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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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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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빈길 ⾦贇吉 태종 1년(1401) 1월 12일∼태종 1년(1401) 윤3월 21일
    김빈길 ⾦贇吉 태종 1년(1401) 1월 12일∼태종 1년(1401) 윤3월 21일김빈길(?∼1405)의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죽강(⽵崗), 낙안 출신이다. 이름을 ‘김윤 길’로 읽기도 한다. 아버지는 집현전 제학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양평공 김미(⾦彌) 이다. 외할아버지는 개성소윤(少尹)을 지낸 정길(鄭吉)로 문정공 정가신(鄭可⾂)의 7남 3녀 가운데 중 5남이다. 1394년에 전라도수군첨절제사가 되어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1397년에는 낙안군 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1401년에는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다.『금성일기』 「신사년 1401년」에 “판목사(判牧使) 김빈길이 수군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윤 3월 21일 바가리(⾶加⾥) 군영에서 떠났다.”라고 되어 있는데, 판목사는 종2품이다.『금성읍지』에는 “신사(1401년) 1월 12일 도임, 동년 윤3월 21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양혜(襄惠)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 였으며, 수전(⽔戰)에 능하였었다. 군사(軍⼠)가 병든 자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치료해 주고, 추위에 언 자가 있으면 옷을 벗어 입혀 주고, 항상 사졸(⼠卒)들과 더불어 감고(⽢苦)를 같이하였다. ……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었다. 매양 상사(賞賜)를 받으면 군사(軍⼠)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변방의 백성들이 힘을 입었 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561
  • 김사희 ⾦思羲 순조 8년(1808) 5월 9일∼순조 10년(1810) 8월 15일
    김사희 ⾦思羲 순조 8년(1808) 5월 9일∼순조 10년(1810) 8월 15일김사희(1753∼?)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일여(逸如), 호는 이아탕주인(爾雅宕主 ⼈)이다. 아버지는 판서 김기대(⾦器⼤)이다. 177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782년 금부도사, 1785년 공조좌랑, 의빈부도사, 형조정랑, 1787년 토산현감, 1791년 공조정 랑, 전의현감, 1795년 시흥현령, 1797년 수원판관, 1799년 화성판관, 1800년 평양서 윤, 1803년 호조정랑, 1804년 건릉수개도감 낭청, 1805년 호조정랑, 1807년 강릉수 개도감 낭청을 역임하였다. 1808년 4월 1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9일 부임하였 는데, 1810년 5월 27일에는 진휼을 잘 한 수령으로 뽑혀 표리를 받았다. 1810년 8월 14일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하면 김사희 목사가 휴가 후에 돌아오지 않아 독촉을 하였 다는 보고가 있은 후 8월 15일에는 “병이 심해져서 거동이 불편하여 내려갈 수 없다.” 는 홍양호 이조판서의 보고에 파직 된다. 1811년 12월에 재령군수에 제수되고, 1813 년엔 진주목사, 1818년 사복첨정, 1821년 사복시정, 1826년 군자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808년) 5월 9일에 도임하였고 경오(1810년) 8월 15일에 상경 하면서 체직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560
  • 김상복 ⾦尙宓 인조 17년(1639) 10월 16일∼인조 20년(1642) 9월
    김상복 ⾦尙宓 인조 17년(1639) 10월 16일∼인조 20년(1642) 9월김상복(1573∼165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정(仲靜)이다. 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김극효(⾦克孝)이며, 우의정 김상용(⾦尙容)과 좌의정 김상헌(⾦尙憲)의 동생이다. 1591년 19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사옹원 봉사, 종부시 주부 등을 역임하고 1631년 대구부사, 1638년 부호군, 1639년 부사과, 1639년 9월 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 월 29일 하직인사를 하고 10월 16일에 부임하여 선정을 펼친 결과 1641년 12월 10 일에 ‘구황(救荒)하는 동안에 한정하여 잉임해 달라’는 전라감사의 서목이 있었으며, 12월 12일에는 잉임을 허락한다는 윤허가 있었고, 1642년 9월에 이임하였다. 1644년 판결사, 1645년 경주부윤·호조참의, 1646년 홍주목사, 1648년 오위장·형조참의, 1651년 돈녕도정 등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금성읍지』에는 “기묘(1639년) 10월 16일에 도임하였고 임오(1642년) 3월에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임기를 연장받아 동년 9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나주목사로 부임할 때 신익성(申翊聖)이 쓴 전별서 「송김나주서(送⾦羅州序)」가 『낙전당집(樂全堂 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559
  • 김서성 ⾦瑞星 명종 3년(1548) 6월∼명종 3년(1548) 8월
