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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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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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金鎰)
    김일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태숙(台淑). 호는 해은(海隱)이다.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1261~1330)의 후손이며 동주(東州) 김덕구(金德垢)의 아들이다. 제용감(濟用監)과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숙종 때 광주(光州)로 이사했다. 그 후손들은 여수시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와 여수시 율촌면(栗村面) 구암리(龜岩里)에 살고 있다.*제용감은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서로 왕실에서 쓰는 각종 직물·인삼의 진상과 국왕이 사여하는 의복 및 사(紗)·나(羅)·능(綾)·단(緞)·포화(布貨)·채색입염(彩色入染 : 색을 입히고 물감을 들임)·직조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2020-03-09 | NO.211
  • 김재명(1901~1930)
    김재명(金在明, 1901~1930)의 본적은 광주시 동구 불로동 76으로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925년 광주청년회; 임원,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전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1927년 3월 제3차조선공산당 전라남도 책임비서, 광주 야체이카 담당자로 활동했다.1928년 2월말 정비된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지속으로 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3.1운동 10주년 기념시위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1928년 7월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옥고의 여독으로 폐병에 걸려 순국했다.'김재병의 상태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1929.12.30.) 기사에서는 "김재명은 정신을 일코 피골이 상접하얏스며 대소변을 바더내는 중이라 하며 ~ "라고 쓰고 있다.*김재기 전남대 교수 페이스북에서
    2021-02-26 | NO.210
  • 김진현(金珍鉉)
    김진현(1878~1966)의 본관은 광산이며 서방면 반용리, 현재의 북구 풍향동에서 살았다. 자는 경유(景儒)이며 호는 운파(雲坡)이다. 김진현은 광산(光山) 김씨이며 자는 경유(景儒), 호는 운파(雲坡)며 광주(光州) 서방(瑞坊)에서 출생하여 송사(松沙)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그의 거처에서 율계栗溪 정기鄭琦(1879~1950)의 寄贈鄭栗溪, 경당 최윤환의 呈崔敬堂(二首), 이용희李熙容의 花卉賦謹呈李雙石丈, 윤종림 尹宗林의 擊壺放歌賦奉呈尹竹下, 고언주 高彦柱의 夢遊楓岳賦寄高春坡, 범형식의 宿范善仲書齋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다지마(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기도 했던 강직한 지식인이요 처사였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고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오늘날 장성 고산서원인 1924년 담대헌澹對軒의 중건 때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24 | NO.209
  • 김찬순(金燦淳)
    김찬순(1809~?)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명수(明修)이고 호는 유헌(幽軒)이다.부 : 金尙白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4 | NO.208
  • 김치원
    김치원(金致謜 1562~?)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守眞堂)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湖節3上-021-3, 光州, 壬辰, 權慄參佐 -《호남절의록》(1799)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손자 김치원(金致謜 1562~?)은 ‘수진당(守眞堂)’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수진당이 풍영정 동쪽 산 기슭에 있다(堂在風詠亭東麓)고 적고 2수의 시를 남겼다.(題守眞堂/潭州錄)竹裏茅齋僻 苔庭絶點塵 煙沙一面水 花木四時春 耕釣堪終老 琴棋且樂眞 蕭然北窓下 方見葛天人夜宿仙滄里 林深草閣幽 芭蕉五更雨 蟋蜶一年秋 簪紱非吾好 丘園入客愁 遙知廣津畔 黍稷滿西疇/東岳集시애서 구원(丘園)은 언덕과 전원으로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 데  수진당(守眞堂)을 두고 그는 말하고 있다.다른 비슷한 기록도 있다. 김치원(金致源)은 광주 출신으로 선무랑 군자감주부인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의 아들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음사(蔭仕)하였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왜병을 격퇴하고자 투필종융(投筆從戎)하고 권율(權慄)의 막료로서 전투를 독전(督戰)하다가 커다란 상처를 입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공을 세웠다.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공급하였으며 세운 공으로 인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오르고 공훈이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또 임진왜란 때 도원수 휘하에서 활약했던 이세환(李世環)과 재종제 서암 이완근(李浣根)은 정충신(鄭忠信), 이충립(李忠立), 고성후(高成厚), 박대수(朴大壽), 김치원(金致源) 등은 광주팔장사(光主八壯士)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2020-04-02 | NO.207
  • 김태순(金泰淳)
    김태순(1832~1897)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신여(信汝)이고 호는 백봉(白峯)이다.부 : 金尙烈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외조 : 梁錫源처부1 : 權淳宗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1882년과 1885에 光州牧에서 金泰淳에게 준호구를 발급해 주었다.
