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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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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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인조 2년
    심기원ㆍ이경의ㆍ홍명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인조 2년 갑자(1624) 2월 10일(갑오)        병조 참판 심기원(沈器遠)을 한남 도원수(漢南都元帥)로 삼았는데, 심기원이 박정(朴炡)ㆍ나만갑(羅萬甲)ㆍ이기조(李基祚)를 자벽(自辟)하여 종사관으로 삼았다. 이때 원수(元帥) 장만이 적의 후미에 있으므로 한수(漢水) 이남은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이경의(李景義)를 지평으로, 홍명형(洪命亨)ㆍ김상(金尙)을 장령으로, 이시방(李時昉)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심기성(沈器成)을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삼았는데, 두 고을은 모두 호남의 웅부(雄府)로서 장차 순행(巡幸) 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훈신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김지수(金地粹)를 호남 소모사(湖南召募使)로, 이갱생(李更生)을 소모관으로 삼아 인견하고 보냈다.【원전】 33 집 579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정(軍政) / 왕실-행행(行幸)
    2021-03-19 | NO.293
  • 광주 목사 정운호 등을 다 파직시키다 - 인조 1년
    제도의 참고관인 광주 목사 정운호 등을 다 파직시키다 - 인조 1년 계해(1623) 9월 24일(신해)        제도의 참고관(參考官)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운호(鄭雲湖),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상준(李尙俊), 임실 현감(任實縣監) 김녕(金寧), 흥양 현감(興陽縣監) 박정원(朴鼎元),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준(李埈), 은계 찰방(銀溪察訪) 김상(金尙), 양양 부사(襄陽府使) 이호의(李好義), 고성 군수(高城郡守) 정언굉(鄭彦宏), 봉산 군수(鳳山郡守) 홍득일(洪得一), 금교 찰방 안경(安璥) 등을 다 파직시켰다.【원전】 33 집 553 면【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선발(選拔)
    2021-03-19 | NO.292
  • 무등산이 무너져 내리다- 광해군 14년
    전라도에 홍수 나다 - 광해군 14년 임술(1622) 9월 23일(병진)       전라도에 많은 비가 내렸다.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이 무너져 내려 산 아래에 있는 민가 수백여 호가 모두 떠내려갔고 평지는 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나주(羅州) 지방은 40, 50리의 전답이 모두 매몰되었다.【원전】 33 집 476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 호구-호구(戶口) / 농업(農業)
    2021-03-18 | NO.291
  • 광주 목사로 원탁을 차송하도록 명하다 - 광해군 13년
    광주 목사로 원탁을 차송하고 이정수는 남원 부사로 옮겨 제수하도록 명하다 - 광해군 13년 신유(1621) 9월 14일(임자)        비국에 전교하기를,“중흥 산성(重興山城)도 자세히 의논해서 계획을 세워 수축하고, 본주의 목사에 합당한 사람을 본사에서 추천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정수(李廷綬)는 다른 고을의 목사나 부사로 옮기도록 하라.”하니, 회계하기를,“남한 산성을 수축하는 일은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어야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들이 재삼 상의하였는데, 혹자는 권반(權盼)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순검(巡檢)의 중임을 맡고 있는 중이니, 옮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지난해 임실(任實)에서 변이 일어난 뒤,〉 원탁(元鐸)이 〈현감으로 나가 그곳 백성들을 무마하고 진정시켜 마침내 안락한 지역을 만들었습니다. 임실의 백성들은 원탁이 떠나간 뒤에도 계속 사모하고 있으니, 원탁이 사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병무에도 능통하여 진심에서 나오는 정으로 직임을 수행하니, 뭇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이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정수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산관(散官)이 되는 것은 타당치 않으니, 광주(光州)ㆍ남원(南原)ㆍ춘천(春川) 가운데에서 〈해조로 하여금 전교에 따라〉 옮기도록 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중흥 산성의 일을 한꺼번에 거행하면 기내(畿內) 백성들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양주 목사 이홍엽(李弘燁)은 오랫동안 직임에 있었고 또 잘 다스린다는 명성도 있으니, 그에게 맡겨 점차로 수선하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원탁을 차송하고, 이정수는 남원 부사로 옮겨 제수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33 집 405 면【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2021-03-18 | NO.290
