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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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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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좌도 암행 어사 조헌섭을 불러 보다 - 철종 5년
    서계하여 전 장흥 부사 김낙승 등을 탄핵한 전라좌도 암행 어사 조헌섭을 불러 보다 - 철종 5년 갑인(1854) 7월 25일(임술) 전라좌도 암행 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 조헌섭(趙憲燮)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전(前) 장흥 부사(長興府使) 김낙승(金樂升)ㆍ전 곡성 현감(谷城縣監) 엄석명(嚴錫明)ㆍ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재순(申在順)ㆍ강진 현감(康津縣監) 이행규(李行奎)ㆍ전 능주 목사(綾州牧使) 이장우(李章愚)ㆍ전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연근(金淵根)ㆍ전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도중(李䆃重)ㆍ전 구례 현감(求禮縣監) 남궁일(南宮鎰)ㆍ전 운봉 현감(雲峰縣監) 한용하(韓用河)ㆍ전 성환 찰방(成歡察訪) 신종익(申鍾益)ㆍ전 병사(兵使) 윤명검(尹明儉)ㆍ전 방답 첨사(防踏僉使) 이창묵(李昌默)ㆍ전 순천 영장(順天營將) 조병선(趙秉善) 등을 죄주고, 담양 부사(潭陽府使) 홍재응(洪在應)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원전】 48 집 587 면【분류】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2021-04-26 | NO.377
  • 광주 유수 김학성 등을 실록 찬수 당상으로 그대로 차하하다 - 철종 1년
    좌참찬 김좌근ㆍ행 상호군 박영원 등을 실록 찬수 당상으로 차하하다 - 철종 1년 경술(1850) 10월 25일(계미)        좌참찬 김좌근(金左根), 행 상호군 박영원(朴永元), 행 병조 판서 조두순(趙斗淳), 행 지중추부사 김흥근(金興根)ㆍ윤정현(尹定鉉), 광주 유수(光州留守) 김학성(金學性), 행 대호군 조학년(趙鶴年)ㆍ김보근(金輔根)ㆍ조병준(趙秉駿)을 실록 찬수 당상으로 그대로 차하(差下)하고 행 예조 판서 이가우(李嘉愚)를 차하하였다.【원전】 48 집 558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4-26 | NO.376
  • 충ㆍ효ㆍ열에 대해 장계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하여 초계하다 - 순조 32년
    예조에서 각 식년에 충ㆍ효ㆍ열에 대해 장계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하여 초계하다 - 순조 32년 임진(1832) 4월 13일(기축)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에 서울과 외방에서 충(忠)ㆍ효(孝)ㆍ열(烈)에 대해 장계(狀啓)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分等)하여 초계(抄啓)하였다.<중략>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 <중략> 광주(光州)의 고 사인 박성립(朴性立)의 처 이씨, <중략>【원전】 48 집 376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주-D001] 오성(五聖) : 공자(孔子)ㆍ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2021-04-26 | NO.375
  • 문관ㆍ무관의 체차와 승서ㆍ승전을 정식대로 하다 - 순조 26년
    문관ㆍ무관의 체차와 승서ㆍ승전을 정식대로 하고 경수궁의 면세 전결을 다시 정하다 - 순조 26년 병술(1826) 7월 5일(을유)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심상규(沈象奎)가 아뢰기를,“변지(邊地)와 연해읍(沿海邑)의 수령(守令)을 문관과 무관으로 교대로 체차하는 것은 곧 법전에 실려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광주(光州)ㆍ순흥(順興)ㆍ삭녕(朔寧)ㆍ봉화(奉化)ㆍ은률(殷栗)ㆍ현풍(玄風)ㆍ낭천(狼川)ㆍ자산(慈山)ㆍ덕천(德川)ㆍ홍원(洪原) 등 10읍(邑)과 능령(陵令) 10과(窠)를 문관의 자리로 정한 것은 곧 문관이 정체된 것을 소통시키는 성의(聖意)였으며, 현저하게 성식(成式)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혹은 다만 묘당(廟堂)에서만 언급(言及)되었고, 전조(銓曹)에서 음관(蔭官)과 무관(武官) 사이에 임시로 옮겨 바꾸고 뽑아 보내는 일은 크게 격례(格例)를 어긴 것입니다. 청컨대 이 뒤로는 한결같이 정식(定式)에 따라 시행하소서.”하고, 또 아뢰기를,“사과(司果)를 구처(區處)함에 스스로 정해진 제도(制度)가 있어서, 원사(元仕)가 도목(都目)에 해당하여 응당 출륙(出六)한 자를 모두 구처하기 전이 아니면, 승전(承傳) 사과(司果)는 법으로 먼저 부직(付職)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양전(兩銓)에서 사과를 구처할 때에 매양 승전이란 것으로써 원사보다 우선으로 하는 폐단이 있는데, 이는 사일(仕日)을 계산하여 서임(敍任) 전천(轉遷)하는 뜻이 아니니, 실로 정한 규제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계방(桂坊) 참하관(參下官)과 같은 경우, 승서(陞敍)가 아니면 시직(侍直)이 부수(副率)로 승서될 수가 없고 세마(洗馬)가 시직으로 승서될 수 없는 것이 또한 이 격례(格例)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혹 한번 어긋나면 뒤에 드디어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데, 근래에는 심지어 세마로서 곧장 부수에 의망하게 되니, 청컨대 이 뒤로는 양전에 신칙하여 잘못을 답습하지 말게 하소서.”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중략>【원전】 48 집 265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재정-상공(上供) / 재정-전세(田稅)[주-D001] 원사(元仕) : 관리의 천전(遷轉)에 참고하기 위하여 계산하는 통상 근무 일수.[주-D002] 을유년 : 1765 영조 41년.[주-D003] 내장(內將) : 내금장(內禁將).
    2021-04-26 | NO.374
  • 이조 판서 박종훈 광주 목사로 보외하다 - 순조 24년
    이조 판서 박종훈ㆍ 참의 홍경모가 스스로 인책하니, 서운히 여기다 결국 보외하다 - 순조 24년 갑신(1824) 9월 11일(경자)이조 판서 박종훈(朴宗薰), 참의 홍경모(洪敬謨)가 아울러 진소하여 스스로 인책하니, 박종훈에게 비답하기를,“경은 단지 일신의 사사로운 의리만 알아서 스스로 인책하는가? 아! 총재(冢宰)의 중함이 어떠한데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백지(白地)에 흔들어서 어려움 없이 손을 대본 것이니, 어찌 불량(不良)한 마음을 품고서 시험해 본 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이는 국가와 진신(搢紳)의 치란(治亂)ㆍ휴척(休戚)에 관계된다고 여기는데, 경이 만약 이로 인해서 스스로 주저하고, 내가 만약 이로 인해서 양해한다면 그가 시험하는 계책에 적중하게 되는 것이니, 어지러움이 날로 생기게 될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깊이 생각하여 시속(時俗)의 예투(例套)를 따르지 말고 즉시 들어와 개정(開政)하라.”하였고, 홍경모에게는 비답하기를,“장전(長銓)의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니, 사직하지 말고 정사에 참여하라.”하였는데 박종훈 등이 소명을 어기자, 전교하기를,“이조 판서에 관한 일은 참으로 서운하다. 이른바 그 사람의 말에 만약 조금이라도 인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예로써 부리는 뜻에 있어서도 나 역시 어찌 강박(强迫)하겠는가? 이는 한 사람의 사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조정의 기상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니, 그 경중과 공사의 구별이 어떠한가? 그런데도 단지 구구한 잗단 혐의에 구애되어 국가의 대체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너무나 미안하다. 이 중신(重臣)이 이처럼 유약(柔弱)할 줄은 몰랐으니,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다시 엄칙하여 패초(牌招)하라. 참의(參議)의 한번 상소는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하나 단지 장전(長銓)을 따라서 변동할 뜻이 없으니, 역시 할 말이 없다. 일체로 엄칙하여 패초하라.”하니, 박 종훈 등이 궐외에서 봉패(奉牌)하고 여러 차례 엄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비답과 칙교(飭敎)를 보았으면 비록 참으로 정세(情勢)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와 한 몸이라는 의리에서 마땅히 변동해야 하는데, 한결같이 봉패하고 미혹을 떨치지 못하면서 단지 일신의 잗단 혐의가 있음만 알고 국체와 왕강(王綱)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저버림이 크다. 이조 판서 박종훈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보외(補外)하고, 이조 참의 홍경모는 법성 첨사(法聖僉使)로 보외하되 당일 밤 안으로 사조(辭朝)하게 하라.”하였다.【원전】 48 집 243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2021-04-26 | NO.373
  •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해 분등하여 초계하다 - 순조 14년
    예조에서 경외에서 의정부에 장보한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해 분등하여 초계하다 - 순조 14년 갑술(1814) 9월 5일(임진)        예조에서 각각 식년마다 경외에서 의정부에 장보(狀報)한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등(分等)하여 초계(抄啓)하였다.<중략>광주(光州)의 고 한량 오차배(吳次培)의 처 백성(白姓), <중략>【원전】 48 집 71 면【분류】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2021-04-26 | NO.372
  • 광주 목사 송지렴 등이 흉년의 실상을 연명하여 상소한 내용 - 순조 9년
    광주 목사 송지렴 등이 흉년의 실상을 연명하여 상소한 내용 - 순조 9년 기사(1809) 12월 4일(기축)       광주 목사(光州牧使) 송지렴(宋知㾾), 순천 부사(順天府使) 조진화(趙晉和), 무안 현감(務安縣監) 서준보(徐俊輔), 무장 현감(茂長縣監) 이윤겸(李允謙),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조(李潮), 부안 현감(扶安縣監) 유원명(柳遠鳴)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신 등은 근밀(近密)한 반열에서 나와 외람되이 하읍(下邑)을 맡았습니다. 진실로 아뢰어야 할 만한 백성의 고통이 있으면 평상시에도 으레 일에 따라 조목조목 진달해야 하는데, 더구나 이렇게 큰 흉년이 들어서 천리(千里)가 적지(赤地)가 되어 만백성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런 때에 한번 유민(流民)들의 그림을 만리(萬里)나 떨어진 계정(階庭) 앞에서 올리지 않는다면, 일로(一路)의 신음하는 정상을 전하께서 어떻게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호남의 기근은 을ㆍ병년(乙丙年)이 가장 극심했다고 일컫고 있는데,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모두들 금년의 흉황(凶荒)이 을병년보다 더 극심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진실로 1백년 동안 없었던 것입니다. 남토(南土)의 경작(耕作)은 오로지 물갈이[水耨]를 숭상하고 있는데, 한전(旱田)을 뒤집어서 가는 것도 또한 물을 끌어대는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는 한전(旱田)ㆍ수전(水田)이 모두 이앙(移秧)을 하지 못했으니, 더구나 한전을 가는 것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른바 이미 이앙한 것과 밭에 심은 각종 곡식도 계속되는 가뭄에 시달리고, 거듭되는 한재(旱災)와 서리를 만나 가을이 된 뒤에는 장포(場圃)가 전부 텅 비어 버렸으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도내(道內)의 진폐(陳廢)된 전지(田地)가 거의 10분의 7, 8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전(旱田)은 으레껏 표재(俵災)에 넣지 않고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또한 어떻게 한결같이 전체가 흉년임을 갖추어 알 수 있겠습니까? 백성 가운데 항산(恒産)이 있는 자가 지극히 적은데 지금은 항산이 있는 집도 한결같이 부황(浮黃)이 들어 조석(朝夕)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니, 더구나 항산이 없는 백성들이야 어떻게 내년까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물을 베어 먹고 풀부리를 캐어 먹으면서 시각(時刻)을 연장시켰습니다만, 지금은 정리(井里)를 떠나 각기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미는 자식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와 결별하였으므로 길바닥에는 쓰러져 죽은 시체가 잇따르고, 떠도는 걸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반드시 흩어져 사방(四方)으로 갈 것입니다만, 사경(四境) 밖도 기근이 똑같으니 또한 어딜 간들 잠시나마 목숨을 연장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원야(原野)를 맴돌면서 아득히 갈 곳이 없으니, 그 경색(景色)이 참담하여 인심이 당황하고 겁에 질려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주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쪽을 돌아보며 애태우시던 끝에 먼저 묘당의 건의에 따라 신속히 우휼(優恤)하는 은전(恩典)을 내리셨고, 이어서 도신(道臣)의 소계(疏啓)에 따라 또 견감시키고 정퇴시키는 은택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대파(代播)하는 경우에는 면세(免稅)를 허락하고 진헌(進獻)에 대해서는 정봉(停封)하게 하였는가 하면, 9만의 재총(災摠)에 대해서는 특명(特命)으로 준표(準俵)하게 하고 환향(還餉)ㆍ신포(身布)도 등급을 나누어 정퇴하게 하였으니, 위에 것을 얻어서 아래에 보태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신 등은 삼가 이미 조령(朝令)을 받들어 덕의(德意)를 선양(宣揚)하였습니다. 이렇게 황황하여 생존하기 어려운 백성으로서 지금 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있습니다만, 환곡(還穀)은 곧 세초(歲初)에 진대(賑貸)할 자본곡이어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신포(身布)는 바로 경외(京外)에서 지방(支放)할 수요(需要)에 들어 있는 것이어서 기한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정퇴시킨 이외에 숫자는 기일 내에 준봉(準捧)하는 것이 신 등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사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주광(黈纊) 아래 한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대저 금년에는 재감(災減)한 것 이외에 전도(全道)의 답결(畓結)이 겨우 5만 결(結)입니다. 이런 5만의 총결(摠結)을 50여 주(州)에 나누어 분배(分配)하면, 1파(把)ㆍ1속(束)이 모두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고 해도 평년(平年)의 가을에 견주어 본다면 감축(減縮)된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5만의 실결(實結)이란 것도 여름서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겪지 않은 재앙이 없어서, 벌레ㆍ서리ㆍ바람ㆍ홍수를 당하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각 고을에서 실결을 잡은 것도 이것이 논에서 말라 죽는 벼 이삭이 아니면 곧 줄기에 달라붙어 있는 쭉정이 낱알인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미루어 본다면, 이른바 답결(畓結)이 5만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명색만 있을뿐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서속(黍粟)과 잡종(雜種)에 관한 밭의 결총(結摠)에 이르러서는 원래가 적은데다가 모두 손상(損傷)을 입어서 전혀 먹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수병(穗秉)의 허비가 이미 이른 가을에 먼저 나버려서 병앵(甁罌)의 저축이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없게 되어 지금은 이미 힘이 고갈되었고 죽음이 박두하였습니다. 비록 가죽을 벗겨 내고 뼛골을 빻는다고 해도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을 실로 판출할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말이 모두들 ‘조가(朝家)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해서 견감(蠲減)시킨 것이 이미 많지 않았는가? 오늘날 창고에 실어다 바치는 것이 내년 봄에 대여(貸與)받을 수 있는 자본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목전에 목숨을 연명할 수가 없는데 앞으로 어느 겨를에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관(官)에서 급하게 독책(督責)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사명(死命)을 재촉하는 것이 될 뿐이다.’ 하니, 그 말이 매우 가긍하고 측은합니다. 신 등이 밖으로는 영곤(營閫)의 책칙(責飭)에 핍박되고, 안으로는 우벌(郵罰)이 목전에 당한 것이 안타까워서 온갖 방법을 다하여 독책하면서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려고 합니다만, 누렇게 부황이 든 몸에 마구 매질을 가하고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집에 닭과 개도 보전할 수 없을 정도로 다그치는 것이 어찌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제 신 등이 담당하고 있는 고을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내년의 환진(還賑)에 대한 접제(接濟)는 모두 새로 받아들이는 환향(還餉)에 의존하고 있으니, 많게는 1만 석, 작게는 수천 수백 석을 뒤따라 거두어 들여야 한다는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고을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또한 이로 미루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연해(沿海) 각처는 대개 우심(尤甚)한 고을이어서 곡부(穀簿)에는 나누어 줄 것이 없는 데가 많고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도 대개는 고갈되어버렸으니, 만일 새로 받아들이는 것을 기다려 장차 진구(賑救)할 것을 의논하려 한다면 각 고을의 기민(饑民)들이 새끼줄에 꿰어 가게에 걸려 있는 고어(枯魚)의 형국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호남의 우심한 34개의 고을에 대해 주야로 헤아려 보았습니다만 구제할 수 있는 계교는 오직 환곡(還穀)의 한 조항 뿐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사소(些少)하니, 참으로 이른바 ‘밀가루 없이 수제비 빚는다.[無麵之不托]’라는 격입니다. 따라서 또한 멀거니 서서 죽는 것을 바라만 볼 뿐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적(糶糴)의 법의(法意)는 본디 수재와 한재를 예비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각 고을의 곡부(穀簿)가 모두 상사(上司)의 지용(支用)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분급(分給)하는 것은 많고 유치(留峙)하는 것은 매우 적은 탓으로, 한번 흉황을 만나면 이렇게 탕연(蕩然)하게 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남쪽 지방의 풍속은 와언(訛言)에 휩쓸려 선동되기 쉬운 탓으로 모두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걱정만 품고 있고, 전혀 삶을 즐기려는 마음이 없어서 양심(良心)을 잃은 관계로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보고 듣기에 경악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 등이 지나치게 헤아리는 우려는 또 오로지 진구하는 한 가지 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유(韓愈)의 말에, ‘하늘이 가뭄을 내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금년의 세전(稅錢)은 모두 백성들의 뱃속에 들어 있으니, 아울러 의당 징수하는 것을 정지해야 합니다.’하였고, 주부자(朱夫子)가 황정(荒政)에 대해 올린 글에, ‘견각(蠲閣)과 진휼은 본디 한가지 일로 수미(首尾)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미 수납(輸納)하라고 추호(追呼)하는 소요를 겪은 연후에 다시 진휼하는 것은 살을 베어내어 입으로 먹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소흥(紹興) 연간에 견감시키고 국고를 풀어 하사한 것이 1백여 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오늘날 남쪽 백성들에 대해서 견정(蠲停)하고 독촉을 중지한 것은 조가(朝家)의 입장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저 어리석고 미련하며 곤궁한 백성들은 아직도 남은 기대가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요순(堯舜)의 백성도 널리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다는 격인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쌀을 풀어서 내려준 송 고종(宋高宗)이 소흥 연간에 시행한 일을 우리 전하께서 호남(湖南)에다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리가 나기전의 접제(接濟)에 대한 방도를 반드시 묘당의 의논이 상의하여 확정지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소식(蘇軾)의 말에, ‘희령(熙寧) 연간의 황정(荒政)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던 것은 구제한 것이 더디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는데, 지금의 사세(事勢)가 조금만 하루라도 늦추게 되면 참으로 헛되이 힘들이고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진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망자(死亡者)가 잇따라서, 이미 각 고을에서는 인구(人口)를 초기(抄記)하여 먹여주기도 하고 가호(家戶)를 계산하여 진구하기도 하여 세전(歲前)까지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있는데, 신포(身布)를 징수해야 하는 것이 원래 이들에게 있으며, 호환(戶還)을 봉납하지 않은 것도 또한 이들에게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진구하여 살리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독책하여 가혹하게 징수하고 있으니, 죽음에서 헤어나려고 한들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을 관리들이 징색(徵索)하는 것은 환곡과 신포 뿐만이 아닙니다. 