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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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제(金允悌)
- 김윤제(1501~1572)의 자는 공로(恭老)이며 호는 사촌(沙村)으로 광주인이다. 증조부인 김자침(金自沈)은 진사를 하였으며 참의에 증직되었고, 조부 김문손(金文孫)은 진사를 하였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친 김후(金珝)는 진사를 하였으며 음직으로 정랑과 현감을 지냈다. 모친은 礪山 金氏로 석저촌(石底村)에서 김윤제를 낳았다. 지금의 북구 충효동이다.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이 있었으며 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1528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숙부 김함(金瑊, 1476~1538)과 더불어 나란히 입조하니 당세의 聲望이 무거웠다. 直講·弘文館敎理·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지방 수령으로서의 능력이 있어 全州鎭營 兵馬節度使, 扶安郡守, 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김윤제가 교유한 대표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宋純, 林億齡, 金麟厚, 蘇世讓, 梁山甫 부자, 奇大升, 梁應鼎, 金成遠, 鄭澈, 高敬命, 白光勳 등 湖南詩壇의 대표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 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들이 많다.
- 2020-03-19 | NO.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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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진 ⾦允珍 태조 3년(1394) 12월 10일∼ 태조 5년(1396) 10월
- 김윤진 ⾦允珍 태조 3년(1394) 12월 10일∼ 태조 5년(1396) 10월김윤진(?∼?)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나주목사가 되기 이전인 1384년 5월 21일(음) 『고려사』에 ‘판사 김윤진’이란 기록이 보인다. 『금성일 기』 「계유년 1393년」에는 “목사 김윤진이 12월 10일 도임하였다가 병자(1396년) 10월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갑술(1394년) 12월 도임, 병자(1396 년) 10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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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현
- 김윤현金胤鉉은 광산김씨로 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화순현감(1878), 서흥부사, 안주목사, 남원부사(1886), 광주목사, 보성군수,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군 화순읍 대리 154번지(한고을길 16)에 있는 충신 정려각인 칠충각의 기문을 지었다.1885년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봉급을 털고 호남 지방의 종인들의 협조로 종회소 10칸, 제사(齋舍) 8칸, 문청(門廳) 5칸을 지었고 문헌공 대제학 김영수가 취사당(聚斯堂)이라 이름을 지었다. 취사당이란 의미는 광산김씨 후손이 이곳에 (斯: 이사) 모이는(聚: 모일 취)는 집(堂: 집당)이라는 뜻이다.
- 2020-04-10 | NO.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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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복
- 김응복(金應福)의 자(字)는 경서(慶瑞), 호는 서봉(瑞峰). 문경공(文敬公) 탁(琢)의 후손이며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김세천(金世天)의 둘째 아들이다.선조 때 무과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고종후(高從厚)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부 송암공(松庵公)과 함께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湖節1下-176-1,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 -《호남절의록》(1799)- 김윤해(金允諧) : 김응복의 아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응복공의 손자 김철생 공이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을 개촌하였다.
- 2020-04-02 | NO.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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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익두(金翼斗)
- 광주(光州) 출신. 삽봉 김세근, 경당 김희환 후손이다. 호는 죽재(竹齋)이다.천성이 착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병이 났을 때 의원이 웅자치(雄紫雉)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자 크게 통곡하였다. 때마침 산 꿩이 사냥꾼에게 쫓기다 앞에 떨어져 구할 수 있었다. 이 꿩을 들고 가는데 사냥꾼이 말하길 자신이 잡으려던 꿩이라며 내놓으라고 말하자 그가 부모님 약에 쓸 것이라며 사정을 말했다. 사냥꾼이 허락하여 부친에 효도할 수 있었다. 김익두의 부인 김씨도 손가락에서 피를 부친의 입에 흘려 넣어 드시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호남지> 5권 열행(烈行)편에 있다.순종(純宗) 때에 정려를 내렸다고 전한다.
