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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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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현을 침범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현을 침범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임진(1592) 6월 1일(기축)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현(郡縣)을 침범하였다. 처음에 호남의 군사가 패하여 본도로 돌아오니 여러 고을의 인심이 흉흉하여 보전할 수 없었는데, 오직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만이 고을의 군사를 단속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수어(守禦)할 계획을 하였으므로, 이광(李洸)이 즉시 첩보하여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아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하게 하였다. 이에 방어사 곽영(郭嶸),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전주(全州) 의병장 황박(黃璞),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을 웅현(熊峴)과 이현(梨峴) 등 요해처에 나누어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 때 왜병이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으로부터 금산(金山)ㆍ지례(知禮) 지경을 경유하여 무주(茂朱) 용담현(龍潭縣)으로 들어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충청도 옥천(沃川)ㆍ영동(永同)의 여러 고을로 들어가 청주(淸州)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방화하며 노략하였다. 그러나 충청 감사 윤국형(尹國馨)과 병사 이옥(李沃)이 금강(錦江)에 군사를 모아 방위만 하면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조헌(趙憲)이 국형에게 편지를 보내어 머뭇거리면서 적을 치지 않는 것을 책망하였으나, 듣지 않았다.【원전】 25 집 621 면【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2021-03-16 | NO.278
  • 전 부사 고경명이 군사를 일으키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전 부사 고경명이 군사를 일으키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임진(1592) 6월 1일(기축)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경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비록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대비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 속에 사무친다.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께서 황산(黃[荒]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유사시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를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고 여러 동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원전】 25 집 620 면【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왜(倭) / 인물(人物)[주-D001] 승여(乘輿) : 임금을 가리킴.[주-D002] 성조(聖祖) : 조선 태조를 가리킴.[주-D003] 선조(先朝) : 고려를 가리킴.
    2021-03-16 | NO.277
  •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임진(1592) 5월 1일(경신)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호서(湖西)의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로 호칭하여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대하였다.【원전】 25 집 616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2021-03-16 | NO.276
  • 전 도사 조대중을 하옥하여 죽이다 - 선조(수정실록) 23년
    전 도사 조대중을 하옥하여 죽이다 - 선조(수정실록) 23년 경인(1590) 3월 1일(임인)        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을 하옥하여 죽였다. 대중이 전라 도사가 되어 역변의 초기에 부안(扶安)의 관창(官娼)을 대동하고 보성(寶城)에 이르러 서로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종인(從人)이 지체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겨 밖에 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 ‘현재 울고 있는 중이니 어느 겨를에 길을 떠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대중이 정여립의 죽음을 듣고 방에 들어가 울었다.’는 것으로 되었다. 