조세(租稅)와 결전(結錢)을 징색함에 있어 각기 기한이 있는데 전세(田稅)는 정공(正供)이고 대동(大同)은 상부(常賦)로, 봄이 지난 뒤 과징(科徵)을 차례로 시작합니다. 결전(結錢)을 거두어 들이고 어염세(魚鹽稅)를 징수하고 삭포(朔布)를 거두는 것이 모두가 눈앞에 닥친 민역(民役)인데, 삼가 수납(收納)함에 있어 빠지는 것이 많을까 우려됩니다만 신 등은 아득하기만 하여 계획을 세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조가(朝家)에서의 진휼에는 참으로 은혜를 베풀다가 국고가 고갈되는 걱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전에 없는 흉황(凶荒)을 만났으니 비상한 거조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이 위급한 군정(群情)을 진정시키고 이 일로(一路)의 생령(生靈)들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경사(京司)의 전포(錢布)와 아문(衙門)의 저축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쌀을 사서 환곡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이고 연한을 정하여 대여를 허락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계교하여 보건대, 시일이 급박하여 육지로 운송하고 선박으로 실어다 먹이는 것이 시기를 어겨서는 안됩니다. 또 삼가 듣건대, 영좌(嶺佐)의 여러 고을은 곡총(穀摠)이 모두 넉넉하고 연사(年事)도 조금 실하게 되었으며 양서(兩西)의 산군(山郡)에는 조적곡(糶糴穀)이 많이 유치(留峙)되어 있다고 하니, 이제 이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게 하는 것은 우리 전하께서 한번 호령(號令)을 내리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우리 숙묘(肅廟) 임술년에 팔로(八路)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이때 묘향(廟享)과 어공(御供)을 모두 감생(減省)하게 하였으며, 성조(聖祖)께서 손수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린 것이 모두 1천여 마디였는데 지극히 정성스럽고 딱하게 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특별히 영곤(營閫)ㆍ주현(州縣)ㆍ진역(搢驛)에 교서를 내려 보호하고 구활하라는 뜻을 하유하였는데,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우천(愚賤)에 이르기까지 오열하면서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변장(邊將)은 교서(敎書)를 받들고 3일 동안 울고나서 드디어 자기 집의 곡식을 가져다가 사졸(士卒)들을 구제하였으며, 무인들도 또한 곡식을 관(官)으로 실어다 바쳤는지 상(賞)을 사양하고 받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상하가 평안하여 기황(饑荒)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영묘(英廟) 계미년에 국내에서 크게 진구를 시행하였는데, 그때에도 먼저 간곡하고 딱하게 여기는 교서를 내리고 나서 안집사(安集使)를 나누어 보낸 다음 강도(江都)의 쌀과 교제(交濟)의 곡식을 교대로 삼남(三南)으로 옮겼기 때문에 백성이 죽음을 면하였고 마을에 떠돌아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촌야(村野)의 노인들이 아직도 그때의 일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태평한 정치로 다스릴 때인 갑인년의 진구는 멀지 않은 옛날이어서 신 등이 더욱 역력히 진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연분(年分)의 계문(啓聞)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정대(停代)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며, 윤음(綸音)을 반강(頒降)한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곡(錢穀)을 획하(劃下)함에 있어서는 넉넉하고 후한 쪽으로 따르도록 힘썼고, 내탕(內帑)의 저축을 풀고 초목(椒木)을 반하하는 것이 모두 특은(特恩)에서 나왔습니다. 본도(本道)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한 이외에 상공(上供)에 관계되는 모든 민역(民役)은 일체 아울러 정감(停減)시켰으며, 별유(別諭)를 환히 내리고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냈었습니다. 그때 연해(沿海) 고을의 흉황(凶荒)은 도(道)의 절반에 불과했는데도 조가(朝家)에서 구휼하는 방도는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성인이 인심을 감복시키는 방법은 또한 진심을 담은 사교(辭敎)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법이 똑같았습니다.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일정 일사(一政一事)를 번번이 조종(祖宗)을 법받으시는데, 더구나 늦추어서는 안되는 민사(民事)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계술(繼述)해야 될 것이, 돌아보건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즉시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풀어서 하사할 수 있는 전포(錢布)와 옮길 수 있는 곡물에 대해 속히 구획(區劃)하게 함으로써 죽어가는 백성의 목숨을 회생시키게 하여 주소서. 이어 또 계속하여 덕음(德音)을 반하하여 일로(一路)로 크게 하유하되, 저 누더기를 입은 바짝 마른 부류들은 정구(庭衢)에서 마주 대한 것처럼 하고 집에서 울고 들에서 통곡하는 정상을 지척 앞에 임어하여 보는 것처럼 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하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하여주는 것처럼 한다면, 백성은 본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神)스러운 것이므로 받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가까이하는 말을 듣고서 그 누구인들 감히 지성으로 감격하고 우러러 흐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의뢰(依賴)하는 것이 있으니 무슨 흩어지는 것을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견정(蠲停)이 이미 넉넉하고 진급(賑給)에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덕의(德意)로 회유(懷柔)하고 혜정(惠政)으로 오게 한다면 죽은 목숨을 살리고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은택이 비로소 극진한 것이 되는데, 대저 흉황을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하니, 비답하기를,“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大臣)의 집으로 가서 사리를 논하여 초기를 올리라.”하였다. 대신이 이에 앞서 구획하였으므로 다시 재처(裁處)를 일삼을 것이 없다고 하니, 버려두게 하였다.【원전】 47 집 644 면【분류】 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농업(農業) / 호구(戶口) / 역사-고사(故事)[주-D001] 주광(黈纊) : 주광은 누런 색의 솜을 둥글게 뭉쳐 관의 양끝에 다는 것으로, 임금이 요긴하지 않은 말까지 지나치게 듣는 것을 막는 뜻을 지녔음.[주-D002] 유치(留峙) : 환곡(還穀) 등을 방출하지 않고 쌓아두는 것.[주-D003] 소흥(紹興) :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임.[주-D004] 희령(熙寧) :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임.[주-D005] 임술년 : 1682 숙종 8년.[주-D006] 계미년 : 1763 영조 39년.[주-D007] 갑인년 : 1794 정조 18년.
    2021-04-26 | NO.371
  • 암행 어사 이면승이 서계하여 호남의 사정을 아뢰다 - 순조 8년
    전라좌도 암행 어사 이면승이 서계하여 호남의 사정을 아뢰다 - 순조 8년 무진(1808) 8월 6일(기해) 전라좌도 암행 어사 이면승(李勉昇)이 서계하여, 금산 군수(錦山郡守) 조영경(趙榮慶), 전 군수 유한기(兪漢紀), 전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계(李㬖), 전 광양 현감(光陽縣監) 김종철(金宗喆), 전 보성 군수(寶城郡守) 권사억(權師億), 전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병원(林秉遠), 전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주현(李周顯),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윤명렬(尹命烈), 정읍 현감(井邑縣監) 윤택렬(尹宅烈), 전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의수(李義秀), 진안 현감(鎭安縣監) 이희찬(李羲贊),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건식(李健植), 전 운봉 현감(雲峰縣監) 신순(申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치성(閔致成), 무주 부사(茂朱府使) 이영수(李英秀), 순천 부사(順川府使) 임후상(任厚常), 곡성 현감(谷城縣監) 이종명(李宗明)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아울러 경중에 따라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또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광헌(李光憲), 옥과 현감(玉果縣監) 윤정진(尹定鎭)의 치적을 말하니, 아울러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별단(別單)을 올려 환곡(還穀)을 고가(高價)로 집전(執錢)하는 일, 민고(民庫)의 곡식을 함부로 내주는 일, 군정(軍丁)을 수괄(搜括)하는 일, 대동(大同)을 저축해 두었다가 획급(劃給)하는 일, 통곡(統穀)을 변통하는 일, 훈국의 대변선(待變船)에 대한 일, 금산(錦山)의 무세(貿稅)에 대한 일, 봉산(封山)의 송정(松政)에 대한 일을 말하고, 또 전 전주 부사(全州府使) 이여절(李汝節), 전 승지 이주현이 향리에 살면서 불법을 행하는 일을 말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데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면승을 소견하고 말하기를,“호남 한 도는 민속(民俗)과 물정(物情)이 어떻던가?”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이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어서 다른 것을 돌아볼 틈이 없는데, 어떻게 민속이 좋은지의 여부를 논하겠습니까? 환곡과 민고(民庫)의 폐단을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한 도가 장차 텅 비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민고의 폐단이 어떻던가?”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1년 동안 쓰는 것을 모두 백성들에게 거두어 민고에 맡기는데, 조관(照管)할 바가 없어서 해마다 함부로 내주니,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광주 목사 윤명렬은 우도에서 서계하여 치적(治績)을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였으니, 어찌하여 현저하게 다른가?”하니, 승지 김이영(金履永)이 말하기를,“듣는 것과 보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한 도 가운데 크게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은 누구인가?”하니, 이면승이 말하기를,“광양 현감 김종철이 크게 불법(不法)하였기 때문에 이미 봉고 파직(封庫罷職)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보성군(寶城郡)에서 환곡(還穀)을 파양(簸揚)한 것은 조정의 연석(筵席)에서 탕감하라는 명이 있었다.”하자, 이면승이 말하기를,“보성의 백성들은 이러한 드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반드시 고무(鼓舞)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보성에서 환곡을 파양하여 축난 쌀이 3천 8백 석 영이었다고 도신이 장문하니, 임금이 나라의 곡식이 비록 중하다 하나 민폐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탕감해 주라고 하교하였다.【원전】 47 집 608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농업-임업(林業)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구휼(救恤)
    2021-04-26 | NO.370
  • 광주 이의우 등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무오(1798) 11월 30일(기축)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자리에 계시면서 온 나라를 덕으로 함육하셨는데, 대개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 정사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으며, 오래 사는 공효의 바탕으로 삼았다. 크고도 높은 공으로 크게 무궁한 터전을 닦으셨는데, 태세성(泰歲星)이 한 바퀴 돌아서 예전의 그 기미년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공경히 이어받아 그 빛나는 위업을 만분의 일이나마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농사를 지어 살아간다. 그러니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곡식이 없게 되니, 백성들이 곡식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겠는가. 나 자신이 먹는 것은 줄일 수 있지만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게 할 수는 없으니,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그 책임이 농사를 잘못 짓는 데 달려 있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지 않으면 어찌 가을걷이할 것이 있겠는가.백성들이 농사지음에 있어서는, 비록 천시(天時)를 따라야 하나 마땅히 지리(地利)를 다하여야 하며, 비록 지리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오행(五行)이 교대로 운행하는 것을 따르고 사계절에 붙어 왕성하는 토(土)의 성질을 체득하여 흙에 의지해 농사짓는 것이 백성들의 사명(司命)인바, 밭에서 일하는 수고로움이 또한 많다. 거름을 져내는 수고와, 물을 대는 수고, 호미질하여 풀뽑는 수고, 밭갈이하는 수고, 씨뿌리는 수고, 김매고 북돋아 주는 수고, 들밥 나르는 수고, 짐승 기르는 수고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1백 일은 족히 수고하는데다가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또 이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수고와 타작을 하는 수고가 있다. 그러나 수고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따라 풍년이 드느냐 흉년이 드느냐가 결정되니 아, 우리 농민들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옛날에 주부자(朱夫子)가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에서 관리가 되었을 때 산골에서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새로 빚은 술을 마주하고 ‘곡식을 적기에 수확할 것에 대한 시[銍艾中熟之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대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고하는 자는 백성들이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아전들이다. 백성들이 수고하고 있는데 관리들이 어찌 감히 편안히 지내겠는가.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산으로 덮이고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며 기름진 들판이 많아 본디부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한 지역이라고 칭하여 왔다. 그런데도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고 게으른 습속이 있으며, 권농관(勸農官)은 제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수재나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어째서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농사짓는 근본은 부지런함과 수고함에 달려 있는데, 그 요체는 역시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고 농작물을 토질에 맞게 심으며 농기구를 잘 마련하는 것뿐이다. 이 세 가지가 그 요체인데, 그 가운데서도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 첫번째를 차지한다. 《주역(周易)》에서 수(水)와 지(地)가 합쳐진 것이 비괘(比卦)이고 지와 수가 합쳐진 것이 사괘(師卦)가 되는데, 이것이 정전법(正田法)의 기본 원리이다. 토질에 잘 맞게 하고자 한다면 물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류(公劉)가 황무지에 살다가 황간(皇澗)을 끼고 있는 곳으로 옮겼고, 태왕(太王)이 서호(西滸) 가에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농삿일에 밝은 원성(元聖)도 먼저 장인(匠人)을 두어 크고 작은 수로를 만들었으며, 이를 《주관(周官)》에 기록하였다. 위(魏)나라에는 이회(李悝)가 만든 하천이 있었고,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이 있었으며, 한(漢)나라에는 문옹(文翁)의 못이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위단(韋丹)의 못이 있어서 물을 끌어 저축해 놓았다가 이것으로 밭에 물을 대었다. 그리하여 비록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더라도 6, 7월에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랐다.그런데 지금은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 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 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 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 지방의 칠리(七里), 관동 지방의 순지(蓴池), 해서 지방의 남지(南池), 관서 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 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 않고 막을 때 막지 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 오늘날의 커다란 계책으로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큰 제언들을 먼저 손보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으며, 이를 미루어 나가서 모든 일을 골고루 베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 도로 하여금 각자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다 바치게 한다면 정성과 노력이 이르는 바에 따라 그 효과가 금방 드러날 것이다.그리고 수리의 효과는 토질의 적절함과 서로 잘 맞은 뒤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평평한 땅과 습한 땅, 밭두둑과 밭고랑은 각각 등급이 다르고, 늦벼와 올벼, 기장과 조는 성질이 다르며, 습한 땅에는 벼가 잘 자라고 마른 땅에는 오이를 심는 법이다. 빈(豳) 땅 사람들은 밭을 새로 일구어서 보리를 심었고, 기(岐) 땅 사람들은 잡초를 베고 밭을 갈았으며, 온(溫) 땅 사람들은 보리를 중하게 여기고 낙(雒) 땅 사람들은 벼를 중하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 《시경(詩經)》에서 읊고 있는 것이다. 벼는 높고 건조한 땅에 심고 기장은 평평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는가 하면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 명산(名山)은 대부분 화전(火田)으로 일궈졌으나 곡식은 흔해지지 않고 있다. 남쪽 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이 북쪽 지방에는 적당치 않으며, 산골짜기에 잘 자라는 것이 들판에서는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남쪽 지방이나 북쪽 지방이나 농사짓는 방법이 똑같고 언덕과 습지를 구별하지 않고서 이앙법(移秧法)만을 위주로 하고 씨를 심는 자가 드무니, 세상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의 이해가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해로운 점이 둘일 경우 이로운 점은 한 가지가 될 뿐이다. 이에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드는데, 이는 어느 곳이나 다 그러하다.농기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어두워서 복희씨(伏羲氏)나 신농씨(神農氏) 시대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시경》에 나오는 창고나 풀 베는 기구가 진실로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단지 그 가운데서 긴요한 것만 말한다면, 수차(水車)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며, 대바구니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방아는 곡식을 찧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돌아보건대, 그 일을 제대로 해서 그 이익을 다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느니 농사지어 보아야 굶기만 할 뿐이라느니 한다면, 이는 나무를 거꾸로 심어놓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구공(九功)으로 독려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하여 도롱이를 입고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다 각자의 힘을 다하게 하고 지혜를 다 쓰게 하여서, 밭은 개간되지 않은 곳이 없고 개간된 밭에는 씨뿌리지 않은 곳이 없으며, 씨뿌린 곳은 먹지 못하는 곳이 없게 한다면, 《관자(管子)》에 이른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부지런한 데 달렸으니 부지런하면 굶주리지 않는다.’고 한 것과, 《위지(魏志)》에서 이른바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면 풍년드는 해가 자주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될 것이다.