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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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주택(奇柱宅)
- 기주택(奇柱宅, 1675~?)의 본관은 행주이다.부 : 奇元聖조 : 奇東奭증조 : 奇翊외조 : 完山 李後奭처부1 : 江陵 崔濟岱1798년 10월 18일에 幼學 奇珍이 京畿道 高陽郡 元堂面 沙根寺에 있는 논을 族叔인 奇柱宅에게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 있다.
- 2020-08-08 | NO.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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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학경奇學敬(1741~1809)
-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중심(仲心). 호는 겸재(謙齋). 대승(大升)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참의 언관(彦觀),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나면서부터 초매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7년 문학사에 선임되어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교정하였다.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한 뒤 곧 정자(正字)를 거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국정에 관한 칠조소(七條疏)를 올렸으며, 그뒤 무장현감(茂長縣監)을 거쳐 홍문관수찬, 교리에 이르렀다. 기학경은 기대승의 후손으로 수신과 세상에 쓰임이 된 인물로서 그의「칠조소(七條疏)」나 「퇴율량선생사칠리기전말(退栗兩先生四七理氣顚末)」, 「회퇴량선생자의변(晦退兩先生疵議辨)」은 전인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권1은 시(詩)로서 모두 41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친구 간에 경사가 있거나 송별, 별세하였을 때 보낸 글, 한가로이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 선현들의 유적지나 글을 보고 느낀 시 등을 수록하였다. 기학경은 자신이 사는 곳을 노래한 「겸재(謙齋)」를 남겼는데, 만년에 강호에 은퇴하여 선현들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따라 풍월과 자연을 일삼으니 그지없는 낙이라고 읊조리고 있다. 저서로는 《겸재집謙齋集》이 있다.
- 2020-09-23 | NO.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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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회성(奇會性)
- 기회성(奇會性, 1889~1943)의 본관은 행주, 자는 연술(然述),성술(成述)이고 호는 연파(蓮波)이다.부 : 奇世國조 : 奇景燮증조 : 奇東燁외조 : 尹泰浩, 鄭鼎鉉처부1 : 朴魯術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 2020-08-08 | NO.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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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효증(1550~1616)
- 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임곡 용동마을에서 기대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를 함재라고 한 것은 '넣고 들이며 가라앉히고 쌓아 두어라'라는 아버지 기대승의 훈계를 따르기 위해 지은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감에 이르렀으나 1572년에 기대승이 별세하자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 백우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그는 벼슬에는 큰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6월 10일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와 의곡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그는 8월1일에 선조가 압록강 끝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모집격문'을 써서 각 고을에 돌린다. 1592년 8월 19일, 광주의 선비 기효증은 용진산 가학정의 주인 박경과 함께 장성 남문 의병청에서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을 만나 그들은 양곡을 보으고 운반하는 일에 기효증은 의곡장으로 임명되고, 박경은 기효증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선유사 윤승훈이 도내에 내려와서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져온 것에 크게 고무되어 격문을 쓴 것이다. 그 결과 의병 1,000인과 군량미 3,000여 석을 확보하였다.그 뒤 휘하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에 이르러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시위하였는데 왕의 총애를 크게 받아 형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군기시첨정에 올랐다.'호남절의록'에는 기효증과 함께 의곡을 모은 이는 영광의 이굉중·이용중 형제, 오귀영, 이희룡, 송약선, 이헌, 임수춘, 이안현, 최희윤, 이곤과 이분, 김재택이고, 광주의 이운홍, 남평의 송기원, 무장의 오희량, 순천의 이안현, 고창의 김홍우, 무안의 윤황 등이다. 특히 전 참봉 이굉중은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어서 기효증을 적극 지원하여 영광 도유사가 되었고 영광출신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하였다. 