홍여순이 이 말을 듣고 보성군의 향관(鄕官)ㆍ이복(吏僕) 등에게 첩문(牒問)하니, 모두들 공술하기를 ‘관창과 이별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사실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 설이 유소(儒疏)에서 ‘적을 위해 울었다.’로 되어 마침내 대론(臺論)에 나와 나국(拿鞫)하게 된 것이다.대중이 공초하기를 ‘여립이 죽었다는 것을 들은 날 나는 광주(光州)의 향가(鄕家)에 있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여물(金汝岉)이 내방하여 「국적(國賊)이 이제 죽었으니 오늘은 술 마시며 즐겨도 관계없을 것이다.」 하기에 여물과 함께 종일토록 술자리를 벌이고 크게 취한 뒤에 파하였다. 증명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여물이 서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국청에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대중이 마침내 일차 고문을 받고 또 신문(訊問)을 가하려 하자 소매 속에서 절구(節句)로 된 시 하나를 바쳤는데지하에서 만약 비간(比干)을 만난다면당연히 웃음을 머금을 뿐 슬퍼하진 않으리라는 내용이었다. 금부(禁府)의 관원이 상문(上聞)하려 하자 대신 심수경(沈守慶)이 ‘이는 죽을 때를 당해 나온 난언(亂言)이니 어찌 신빙성이 있겠는가.’ 하며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대중이 죽은 뒤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그 시를 가지고 상에게 아뢰니, 상이 크게 놀라 수경을 돌아보고 묻기를 ‘어떻게 이처럼 되었는가?’ 하였다. 수경이 대답하기를 ‘죄수가 일단 원정(元情)으로 공초하였으면 국문할 때의 난언이나 잡설은 수리(受理)하지 않는 것이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입니다. 신이 대신으로서 법 외의 일을 감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자, 상의 뜻이 조금 풀어지면서 이어 대중의 시신에 추형(追刑)할 것을 명하고 처자는 연좌를 면하게 하였다.당시 조사(朝士) 김빙(金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 눈병을 앓아 바람만 쏘이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립을 추형(追刑)할 때 김빙이 반행(班行)에 서 있었는대 날씨가 너무 추워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논핵을 입고 국문을 받다 죽었다. 이 당시 와언(訛言)이 날로 일어나 대론(臺論)이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많았다. 【당초에 최황과 홍성민(洪聖民)의 의논이 자못 준엄하였는데 이는 토역(討逆)이 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뒤에는 연소한 후진들이 한결같이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이때는 장운익(張雲翼)ㆍ백유함(白惟咸)ㆍ황혁(黃赫) 등의 의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원전】 25 집 594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2021-03-16 | NO.275
  • 정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9년
    신잡ㆍ홍가신ㆍ박동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9년 병오(1606) 8월 25일(신유)        신잡(申磼)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홍가신(洪可臣)을 영원군(寧原君)으로, 박동열(朴東說)을 동부승지로, 이충양(李忠養)을 장령으로, 권태일(權泰一)을 장악 첨정(掌樂僉正)으로, 이경기(李慶禥)를 전적으로, 김치원(金致遠)을 감찰로, 김성발(金聲發)을 주서로, 정구(鄭逑)를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원전】 25 집 254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16 | NO.274
  •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의 포상을 의논하다 - 선조 37년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의 포상을 의논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10월 20일(병인) 전라 감사(全羅監司) 장만(張晩)이 아뢰기를,“도내(道內)의 나주 생원(生員) 강위호(姜渭虎) 등 58인이 정서(呈書)하였는데, 그 대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호남의 석유(碩儒)로 지난 임진 왜란 때 왕성(王城)이 함락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고 적세(賊勢)가 맹렬하여 남북이 횡분(橫分)되었으므로 모두들 「국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할 적에 분연히 일어나 동지를 규합하여 제일 먼저 대의(大義)를 창도하였다. 