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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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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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광주)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공민왕 23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1487년(성종 18)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1489년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군명】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명환】 신라 천훈(天訓) 신라 문무왕 18년에 아찬(阿湌)으로서 나와 도독(都督)이 되었다. 김양(金陽) 흥덕왕 때 도독이 되었다.고려 이서(李舒) 공양왕 2년에 우사의(右司議)로서 목사(牧使)가 되었다.본조 권담(權湛) 목사였다. 이영구(李英耈) 목사가 되어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하자, 주(州)에서 상소하여 유임해 주기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2022-05-18 | NO.4
  • 무남성(武南省)과 광주부- 경세유표 제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살피건대, 광주(光州)란 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
    2022-04-29 | NO.3
  • 광주의 3.1운동
    光州의 3·1運動  광주지방에는 개화기 때부터 예수교가 들어와 있었고, 1903(光武 7)년에는 금동(錦洞)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8(隆熙 2)년에는 숭일학교가 개교되었다. 뒤이어 수피아여학교와 제중(濟衆)의원 등 교회사회기관의 설립으로, 사회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문화의 영향으로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서울과 일본 등지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이들 유학생들을 통하여 세계정세와 독립운동의 동향이 재빨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미 동경 유학생 정광호(鄭光好)에 의하여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의 2·8선언서가 광주청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최한영(崔漢泳) 김복수(金福洙) 등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이를 다수 등사하기도 하였다. 또 3·1운동 직전에는 서울의 예수교 인사들과 최흥종(崔興琮) 김철(金鐵)의 사이에 3·1운동에 관한 연락이 있기도 했다. 국장(國葬)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했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 최정두(崔正斗) 등은 3월 5일 광주로 돌아와서 지체없이 3·1만세운동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진행하였다. 5일 밤 양림동(楊林洞)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金剛,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炳俊)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한영(崔漢泳)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圭)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등이 함께 회합을 갖고, 3월 8일 큰장날을 기하여 학생 시민 총동원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하였으며, 아래와 같이 책임을 분담했다.•선언서 및 태극기 준비 : 최한영 •일반시민동원 : 서정희 •예수교회동원 : 김강 •수피아 연결 학생동원 : 홍승애 •숭일학교 학생동원 : 최병준 •기타학교 학생동원 : 김태열, 최영균, 김용규 •자금 담당 : 김기조(金基造) 최한영은 자기 집에서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范潤斗) 등과 협력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및 격문 그리고 애국 독립운동가 등을 밤낮으로 인쇄하였고, 다른 이들도 임무를 수행하기에 분주하였다. 그러나 준비와 연락관계로 거사일시는 3월 10일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천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 양림동쪽에서는 예수교인과 숭일 수피아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일반시민은 서문통(西門通, 지금의 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으로,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 지금의 우체국 옆 충장로 2가에서 파출소까지)을 거쳐 운집했다. 또 지산면(芝山面) 일곡리(日谷里)에 사는 이주상(李周祥)은 광주의 주도 인물들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두 아들 윤호(允鎬) 창호(昌鎬)를 선두에 세운 다음 수백명의 근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서 대거 합세했다. 이들은 일곡과 생용 등지에 사는 이씨(李氏)와 범씨(范氏) 및 노씨(盧氏)들이었다. 이렇게 시위군중이 모여들자 숭일 수피아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지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모두 호응하여 온 시장은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하였다. 최한영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얼떨결에 됫박을 든 채 행렬에 따라나와 만세를 부르는 쌀장수도 있었고, 평소 친일파라고 지목되던 사람들도 참가했으며, 걸인들까지도 기뻐 날뛰더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무단통치가 얼마나 가혹했으며, 우리 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갈망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시위행렬은 서문(西門)을 지나 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지금의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구법원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 들었다. 