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
- 김언거(1503~1584)
-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다.김언거는 1525년(중종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한 뒤 이듬해 예조좌랑 및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2년에는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었고, 1545년에는 금산군수에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1546년(명종1)에는 경상도 상주목사가 되었다. 1550년에 통정, 응교, 사헌부 장령을 거쳐 1552년에는 사헌부 헌납, 1553년에는 연안부사가 되었고, 1555년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체직되었다. 1557년에 승문원 판교에 올랐으며 1560년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죽와휘어竹窩彙言>, <송사절요宋史節要>, <가례초家禮抄>, <역대명신간소초歷代名臣諫疏抄> 등의 책이 있다.풍영정 앞을 흐르는 극락강은 칠천이라 불렸는데, 자신의 호를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볼 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강호자연을 애호하는 높은 풍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광주 신창동 극락강변의 선창산 위에 자리한 풍영정은 근동에서 으뜸의 풍광을 가진 곳으로, 칠계 선생이 1560년(명종15) 내직과 외직의 오랜 관료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돌아온 직후에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82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풍영정에 남아있는 이들의 제영현판은 이때의 흔적이다.또한, 여기에는 '제일호산'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풍영정 원운은 병조판서 조계원이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그의 6대손광주목사 조진민이 새겨 걸었다. 1948년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였는데, 당시의 기록이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 현판으로 남아있다.풍영정 내에는 김인후, 이황,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송인수, 이호민, 권필, 이안눌, 박언침 등의 제영이 걸려있다.《조선왕조실록》에 김언거는 14회(중종실록 1회, 명종실록 13회) 언급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사관은 그가 임백령 등에게 붙어 벼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이상하, 퇴계생각, p 113-114 참조)회재 박광옥이 지은 묘지명에는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시렁 위에 만권의 책을 꽂아놓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적고 있어 이들 정자에서 많은 독서를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2020-03-27 | NO.546
-
- 김언복
-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려갔다. 군 참모로써 많은 훈공을 세웠다.금산이치(錦山梨峙) 싸움에서는 몸을 날려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많은 적의 목을 자르고 용전분투하였으나 패세를 만회할 길이 없어 고경명과 더불어 같은 날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혼을 불러들여 장사지내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담양삼강록 다른 기록도 있다.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했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하고 또 아들 직장(直長) 경입(敬立), 아우 언수(彦壽)와 함께 군량을 모집(募集)하여 도원사 권율(都元師權慄)을 따라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다. 湖節3下-173-1,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
- 2020-04-01 | NO.545
-
- 김영휘(金永暉)-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정홍명(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 2022-05-03 | NO.544
-
- 김용순 ⾦⿓淳 순조 6년(1806) 7월 13일∼순조 8년(1808). 4월
- 김용순 ⾦⿓淳 순조 6년(1806) 7월 13일∼순조 8년(1808). 4월김용순(1754∼182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시백(施伯)이다. 아버지는 김이기(⾦ 履基)인데 1787년 8월부터 1790년 6월까지 광주목사를 지냈다. 1777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86년 원릉참봉, 1787년 내섬봉사, 1788년 전생봉사(典牲奉事), 1790년 종묘직장, 1792년 내섬직장, 1793년 상의직장, 1794년 제용주부, 형조좌랑, 1795년 제용판관, 1797년 신천군수, 1801년 고양군수, 1804년 부평부사를 지냈다. 1806년 6 월 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2일 하직하고 7월 13일 도임하였다. 1808년 3월 27일 전라도우수사 권탁(權逴)의 장계에 따라 나수(拿囚)되었는데 4월 11일 기록에 전선관리를 못한 죄상이 나온다. 1810년 3월에 호조정랑, 8월에 서원현감, 1813년 청주 목사, 1817년 5월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1819년 6월까지 역임하였고, 1819년 평양서 윤, 1821년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인 (1806년) 7월 13일에 도임하였고 무진(1808년) 4월에 수군 훈련을 위한 전선(戰船)을 출발시키지 않는 일로 4월 11일에 나포되어 파직 당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543
-
- 김우현 ⾦佑鉉 고종 2년(1865) 8월 16일∼고종 5년(1868) 9월 17일
