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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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달생(金達生)
- 풍영정 주인 김언거의 9대손 거이당(居易堂) 김달생(金達生 1745~1791)은 대를 이어 풍영정을 운영하며 거이(居易)하며 지냈다.이곳에 김달생과 유유상종했던 시기에 서유승(徐有升), 정기정(朴基正), 이복영(李復永), 윤치용(尹致容), 심의복(沈宜復) 등이 들려 시문을 남겼다.여기에서 읊은 시들은 모두 풍영정의 정취를 읊고 있으며, 55수 가량이나 된다.
- 2020-03-11 | NO.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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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령(金德齡)
-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 되던 해에는 형 덕홍과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우계 (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지만 어머님 봉양을 위해 다시 광주로 귀향 후,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의병 지원활동을 하였다. 김덕령(金德齡), 湖節2上-001-1, 光州, 壬辰, 忠勇將 -《호남절의록》(1799)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서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왕의 특명으로 제도의 의병을 혁파하여 장군에게 예속시킴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그해 여름 진지를 대곡리에서 대여촌(현, 금산면 가방리)으로 진을 옮기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진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482m)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는가 하면 정상부근에 제무소를 두어 무기를 직접 만들기까지 하였다.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고성․창원․정암진 전투의 전과를 통해 왜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594년 9월, 곽재우․이순신․원균과 함께 참전한 수륙연합 장문포 해전에서의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 장군 또한 조정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였다하여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 하지만 1596년 7월,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다시 잡혀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장군은 “충효로서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596년 8월 21일 여섯 차례의 고문을 받은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곡 을 노래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봄철의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불이 붙어 다 타는구나.저 산에 일어난 불은 물을 뿌려 끌 수 있지만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이 일어나니 이 불은 끌 물조차 없는 것을 한탄하노라.이 노래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현종 2) 왕의 특명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후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숙종 7) 병조판서로 가증되었다.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정려비와 충효리’를 하사한다.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김덕령 평전(2006)》
- 2020-03-06 | NO.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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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보
-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효동에 살았다.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김덕홍(金德弘)·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전라도 곳곳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김덕홍이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데다가 김덕령이 무고에 의해 옥사하자 향리에 돌아가 세상의 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1626년(인조4) 2월 3일에 김덕보가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 추천해준 일은 감사하지만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안방준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이므로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 김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 2020-03-30 | NO.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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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우(1548~1633)
- 양촌 김덕우(金德宇, 1548~1633) 는 명종과 인조 때인 조선 중기 의병으로 자는 언용(彦容), 호는 양촌(良村)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노동(蘆洞)에서 출생하였다.판서(判書) 김인우(金仁雨)의 후손으로, 부친 생원(生員) 김경희(金景熹)와 모친 사과(司果) 이세원(李世元)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유학(遊學)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장성(長城) 남문(南門) 밖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무장군유사(茂長郡有司)로서 의병 8백 인을 모집하여 진주성(晉州城)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에 보냈다. 의곡(義穀) 5백 석을 모취(募聚)하여 의곡장(義穀將) 기효증(奇孝曾)을 통해 행재소(行在所)로 조납(漕納)하도록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도 유사로서 의곡을 모아 행재소로 운송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동지사를 제수(除授)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의병 모집 격문에 응하여 호우의곡장(湖右義穀將)으로 활약, 군량미를 강화도에 보냈다. 마침 의병을 인솔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렀을 때,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하였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의 녹권을 내렸다. 묘지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송암에 있고, 장성 오산사(鰲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2024-11-08 | NO.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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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홍(金德弘)