송약선은 중종 때 청백리인 지지당 송흠의 4대손으로 영광에서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고봉의 장남 함재 기효증(1550~1616)의 <근왕록>(勤王錄)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도 시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한글 번역도 되지 않았다. 기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함재근왕록'에는 의곡을 모은 사람으로 이굉중, 민근, 이영립, 임업, 이운홍, 이천룡, 기효분, 기효민, 박경, 이한, 이녕 등의 이름이 나오고, 무안생원 김충수가 쌀 2백석, 순천 낙안 유생이 3백석, 태인 유생 안광주가 2백석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효민은 기효증의 동생이고 기효분은 기효증의 사촌이다.<근왕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기효증이 군량미 3200석을 모아 바닷길로 임금이 있던 용만(龍灣) 의주까지 수송했던 내역 등이 기록돼 있다. 기효증은 의곡과 의병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따라 의주로 향한다. 맨 먼저 9월16일에 영광군 의곡도유사인 이굉중과 생원 이용중, 유학 이홍종, 생원 이극부 등이 함께 모은 의곡 1.200석이 영광 법성포에서 출발하였다. 9월21일에는 나주에서 양곡을 실은 배 3척이 출항한다. 기효증은 이 나주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보인다. 배들은 서해안을 거치면서 점점 늘어났다.함재근왕록에 의하면 의곡을 실은 배는 모두 24척으로서, 강진 1척, 영암 2척, 나주 3척, 무안 1, 임치 1척, 함평 1척, 영광 2, 무장 2, 흥덕 1, 고부 1, 금모포1, 부안 2, 임피 1, 옥구 1, 태안 2, 근포 2척이다.쌀과 의병을 실은 배들은 10월15일에 고부에 도착하고, 11월6일에는 군산포(羣山浦) , 11월10일 충청도의 람포(藍浦), 12월3일에 태안(泰安)에 도착한다. 그리고 12월6일에 근포진, 12월10일 독진을 거쳐서 1593년 1월19일 강화도에 도착한다. 포구에 이를 때마다 배가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제문을 올리고 해신에게 제사를 드리었다. 이를테면 11월6일 군산포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원 임업이 제문을 지은 제서해신문祭西海神文이 '함재근왕록'에 실려있다.1592년 겨울은 너무 추웠나 보다. 의병선 5척이 풍랑에 표류되기도 하였고 바다가 얼어서 제대로 운항을 못하였다. 의주의 행재소는 기효증이 의병과 의곡을 싣고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것 같다. 1592년 12월17일 선조실록을 보면 윤두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효증이 정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있는데 삼화도가 얼어붙어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또 이곳 정군을 뽑아 이빈(李薲)에게 주어 싸움터로 보내면, 그는 그곳의 형세를 잘 알고 있고 또 전에 이미 오래 머물면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스스로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배는 1593년 1월말 경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효증이 2월1일에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썼기 때문이다. 기효증은 의주 거련관에서 선조 임금을 뵈었다. 임금께서 불러보시고 따뜻하게 말씀하시길 “고통을 무릅쓰고 먼 곳에서 이곳에 이르니 내가 매우 기쁘도다. 또한 풍랑이 심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위로하였다.이 때 임금의 호위가 허술하였는데 호남에서 정예 근왕병 460명이 오자 비로소 호위병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양곡은 주로 명나라 군사들의 식량으로 쓰였다.조정에서는 도체찰사가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려 기효증은 형조정랑 및 군기시 첨정 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군기시는 병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는 신하로서 할 도리를 다한 것이지 별다른 공로가 없으니 4품 벼슬을 사양한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선조임금은 기효증의 사직 상소를 보고는 “천리 길을 달려와 임금을 도왔으니 그 충의정신이 장하다”고 하였다.이 상소문에는 의병과 의곡의 내역과 각지에서 차출된 배, 그리고 종사자 명단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의곡종사 감수관 전몽성, 참모 최지남, 군량 선물 참모 강형, 주사장(舟師將) 김몽일, 해남의 의곡유사 윤광계, 백진남 이름 등이 나온다. 백진남은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기효증은 나중에 동복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93년 3월에 대간들의 논박을 받고 파직된다. 한편 종사관 박경(朴璟 1559-1633)은 평시서 직장에 제수하였으나 그 또한 벼슬을 사양하였다 이에 임금이 궤장과 죽림처사라는 호칭을 내리었다.선조임금은 '천리길을 마다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함재 선생이 이곳에 7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청고한 절개를 본받았다.고봉의 아들 기효증이 시묘살이하던 위치에 건립된 현재 칠송정의 초건은 1651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그 후 누차의 중수를 거쳤다. 정자 내에는 한말의 거유였던 윤용구의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1905년 10대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 중건기, 호산승처필명정 8세손 기봉국이 쓴 칠송운이 걸려 있다.