- 김우현 ⾦佑鉉 고종 2년(1865) 8월 16일∼고종 5년(1868) 9월 17일김우현(1800∼1881)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우보(佑輔),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 의주부윤 김재원(⾦在元), 형 김공현(⾦公鉉)은 문과 급제자이다. 1844년 45세에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45년 창릉참봉, 1847년 제용 부봉사, 상서 부직장, 1848년 조지 별제, 사직령, 1849년 공조정랑, 1850년 휘경원령, 1852년 의릉령·토산현감, 1855년 과천현감·포천현감, 1856년 강서현령, 1857년 부안현감, 1861년 고부군수, 1862년 삼척부사를 지냈다. 1865년 6월 2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고, 1868년 9월 17일 신병이 중하여 파직되었다. 1875년 통정대부·첨지·공조참의, 1879년 호군, 1881년 동의 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865년) 6월 22일에 삼척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8월 3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8월 16일에 나주에 부임하여 재직하다 1868년 9월 17일 신병이 있어 이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척도호부 옛 관아 터에 「부사 김우현 흥학비(府使 ⾦佑鉉 興學碑)」가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542
-
- 김우홍 ⾦宇弘 선조 5년(1572) 5월 7일∼선조 6년(1573) 9월
- 김우홍 ⾦宇弘 선조 5년(1572) 5월 7일∼선조 6년(1573) 9월김우홍(1522∼1590)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면부(勉夫), 호는 지족당(知⾜堂) 또는 이계(伊溪)이다.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김희삼(⾦希參)이며, 동생으로 광주목 사를 지낸 부제학 김우굉(⾦宇宏), 전라감사를 지낸 예조참판 김우옹(⾦宇顒)이 있는데 모두 문과 급제자다. 1546년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155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1558년 승정원 주서, 1562년에 병조좌랑, 1563년 경상도 도사, 1564년 함양군수, 1572년 5월 나주목사로 부임했다. 1575년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고, 그 뒤 통정대부가 되어 영흥부사, 밀양부사를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임신(1572년) 5월 7일 도임하였고, 계유(1573년) 9월에 재난으로 파직을 당하였다. 갑술(1574년) 봄에 자혜비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나주 객관 금성관 경내에 「목사김우홍자혜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41
-
- 김원국
-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게 되었다. 이 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1906년 3월 원범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어 3백병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탈출,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여러 차례의 교전으로 일제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1908년 3월 영광 토산에서 패전, 불갑산으로 후퇴, 광주 어등산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2월 19일 무등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갔던 김원범이 1909년 2월 취조받던 중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발송,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에 취임하였다.일제가 의병 대토벌전을 펼치자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근거지로 광주.나주.능주.동복.창평.담양.장성.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나주 관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함평 오산면에서 일군과 접전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그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사지휘권을 곽진일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총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2018-05-28 | NO.540
-
- 김원범
-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항일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로 일제 감옥에서 자결한 애국지인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다. 형인 원국이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헌병을 타살하고 피신하자,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 1906년 3월 형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이때 선봉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의 규모는 3백명이었다. 그 뒤 각처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던 중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접전 끝에 대패, 원국이 붙잡히는 등 적지 않은 인명피해로 의진은 해산되었다.다시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에서 매복 중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적의 대장 요시다 이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또한 장성 낭월산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3월 영광의 토산에서 패전하고 불갑산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광주 어등산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참패하였다. 6월 이대왕 의진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 격퇴하였으며, 그 뒤 오수산과 함평의 석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1월 어등산에서 적과 교전중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전기홍 의진과 합진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 중군장에 임명되어 광주.나주.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2018-05-28 | NO.539
-
- 김유 ⾦濰 영조 13년(1737) 7월 8일∼영조 13년(1737) 10월 4일