- 김덕홍(1558∼15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후(金珝), 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다. 부친은 습독(習讀) 김붕변(金鵬變)이다. 동생은 김덕령(金德齡), 김덕보(金德普)이다.김덕홍의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김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김덕령과 김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아 전주에 이르렀을 때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금산으로 진격하기 전 김덕령에게 말하기를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아우만이 혼자 있으니 우리 형제가 모두 나선다면 어머님을 보호할 사람이 없게 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님을 봉양하여라.”고 당부하였다.그해 7월 10일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하였다. 김덕홍(金德弘), 湖節1上-046-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이 무고죄로 옥사하자 무등산 계곡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했다.1785년(정조 9) 지평(持平)으로 증직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하였다. 슬하에 딸 2명을 두었다. * 《광주읍지(1879)》, 《국역 김충장공유사(1979)》, 《호남절의록(1799)》, 《김덕령 평전(2006)》
- 2020-03-06 | NO.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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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
-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김동선(1800∼1874)의 본관은 청풍(⾭⾵)이며, 자는 자의(⼦儀)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김기협(⾦基恊)으로, 예조참의 김회연(⾦會淵)에게 입양 되었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영희전 참봉, 1841년 금부도사, 1842년 사재직장, 1844년 활인별제·제용주부·가례도감 낭청, 1845년 의빈도사, 1847년 백천군수, 1849년 합천군 수, 1853년 이천부사, 1855년 성주목사, 1858년 의성현령을 지냈다. 1862년 1월 28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에 부임하였다. 9월 8일에 대동(⼤同) 결전(結錢) 상납을 지체한 일로 나수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조운의 출발을 지연시킨 일이었다. 1869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돈녕도정, 조사 오위장, 1874년 부호군, 1874년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술(1862년) 1월 28일에 제수되어 3월 4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3월 15일에 부임하였으며 계해(1863년) 4월에 대동선 1척이 치패된 일로 취리차 상경하였는데 용서를 받고 7월 3일에 서원현감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천시 안흥동 안흥지에 「부사김공동선 청근선정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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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수(金東洙)
- 광주, 담양 등지에서 일제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한 김동수(1879∼1910)는 본관은 김해로 광주목 경양면景陽 병문리屛門 , 현 북구 우산동 283번지에서 태어났다. 처가는 중흥동 84-3번지이다.(후손 김홍두 증언) 그는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7년 이원오(李元五)·조경환(曺京煥)·양상기(梁相基)·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합진하여 활약하였다. 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갑마보(甲馬保)면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였다.김동수 의병장은 뒤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65명의 의병으로 편성되었고, 부관은 이기섭(李基燮, 서방면 모른거리(毛弄里) 출신), 선전병은 선덕현(宣德玄, 서방면 신나굴(溪川里) 출신), 도포사는 임윤팔(林允八)․임윤오(林允五, 오치면 외촌 출신) 형제, 도십장 김재민(金在珉, 천곡면 봉산리 출신)이었고, 의원(義員)은 양동골(梁東骨, 서방면 솔대거리(孝竹里) 출신), 백학선(白學善, 모른거리 출신), 그리고 박포대(朴砲大, 신나굴 출신)이었다.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담겨 있는 장군의 활약상은 의병을 폭도라 하고 군자금 징수를 강도나 갈취로 친일분자를 양민으로, 침략자인 군경을 치안담당자로 표현하고 있어 내용을 잘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그런데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이 한 활동을 일제 측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김동수 의병장은 양진여의 부하로 1908년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伏龍里)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돌아다녔다.1909년 3월 15일에 삼취지(三取旨)동에서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수합, 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특히 1909년 5월 19일에 5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광주군 덕산(德山)면 덕산에서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의 적군들과 접전을 벌였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시 갑마보면 본촌(本村)동 김영조 집에서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과 교전하였다. 의병장 김동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광주 뿐만 아니라 담양(潭陽)·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 사창(社倉)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어 1910년 2월 22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김동수 의병실록(1986)》, 《광주시보》(이상식, 1985년 12월호)
- 2020-03-06 | NO.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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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리 ⾦履 우왕 12년(1386) 9월∼우왕 13년(1387) 7월
- 김리 ⾦履 우왕 12년(1386) 9월∼우왕 13년(1387) 7월김리(?∼?)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그의 행적은 『고려사』 1392년 (공양왕 4) 5월 17일 기록에 보인다. 사헌부 겸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예조판서 김리(⾦履)는 젊어서부터 권세가에 붙어서 별다른 재행이 없는데도 외람되게 관작을 받아 육부(六部)까지 이르렀습니다. 모두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진심으로 힘을 다해서 성은에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정몽주와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충량한 자들을 모함하여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여 국문하고 논죄 하여 후세에 감계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설장수와 김리를 파직 하여 전리(⽥⾥)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금성일기』 「병인년 1386년」에 “목사 김리가 9월에 도임하였다가 정묘(1387년) 7월에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 지』에는 “병인(1386년) 9월 도임, 정묘(1387년) 7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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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식(金晩植)
- 김민식(1845~1922)의 본관은 광산이며 충효리에서 살았다. 자는 사성(司晟)이며 호는 난실(蘭室)이다. 부 : 金洪泰조 : 金琦鉉증조 : 金致儀외조 : 金學中처부1 : 高殷鎭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취가정을 경영하였고 『蘭室遺稿』가 있다.