  • 송경신 등의 처벌을 청하자 윤허하다 - 광해군 13년
    비변사가 어란 만호 유응관ㆍ조도 별장 송경신 등의 처벌을 청하자 윤허하다 - 광해군 13년 신유(1621) 5월 11일(임자) 비변사에서 순검사 종사관 오숙(吳䎘)의 첩보를 가지고 아뢰기를,“어란 만호(於蘭萬戶) 유응관(柳應寬)은 탐욕스럽고 악독한 데다가 방자하기까지 하며, 조도별장(調度別將) 송경신(宋敬臣)의 경우는 갑자기 직첩을 내려준 일로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합니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기순격(奇順格)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으나 본 고을 백성들에게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속히 처리하도록 하소서. 광주(光州)ㆍ영암(靈巖)ㆍ무장(茂長) 등의 고을은 근래에 탐오한 관리들을 겪었으니 청렴하고 신중한 문관으로 뽑아서 보내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해남에 어찌 문관을 보내야 하겠는가.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은 유독 문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해조로 하여금 속히 가려서 보내도록 하라. 송경신의 경우는 우선 추고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33 집 376 면【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2021-03-18 | NO.289
  • 이안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광해군 12년
    남근ㆍ한찬남ㆍ임길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광해군 12년 경신(1620) 10월 20일(계해)        〈정사(政事)가 있었다.〉 남근(南瑾)을 지돈녕부사로, 한찬남(韓纘男)을 대사헌으로, 임길후(任吉後)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이익엽(李益燁)을 대사성으로, 임기지(任器之)를 정언으로, 이안민(李安民)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각각 삼았다. 【길후는 숙원(淑媛)의 오라비인데 백도(白徒)로서 2품(品)까지 뛰어올랐고, 안민 역시 문음(門蔭)을 통해 내간에 결탁해서 웅부(雄府)를 얻었다.】 【원전】 33 집 349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2021-03-18 | NO.288
  • 정운룡의 사적을 진달하다 - 광해군 7년
    광주의 유학 박률이 상소하여 정운룡의 사적을 진달하다 - 광해군 7년 을묘(1615) 10월 3일(병오) 광주(光州)의 유학 박율(朴)이 상소하여 증 승지(贈承旨) 정운룡(鄭雲龍)의 사적을 진달하였다.【원전】 32 집 427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2021-03-18 | NO.287
  • 홍명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광해군 7년
    홍명원ㆍ황근중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광해군 7년 을묘(1615) 9월 15일(무자)       홍명원(洪命元)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특명이었다.】 황근중(黃謹中)을 동부승지로 삼았다.【원전】 32 집 425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18 | NO.286
  • 박광옥의 서원에 편액을 달라고 청하다 - 광해군 7년
    광주의 진사 안경 등이 상소하여 박광옥의 서원에 편액을 달라고 청하다 - 광해군 7년 을묘(1615) 9월 8일(신사) 광주(光州)의 진사 안경(安璥) 등이 상소하여 고 지평 박광옥(朴光玉)의 서원(書院)에 편액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였다.【원전】 32 집 424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2021-03-18 | NO.285
  • 유희량의 격문에 대해 아뢰며 파직을 청하다 - 광해군 7년
    헌납 정준이 유희량의 격문에 대해 아뢰며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 광해군 7년 을묘(1615) 7월 3일(무신) [DCI]ITKC_JT_O0_A07_07A_03A_00050_2005_013_XML DCI복사 URL복사 헌납 정준이 아뢰기를,“유희량은 사람이 생각지 않는 틈을 타 격문을 뛰워 도전해 왔는데, 신은 참으로 오늘날의 모함하는 계책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날 피혐하는 말 중에 ‘추하게 헐뜯고 욕하여 신으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동요하게 한 뒤에 그 틈을 타려고 한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바, 신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다투고 있는 이 논의는 단지 이원익과 남이공에 대한 논의를 정지하느냐 안 하느냐와 높이느냐 낮추느냐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논의한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유희량과 더불어 그 사이에 서로 다름이 없지는 않으나, 그 또한 모두가 그 논의를 중하게 여겨서였습니다.〉 