내가 일찍부터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제적인 데 힘쓰는 정사에 뜻을 두고 농서(農書)를 편찬하여 여러 주와 군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서로 다르고 풍토(風土)가 똑같지 않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을 고르게 하기 어렵고 일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서, 획일적으로 정하여 놓고 그것만을 지키게 할 수가 없었다. 대궐은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좋은 방책을 진달하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절충해 쓸 것이니 그런즉 농가(農家)의 대전(大典)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무릇 농삿일이란 위로 중성(中星)에 속하고 겉으로는 기운(氣運)과 잘 맞아야만 하는 법이다. 축월(丑月)의 중간은 대한(大寒)의 절기로서 토(土)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미월(未月)의 중간은 대서(大署)의 절기로서 토를 습하게 하는 태음(泰陰)의 기운이 비로소 생겨나니, 축월이 미월과 더불어 상대되어서 토가 비로소 용사(用事)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미 지나간 일은 뒤쫓기 어려움을 개탄하고 앞으로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일으키고 농부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일찍 서두르는 것이니, 어찌 새봄이 오기를 기다려 교서를 내리겠는가. 오늘은 축일(丑日)이고 내일이면 축월(丑月)이 된다. 미시(未時) 정각에는 절기가 교대로 이르니 토우(土牛)를 빚어놓고 풍년들기를 기원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 더구나 전의 공적을 일으키기를 도모하고 그때의 날과 달을 따르는 것이 실로 내가 선왕의 뜻을 우러러 이어받는 한 가지 일이 되는 데이겠는가.아, 경외(京外)의 대소 관료와 백성들은 모두 다 모름지기 잘 듣고 알도록 하라. 농삿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의 견해가 있으면, 상소를 올리거나 책으로 엮거나 하여, 서울은 묘당에 바치고 지방에서는 감사에게 바치라. 그리고 이속(異俗)에 빠지거나 예전 방법에 구애되지 말고, 바닷가와 산골,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에 맞추어서 각자 마땅한 방법을 진달하라.사람들의 계책이 진실로 훌륭하면 능히 하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풍년을 내려 곡식을 많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쌀밥을 먹고 태평 세월을 누리게 된다면, 이것은 우러러 우리 선왕께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농정에 힘쓴 훌륭한 덕과 지극한 사랑에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나 소자(小子)의 씨뿌리고 수확하는 데 대한 지극한 정성과 애달픈 마음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농정(農政)을 일으키고 농서(農書)를 한 곳으로 모으려고 하는 것은 농부들이 가을 수확을 고대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다.내가 즉위한 지 22년 째 되는 해 축월(丑月)이 되기 하루 전날인 기축일(己丑日) 미시 정각에 교서를 내린다.”하였다.이에 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린 자가 27인이었는데, 충의위 배의(裵宜), 홍주(洪州)의 유학 신재형(申在亨), 전 동지(同知) 김천숙(金天肅), 대구(大邱)의 유학 유동범(柳東範), 부호군 복태진(卜台鎭), 영암(靈巖)의 유학 정시원(鄭始元), 전 감찰 이우형(李宇炯), 수위관(守衛官) 윤보(尹溥), 전 영(令) 염덕우(廉德隅), 수위관 유종섭(劉宗燮), 전 찰방 강요신(康堯愼), 전 충의(忠義) 장지한(張志瀚), 전 순릉 참봉(純陵參奉) 이상희(李尙熙), 부사과 이인영(李仁榮), 전 군수 윤홍심(尹弘心), 신계(新溪) 유생 정석유(鄭錫猷), 순장(巡將) 정도성(鄭道星), 전라 도사 김하련(金夏璉),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경오(李敬五), 삼가(三嘉) 유학 정응참(鄭應參), 언양(彦陽) 유학 전만(全萬), 후릉 영(厚陵令) 김응린(金應麟), 전 동지 김양직(金養直)ㆍ최세택(崔世澤), 상주(尙州) 유학 이제화(李齊華), 순안(順安) 진사 김치대(金致大)였다. 전 지평 윤재양(尹在陽) 역시 시무 상소(時務上疏)를 올리면서 농정(農政)에 대해서도 덧붙여 진달하였다.농서(農書)를 올린 자는 40인이었는데, 남원(南原) 유학 장윤(張)ㆍ허호(許顥)ㆍ허질(許耋)ㆍ노익원(盧翼遠), 공주(公州) 생원 유진목(柳鎭穆), 공주 유학 임박유(林博儒), 양주(楊州) 유학 안성탁(安聖鐸), 서울에 사는 서민 이필충(李必忠), 홍천(洪川) 유학 이광한(李光漢), 고성(高城) 유학 권현(權炫)ㆍ노재황(盧再煌), 흡곡(歙谷) 유학 조지영(趙之榮)ㆍ정치일(鄭致一)ㆍ표헌정(表憲正), 보은(報恩) 유학 이동응(李東膺), 덕산(德山) 유학 이의주(李宜璹), 수원(水原)의 절충(折衝) 원재하(元在夏), 정산(定山) 유학 김훈(金勳), 서울에 사는 유학 이만록(李晩菉), 교하(交河) 유학 이문철(李文哲), 나주(羅州)의 유학 나민휘(羅敏徽)ㆍ나학신(羅學愼), 순창(淳昌) 유학 신보권(申輔權), 영광(靈光) 진사 이대규(李大奎), 전주(全州) 유학(幼學) 김상직(金相直)ㆍ이여효(李汝孝)ㆍ송상휘(宋相彙)ㆍ이장렬(李章烈), 진안(鎭安) 유학 박종혁(朴宗赫), 고부(古阜) 유학 박도흠(朴道欽), 능주(綾州) 진사 남익(南熤), 광주(光州) 진사 이의우(李宜), 유학 박문찬(朴文燦)ㆍ정윤국(鄭潤國), 무장(茂長) 유학 강석운(康錫運)ㆍ강순(康洵), 남원(南原) 전 현감 장현경(張顯慶), 장련(長連) 진사 박재설(朴載卨), 해주(海州) 유학 김호(金皓)ㆍ이훈(李薰)이었다. 우배의(裵宜)의 상소에 아뢰기를,“농사에는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전에는 곡우(穀雨)에 씨를 뿌리고 하지에 모내기를 하였으니 농사철이 오히려 일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곡우와 하지 두 절기보다 먼저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늦다고 여깁니다. 이에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일찍하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두 번째는 보리가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점이 벼 못지 않은데, 사람들은 보리를 밭에 심는 것만 좋은 줄 알고 논에다 심는 것도 좋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릇 논은 추수한 뒤에는 그대로 빈 땅이 되어버리는데 빈 땅으로 되었을 때 물을 빼내고 건답(乾畓)을 만들어서 수만 평의 논에 모두 보리를 심었다가 보리를 수확한 뒤 곧바로 모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혹 벼가 가을에 제대로 여물지 않았을 경우에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세 번째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돕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경우에는 밭갈고 씨뿌릴 철에 소와 종자가 없어서 농사를 못짓는 자가 많습니다. 이러 병통을 고치자면 고을의 수령들이 면이나 리의 부로(父老)를 골라 뽑아서 그들에게 권농관(勸農官)의 책임을 지운 후 각기 면과 리의 부자와 가난한 자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든 다음 부자로 하여금 종자 곡식을 내어 가난한 자에게 꾸어주게 합니다. 면이나 리에 부자집이 없을 경우에는 관청에서 곡식을 내어주었다가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부자는 손해가 없고 가난한 자는 의지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엄하게 하면 소가 저절로 흔해질 것입니다.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수령들에게 달렸는바, 수령들을 적임자로 임명하기만 하면 농사에 힘쓰는 것은 그 가운데서 저절로 될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농정(農政)에 대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듣고자 해서 특별히 교서를 내려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나의 말이 사리에 어두워서 합당치 않다고 말하지 말라. 현재의 급선무 가운데 어찌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교서를 내린지 여러 날이 되도록 의견을 개진하는 상소가 올라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었다.너는 공신(功臣)의 후손으로서 교서에 응하여서 조목별로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모두가 실용에 적당한 것이었다. 씨뿌리기와 모내기를 반드시 일찍해야 한다는 말과, 벼가 혹 미처 여물지 않더라도 보리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부자가 종자와 식량을 내어 꿔주었다가 가을에 도로 받아들이며 또 면이나 리의 부로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권농관의 책임을 지우라고 한 것 등은 모두가 정확히 보고 충분히 헤아려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죽은 말 뼈다귀를 사서 천리마를 구한다는 뜻에서 가장 먼저 의견을 개진한 사람을 가상히 여기고 포상해야 마땅하겠으나, 혹 말하려고 하던 자들이 이를 혐의스럽게 여겨 물러나버릴까 염려되기에 우선은 교지를 내리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물러가서 묘당에서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사실대로 다 말하라.”하였다. 신재형(申在亨)의 상소에 아뢰기를,“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되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됩니다.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는바,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하는데,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됩니다. 백성들을 농사에 힘쓰도록 이끌고 농삿일을 절기에 맞추도록 힘쓰는 것은 오로지 다음해인 기미년에 있습니다.대개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나서 지리(地利)를 다 이용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고 나서 천시(天時)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맞는 것을 잘 살피며, 농기구를 잘 정비하는 것이 모두 사람이 응당 하여야 할 일들입니다. 천시(天時)에 있어서는 3년 동안 가뭄이 들고 3년 동안 홍수가 지며, 10년에 한 차례 크게 가뭄이 들고 10년에 한 차례 크게 홍수가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가뭄의 피해가 홍수의 피해보다 더 심하니, 우리 나라는 논이 많아서 일단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농민들이 속수 무책입니다.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모판을 만들었다가 모내기를 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기성(箕聖)이 처음에 정전법(正田法)을 가르친 때부터 높고 건조한 곳은 마른 땅에 씨를 심고 낮고 습한 곳에서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일러 마른씨뿌리기[乾播], 물씨뿌리기[水播]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기부터 비로소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이 생겨났습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이앙법은 임진 왜란 때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 법이 한 번 유행되자 농사를 망치는 백성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절기가 곡우 때가 되어서야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데 이때 만약 가뭄이 들면 아무리 부지런한 농사꾼이더라도 매번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다가 시기를 놓친 다음에야 볍씨를 뿌리게 됩니다. 또 하지 때에 가서는 모내기를 할 수 있지만 하늘이 이때에 가뭄을 내리면 번번이 비가 적은 것을 걱정하는데, 한 번이라도 제 시기를 놓치기만 하면 농사를 망치고 맙니다.씨를 심는 부종법(付種法)의 경우에는, 겨울에 쌓인 눈이 녹고 봄비가 촉촉히 내릴 때에 올벼는 일찍 심고 늦벼는 늦게 심으며, 마른 땅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고 물이 있는 곳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므로, 종자가 싹트고 줄기가 서는 데 있어서 가뭄과 홍수가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만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매는 데 있어서 이앙법의 경우에는 두어 차례만 김을 매주면 그만이지만 부종법의 경우에는 적어도 3, 4차례 이상 매주어야만 합니다. 부유한 백성들은 토지를 겸병(兼幷)하여 농사를 많이 짓고자 하여 적게는 3, 4석씩, 많게는 6, 7석씩을 한꺼번에 모를 부어 노동력을 줄이고 한꺼번에 모내기를 하여 수고를 줄입니다. 그리고 비록 가뭄을 당하더라도 좋은 논이 많으므로 수확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의 경우에는 모를 붓고 모내기하는 것을 맨 나중에야 하게 되므로 가뭄이 들거나 흉년을 만나면 입에 풀칠할 길이 없습니다.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년부터 모 붓는 법을 폐지하고 부종법을 쓴다면 비록 한때의 수고로움은 있을지언정 한 해 동안 먹을 것은 넉넉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좋아하고 영구적인 계책은 세울 줄을 모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삼농(三農)의 일에 힘쓰고자 하신다면 만대를 두고 전해질 법을 세우소서.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이미 있는 큰 제언(堤堰)부터 착수하여야 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대개 산에 가까운 곳은 제언을 만들어서 물을 가두고, 들에 가까운 곳은 보(洑)가 있어서 물을 끌어대며, 바다에 가까운 곳에서는 제방을 쌓아서 바닷물을 막습니다. 이 둑과 보, 제방 세 가지는 수리(水利)를 일으켜서 가뭄과 재앙에 대비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뒤섞여 있고 호수와 바다를 낀 고을들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데, 옛사람들이 수축해놓은 것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은 모래에 막히고 보는 돌에 파괴되고 제방은 조수에 무너졌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를 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약 제언사(堤堰司)에서 감사와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의 힘을 들여 초봄에 역사를 시작하여서 물을 끌어다 채우게 하되, 혹 부지런히 하지 않을 경우에는 고과(考課)하여 징계합니다. 또 새로 쌓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늠료(廩料)를 출연하고 인력을 내어 역사를 시작하며, 그러고서도 또 힘이 모자라면 국곡(國穀)을 내어 공사를 끝내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출연하고 힘을 내어 백성들이 그 이익을 입게 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상을 내려서 다른 백성들을 흥기시키는 방도로 삼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산간 고을이나 바닷가 고을이 어찌 올해와 같이 크게 흉년이 들겠습니까.토질에 잘 맞는 것을 살피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하교하시기를 ‘남쪽 지방에 잘 맞는 것은 북쪽 지방에 맞지 않고 산골짜기에서 잘 자라는 것은 들판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토질을 잘 살피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조그마한 땅뙈기마저 모두 다 양안(量案)에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들판이 지금 혹 묵어가고 넓디넓은 습지가 지금 혹 버려진 채 있으니, 누군들 그것을 개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봄에 개간을 하여 경작하기만 하면 가을에는 세금을 매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을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개간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에게 개간하게 하고, 경작할 만한 토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한 다음, 토질이 기름지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서 세금의 많고 적음을 정하되, 6, 7년이나 혹 4, 5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넓은 은혜 아래에서 배부르고 따스히 지내게 한다면, 토질에 맞는 것을 살피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부연 설명한 ‘무(戊)와 기(己)는 천간(天干)의 토(土)이고 축(丑)과 미(未)는 지지(地支)의 토인데, 천간과 지지가 합하여 기미(己未)가 되었으니, 기와 미는 모두 토에 속한다. 토는 농사의 근본이 되고, 농사는 먹는 것의 근본이 되며, 먹는 것은 백성들의 근본이 되고,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이 된다.’라는 말은 이치를 잘 터득한 것으로서 참으로 취할 만한 말이다. 그리고 ‘기성(箕聖)께서 처음 정전법을 가르친 때부터 마른 땅에는 마른 대로 씨를 뿌렸고 습한 땅에는 물을 대고 씨를 뿌렸는데, 우리 조선조에서 마른씨뿌리기니 물씨뿌리기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앙법이 유행되자 농사를 망친 사람이 많다. 그러니 내년 기미년부터 모 붓는 것을 폐지하고 부종법(付種法)을 행하면 그 이익이 클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요즈음 묘당에서 강구하고 있는 계책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따르게끔 할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게끔 할 수는 없으며, 또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은 생선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뒤흔들면 옛날의 훌륭한 법을 본받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니, 지나친 것을 제거하는 방도는 감사나 수령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그리고 ‘산 가까운 곳에는 제언이 있는데 물을 가두기 위한 것이고, 들판에 가까운 곳에는 보가 있는데, 보는 물을 끌어대기 위한 것이며,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는 제방이 있는데 제방은 바닷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산과 들판을 낀 고을들이 수놓은 것처럼 섞여 있고, 호수와 바닷가의 고을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 곳마다 옛사람들이 수축해 놓지 않은 곳이 없지만, 제언은 모래가 쌓여 묻히고 보는 돌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제방은 조수에 의해 무너졌다. 작은 곳은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큰 곳은 관가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초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수리하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하여 고과할 때 성적을 매긴다. 예전에는 쌓지 않았으나 지금은 쌓을 만한 곳은 또 공곡을 내어 역사를 마친다. 혹 재물을 출연하여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입히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특별히 포상한다.’고 한 것도 적절한 의견이라고 할 만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초기(草記)를 올리게 해서 개간하기 전에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하겠다.또 ‘묵고 버려진 땅을 누군들 개간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봄에 개간하여 농사지으면 가을이면 곧바로 세금을 매긴다. 이렇게 하면서 토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이 모여 살게 하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개간하고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함에 따라 세금의 높낮이를 정하며, 6, 7년이나 4, 5년 동안을 기한으로 해서 입을 것 없고 먹을 것 없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따스하고 배부르게 지내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3년 동안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차등을 두어 속전(續田)으로 등급을 내려주는 뜻이다. 얼마 전에 영남 지방에 이런 뜻을 알린 일이 있는데, 근래에 과연 성과가 있었는가? 끝부분에서 진달한 조항과 함께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제언과 보ㆍ제방을 수축하라고 신칙하는 일에 있어서는,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며,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조사해서 고과에 반영하라.’고 한 그의 말은, 바로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힘을 빌리고 관에서 인력을 동원하는 가운데에는 또 자연히 얼마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작지 않은 역사를 일으킨 곳에는 으레 반드시 힘을 들여서 해마다 수리해야 합니다. 