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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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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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동(朴成東)
    1894년의 동학운동 때는 동학의 핵심인물 3인 중의 한 사람인 손화중(孫華仲)이 광주에서 봉기할 때 박성동(朴成東)은 광주접주로 1894년 10월 전라도 광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하여 4천명의 농민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년약사(상권)또 1894년 3월 말에 있었던 백산대회에 강대열, 박성동, 김우현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광주에도 적지 않은 교도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020-03-06 | NO.166
  • 박숙
    박숙(朴橚)의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전력부위(展力副尉) 를 지냈다. 전력부위는 조선시대 무신 종9품의 품계이다.湖節1上-079-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고경명의 장녀는 사인(士人) 박숙(朴橚)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박충렴(朴忠廉), 자는 효원(孝原)이다.고경명의병장은 1592년 5월 23일 유팽로·양대박 등과 담양의 추성관에서 회동을 갖고 추성창의(秋成倡義)를 합의하여 5월 29일 의병을 일으켰다. 추성창의란 의로운 일을 위하여 결기를 모은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는 고경명·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3부자, 고경명의 조카 고성후(高成厚), 사위인 노석령(盧石齡)·박숙(朴橚)이 참여하였다. 고경명 장군이 금산의 왜적을 치게 되자 사위인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을 부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을 준비한 것으로 읽혀진다.
    2020-04-02 | NO.165
  • 박승남
    박승남(朴承男)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교리(校理) 박맹지(朴孟智)의 후손이다. 부는 순릉참봉(順陵參奉) 박임(朴?)이고 자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박행(朴荇)이다.판관으로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 경남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배향되어 있다.湖節1下-100-2, 光州, 壬辰, 金千鎰同殉  -《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64
  • 박양동(朴陽東)
    박양동(1829~?)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이숙(而淑)이며 호는 관어(觀魚)이다.부 : 朴濟邦조 : 朴懿鉉증조 : 朴聖洌외조 : 金堯欽처부1 : 高濟儒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7 | NO.163
  • 박언신
    박언신(朴彦信)의 자는 호중好仲 벼슬은 선무랑宣務郞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와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옥과玉果로부터 광주로 이사했다. 난계 박연의 후손으로 증조부 박맹우, 조부는 박곤, 부는 금흥이다. 임진왜란 어사공신御賜功臣으로 임진란 당시 여러 고을이 연쇄적으로 함락될 즈음 선조의 어가가 서쪽으로 몽진 행차할 때 의병 수백인을 거느리고 식량과 기계를 모아 제봉 고경명의 막부에 가 금산 접전에 적을 무수 베이고서도 전패함에 고경명과 함께 순절하셨다. 1606년에 어사공신록에 등재되어있다. 배는 경주김씨요 부는 金錫圭이다. 묘는 소지면 강동뒤 子坐 合窆 床石과 望柱가 있다. 字好中慷慨有大節平生以忠孝立志而壬辰之變倡義赴敵官之宣武郞軍資監主簿 -詳見壬辰功臣錄 湖節1上-052-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62
  • 박원명
    서구 서창동에는 농민전쟁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박원명(朴源明)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원명은 농민전쟁의 발발 직전에 일어난 만석보 사건의 원흉인 조병갑이 군수에서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고부군수에 임명된 사람이다. 당시 그는 격렬한 고부 군민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천야록> 권2에는 1894년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군수조병갑이 도주하자 고종은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라는 명을 내리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대신 그 직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흥부사리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조병갑은 고 군수조규순의 서자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하고 가혹한 행위를 하였다. 계사년(1893)에 한해가 극심하여 기근이 들었지만, 그는 재결을 숨기어 세조와 함께 징수하므로 결국 민란이 발생하였다. 박원명은 대대로 광주에서 살았고 많은 재산도 모았다. 그리고 그는 기민한 재주가 있어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또 그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영준이 기용한 것이다."그러나 호남농민들의 날로 커져가는 항쟁의식을 꺾을 수는 없었고 이것이 몇 년 뒤 전면적인 농민전쟁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광주에서 농민전쟁은 1894년 말과 이듬해 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박원명(朴源明, 1847~?) 자(字)는 덕홍(德弘). 본관은 충주이다.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살았다. 1885년(고종2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조선 때 7개 군(郡)의 수령(守令)을 역임한 후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다.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의 <암서집> 제32권 회와 조공 묘갈명〔晦窩曺公墓碣銘〕에는 박원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동학(東學)의 무리들이 들끓었을 때 공은 종족과 벗들을 달래어 거기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 고부(古阜) 군수가 재앙을 숨긴 것 때문에 난민(亂民)을 일어나게 했는데, 난민이 어지럽게 일어나자 군수가 달아나 버렸다. 조정에서는 용안(龍安) 현감 박원명(朴源明)에게 명하여 급히 가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는데, 박원명은 공의 매부였다. 박원명이 수레를 갖추어 공을 맞이했는데, 공은 병 때문에 사양하다가 강권한 뒤에야 이르러 유세객 한 사람을 구하여 난민의 진중에 가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말하고 또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다. 난민이 이에 모두 해산하니, 공도 또한 이윽고 돌아와 병을 치료하였다.