- 2020-02-24 | NO.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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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
-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김만증(1635∼1720)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경능(景能), 호는 둔촌(遯村)이다. 아버지는 판서 김익희(⾦益熙)이며, 김장생(⾦⾧⽣)의 증손이다. 승지 김만균(⾦萬均)의 동생이다. 166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64년 음보로 내시교관, 1669년 사옹참봉, 1670년 세마, 1672년 우수운판관, 1674년 신녕현감, 1680년 공조좌랑·좌수운판관, 1681년 임피현령, 1685년 돈녕판관, 1686년 호조정랑, 1689년 사복첨정, 1694년 한성판관·선산부사, 1698년 좌윤을 지냈다. 1699년 7월 22일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701년 부호군, 1702년 청주목사, 1704년 오위장, 1708년 첨지, 1709년 돈녕도정, 1716년 부호군, 1718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금성읍지』에는 “기묘(1699년) 윤7월 22일 도임하였고 경진(1700년) 6월 10일에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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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
-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김말문(1469∼1525)의 본관은 광산(光⼭)이다. 149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 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아버지 김성원(⾦性源), 할아버지 김예몽(⾦禮蒙), 증조할아버지 김소(⾦遡)와 형 김윤문(⾦胤⽂), 김철문(⾦綴⽂), 동생 김내문(⾦乃⽂)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이다. 형제 여덟 명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네 명이 대과에 합격해 ‘팔문(⼋⽂)’으로 이름을 높였다. 1501년 예문관 대교(待敎)를 시작으로 사간, 동부승지를 거쳐 1513년 8월 21일 통정대부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부임하여 1516년 1월까지 재직하고 형조참의로 영전했다. 1522년 우승지, 1524년 좌승지를 거쳐 1525년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513년) 10월 17일 도임하였고, 병자 (1516년) 1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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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원 ⾦命元 선조 7년(1574) 1월 12일∼선조 9년(1576) 7월
- 김명원 ⾦命元 선조 7년(1574) 1월 12일∼선조 9년(1576) 7월김명원(1534∼1602)은 1583년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금성읍지』에는 “만력 갑술 (1574년) 1월 12일 도임하였고, 병자(1576년) 7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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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진 ⾦明鎭 순조 12년(1812) 7월 17일∼순조 14년(1814) 4월 2일
- 김명진 ⾦明鎭 순조 12년(1812) 7월 17일∼순조 14년(1814) 4월 2일김명진(1748∼?)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성윤(聖允)이다. 아버지는 유학 김상경(⾦尙 慶)인데 이조판서를 지낸 김상성(⾦尙星 1703∼1755)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64년 성균관 유학으로 들어가 1774년 생원에 급제하였다. 1778년 원릉참봉, 1779년 종묘 부봉사, 1780년 상서부직장, 1781년 상서직장·공조좌랑, 1782년 한성주부, 1797년 사옹주부·사직령·경기전령, 1798년 한성서윤·공조좌랑, 1799년 한성판관, 1800년 통천군수, 1808년 이천부사를 지냈다. 1812년 6월 2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금성 읍지』에는 “임신(1812년) 7월 17일 부임하였고 갑술(1814년) 4월 1일 선산부사와 서로 바꾸어 근무하게 하였다.”라 기록되었다. 실록에 1814년 3월 26일에 연안부사 권준과 서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이 교동수사로 있을 때 갈등 관계로 상피한 적이 있었다는 보고에 연안부사는 그대로 계속 근무케 하는 대신 4월 2일에 선산부사 이민 식과 서로 바꾸는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후 선산부사 재직 시 행정을 잘 하였기에 「부사김후명진청덕선정비」가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에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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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 金倣
- 광산김씨 김방(金倣)의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승노(承魯)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의 딸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를 거쳐 조선(朝鮮)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통훈대부, 김제(金堤)군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근무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 땅 벽골제(金堤 碧骨堤= 저수지)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 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그 후 광주 목사로 재임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제민하는 뜻을 받들어 공의 개인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光州 景陽堤) 방죽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공이 죽은 후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증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光寺)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후손이 남면(南面) 재궁동(梓宮洞)에 재실을 지어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見勝覽及兩郡誌) 배(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 2020-05-17 | NO.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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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우 ⾦炳愚 고종 5년(1868) 10월 24일∼고종 8년(1871) 6월 20일
- 김병우 ⾦炳愚 고종 5년(1868) 10월 24일∼고종 8년(1871) 6월 20일김병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여(聖汝), 호는 우전(⾬⽥)이다. 문정공(⽂正公) 청음(淸陰) 김상헌(⾦尙憲)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집의 김직순(⾦直淳),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정헌(靜軒) 김인근(⾦仁根)이다. 어머니는 해평윤씨이다. 1850년 음보로 공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1852년 내자시 참봉이 되었고, 1854년 장악원 주부·사복시 주부·한 성부 주부를 지냈다. 1855년 의령현감, 1859년 괴산군수, 1864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868년 9월 1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24일 부임하였다. 1870년 10월 7일 세곡(稅穀)을 더 싣는 일에 대해 선혜청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잡아오기를 청한다하였으나 성역(城役)이 한창 바쁜데 아직 준공을 보지 못하여 직무를 비워두는 것은 염려스러 우니 의금부로 잡아다 처리하는 일은 그만두고 죄를 진 로거행하게 한다. 1870년 8월 1일에는 전라감사 (李鎬俊)장계에 따라 성첩(城堞), 문루(⾨樓)를 새로 건축할 때 녹봉을 털어 재물을 모은 것을 차례로 시작하였으니, 포상을 감독한 사람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보답을 베풀어야 마땅하다 해 8) 표리(表裏) 1습(襲)을 특별히 사급받는다. 12월 27일 에는 전라감사의 장계에 따라 3년 동안 다스리면서 패국(敗局)이 거의 회복되었다 하여 특별히 한 임기를 잉임시키도록 한다. 1871년 1월 3일 잉임 전지를 받는다. 1873년 동부승지·우부승지, 1880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868년) 9월 17일에 통정대부 선산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임금을 사조한 후, 10월 24일에 부임 하여 재직하다 신미(1871년) 1월 3일 만기를 넘겨 근무하다 6월 20일에 양주목사로 발령이 나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9년 나주향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