먼저 각 고을의 제언과 보ㆍ제방 가운데서 많은 이익을 주면서도 심하게 무너지거나 막힌 곳을 각각 몇 군데씩 정한 다음, 천 명이나 만 명의 백성을 동원해야 될 곳에 대해서는 진휼할 곡식으로 떼어놓은 곳 가운데서 몇 석을 떼내어 양식으로 삼은 뒤 날짜를 따져서 기어이 완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실로 흉년에 공사를 일으키는 정사에 합당한 것이며, 장정들이 여기에서 품삯을 받아 먹으면 필시 진구할 대상자가 줄어서 민간에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에도 기대 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이런 내용으로 삼남(三南)의 감사에서 분부하여 수령들과 직접 의논한 다음 수축하기에 합당한 곳을 즉시 계문하게 하고, 반드시 얼음이 풀린 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맞춰 모두 공사를 끝내게 하며, 그에 대한 상황을 본사(本司)에 치보하게 합니다. 그러면 본사에서 품지(稟旨)하여 각별히 농삿일을 잘 알고 수리(水利)에 해박한 사람을 택하여 이들을 나누어 보내어 살펴보게 하겠습니다.그리고 예전에는 수축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수축할 만한 곳에 대해서는, 십분 의심이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영을 내려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대소 민인(民人)을 막론하고 형편을 보아서 공사를 이룬 자가 있다면 그 가상함이 어찌 재물을 출연하여 진휼을 보탠 공에만 그치겠습니까. 감사가 그런 사람을 계문하면 특별히 논상해야 합니다.수령들의 업적을 고과하는 것은 본디 수령 칠사(守令七事)를 따지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농정은 칠사 가운데서 으뜸을 차지하는바, 농사를 장려한 것을 가지고 고과를 하는 것은 바로 법의 본뜻입니다. 이 뒤로는 먼저 농정(農政)의 우열(優劣)을 기록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정사를 기록하라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여 알려야 합니다.대개 이 제방의 수축에 대한 일은 삼남 지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 다른 여러 도에서도 똑같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기와 관동ㆍ관서ㆍ관북 지방은 사정이 각각 조금씩 다르니 이 복계(覆啓)한 내용을 간추려서 알려야 하겠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유동범(柳東範)의 상소에 아뢰기를,“신은 단지 영남 지방 일대에서 보고 들은 것만을 가지고 진달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농사에 재앙을 끼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뭄이 가장 큰 재앙이 되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환곡을 나눠주는 것이 균등치 않아서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생업을 잃고, 첨정(簽丁)이 많이 숨어 있어서 잔약한 농민들이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 일군 토지에 대해 세금을 정하여서 개간하는 면적이 넓지 못합니다. 벼는 습한 땅에 맞고 기장은 마른 땅에 맞으며, 목화는 햇빛을 좋아하고 삼은 비를 좋아한다는 등의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농사꾼들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요체가 되는 것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제언과 못을 깊게 파내는 것, 물을 절도있게 쓰는 것, 가축을 번식시키는 것, 환곡을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것,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어 신역을 부담시키는 것, 새로 개간한 밭에는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근년에 들어서 해마다 가뭄이 들고 있는데, 사람들은 하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은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여름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겨울에는 반드시 눈이 내리나 때때로 가물 때도 있으며, 또한 겨울에 이미 눈이 내렸는데 봄에 또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이 녹은 물과 비가 고인 물을 한 국자도 낭비하지 않고 가는 물줄기까지 모두 가두어 둔다면, 겨울과 봄 5, 6개월 동안에 받은 물로 여름 3개월 간의 가뭄을 막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언과 못은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깊기 때문에 물을 가둔 것이 많았고, 많았기 때문에 가뭄을 막기에 넉넉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뚝을 쌓은 것이 점점 깍여지고 흘러든 모래가 쌓인 것이 몇 천 섬이나 되는데도 10년 동안에 한 번도 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검지(恭儉池)는 예로부터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도 마르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가문 지 몇 달도 안 되어서 물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단지 바깥만 수축하고 안을 파내지 않은 탓입니다. 안을 파내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어떤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의 힘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에는 관가에서 다른 제언의 물을 받아쓰는 백성들을 조발하여 힘을 합하여 함께 쳐내게 해야 합니다. 이 제언을 쳐낸 다음에는 다른 제언을 쳐내며, 해마다 반드시 한 차례씩 쳐내되 깊게 파내도록 하며 파낸 흙으로는 그 제방을 더 쌓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제언이 어찌 깊어지지 않겠으며, 물이 어찌 많아지지 않겠으며, 가뭄이 어찌 재앙이 되겠습니까. 이른바 제언과 못을 깊이 쳐낸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대체로 백성들은 생각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여 가뭄이 들었을 때에 한 국자의 물도 얻지 못하다가도 비가 조금 내리기만 하면 아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미 땅이 젖었는데 물을 가두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무릇 논에서 이미 수확을 한 뒤에도 물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봄에 미쳐 갈아 엎기에 급급하므로 차례차례 물을 뽑아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언을 쌓았을 경우에는 참으로 터진 곳을 수리하여 물을 가두어 두어야만 합니다. 여름철에 모내기할 때를 당하여서는 하룻 동안만 물을 대면 4, 5일 간의 가뭄을 견뎌내기에 충분하니, 아침에 물꼬를 트고 저녁에 막고 다시 4, 5일이 되기를 기다려서 물꼬를 틉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야지 한결같이 모두 쏟아버려서 이곳에는 물이 남아돌고 저곳에는 남는 물이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물을 씀에 있어서 절도가 있게 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무릇 농사짓는 데 있어서는 깊게 가는 것이 중요한데, 깊게 가는 것은 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법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에는 소가 없는 탓에 밭갈이를 못하는 자가 10에 5, 6은 됩니다. 그리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반드시 소가 있는 자를 먼저 장부에 올려 그로 하여금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거듭 밝힌 다음 한 통(統) 내에서 재물을 합하여 소를 마련하게 하고, 3, 4년에 한 차례씩 고치는 것을 허락해주며, 또 환곡을 받아들일 때 소를 팔아서 곡식을 납부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장차 사람마다 모두 소를 소유하여서 모두들 깊게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가축을 번식시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물이 풍족하고 소가 있는데도 오히려 농사짓지 못하는 것은 농사철 동안의 양식이 없어서입니다. 환곡은 본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고르게 먹게 하기 위한 것으로, 봄에 고르게 받아가게 하므로 가을에 거두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자 백성은 하나도 환곡을 받지 않고 있으니, 가난한 백성이 치우치게 많이 받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치우치게 받아 먹으면 곤궁하게 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하며, 곤궁하게 되면 농사를 망치는 것 역시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비단 호별(戶別)로 내주는 환곡뿐만 아니라 전결(田結)에 따른 환곡도 있는데, 가난한 자는 전결이 없으니 이치상 당연히 환곡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양호(養戶)를 하는 간사한 백성이 많이 있는바, 가난한 백성에게 전결에 따른 환곡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받아들이기를 일시 중지한 묵은 환곡이 있을 경우 비록 한 해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쌓인 환곡을 갚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양호(養戶)를 하거나 부자를 빼어놓는 폐습을 통렬히 혁파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의 환곡이 줄어들 것이며, 이웃집에서 징수하거나 소를 팔아 내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른바 가난한 자와 부자에게 환곡을 고르게 나누어 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예전에는 군포(軍布)가 2필이던 것이 지금은 1필로 되었으니 백성들이 더욱 넉넉해져야 마땅한데 도리어 더욱 가난해진 것은 어째서입니까. 누락된 군정(軍丁)을 찾아내지 못해서입니다. 파총(把摠)이나 초관(哨官)들은 모두 자기 일가를 보호하고 있고 풍헌(風憲)이나 약장(約長)들 역시 일가 전체를 비호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령들을 엄하게 신칙해서 이른바 파총이나 초관, 풍헌, 약장 같은 자들에 대해서 본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역에 충당시키게 하고, 그 나머지 숨겨둔 자들을 엄명하게 조사해 찾아내도록 한다면 군정이 전보다 열 배는 많아지고 양정(良丁)과 부유한 자들도 모두 다 편호(編戶)의 역에 충당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누락된 군정을 찾아낸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대체로 풀이 없는 목장터나 버려진 빈터 가운데 개간할 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토지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여 농사짓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개간하자마자 곧바로 세금을 매기는데, 새로 개간한 땅의 소출이 혹 세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경우마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경작하려고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버려진 땅을 개간한 것에 대해서는 10년 동안을 기한으로 세금을 물리지 않고 10년 후에라도 절대로 높은 등급으로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경작하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른바 세금을 매기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영남 사람으로서 농서(農書)를 구한다는 교서를 보고서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할 만한 점이 있는바, 인재는 거리가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더욱더 알 수 있겠다. 몹시 가상하다.이른바 ‘농사에 재앙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가뭄의 재앙이 가장 크며, 농사에 중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소가 가장 중요하다. 가난한 농사꾼은 환곡 때문에 생업을 잃고 잔약한 농부는 첨정(簽丁) 때문에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제언과 못의 깊이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깊어서 물고기나 용이 숨어 살고 배가 떠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공검지와 같이 큰 제언도 가뭄이 들면 그 즉시 말라버려서 한번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물과 같으니 물을 씀에 절도가 없다. 풀이 없는 목장이나 내버려진 밭들을 백성들이 감히 개간하지 못하며 이익을 보기도 전에 피해가 먼저 미친다.’고 한 것 등은 너의 말이 옳다.사람마다 각자 힘을 다해 부지런히 농사지으면서 천시(天時)를 인하여 지리(地利)를 일으킨다면 재해가 유행할지라도 어찌 식량이 부족한 지경에야 이르겠는가. 사람의 노력을 대신하고 사람의 노동력을 돕는 것으로 있으면 땅이 개간되고 없으면 땅이 묵는바, 소 한 마리의 힘은 백 명의 인력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소의 도살을 금하는 법이 사람을 죽인 살인죄에 비해 두 등급만 감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는데, 근래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금령을 거듭 신칙하였다. 환곡과 첨정에 대한 폐단 및 물길을 소통시키고 개간을 권장하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에 회부하여 다른 사람들이 올린 상소를 참조해 보고 좋은 쪽으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하였다.복태진(卜台鎭)의 상소에 아뢰기를,“농삿일에 있어서 급선무는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수리의 공효는 제언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 처사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어보니, 거기에 ‘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藤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에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두었다.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근세에 국가를 경륜할 만한 선비로는 유형원을 으뜸으로 꼽는데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세 제언의 이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분야에 능숙한 자를 잘 가려 뽑아 봄이 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게 하되, 굶주리는 백성을 정밀히 뽑아 그들을 부역시키고 관가에서 먹을 것을 대주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하소서. 그러면 이 제언이 완성되자마자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질 것입니다.담배의 재배로 곡식의 생산이 줄어드는 피해가 몹시 심합니다. 신은, 원장(元帳)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에는 차를 심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을 깎고 숲을 불사르는 버릇을 금지시켜야 하니, 무익한 작물을 지어 유익한 것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술과 소와 소나무에 대한 금령은 실로 국가의 금석과 같은 법전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술에 대한 금령이 몹시 해이해졌습니다. 이에 술에 빠져 화를 부르며 곡식을 낭비하는 해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에 쓰는 것과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는 술까지 모두 금지시킬 수는 없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은 금하지 말고 술을 매매하는 것만 금지시킨다면, 백성들의 식량에 도움을 주는 것이 결단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소에 대한 금령은 아마도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수레를 뒤집어 엎는 사나운 소나 늙어서 쓸모없는 소는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가두어 둔 채 여물만 먹입니다. 그리고 1백 일 동안 수고한 뒤 하루를 즐기는 날이 바로 설날로, 사람들이 모두들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친구들이 모여 잔치하면서 마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영은 엄하게 해야만 하나, 설날에 한 차례 도살하는 것은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우리 나라의 네 부류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농사꾼이 몹시 적으며, 관리들이 농사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주 심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관리의 정원수를 정하여서 큰 고을은 40, 50명을 넘지 않게 하고 작은 고을도 반 정도 줄인 다음 그 나머지 관리들은 모두 돌아가서 농사짓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팔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토지를 개간할 수십만 명의 백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3일 동안 정무를 본 뒤끝에 무언가 목에 걸려 있는 듯한 것은, 호서의 너와 호남에 사는 장현경(張顯慶)을 등용하려다가 번거롭게 특별히 제수하는 것이 혹 너무 서두르는 듯하여 제수하지 못해서이다. 너와 장현경은 모두 여러 해 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는데, 너는 다시 등용된 뒤 임기가 차서 자급이 올라갔으나 아직 실직(實職)에 임명되지 못하였고, 장현경은 임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년이면 70이 되는데도 아직도 당하관 자리에 있다. 이번에 너의 상소를 보건대 경륜(經綸)의 계책을 성대히 진달하였는바, 몹시 가상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하였다. 정시원(鄭始元)의 상소에 아뢰기를,“우리 나라에는 기름진 들판이 수천 리나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간혹 공한지로 내버려 둔 것이 많습니다. 이는 바로 물을 끌어댈 방도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통(筒)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부터 지형에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논을 만든 곳이 물 아래쪽에 있더라도 그 사이에 구릉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으면 끌어오는 물길이 중간에서 끊어지고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기름진 들판이 있더라도 버려두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신이 말한 통을 설치하는 법은, 질그릇 통을 굽되 속은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어 상류에서부터 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이어 땅 속에 묻은 다음 통 속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시내나 골짜기를 만나면 지형에 따라서 물 밑으로 통을 묻어서 낮은 곳을 넘어가게 하며, 높은 언덕이 가로막혀 있을 경우에는 지세에 따라서 언덕 가에 통을 세워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합니다. 이것은 딴 이치가 아닙니다. 원류(源流)가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 통 속으로 들어가면 물이 통 속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높은 곳을 올라가 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물을 끌어댈 경우 높거나 낮거나 멀거나 가깝거나를 따질 것 없이 물을 대어 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언과 보를 만들어 얻는 이익뿐이겠습니까.”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이미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옛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상소에서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 방법을 말하면서 질그릇 통을 굽되 안은 텅 비어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며, 골짜기를 만날 경우에는 통을 파묻어 낮은 곳을 뛰어넘고 언덕을 만나면 통을 세워서 높은 곳을 넘어가게 한다고 하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시험해 보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즉시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상소를 가져다가 따져본 뒤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겠다.”하였는데,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신과 선혜청 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정시원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물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만약 기계를 설치하여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물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은 불가능하며, 작은 양은 할 수 있으나 많은 양은 할 수가 없다. 