까지 연좌시켜 범인과 같은 형에 처하고, 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
    2021-04-12 | NO.346
  • 호남에 찬적된 사람 12인을 제도에 옮겨 유배시키다 - 경종 3년
    호남에 찬적된 사람 12인을 제도에 옮겨 유배시키다 - 경종 3년 계묘(1723) 11월 21일(정유)        금부 당상(禁府堂上) 강현(姜鋧)과 이진유(李眞儒) 등이 청대(請對)하여 어비(御批)를 위조한 죄인 황하신(黃夏臣)ㆍ황상질(黃尙質)을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訊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의관(醫官) 이시필(李時弼)도 일체 설국(設鞫) 하소서.”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이만근(李萬根)의 공사(供辭)에 ‘조용석(趙龍錫)에게서 얻어 보았다.’ 하였으므로 조용석에게 물었더니, 황상질을 끌어대었고, 황상질은 또 그 숙부(叔父)인 황하신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황하신을 잡아들일 것을 청하고, 이어 설국(設鞫)할 것을 청하였는데, 황하신을 채 핵실(覈實)하지도 않고 앞질러 이런 청을 한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으니, 대개 그 일을 확대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상신(相臣) 역시 그 실수를 알고서도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다른 일이야 논해 무엇하겠는가? 이진유가 아뢰기를,“전라 감사(全羅監司) 황이장(黃爾章)은 본도(本道)에 거듭 흉년이 들었다면서 장수(長水)에 정배(定配)된 사람인 민창도(閔昌道)를 다른 도(道)에 이배(移配)할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하지만 도내(道內)에 찬배(竄配)된 자가 단지 민창도 한 사람뿐이 아니니, 한 사람을 장청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아주 잃는 일입니다. 청컨대 감사(監司)를 추고(推考)하고, 호남(湖南)의 고을에 겹쳐 유배(流配)된 자와 멀고 가까운 것이 고르지 못한 자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유배시키소서.”하니, 임금이 따랐다. 드디어 전라도(全羅道)에 찬적(竄謫)된 사람인 이희조(李喜朝) 등 12인을 여러 도에 이배(移配)했는데, 이희조는 영암(靈巖)에서 철산(鐵山)으로, 어유룡(魚有龍)은 영암에서 사천(泗川)으로, 김여(金礪)는 영암에소 하동(河東)으로, 이중협(李重協)은 해남(海南)에서 경원(慶源)으로, 박사익(朴師益)은 태인(泰仁)에서 청하(淸河)로, 조도빈(趙道彬)은 옥구(沃溝)에서 안음(安陰)으로, 이병상(李秉常)은 부안(扶安)에서 함양(咸陽)으로, 권응(權譍)은 부안에서 개령(開寧)으로, 이익명(李益命)은 광주(光州)에서 길주(吉州)로, 민창도는 장수에서 문경(聞慶)으로, 황선(黃璿)은 무장(茂長)에서 양덕(陽德)으로, 신무일(愼無逸)은 김제(金堤)에서 영원(寧遠)으로 각각 옮겼다. 이진유가 본도의 장청(狀請)을 빙자하여 아울러 여러 적소(謫所)를 옮겼는데, ‘적객(謫客)이 한 도(道)에 모두 모여 있으면 인심을 혹란(惑亂)시키고 쉽게 화변(禍變)이 생기게 한다.’고 하면서 이런 대단히 심한 이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때 여러 사람이 유배(流配)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북으로 분주하게 귀양을 갔는데, 그 중에서 이희조는 늙고 병들어 미처 배소(配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희조는 유일(遺逸)로 직질(職秩)이 아경(亞卿)에까지 올랐고 일찍이 예우(禮遇)를 받았다. 아무리 그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세상에 넘친다 하더라도 당화(黨禍)가 산림(山林)에까지 미쳐 원한이 날로 깊어지니, 그 실패를 서서 기다릴 수 있겠다.【원전】 41 집 304 면【분류】 사법(司法) / 출판(出版) / 구휼(救恤)
    2021-04-12 | NO.345
  • 광주 등의 고을에 수 이상의 포를 징수하지 않도록 하다 - 경종 3년
    각 아문에서 모은 둔전에 세금을 많이 징수하지 말고 나주 등의 고을에 수 이상의 포를 징수하지 않도록 하다 - 경종 3년 계묘(1723) 11월 19일(을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훈국(訓局)에서 민전(民田)을 모아 들인 것은 대가(代價)를 주고 토지를 사는 것과 구별이 있는데, 근래 그 세금을 더 징수하므로 그대로 묵고 버려진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각 아문(衙門)에서 모아 들인 둔전(屯田)은 남징(濫徵)하지 못하게 하여 그 폐단을 덜게 하소서.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능주(綾州)ㆍ장흥(長興)ㆍ남평(南平)ㆍ화순(和順) 등 여섯 고을의 장인(匠人)의 포(布)를 1필(匹)씩 더 거두었으므로 일찍이 비국(備局)에서 조사를 하여 정식(定式)하였었는데, 조정만(趙正萬)이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을 때 전과 같이 남봉(濫捧)하여 유산(流散)하는 백성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6읍(邑)을 엄중히 신칙하여 정식에 의해 시행하게 하되, 만일 법을 범한 수령(守令)이 있다면 일체로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따랐다.【원전】 41 집 304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농업-전제(田制) / 재정-역(役)[주-D001] 남봉(濫捧) : 정해진 수량보다 더 많이 받아들임.