- 2020-03-30 | NO.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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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 ⾦㤎 세조 2년(1456) 11월 22일∼세조 3년(1457) 7월 5일 상경
- 김가 ⾦㤎 세조 2년(1456) 11월 22일∼세조 3년(1457) 7월 5일 상경김가(?∼?)의 인적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거의 없다. 1454년 선공판사, 1455 년 영녕전의 천조관(薦俎官), 판통례문사(判通禮⾨事)를 지냈고, 1455년에 정난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는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나주목사로 임용된다. 『금성일기』 「병자년 1456년」 “신임 목사 통정대부 김가가 11월 6일 나주에 도임하였고”, 「정축년 1457년」의 기록에는 “행목사 김가가 7월 5일 체임되어 7월 25일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천순 병자(1456년) 11월 22일에 도임하였고, 정축(1457 년) 7월 5일에 교체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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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 ⾦闓 광해군 8년(1616) 3월 24일∼광해군 9년(1617) 4월
- 김개 ⾦闓 광해군 8년(1616) 3월 24일∼광해군 9년(1617) 4월김개(1582∼1618)의 본관은 상산(商⼭, 尙州)이며, 자는 계숙(啓叔), 군호는 낙천군(洛 川君)이다.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김귀영(⾦貴榮)이다. 처음에는 무반으로 출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었다가,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 알성시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14년 예조참의, 1615년 문과 정시에서 입격하였다. 1615년 동부승지·우부승지, 1616년 1월 가선대부로 승격이 되면서 같은 해 3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금성관(錦城館)을 중건하는 등 업적을 남기고 1617년 4월 좌윤으로 옮겼다. 허균(許筠)과 함께 인목대비 폐비론을 앞장서서 주장하다 1618년 숭례문[남대 문] 격문 사건으로 허균이 역모 혐의로 처형당할 때 심문을 받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1678년 결정적인 단서 없이 죽었다는 김석주(⾦錫冑)의 주청에 의하여 신원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신(1616년) 3월 24일 역말을 타고 도임하였고, 정사(1617년) 4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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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희 ⾦係熙 세조 3년(1457) 8월 11일∼세조 4년(1459) 11월 21일
- 김계희 ⾦係熙 세조 3년(1457) 8월 11일∼세조 4년(1459) 11월 21일김계희(?∼?)의 본관은 김해(⾦海)이며,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이다. 청도군사 (淸道軍事)를 지낸 김순생(⾦筍⽣)의 아들이다. 1435년 생원시에서 갑과 3위, 1441년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1447년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경상도 도사, 좌랑, 사간원 우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57년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나주읍성을 확장 축조하고 나주향교를 중수하는 등의 큰 업적을 이루자 백성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향교에 위패를 봉안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고 『금 성읍지』에 전한다. 나주목사에서 형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63년 인수부윤에까지 이르렀다. 『금성일기』「정축년」 1457년의 기록에 “신임 목사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김계희가 8월 11일 도임하였다.”라 되어 있고, 「기묘년 1459년」에는 “목사 김계희가 형조참의로 선환되어 기묘(1459 년) 11월 21일에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정축(1457년) 8월 11 일에 도임하였고, 기묘(1459년) 11월 21일 형조참의로 승진하여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장흥 수향리 김해김씨 사현사(四賢祠)에 배향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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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욱 ⾦光煜 인조 16년(1638) 8월 24일∼인조 17년(1639) 8월
- 김광욱 ⾦光煜 인조 16년(1638) 8월 24일∼인조 17년(1639) 8월김광욱(1580∼1656)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회이(晦⽽), 호는 죽소(⽵所)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 김상준(⾦尙寯)이며, 어머니는 이천우(李天祐)의 딸이다. 1606년 증광시에 진사시와 문과에 병과로 동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1608년 검열, 1609년 대교·설서, 1610년 사서·사간원 정언, 1611년 부수찬, 1612년 병조좌랑, 1613 년 계축옥사 때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었으나 풀려났다. 1633년 양서 관향사, 1637년 동부승지, 1638년 좌부승지를 역임하다가 7월 2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았다. 8월 24일 하직하고 9월 12일 부임하여 1639년 8월에 이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전라감사가 올린, 나주의 양전 감관(量⽥監官)을 조사한 계문에 대하여 아뢰는 이후원(李厚源)의 계가 있다. 쌀을 징수하여 폐단을 야기한 무리에 대한 형률에 대해 나주목사 김광욱이 사핵한 것과 해조의 회계가 모두 적절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 1643년 좌승지, 1644년 우승지·우부빈객, 1646년 도승지·예문각 제학, 1648년 도승지, 1650년 동지중추부사·경기감사, 1652년 개성유수, 1654년 동지정사, 1655년 좌참찬을 역임하다 1656년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죽소집(⽵所集)』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638 년) 9월 12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다음 목사의 부임일 등을 보아 1639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정(⽂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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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광(1415~1480)