지금 진달한바, 통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대는 것도 역시 물을 쳐서 올라가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은 상류의 물을 받아들이는 곳이 하류의 물이 흘러나오는 곳보다 높아서, 비록 수백 보나 되는 먼 거리를 구부러지면서 돌고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낮게 내려가기도 하나, 결국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물이 흘러드는 통 입구에 비하면 얼마쯤은 낮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물의 성질이 끝내는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으므로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음을 분명히 안다. 만약 진흙을 구워 통을 만들어 서로 맞붙는 부분의 양쪽 아가리를 맞물리게 하고 바깥쪽에다 작은 고리를 끼운 다음 그 틈을 유회(油灰)로 채우면 물이 새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신들이 그의 말대로 대나무 통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더니 여러 차례 돌려서 높였다 낮추었다 하여 산(山) 자 모양을 만들었는데도 과연 물을 끌어들이고 토해내기를 법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 등을 보니 두 쪽에 불과하였는데, 단지 이 법에 대해서만 논하고 다른 제도에 대해 언급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대체로 예로부터 용골(龍骨)이나 옥형(玉衡)과 같은 물에 관한 기구들은 모두 다 땅에서 물을 끌어올려 충격을 주어 높이 올려보내는 것으로, 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흐르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행하지 못하였고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농서(農書)에 들어있는 통을 연결하여 물을 끌어대는 법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이를 미루어 크게 한 것일 뿐으로, 물을 끌어대는 다른 기구에 비하여 쉽게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여름에는 장맛비에 모래가 밀려들어 속이 막히기도 하고, 겨울에는 물이 혹 미처 다 빠지기 전에 안에서 얼어터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봄 가을로 보수하여야 하는 것은 형세상 뻔한 일입니다. 비록 진흙을 구워 만든다 하더라도, 수백 보나 혹은 몇 리나 되는 먼 거리를 끌어올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야 여사(餘事)이고 구워 만든 것이 흠이 없어서 쓰기에 알맞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는 남쪽 지방에 사는 사람이니 지형이나 수세(水勢)로 보아 설치할 만한 곳을 아마도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지방관에게 알려 그의 말에 의거해서 알맞은 곳을 골라 설치하여 시행해 보게 한 다음 성공하기를 기다려 여러 도에 반포하소서.”하니, 따랐다. 이우형(李宇炯)의 상소에 아뢰기를,“신은 수리(水利)에 대한 설을 약간 강구해 본 바가 있어서 일찍이 수차 바퀴를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의를 진달하여 한편으로는 호조에서 만들게 하고 한편으로는 감사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라는 비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역은 방대하고 힘은 딸려서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에 상소를 올릴 때 미처 진달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를 막고 제언을 쌓는 법입니다.오늘날 세상에는 보를 쌓는 자가 몹시 많으나 모두 그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재력만 헛되이 낭비하고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제언을 쌓는 데에도 역시 방법이 있습니다. 네모난 벽돌을 많이 굽되 기와보다는 조금 크게 하며 너비는 각각 몇 자 가량 되게 구운 다음 이를 차례차례 쌓아 도랑을 만들되 아래로부터 점차 위로 쌓아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물을 가두고자 할 때는 닫아서 막고 물을 빼려고 할 때에는 열어서 빼내면 되니 돌을 쌓고 나무로 가로막는 법에 비해서 훨씬 편리하며 쌓은 것도 자연 견고합니다.신이 일찍이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그 도보(圖譜)를 상고하여 수책(水柵)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보를 쌓는 묘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평평한 습지가 개울가에 있어서 못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만한 곳이 있을 경우 5리나 10리쯤 되는 상류의 여울이 많은 곳에 가보아 돌이 서려 있어서 보의 입구를 만들기에 합당한 곳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말뚝을 박되 간가(間架)를 반드시 긴 복도와 같이 만들어서 개울의 너비를 가로질러 쭉 뻗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 목책(木柵)의 아래 위 양쪽 곁에다가 나무를 엮어 세워두고 큰 돌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뒤 큰 돌이나 작은 돌을 가리지 않고 뒤섞어서 쌓되, 나무를 엮은 곳까지 쌓아 올립니다. 그 목책이 일단 완성되면 돌산이 개울을 가로질러 뻗은 것 같아서 물을 아주 단단히 막으면서도 사용하는 나무는 매우 적게 들고 돌을 쌓은 것이 실로 많으면, 그 사이에 모래와 진흙이 엉겨 붙어서 장마가 지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만전의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래가 많은 개울일 경우에는 짚이나 갈대 같은 것으로 목책의 주위를 둘러 막고 그 안에다 흙과 돌을 채워 넣어 물이 새지 않게 하면 역시 쌓은 것이 견고해집니다. 이렇게 한 뒤에도 언덕이 개울보다 한두 장쯤 높고 반드시 축과 바퀴가 있어야만 물을 가두었다가 관개할 수 있습니다. 수차(水車)의 제도가 몹시 많으나 오직 용미(龍尾)가 가장 좋습니다. 용미는 둥근 나무로 축을 만들되 아래와 위가 고르게 되게 하고, 도랑[溝]은 비스듬히 나선형(螺旋形)으로 만들되 판자를 엮어 칸을 막고 얇은 널판으로 둘러싼 다음 석회나 역청(瀝靑)으로 발라 틈이 없게 합니다. 또 철추(鐵樞)를 만들되 양쪽 끝이 직각삼각형 모양이 되게 만들어 세우고 곳곳마다 톱니가 8개가 되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軸)을 눕히고 바퀴를 세운 뒤 그 톱니가 맞물리게 하고, 그 곁에 있는 한 바퀴에 물을 받는 날개[箑]를 붙이면 세 개의 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서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물이 흐르는 힘으로 인해 저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물이 판자로 만든 도랑을 따라 위로 솟아오르게 되는바, 그 제도가 다른 수차에 비해 더욱 묘합니다.이 밖에도 고전통차(高轉筒車)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역시 흐르는 물에서 쓸 수 있습니다. 강 언덕의 높이를 살펴보고 큰 바퀴를 만들어 물 흐름에 맞추어 설치합니다. 그런 다음 그 바퀴테[輞]에다 판자를 가로로 매어 물살에 부딪혀서 돌아가게 하고, 거기다 물통을 세로로 매달아 물을 퍼가지고 올라가서 쏟아붓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효과가 용미보다 못지 않으나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약간 적습니다.못이나 우물과 같이 땅이 약간 깊은 곳에서는 항승차(恒升車)로 물을 퍼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물통의 길이를 언덕과 나란히 되게 하고 하단(下端)을 얇은 판자로 막고 모나고 둥글고에 따라 구멍을 뚫은 다음, 쇠를 벼리어서 혓바닥을 만들어 여닫는 기구를 만들고, 판자에다는 별도로 긴 장대를 박아 오르내리게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마치 풀무에서 바람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물이 통속으로부터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옥형(玉衡)의 반호(盤壺)나 쌍통(雙筒) 및 홍흡법(虹吸法)과 같은 것은 모두 구리나 주석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신이 시험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이 수차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신은 생각건대, 삼남 지방과 경기에는 수리(水利) 공사를 일으킬 만한 곳이 마을마다 있으니, 새로 쌓거나 예전에 있던 곳을 수리하여 보를 만들거나 제언을 쌓으면 그에 따른 이익이 몹시 클 것입니다. 그러나 드넓은 평야 지대로 큰강을 끼고 있어서 보를 막을 수 없는 곳에서는 수차를 이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수리(水利)에 대하여서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는 것을 익히 듣고는 너의 성의가 가상해서 한번 만들어 시험해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시험해 보지 않았다고 하니, 근래의 일이 모두 다 이 모양이다. 너의 상소를 묘당에 내려보내어서 이 뒤에 모여서 의논할 때에 너를 불러 자세히 물어본 다음 반드시 한 차례 시험해보게 하겠다.”하였다. 염덕우(廉德隅)의 상소에 아뢰기를,“신이 듣건대 잘 가르치는 것이 몸소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왕(先大王)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준행하여 친경(親耕)과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는 국가에서 농가를 장려하는 큰 정사이므로 장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장려될 것입니다.농정에 있어서는 첫째는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고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농사지을 종자(種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양식을 대주는 것이며, 셋째는 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이며, 넷째는 전정(田政)을 균등히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의(義)로 가르치고 형(刑)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근본이 흔들리면 나라가 존재하기 어려우며, 농사짓는 데에는 철이 있는데 철을 놓치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종자를 보조해 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식량을 대주라고 한 것은, 맹자가 말한 ‘봄에는 밭갈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가을에는 가을걷이하는 것을 살펴보아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불쌍한 우리 농민들은 한 해 동안 내내 고생하였는데 가을에 추수할 때가 되어서는 모조리 관가로 실어가 버립니다. 이에 실곡(實穀)은 모두 감영이나 고을로 들어가고 모곡(耗穀)은 간사한 아전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리며 농민들이 받아먹는 환곡은 피곡(皮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흉년이 들게 되면 혹 탕감해 주거나 기한을 연기해 주거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하지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무리들이 공문(公文)을 숨기고는 마구 매질을 해대며 독촉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토지가 없고 인족(隣族)이 없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 뒤에 이르러서야 관문(關文)을 뜯어봅니다. 이에 이른바 탕감해 주고 연기시켜 준 실제 혜택은 모두다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리는바, 이는 실로 농민들의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이 북쪽 지방에 가장 심한 것은 다름아니라 계축년과 갑인년 이후 암행 어사를 파견하는 법을 혁파하였기 때문입니다.미리 씨를 뿌리면 잘 자라고 부지런하면 수확할 것이 있다고 한 것은, 봄에 일찍 밭갈이를 하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농민들이 어찌 일찍 서둘지 않겠습니까. 여름 동안 도롱이를 입은 채 밭갈고 씨뿌리고 김매기를 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것은, 《시경》 칠월편(七月篇)에서 말한 모든 것을 다 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전정(田政) 역시 농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북도(北道)는 병오년에 양전(量田)한 뒤 무신년과 기유년 이후부터 물길이 변하였는데도 전세(田稅)는 한결같이 병오년의 양안(量案)에 따라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전세가 이와 같이 불균등한데 농정을 어떻게 장려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수령을 각별히 잘 가려뽑아 전정을 균등히 한 다음에야 농사에 수확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토지를 개간해야 한다고 한 것은, 우리 나라의 폐사군(廢四郡)을 오랫동안 내버려 둔 채 개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찍이 갑인년에 서쪽의 자성(慈城)과 북쪽의 후주(厚州) 두 진(鎭)의 지역을 백성들이 개간하도록 허용한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후주는 진을 설치한 지 3년만에 민호(民戶)가 8백 호로 불어났는데 나라의 금법에 구애되어 더이상 개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군(四郡) 지역을 개간하도록 허락하여 날마다 모여드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곳에 들어가 농사짓게 한다면, 이는 실로 농사를 권장하는 하나의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의로 가르치고 형벌로 징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짓고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의로 가르치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윤리 기강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쳤는데도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형벌로 다스린 다음에야 인륜이 밝아지고 왕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친정과 친잠은 바로 우리 열성조들께서 시행하던 전례(典禮)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돌아보건대 정사나 교화가 열성조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먼저 의식 절차에 관한 일에서부터 선대왕들이 하시던 바를 따라 하겠는가. 선대왕들의 뜻을 잘 받들어 이어가는 실제는 지난 축월(丑月)에 반포한 교서가 조금이라도 실제적인 효과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관북 지방에 아직까지 암행 어사를 차임해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처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다. 전에 이미 대신(臺臣)에게 내린 비답에서 말하였으니, 앞으로 형세를 살펴보고서 내려보내겠다. 이 외에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의하겠다.”하였다. 유종섭(劉宗燮)이 상소하여 아뢰기를,“다스리는 방도에 있어서는 책임을 전담시키지 않으면 일이 한결같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주관(周官)》 사도(司徒)의 관직에 의거해서 권농사(勸農司)를 별도로 설립하고 토지를 균등히 하는 관리, 물을 다스리는 관리, 농기구를 담당하는 아전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여러 고을과 마을들을 감독하면서 편리한 방법을 들어주고 품의한 뒤 시행하게 하고, 때때로 감사와 수령들의 근만(勤慢)과 허실을 살펴서 모두 논계하게 하소서. 그러면 방백과 수령들이 반드시 고무되는 바가 있어서 농삿일을 권장하는 데 힘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의 걱정은 전세가 균등치 못하고 물을 이용하기가 힘들며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전세를 균등히 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고 농기구를 제대로 갖추게 한다면 하늘과 땅, 사람의 때와 힘이 저절로 합치될 것인바, 또한 어찌 위에서 명령을 내려 일일이 신칙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비답을 내리기를,“전세(田稅)와 수공(水功)과 농기구 세 가지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너의 말이 몹시 이치에 맞다. 권농함에 있어서 마땅히 이를 주관하는 관서가 있어야 한다고 한 것도 너의 말이 맞다. 모두 묘당에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윤재양(尹在陽)의 상소에 아뢰기를,“오늘날에 있어서 시급하게 변통해야 할 것이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병작(並作)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백징(白徵)을 견감해 주는 것이며, 셋째는 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것이며, 넷째는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양역(良役)을 충당시키는 것이며, 여섯째는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이며, 일곱째는 아전들의 정원수를 줄이는 것이며, 여덟째는 과거의 폐단을 없애는 것입니다.병작하는 것을 고르게 하는 것은 실로 토지가 없는 자에게 토지가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백징을 견감해 주는 것은, 논의 경우에는 당초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거나 모내기를 못한 땅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 주는 규정이 있어서 특별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허락해 주는데, 밭의 경우에는 현재 묵었거나 전부터 묵어서 나무가 숲을 이룬 땅에 대해서도 모두 세금을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현재 백성들은 모두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한 줌, 한 단이라도 백징하는 폐단이 없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담배의 경작을 금하는 것은,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으니, 담배의 해로움이 이에 이르러 극심한바, 금지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백성들에게 버려진 땅을 경작하도록 허락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5군문(軍門)과 각 궁방(宮房), 충훈부(忠勳府), 세도가의 전지를 막론하고 경작할 만한 곳을 묵혀버린 곳이 많은데, 그 주위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을 하면 본주인이 도로 빼앗아 가버리므로 영원히 묵혀버린 채 경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땅을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한다면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며, 국가에는 세금을 거두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양역(良役)을 충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정이 부실한 폐단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바, 입번(立番)을 면제받은 군관(軍官)과 시골에 있으면서 신역을 면제받은 자들을 일체 혁파한다면 죽은 사람의 번(番)을 채워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환곡법을 바로잡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환곡과 향미(餉米)를 모두 절반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절반은 나누어 주되, 경사(京司)에서 발매(發賣)하는 규례에 의거해서 봄에 작전(作錢)하고 이어 싯가에 준하는 범위 안에서 값을 낮추어 파는 것을 허락하며, 가을이 된 뒤 싯가에 따라서 그 돈을 가지고 햇곡식을 사들이며, 다음해 봄에는 작년 봄에 창고에 남겨두었던 나머지 절반을 발매하도록 합니다. 대체로 봄과 가을의 싯가가 싸고 비싼 차이는 있겠지만 값을 낮춘 가운데서 한 말당 반드시 3전(錢)의 우수리를 관가에서 취하고 그 나머지의 이익을 전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그럴 경우 관가에서는 독촉해 받아들이느라 수고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은 이웃이나 친척들의 것까지 물어내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전들의 정원을 줄이는 것은,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아전들로 인한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만큼 그 고을의 크기를 따져서 정원을 알맞게 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과거의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서울의 유생들에 대해서는 사학 교수(四學敎授)가 오부(五部)의 거안(擧案)을 받고 각 문체별로 과거 시험의 제목을 내어 시취(試取)한 다음, 합격자의 방(榜)을 성균관에 제출하면, 대사성(大司成)이 사학에서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앞에서 시험치른 후 예조에 합격자의 명단을 통보합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유생들의 경우에는 각각 해당 고을에서 각 면에서 올린 단자(單子)를 받아 과제(科題)를 내어 뽑기를 한결같이 사학(四學)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한 다음 각각 예조에 제출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고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치를 때 예조에 비치되어 있는 것과 대조하여 조사하면 영원히 억울함을 당하거나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네가 농삿일에 대해 진달하면서 곁들여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진달하였는 바, 몹시 가상하다. 