    2020-02-24 | NO.206
  • 김홍담
    김홍담(金弘淡)의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자원子元, 幸州城戰(1593), 露粱海戰(1598)/ 宣武原從勳湖節2下-204-3, 光州, 壬辰, 一道擧義 -《호남절의록》(1799)*조선시대 1866년(咸豊 5년) 충훈부忠勳府에서 仁祖(1595~1649) 때 宣武功臣 金弘淡의 子孫 金東成 등 5인에게 각종 軍役을 부과하지 말 것을 명기한 계하절목啓下節目이 있다.
    2020-04-02 | NO.205
  • 김홍두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아호는 악포樂浦이며 서창면 용두리 155,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 서당에서 글을 배운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였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유장열柳璋烈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하였다.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김정호金鼎浩, 권태진權泰鎭, 임병한林炳翰, 윤형중尹瀅重, 윤치성尹致晟, 이현李鉉. 박성태朴性泰, 기명섭奇明燮 등과 규합하여 다시 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단원들은 수백명으로 증가하였고 군자금 보급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김홍두는 1918년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 남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하여 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창 학동 본가에 근거를 두고, 군자금 조달과 국내 각지의 청년회 조직정비를 위하여 활동을 하던 중 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 함구하니, 1920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상진朴尙鎭, 안재홍安在鴻, 현익길玄益拮, 이기선李起選, 기산도奇山度 등과 같은 감방에서 형기를 마쳤다.출감 후 1926년에 다시 전남과 전북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 하다가 장성경찰서에 피체되어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서승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 1933년 6월 9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전 애국지사 제1묘역에 잠들어있으며, 서구 용두동 163-4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18-05-28 | NO.204
  • 김희수(金喜洙)
    김희수(1891~?)의 본관은 광산이다. 자는 창술(昌述)이고 호는 하은(荷隱)이다. 당시 서방면 하백동에 거주했는데 오늘날 북구 매곡동306 일대이다.부 : 金永德연파정과 하은정을 경영하였다. 현재도 있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澹對軒重建扶成錄』
    2020-02-24 | NO.203
  • 김희순(金禧淳)
    김희순(1827~?)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명집(明集), 호는 묵재(默齋)이다.부 : 金尙烈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외조 : 梁錫源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6 | NO.202
  • 나도규(羅燾圭)
    나도규羅燾圭(1826~1885)의 본관은 나주이다. 자는 경문(敬文)이고 호는 덕암(德巖)이다. 당시 계촌면에 살았는데 오늘날 남구 석정동에 해당한다.부 : 羅禧集조 : 羅錫曾증조 : 羅弼殷처부1 : 李鉉臨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1880년 3월 25일에 奇陽衍에게 편지를 보냈다. 1883년 1월 13일에 광주 石亭에서 羅燾圭가 柏石軒 奇陽衍에게 편지를 보냈다.남덕정覽德亭을 경영했다.『덕암만록德巖漫錄』이 있다.덕암사상연구회에서 『덕암 나도규의 학문과 사상』(심미안, 2013)이라는 책을 안동교.박명희.김봉곤.김덕진.권수용 등이 펴냈다.