- 2020-03-09 | NO.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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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익수 ⾦益壽 중종 35년(1540) 3월∼중종 37년(1542) 8월
- 김익수 ⾦益壽 중종 35년(1540) 3월∼중종 37년(1542) 8월김익수(1491∼?)의 본관은 김해(⾦海)이며, 자는 인경(仁卿)이다. 호조판서 김진손(⾦震 孫)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김영정(⾦永貞), 아버지는 참의 김세균(⾦ 世鈞)으로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5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9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21년 세자시강원 설서, 지평을 거쳐 1529년 경기도재상어사(京畿道災傷 御史)로 파견되었다. 153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장령, 동부승지가 되었고, 1540년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543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에 제수 되었으나,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직무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 다.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546년 우승지, 경연참찬관, 도승지, 형조참판, 충청감사, 병조참판, 관상감 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540년) 3월에 도임하였고, 임인(1542년) 8월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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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대 ⾦仁⼤ 영조 38년(1762) 10월 3일∼영조 38년(1762) 10월 26일
- 김인대 ⾦仁⼤ 영조 38년(1762) 10월 3일∼영조 38년(1762) 10월 26일김인대(?∼?)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740년 명릉참봉, 1745년 창름참봉, 1746년 선공봉사, 1747년 중부도사, 1748년 돈녕판관, 1749년 해주판관, 1755년 사복첨정, 1757년 돈녕주부, 1758년 교하군수, 1759년 부사과를 지냈다. 1762년 9월 1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고 10월 3일 부임하였다. 1763년 밀양부사를 지냈다. 밀양에 세운 「부사김후인대유애비」가 삼랑진 후조창 터에 있다.『금성읍지』에는 “임오(1762년) 10월 3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12일에에 이국선이 표류하여 지도(智島) 에 왔다는 보고를 하면서 그림으로 그리지 않는 일로 순영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을 당하고 10월 26일에 이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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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연(金仁沇) -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옛 은거지가 큰 바다를 누르는 곳 / 舊隱壓滄海신선을 찾아 자줏빛 구름을 넘어갔구려 / 仙游凌紫煙지금까지도 강좌의 명망 있는 가문 / 至今江左望오직 연연산에 비석 세우기를 기다린다네 / 唯待勒燕然성을 나와 백 리쯤 되는 곳 / 出城百里地바다 곁 한 층의 누각 / 傍海一層樓어진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賢相今何處신선의 학을 타고 표연히 노닐리라 / 飄然笙鶴游이상은 이상(二相) 김인연(金仁沇)의 청암장(靑嵒莊)에 대해 쓴 시이다.강좌는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진(晉)나라가 중원을 외적에게 빼앗기고 강좌 지역에 와서 동진(東晉)을 세웠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江左望〕으로는 왕씨(王氏)와 사씨(謝氏)가 있었다. 당시 공경(公卿) 장상(將相)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이 이 두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김인연(金仁沇)의 가문을 광주(光州)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칭송한 것이다.김인연(金仁沇) : 대본에는 ‘金仁衍’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의 문신 ‘김인연(金仁沇)’으로 보인다. 김인연은 화평부(化平府) 즉 광주(光州) 출신으로, 밀직사로 있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왕의 환국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왕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밀직사와 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숙왕이 죽은 뒤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청원하였다. 충혜왕 복위 시에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 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2022-05-03 | NO.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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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후
-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울산 김씨 이름은 인후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 시호는 문정이다. 1510년에 장성 맥동에서 태어나니 자질이 비범하여 6세에 시를 짓고 8세 때 조원기 관찰사와의 시문답으로 신동의 명성을 얻다. 이듬해 기안재가 보고 세자지신을 예언하다. 세에 김모재(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니 모재가 3대 상의 인물이라 하고 소우로 대하다. 13세에 경서공부에 정진하고 글씨도 체마다 신묘한 경지에 들다. 18세에 최신재에게 배우니 신재는 선생의 학문이 이미 심오함에 경탄하다. 19세에 상경하고 성균관시회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다. 22세에 진사가 되고 24세에 성균관에서 퇴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이후 그의 추중을 받다. 31세에 문과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호당에 들다. 34세에 홍문관박사 겸 세사시강원설서로 세자 곧 인종과 수어지교를 맺고 묵죽도 한 폭을 받아 제시를 써넣다. 유월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에 관해 극렬히 논변하고 귀향하여 옥과현감이 되다. 36세에 제술관으로 일시 상경하였으나 곧 귀임하다. 7월에 인종이 승하하자 통곡기절을 거듭하며 벼슬을 그만두다. 이후 향리에서 후학교육에 힘쓰며 학문에 전념하다. 거듭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효경간오발 대학강의발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는 한편 인심도심설 이기사칠론 태극론 등 도학의 주요 논점에 관한 치열한 논쟁에 선생은 심오정밀한 학식으로 의문을 명쾌히 풀어 학계의 방향을 바로잡다. 퇴계 고봉의 사칠논변에도 고봉과의 강론을 통해 많은 영향을 주다. 1560년 1월 16일 51세에 서거하다. 1662년 필암서원사액 1669년 문정시호를 받다. 1796년 정조20년 문묘에 종향되고 문정시호를 받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직을 받다.