병작(並作)을 고르게 하는 것은 정전 제도(井田制度)나 한전 제도(限田制度)를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기강이 확립된 다음에야 부차적인 항목이 시행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와 같이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던 사람도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늘상 신중하게 처리하면서 하루아침에 즉시 고쳐야 된다고 말한 적이 일찍이 없었는바, 이 일 역시 그와 비슷한 일이다. 백징(白徵)을 견감하는 일은 너의 말이 참으로 옳다. 조금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려서 진전(陳田)을 조사하도록 하겠다.담배의 경작을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껄끄러운 점이 있을 듯하다. 백성들에게 관가의 전지나 부자들의 전지로서 묵혀버린 곳을 경작해 먹도록 허락해 주는 일은, 그것은 전적으로 감사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양역(良役)을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지우는 것에 대한 폐단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번(番)을 면제하고 역(役)을 면제하는 것을 없애느냐 그대로 두느냐 하는 문제 역시 조정에서 다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여러 고을에서 제대로 잘 시행하고 있는가만 조사하면 되는 일이다. 환곡의 폐단에 있어서 반을 창고에 남겨두는 일은 바로 요즈음에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크고 작은 고을의 아전들을 줄이는 일은, 일찍이 다른 사람의 상소로 인하여 묘당에서 여러 차례 복계(覆啓)하였었다.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는 일은, 내가 처음 즉위하여서 물어본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인데, 지금까지 세월만 끌어온 것은, 시행할 만한 좋은 법이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법만 부질없이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향거(鄕擧)와 이선(里選) 및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孝悌] 농사에 힘쓰는 사람[力田]을 추천하는 등의 제도를 지금 시행하였다가 만에 하나라도 명목만 있고 실재가 없게 될 경우, 애당초 경솔하게 시행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처음부터 잘 계획하는 체모에 합당할 것이다. 근년 들어 내가 수령을 반드시 삼사(三司)의 관원 중에서 뽑고 사람을 쓸 경우 반드시 수령들 가운데서 뽑아쓰는 것은 등용하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게 하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두루 물어본 다음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겠다.”하였다.정석유(鄭錫猷)의 상소에 아뢰기를,“신은 먼저 우리 나라의 지리(地利)와 전토(田土)와 농기구에 대하여 논한 다음 시기를 놓치지 않는 방도와 살 곳을 잃지 않는 방도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옥저(沃沮)는 산이 많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대방(帶方)은 골짜기가 깊고 냇물이 깊으며, 낙랑(樂浪)은 서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고 동남쪽은 들판이 널려 있습니다. 삼남 지방은 물이 깊고 토질이 비옥하며, 해서와 경기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산이 가파른데다가 바닷가에는 염분이 많고 바다 가까운 곳에는 모래와 돌이 많습니다.신이 일찍이 집에 있으면서 궁리한 바가 있는데, 온 나라에서 두루 쓸 수 있는 것으로 마른 땅이나 습한 땅이나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쓰기에 알맞은 기구는 오로지 달구지[田車]뿐입니다. 대개 달구지를 쓰면 이로운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봄에는 거름 수레가 되는데, 수레 1대가 운반하는 양이 소 5마리에 싣는 것만큼이나 되니 한 사람이 수레 한 대를 쓰면 소 네 마리와 사람 네 사람을 줄이는 격으로 소와 사람의 노동력이 모두 여유가 있게 되는 바, 이것이 첫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농사가 한창 바쁠 때에는 밭에 거름주는 일이 더욱 급하여 한시라도 먼저 내면 소출이 배로 불어나고 한시라도 늦으면 수확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이때 만약 거름 수레를 쓰면 제때에 맞춰 일을 민첩하게 할 수 있는 바, 이것이 두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가을에는 부리는 수레[役車]가 되는데, 곡식은 한창 거두어들일 때 소가 있으면 노동력이 남게 되고 소가 없더라도 지게로 지고 다니는 수고가 없는바, 이것이 세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각 군현(郡縣)에서 환곡을 받아들일 때 눈이나 빙판으로 길이 막히게 되면 소발굽은 미끄러질까 겁나고 사람들의 어깨는 빠질듯 아프게 되는데, 이때 만약 부리는 수레[役車]를 이용하면 큰 수레는 멍에를 지워 끌고 작은 수레는 뒤에서 밀면서 갈 수 있는바, 이것이 네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그리고 소나 말의 병은 항상 어깨와 발에 나는데, 이는 짐은 무거운데 힘이 딸려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수레를 쓰면 소나 말이 모두 병나지 않을 것인바, 이것이 다섯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신이 듣건대, 조종조 때 전화(錢貨)를 통용시키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자, 당시 고(故) 상신 김육(金堉)이 역참(驛站)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역참에서부터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역참은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 모두 지나는 곳이며 익숙히 보고 들어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수레에 대한 제도도 역참에서부터 시행한다면 반드시 점차적으로 본받아서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팔도의 공부(貢賦)를 운반하는 때에 으레 모두 말을 전세내어 운반하는데, 1천 리를 운반하는 경우 2천 전(錢)을 전세값으로 주는바, 짐 한 바리를 운반하는 값이 거의 말 한 마리 값과 맞먹습니다. 만약 군현에서 운반하여야 하는 모든 짐바리들을 죄다 수레로 운반한다면 역참에서 말을 세놓는 자들도 앞으로 말 대신 수레를 세놓아 생업을 잃지 않을 것이며, 점차적으로 이를 서로 본받아서 온 나라에 두루 퍼질 것입니다.”하고, 또 말하기를,“오늘날에 있어서 급선무는 두 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 네 가지 이로운 것을 일으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 해로운 것이냐 하면 쓸데없는 관리와 쓸데없는 군사가 그것입니다. 무엇이 네 가지 이로운 것이냐 하면 어진 인재를 가려뽑고, 전제(田制)를 고르게 하며, 노는 토지를 개간하고 환곡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책문(策問) 제목으로 내어 물었으니 어찌 혹시라도 쓸데없는 빈말을 하였겠는가. 수십 년 전에 감사나 병사가 녹봉을 출연(出捐)하거나 방역(防役)하는 등과 같은 자질구레한 명색(名色)에 대해서는 거의 다 그 문서를 없애고 빚을 받는 것을 중지시켰지만 필경에는 이자로 받아들인 곡식에다 손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서울에 있는 관청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원도의 삼(蔘)이니, 노비의 신공(身貢)이니 하는 것들은 그 가운데 특히 큰 것이고 그 나머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조차 없다. 무릇 법이란 것은 그릇을 땅에 놓아둔 것과 같아서 오로지 어떻게 쓰는가 하는 데 달려있는 것이다. 환곡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박한 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공물을 줄여서 다른 물품으로 대체해 주고 은택을 내려 부담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 수십 만 가지도 넘는다. 그런데 만약 그에 대해서는 양쪽이 다 편리한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지 않고서 지시만 내리면서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어찌 옳겠는가. 첨부하여 올린 견해에 대해서는 묘당에 내려 상세하게 살펴본 뒤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정도성(鄭道星)의 상소에 아뢰기를,“대체적으로 볍씨는 강한 종자도 있고 약한 종자도 있는데, 약한 종자는 가뭄을 당하면 잘 자라지 못하고 쉽게 말라 죽으며, 강한 종자는 홍수나 가뭄에도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대개 볍씨에는 강한 종자가 세 가지가 있는데, 천상도(天上稻), 두어라산도(斗於羅山稻), 순창도(淳昌稻)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볍씨는 그 성질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논에는 모를 붓고 밭에는 씨를 뿌리는데, 2월에 땅을 갈고 3월에 씨를 뿌리면 늦모를 낼 때쯤 이 세 종류의 벼는 줄기가 이미 절반 정도 성장하며, 결실 역시 빨라서 비록 가뭄이나 홍수를 만나더라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삼남 지방에는 논이 많고 나머지 다섯 도에는 밭이 많으니 이 세 가지 벼 종자를 심는 법을 시행한다면 삼남 지방에는 그 이익이 더욱 클 것입니다.춘궁기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종자곡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걸핏하면 농사철을 놓치고 마니 특별히 환곡을 꿔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관가에서 시골 백성들에게 지시를 내려 농토를 일구게 하면 들판이 묵고 황폐해지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게을러서 농사짓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놀고 먹는 백성들을 찾아내게 한다면 백성들이 모두 농사에 힘쓸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올린 글이 10여 줄에 불과하지만 세 가지 벼 종자를 심는 법과 소의 도살을 금지하라고 진달한 것은 모두가 실용(實用)에 힘쓴 적당한 말들이다.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이미 전라 감사를 지낸 자인만큼 그를 불러다가 의견을 묻는 한편, 너의 말대로 시험해 볼 만한 남쪽 고을에서 시험해 볼 것이니, 뒷날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다.”하고, 전교하기를,“물어보는 것은 실제적인 것에 힘쓰기 위한 것이니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는 것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근래에 올라온 여러 글들 가운데서 실속이 있는 것은 이 사람의 글에서 처음으로 보겠다. 좌상이 불러보고 등용하기에 합당할 것 같으면 초기(草記)를 올리라.”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정도성을 불러다가 내력을 물어보니, 살림살이가 웬만큼 넉넉하여 진구곡(賑救穀)을 내고 직첩(職帖)을 받는 은혜를 입었으며, 글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해주고 대신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착실하고 말 역시 믿을 만하나 등용하기에 합당한지의 여부는 감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김하련(金夏璉)의 상소에 아뢰기를,“수차(水車)를 만드는 재목으로는 참나무와 박달나무만을 쓰는데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자성(慈城)ㆍ우예(虞芮)ㆍ여연(閭延)ㆍ무창(茂昌) 등 사군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나무로서 수차 바퀴나 배의 돛대, 집의 대들보감으로 쓰기에 충분한 좋은 재목이 산과 들에 가득 차있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백성으로서 그곳에 가서 수차와 배의 재목을 베어오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공문을 내주어 각자 원하는 바에 따라 수차를 만들거나 배, 뗏목을 만들게 한 다음, 자성 부근에서부터 강물을 타고 내려오게 하면, 용천(龍川) 바다 어귀까지 3, 4일 정도면 도착하고, 용천서부터 경강(京江)이나 삼남 지방까지는 열흘을 넘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습니다.수차를 만드는 법은 전 찰방 이우형(李宇烱)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우형을 특별히 자성에 보내어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한 뒤 그것을 바닷가의 고을마다 1대씩 나누어 주어 각 고을의 농민들이 이를 본받게 하면 몇 해 안 가서 수차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법이 온 나라에 두루 퍼질 것이고 어민들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상소의 내용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논의해본 뒤 품의하여 조처해서 농정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하였다. 이경오(李敬五)의 상소에 아뢰기를,“우리 나라는 논밭이 많이 황폐해지고 베틀마저 텅 비어 있는데, 이것은 농서(農書)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마땅히 먼저 손을 써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농사짓지 않으면 천하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아전이나 하인들의 무리 속으로 함부로 의탁하고 저자거리의 거간꾼 무리를 쫓아다니며, 이보다 못한 무리들은 편한 길을 따라 장사를 배우거나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하면서 모두들 놀고 먹으려고만 합니다. 이에 떠돌아다니는 자가 꼬리를 물고 호구수가 날로 줄어들어서 팔도의 백성들 가운데 농사를 짓지 않는 자가 거의 절반이나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현재 농정에 있어서의 급선무는 놀고 먹는 백성들을 모조리 몰아다 농토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야 농서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하고, 이어 본부(本府)의 삼(蔘)을 캐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이를 중지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이른바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에서 농사짓게 한 뒤에야 농서가 필요한 것이라고 한 것은, 간략하면서도 할 말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의 잘못된 습속은 오로지 조그마한 이끗만 노릴 줄 아는 것인데, 이를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근본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네가 살고 있는 고을의 노는 땅부터 시작하여 몸소 전준(田畯)이 되어 오늘 한 모퉁이를 개간하고 내일 한 고랑을 개간하여 날마다 개간하는 성과가 나타나게 한다면 너를 알아준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에게 하유하여 앞으로 있을 여름과 겨울의 근무 평정때 해당 수령의 실적을 항목 아래에다가 주를 달아 기록하게 하겠다.이른바 ‘삼 캐는 것을 권장하는 규정이 한갓 삼상(蔘商)들이 이끗을 노리는 길만 열어놓았고 온 도의 농사를 방해하는 해독을 빚어낼 뿐이다.’고 한 것은, 사리가 분명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어찌 그 폐단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감사에게 하유하여 이에 대해 속히 장계를 올리게 하겠다.”하였다. 김만(金萬)의 상소에 아뢰기를,“천시(天時)를 따르고 지리(地利)를 이용하며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본령(本領)이며,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토질에 알맞은 것을 살피며 농기구를 이용하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남쪽과 북쪽 지방에 잘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과 산골짜기와 들판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느냐 하는 것 및 모를 붓고 씨를 심는 것의 이해(利害), 담배를 심고 화전(火田)을 일구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 등은 작은 절목에 해당되는 일들입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남북이 수천 리나 되니 풍토와 기후가 같지 않고 토질이 현저히 다른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모를 붓는 것에 대한 득실 여부는 가장 신중하게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물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고 토질이 부드러울 경우에는 마른씨뿌리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습하여도 비옥하지 않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곳이나 혹은 흙덩이가 단단하여 쟁기가 들어가지 않아 물을 대면 갈 수 있고 마른 채로 갈면 갈 수가 없는 땅이 곳곳마다 반반씩 뒤섞여 있으니, 모를 붓는 것은 농사에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토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것을 금지하는 경우에는 법으로 금하여야 하겠지만 신은 감히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화전을 일구는 이익 역시 큽니다. 명산(名山)을 벗겨내는 것이 과연 염려되기는 하지만 천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폐단을 하루아침에 금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통렬히 금지해야 할 것은 담배를 재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자면 반드시 먼저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는 것을 금지해야 합니다.환곡에서 발생하는 허다한 폐단은 그 근본 원인이 뒤섞어 보관해두는 데 있으니, 그 폐단을 구제하자면 면(面)별로 창고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고을에 그 전에 있던 창고를 그대로 두고 그 안에다 그 고을의 면수에 따라서 벽을 쌓아 칸을 막되, 칸의 크기는 면의 대소에 따라 적당히 하며, 해당 면에서 바친 곡식은 다른 칸으로 옮겨 쌓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벽에다가는 해당 면의 이름을 써서 구별합니다. 그리고 곡식을 바칠 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창고에 바치게 하고 곡식을 내줄 때에도 그와 같이 하여 창고문에서 지급해 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위에다 자물쇠와 열쇠를 설치하여 아무때나 함부로 여닫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각영(各營)의 모곡(耗穀)과 관청에서 내려주는 잡역곡(雜役穀)은 수시로 출납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세웁니다. 이상과 같이 할 경우 백성들이 관가의 창고를 보기를 개인의 창고 같이 보아 오로지 곡식이 깨끗하지 못할까만 걱정할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네가 상소에서 진달한 바는 갑자기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바, 너의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묘당에서 논의해 본 다음 방안을 첨부하여 아뢰게 하겠다.”하였다.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모내기는 토질에 따라서 하고 화전을 일구는 것은 금할 수 없으며 담배의 경작을 금하는 것과 제언을 수리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이미 전후로 올린 복계(覆啓)에서 이미 진달드린 것입니다. 환곡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있던 창고에다 면의 숫자에 따라 벽을 쌓아 칸을 막는 일은, 관고(官庫)에다 사창(社倉)의 뜻을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물품처럼 여겨 서로 자신을 위해 모의하게 하자는 것이니, 지금 논한 것이 채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을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면수는 많고 적음이 있는 만큼 일률적으로 시행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언양(彦陽) 한 고을에서부터 백성들의 의견을 널리 물어보고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히지 않으면서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시험해본 뒤에 과연 성과가 있을 것 같으면 여러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차례로 시행해 나가도록 해당 도에 분부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에서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해당 수령에게 엄히 신칙해서 거행하게 하라.”하였다.김양직(金養直)의 상소에 아뢰기를,“신이 듣건대 《농가잡설(農家雜說)》에 말하기를 ‘부용꽃이 필 때 가장 먼저 핀 꽃 한 송이를 따가지고 그 무게를 달아보아 이듬해의 쌀값이 쌀지 비쌀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음해에 어떤 곡식이 풍년이 들 것인지를 알고자 하면 먼저 올해에 다섯 가지 나무 가운데 어느 것이 무성하게 자랐는가를 알아보고 그에 따른 곡식을 심는다. 벼는 대추나무나 버드나무에서, 기장은 느릅나무에서, 콩은 느티나무에서, 팥은 오얏나무에서, 삼은 버드나무나 가시나무에서 알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에는 대추나무 잎이 무성하였고 늙은 버드나무가 무성하였는바, 금년에는 벼농사를 권장할만 하겠습니다.