이러한 시위행렬에 일본경찰은 총을 멘 채 그저 따라만 다닐 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군중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무장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우리가 자진해서 경찰서로 가겠다"고 외치며 경찰서 앞마당으로 몰려들어 가면서 더욱 맹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때부터 경찰과 헌병은 발악적으로 대들었고, 총검을 휘두르며 무차별 구타와 폭행을 자행하였다. 노인이나 어린학생들까지 마구 때리고 치고 했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고, 그 자리에서 구금된 사람이 100여명이었다. 남은 군중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리도 잡아 가두어라, 잡아가둔 동지를 내놓아라"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몸은 지치고 일경(日警)의 폭압은 가중되어, 땅거미가 질 무렵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는 헌병과 경찰 뿐아니라 소방서원까지 동원하여 비무장 비폭력의 평화적인 시위에 폭행을 가하였다. 이 운동은 다음날인 11日에도 계속되었다. 이날 오후 5시쯤 숭일학생과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00명가량의 군중과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돌면서 시위를 했다. 그리고 13일 큰 장날은 장꾼들을 포함한 약 1,000여명의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중 일부는 시위행진도 하였다. 그러나 미리부터 이에 대비하여 배치되었던 헌병·경찰에 의하여, 11일에는 23명이 검거되었고 13일에도 20명이 체포되었다. 이 운동으로 검속당한 애국지사들은 비인도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의 법적 처벌의 규정을 보면, 출판법 위반이 징역 3년, 보안법 위반이 징역 2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광주 감옥에 수감 중이던 10여명은, 보안법 위반으로만 형을 받기 위하여 독립선언서 등은 광주에서 인쇄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두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의 인쇄물용지는 시내 일본인 상점에서만 팔던 반지(半紙)를 여러 상점으로부터 고루 나누어 구입하여 사용하였던 바, 불과 4일동안에 약 10만장을 사왔기 때문에 시내 전일본인(全日本人) 상점의 종이를 모두 거두어 온 셈이 되어 들통이 나고 말았다. 거의 반년이 지난 뒤 공판(公判)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인 검사 堀江이 논고를 통하여, "국헌(國憲)을 교란시킨 죄는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관대히 다스리겠다"고 하자, 광주만세운동의 책임자였던 김철(金鐵)은,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그냥 훈방하라. 그리고 내 이름은 김철이다. 쇠는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보라"고 하며, 이번 광주운동은 전적으로 자기 한사람에게만 죄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김철(金鐵) 서정희(徐廷禧) 이달근(李達根) 변순기(邊舜基) 정두범(鄭斗凡) 송기호(宋琪浩) 김성민(金聖敏) 등은 서울의 고등법원에까지 상고 투쟁했지만, 끝내 기각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이 중 변순기는 서울의 고등 법원에서 도도한 열변을 토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힐난했다. 이 당시 광주 지방법원에서 언도된 형량은 다음과 같다. 징역 8년  김화순(金華順), 윤순임(尹順任), 이옥희(李玉姬), 박영자(朴永子), 최경동(崔敬東)  징역 6년  이라주(李羅州), 이태옥(李泰玉), 김덕순(金德順)  징역 3년  김철, 정광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  징역 2년  김정수, 송기호, 황상호, 정두범, 노천묵, 김철주, 송흥진, 조보근  징역 1년  박애순(朴愛順), 진신애(陳新愛), 홍승애(洪承愛), 송광춘(宋光春, 대구감옥 옥사)  이들은 전원이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서울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모두가 옥고를 겪었다. 3월 10일의 광주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양림동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회계원으로 근무하던 황상호(黃尙鎬)는, 3·1운동에 참가한 바도 있었지만, 이 독립운동을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민중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발행하였다. 이는 서울에서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발행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본따 착상한 것으로,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약제사인 홍덕주(洪德周) 장호조(張鎬祚) 등과 상의하여, 병원에서 쓰던 등사판을 이용 황송우(黃松友, 황상호의 가명)사장 명의로 제4호까지 발행하였다. 이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는 3월 13일에 300부가 인쇄되었는데, 홍덕주와 장호조 등에 의하여 광주 큰 장터 및 시민들에게 배부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5일에는 제 2호가 발행 배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 4호까지 발행하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체포되었는데, 광주 지방법원에서 황상호는 징역 3년을, 그리고 홍덕주와 장호조는 각각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한편 4월 8일에는 광주보통학교 4년생의 만세운동계획이 있었다. 즉 동교 4학년 급장인 최영섭(崔泳燮)이 유봉식(柳鳳植) 등 청년동지들과 연락하여, 4월 8일 오전 10시를 기해 자혜의원(慈惠醫院, 현 전대부속병원)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4월 7일에 4학년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면서 이튿날 모두 학교를 쉰 채 자혜의원 앞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8일에는 4학년생이 전부 휴교한 가운데 최종하(崔鍾夏) 김봉수(金鳳洙) 김길선(金吉善) 등 생도들이 예정대로 지정 장소에 집합하였는데, 일본경찰이 이를 미리 알고 달려와 강제 해산시키고 최영섭 등을 검속하였다. 