그리하여 곧바로 기전(畿甸)으로 달려가 강회(江淮)를 차단하고 행궁(行宮)으로 가는 길을 뚫었으며 영남과 호남을 제어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적을 추격할 적에는 외로운 성채를 힘을 다하여 지키고 상처를 싸매고서 독전(督戰)하였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군량이 바닥이 나서 죽고 말았으니, 그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호위한 공과 살신 성인(殺身成人)한 절개는 옛사람에 견주어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지금 의장(義將) 고경명(高敬命)의 사당(祠堂)을 광주(光州)에 세웠고, 조헌(趙憲)의 비석은 금산(錦山)에다 세웠는데, 유독 김천일에 대해서만이 아직까지 아름답게 여긴다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실을 조정에 전문(轉聞)하여 그의 충성스런 공적을 포장하고 그의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여 충신과 효자의 권면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김천일은 일개 서생(書生)으로 비분 강개하여 한 고장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인심이 모두 무너져 흩어질 때에 거의(擧義)의 소식이 들리자 민정(民情)이 매일 데가 있게 되었고, 향곡(鄕曲)의 난적(亂賊)들이 스스로 금즙되어 감히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의 파급 효과는 이미 비상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강도(江都)로 들어가 웅거하고 있으면서 서북쪽에 명령을 통하게 하였고, 힘껏 진양(晉陽)을 지켜 동남쪽의 보장(保障)을 만들려고 하다가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의(義)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러니 실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여러 장수 가운데 뛰어난 자로 고경명이 수립한 공보다도 더욱 빛나게 드러나는 자입니다. 사당(祠堂)을 세우자는 것이 선비들에게서 나온 일이기는 하지만 편액(扁額)을 하사하는 은전은 유명(幽明)이 함께 빛나는 일입니다. 호남의 선비들이 천일을 위하여 강개한 마음을 일으킨 것도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良心)에서 우러난 것으로 권면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여 권면하는 풍교(風敎)가 되게 함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하니, 계하(啓下)하기를,“국사에 죽은 신하를 위해 정문(旌門)한 전례는 없다. 다른 사람 또한 본받게 될 것이니 다시 자세히 살펴 대신들과 의논해서 참작, 시행토록 하라.”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한 바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의논드리기를,“김천일은 제도(諸道)에서 제일 먼저 창의(倡義)하여 그의 강직한 지조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정표하는 일을 속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덕형(李德馨)은 의논드리기를,“해조(該曹)의 공사대로 시행하소서.”하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의논드리기를,“김천일이 창의하여 사지(死地)로 나아간 것은 태양처럼 찬란하여 다시 의논할 것도 없는바, 인격과 명망이 으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정표하는 일은 마땅히 성상의 결단에서 나와야 합니다.”하고,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유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김천일이 다른 사람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제일 먼저 창의하였으니, 제도(諸道)의 수창(首唱)입니다. 마땅히 먼저 포상(褒賞)하는 은전을 시행하여 인심을 용동시키는 거조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조에서 지금 이에 대해 마련하는 중에 있고 천일도 그 가운데 들어 있으니, 그 공사(公事)가 귀일되기를 기다려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거행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하니, 삼공의 의논을 따르라고 하였다.사신은 논한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할 적에 팔로(八路)가 무너지고 인심이 흩어져 곤수(閫帥)와 읍재(邑宰)들은 거개가 자신과 처자식을 보전하기 위해 민간에 숨어 구명도생하기에 바빴는데도 천일은 일개 서생으로서 자신을 잊고 창의하여 향병(鄕兵)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강도(江都)에서 명령을 통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진주성(晉州城)을 보장(保障)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군졸이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 전사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았으니, 구구한 충의(忠義)야말로 숭상할 만하다. 저 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고 몸을 보존하기 위해 나라를 등진 무리들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원전】 24 집 680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식생활(食生活)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주-D001] 강회(江淮) : 양자강(楊子江)과 회수(淮水)의 약칭으로 여기서는 한강과 임진강을 뜻한다.
    2021-03-16 | NO.273
  • 사헌부가 훈련 도감의 당상을 추고할 것을 청하다 - 선조 37년
