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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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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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종룡(盧鍾龍)
    노종룡(1856~1940)의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치운(致雲), 호는 소해(蘇海),농아(聾啞)이다. 당시 본촌면 일곡리에서 살았는데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 최익현의 문인이다.부 : 盧在奎조 : 盧鎭權증조 : 盧弼元외조 : 鄭錫源처부1 : 金箕彩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掌位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05년 11월 12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蘇海遺稿』가 있다.노종용의 소해정(蘇海亭)이 오늘날 남아 있다.
    2020-02-26 | NO.196
  • 노준공(盧俊恭)
    노준공(1340∼1397)은 광주 출신으로 그의 후손들이 일곡동 일곡마을에 자작일촌하고 있다.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광주이다. 고려 말 밀직사를 지낸 사청(士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어머니 병환에는 옆을 지키며 손수 약을 달여 드리고, 변(똥)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여 병세가 위태로울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일시 소생하게 하는 등 극진한 효도에 주위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려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그는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시묘 때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호위하며 따랐다고 전해지고 있다.조선을 창업한 이 태조가 그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리고 몇 차례 불렸으나 거절하고 무등산 계곡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광주읍지(1879)》, 《효행열지(1985)》, 《노씨위적사(1988)》
    2020-04-01 | NO.195
  • 농포 류희달(1571~1631)
    류희달柳希達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호는 농포弄圃이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규합하여 활약하였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으로 재직하였으며 1599년(선조32)에 죽산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0년(선조33) 의인왕후懿仁王后 국상 때 산릉을 만드는 역군役軍을 늦게 보낸 일로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여 살았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을 받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1947년에 농포선생을 기리기 위한 농포류선생신도비가 세워진 바 있다.
    2020-05-11 | NO.194
  • 눌재 박상朴祥(1474~1530)
    박상朴祥(1474~1530)은 진사 박지흥의 차남이며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호남 사림의 대부이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눌재는 1474(성종5년)년에 광주 방하동 본가에서 성균관 진사였던 부친 지흥과 모친 계성서씨 사이에서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씨 집안은 대대로 송경에서 살아왔는데 조고판서공 때 호서의 회덕현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인 찬성공이 다시 부인서씨의 고향인 서창 방하동 봉황산 아래로 옮겨 터를 잡았다. 눌재의 아버지가 호남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부인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과 관련하여 벼슬길을 포기한 것으로 눌재의 집안이 절의파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눌재는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단정하고 얼굴빛이 영명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학문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눌재의 첫번 째 스승은 아버지인 찬성공이었는데 부친은 그가 1488년 15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눌재의 백형인 하촌 박정이 눌재의 학문을 담당했다. 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눌재의 기억력은 비상하였으며 부친과 백형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명예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통감하여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경술에 널리 통하였고 문사에도 큰 진보가 있었다. 1496년 진사시를 지냈고 1501년 28세에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는데 첫 관직으로 교서관 정자를 제수받았고 이듬해 승문원 교검과 시강원 사서를 제수 받았으며 1년 뒤에 병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눌재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문으로 닦아왔던 의리정신을 실제 정치현장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의리 정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은 전라도사로 부임하였을 때에 일으킨 김소부리(우부리) 장살 사건이다.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성정은 참으로 곧았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을 위해 아낌없는 선정을 행했다. 전라도사 시절 나주의 우부리가 연산군의 후궁으로 있는 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자 그의 죄상을 물어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그 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센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세른 세 살 때인 1506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사헌부와 더불어 임금의 내척과 외척 등의 성급한 발탁을 간언하는 등 간관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였다. 당시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과 재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왔다.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 등의 전관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사헌부가 대간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하여 곧 종묘서령, 소격서령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이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임피현령으로 3년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했다.서른여덟 살 되던 1511년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담양부사가 되었다. 