- 2020-03-19 | NO.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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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金鎰)
- 김일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태숙(台淑). 호는 해은(海隱)이다.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1261~1330)의 후손이며 동주(東州) 김덕구(金德垢)의 아들이다. 제용감(濟用監)과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숙종 때 광주(光州)로 이사했다. 그 후손들은 여수시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와 여수시 율촌면(栗村面) 구암리(龜岩里)에 살고 있다.*제용감은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서로 왕실에서 쓰는 각종 직물·인삼의 진상과 국왕이 사여하는 의복 및 사(紗)·나(羅)·능(綾)·단(緞)·포화(布貨)·채색입염(彩色入染 : 색을 입히고 물감을 들임)·직조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 2020-03-09 | NO.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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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행 ⾦⾃⾏ 성종 21년(1490) 7월 20일∼성종 25년(1494) 10월 [2차]
- 김자행 ⾦⾃⾏ 성종 21년(1490) 7월 20일∼성종 25년(1494) 10월 [2차]김자행(1412∼1489)은 나주목사를 두 차례 역임하였다. 『성종실록』 그의 졸기에 사신이 논평하기를, “김겸광은 재물을 탐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집 재산이 대단히 많았다. 하루는 집에 불이 나서 재물이 모두 탔는데, 김자행이 가서 위로하기를, ‘영공 (令公)은 한스러워하지 마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 티끌 일세[百年貪物⼀朝塵]」라고 한 것이 있오.’라고 하여 자못 비꼬는 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김자행도 역시 청렴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나주목사가 되어 임기가 차서 돌아 오려고 할 적에 관중(官中)의 재물을 모두 취하여 짐을 다 꾸려가지고 장차 실으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미워하여 불을 질러 모두 불태우니, 어떤 사람이 기롱하기를, ‘6년 동안 탐한 물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六年貪物⼀朝灰]’라고 하였으니, 이때 사람들이 명담(名談)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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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행 ⾦⾃⾏ 세조 12년(1466) 3월 6일∼세조 14년(1468) 12월 [1차]
- 김자행 ⾦⾃⾏ 세조 12년(1466) 3월 6일∼세조 14년(1468) 12월 [1차]김자행(1412∼1489)은 나주목사를 두 번 역임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안이(安⽽)이다. 집의를 지낸 김질(⾦咥)의 아들이다. 1429년 현량으로 천거되어 소문전 직장이 되어 벼슬에 올라 1449년 사헌부 지평, 1457년 제주경차관, 1461년에 첨지중 추원사가 된다. 1462년 성주목사, 1466년 나주목사, 1469년 통정대부 광주목사(廣州 牧使)를 지내고, 1472년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가선대부 강원 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가선대부 부호군이 되고, 1480년에 경상도관찰사에 부임한다. 그리고 1490년에 다시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중임하게 된다. 『금성일기』 「병술년 1466 년」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김자행이 3월 6일 도임하였다.”라 하였고, 「정해년 1467 년」 기록에는 “행목사 김자행과 판관 박문찬 등이 주에 사는 학생 장계동이 난언한 일로 추고를 입게 되어 3월 26일 상경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4월 7일 석방되어 4월 18일 관아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다. 이 일을 극복하고 1468년 말까지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금성읍지』에는 “성화 병술(1466년) 3월 6일에 도임하였고, 정해(1467 년) 3월 26일에 판관 박문찬 등과 함께 주에 사는 학생 장계동의 난언(亂⾔) 사건으로 체포되어 상경 의금부에 갇혔다가 4월 7일에 석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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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경 ⾦在敬 헌종 15년(1849) 6월 13일∼철종 2년(1851) 4월 24일