- 김유 ⾦濰 영조 13년(1737) 7월 8일∼영조 13년(1737) 10월 4일현감 김유(1685∼?)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단양군수 김중우(⾦重禹)이다. 170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171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1715년 승문원 부정자·황해감사, 1715년 주서, 1717년 전적, 1718년 연기현감, 1720년 부사과, 1722년 금성현령(⾦城縣令), 1723년 장령, 1724년 정언, 1725년 집의, 1727년 사간, 1728년 남원부사, 1729년 부사과, 1731년 승지, 1733년 안동부 사, 1735년 호조참의, 1736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1737년 5월 22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7월 8일에 부임하였다. 1737년 예조참의·대사간, 1738년 부사직·우부승지·경 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1739년 대사간, 1741년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정사(1737년) 7월 8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4일에 대간의 장계에 의하여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538
-
- 김유현
- 김유현(金裕鉉) ; 동학 광주접주-백년약사(상권)
- 2020-04-03 | NO.537
-
- 김유희 ⾦有喜 헌종 10년(1844) 7월 27일∼헌종 13년(1847) 5월 9일
- 김유희 ⾦有喜 헌종 10년(1844) 7월 27일∼헌종 13년(1847) 5월 9일김유희(178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대이(⼤⽽)이다. 부친은 김노창(⾦魯昌) 이며, 서울 출신이다. 181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0년 원릉참봉, 1821년 금부도사, 1822년 군자감봉사, 1823년 도청부사직·군자직장, 1824년 군자주부, 1827년 순안현령, 1830년 재령군수, 1835년 익릉령, 1836년 의빈도사·무장현감, 1841년 고원군수, 1843년 청풍부사를 지냈다. 1844년 6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7월 27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1847년 5월 9일 휴가를 얻어 상경하였다가 1847년 7월 6일병이 심하여 파직되었다. 1847년 11월 29일 『승정원일기』에 전 목사 김유희의 궁가의 전결, 섬의 세미(稅⽶), 삼향창 환미, 사송(詞訟)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나주객사 내 1849년에 세운 「목사김후유의거사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536
-
- 김윤제 ⾦允悌
- 김윤제 ⾦允悌 김윤제(1501∼1572)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공로(恭⽼), 호는 사촌(沙村)이다. 장례원 사평을 지낸 김후(⾦詡)의 아들로 광주 출신이다.1528년 식년시에 진사 합격 하였고, 1531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와 전중어사겸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고, 지방수령으로 나아가 고창현감, 부안군수, 전주진관 병마절제사를 거쳐 1555년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기대승(奇⼤升)이 엮은 《주자문록(朱⼦⽂錄)》 4책을 간행하였다. 1560년 나주목사를 마치고 향리 광주에 환벽당을 짓고 시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서하당(棲霞堂) 김성원(⾦成遠)이 대표적인 제자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555년) 6월 1일 도임하였 고, 체직일은 기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35
-
- 김윤제(金允悌)
- 김윤제(1501~1572)의 자는 공로(恭老)이며 호는 사촌(沙村)으로 광주인이다. 증조부인 김자침(金自沈)은 진사를 하였으며 참의에 증직되었고, 조부 김문손(金文孫)은 진사를 하였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친 김후(金珝)는 진사를 하였으며 음직으로 정랑과 현감을 지냈다. 모친은 礪山 金氏로 석저촌(石底村)에서 김윤제를 낳았다. 지금의 북구 충효동이다.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이 있었으며 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1528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숙부 김함(金瑊, 1476~1538)과 더불어 나란히 입조하니 당세의 聲望이 무거웠다. 直講·弘文館敎理·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지방 수령으로서의 능력이 있어 全州鎭營 兵馬節度使, 扶安郡守, 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김윤제가 교유한 대표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宋純, 林億齡, 金麟厚, 蘇世讓, 梁山甫 부자, 奇大升, 梁應鼎, 金成遠, 鄭澈, 高敬命, 白光勳 등 湖南詩壇의 대표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 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들이 많다.
- 2020-03-19 | NO.534
-
- 김윤진 ⾦允珍 태조 3년(1394) 12월 10일∼ 태조 5년(1396) 10월
- 김윤진 ⾦允珍 태조 3년(1394) 12월 10일∼ 태조 5년(1396) 10월김윤진(?∼?)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나주목사가 되기 이전인 1384년 5월 21일(음) 『고려사』에 ‘판사 김윤진’이란 기록이 보인다. 『금성일 기』 「계유년 1393년」에는 “목사 김윤진이 12월 10일 도임하였다가 병자(1396년) 10월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갑술(1394년) 12월 도임, 병자(1396 년) 10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33
-
- 김윤현
- 김윤현金胤鉉은 광산김씨로 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화순현감(1878), 서흥부사, 안주목사, 남원부사(1886), 광주목사, 보성군수,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군 화순읍 대리 154번지(한고을길 16)에 있는 충신 정려각인 칠충각의 기문을 지었다.1885년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봉급을 털고 호남 지방의 종인들의 협조로 종회소 10칸, 제사(齋舍) 8칸, 문청(門廳) 5칸을 지었고 문헌공 대제학 김영수가 취사당(聚斯堂)이라 이름을 지었다. 취사당이란 의미는 광산김씨 후손이 이곳에 (斯: 이사) 모이는(聚: 모일 취)는 집(堂: 집당)이라는 뜻이다.
- 2020-04-10 | NO.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