    사헌부가 성균관 유생의 도기를 함부로 거두어 간 훈련 도감의 당상을 추고할 것을 청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윤 9월 29일(병오)        헌부가 아뢰기를,“태학(太學)은 많은 선비들이 모인 곳으로 조정 상하가 우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군정(軍丁)의 조사를 인하여 공공연히 성균관의 감결(甘結)을 받아 유생(儒生)들의 도기(到記)를 수취(收聚)하였습니다. 설사 빙열(憑閱)할 일이 있더라도 이문(移文)하여 문의하여 보면 될 것인데, 선비들의 부적(簿籍)을 어떻게 타사(他司)에서 수취하여 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체를 모르고 유림(儒林)을 모독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훈련 도감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은 추고하고 색낭청(色郞廳)은 파직하소서.평안 우후(平安虞候) 이문전(李文荃)은 기탄없이 음란 방종하고 형장(刑杖)을 함부로 혹독하게 쓰기 때문에 제보(諸堡)의 모든 군정(軍情)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장(主將)까지 멸시하여 체모의 손상이 많으니 파직하소서.그리고 각도(各道) 각 고을에 행이(行移)하여 추고하는 공사(公事)를 제때에 거행하지 않아 해를 넘기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본부(本府)에서 감사(監司)의 추고를 청하였는데 아직껏 완만한 마음으로 봉행할 뜻이 없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그 가운데 강원도 철원(鐵原)의 관리가 봉수(烽燧)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일을 추고 하는 것은 지난해 9월에 계하(啓下)했고, 경기 포천(抱川)의 전 현감 임호(任琥)가 종성(鍾城)에서 있었던 적변(賊變)에 관한 문서를 지체시킨 것을 추고 하는 일은 5월에 계하했고, 전라도 무안(務安)ㆍ흥양(興陽)ㆍ남원(南原)의 수령들이 5월에 공상(供上)할 종이를 올려보내지 않은 것과 광주(光州)ㆍ순창(淳昌)ㆍ담양(潭陽)ㆍ영광(靈光)의 수령들이 공상한 종이의 품질이 나쁜 것을 추고하는 것은 5월에 계하했고, 평안도 창성(昌城)ㆍ벽동(碧潼)ㆍ평양(平壤)ㆍ구성(龜城)ㆍ이산(理山)ㆍ위원(渭原)의 수령들이 진헌(進獻)할 면주(綿紬)를 납입하지 않은 것을 추고하는 일은 5월에 계하하였습니다. 이상은 행이(行移)한 시일이 제일 오래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계문하지 않고 있으니 완만한 죄가 막심합니다. 4도(道)의 감사를 아울러 추고하여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낭청도 추고하라.”하였다.【원전】 24 집 672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주-D001] 감결(甘結) : 상급 관청(上級官廳)에서 하급 관청(下級官廳)에 공문을 내려보내는 것.[주-D002] 도기(到記) :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출근하여 식당(食堂)에 출입한 횟수를 적는 부책(簿冊)임. 아침ㆍ저녁 두 끼를 1도(至)로 하여 50도가 되면 과거(科擧)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어 있다.
    2021-03-16 | NO.272
  • 사헌부가 지방 수령들의 근황, 공무를 유기하는 풍조 등을 아뢰다 - 선조 37년
    사헌부가 지방 수령들의 근황, 공무를 유기하는 풍조 등을 아뢰다 - 선조 37년 갑진(1604) 9월 19일(병인)         헌부가 아뢰었다.“<중략> 전라도의 경우 광주(光州) 등 고을이 노비 공안(奴婢貢案)을 올려보내지 않은 데 대한 추고 공사를 지난 3월에 행이하고, 익산(益山) 등 고을에서 공상지(供上紙)를 주의해서 만들지 않아 거칠고 엷게 한 것에 관한 추고 공사를 지난 4월 행이한 뒤 모두 여러 차례 독촉했는데도 계문(啓聞)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 모두 추고를 명하소서.”【원전】 24 집 664 면【분류】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군사(軍事) / 재정(財政)
    2021-03-16 | NO.271
  • 박광옥의 포장 요청에 문안을 토대로 받아들이다 - 선조 37년
    고 나주 목사 박광옥의 포장 요청에 문안을 토대로 포장하기로 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5월 20일(경오)        광주(光州) 진사(進士) 이한용(李翰龍) 등의 소장에,“고(故)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광옥(朴光玉)은 지난 임진년에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서로 서찰(書札)을 통해 가며 군사를 조방하고 군량을 저축하며, 무기(武器)를 수선하고 여염(閭閻)을 드나들며 극진히 효유(曉諭)하여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해 권율(權慄)에게 보냈는데도 유독 포장(褒奬)을 받지 못하였으니 원통합니다.”하였는데, 임금이 공경(公卿)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했다. 이원익(李元翼)ㆍ윤승훈(尹承勳)ㆍ유영경(柳永慶) 등이 모두 아뢰기를,“이렇게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반드시 온 도(道)의 공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절(死節)한 사람과는 똑같이 대우할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고찰해 보고 들은 말도 참작해 보아 요량해서 포장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 의논을 옳게 여겼다.【원전】 24 집 611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2021-03-16 | NO.270