또 사시입절가(四時立節歌)를 보건대, 거기에 ‘동짓날 날이 맑고 햇빛이 희미하면 이듬해에는 태평가가 울려 퍼진다.’고 하였고, 입춘시(立春詩)에는 ‘입춘날 하루만 맑게 개어라. 농부들이 농삿일에 힘들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며, 제석가(除夕歌)에는 ‘이날에 청명한 좋은 날씨 만났으니 농가에 분부하여 마음 기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작년 동지에는 하늘빛이 과연 맑고 햇빛이 희미하였으며, 입춘날에도 또다시 맑게 개였으며 이날이 또 제일(除日)을 겸하였습니다. 신이 이 세 구(句)의 시의 뜻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모두 다 길한 징조입니다. 또 보건대 설날에는 서풍이 약하게 불고 동쪽에 누런 구름의 길한 기운이 있었는바, 올해 풍년이 들 것임을 점칠 수 있겠습니다.또 《고방(古方)》을 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정월 3일에 비가 내리면 4월달에 물이 풍부하고 4일에 비가 내리면 5월달에 물이 풍부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금년 정월 3일에는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4일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으니 이것은 길한 징조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4월과 5월은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달로서 농민들이 이 두 달 동안에 제때 일찌감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비록 작은 가뭄이 있더라도 크게 농사에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년에는 농사를 일찌감치 시작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진달한 바에 모두 소견이 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이제화(李齊華)의 상소에 아뢰기를,“《농정전서(農政全書)》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좋은 농사법입니다. 이 책을 출간하여 중외에 널리 유포한다면 농사에 힘쓰도록 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을 조사해내어 부자집에 나누어 배정한 뒤 토지를 주고 종자와 식량을 주게 하면 그해 안으로 신역(身役)을 지거나 환곡을 갚지 못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이를 몇 해 동안 시행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나라 안에는 제언이 없는 고을이 없지만 막히고 말라붙었습니다. 또 아랫보가 있으면 윗보를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를 만들 만한 곳에 일체 보를 열게 한다면 실로 백성들과 나라에 있어서 다행이겠습니다. 고구마를 심는 것은 구황(救荒)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 여러 도에 널리 유포한다면 실로 식량을 보충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경진년부터 영남의 조세 곡식을 영남의 백성들이 영남의 배로 실어다가 바치기 때문에 60여 척이나 되는 배를 다시 만들고 고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며 그 재목을 대느라 원래 정해준 그루 수 외에 함부로 더 베는 것이 3, 4배가 넘는 바람에 주위에 있는 봉산(封山)들이 지금은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1천여 석이나 실은 배의 선주와 사공이 모두 뱃일에 서투른 농사꾼들이기 때문에 배가 전복되는 걱정을 해마다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창(漕倉)에다 예전대로 보관해 두고 경강(京江)의 뱃사람들로 하여금 각 조창으로 배를 끌고 내려가서 나누어 싣고 올라와 바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럴 경우 전혀 뱃일에 서투른 사람들이 자주 파선시키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60척의 배를 3대(隊)로 나누어 배정한 뒤, 그 대에서 각자 특별히 단속하게 하고 혹시라도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선대 20척의 배에서 힘을 합해 다시 마련해 바치게 합니다. 그러면 영남 지방의 백성들은 저절로 농삿일에 돌아가 안착할 수 있을 것이고, 봉산(封山)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폐단과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 세곡을 거듭 징수하는 폐단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비답을 내리기를,“진달한 내용 중에 쓸 만한 말이 많았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내용을 첨부하여 품의한 뒤 조처하게 하겠다.”하였다. 비변사가 복주하기를,“《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하는 일은, 농가류(農家類)의 저서 가운데에서 이 책이 가장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고 칭해지고 있는바, 양남(兩南) 지방에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겠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뽑아내어 부자집에 나누어 맡기는 문제는, 궁한 백성을 먼저 돌보아 주는 일로서,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는 의리입니다. 이는 마을에 좋은 풍속이 있으면 권면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해나갈 것이며, 관가에서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 반드시 어거지로 배정할 염려가 있습니다. 신역을 옮겨 지우고 환곡을 대신 징수하는 것은 더더욱 백성들을 인도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가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제언에 대한 일은, 제언에 함부로 법을 어기고 경작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지극히 엄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제언을 수축하기를 신칙하는 때를 당해서 도리어 개간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청한 것은 사체를 잘 모른 소치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아울러 우선은 내버려두소서. 고구마를 심는 데 대한 일은, 고구마는 구황하는 데 있어서 실로 중요한 종자입니다. 남쪽 바닷가의 고을 가운데 심는 곳이 많이 있고 연전에도 이미 심도록 신칙하였는데,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여러 도에 신칙하겠습니다. 영남 지방의 조운선에 대한 일은, 조운선은 실로 소나무를 해치는 좀벌레인바, 이 때문에 배 만드는 제도를 변경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경강(京江)의 뱃군들에게 나누어 실어오게 하자는 논의는 비록 나름대로 소견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창을 설치하고 조졸(漕卒)을 단속하는 데 대해서는 이미 정해놓은 규례가 있으니 사소한 폐단으로 인해서 갑자기 뜯어고치자고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우선은 내버려두소서.”하니, 전교하기를,“《농정전서》를 중외에 널리 유포시키는 일은, 근래에 찍어낸 책이 있는 곳이 드무니, 이것이 어찌 편찬하도록 명하고 인쇄하도록 명한 본뜻이겠는가. 이번에 진달한 여러 설들 가운데 채용할 만한 설들을 종류별로 보충해 편찬하여 널리 배포할 바탕으로 삼도록 할 일을 주자소(鑄字所)에 분부하라. 고구마를 심는 일은, 그 효과가 콩이나 조와 거의 같은데 배를 채우고 위장을 기름지게 하며 맛 역시 좋다. 사다가 심는 방도에 대해서도 역시 별도로 새로운 영을 반포할 필요가 없다. 각 해당 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각자 심어 먹을 방도를 생각하되, 혹시라도 으레 신칙하는 지시로 보아넘기지 말게 하라.영남의 조운선을 다시 경강선(京江船)으로 바꾸고 조운선을 대(隊)로 편성하는 일은, 곡식을 배로 실어나르는 정사에 대해서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배 만드는 숫자를 줄이고 병선(兵船)과 경선(京船)을 통용하여, 산에 나무가 헐벗지 않고 강물의 흐름이 막히지 않게 함으로써, 농정(農政)과 함께 다같이 이익을 보는 방도에 있다 하겠다. 전에 이미 이에 대하여 두루 물어보았으니 다만 한 차례 말한 것을 실천해 보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이 조항은 우선 내버려두라. 앞으로 여러 도에서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와 책자 및 묘당의 회계(回啓)와 비답(批答) 내용까지를 반드시 모두다 기록하여 해당 도에 내려보내서, 감사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관청으로 불러다 놓고 정복을 갖추어 입은 뒤 직접 전해주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한편으로는 체모를 높이도록 하라.”하였다.이때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대부분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상이 한결같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김천숙(金天肅)ㆍ윤보(尹溥)ㆍ염덕우(廉德隅)ㆍ강요신(康堯愼)ㆍ장지한(張志澣)ㆍ이상희(李尙熙)ㆍ이인영(李仁榮)ㆍ윤홍심(尹弘心)ㆍ정응삼(鄭應參)ㆍ김응린(金應麟)ㆍ최세택(崔世澤)ㆍ김치대(金致大) 등의 상소는 분명하게 건의한 바가 없었다. 김치대는 문장이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뛰어났으므로 특별히 주자서(朱子書) 한 질을 하사하였다. 장윤(張) 이하 농서(農書)를 바친 자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묘당에 명하여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고, 조금이라도 취할 만한 좋은 점이 있으면 내각(內閣)에 명해서 새로 편찬하는 농서에 채택하여 넣게 하였다. 이만록(李晩菉)과 이문철(李文哲)은 가장 먼저 전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으며, 이만록은 또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다고 하였는데, 상이 근본을 제대로 알았다고 하면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하사하였고, 이문철에게는 운서(韻書)를 하사하였다. 유진목(柳鎭穆)이 올린 상소는 전지의 내용에 가장 잘 맞았으므로 관직을 제수하였다.유진목이 농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신은 삼가 교서를 받들어 읽고서 감히 농사를 가르치는 것, 농삿일을 다스리는 것, 농사에 이로운 것, 농사에 해가 되는 것들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15가지 항목을 만들었습니다.1. 향약법(鄕約法)을 거듭 밝히고 농민들을 부지런히 힘쓰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1.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고서 씨를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는 것을 각각 그 토질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1. 바닷가나 평야지대 고을의 각 창고에 보관하는 잡곡을 종자곡으로 나누어주어 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1. 널리 제언을 쌓아서 물을 잘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1. 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엄히 금하여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1. 수차의 제도를 반포하여서 물을 끌어대는 것을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1. 물을 균등하게 이용하게 하여 농민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1.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참고하여 오늘날의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드는 것입니다.1. 여름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않는 것입니다.1. 목화밭에 대해 재결(災結)로 처리해 주어 목화 농사를 권장하는 것입니다.1. 논에 가을 보리를 심도록 신칙해서 농사철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1. 사창법(社倉法)을 모방하여 시행함으로써 농량(農粮)을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1. 봄과 여름에 밭갈고 김매는 것을 가난한 농부집부터 먼저하게 하는 것입니다.1. 소의 돌림병에 대한 치료법을 널리 물어서 농서에 첨부하는 것입니다.1.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장하며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입니다.”하였다. 임박유(林博儒)도 농서를 진달하였는데, 유진목과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유진목과 함께 책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1.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를 잘 가려 임명하고 제대로 농사를 장려하였는가 하는 것을 근무평정에 반영하여 게으른 농민들을 권장하게 하는 것입니다.1. 산의 벌채를 금지하여 나무를 길러서 수원(水源)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1. 냇가의 둑을 다시 수축하고 제언을 더 설치하여 수리(水利)를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1. 둑을 수리하고 제언을 설치한 뒤 법조문을 엄하게 세워 관개를 균등히 하는 것입니다.1. 수차(水車)의 제도를 반포하여 물을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하는 것입니다.1. 한전법(限田法)을 정립하여 게으른 농민을 진작시키는 것입니다.1. 논을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모내기를 하거나, 씨뿌리기를 하거나, 다른 작물을 파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1. 연해 고을의 각 창고의 곡식은 잡곡으로 바꾸어 보관해 두고 이를 환곡으로 나누어주어 벼 대신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1. 환곡을 나누어 줌에 있어서는 반드시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한 차례 넉넉하게 나누어주어 농사지을 동안의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1. 향약법을 신명하여서 농사에 힘쓸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1. 농민을 귀하게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지을 마음이 생기게 하는 일입니다.1. 담배의 재배를 엄하게 금지시켜서 농사짓는 전지를 넓히는 일입니다.1. 토질을 살피고 곡식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는 일입니다.”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유진목이 올린 책자를 가져다가 보니, 그 조목이 문란하지 않았고 그 내용이 근거할 만하였는데, 필경에는 그 요지가 향약법을 시행하는 데로 귀결되었습니다. 다만 농정이 점차 성과가 있는가를 살펴보아 한(漢)나라에서 시행하였던 법과 똑같이 별도로 효제(孝悌)와 역전(力田)의 과목(科目)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니, 우선은 내버려두소서.”하니, 전교하기를,“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공주 목사(公州牧使) 신숙(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의 서문을 쓴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주자가 쓴 책 가운데 권농문(權農文) 몇 조목은 참으로 뭇 백성들이 일용(日用)으로 할 것들이다. 효제(孝悌)니 예의니 하는 것이 일찍이 제언을 수축하고 토지를 일구는 것에 대한 방문(榜文)과 아울러 언급되지 않은 적이 없었은즉, 다른 데서 구하지 않더라도 그 힘을 쏟아야 할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바, 그 말뜻이 절실하기도 하다. 참으로 농가(農家)의 지침이 되는 것이며,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근래에 날마다 올라와 쌓이는 상소문을 보건대 여기에 대해 언급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로지 공주 생원 유진목만이 능히 말하였다. 이 책을 편찬한 자가 바로 공주 목사였는데, 지금 1백 46년이 지난 뒤에 그 말이 또 공주에 사는 선비에게서 나왔으니,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진달한 15조항은 모두 주자가 남강(南康)에서 내린 방문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이른바 향약법을 거듭 밝혀 농민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2월에 술과 음식을 싸가지고 교외로 나가 부호들을 만나보고서 농상(農桑)에 힘쓸 것과 효제(孝悌)를 돈독히 할 방도를 일러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씨를 심거나 모를 내는 것을 각각 토질에 맞게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주자가 말한 씨를 물에 담궈두었다가 모를 부으며 깊게 갈고 얕게 김매라고 한 뜻이다. 이른바 잡곡을 대신 파종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제때에 논을 갈아엎고 밀과 보리를 많이 심는다는 법이다. 이른바 수레의 제도를 널리 반포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숙(塾)이 있는 자는 수레와 두레박의 힘을 힘입는다는 방법이다. 이른바 수리(水利)를 균등히 나눈다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못과 연못이 얕거나 샐 경우에는 힘을 합쳐서 파낸다는 방책이다. 이른바 농사철에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빈민이나 하호(下戶)가 억울하게 불려나간다는 깨우침이다. 이른바 목화농사를 장려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성자현 지사(星子縣知事) 왕문림(王文林)의 뽕나무를 심는 방법 등을 알아내어 세 현(縣)에 내려보낸 규례이다. 이른바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모방하여 시행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제갈가(諸葛家)와 천능가(千能家) 등 집안의 쌀을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대신 나누어주자고 한 논의이다. 이른바 갈고 김매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가난한 농민의 집부터 먼저 하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빈궁한 농민을 기쁘게 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소의 돌림병을 고치는 방법을 두루 물어보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농사짓는 품은 전적으로 소의 힘에 의지하는바 제때에 잘 먹여 기르고 잡아먹지 못하게 하라는 훈계이다. 이른바 농민을 귀하게 여기고 선비들을 권면하라고 한 것은, 바로 주부자가 말한 도를 배우고 몸을 닦아 민호(民戶)를 흥기시킨다고 한 뜻인 것이다. 이른바 산을 벌채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주부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주부자가 있던 남방 지방에는 물이 많고 산이 적었기 때문이다.이러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시험해 본 것들로서, 오로지 수령들이 어떻게 독려하고 신칙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묘당에서 그가 진달한 책자 가운데 있는 여러 조항들을 문서 뒤에다 기록하여 본도 이외의 7도 및 화성부(華城府)에 내려보내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자 상세히 살펴본 다음 관하의 수령들을 잘 신칙해서, 본받을 만한 조항들을 관심을 두고 채택해 시행해서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그 가운데서도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은 농사짓는 데 있어서 더욱 요긴한 것이다. 버들가지를 밭에 펴고, 개흙을 재[灰]에 섞고, 지붕의 짚을 썩히고, 짠물을 흙에 붓는 등의 방법을 써서, 땅이 비옥해지면 갈나무 잎을 펴서 지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흙이 부풀어 오르면 가는 모래를 고르게 섞어서 소출을 배로 거두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묘리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사람들이 부지런하냐 게으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 ‘근(勤)’이라는 한 자를 뽑아내어 교서문의 핵심 글자로 삼았는데, 지금 이 글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면서 능히 ‘근’ 자에다 귀결시켰으니, 몹시 가상하다. 이 비답 내용을 해당 도에 내려보내어 그로 하여금 유진목에게 등사해서 주게 하라.”하였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임박유(林博儒)가 진달한 14개 조목 가운데 10개 조목은 유진목이 진달한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한전제도(限田制度)를 정하자는 것과 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자는 것, 담배의 재배를 엄히 금지시키라는 것, 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라는 것은 유진목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전제도를 시행하자는 것은 말은 그르지 않지만 갑자기 논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담배의 재배를 금지하는 것은, 금지시키기는 참으로 쉬우나 역시 효과와 피해가 서로 엇비슷할 것입니다. 어공(御供)은 빠뜨릴 수 없다고 운운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극히 외람스럽습니다. 시골 유생이 비록 사체를 제대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감사가 어찌 살펴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해당 감사를 추고하소서. 