    2021-04-12 | NO.344
  • 이성좌를 삭판하다 - 경종 3년
    간원에서 조종세도 강봉의와 함께 변원에 정배할 것 등을 청하다 - 경종 3년 계묘(1723) 6월 4일(신해) 간원(諫院) 【정언 조지빈(趙趾彬)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강봉의(姜鳳儀)ㆍ조종세(趙宗世) 등은 응지(應旨)란 핑계로 서로 이어서 소(疏)를 올렸는데, 오로지 신사년의 일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일종의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백방으로 번갈아가며 엿보다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이 전하(殿下)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신(君臣)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종세의 소어(疏語)는 윤기(倫紀)가 없어 강봉의보다 더한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투비(投畀)의 법이 강봉의에게만 미쳤으니, 청컨대 조종세도 함께 변원(邊遠)으로 정배(定配)하소서. 옥서(玉署)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할 때에 이 문제를 전혀 제기하여 언급하지 않다가 필경에는 논죄(論罪)하였는데, 한 사람은 논하고 한 사람은 논하지 않았으니, 너무 소루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성좌(李聖佐)는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인척으로서 연줄을 대고 사적(仕籍)에 올라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歷任)하여 탐독(貪黷)을 자행(姿行)하였습니다. 또 광주(光州)를 맡고 있을 때는 잘 다듬어진 집 재목을 역적 홍계적(洪啓迪)의 배소(配所)에 보냈습니다.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고 장법(贓法)을 신칙하는 데 있어서 결코 그냥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하니, 임금은 단지 김춘택(金春澤)의 자질(子姪)을 종전대로 유배지로 보내는 일과 조종세(趙宗世)를 원배(遠配)하는 일과 옥당을 추고하는 일과 이성좌(李聖佐)를 삭판(削版)하는 일만 허락하였다.【원전】 41 집 295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變亂)[주-D001] 신사년 : 1701 숙종 27년.[주-D002] 투비(投畀) : 귀양 보냄.[주-D003] 옥서(玉署) : 옥당.
    2021-04-12 | NO.343
  • 광주(光州)의 전임 수령은 잉임하다 - 경종 3년
    우의정 최석항이 이진유ㆍ박징빈ㆍ유수원 등을 논핵하다 - 경종 3년 계묘(1723) 2월 25일(을해)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무릇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규례는 자리가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을 받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특별히 출보하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이 자리를 만들어서 단부(單付)한 예(例)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해에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는 삼학사(三學士)를 병출(屛黜)할 것을 청하고 자리를 지정하여 멀리 출보한 일에 있어 공의(公議)가 지금까지도 놀라고 탄식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진유(李眞儒)는 좌이(佐貳)의 관원으로서 도리어 이러한 풍습을 본떴습니다. 만약 규경(規警)하는 방도가 없다면 곧 그릇된 예(例)를 이루어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이며, 또 조정의 체통도 이로 인해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박징빈(朴徵賓)은 이성(利城)에 잉임(仍任)시키고 김동필(金東弼)은 체개(遞改)하소서. 그리고 유수원(柳壽垣)은 경박하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조정을 궤열(潰裂)하게 만들었으니, 우선 파직하고, 광주(光州)와 예안(禮安)의 전임 수령은 잉임하게 하소서.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는 그 본의가 비록 재억(裁抑)하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전첩(專輒)의 혐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이처럼 전에 없던 행동을 했으니, 마땅히 본직(本職)을 갈아서 경솔하게 날카로운 과실을 경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하고, 또 청하기를,“금후로는 괴격(乖激)하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조정을 괴란(壞亂)하는 무리는 모두 무거운 벌을 베풀어서 세도(世道)를 유지(維持)하고 조론(朝論)을 화합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전에 입계(入啓)한 여러 신하들의 소장(疏章)을 연이어 정원(政院)에 내리시며, 혹은 환급(還給)하라 명하시고 혹은 이미 처분(處分)을 거친 것이라고 비답하셨는데, 중신(重臣)이나 삼사(三司)에서 일을 논(論)한 소장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함이 있으니, 형세로 보아 장차 구별하여 앙품(仰稟)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살펴보건대 이때 이진유가 조정의 권세를 제마음대로 휘두르고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과 사당(死黨)이 되었는데, 김동필이 소를 올려 김일경을 공격한 것을 미워한 나머지 망령되게도 선정(先正)이 조정(調停)한 논의를 끌어대어 김동필을 외지로 척보(斥補)하였던 것이니, 이에서 춘궁(春宮)을 위하여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아! 통탄스런 일이다.【원전】 41 집 282 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주-D001] 좌이(佐貳) : 육조(六曹)의 참판(參判)ㆍ참의(參議), 또는 기타 관사의 차석(次席).[주-D002] 전첩(專輒) : 상관(上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함.