- 성종실록 123권, 성종 11년 11월 11일 정해 5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졸기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김국광(金國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轍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다. 정통(正統) 신유년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천전(遷轉)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을축년 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승직(陞職)되고,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성균 주부(成均主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歷任)하였다. 경태(景泰) 을해년 에 조모(祖母)의 상(喪)으로 복(服)을 입었는데, 세조(世祖)가 ‘김국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상을 당했다고 대답하였다. 삼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승직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으로 천전(遷轉)되었었다. 경진년 에 특별히 중훈 대부(中訓大夫) 사섬시 윤(司贍寺尹)을 더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천전되었으며, 신사년 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계되었다. 세조가 항상 그의 암련(?鍊) 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었다. 그때 승지(承旨)들이 일로 인하여 견책(譴責)을 받으니, 김국광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다. 갑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초배(超拜)되고 성화(成化) 을유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승계되었으며, 병술년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승계되었다. 정해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천전되었다가, 이어서 우찬성(右贊成)에 승직되었는데, 그때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주벌(誅伐)로 정충 출기 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숭록 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계시켰으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한때 김국광을 비방(誹謗)하는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이것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니, 세조가 크게 노(怒)하여 간관을 저촉시켜 대죄(待罪)하게 하였으며, 김국광이 일찍이 의정(議政)을 역임한 적이 있다 하여 원상(院相)을 삼으니, 김국광이 찬성(贊成)으로서 또한 참여하였다. 기축년에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계되었는데, 주상(主上)이 즉위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계사년에 어미의 상을 당했는데, 을미년에 삼년상을 마치니,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을 제수하고, 정유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543) 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이 모두 장죄(贓罪)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태백산사고본】 18책 12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73면【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2020-05-08 | NO.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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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귀인
- 김귀인(金貴仁), 湖節2下-131-1, 光州, 壬辰, 一道殉節-《호남절의록》(1799)
- 2020-04-01 | NO.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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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 ⾦奎軾 고종 26년(1889) 8월 22일∼고종 27년(1890) 7월 1일
- 김규식 ⾦奎軾 고종 26년(1889) 8월 22일∼고종 27년(1890) 7월 1일김규식(1838∼1896)의 본관은 청풍(淸⾵)이며, 자는 우약(⾬若)이다. 아버지는 이세호 (李世鎬)이다. 1870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대교(檢校待敎)를 시작으로 1872년 우부승지, 1873년 우승지, 1879년 행부호군·이조참의, 1880년 원임대교,1882년 우승지, 1886년 부호군, 1887년 병조참지, 1888년 병조참의·우부승지, 1889 년 수궁검교대교(守宮檢校待敎)를 지냈다. 1889년 6월 3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고 8월 22일 부임하였다. 1890년 동부승지, 1892년 좌부승지, 1893년 행우승지·호군, 1895 년 5월 진주부관찰사, 1895년 7월 충주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축 (1889년) 6월 30일에 제수받아 8월 6일 임금에게 사조하고 8월 22일 부임하였으며 경인(1890)년 2월에 민란(광양)을 다스리고 7월 1일에 진향사(進⾹使)가 되어 경성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축(1889년) 9월 17일에 광양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가 되어 진압에 나섰고, 10월 30일 “안핵사(按覈使) 김규식(⾦奎軾)이, ‘광양현 백성들의 소란에 수창(⾸倡)한 죄인 정홍기(鄭洪基), 박상룡(朴尙⿓)을 이달 14일에 효경 (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금성읍지』의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2월에 “충주부관찰사 김규식, 청풍군수 서상기, 단양군수 권숙이,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해를 입었습니다.”라는 보고를 통해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1910년 8월 24일 충헌(忠憲)이라는 시호와 은전이 하사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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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극추金克秋(1552~1610)
- 김극추(金克秋), 湖節1上-08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이다. 1552년 4월 8일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사동 절골마을에서 참봉을 지낸 김필金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기 드물게 문무를 두루 갖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의로운 선비였다.당시 광주 목사로 부임했던 권율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해 그의 역량이 소문과 같은 것을 확인한 후 지근거리에 두고 친교를 나눴다.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무예 겨루기를 즐겨했다. 의기를 갖춘 권율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앞장서서 왜군과 싸웠다.권율이 피로써 맹세하고 있는 힘을 다해 왜군을 함께 무찌르자고 호소하자 1천 5백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관내 5백명 전라도 인근 1천명이었다. 광주공원에서 광주 향교 가는 길 오른 편 기슭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비석 스무개가 있다. 이 중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앞에 광주 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碑이다. 