  • 이경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황시ㆍ이심ㆍ김수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1월 28일(기묘)       황시(黃是)를 시강원 보덕으로, 이심(李愖)을 의정부 사인으로, 김수현(金壽賢)을 시강원 겸사서로, 이응표(李應彪)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이경함(李慶涵)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유공신(柳拱辰)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홍영(洪泳)을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이몽상(李夢祥)을 영춘 현감(永春縣監)으로, 김담령(金聃齡)을 은율 현감(殷栗縣監)으로 삼았다.【원전】 24 집 563 면【분류】 인사(人事)
    2021-03-16 | NO.269
  • 간원이 광주 목사의 체차를 건의하다 - 선조 37년
    간원이 포도 대장의 추고와 광주 목사의 체차를 건의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1월 24일(을해)       간원이 아뢰기를,“<중략>광주(光州)는 호남의 후설(喉舌)같은 요충지인데, 근래 수령이 자주 갈려서 탕패한 고을이 되어버렸습니다. 급할 때에 보장(保障)하는 책임은 보통으로 차출하여 보낸 사람이 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새 목사(牧使) 이집(李㙫)은 명성이 평소에 가벼워서 결코 감당할 수 없으니 체차하고, 자상하고 개제(愷悌)하며 근실하고 일에 익숙한 사람으로 직질(職秩)의 고하를 논하지 말고 충분히 가려서 차출하여 보내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24 집 562 면【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2021-03-16 | NO.268
  • 이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홍여순ㆍ신잡ㆍ최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1월 23일(갑술)        홍여순(洪汝淳)을 형조 판서로, 신잡(申磼)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문전에 가득 차서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있었다. 당시 사람이 탐오한 재상을 꼽는 데 있어서 홍(洪)ㆍ신(申)ㆍ노(盧)―홍여순과 노직(盧稙)이다.―를 으뜸으로 꼽았다.】 을 지중추부사로, 최기(崔沂)를 승정원 좌부승지로, 홍경신(洪慶臣)을 부호군으로, 조정립(趙正立)을 성균관 직강으로, 이성(李惺)을 전적(典籍)으로, 이집(李㙫)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이정표(李廷彪)를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이성길(李成吉)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이계정(李禎慶)을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홍희(洪憙)를 장성 현감(長城縣監)으로, 이정경(李禎慶)을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삼았다.【원전】 24 집 562 면【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
    2021-03-16 | NO.267
  • 한수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한준겸ㆍ박승종ㆍ허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37년 갑진(1604) 1월 18일(기사)        한준겸(韓浚謙)을 이조 참판으로, 박승종(朴承宗)을 【경솔하고 기량이 작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허성(許筬)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상신(李尙信)을 예조 참의로, 강첨(姜籤)을 사헌부 집의로, 한수민(韓壽民)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김홍미(金弘微)를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이유성(李惟誠)을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신경징(申景澄)을 남도 우후(南道虞候)로, 성진선(成晉善)을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정숙도(鄭淑度)를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김호(金浩)를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이경립(李景立)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최충원(崔忠元)을 함경 도사(咸鏡都事)로, 이진웅(李震雄)을 사헌부 감찰로 삼았다.【원전】 24 집 561 면【분류】 인사(人事)
    2021-03-16 | NO.266
  • 폭풍우에 대한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의 치계 - 선조 36년