    2021-04-12 | NO.342
  • 김동필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다 - 경종 3년
    이조 참의 이진유가 김동필과 유수원을 외읍으로 척보할 것을 청하다 - 경종 3년 계묘(1723) 2월 23일(계유)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구명규(具命奎)ㆍ박징빈(朴徵賓)ㆍ김동필(金東弼) 등이 부정(不靖)한 사단(事端)을 야기하여 서로가 배척하며 일이 없는 가운데서 일을 만들어내었으니, 언의(言議)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논할 것도 없이 그 죄는 꼭 같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이 척보(斥補)하자는 논계를 앞장서서 주장하여 구명규와 박징빈은 이미 외읍(外邑)에 제수되었으나, 김동필은 장료(長僚)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政事)를 그만두고 곧바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수원의 소(疏)가 또다시 뜻밖에 튀어나와 기필코 각각 형적(形跡)을 남겨서 제뜻대로 분열(分裂)을 이루고야 말려고 하니, 또한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조정(調停)의 논의를 주장하면서 피차(彼此)를 모두 척보(斥補)한 일이 있었으니, 김동필과 유수원을 모두 외읍(外邑)으로 척보하여 그 일을 좋아하는 풍습을 징계하게 하소서.”하고, 이어 적합한 주ㆍ현(州縣)에 자리를 만들어서 단부(單付)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이성 현감(利城縣監) 박징빈은 벌(罰)을 내린 것이 너무 지나치니, 조금 가까운 고을에 제수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가 물러나 김동필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유수원은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단부(單付)하고, 박징빈은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옮겼다. 그리고 정수기를 사간(司諫)으로, 이진순(李眞淳)을 집의(執義)로,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현장(李顯章)ㆍ오명신(吳命新)을 부교리(副校理)로, 유필원(柳弼垣)ㆍ박정(朴涏)을 교리(校理)로, 이세덕(李世德)ㆍ송진명(宋眞明)을 수찬(修撰)으로, 목호룡(睦虎龍)을 동성군(東城君)으로 삼았다.【원전】 41 집 281 면【분류】 인사-임면(任免)[주-D001] 단부(單付) : 단망(單望)으로 관직에 임명함.       승정원일기 >  1727년 영조 3년 6월 9일 홍용조가 아뢰기를,“이도원이 아뢴 것이 옳습니다.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같은 대역적은 임금이 힘으로 주벌할 수가 없었지만 간혹 역심을 몰라서 끝내 주벌을 가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오적의 죄를 전하께서 아주 잘 아신다는 것은 차대 때의 하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알면서도 잘 행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김일경의 상소에 참가한 역적들의 흉악한 심보는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그들을 모두 죽이는 법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진유와 박필몽 두 역적이 가장 괴수가 되어 흉계를 꾸며서 충직한 신하들을 해쳤으니 뚜렷이 드러난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이 상소로 역적 김일경을 배척하자 이진유가 김동필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외직에 좌천하여 보임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동필을 칭찬하고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계책이 참으로 흉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고(故) 판서 신임(申銋)이 상소를 올려서 백망(白望)이 고한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고 묻지 말자고 말하고서 결국은 동궁을 보호하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이진유와 박필몽 무리가 청대하여 극력으로 쟁집(爭執)하여 궁벽한 바닷가로 유배 보냈습니다. 심지어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을 조시(朝市)에서 처형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에 비하면 이 일은 다만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이 역적들의 죄가 이처럼 많아서 결코 하루도 용서하기 어려우니 삼가 결단을 내려서 윤허하여 주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승지의 말이 옳다. 그 당시에 역적 김일경의 상소에 연명한 사람 중에 간혹 그 이름을 뺀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차마 할 수 없었던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런 부류는 허용할 수 있다. 김일경의 기세가 충천할 때에 오직 김동필과 윤순(尹淳)의 상소만이 나왔고 김동필은 단망으로 외직으로 좌천되어 보직되었으니, 김동필 같은 사람은 칭찬하고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도 ‘칭찬하고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하니 내가 참으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이진유 무리가 조조(曹操)처럼 청의(淸議)를 두려워했기에 끝내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였으니, 김동필의 힘이 크다고 하겠다.”하자, 홍용조가 아뢰기를,“김동필의 상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분발시켰지만, 신은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이런 사람은 인정해야 한다.”하였다. 윤섭이 아뢰기를,“김동필이 결국 김일경을 구하였으니, 이것이 칭찬하고 인정하기에 부족한 까닭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닌 이상에 어찌 매사를 모두 잘하겠는가. 선유(先儒)들의 양웅(揚雄)에 대한 말에서도 그의 말이 좋으면 양자(揚子)라고 칭하면서 그의 말을 썼으니 김동필의 상소는 취해도 된다.”하였다.