이를 전후로 하여 비아(飛鴉) 하남(河南) 임곡(林谷) 등 여러 곳에서도 혹은 산상(山上)에서, 혹은 들판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그리고 또한 앞서 3 1운동을 이끌었던 범윤두는, 다시 서방면(瑞方面)의 유지 양해문(梁海文) 및 범희대(范熙大) 범윤곤(范潤坤) 등과 연락하면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에 그쳤다. 이렇게 대규모적인 시위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뜻있는 인사들은 다시 개별적으로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기관과 연락하면서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효천면(孝泉面)의 유한선(劉漢先)과 본촌면(本村面)의 이주상(李周庠) 및 비아면(飛鴉面)의 허원삼(許元三) 등은 나주군의 최종렬(崔鍾烈) 김양숙(金良淑) 등과 연락해 가며, 그 해 6월 상해임시정부에 협조할 목적으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촌면(本村面)의 이동석(李東石) 등 수십명을 회원으로 모집하여 각 회원에게 1원 내지 4원씩의 입회금을 받아 비밀활동을 해오던 중, 일경에 적발되어 대구 복심법원에서 6개월 내지 2년의 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또한 서창면(西倉面)의 김홍두(金弘斗)는 이듬해 7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고 돌아온 다음 전라도의 통신기반 설치를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본촌면의 노석정(盧錫正) 노석중(盧錫中) 김아래(金雅萊) 조병철(曺乘喆) 그리고 효천면의 김정련(金正連) 윤영기(尹永淇) 및 임곡면의 양인묵(梁仁默) 등은 이듬해 7월부터 화순군의 노형규(盧衡奎) 조병렬(曺秉烈) 및 곡성군의 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에 있는 신덕영(申德永) 최양옥(崔養玉) 등과 연락해 가면서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임시정부의 자금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년 내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자료: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http://cafe.daum.net/chonnamtour
    2020-08-10 | NO.2
  • 선사시대부터 21세기의 광주까지
    선사시대광주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된 유적, 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상무 신도심을 개발하면서 확인된 인근의 서구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12만5천년 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삶의 흔적임이 확인되었다. 이 지역의 구석기 문화는 뗀석기로 대표된다. 이 뗀석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지활동과 자유로이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의 산물이다. 이 뗀석기가 광주 상무지구의 치평동, 광주철도 이설구간인 매월동 구릉상에서 발견되었다.청동기 시대 집터는 남구 대촌동과 이장동의 경계에 있는 송암동 임정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집터에서는 민무늬토기 조각, 석기류 등 80여점도 출토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군이 서구 서창동과 풍암동을 비롯하여 압촌동 지석동 삼거동 와룡동과 충효동 효덕동 송하동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광산구 신창동에서는 옹관묘군 및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발견되었다.대체로 광주의 서북부 지역인 극랑강 주변에 선사유적이 널리 분포되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광주 서남쪽의 대촌천, 지석천, 극락강변의 야산 및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삶을 꾸렸음을 알 수 있다.마한-백제시대마한 이전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을까. 국가로 볼 수 있는 나라 수준의 정치체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광주 지역에 존재한 최초의 정치체는 기원전 2~3세기경에 시작하여 6세기 중엽까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에 존재한 마한(馬韓)이었다. 마한은 경기·충청·전라 지방에 분포한 54개 소국을 가리킨다. 마한시대 각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 명으로 전체적으로는 5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광주 사람들은 이 시기에 존속한 마한을 가장 먼 고대국가로 기억한다.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지역에 분포된 마한은 여러 정치집단의 총칭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DNA에 오랜 역사 속을 흘러온 찬란했던 마한의 피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처럼 마한은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 서남부에 웅거한 삼한(三韓)의 하나이다. 서해에 접하면서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과 경계를 나란히 하다가 나중에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 역사시대의 광주는 마한으로부터 시작된다. 마한의 영토는 경기와 충청, 전라도 일대로 설명할 수 있다. 3세기 말엽 중국의 촉나라 사람으로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를 집필한 진수(陳壽, 233 ~ 297)의 <삼국지>의 위지동이전한조(魏誌東夷傳韓條)에는 마한 지역에 속하는 54개국의 명칭이 나타난다.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나 <삼국지>는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고 서술했다. 마한 사람들을 두고는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고 씩씩하고 용감하다. 해마다 5·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자리를 베풀고 집단으로 가무를 즐긴다. 춤출 때는 수십명이 줄줄이 서서 땅을 밟으며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춘다”는 기록을 남겼다. 