    김서성 ⾦瑞星 명종 3년(1548) 6월∼명종 3년(1548) 8월김서성(1497∼1548)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응경(應卿), 호는 청수재(淸修齋)이 다. 할아버지는 한산군수 김직손(⾦直孫), 아버지는 희릉참봉 김석홍(⾦錫弘)이다. 1525 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1537년 지평, 1539년 장령, 1541 년 사헌부 장령, 1542년 홍문관 응교, 1543년 사헌부 집의, 1544년 사재감 정으로 산릉도감 낭관을 역임하다가 1548년 6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8월에 신병으로 교체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 6월에 도임하였고, 동년 8월에 신병으로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58
  • 김석구金錫龜
    金錫龜의 자는 景範, 호는 大谷, 본관은 金海이다. 1835(헌종 1) 2월 남원 松洞面細田에서 金國賢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국현은 아들 김석구가 학문에 힘쓰자 그를 위하여 곡성으로 옮겨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隣里書塾에서 『小學』을 배우고 이어 맹자를 배우자 스스로 맹자를 자처하였다. 이후 그는 17․8세에 蘆沙 奇正鎭를 뵙고 사사한 지 몇 개월 만에 光州 大谷(現, 潭陽 大峙里 金谷)으로 옮겨서 기정진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김석구는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정진으로부터 자신의 문하 중 당세의 輔弼治澤을 맡길 만한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문인 중에서도 기정진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여 스승인 기정진에 의해 김석구, 老栢軒 鄭載圭, 日新齋 鄭義林 등 蘆門三子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평생 場屋(과거 보는 곳)에 드나들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처는 베를 짜고 아들은 밭을 갈아 독서하면서 그를 봉양했다. 기정진의 喪에 三年持服하였고, 內難母喪을 만나 3년 상을 마치고 1885년 고종 22년 8월 8일 별세했다. 기정진은 김석구를 일컬어 ‘夫人不言 言必有中(말을 하지 않으나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이라 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에 비유하였으며, 최익현은 스승인 기정진에 대한 관계를 주렴계와 정명도 형제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2020-08-03 | NO.557
  • 김선근 ⾦善根 고종 13년(1876) 10월 30일∼고종 15년(1878) 2월 27일
    김선근 ⾦善根 고종 13년(1876) 10월 30일∼고종 15년(1878) 2월 27일김선근(182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인회(仁會)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김정순(⾦⿍淳)이고 병조참판 김매순(⾦邁淳)에게 입적하였다. 185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 하여 1857년 홍릉참봉, 1859년 종묘 부봉사, 1860년 상서 부직장·공조좌랑, 1861년 공조정랑, 1862년 전적, 1863년 영유현령, 1866년 덕천군수, 1867년 평양서윤, 1869년 김제군수, 1872년 무주부사, 1873년 황주목사를 지냈다. 1876년 9월 2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30일 부임하였다. 1877년 2월 1일에는 제도 수령의 천거 단자가 격례(端川府使⾦翼濟, 有違格例)에 어긋난다 하여 추고를 받는다. 6월 19일에는 나수된다. 선주(船主)의 포흠(逋⽋)에 관한 일이었다. 1877년 8월 21일에는 자신의 녹봉을 털어 보충한 돈이 5000량이라는 전라감사 이돈상(李敦相)의 진휼 장계와 성책(成 冊)에 따라 숙마(熟⾺)를 하사받는다. 1878년 2월 27일에는 나주목사 김선근이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 고을로 돌아갈 가망이 전혀없다는 호노(⼾奴)의 장정에 따라 이조가 아뢰자 파출하기 보다는 연석에서 잘 다스린 수령이니 홍주목사 오달선(吳達善)과 서로 바꾸라고 한다. 1880년 동래부사, 1883년 동부승지, 1884년 동의금, 1885년 강원도 독련어사, 1886년 해방총관(海防摠管)·개성유수, 1888년 승지, 1892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876년) 9월 24일에 황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10월 30일 부임하여 무인(1878년) 2월 27일 홍주목사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부산 동래구 가야공원에 1883년에 세운 「부사김공선근영세불망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556
  • 김선지
    김선지(金銑之, 1570~1597), 湖節3下-182-2,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김선지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휘(汝輝), 호는 제남(濟南)이며 참봉 김하(金河)의 후손, 생원 김안방(金安邦)의 아들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21년 戊子에 무과에 합격했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 곡포만호로 전함을 만들어 이순신 정운 어영담 배흥립 신호등과 더불어 한산 사천 부산 당포 당항포 옥포 노량싸움에서 연전연승 함으로써 군공(軍功)을 세우고 좌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의주(義州)에서 왕을 호위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전사하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1867년 기정진(奇正鎭, 1798 ~1879) 선생이 撰書한 宣武原從功臣 行寶城郡守 김선지(金銑之, 1570~1597) 선생의 <제남공묘갈명(濟南公墓碣銘)>이 있다. 