이 비의 옆면 두 곳에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인사의 명단이 적혀 있다. 김극추의 이름이 올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호남절의록』에는 1592년 7월 전북 금산 근처의 이치梨峙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훈상으로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충의사록』에서는 자세하게 이치전투에서 고을장정들을 인솔하여 영정곡永貞谷에 복병하였다가 큰 전과를 올려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뒤 행주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 한성참군이 되었다가 정우위별무사로 선별되었다. 권율 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정충신, 이충립, 고성후, 이완근, 이세환, 박대수, 김치원 등과 광주 8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그는 행주전투 이후 특진하여 내직으로 병조좌랑, 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 해미현감을 거쳐 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을 당했다. 그를 따르던 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선무후종3등공신에 책록되었다.그러나 임진왜란 때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1610년 1월 9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좌승지로 중직정려를 명하여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삼강정려에 모셔졌으나 주택단지에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이설되었다. 충남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 2018-05-28 | NO.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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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현 ⾦箕絢 철종 4년(1853) 12월 27일∼철종 6년(1855) 10월 15일
- 김기현 ⾦箕絢 철종 4년(1853) 12월 27일∼철종 6년(1855) 10월 15일김기현(1779∼1866)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성소(聖素)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주부 김상종(⾦相種)이다. 181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9년 정릉참봉, 1831년 사재봉사, 1834년 종묘 부봉사, 1835년 상서 부직장, 선공감 주부, 1836년 충훈도사, 1837년 삼등현령, 1843년 예천군수, 1844년 울산부사, 1846년 대구판관, 1850년 여주목사를 지냈다. 1853년 11월 1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17일 부임하였다.1854년 윤7월 3일에 전라우도암행어사 박인하(朴麟夏)의 서계에 따라 이조에서 “장부를 결부(結簿)에 넣고 양호(養⼾)의 폐단을 막았고, 군정(軍丁)의 원망을 살피고 균포(均布)의 규정을 혁파하여 2만 냥의 공납(公納)을 쇄환(刷還)하고 마을에는 엄히 독촉하는 근심이 없고, 300명의 굶주린 가호를 진휼하고 들에는 안집하는 기쁨이 있으며 고을의 일은 삼정(三政)을 모두 거행하였고 민정(民情)은 10년 동안 유임 되기를 원한다.”고 고하였으니, “이를 기원(飢願)으로 삼고, 300년의 기호(飢⼾)를 진휼하고, 들에는 안집하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고을의 일은 세 가지 정사가 모두 거행될 것이니, 민정(民情)은 10년 동안 유임(留任)되기를 원할 것입니다.”라 하면서 승서(陞敍)의 논의가 있었다. 신병으로 파출되었다. 1860년 남원부사, 1862년 인천부사, 1862년 함평현감, 진주목사, 1865년 남양부사, 1865년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축(1853년) 12 월 27일에 여주목사에서 옮겨 부임하였고 을묘(1855년) 10월 15일에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시 영산동주민센터, 신안 자은면,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에도 김기현 선정비와 영세불망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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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주
-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인은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태생으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73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창작과비평》에 발표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문학 활동 이외에도 전남‧광주 지역에서 활발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석방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 이사를 맡으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사회참여 활동을 병행했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수감 후유증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운명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1974년 《창작과비평》에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1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 1992년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상, 1993년 제3회 윤상원상, 1994년 제4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시집으로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솔직히 말하자》(1989), 《사상의 거처》(1991),《이 좋은 세상에》(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이 있다. 시선집으로 《학살》(1988), 《사랑의 무기》(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1991), 《꽃 속에 피가 흐른다》(2004)으며, 번역서로 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1978),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88), 하이네 《아타 트롤》(1991)가 있다.
- 2020-03-24 | NO.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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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노종 ⾦魯鍾 순조 25년(1825) 10월 13일∼순조 27년(1827) 3월
- 김노종 ⾦魯鍾 순조 25년(1825) 10월 13일∼순조 27년(1827) 3월김노종(176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대응(⼤應)이다. 아버지는 첨지 김건주 (⾦健柱)이다. 180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09년 건릉참봉, 1811년 선공부봉사, 1812년 상서부직장, 평시령, 1813년 금구현령, 1819년 부평부사를 지냈다. 1825년 9월 1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13일 도임했다. 1827년 예문관 제학을 역임하였 다. 『금성읍지』에는 “을유(1825년) 10월 13일 부임하였고 정해(1827년) 3월에 체직되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