예술적 감수성, 공동체적 성향이 강하다고들 하는 ‘남도 사람들’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집단이 광주 또는 그 인근 지역에서 중심을 이루며 생활했는지는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마한의 54개국 중 광주와 관련된 나라는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다.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추정하며, 불미지국은 나주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의 반남ㆍ덕산ㆍ대안ㆍ신촌에 소재한 30여기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 일대로의 추정이 가능하다. 구사오단국의 경우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 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 또한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ㆍ송암동ㆍ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광주는 지리적으로 볼 때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를 중심으로 서구와 남구가 해당 지역으로 볼 개연성이 높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온조왕대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은 1세기 초(서기 8∼9년)에 멸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마한이 1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표현은 그 중심 세력이 백제에 쫓기거나 밀려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탈해이사금 5년(서기 61년)에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岩城: 지금의 鎭川)을 들어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중국 측의 기록에 ‘멸망’했다고 한 그 후에도 마한은 맹소와 같은 잔여 세력들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 밖에서 웅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남쪽으로 내려간 마한의 중심부는 공주 이남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 광주 지역과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한의 상한연대는 지석묘 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기원 전후가 되며 하한연대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 마한의 잔여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아 AD 4세기 후반이 된다. 마한은 기원 전후로부터 4세기 후반까지 4~5백년간 지속된 셈이다. 이 지역이 완전히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4세기 근초고왕(346∼375) 때였을 것이다. 근초고왕이 전남 지역을 경략한 기사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반 설화적으로 나타나 있다.한강 유역의 백제가 성장하면서 대부분 병합됐으나,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은 장기간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옹관고분을 발달시키고 해양교류를 확대하는 등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고대 항해는 바람에 의존했기 때문에, 서남해안은 일본과 중국 등으로 가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는 포구가 들어서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백제 지배 아래 놓이면서 ‘역사의 패자’, ‘변방의 역사’로 전락했고 기록들이 사라져 실체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동안 연구 성과로 마한의 공간적 범위, 성립과 소멸 시기, 사회 특성, 대외 교류 등은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졌다. 하지만 장고분(일본식 전방후원형 고분) 14기에 묻힌 주검의 출신 등 풀리지 않은 의문도 적지 않다.이런 가운데 통설인 ‘백제의 4세기 마한 병합’에 맞서는 ‘6세기 병합설’의 도전은 만만치 않다. 6세기 병합설을 펴는 연구자들은 4세기 이후에도 백제와 다른 옹관묘를 발달시킨 영산강 유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광주를 포함한 나주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6세기 중엽에 가서야 백제에 완전 복속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였다. 그 중 전남 지역은 중.동.남.서.북 오방의 하나인 남방의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하였으며, 13군 42현이 있었다. 또한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가 기록상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동성왕(東城王) 20년(498)이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탐라가 공부(貢賦)를 잘 닦지 않으므로 동성왕이 친정(親征)에 나서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함으로 이를 중지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광주는 무진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이 지역이 탐라의 조공을 거둬들이는 경로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 당시에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광주는 백제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호남의 중심부였던 것을 짐작케 한다.광주는 무진주武珍州로 불리었으며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남평 일대), 복룡현伏龍縣(평동 일대), 굴지현屈支縣(창평 일대)을 통치하였다. 당시 무진주는 발라發羅(나주), 월나月奈(영암)와 함께 일본 및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 중의 하나로 문물 교역의 요지였다. 백제의 행정구역 편제는 수도를 5부로 나누고 지방은 5방으로 구획하여 다스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군·현을 두었다. 5방은 중방의 고사성(古沙城), 동방의 득안성(得安城), 서방의 도선성(刀先城), 북방의 웅진성과 남방의 구지하성(久知下城)이다. 