    2020-04-01 | NO.555
  • 김섭 ⾦涉 세종 12년(1430) 4월 24일∼세종 12년(1430) 11월 6일
    김섭 ⾦涉 세종 12년(1430) 4월 24일∼세종 12년(1430) 11월 6일김섭(?∼?)의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1400년 사관(史官)이 되었고, 우정언을 거쳐 호조 좌랑, 지평, 우헌납에 오른다. 그러나 1408년 임형의 참서(讖書)사건으로 영해로 귀양을 갔다. 1426년에 우사간으로 복직이 되고 이어서 좌사간이 되었으나 1427년에 상고(上告) 문제로 파직되었다. 1430년에 복직이 되면서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고성으로 귀양 보내졌다. 『금성일기』 「경술년 1430년」의 기록에 “4월에 온 신임 목사 통정대부 김섭이 11월에 사표를 내고 상경하였다.”라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술(1430년) 4월 24일 도임, 동년 11월 6일 부여군수로 발령받아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554
  • 김성기 ⾦聖基 광무 10년(1906) 8월 12일∼융희 1년(1908) 6월 18일
    김성기 ⾦聖基 광무 10년(1906) 8월 12일∼융희 1년(1908) 6월 18일김성기(1863∼?)의 본관은 연안, 아버지는 김용(⾦鎔)으로 김도(⾦鍍)의 양자가 되었다. 1891년 4월 춘도기(春到記) 전강(殿講)에서 입격하고, 1891년 11월 문과 병과에 급제 하여 가주서에 임명, 1893년 승문원 부정자, 1897년 작세위(爵洗位) 6품, 1898년 중추원 3등의관, 1899년 전선(典膳) 감관·외부주사, 1902년 외부참서관, 1903년 홍문관 시독·중추원 의관, 1905년 농상공부 참서관, 1906년 청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906년 8월 12일 나주군수로 임명되고 1907년 4월 19일에 공립나주보통학교장을 겸임하였 다. 1908년 6월 18일 나주군수에서 면직, 1908년 7월 15일 공립나주보통학교장에서 면직되었다. 나주 궁삼면 토지 소유권을 면민에게 돌려주지 않고 뇌물을 받고 문서를 조작하여 모리배들이 동양척식회사에 매각함으로써 나주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의 발단을 제공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553
  • 김성원
    김성원(金成遠, 1525~1597), 湖節2下-162-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김성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광주 출생. 본관 광산(光山), 자 강숙(剛叔). 호 서하당(棲霞堂)ㆍ인재(忍齋). 아버지는 교위(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한종(漢宗)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세 때 아버지는 잃고 숙부에게 수학하여 1551년(명종 6) 향시(鄕試)에 일등하였으며, 정철(鄭澈)과 특계(特契)를 맺고 <근사록(近思錄)>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60년 침랑(寢郞)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 14)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및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고 말았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병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살해되었다. 저서에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가 있는데, 여기에는 서문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와 한시 외에 부록으로 한시(漢詩) <식영정십이영(息影정十二詠)>, 송강(松江)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이의 한역(漢譯) 및 단가(短歌)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獻酌北堂時月微明雨亦作作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 수록된 <성산별곡>은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수록된 것과 비슷한데, 송강이 25세 때 김성원을 위하여 지어 준 것이라 한다.  그는 <성리서(性理書)> <주역(周易)>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시(詩)로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은 세상에 유행하였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는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인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식영정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이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후에 복원되었다.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명승 제57호. 소재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저서】<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2020-04-01 | NO.552
  • 김성일 ⾦誠⼀ 선조 16년(1583) 8월 1일∼선조 19년(1586) 10월
    김성일 ⾦誠⼀ 선조 16년(1583) 8월 1일∼선조 19년(1586) 10월김성일(1538∼1893)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사순(⼠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진(⾦璡)이다. 1564년 진사시에 함격하고 1568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 김극일(⾦克⼀)과 동생 김복일(⾦復⼀)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3년 홍문 록에 들어갈 인물로 뽑히고 사헌부 정언, 예조좌랑, 수찬, 정언, 1574년 수찬, 1579년 장령, 1583년 황해도 순무어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 7월 1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 다. 1586년 11월 12일 나주 사직단의 위판이 밤중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려 파직되었 다. 그러나 사직 위판이 불탄 후 김성일은 하루라도 신주(神主)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곧바로 위판을 만들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는데, 조정에 아뢰지는 않고 수토(守 ⼟)하는 신하가 지레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신을 섬기는 예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추고를 당하고 물러난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 온뒤 황윤길이 병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보고한 것과 달리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김성일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김성일은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라는 장계를 올리자 선조가 감동하여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 재임 중 진주 공관에서 병사하였다. 문집으로 『학봉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여 계미(1583년) 8월 26일 도임하였다. 인덕지를 개착하고, 서원(대곡서원)을 창설하고, 사직단을 옮겼으나 병술(1586년) 10월에 화재로 위패가 소실되어 파직되었 다.”라고 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忠)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51
  • 김숭조 ⾦崇祖 중종 3년(1508) 9월 13일∼?