- 김재경 ⾦在敬 헌종 15년(1849) 6월 13일∼철종 2년(1851) 4월 24일김재경(1791∼1864)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치함(稚涵), 호는 졸재(拙齋)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기장(⾦箕章)으로 증참판 김기헌(⾦基憲)의 양자로 들어갔다. 1816년 성균관 유학, 1821년 명릉참봉, 1824년 장원서 봉사, 1825년 부솔(副率), 1826년 상의별제·금부도사, 1827년 종묘령·사직령, 1832년 개령현감, 1835년 금천군수·해주판 관, 1842년 장악주부·사직령, 1845년 사도시 첨정, 1846년 상의 첨정, 1847년 선공 주부·남원현감, 1849년 3월 서흥부사를 지냈다. 1849년 5월 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 었고, 5월 18일 전임지 황해도 서흥 임소에 있어 빨리 올라와 하직하도록 도신에게 관문을 보낸다. 1851년 4월 12일 가작(加作) 한 미조(⽶租)가 2114섬이고, 분방(分房) 의 봉결(捧結)은 3000여 냥이 넘었다는 논의가 있다. 1859년 형조참의, 5월에 경주부 윤, 6월 우부승지, 1863년 첨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유(1849년) 6월 13 일에 부임하였고 신해(1851년) 4월 13일에 상경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51년 4월 12일 의금부에 나포되어 상경, 조사 받은 결과 1851년 4월 24일 파직을 당한다. 김재경은 양부모를 지극히 섬겨 1864년 정려를 받았는데 현재 충남 논산 연산면 광산김씨 문중 재실인 염수재(念修齋)의 솟을대문 상단부에 홍살문 형태로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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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명(1901~1930)
- 김재명(金在明, 1901~1930)의 본적은 광주시 동구 불로동 76으로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925년 광주청년회; 임원,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전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1927년 3월 제3차조선공산당 전라남도 책임비서, 광주 야체이카 담당자로 활동했다.1928년 2월말 정비된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지속으로 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3.1운동 10주년 기념시위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1928년 7월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옥고의 여독으로 폐병에 걸려 순국했다.'김재병의 상태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1929.12.30.) 기사에서는 "김재명은 정신을 일코 피골이 상접하얏스며 대소변을 바더내는 중이라 하며 ~ "라고 쓰고 있다.*김재기 전남대 교수 페이스북에서
- 2021-02-26 | NO.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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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연 ⾦宗衍 우왕 9년(1383) 1월 16일∼우왕 10년(1384) 7월
- 김종연 ⾦宗衍 우왕 9년(1383) 1월 16일∼우왕 10년(1384) 7월 [1차]김종연(?∼1390)의 본관은 광산(光⼭)이다. 김정(⾦精)의 아들이다. 김정은 신돈의 암살을 도모하다 처형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된 뒤에야 벼슬을 시작하였다. 1388년 전라도부원수, 전라도도절제사, 1389년 전라도원수를 역임하면서 전라도 지방의 왜구를 격퇴하였다.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에도 참전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고려인 남녀 100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1390년 12월 이성계 제거 모의사건으로 적발되어 심문 중 옥사하였다. 『금성일기』 「신유년 1381년」에 “목사 김종연이 1월 16일 도임, 갑자(1384년) 7월에 정무를 마치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고, 『금성읍지』에는 “계해(1383년) 5월 도임, 갑자(1384년) 7월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