전남지역은 남방인 장성군 근방의 구지하성에 속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지하성은 신라 때의 이름인 갑성(岬城), 고려 때 이후의 이름인 장성(長城)이 의미하듯이 험준한 노령산맥과 긴 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며, 지금도 장성읍내에 구진성(丘珍城) 터가 남아 있다.이곳에는 14군 44현의 행정 단위가 있었다. 광주와 무등산을 중심으로 무진주를 비롯하여 복룡현(고마산현 : 현 광산구 송정·평동·삼도), 굴지현(현 : 담양군 창평·고서), 수천현(수인현 : 현 광산구 본량·임곡) 등이 있었다.통일신라-후백제시대광주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의 실패로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방행정조직을 재편성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당시 광주의 명칭은 무진주였고, 지방장관인 도독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문무왕(文武王) 17∼18년(677∼678)경부터 무진주를 도독부(都督府)로 정했다. <광주읍지> 읍선생조를 보면 문무왕 18년(678년)에 아찬(阿飡) 천훈(天訓)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된 기록도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한 3년 뒤의 일로서 지방세력의 견제나 지배 기반을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광주지역이 그만큼 중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에는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가 처음 설치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광주를 무주(武州)라고 기록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 및 신라의 옛 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한 삼국사기 무진주조(條)에 나타나며 신라 신문왕 7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신문왕(神文王) 7년(687)에 이르러 지방행정조직이 완성되고 9주 5소경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전국을 9주로 구분하고 각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어 경덕왕(景德王) 16년(757) 백제 이래 사용되었던 무진주는 무주(武州)로 개칭되었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한주에 중원경, 삭주에 북원경, 웅주에 서원경, 전주에 남원경 등 5경을 두었고 무주는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 일부), 기양현(창평)을 직접 통치하는 전남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15군 32현을 관할하였는데, 오늘 광주.전남 행정구역의 근간이 된다. 모든 군현의 명칭이 한식(漢式)으로 개편되면서 토박이 말들은 사라지고 관호 역시 한식으로 바뀐다. 이러한 관호나 지명의 한화정책은 왕권의 전제화를 촉진시켰다. 중앙에서 장관과 부관을 파견하고 그 밑의 실무행정은 그 지방민으로 맡게 하였다.이러한 개편에도 불구하고 무진주와 무주는 계속 혼용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신라 왕실의 전제화 경향에 대한 백제 지역의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세력 과시를 펼쳤던 노력으로 보인다. 결국 혜공왕(惠恭王) 12년(776)에는 관제가 경덕왕 이전처럼 복구되었다. 이와 함께 군현의 명칭도 복구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후의 기록에는 무진주란 표기가 빈번히 등장한다.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 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주거단위였다.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시위부(侍衛府)와 수도에 주둔한 중앙군단으로 9서당과 지방통치의 거점에 군사조직인 10정(停)이 있고 주 및 변방에 배치된 군단인 5주서(五州誓)와 3변수당(三邊守幢)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10정 중 하나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무주에 직속되었던 현웅현(玄雄縣, 나주 남평)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흑색금(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존재한다. 신라 9주(九州) 가운데서 옛 백제영토에 설치하였던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光州)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에 두었던 군단이다. 무진도독이 근무했던 무진도독성은 <세종실록지리지>(1432),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여지도서>(1765), <동국문헌비고>(1770), <광주목지>(1798), <대동지지>(1866), <광주읍지>(1879) 등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무진도독 때의 옛 토성은 둘레가 2,650보다”라고 서술된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진도독고성은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32,448척이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것은 동여비고(1682)와 대동여지도(1861)다. 동여비고는 십신사라는 절 왼편에 무진도독고성을, 대동여지도는 읍성 북쪽 냇가 건너편에 고읍(古邑)을 표기하고 있다. 고읍이란 조선시대 읍성 이전의 옛 읍으로 무진도독성을 가리킨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전제 왕권은 무너지고 각지에서 호족들이 중앙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후삼국시대가 개막된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방수비장(防守婢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를 점령하여 후백제라 칭하고 기병한지 9년만인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왕이라 칭했다. 광주성은 계속 아들 용검(龍檢)과 성주인 사위 지훤(池萱)에게 지키게 한다. 북방에서는 궁예가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정벌하고 도읍을 송악(松岳, 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혜공왕 5년(901)에 후고구려 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다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또 당시 궁예에게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 및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 귀속시키고, 해상을 통해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나주) 등 10여군을 공략한 후 나주에 진을 쳤다.