    김숭조 ⾦崇祖 중종 3년(1508) 9월 13일∼?김숭조(1461∼?)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희지(禧之), 호는 서청자(西淸⼦)이다. 아버지는 훈련원참군 김충손(⾦衷孫)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148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 증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1507년 중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 다. 1501년 정언을 시작으로 지평, 성균관 전적, 헌납,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14년 나주 금성산 산신의 폐해를 아뢰어 폐지를 건의한다. “나주 금성산은 국사(國 祀) 인데,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이 무당에게 혹해서, 봄가을이 될 때마다 원근의 남녀들이 시끄럽게 모여들어 남에게 뒤질세라 기도하여 앙운을 면하려고 밤을 지내기까지 하여 추한 소문이 많으니, 풍속을 손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호조수교에는 퇴미(退⽶)를 거두어 귀후서로 나르되 1년에 받아들이는 양을 60석 으로 항규(恒規)를 삼았으므로, 수령이 능히 금하지 못하니, 빨리 쌀을 받아들이라는 영을 거두시어 음사의 폐해를 엄하게 금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금성산 신당에서 바치는 쌀이 그런 줄 몰랐다. 이렇게 풍속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엄하게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금성읍지』에 “무진(1508년) 9월 13일 도임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은 기록이 없다. 1480년에 김숭조를 비롯한 나주향교 생도 10명이 사마시에 급제하는 큰 경사를 맞게 되는데, 이때 나주향교의 교수였던 박성건(朴成乾)이 이를 기뻐하며 경기체가 「금성별곡」 6장을 지어 노래한다. 제5장에 10명의 이름들이 나온 다. 김숭조는 진사시 급제 후 28년만에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50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안국(金安國, 1478~1543)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으나 학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음
    2023-08-02 | NO.549
  • 김억룡
    김억룡(金億龍, 1561~1592)의 자는 내무(內武), 호는 송암(松岩)이다. 절효공 후손이며 공신 모재 김사모(金嗣牟)의 차남이다.1589년(선조22) 무과 급제하여 용분위부사정(龍賁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형 억명, 아우 억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광 송촌사(松村祠)에 제향했다. 湖節5上-105-2, 光州, 丙子, 扈從 -《호남절의록》(1799)송촌사는 원래 군서면 송학리에 소재한 것으로 철종때 향중유림의 발의로 모재 김사모, 송은 김억명, 송암 김억룡, 송정 김억호, 송포 김억련 다섯부자(五父子)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순절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유림들이 제향해 오던 곳이다.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지난 1971년 향중유림의 재발의에 의해 현소재지인 만금리 만호동에 예전의 사우를 복원, 지금까지 매년 음력 9월21일을 향사일로 정하고 제향해오고 있다.
    2020-04-01 | NO.548
  • 김언 ⾦漹 명종 3년(1548) 3월∼명종 3년(1548) 4월
    김언 ⾦漹 명종 3년(1548) 3월∼명종 3년(1548) 4월김언(1495∼155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호원(浩源)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질(⾦礩), 아버지는 부평부사 김성동(⾦誠童), 외할아버지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으로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523년 기사관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지평, 수원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1539년 군기시 부정, 1546년 원주목사를 거쳐 당상관인 절충장군 호분위대호군을 제수 받았으나, 1547년 동지사 때의 일로 사헌부의 상소로 당상관이 취소되어 3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나 바로 4월에 파직을 당하게 된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에 도임하였고, 동년 4월에 파직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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