    폭풍우에 대한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의 치계 - 선조 36년 계묘(1603) 7월 24일(무인)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이 치계하였다.“7월 3일 술시부터 4일 묘시까지 광풍과 폭우가 한꺼번에 몰아쳐 크고 작은 나무가 모두 뿌리째 뽑혔고 관사와 민가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부(府)의 동남쪽 문밖 냇가의 민가와 남쪽의 해농창평(海濃倉坪) 1만여 섬지기 큰 들에 물이 넘쳐 마치 바다처럼 되었고, 높은 곳에 있는 메마른 논밭의 화곡(禾穀)도 사나운 바람에 부러져 상하였습니다. 재해가 이에 이르러 추수할 가망이 전혀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통곡하고 있으니, 보기에 애처롭습니다. 흥양 현감(興陽縣監)의 첩정에 ‘품관(品官) 정여관(丁汝寬) 등 7호(戶)와 포작인(鮑作人)의 집 3채가 조수에 떠내려 갔으며, 배 안에 있던 5명은 빠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천재(天災)의 변이 근고에 없던 바인데, 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해남(海南)ㆍ남원(南原)ㆍ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고부(古阜)ㆍ순창(淳昌)ㆍ금구(金溝)ㆍ옥과(玉果)ㆍ고산(高山)ㆍ임실(任實)ㆍ구례(求禮)ㆍ태인(泰仁)ㆍ옥구(沃溝)ㆍ용담(龍潭)ㆍ무주(茂朱) 등의 고을이 신보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화곡과 사람이 모두 손상되고 죽었으니 농사가 절망적입니다.”【원전】 24 집 507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농작(農作) / 호구(戶口) / 과학-천기(天氣)
    2021-03-16 | NO.265
  • 전 의영고 직장 안중묵의 상소 - 선조 36년
    전 의영고 직장 안중묵의 상소 - 선조 36년 계묘(1603) 3월 17일(계유)        전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신(臣) 안중묵(安重默)이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백성은 임금ㆍ스승ㆍ아비를 똑같이 섬겨야 합니다. 신의 스승 정개청(鄭介淸)은 역옥(逆獄)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지 14년이 지났는데 공론(公論)이 아직도 답답해 하고 있으며 지극한 원통함을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초야(草野)에서 생장하여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하지만 사생(師生)의 의리가 중한 것이므로 심혈을 피력하여 진소(陳疏)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생각하건대 신의 스승 개청은 궁항(窮巷)에 살면서 신의가 돈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정철(鄭澈)과 함께 가까운 경내(境內)에 살았으나 취향이 배치(背馳)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철이 겉으로는 선비를 아낀다는 명분을 핑계대고 속으로는 당비(黨比)의 간사함을 이루려고 제멋대로 미처 날뛰며 일도(一道)의 풍습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항상 분개한 마음을 품었었습니다. 그래서 박순(朴淳)과 이야기하면서 경망하고 조급하다고 지목하고 그의 천발(薦拔)이 잘못되었다고 진술하였었습니다. 이 말이 한번 누설되자 이를 깨물고 유감을 품은 지 오래였습니다. 무자년 무렵에 정철이 유배되어 광주(光州)에 살았고 개청은 그때 곡산 현감(谷山縣監)이었으므로 근친(覲親)하러 왕래하느라 자주 그의 문앞을 지나다녔으나 끝내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일찍이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공부하면서 널리 그 뜻을 채취하여 일설(一說)을 만들어 문생(門生)들에게 보이며 지목하기를 ‘동한(東漢)과 진(晉)ㆍ송(宋)은 숭상하는 바가 같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말의 은미한 뜻의 소재는 일도(一道)의 폐습을 지적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철이 이를 보고서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여겨 주먹을 휘두르고 눈을 부라리며 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틈을 엿보다가 역변(逆變)이 있던 처음에 날듯이 뛰어 일어나 죄상을 낱낱이 찾아 내어 스스로 배절의(排節義)라는 3자를 지어서 위로 천청(天聽)에 진달함으로써 옥사를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아, 절의라고 하는 것은 우주(宇宙)의 동량(棟梁)인 것입니다. 아무리 대간웅(大奸雄)이 이심(異心)을 품고 있더라도 그것을 배척하는 말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개청은 경전(經傳)을 깊이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 마디 말이라도 도(道)에 가깝기를 구하는 터에 어찌 감히 배절의라는 3자를 공공연히 편지에 썼겠습니까.신의 스승 개청이 역적과 한 도(道)에 있었지만 나이의 차이가 현격하여 평소 서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을유년에 비로소 교정국(校正局)에 같이 있게 되어서 처음으로 면대하게 되었는데 몇 달 안 되어 개청은 어버이의 병으로 먼저 돌아갔으므로 그간에 서로 만난 것은 5~6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후 동료 때문에 두 번 보내온 편지에 존형(尊兄)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대체로 편지의 내용에 있어 친밀하면 태만히 하고 소원하면 공경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육자정(陸子靜) 형제가 주자(朱子)와 논의에 크게 차이가 나더니 끝내 죽었는데도 조문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왕래할 때에는 매우 존경하여 노형(老兄)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송경(宋牼) 역시 유세(遊說)하던 선비에 지나지 않았는데 맹자(孟子)가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오늘날의 속규(俗規)를 참고해 보아도 문무(文武)의 관원끼리 서로 연형(年兄)이니 요형(僚兄)이니 합니다. 