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마진)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세력을 겨루었다. 궁예가 광주성을 공격하자 견훤의 사위 지훤이 굳게 지키고 투항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내분으로 말미암아 932년에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하고 고려 태조 19년(936)에 이르러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이 용검(龍劒), 양검(良劒) 등 두 아우와 함께 항복하면서 후백제가 멸망한다. 후백제 패배의 결과로 전남의 중심은 무등산이 배경인 광주에서 영산강의 중심권인 나주로 옮겨진다. 물론 나주지역이 왕건의 개국에 협력했던 이유가 크지만 일찍부터 해로를 통한 길목으로서 그 중요성이 입증되고 있었다.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나주 일대의 공략에 힘을 기울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고려시대고려시대에 이르러 광주는 수차에 걸쳐 외관(外官)의 승강(陞降)과 읍호(邑號)의 개칭이 있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태조 23년(940)에 무주의 읍호를 광주로 개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주라는 읍호가 이미 후백제 견훤 때부터 사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무진주·무주 등의 명칭과 함께 혼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기록 등을 볼 때 940년에 광주로 칭했다는 기록은 여러 가지로 혼용되던 읍호를 광주로 확정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찬자(撰者)인 이행, 홍언필 등의 견해도 일치한다. 또 광주의 명칭은 고려 전 시대를 통하여 그대로 유지되지는 못하였다. <고려사> 지리지를 통해 그 변천과정을 다음처럼 살필 수 있다.“성종 14년(995)에 내려서 칙사를 삼았으며, 성종 15년(996)에 강등하여 자사의 고을로 삼았고 뒤에 또 내려 해양현 영관(令官)을 삼았다. 고종 46년(1259) 공신 김인준의 외향이므로 익주에 이어 광주목으로 삼았다가 후에 다시 무진주로 승격하였고 충선왕 2년(1310)에는 다시 강등하여 화평부로 삼았다. 왜 화평부로 강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광주 토호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중앙정부 차원의 견제책으로 보인다. 공민왕 11년(1362)에 무진부(혜종의 위를 피하여 武를 茂로 고쳤다.)로 고쳤다가 동왕 22년(1373)에 다시 광주목으로 하고 별호로는 광산이나 익양이라 하였다.”이렇듯 시대에 따라 굴곡 많은 변화를 보이면서 광주(光州)→해양(海陽)→익주→광주→무진(茂珍)→광주의 순으로 변천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광주’의 명칭으로 되돌아 왔다.위의 기사 중 강등하여 칙사를 삼았다는 것은 칙사가 파견되기 전에는 칙사보다 격이 높은 외관이 파견되었음을 의미한다. 성종 2년(983) 12목이 설치되면서 여조(麗朝) 개국에 협력했던 나주에 목이 설치됨을 볼 때, 그보다는 낮은 외관 즉 지사가 성종 2년 이후 언제인가 파견되었는데 성종 14년에 다시 칙사로 바뀐 것이다.성종 이후 현종 9년(1018)에 이루어진 지방제도의 개편은 고려 지방제도의 완비를 뜻하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지방 조직이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으로 개편 정착된다. 전남지역은 나주목을 주목으로 하여 1지사부(장흥)와 4지사군(영광·영암·보성·함평), 4현령관(해양·진도·육성·탐라)로 편제된다.그 후 5도 안찰사제가 성립된 것은 예종을 거쳐 인종 때였다. 그리고 5도는 양광충청주도, 경상진주도, 전라주도, 서해도, 춘주도 등이었다. 전라도 지역은 전라주도라 하여 전주와 나주를 거점으로 한 지역이 이에 해당하여 임기 6개월의 안찰사 1명이 파견되었는데 이때의 본영은 전주였다.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광주의 행정체제는 중앙정부↔전라주도 안찰사↔광주의 계통 순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틀 속에서 광주는 명칭의 변화가 많았고 행정단위도 현→주→목→부→목의 흐름 또한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이에 따라 외관의 지위도 현령→지주사→목사→부사→목사로 변하였다. 이 같은 변천이 광주의 지역적 행정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광주가 목이 되었다고 해도 초기의 12목이나 8목과 같은 부목으로서의 성격을 띨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가 현이든 주이든 목이든 간에 안찰사의 매개와 통제를 통하여 중앙에 연결되고, 실제 행정사무의 처리에 있어서도 그 단위의 차이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조선시대조선 시대에는 전라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하였다. 조선 초의 여러 제도는 태조 이성계가 그의 즉위교서에서 “의장법제는 모두 전조의 고사를 따른다.”고 밝혀 고려의 문물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 답습하였다. 그 뒤 차츰 왕조의 기반이 안정되고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제도의 개편이 있게 된다. 태종(1401∼1418)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시작된 제도개편 작업은 세조를 거쳐 성종 16년(1485)에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과 더불어 중앙집권적 제도가 완비되기에 이른다.조선시대의 지방행정기구는 태종 13년(1413)의 개혁 이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평안·함길도 등 8도로 나누고 각도에 상임의 관찰사를 두었다. 그 밑에 4부·4대도호부·20목·43도호부·82군·175현을 두어 각각 수령을 파견하였다.태종 때부터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전라도 57관이 완성된다. 이 57관은 읍호의 승강이나 소속의 변경 등은 없지 않았으나, 정유재란의 폐허로 인해 선조 33년(1600) 진원현이 장성군으로 편입된 것 말고는 커다란 변동 없이 56관이 유지된다. 광주는 고려 말의 광주목이란 읍호 그대로 조선조에 들어와 나주목과 함께 계수관(界首官)이 두어진다. 계수관이란 도의 지시를 소령의 군현에 전달하면서 군현을 통할하던 기구이다. 고려 말 전라도의 계수관은 전주·광주·승주·익주에 두었는데, 조선 태조 2년(1393)에 승주와 익주가 제외되고 완산(전주)·나주·광주로 좁혀졌다. 