그런데 유희량은 스스로 시비가 현격하게 달라서 다시는 이길 수가 없음을 알고는 분노를 머금고 날뛰면서 헐뜯어 신의 형과 할아버지를 욕하였는데, 마치 무지한 하천배들이 상말로 서로 공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은 이 점에서 괴이하고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생각건대, 신의 증조인, 선신 정언각(鄭彦慤)은 지난 갑진년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병오년에 상을 마쳤으니 을사년의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훈에도 참여되지 않았음이 국승(國乘)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미년 가을에는 시임(時任) 부제학으로서, 딸인 이찬금(李纘金)의 처가 광주(光州)로 대귀(大歸)함으로 인하여 이찬금의 삼촌인 이노(李櫓)ㆍ이건(李楗) 등과 함께 양재역(良才驛)에서 전송하였습니다. 그러다 벽 위에 쓰여진 비방하는 글을 함께 보았는데, 왕실의 지친이자 옥당의 장관으로서 이미 그 글을 보고는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정보감(武定寶鑑)》과 홍언필(洪彦弼) 등이 합계한 내용으로 본다면 죄를 더하자는 의논이 이미 그들 가운데서 정해져 있다가 벽서(壁書)로 인하여 발의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정축년에 삭훈(削勳)될 때에는 그 당시의 원훈과 똑같이 삭탈을 당하였는데 밝은 세상에 원통함을 입은 일로 뒷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신을 헐뜯으니, 신은 몹시 통분스럽습니다.〈무릇 논의를 함에 있어서는 다만 일의 시비(是非)와 공사(公私)만을 판가름해야 하는 법입니다. 유희량이 이원익과 남이공에 대한 논계를 정계시키고자 한 것과 신들이 끝까지 고집하며 그 의논을 따르지 않고자 한 것이,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쪽이 공이고 어느 쪽이 사입니까?〉 유희량이 전후로 은인자중하며 잠깐 나왔다가 곧바로 들어간 것은 모두가 이원익과 남이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계의 논의를 힘껏 주장하면서 장관에게 떠맡기고 바깥으로는 동료의 의논에 의탁하며 자기의 뜻이 아닌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심적(心跡)이 이미 드러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바, 임금을 모함한 역적을 신구하고 당파를 비호하는 논의를 답습하는 데 가깝지 않습니까. 의리상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해야 할 자가 참으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그리고 이원익이 온 나라에 죄를 얻은 것은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임금을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대비(大妃)에게까지 미친 말은 실로 남이공이 부추긴 데에서 나온 것이니, 공론이 갈수록 격렬해져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희량은 도리어 이원익의 차자 역시 신의 형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설령 신의 형이 소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 해도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에 있어서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희량에 이르러서도 역시 성명(聖明)에게 의심을 두어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몹시 괴이하게 여깁니다. 신이 이원익과 남이공을 논계하는 데 참여한 것은 공론을 위해서이고 군부를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것을 두고 기세를 돋우며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다고 한다면 역시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그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성상의 노여움을 일으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하였는데, 임금의 말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밝아 추호도 사사로움이 없으며 시비와 곡직을 성감(聖鑑)이 밝게 비추고 있으니, 어찌 신이 격발시키기를 기다려서 갑자기 노여워하겠습니까. 그리고 말하기를 ‘반드시 지시받은 곳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지시한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임금을 받들고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바 참으로 유희량이 아니라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또 그가 말하기를 ‘대론(大論)은 비록 먼저 정지할 바에 있지만은’이라고 한 것은, 이원익에 대해 정계하기 전인 바로 6월 12일에 헌부에 통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니, 역시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그리고 말하기를 ‘이른바 다른 날이란 어느 날을 가리키며 공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공을 가리키는가? 정준과 함께 형관(刑官)에게 나아가 따졌으면 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다른 날이란 것은 바로 이원익과 남이공이 다시 일어나는 때이며, 공을 세운다는 것은 정계하기를 주장하여 그 무리들에게 공을 세우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형관에게 나아가 따지고 싶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원숭이로 하여금 나무에 오르는 법을 가르쳐 마구 날뛰도록 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함이 끝이 없다. 