교유하는 사이에 개청이 역적과 편지를 주고 받은 죄는 있지만 그 실정(實情)은 반드시 아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왕망(王莽)의 거짓 공손함에 팔만(八萬)이 공덕을 수식했고 육당(陸棠)은 구산(龜山)에게 거짓 공순을 하여 그의 사위가 되기도 한 것과 같은 데이겠습니까. 역적들이 겉으로 시서(詩書)를 말하며 세상을 많이 속였으니, 개청이 우연히 일컬은 것은 실로 범연한 교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천우(吳天祐)는 역적의 문도(門徒)이고 곡성(谷城) 사람인데 역적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개청이 현감으로 있을 때 그가 연루되어 옥에 갇혔고 그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과연 역적과 교분이 두터웠다면 그의 문인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성상의 비답(批答)에 ‘지금 세상에 무슨 학문이 그리 깊어서 저술(著述)이 세상에 행해진단 말인가. 더구나 절의를 배척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신은 더욱 마음에 근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이 설(說)을 채취한 것은 개청의 손에서 나왔지만 문자로 논지를 세운 것은 모두 주자(朱子)ㆍ장자(張子)가 이미 이루어 놓은 논지를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거기에 ‘모두 성현(聖賢)의 명덕(明德)ㆍ신민(新民)의 학문을 모른다.’고 했고, 또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이치를 연구하지는 않고 스스로 검방(檢防)하는 절도에 안일하다.’고 했고, 또 쇠퇴한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은 성현의 중화(中和)의 도(道)가 아니다.’고 했고, 또 ‘당시 절의가 있는 사람은 문득 일세를 오만하게 보고 조정을 탁란시킨다.’고 했고, 또 ‘후한(後漢)의 명절(名節)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은 귀하게 여기고 남은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었다.’고 했고, 또 ‘진(晉)ㆍ송(宋)의 인물이 청고(淸高)함을 숭상했다고는 하지만 개개인은 모두 관직을 바랐으며 한편으로는 권세가를 섬기며 재물을 바쳤다.’고 했고, 또 ‘명절이라고 하는 호칭은 쇠미한 세상에서 시작한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평소에 충만시켜 그 용(用)에 시행되었으므로 이것이 수시로 드러나서 절의를 세움에 있어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절의는 빼앗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쇠미해지고 도(道)가 미약해져도 우뚝하게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이면 세상에서는 명절이라는 이름을 돌리었고, 사군자(士君子)로서 도학이 지극하지 못하여도 또한 이것으로 자부하였으니, 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하였습니다.이 몇 줄의 글을 모아서 동한(東漢)과 진(晉) 그리고 송(宋)에서 숭상하던 것이 다른 데 대한 폐단을 드러낸 것으로 개청의 뜻은 감히 절의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로 절의의 근본을 북돋아준 것입니다. 이는 실로 옛 현인의 명결(明訣)이요 후학의 표적(標的)입니다. 죄를 가하려 하면 어찌 핑계가 없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정철(鄭澈)이 이미 길삼봉(吉三峯)의 설(說)을 지어내 최영경(崔永慶)을 무함하여 죄에 빠뜨렸는데 그것은 배절의(排節義) 3자를 지어낸 수단으로 만든 것입니다.아, 사람을 참소함이 망극하여 죄를 얽어내 억울하게 옥사(獄死)하게 하였는데 사방에다 방(榜)을 걸어 보이기까지 하였으니, 사기(士氣)가 있는 사람은 누군들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지 않겠습니까. 성감(聖鑑)이 지극히 밝아서 윤음(綸音)이 가린 것을 풀어 당시에 잘못 죄망에 걸린 사람들을 모두 사유(赦宥)하였으므로 더러 조정의 반열에 드러나 있는 이도 있습니다. 영경에게 이르러서도 특별히 신설(伸雪)해 주시어 그 아들에게는 관직을 주고 그 동생은 증직(贈職)시켰으므로 억울함을 품었던 사람들이 기뻐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개청만 아직 신리(伸理)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지의 화기가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원전】 24 집 458 면【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2021-03-16 | NO.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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