마흔 두 살인 1515년 봄 또 다시 필화에 얽혔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상빈上賓 문제로 바른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순창군수 충암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전 왕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려 바른말을 하였다.조광조와 교유했던 박상은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후 남평 오림역烏林譯으로 유배를 가자 조광조가 박상을 옹호하며 유배를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조광조는 1519년에 능성(현재 화순 능주)으로 유배를 가며 광주를 거치자 박상은 광주 읍성 남문 밖 10리에 있는 분수원에서 그를 만나 면회하였다.박상은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고, 광산 출신의 하서 김인후와는 교분이 깊었다. 임억령, 송순, 정만종 등이 박상의 문하에서는 직접 사사했다. 임억령과 깊은 교유를 한 사람이 고경명이고, 송순의 문하에서 정철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호남지방에 성리학을 보급하고 호남사림을 형성.발전한 대표적 인물이다. 박상은 호남사림의 원조인 셈이다.1516년에 대한발로 인해 석방되어 향리에 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의빈부도사,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중앙부처에 염증을 느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26년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에 장원급제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승진하지 못하고 나주목사로 선정을 베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다 1530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간공으로 하였으며 광주의 월봉, 순창의 화산, 담양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여러 차례의 혹독한 변고를 당하였어도 위엄이 사그러들지 않았으니 퇴계 이황은 그의 고상한 기품과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다며 ‘하늘이 내린 완인’이라 하였다. 청백리로 추천받았고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성신 신광한, 황정욱과 더불어 서거정 이래로 사가로 높이 칭송되었다. 정조의 시문과 논음, 교지 등을 모아 만든 홍재전서에서 조선 5백년의 으뜸가는 시인이라 일컫는 읍취헌 박은과 비교하면서 눌재 시의 우월함을 찬양하기도 했다.당대의 명현인 사암 박순과 숙질간이다. 저서는 <눌재집訥齋集> 8권이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눌재가 호남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그가 생존했던 16세기부터 17세기를 거치는 사이 호남에서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수준에 있어서도 절정기에 이르렀는데 이 호남 시단의 첫머리에 눌재가 자리하고 있다. 눌재는 주로 호남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이는 자신이 광주 출신이므로 교유의 범위가 호남 위주가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이들이 대부분 호남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혁혁한 문사들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눌재의 교유 시인 중에서 또 하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리는 기묘사화에 관련되었던 기묘 제현들이다. 눌재는 기묘사화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눌재와 기묘 제현들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신잠, 김세필, 윤구, 고운, 김정, 소세양, 임억령, 조신, 정사룡, 정만종 등이 눌재의 교유 시인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신잠부터 김정까지가 눌재와 함께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시인들이다. 또한 눌재에게 사사하였거나 교유 이외에도 기묘사림과 뜻을 같이 하였던 복재 기준의 조카 고봉 기대승과 기묘명현의 한 분인 하천 고운의 손자 제봉 고경명 등도 눌재의 문하라고 할 수 있다.
    2018-08-19 | NO.193
  • 동국여지지 제1권; 권율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뜻을 독실하게 지니고 학문에 힘썼다. 소경왕 15년(1582)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25년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권율은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남원(南原) 이현(梨峴)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얼마 뒤 본도 관찰사로 승진하여 병사를 이끌고 왕을 근위하기 위해 고양(高陽)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렀다. 당시 왜의 장수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왜적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 왔는데, 권율이 힘써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졸한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율은 중후하고 기량(氣量)이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을 성의로 거느리고 위엄과 굳건함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회복할 수 있었고 명장(名將)으로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행주대첩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개성(開城)에 있으면서 유격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함께 만나 보기를 청하고 감탄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부대에 비할 바가 아니니 외국에 참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왜의 우두머리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권 원수(權元帥)의 안부를 물었다.
    2022-05-06 | NO.192
  • 동국여지지 제2권; 박순(朴淳)
    박순(朴淳) 광주(光州) 사람이다. 본조 선조(宣祖) 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공의 청렴한 지조를 존경하였다. 만년에 당시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영평현의 백운계 가로 물러났는데, 거처하던 곳에 배견와, 이양정이 있었다.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약초를 심고 고기 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촌사람과 야로(野老)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면 기쁘게 마주하여 술을 마셨고, 학자들이 와서 강론할 때는 매번 추위나 더위를 잊었다. 끝내 이곳에서 졸하였는데, 공이 죽자 성혼(成渾)이 만시(挽詩)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만시에,세상 밖 백운산 깊고도 깊은데 / 世外雲山深復深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 / 拜鵑窩上三更月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하였다.
    2022-05-06 | NO.191
  • 동국여지지 제3권; 양원준(梁元俊) 광주 감무(光州監務
    서리(胥吏)에서 시작하여 광주 감무(光州監務)가 되었다. 인종(仁宗) 때 누차 옮겨서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외직으로 나가 상주 부사(尙州副使)가 되었다가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하며 순박하고 솔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가 한결같았다. 생업을 일삼지 않고 접대나 선물을 받지 않아서 문 앞이 쓸쓸하였다.