〈바깥으로는 소원(疏遠)한 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안으로는 그 세력에 의지한다.〉 ’고 하였는데, 이미 신을 원숭이에게 비유하였다면 이른바 원숭이를 가르친 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원익과 남이공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외에 지적한 바에 대해서는 유희량이 반드시 상세히 말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유희량이 이른바 함께 형관에게 나아가 대질하여 따질 곳이 아니겠습니까.신은 실로 소원하고 천하니 어찌 감히 스스로 귀근(貴近)한 자에게 대항하겠습니까. 이미 의지할 만한 권세가 없는데 어찌 방자하게 굴 리가 있겠습니까. 완악한 철부지라는 비유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욕은 실로 국조(國朝)의 사대부에게 있어서는 2백 년 이래로 없었던 치욕입니다. 신은 이 점에서 더욱 마음 아픔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유희량은 정계하자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고 아울러 죄가 없다고 하였으며, 혹 공론이 아니라 하고 혹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데, 이원익이 신원되는 날이 바로 김제남(金悌男)의 옥사가 뒤집어지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유희량은 그 두려워할 만한 조짐을 모르고서 죽을 때가 되어 노망한 나머지 사론(邪論)을 힘써 주장하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아, 유희량의 형제와 삼촌, 조카의 부귀와 공명을 추호인들 누가 준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론(邪論)에 잘못 빠져들어 간악한 저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전후로 공격하기를 마치 국가의 우익을 잘라내어 사당(邪黨)에 잘보이려고 하는 자처럼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보면 이치상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지만 자취로 논하면 스스로 면하기 어려울 듯하니, 신은 몹시 통탄스럽고 분합니다. 신은 천성이 어리석어서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았다가 여러 차례 헐뜯음을 당하였으니 뻔뻔스럽게 무슨 얼굴로 명을 받들고 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기가 어려우니, 신을 파직하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원전】 32 집 396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변란(變亂)[주-D001] 갑진년 : 1544 중종 39년.[주-D002] 을사년의 일 : 명종 원년에 일어난 을사 사화(乙巳士禍)를 말함. 명종의 외숙(外叔)이자 소윤(小尹)의 거두인 윤원형(尹元衡)과 인종의 외숙이자 대윤의 거두인 윤임(尹任)의 불화로, 인종이 승하하자 명종이 등극하고 모후(母后)인 문정 왕후(文貞王后)가 수렴 청정하게 됨을 기화로 윤원형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음모를 꾸며 윤임의 일가 및 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고 선비들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명종조고시본말(明宗朝故事本末).[주-D003] 정미년 : 1547 명종 2년.[주-D004] 정축년 : 1577 선조 10년.
    2021-03-16 | NO.284
  • 광주 목사 박경신을 사목에 따라 표창할 것을 치계하다 - 광해군 6년
    해운 판관이 광주 목사 박경신을 사목에 따라 표창할 것을 치계하다 - 광해군 6년 갑인(1614) 10월 9일(무자) 해운 판관(海運判官)이 치계하였다.“광주 목사(光州牧使) 박경신(朴慶新)이 별도로 마련한 쌀 1천 섬을 우선 올려보내니 사목(事目)에 따라 표창하소서.”【원전】 32 집 347 면【분류】 재정(財政)
    2021-03-16 | NO.283
  • 광주 목사 성안의의 파직을 청하다 - 광해군 4년
    사헌부가 상부의 지시를 어긴 광주 목사 성안의의 파직을 청하다 - 광해군 4년 임자(1612) 3월 18일(임자)        사헌부가 아뢰기를,“근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해사(該司)에서 상사(上司)의 호령을 받들지 않고 있으며, 각 고을에서는 조정의 지휘를 봉행하지 않고 있는데, 이게 이미 고질적인 습관으로 굳어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번 본부(本府)에서 사족(士族) 과부(寡婦)의 호소로 인하여 광주(光州)에 공문을 보내 범죄자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본주(本州)에서 압송하는 사람을 배정하지 않아 중도에서 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재차 공문을 보냈더니 죄명(罪名)을 모른다고 하면서 끝내 체포하여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죄의 유무는 법부(法府)에서 자동적으로 심사하여 처치하여야 하는 것으로 수령이 먼저 사의(私意)에 의거하여 감히 상세히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가 사체를 모르고 법사(法司)를 무시한 것이 너무 심합니다. 광주 목사 성안의(成安義)를 파직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33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2021-03-16 | NO.282
  • 정철의 졸기 - 선조(수정실록) 26년