    2020-02-26 | NO.201
  • 노문규(盧汶奎)
    노문규(1850~1935)는 본관이 광산으로 자는 응삼(應三), 호는 송해(松海)이다. 1850년 7월 29일 당시 본촌면 일곡리에서 살았다.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문장과 도덕을 갖추었으며, 편지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하였다. 향교에서 유사를 맡은 여러 해 동안에는 읍강을 진흥하고, 향약을 만들어서 관찰부주사에 올랐다. 시사가 날로 그른 것을 보고 진취하는데 뜻을 끊고 사직하려하니 도백이 만류하였고, 영암군수를 맡기려하니 기어이 하직하였다. 풍질(風疾)로 1935년 5월 6일에 수북 삼각산에 장사했다.『송해유집』은 4권 1책의 석인본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시 70여 수, 「복록수부(福祿壽賦)」ㆍ「승평성세부(昇平聖世賦)」ㆍ「성학군덕부(聖學君德賦)」와 「공부자찬(孔夫子贊)」이 있으며, 2권에는 잡저(雜著)로 마지막에 「금융상황(金融狀況)」을 기록하였으며, 3권은 제문(祭文)ㆍ행장, 4권은 부록ㆍ부편(附編)이 들어있다. 일곡동 입구 북구 일곡로41번길 26에 송해당이라는 정자가 있다.1960년 국역으로 간행되었으며, 시의 원문은 한문으로, 번역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서문은 1960년 고연주(高淵柱), 행장은 1938년 이범석(李範錫), 묘표는 이병관(李炳觀)이 썼다. 卷1詩 : 溫井, 悼閔忠貞, 松汀詩會, 其二, 漢陽南山詩會, 謹題日新齋, 春夜與友敍懷, 完山秋夜與田艮齋(愚)諸友吟, 附田艮齋和吟, 續吟, 又吟, 又吟, 附金秋河和吟, 春雨, 燈, 筆, 龍興寺譜所敍懷, 續吟, 又吟, 書室偶吟, 書室對諸生吟, 草溪說濂堂小會, 和蓮塘贈別詩, 與沈承旨(九澤)李都事(奭)會話, 日新齋諸生席上與鄭江山(在舜)吟, 其二, 其三, 其四, 瑞南齋淸夜敍懷, 其二, 貨玄上舍(基奉)?韻(二首), 和錦雲(鄭泰老)原韻, 次楊波亭(鄭?奉洛敎)原韻, 謹次願豊亭韻, 次鄭?奉(洛敎)?韻, 次房素澗原韻, 題儒館, 與諸益暢懷, 白鷺二首, 偶題, 謹次天山齋韻, 次昌平小山亭韻, 次樂圃堂?韻, 日新齋詩會, 次樵隱亭(李章燮)韻, 謹次慕龍臺韻, 次心汕(李周英)韻, 宿東萊梵魚寺, 其二, 觀海, 回甲韻, 附和韻, 隱居有感, 其二, 次洛雲(李龍喆)韻, 九老會, 松海堂原韻, 附次韻賦 : 福祿壽賦, 昇平聖世賦, 聖學君德賦贊 : 孔夫子贊卷2雜著 : 嶺南宗中通文, 代光州鄕校儒林答京城人道公議所通文, 光州鄕校西齋(及)碑閣重建事通文, 代全南儒林以湖南誌事通文, 代湖南誌發起儒林通文, ●道宗中通文, 本郡民會趣旨書, 謝却封金, 光南測量學校趣旨書, 同追書, 勸學論理, 儒道彰明會趣旨書, 儒道彰明論, 金融狀況卷3記 : 日新齋記, 節李先生旌閭重修記, 永慕齋記, 松海堂記, 附記序 : 盧氏族譜序, 爲親?序, 門規序, 松海序, 附書卷4附錄 : 輓章, 祭文, 家狀, 行狀, 墓表, 跋附編 : 贈童蒙敎官朝奉大夫慕窩公行狀, 慕窩公墓表, 慕窩公旌閭記, 卷後小記祭文 부 : 盧啓悅조 : 盧弼英증조 : 盧有光외조 : 務安 車廷燁처부1 : 光山 金揚采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24년 담대헌(장성 고산서원)의 중건 때 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26 | NO.200
  • 노병운(盧炳云)
    노병운(盧炳云, 1911~1951)의 본관은 광산, 극락면 월곡리에 살았다.부 : 盧尙永조 : 盧錫興증조 : 盧宗奎외조 : 朱光玉처부1 : 崔洛鎭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8 | NO.199
  • 노석용(盧錫容)
    노석용(盧錫容, 1879~1954)의 본관은 광산, 자는 성행(性行), 호는 秉燭(齊)이다.부 : 盧澤奎조 : 盧景薰증조 : 盧弼仁외조 : 宋在淇처부1 : 鄭圭鎭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35년 4월에 吳東洙 高光洙 등 33명과 함께 도내 유생에게 通文을 보냈다.
    2020-08-08 | NO.198
  • 노재 배승무裵承武(1559~1593)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과 함께 7일간 혈전을 치르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사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나주 무열사에 배현경을 주벽으로 배정지裵廷芝ㆍ배극렴裵克濂이 제향되어 있었는데 1868(고종5년)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1882(고종19년)년에 다시 복건하여 배운룡裵雲龍ㆍ배공서裵工瑞ㆍ배공보裵工甫ㆍ배승무裵承武ㆍ배세조裵世祚 등 5위를 추배하였다.배승무(裵承武), 湖節1下-173-4,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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