    2022-05-06 | NO.190
  • 류박
    류박(柳璞), 湖節5上-091-1, 光州, 丙子, 扈從-《호남절의록》(1799)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때는 이 고장 출신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2020-04-02 | NO.189
  • 류사경
    류사경(柳思敬, 1556~?), 湖節1上-070-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류사경은 문화류씨이며 자는 덕신德新, 호는 육유당이다. 우의정을 지낸 류량의 8대손, 유혜의 아들이며 광주 이장(光州 泥場), 현 남구 양과동에서 자랐다. 문장에 뛰어났고 절개(節槪)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회재 박광옥의 사위이다. 임진왜란 때 늘 박광옥의 곁에 머물러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노력했고, 박광옥의 행장을 지었다.‘양과동적입의서(良苽洞籍入議序)’나 ‘양과동정향약서(良苽洞亭鄕約序)’ 등에 따르면 ‘옛 부곡(部曲) 일대의 동약이 잘 지켜지지 않아 성종 때 다시 동적을 만들었으나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며 준수가 안 되어 새로이 1604년 류사경(柳思敬)이 동약을 재정했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1605년(선조 3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사 박종정(朴宗挺)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도신(道臣) 이황(李滉)의 두류(逗流)의 죄(罪)를 논척(論斥)하였고 별제학(別提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시배(時輩)들을 미워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광주읍지, 광주시사 『육유당일기(六有堂日記)』는 장성 필암서원의 1975년 『필암서원지』권 12. 장서목록 - 206종 777책에 들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정유재란 때의 일기가 실려있다. 광주에서 올라와서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기록한 서행일기도 나온다. 월파집3권의 의병기인 월파 류팽로장군 의병일기 임진(壬辰) 6월 초4일 임진에 보면 "광주의 수령 정윤우(丁允祐)가 군량 50석과 소 두 마리를 보내왔고 전 진사 류사경(柳思敬)도 양식과 기계를 모아서 도와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2020-04-02 | NO.188
  • 류술
    류술(柳述, 1582~1652)의 자는 효숙(孝叔). 호는 애죽헌(愛竹軒)이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8대손, 예조좌랑 육유당 사경(禮馴佐郞 六有堂 恩敬)의  둘째로 선조(宣祖) 15년 壬午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외조(外祖)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에게 학문을 익혀 문장과 행의로 그 명성이 드러났었다. 인조(仁祖) 5년 丁卯(1627) 정묘호란에 호소사 김장생(號召使 金長生) 소모유사(召幕有司)가 되어 의병(義兵)과 군량(軍糧)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는데 의병을 해산하라는 엄지(嚴旨)가 있어 의병을 해산했다. 김장생의 거의록(擧義錄)에 柳述。字孝叔 號愛竹軒 文化人 朴懷齋光玉外孫也 丁卯亂 先生辟公以軍器有司 公到全州 聞媾成罷歸(居光州) 동궁(東宮)을 호종(扈從)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전(和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시골로 돌아왔다. 湖節4下-128-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광산군 대촌면 유등곡 건덕산 선영 북록(光山郡 大村面 柳等谷 建德山 先瑩 北麓)에 안장되었다.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온침(蘊沈)의 女,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생원 엄(生員 儼)의 女인데 모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동생 선(季弟 選)의 장자 종기(宗起)를 맞아 계자하였다.
    2020-04-02 | NO.187
  • 류인대(유인대)
    류인대柳寅大(1895~1976)의 자는 國南, 호는 月湖이며 左相公派 大丞公 33世손이다.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후예로 농포 희달(弄圃 希達)의 9대손이요, 용강 년영(龍崗 年永)의 3자인데 출계하여 백부인 소파 석영(小坡 碩永)의 계자(系子)가 되었다.광산군 본량면 동호리에서 태어났는데 풍채가 근엄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일용 행사(日用 行事)가 확실하였다. 일찌기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 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선생께서 침중과묵(沈重寡黙)으로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생양 양정(生養兩庭)을 섬기되 뜻을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여러 누이들로 더불어 우애 또한 독신하였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 제반 절차를 예제(禮制)에 쫒아 행하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여재지성(如在之誠)을 다하며 친척간에 돈목(敦睦)을 위주하였다.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586-1에 대동사(大東祠)를 창건하는데 재목(材木)을 거의 독담하였다. 말년에는 문중도유사(門中都有司)로서 제반 종사(宗事)에 헌신하였다. 또한 임종에 유언으로 사우(祠字) 밑에 강당 부지(講堂 敷池)를 희사하라 하시어 돌아가신 후 그 손자 재천(在泉)이 그 뜻을 받들어 종중에 희사하여 지금 강당이 서게 되었다.향년 82세로 졸하니 동호리 월륜동 선영하에 안장하였다.배위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참봉 종만(參奉 鎭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종렬(種烈)이요, 사위는 전주 이동혁(全州 李東奕) ․ 천안 전종태(天安 全鐘泰) ․ 전주 이현권(全州 李鉉權)이다. 손자는 재천(在泉) ․ 증석(增奭) ․ 재원(在苑) ․ 재응(在應)이다.1981년에 종중에서 공의 위선지성(爲先之誠)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돌을 다듬어 대동사 사우(祠字) 밖에 공의 공적비(功績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유현 장재철(惟玄 張在鐵)이 지었으며, 공의 묘갈명은 족질 동강 류한상(東江 柳漢相)이 지었다.