    전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 -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1593) 12월 1일(경술)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명종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 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ㆍ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ㆍ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원전】 25 집 644 면【분류】 인물(人物)[주-D001] 을사년 : 1545 인종 1년.[주-D002] 신묘년 : 1591 선조 24년.[주-D003] 정유년 : 1597 선조 30년.[주-D004] 미오(郿塢) : 후한(後漢) 말기 음란 흉포하기로 유명한 동탁(董卓)을 가리킴. 동탁이 미(郿)땅에 오(塢)를 쌓아 이름을 만세오(萬歲塢)라 하고 그 속에 금은 보화를 저장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주-D005] 팔병(八柄) :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는 여덟 가지의 권병(權柄). 곧 작(爵)ㆍ녹(祿)ㆍ여(予)ㆍ치(置)ㆍ생(生)ㆍ탈(奪)ㆍ폐(廢)ㆍ주(誅)이다.《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大宰).
    2021-03-16 | NO.281
  •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다 - 선조(수정실록) 26년
    광주 유생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다 -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1593) 12월 1일(경술)        광주(光州) 유생 김덕령(金德齡)이 의병을 일으켰다.김덕령은 신력(神力)의 소유자로서 비호처럼 용건(勇健)하고 자못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집에서 유업(儒業)을 익혀 겸회(謙晦)한 태도로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그의 역량을 아는 자가 없었다. 전란이 있은 뒤로 그는 거상(居喪)을 하며 집에 있었다. 이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무려 수백 둔(屯)이나 되었지만 적을 보고는 곧 궤산(潰散)하였다. 그의 자부(姉夫)인 김응회(金應會)는 강개(慷慨)한 선비였다. 그가 누차 김덕령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도록 권하였으나 김덕령은 회의를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대장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김덕령을 추천하였고 당시 무군사(撫軍司)가 남하하여 또 세자의 영지(令旨)를 가지고 효유하였다.이에 김덕령이 친구인 장사(壯士)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기병하였는데, 전택(田宅)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응모자가 운집하였으므로 정장(精壯) 5천여 명을 확보하였다. 김덕령이 손수 지획(指畫)하여 행진(行陣)을 가르치니, 군사들이 모두 자신을 단속하여 규율에 맞게 되었다. 감사(監司) 이정암(李廷馣)이 계문(啓聞)하니, 상이 선전관(宣傳官)을 명하고, 충용장(忠勇將)이란 이름을 내리게 하는 동시에 교서(敎書)를 내려 포장(褒奬)하였으며, 관원을 보내 그의 군사를 살펴본 뒤 영남에 보내게 하였다. 김덕령의 군사의 명성이 이미 떨쳤으므로 적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작은 둔진(屯陣)을 거두어 큰 둔진으로 만들어 항거하였다. 그런데 마침 조정에서는 강화(講和)하는 일 때문에 그의 진병(進兵)을 중지시켰으므로 김덕령은 산음(山陰)과 거창(居昌) 사이에 주둔하게 되었다.【원전】 25 집 644 면【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병참(兵站) / 외교-왜(倭) /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2021-03-16 | NO.280
  •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임진(1592) 7월 1일(무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경명이 모집한 병사 6천~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이튿날 동틀 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러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고인후(高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 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면유(面諭)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였다.경명의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峯)이다.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으며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서 절개를 드러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의 시(詩)는 대가(大家)로 불리워졌으며 유고(遺稿)가 세상에 전한다.【원전】 25 집 623 면【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2021-03-16 | NO.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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