광주목에 속한 군현으로는 2도호부(순천, 담양), 2군(보성, 낙안), 7현(고흥, 능성, 화순, 동복, 옥과, 진원, 창평)이었다. 이어 태조 6년(1397)에는 전라도의 군을 담당하는 병마절도사 영을 광주에 둔다. 이 병영은 현재의 광산구 고내상(송정)에 있었는데 태조 17년(1417)에 도강현(道康縣, 현 강진군 병영면 지역)으로 옮겨 갔다.조선시대 광주의 읍호 변천과 외관의 승강은 다음과 같다. “세종 12년(1430) 경술에 광주사람으로 만호를 지냈던 노흥준이 광주목사인 신보안을 구타해 사망케 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노흥준은 장형에 처하여 가산을 몰수한 뒤 변경으로 추방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는 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되며, 계수관도 장흥부로 옮겨진다. 문종 원년(1451) 신미에 와서 다시 옛날대로 복구되었다. 성종 20년(1489) 기유에 판관 우윤공이 유시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광주고을 사람의 행위라 의심하여 현으로 강등시키고 읍호도 광산으로 고쳤다. 연산군 7년(1501) 신유에 다시 광주목이 되어 목사와 판관 각 1인의 관원을 두었다. 인조 2년(1624) 갑자에 광주사람 구원이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고 하여 대죄로 처단하고 광주목은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된다. 인조 12년(1634) 갑술에 광주는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허나 숙종 27년(1701) 신사에 장희재와 함께 무고의 옥에 사형당한 숙정의 관향이라는 이유로 광주목에서 다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영조 33년(1757) 광산현에서 다시 광주목으로 복구되었으나, 고종 6년(1869) 사령인 문성이란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으로 광주목에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고종 8년(1871) 광산현에서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광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외관의 승강이 반복되었고, 읍호도 광주→무진→광산→광주로 변화되었지만,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광주’라는 고을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읍리·민의 수령에 대한 행패나 모반·강상죄 등을 범하면 그 고을 자체를 없애버리거나 강등 또는 인근 군현에 병합시키기도 하였다. 고을의 강등은 곧 외관의 격이 강등됨을 말하며 이와 함께 읍호의 개칭도 뒤따르게 된다.1895년 8도가 23부로 바뀌면서 전라도는 나주부(16군), 전주부(20군), 남원부(15군)로 나뉘게 되고, 이때 광주는 광주군이 되어 나주부에 속하게 된다. 1896년, 23부가 다시 13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나뉜다. 이때 광주가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정해지면서 이후 전라남도의 중심이 된다.*일제 강점기 당시 광주역 전경근대 시대전국이 8도의 편제로 유지되던 조선사회가 1895년 갑오경장과 함께 근대적 행정편제로 개편된다. 1895년 윤5월에 8도의 지방관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의 행정구역으로 바뀌면서, 광주는 나주부 예하의 광주군이 된다(1895. 5. 26 반포 칙령 제98호). 같은 해 9월 5일에는 면세와 결·호수의 다소에 따라 각 군의 등급을 정하면서 광주군은 41개 면을 관할하는 1등 군이 된다.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된다(1896. 8. 4 반포 칙령 제36호). 이는 너무 급격히 변화 개편된 23부의 지방행정체제가 익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효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13도로 개편된 지방행정체제는 1946년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14도로 증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광주군은 13도제에 따라 전라남도의 1등 군으로서 지방장관의 치소인 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전라남도 최초의 지방장관인 초대 관찰사로는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임명되었다. 관찰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긴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에 전남지역의 중심이었으며 견훤의 후백제 기병의 중심지이던 광주가 태조 왕건의 고려 개국과 함께 전남지역 행정의 주도권을 나주에 넘겨준 이래 실로 천여 년 만에 이 지역 행정의 주도권을 되찾은 것이다.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관찰부는 도청으로 바뀐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새로운 지방 제도를 마련하고 광주에 읍장을 둔다. 당시 광주는 성 안을 성내면이라 하였고, 성 밖의 기례방, 공수방, 부동방 등 3방과 합하여 광주면이라 불렀다. 나머지는 각각 화순, 담양군으로 편입된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발표하고 이듬해 4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대폭적인 지방행정구역개편을 실시한다. 이때 광주군은 41면 432동리에서 15면 152리로 대폭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 조치한 것은 통치의 집약적 단일화로 소수의 인원을 배치하고도 행정효과는 극대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1917년 10월에는 광주면은 면제 시행령에 의하여 지정면으로 승격하였다. 현재의 광주광역시는 결과적으로 보면 이 광주면이 발전하면서 광주군 일대를 흡수시킨 것이다. 광주면이 지정면으로 되면서부터는 일본식 동리명인 통(通, 동문통∼북문통 등 4통) 또는 정(町, 궁정·중정·부동정 등 11정)이란 명칭이 생겼다.1931년 4월 1일에는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된다. 당시의 광주인구는 총 42,637명(한국인 36,113명, 일인 6,199명, 외국인 325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1935년 10월 1일에는 광주읍이 부로 승격되면서 지한면의 4개리(태봉·서남·주곡·홍연), 효천면의 5개리(교사·양림·봉선·벽도·주월), 서방면의 5개리(풍향·장호·동계·중흥·신안)등 14개리를 편입하여 33정을 41정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고 광주부의 인구는 52,674명으로 불과 4년 반 만에 10,000여 명의 급속한 증가를 보였다. 1935년에 개편된 행정체계는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일제는 물러가고 해방을 맞게 된다.