    2018-11-21 | NO.186
  • 류인석(柳寅奭)
    유인석(柳寅奭)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아버지는 유하영(柳河永, 號 農山), 어머니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 5월 9일 태어나 광산구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로 단묘절신(端廟節臣) 서산공(西山公) 자미(自湄)의 16세손이다. 선친은 농산공(農山公) 하영(河永)으로 광산구 본량면 동호리(東湖里) 신촌(莘村)에서 수당을 낳았다. 수당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보이는 천성에 의용(儀容)이 단중(端重)하고 영민하여 범인과 달랐다.노사 기정진의 문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1835∼1885) 문하에서 수학했다.공부가 무르익으면서는 면암 최익현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갖추었다. 따라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로 이어지는 위정척사 사상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문집으로 『수당유고(睡堂遺稿)』가 있다. 는 4권 1책의 연활자본이다. 문집의 서문에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권 1에 수록된 서(書)에 면암(勉菴), 연재(淵齋), 송사(松沙) 선생 등에게 보낸 서간이 다수 실려 있어 그의 교유와 학문이력을 짐작하게 한다. 수당유고(睡堂遺稿)에는 사사(師事)했던 대곡 김석구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외에 송사 기우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 등에게도 학문을 묻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이당(以堂) 정경원(鄭經源), 석전(石田) 이병수(李炳壽) 등 당대 이 고장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당유고>에는 ‘면암의 의거시에 신병(身病)으로 달려가지 못해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면암 순절(殉節) 후로는 향리산간(鄕里山間)에 멸영자정(滅影自靖)하더니, 경술국치(庚戌國恥) 후로는 민족정기를 후진들에게 전수하는 교육에 전념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단발령이 내려지자, ‘손자들의 단발을 엄금하고 일인들에 항거했다’는 구절도 엿보인다.서문은 1974년 권용현(權龍鉉), 발문은 1974년 문생 송흥진(宋興鎭)ㆍ증손 유장현(柳璋鉉), 묘지명은 1974년 문생 윤요중(尹堯重)이 작성하였다. 1975년 광산군 대산사(大山祠)에서 편집ㆍ발행하고 광주 청우당(靑友堂)에서 인쇄하여 발간하였다.
    2020-08-08 | NO.185
  • 류재천
    류재천(柳在千, 1914~? )의 자는 성천(誠千) 호는 송호(松湖), 광주 송정읍에서 출생했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후예로 만은공 도장(晩隱公 道長)의 16대 종손, 육유당 사경(六有堂 思敬)의 11대손,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된 서은 인열(瑞隱 仁烈)의 장자이다. 광주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음성박씨 필수(陰城朴氏 必修)의 따님이다. 장성하면서 유학의 깊은 뜻을 정숙(精熟)하여 수제(修齊)하는 도를 깨닫고 종중사(宗中事)를 관장하였다. 광산구 수정동에 율수재(聿修齋), 나주에 금산재(衾山齋)를 건축하고 전대(前代)에 이루지 못한 선영(先塋)에 석의(石儀)를 갖추는 한편 율수지(聿修誌)를 편간하였다. 문화류씨 종의(宗議)로 1981년 경앙재(景仰齋) 낙성과 더불어 그의 숭조사행(崇祖事行)을 비에 새겨 칭송했다. 대한시우회 전남도지회장으로 6년 동안 재임하면서 시조(時調)의 보급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노력하고 송정동에 황강정(黃江亭)을 축조하여 노인들의 소영자적(嘯詠自適)하는 곳으로 이용케하고, 각시군지회(各市部支會)를 육성강화했다.대회장(大會長)으로서 라구지회 주최 전국시조경창대회(全國時調競唱大會)를 마련하고 전남지부주최 전국경창대회 및 전국시조가사가곡경창대회(全國時調歌詞歌曲競唱大會)를 광주에 유치하여 대성황을 이룩하였다. 이리하여 광주지역에서 국창 1인 시조명인 7인이나 배출하였으며 전남문화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중앙본부총회(中央本部總會)에서 공로패(功勞牌)를 수여함과 동시에 본부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후 1985년 3월 전국시조명인급 인사들이 의합(議合)하여 총회에서 송호 류재천선생공적비(松湖柳在千先生功績碑)를 5월에 광주시 남구 봉선동 984에 건립했다. 비문은 대한시우회본 부회장 인간문화재 석암 정경태(石庵 鄭坰兌)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고광열(高光烈)이 썼다. 부인은 광산정씨 판서 응종(光山鄭氏 判書 應鐘)의 후손으로 덕재공 기림(德齋公 琪林)의 장녀로 슬하에 3남2녀로 상선(相善), 필선(弼善), 경선(景善)이며 큰 딸은 나주김씨 두연(羅州金氏 杜衍)에게 작은 딸은 광산 김씨 춘현(光山金氏 春鉉)에게 출가하였다.