    2021-04-12 | NO.341
  • 광주 목사 이민서를 체차하다 - 숙종(보궐정오) 4년
    지병이 다시 일어난 광주 목사 이민서를 체차하다 - 숙종(보궐정오) 4년 무오(1678) 9월 13일(신해)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민서(李敏敍)는 지병(持病)이 다시 일어나, 스스로 그 허벅다리를 찔렀으니, 설령 차도가 있더라도 이사(吏事)를 감당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하니, 임금이 명하여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이민서(李敏敍)는 일찍이 현묘조(顯廟朝)에 옥당(玉堂)에 있었는데 심질(心疾)이 갑자기 발생하여 칼로 자신을 찔렀다. 이로부터 현묘(顯廟)께서 다시는 청요(淸要)의 직(職)을 제수하지 않았다.】 【원전】 38 집 401 면【분류】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2021-04-12 | NO.340
  • 양전에 구척을 사용하자는 등의 일을 묘당에 품처케 하다 - 숙종 44년
    전라 감사 홍석보의 양전에 구척을 사용하자는 등의 일을 묘당에 품처케 하다 - 숙종 44년 무술(1718) 12월 12일(을묘)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양전(量田)은 국가의 큰 일이니, 형세를 인하여 잘 인도하여 자진해서 움직이도록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만함이 없습니다. 신이 물정을 널리 캐어 새로 기경(起耕)한 〈전지에 대하여〉 3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는 주청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나, 간혹 그 세금을 견감(蠲減)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는 중론(衆論)을 염려하여 마침내 계사년의 포적(逋糴)을 보충한다는 뜻으로 논열(論列)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국(備局)에서 다시 아뢰었으나, 청한 바를 준허(準許) 받지 못하게 됨에 이르러 신이 다시 진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정에서 특별히 덕음(德音)을 반포하여 새로 부과한 세금을 혼쾌하게 감해 주어 즉시 거행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즐거이 나아가느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처럼 전염병이 점차로 번지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그 중 병들지 않은 자들은 틀림없이 앞으로 무리를 지어 일어나 그 일을 따를 것입니다. 이를 시행하여 실제로 효과가 없다면 신이 비록 망령되이 말한 죄로 복주(伏誅)된다 하더라도 마음에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본도(本道)에서 갑술년에 양전(量田)한 자[尺]가 아직도 광주목(光州牧)에 있는데, 지부(地部)에서 내려 보낸 새 자[新尺]와 비교해 보았더니, 한 치[寸]가 더 길었습니다. 양전청(量田廳)에서 반드시 준수척(遵守尺)의 제도를 고쳐서 사용하려는 것은 진실로 보존하려는 바가 있으나, 다만 본도의 사세(事勢)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새로 만든 자가 옛날에 있던 자보다 한 치가 길다는 뜻으로 치계(馳啓)하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특별히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도록 명하여 새 자를 사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옛날의 표시가 지금도 완연(宛然)한데, 갑자기 조금 짧은 새 자로 구결(舊結)을 고쳐서 측량한다면, 한 치가 더 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장차 세금이 불어날 것이므로, 원근(遠近)에서 놀라고 촌려(村閭)에서는 잇따라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다시 준수척을 고수(固守)하려고 하지 말고, 한결같이 성조(聖祖)께서 일찍이 시행한 성규(成規)를 따라 그대로 구척(舊尺)을 사용한다면, 전(傳)에 이른바, ‘선왕(先王)의 법을 따랐다가 지나친 적은 없다.’고 한 것이 아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원전】 41 집 46 면【분류】 농업-양전(量田) / 재정-전세(田稅) / 도량형(度量衡)[주-D001] 계사년 : 1713 숙종 39년.[주-D002] 갑술년 : 1634 인조 12년.
    2021-04-12 | NO.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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