그 가운데 환곡을 나누어주는 한 가지 일은 채용할 만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사로 하여금 영하(營下)의 고을 백성들에게 시행해보게 하고, 편리하다고 여겨지면 여러 고을에 시행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한전제도에 대한 일은 말인즉 좋으나 형세상 용이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비록 성세였던 하ㆍ은ㆍ주 삼대 때를 두고 말하더라도, 한 사람이 받는 전지가 하나라에서는 50묘(畝)였고 은나라에서는 70묘였으며, 주나라에서는 1백 묘였었으니,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비용이 점점 불어남에 따라 전지 역시 늘려주었다는 것을 대개 알 수가 있다. 진(晋)나라 태강(泰康) 때에는 한 사람당 70묘를 받는 제도가 있었지만 토지를 주고 받는 제도가 역사책에 쓰여져 있지 않다.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비로소 균전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전지를 균등히 나눈 데 지나지 않았다. 당 태종(唐太宗)이 시행한 호구별로 나누어서 대대로 이어가게 한 규정 역시 이것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영휘(永徽) 연간에 토지의 겸병(兼並)이 옛날과 같게 되었다. 대개 진(秦)나라에서 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이 1천 6백 년이 되었는데 능히 전지를 나누어주고 토지를 균등하게 하는 법을 시행한 기간은 2백 년에 불과하였으니, 저절로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우리 나라 6도(道)의 토지 대장에 등재되어 있는 전지의 총수를 경외의 사람 숫자에 비교해 보면 문무관(文武官) 3천여 명을 제외하고 사람마다 1결(結)씩만 나누어준다고 할 때 6백 63만 6천여 결이 부족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내가 즉위한 초기부터 가장 먼저 전정(田政)을 바로잡는 데 유의하여, 매번 이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밤까지 평상을 빙빙돌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그 요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몇 기분의 환곡을 합하여 나누어 주는 일은, 양반이라는 명색만 있고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이 없는 자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구걸하여서 환곡을 받아가는데, 늘상 이들에게 뜯겨서 잃어버리는 것이 원래부터의 공통된 폐단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몇 말의 환곡을 받아갈 때에도 오히려 관속들의 침탈과 점주(店主)들의 비용으로 뜯기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더구나 몇 섬을 한꺼번에 아울러서 받아갈 경우, 능히 종자곡과 농사지을 양식으로 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선은 한두 고을에서만 시험해 보는 것도 안 될 것은 없다.담배의 재배를 금지하는 일은,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이 엇비슷하여 술을 빚는 것과 같은 점이 있는바,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풍 장공(新風張公)의 말에서 충분히 근거삼을 수 있는 것이다.백성들에게 절약하도록 장려하는 일은, 오히려 조정에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어찌 백성들에게 책할 문제이겠는가. 경들부터 참으로 검소한 생활에 솔선수범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자연히 우역(郵驛)으로 명을 전하는 것처럼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점에 대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겠다.”하였다. 그리고는 장윤(張)과 안성탁(安聖鐸)이 또 유진목에 다음간다고 칭찬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장윤이 올린 농서(農書)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1.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토질을 잘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곡식을 심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내린 교서에서 유시한 바가 있으니 대소의 백성들 가운데 이를 환히 아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분발하여서 성과를 거두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어떤 땅에는 어떤 곡식을 심으라고 말하여 마치 규정을 정해놓는 것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버려두소서.1. 농기구 가운데에서 수차(水車)와 역거(役車)가 농삿일에 있어서 더욱더 긴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역거는 외바퀴수레를 쓸 수 있다는 일에 대해서입니다.수차의 제도는 일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법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그 만드는 법이 교묘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반 장인(匠人)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호(民戶)에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이 바로 우리 나라가 수차 만드는 제도를 잘 몰랐던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말하는 자들은 ‘중국에서 쓰는 것을 어느 곳에서인들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장인은 솜씨가 뛰어나고 중국의 재물은 풍족합니다. 그리하여 아주 가난한 자를 놓고 본다면 우리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과 다름이 없지만, 조금 부유한 자를 놓고 본다면 그 재산이 우리 나라의 부유한 자들보다 천만 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수차 한 대가 만들어지면 뭇 공장들이 이를 본따고 한 동네가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에 응합니다. 이 때문에 만들기가 쉽고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서 이를 시험해 보고자 할 경우 반드시 영읍(營邑)이 힘을 합친 다음에야 한두 대의 수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일반 백성들이 서로 모방한다는 것은 결코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역거에 이르러서는, 각도의 습속이 서로 다른바, 역시 영을 내려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버려두소서.1. 호남 지방에 오랫동안 양전(量田)을 하지 않아서 전지(田地)가 균등치 않고 부세(賦稅)가 공평치 않다는 데 대해서입니다.토지를 다시 양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복계(覆啓)에서 진달드렸습니다. 풍년을 기다려서 품정(稟定)하여 거행하겠습니다.1. 무주(茂州)와 순천(順天) 사이에는 사금(沙金)을 캐는 자가 줄을 잇고 농부가 아주 드물게 있는바, 이를 일체 금지시킬 경우 놀고먹는 무리들이 저절로 돌아가 농사지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입니다.금의 채취를 금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엄격히 실려 있고 농사를 해치는 일로도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각별히 엄하게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감사들을 엄하게 신칙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그 가운데에서도 농사철에 대해 상세히 진달한 것은 모두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서 말한 ‘우수(雨水)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驚蟄)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春分)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淸明)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穀雨)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立夏)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芒種)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夏至)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立秋)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處暑)에는 올벼를 수확한다. 반드시 절기에 앞서 갈고 심으며 절기에 앞서 물을 가두며, 또한 제때에 모를 내고 제때에 김을 매준다. 모를 낸 지 20일 뒤에 초벌김을 매며, 초벌김을 맨 지 13일이 지난 뒤에 두벌김을 매며, 두벌김을 맨 지 15일이 지난 뒤에 세벌김을 매면 곧바로 추수할 때가 된다. 만약 제때를 어긴다면 곡식이 잘 자라나게 하려 해도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말한 바가 형식적인 것을 벗어던지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니 기쁘다. 또 김을 매는 과정도 일일이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그러니 해당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를 특별히 권농관의 직임에 차임하고 가을 추수 뒤에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과한 뒤 감영에 보고하게 하고, 그런 뒤에 감사가 장계를 올리라고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라.”하였다.【원전】 47 집 138 면【분류】 금융(金融) / 상업(商業) / 출판-서책(書冊) / 식생활(食生活) / 인물(人物)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과학(科學)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왕실-사급(賜給) / 향촌(鄕村) / 교통-육운(陸運) / 인사-선발(選拔)[주-D001] 태세성(泰歲星) : 목성을 말함.[주-D002] 공류(公劉) : 후직(后稷)의 증손.[주-D003] 태왕(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 주 문왕의 조부로 처음 주나라를 세웠음.[주-D004] 원성(元聖) : 이윤(伊尹).[주-D005]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 : 전국(戰國) 시대에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수공(水工) 정국(鄭國)을 시켜서 진(秦)나라에 가서 대대적인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게 하여 진나라를 피폐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은 이 관개사업으로 관중(關中)이 비옥해져서 막대한 국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사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주-D006] 구공(九功) : 구공은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가리키는데, 육부는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ㆍ곡(穀)을 맡은 곳이며, 삼사는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주-D007] 축월(丑月) : 음력 12월.[주-D008] 미월(未月) : 음력 6월.[주-D009] 수령 칠사(守令七事) : 고려 때부터 지방관의 행정 지침이었던 일곱 가지 조목. 농상을 장려하는 일[農桑盛], 호구를 증가시키는 일[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學校興], 군정을 정비하는 일[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賦役均], 송사를 처리하는 일[詞訟簡], 간활한 짓을 종식시키는 일[姦猾息] 등인데 고과에 반영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주-D010] 제일(除日) : 섣달 그믐날.[주-D011] 송 문정공(宋文正公) : 송시열(宋時烈)을 말함.[주-D012] 태강(泰康) : 무제(武帝)의 연호.[주-D013] 신풍 장공(新風張公) : 장유(張維)를 가리킴.
    2021-04-26 | NO.369
  • 광주 유생을 시험보이게 하다 - 정조 22년
    어제한 시ㆍ부ㆍ전ㆍ의ㆍ책으로 광주 유생을 시험보이게 하다 - 정조 22년 무오(1798) 6월 18일(경술) 이에 앞서 어제(御題)한 시(詩)ㆍ부(賦)ㆍ전(箋)ㆍ의(義)ㆍ책(策)ㆍ오체(五體)를 내리면서 광주 목사(光州牧使) 서형수(徐瀅修)에게 명하여 광주로 가지고 가서 유생들을 시험보이게 하고, 겸하여 《어정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ㆍ《연의보(衍義補)》 및 《주자대전절약(朱子大全節約)》 등의 책을 내려보내 유생들을 시켜 고정(校正)하여 정서(淨書)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생들이 모두 광주 관아로 와서 응시한 다음, 그 시권(詩券)을 수합하여 올려보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친히 그 시권들을 검토하고 전교하기를,“어정서(御定書) 양본(兩本)을 교정하고 정서한 데 대한 노고는 이미 기념할 만하거니와, 고정(考訂)한 곳에 쪽지를 붙여 의견을 기록한 것에서는 또한 각각 지니고 있는 식견을 징험할 만하다. 그리고 도백이 추가로 선발한 사람들은 또 모두 고가(故家)의 후손들로서 특히 시ㆍ부ㆍ전ㆍ의ㆍ책 다섯 가지를 가지고 날짜를 나누어서 제술을 시험하였는데, 올려보낸 여러 시권들을 보니 걸구(傑句)와 가작(佳作)이 많았다. 생각건대 지금 이 재능을 살피고 장점을 비교하는 일은 곧 호남의 재능 품은 선비들의 명성을 천양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동안 가뭄 걱정으로 인하여 한가로이 수응할 겨를이 없었는데, 근래에 단비[甘澍]를 얻었고 또 오늘같은 경사스러운 날을 만났기에 비로소 등제(等第)를 나누노라.”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내리었는데, 그 내용은 1등을 차지한 고정봉(高廷鳳)ㆍ임홍원(任興源)에게는 사제(賜第)하고, 그 다음인 박종민(朴宗民)ㆍ정주환(鄭冑煥)은 초사(初仕)로 등용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하라는 것이었다.【원전】 47 집 92 면【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 출판(出版)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주-D001] 오늘같은 경사스러운 날 : 음력 6월 18일로, 즉 정조의 자궁(慈宮)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탄일(誕日)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2021-04-26 | NO.368
  • 광주목에서 호남의 제생들을 시험보이게 하다 - 정조 22년
    광주목에서 호남의 제생들을 시험보이게 하다 - 정조 22년 무오(1798) 4월 13일(정미)        경의(經義)의 조문(條問)과 정문(程文)의 과제(課題)를 내리고, 《어정대학(御定大學)》과 주서(朱書)의 교정(校正)으로 광주목(光州牧)에서 호남의 제생(諸生)들을 시험보이게 하였다. 전교하기를,“《어정대학》과 주서 등본(謄本)의 교정은 체모가 자별하므로, 교정하는 제생들에게 공령문(功令文)으로 시험보이고 경서(經書)의 의의(疑義)를 물어서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교정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교정할 제생 가운데 혹 빠진 자가 있을지 모르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도내에서 본래부터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다 모아 일체 고교(考校)의 반열에 부쳐서 함께 응시하여 조대(條對)하게 하도록 하라. 광주는 도내의 한 중앙이므로 사람들이 타지로부터 이곳으로 모이는데 있어 도리(道里)가 서로 알맞고, 해당 수령 또한 문자(文字)의 일에 익숙한 사람이므로, 해당 고을에 회동(會同)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연로하여 그곳에 올 수 없는 자에 대해서나, 또 혹 공령문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경의에만 익숙하다든지, 경의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공령문에만 익숙한 자에 대해서는 또한 모두 본인의 소원에 따라 응대(應對)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47 집 81 면【분류】 출판-서책(書冊)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2021-04-26 | NO.367
  • 광주목사 조연덕의 죄를 묻다 - 정조 15년
    정언 박길언이 지평 조각을 삭직하도록 아뢰다 - 정조 15년 신해(1791) 8월 28일(경오)        정언 박길원(朴吉源)이 아뢰기를,“언관(言官)의 거취는 염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소금 가게와 땔나무 가게 등 두 가게에 패(牌)를 내준 일로 그 당시 사헌부 관원들은 정배(定配)의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평 조각(趙恪)은 똑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면서도 단지 서계(書啓) 속에 끼지 않은 이유로 요행히 죄를 모면했습니다. 그 패를 내준 서리는 이미 유배의 처벌을 받았으니 그 자신의 도리로서는 응당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번에 관직에 제수하는 명이 내리자 스스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숙배하였습니다. 염치를 지키는 것에 관계가 있으니, 조각을 빨리 삭직하는 법을 적용하소서.이번 감시(監試)에 새로 정한 제도는 족히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고 과장의 질서를 엄격히 할 만한데, 조태림(趙台霖)의 문제는 평범한 범죄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비록 이미 처벌을 받았지만 이는 그 한 사람의 죄만은 아닙니다. 그 아비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조연덕(趙衍德)은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지방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로서 그 고을의 선비를 실어보내 그 패역한 자식을 돕게 하여 심지어 과장에 대신 들어가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그 아우 조태영(趙台榮)은 외람되게 승정원 주서로 있으면서 연석에 출입했으니, 새로 내린 명이 엄중하고 신칙하는 하교가 간곡한 것을 그가 어찌 못 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막지를 못했으니, 이처럼 무엄하게 법을 깔보는 무리를 시종의 반열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광주 목사 조연덕과 전 가주서 조태영은 모두 사판에서 영원히 삭제하는 벌을 내리소서.”하니, 비답하기를,“조각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조연덕과 조태영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태림의 죄는 곧 글씨를 빌린 것일 뿐 대신 지은 것이 아니며 그것도 또한 진짜 글씨를 빌린 경우와는 차이가 있으니, 범법이라고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아비와 그 아우 때문에 특별히 더 무거운 죄를 준 것이니, 그가 충군(充軍)된 것도 오히려 원통한 것이다. 그의 뜻하지 않은 죄로 인한 처벌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의 아비와 아우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하였다.【원전】 46 집 238 면【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선발(選拔)
    2021-04-26 | NO.366
  • 이조 참판 김희를 특보하여 광주 목사로 삼다 - 정조 14년
    이조 참판 김희를 특보하여 광주 목사로 삼다 - 정조 14년 경술(1790) 3월 25일(을사)        이조 참판 김희(金憙)를 특보(特補)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 그가 인사 행정에 즈음하여 어물거린 까닭이었다.【원전】 46 집 111 면【분류】 인사(人事)
    2021-04-23 | NO.365
  • 김덕령의 옛 신주의 매안 문제 등을 판하하다 - 정조 13년
    김덕령의 옛 신주의 매안 문제 등 상언한 19건을 판하하다 - 정조 13년 기유(1789) 4월 6일(임진)        상언(上言)한 19건에 대해 판하(判下)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광주(光州)에 사는 유학(幼學) 김치옥(金致玉)이 상언하기를 ‘6대 방조(傍祖)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에게 시호가 내리고 제사가 내림으로 인하여 다시 신주(神主)를 만들어서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든 신주를 이내 매안(埋安)하는 것은 인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박절함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에 없는 일이라서 조정에서 지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묵살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예제(禮制)에는 경도(經道)도 있고 권도(權道)도 있다. 전례를 참고하면 성삼문(成三問)과 김천일(金千鎰) 등의 일이 혹 의거할 만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미 만들었다가 이내 매안하는 것도 변례(變禮)에 속한다. 사손(嗣孫)이 없는 경우에 주제자(主祭者)를 정하여 주는 것은 일찍이 그런 예가 많았다. 특별히 그 문중(門中)으로 하여금 따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해서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게 하라.”하였다.【원전】 46 집 32 면【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2021-04-23 | NO.364
  • 음직 무관 10자리를 문관 자리로 만들다 - 정조 12년
    제도의 음직 무관 10자리를 문관 자리로 만들다 - 정조 12년 무신(1788) 7월 29일(기축)        제도의 음직(蔭職) 무관(武官) 10자리를 문관(文官) 자리로 만들었는데, 광주(光州)ㆍ순흥(順興)ㆍ삭녕(朔寧)ㆍ봉화(奉化)ㆍ은율(殷栗)ㆍ현풍(玄風)ㆍ낭천(狼川)ㆍ자산(慈山)ㆍ덕천(德川)ㆍ홍원(洪原)이다.【원전】 46 집 3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2021-04-23 | NO.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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