    2020-03-27 | NO.184
  • 류휘진(1556~1593)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의 시호가 내려졌다.류휘진(柳彙進)의 자는 언우(彦遇)이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湖節1下-096-1, 光州, 壬辰, 金千鎰同殉 -《호남절의록》(1799)성해응(成海應, 1760~1839) 의 『硏經齋全集』 卷之五十九 蘭室史科二의 <晉陽殉難諸臣傳>에는  柳彙進字彦遇。文化人。素倜儻好奇節。壬辰從金千鎰起兵。常爲軍鋒。及晉州陷。與千鎰俱死。年三十八。甞以軍功拜軍器主簿。後贈戶曹參判。子瓘,璜亦死丁酉之難조선 후기 문신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의 『창하집(蒼霞集)』 권8의 묘갈명 중에 <軍器寺主簿。贈戶曹參判柳公墓碣>에 …節光州。閱輿地誌。有曰。柳彙進佐倡義使金千鎰幕。同死于晉州。公雖不幸而失白沙之筆。幸而載斯誌。使後人徵焉。庶有以慰公於九原也歟。余銘湖南義烈之墓多矣。表高霽峰。誌鄭運金浚。而今又書公事于碣。公未與數公振顯于世。則其書也宜可以詳과 같은 기록이 있다.
    2020-04-02 | NO.183
  • 명곡 오희도(1583~1623)
    오희도吳希道의 본관은 나주.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오세훈(吳世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원(吳謜)이다.아버지 오언표吳彦彪는 지조가 있어 남을 허가함이 드물었고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비로소 창평에 옮겨와 은둔하며 삶을 마쳤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박명성(朴命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재기가 숙성하여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2(선조35년)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몹시 야위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들 감동하였다. 묘곁에 여막을 지어놓고 지내면서 매양 조석으로 묘역을 살펴 청소하고 상식하였으며, 몸소 밥을 지어 먹으며 3년상을 마쳤다.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일에 정성과 공경함을 다하였고 형제들과 함께 살며 독서로 서로 권면하면서 자질을 가르쳐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미천한 동복 역시 모두 감화되었다. 집안일을 계획함에 있어 모두 정돈하였고 혼인은 때에 맞게 행하였다.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으며 형제와 함께 살면서 독서하며 서로 권면하였다. 일찍이 본량 대명곡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명곡明谷'이라 자호 하였고 만년에는 뒷산 지록에 집을 지어놓고 '망재忘齋'라 하여 세속의 사물을 버리는 뜻을 담았다.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1623(인조원년)년초에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추천에 의해 한원 예문관에 들어갔다. 일찍이 가주를 대행하여 탑전榻前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일을 기록함에 있어 문장의 어휘가 넉넉하고 기록이 민첩하였다. 그만두고 난 뒤에 승정원의 여러 공들이 하리에게 명하여 초기草記를 취하여 올리라 하고 서로 돌아보며 칭찬들을 하였다. 얼마 후에 검열에 임명되어 조정에서 진용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불행히도 두창에 걸려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향년 41세였다. 공은 순천김씨에게 장가들어 5남을 낳았다. 장남 오이두는 생원이고 다음 오이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는데 영사 원종공신에 참여하였으므로 예에 따라 공은 도승지에 추증되었다.한편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1619~1655)이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 도장곡에  명옥헌원림은 창건하였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의 일이다.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명승 제58호이다.
    2020-05-11 | NO.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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