    2018-06-27 | NO.161
  • 박원응(朴源應)
    박원응(1812~1898)의 본관은 충주이다. 자는 응지(應之)이며 호는 송음(松蔭)이다.부 : 朴寬休조 : 朴馨基외조 : 洪羲鼎처부1 : 閔百㤑처부2 : 李命九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7 | NO.160
  • 박윤협
    박윤협(朴允?), 湖節1上-078-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59
  • 박이온 (1461~1524)
    본관은 순천이며 자는 자화이다. 하남의 순천 박씨들은 1425년 하남 진곡동으로 들어왔다. 박이온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박순선의 아들로 1496(연산군2년)년 병진증광사마시丙辰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1506(연산군12년)년 중종반정에 사포서별제로 있을 때 정국군모에 공이 있어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이 되었고 돈녕부판관으로 승진하였다. 임피현감, 익산, 임천군수, 풍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이후 공조판서와 승평군의 훈작을 받았고 자헌대부공조판서에 증직 되었으며 정국3등 공신으로 훈록되었다.순천박씨 가문의 충신 사적을 보여주는 자료 「십공신회맹록十功臣會盟錄」이 현재 전해진다. 표제를 「중종조녹권中宗朝綠券」명량록明良錄이라 하였는데, 1507년 9월에 10명의 공신 및 그 자손들과 함께 회맹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그가 기재되어 있다.
    2020-04-22 | NO.158
  • 박정지
    박정지(朴廷芝), 湖節4中-059-2,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임회는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의 아들이며, 중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전사하였다.일찍이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한 뒤 생모 이씨, 생부와 양부의 상을 차례로 당하였으며, 1593년(선조 26) 양모 노씨(魯氏)의 상을 당하여 집상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벼슬길이 늦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4-02 | NO.157
  • 박정휴朴鼎休
    朴鼎休(1805~1865)의 자는 元實, 호는 芚皐, 貫鄕은 忠州이다. 그의 현조는 중종 때 端敬王后 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 눌재 박상朴祥이며, 고조는 再茂, 증조는 師東, 조부는 燧이다. 부친 筠軒 朴孝碩은 원래 조부 燧의 족형인 龍湖堂 褧의 셋째 아들인데, 燧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박정휴는 아버지 박효석과 어머니 原州李氏 懿德의 딸 사이에서 1805년(순조5)에 光州 素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장중하여 어른스러웠으며, 놀 때도 교활하지 않았으며, 남녀 간에 예의범절이 분명하였다.그는 가정의 훈도를 받아 열심히 공부하여 四書와 六經, 諸子百家에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20세가 넘어서는 과거 짓는 문장에도 힘을 쏟아 과거장에서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833년(순조 33) 형이 죽고, 아버지가 연로하자 더 이상 과거를 볼 생각을 하지 않고 경전에 잠심하여 비로소 爲己之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어 그는 錦谷 宋來熙의 문하에 들어가서 四書와 心經, 朱書百選 등의 학설을 배우고 열심히 행하고 익히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동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1836년(헌종 2)에는 부친상을 당하고 1841년(헌종 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례에 따라 극진하게 삼년상을 치루었다. 또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가난을 군자가 세상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책을 좋아하여 친척이나 붕우들과 계를 만들어 집에 천 여권의 서적을 갖추었다. 그는 1851년(철종 2)에 큰 흉년이 들어 생계가 어렵게 되자 1852년에 松汀村으로 옮겨서 잠시 그 곳에 사는 마을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다시 1856년(철종 7)에 다시 소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해에 다시 금산 桐谷에 가서 송래희를 뵙고 서당현판과 벽에 붙일 글자 24자를 얻어서 돌아와서 더욱 강학에 전념하였다. 이어 1859년부터는 송준길을 모신 문의현의 黔潭書院에서 同門의 士友들과 同門契를 조직하여 매년 스승인 송래희를 모시고 강론을 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먼저 『心經問答』을 강론하였으며, 1860년에는 新安寺에서 『大學』, 1861년에는 송래희가 찬한 『禮節覽要』과 『論語疑義問答』, 1862년에는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모신 금산의 龍江書院에서 『禮節覽要』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1863에는 금산의 칠백의총을 모신 從容祠에서 송래희를 대신하여 박정휴가 講長이 되어 강학을 하였으며, 그해 10월 동곡에서 향음주례를 실시할 때 賓이 되기도 하였다. 1864년에는 觀善契의 회장이 되어 향음주례를 시행하고 「白鹿洞規」, 「孟子記疑論人物性」 등을 강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해 겨울부터 몸이 좋지 못하여 다음 해 6월에 이르러서는 설사까지 겹치는 등 병이 더욱 위중해져서 1865년 7월 22일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광주 柳等谷面 松鶴山 남쪽 자락이다. 그는 鄭澈의 후손인 延日鄭氏 在善 사이에서 源弘과 源大 등 두 아들과 金麟厚의 후손인 蔚山金氏 學洙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2020-08-02 | NO.156
  • 박제방(朴齊邦)
    박제방(1808~1886)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순문(舜聞)이며 호는 안호(安湖)이다.부 : 朴懿鉉조 : 朴聖洌증조 : 朴天鎭외조 : 奇泰熙처부1 : 金堯欽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880년 노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2020-02-27 | NO.155
  • 박종정
    박종정(朴宗挺), 湖節2下-134-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54
  • 박지효
    박지효(朴之孝), 湖節1上-07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53
  • 박지효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은 데 기여했다.1627년 정묘호란 때 김장생金長生이 삼남호초사三南號苕使로 광주에 내려와 그에게 모병유사의 책임을 맡기자 75세의 노구로 병사와 식량을 모으는 데 큰 성과를 올렸다. 전주에 피난중인 세자를 맞아들여 여산까지 호송하니 인조가 이를 칭찬하여 장례원사간掌禮院司諫, 사헌부임제司憲府臨製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2018-05-28 | NO.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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