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제1차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광주는 일반 시로 개칭되었다. 20세기 이후의 광주일제 패망 후 미 군정을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실시된 지방자치제에 따라 광주부는 1949년 광주시로 개칭된다. 1955년 현재 남구에 속하는 효지면 전역을 포함하여 광산군 서방, 석곡, 극락면이 광주에 편입되어 면적은 종전 19㎢에서 155.01㎢로, 1957년 광산군 석곡면의 잔여와 지산, 서창, 대촌면 및 담양군 남면의 일부가 또 편입되면서 시 면적은 279.25㎢로 확장된다. 광복 이후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빠르게 진행된 정부 수립과정 속에서 부정적인 정권 승계의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럴 때마다 광주는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선봉장 역할을 빈번이 맡게 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일 민주당원들의 소규모 시위 이후 4월 18일 서울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광주의 시위 열기는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4월 19일부터 광주고교를 비롯한 고교생들의 규탄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광주지역의 4월 민주혁명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71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였다. 3·15 부정선거에서 비롯된 4·19민주혁명은 국민의 힘에 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개가를 올렸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과시하는 숭고한 역사를 정립한 것이다. 하지만 4·19 민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1961년, 현재의 남구지역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사구동, 서동, 양1동, 양2동, 월산동, 농성동, 백운동, 봉주동, 효덕동, 송암동을 관할한다. 1963년에는 서창.대촌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 면적은 214.92㎢로 줄어들고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된다. 1966년에는 계림1구.월산동.효죽동의 3개동을 분동하여 48개 동으로 늘렸고, 1970년에는 다시 산수2동.서석2동.학3동 등 10개 동이 분동되어 58개 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 인구는 502,000명이었다. 1973년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 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진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른바 ‘10·26사건’)으로 18년간 유지해 온 유신정권이 마무리되는 듯 하였다. 곧이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이어 ‘12·12사태’라 일컫는 군사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이듬해인 1980년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을 내세운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고,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광주 역시 신군부의 권력 장악 음모와 민주 인사 및 학생 운동 지도부의 검거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 만약 휴교령을 내리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 양심 있는 교수들은 적극 동참할 것 등을 호소하였다. 5월 13일에는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의 시국선언이 발표되었고 일부 고등학생들의 시위도 일어났다. 계엄확대 이후 계엄군과 학생들의 첫 충돌은 5월 18일 전남대학교에서 일어났다.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구타하였는데, 학생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부상을 입고 쫓겨났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다시 광주역 광장에 모여 대열을 가다듬고 비상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전두환 퇴진, 계엄군 철수 등을 외치며 도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계엄령 확대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봉기한 지역은 전국에서 오로지 광주뿐이었다. 광주 외곽을 완전히 봉쇄한 계엄군은 신군부가 수립한 ‘상무충정작전’에 따라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항쟁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 진압에 중무장한 3공수여단 11대대를 투입시켰다. 5월 27일 0시 정각 도청 상황실의 전화가 끊기고 계엄군의 공격에 시민군은 무참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진행된 5월 항쟁은 좌절되었지만, 결코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정신이 계승되어 이후의 국내외를 막론한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의 결과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1986년 11월 1일 직할시(直轄市)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1988년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은 500.73㎢로 크게 늘어났고, 4구 83동 9개 출장소를 관장하였다. 1995년 1월 1일 명칭변경에 따라 광역시(廣域市)로 바뀌고, 같은 해 서구에서 남구가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2018년 2월말 현재 5개 구 95개 행정동과 202개 법정동을 두고 있으며, 594,453세대에 1,463,100명의 시민이 살고 있다. 이 중에는 외국인 26,536(2015년)명이 포함되어 있다.
    2018-05-23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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