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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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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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지
    김선지(金銑之, 1570~1597), 湖節3下-182-2,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김선지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휘(汝輝), 호는 제남(濟南)이며 참봉 김하(金河)의 후손, 생원 김안방(金安邦)의 아들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21년 戊子에 무과에 합격했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 곡포만호로 전함을 만들어 이순신 정운 어영담 배흥립 신호등과 더불어 한산 사천 부산 당포 당항포 옥포 노량싸움에서 연전연승 함으로써 군공(軍功)을 세우고 좌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의주(義州)에서 왕을 호위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전사하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1867년 기정진(奇正鎭, 1798 ~1879) 선생이 撰書한 宣武原從功臣 行寶城郡守 김선지(金銑之, 1570~1597) 선생의 <제남공묘갈명(濟南公墓碣銘)>이 있다. 
    2020-04-01 | NO.226
  • 김성원
    김성원(金成遠, 1525~1597), 湖節2下-162-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김성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광주 출생. 본관 광산(光山), 자 강숙(剛叔). 호 서하당(棲霞堂)ㆍ인재(忍齋). 아버지는 교위(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한종(漢宗)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세 때 아버지는 잃고 숙부에게 수학하여 1551년(명종 6) 향시(鄕試)에 일등하였으며, 정철(鄭澈)과 특계(特契)를 맺고 <근사록(近思錄)>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다.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60년 침랑(寢郞)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 14)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및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고 말았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병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살해되었다. 저서에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가 있는데, 여기에는 서문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와 한시 외에 부록으로 한시(漢詩) <식영정십이영(息影정十二詠)>, 송강(松江)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이의 한역(漢譯) 및 단가(短歌)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獻酌北堂時月微明雨亦作作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 수록된 <성산별곡>은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수록된 것과 비슷한데, 송강이 25세 때 김성원을 위하여 지어 준 것이라 한다.  그는 <성리서(性理書)> <주역(周易)>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시(詩)로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은 세상에 유행하였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는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인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식영정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이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후에 복원되었다.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명승 제57호. 소재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저서】<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2020-04-01 | NO.225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안국(金安國, 1478~1543)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으나 학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음
    2023-08-02 | NO.224
  • 김억룡
    김억룡(金億龍, 1561~1592)의 자는 내무(內武), 호는 송암(松岩)이다. 절효공 후손이며 공신 모재 김사모(金嗣牟)의 차남이다.1589년(선조22) 무과 급제하여 용분위부사정(龍賁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형 억명, 아우 억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광 송촌사(松村祠)에 제향했다. 湖節5上-105-2, 光州, 丙子, 扈從 -《호남절의록》(1799)송촌사는 원래 군서면 송학리에 소재한 것으로 철종때 향중유림의 발의로 모재 김사모, 송은 김억명, 송암 김억룡, 송정 김억호, 송포 김억련 다섯부자(五父子)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순절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유림들이 제향해 오던 곳이다.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지난 1971년 향중유림의 재발의에 의해 현소재지인 만금리 만호동에 예전의 사우를 복원, 지금까지 매년 음력 9월21일을 향사일로 정하고 제향해오고 있다.
    2020-04-01 | NO.223
  • 김언복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려갔다. 군 참모로써 많은 훈공을 세웠다.금산이치(錦山梨峙) 싸움에서는 몸을 날려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수많은 적의 목을 자르고 용전분투하였으나 패세를 만회할 길이 없어 고경명과 더불어 같은 날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혼을 불러들여 장사지내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담양삼강록 다른 기록도 있다.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했본관(本貫)은 김해(金海), 판서(判書) 효심(孝芯)의 후손(後孫), 봉사(奉事) 분(芬)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9년에 무과(武科)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의주(義州)에서 왕(王)을 호위하고 또 아들 직장(直長) 경입(敬立), 아우 언수(彦壽)와 함께 군량을 모집(募集)하여 도원사 권율(都元師權慄)을 따라 전공(戰功)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여했다. 湖節3下-173-1,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222
  • 김영휘(金永暉)-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정홍명(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2022-05-03 | NO.221
  • 김원국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게 되었다. 이 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1906년 3월 원범과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어 3백병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탈출, 함평 먹굴산으로 피신하였다.여러 차례의 교전으로 일제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나 1908년 3월 영광 토산에서 패전, 불갑산으로 후퇴, 광주 어등산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 후 12월 19일 무등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갔던 김원범이 1909년 2월 취조받던 중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발송,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에 취임하였다.일제가 의병 대토벌전을 펼치자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함평을 근거지로 광주.나주.능주.동복.창평.담양.장성.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나주 관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함평 오산면에서 일군과 접전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그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군사지휘권을 곽진일에게 위임하고, 광주 우산면 향악리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총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2018-05-28 | NO.220
  • 김원범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항일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로 일제 감옥에서 자결한 애국지인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다. 형인 원국이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헌병을 타살하고 피신하자,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 1906년 3월 형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이때 선봉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의 규모는 3백명이었다. 그 뒤 각처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던 중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접전 끝에 대패, 원국이 붙잡히는 등 적지 않은 인명피해로 의진은 해산되었다.다시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에서 매복 중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적의 대장 요시다 이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또한 장성 낭월산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3월 영광의 토산에서 패전하고 불갑산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광주 어등산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참패하였다. 6월 이대왕 의진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 격퇴하였으며, 그 뒤 오수산과 함평의 석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1월 어등산에서 적과 교전중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전기홍 의진과 합진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 중군장에 임명되어 광주.나주.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8-05-28 | NO.219
  • 김유현
    김유현(金裕鉉) ; 동학  광주접주-백년약사(상권)
    2020-04-03 | NO.218
  • 김윤제(金允悌)
    김윤제(1501-1572)의 자는 공로恭老이며 호는 사촌沙村으로 광주인이다. 高祖 有章은 진사를 하였다. 曾祖 自沈은 진사를 하였으며 參議에 증직되었다. 조부 文孫은 진사를 하였고 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珝는 진사를 하였으며 음직으로 正郞과 縣監을 역임하였다. 모친 淑夫人은 礪山 金氏로 辛酉(1501)년에 석저촌石底村에서 김윤제를 낳았다. 지금의 북구 충효동이다.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이 있었으며 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嘉靖 戊子(1528)에 進士에 합격하였고, 辛卯(1531)에 文科에 급제하였다. 숙부 瑊과 더불어 나란히 입조하니 당세의 聲望이 무거웠다. 直講·弘文館敎理·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지방 수령으로서의 능력이 있어 全州鎭營 兵馬節度使, 扶安郡守, 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에 원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사촌 김윤제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息影亭, 瀟灑園과 함께 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環碧堂을 중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사촌은 말년에 환벽당에 은거하면서 후인의 교육에 전념하여 鄭澈, 金成遠, 金德齡 등을 계발시켰다.김윤제가 교유한 대표적 인들을 살펴보면, 宋純, 林億齡, 金麟厚, 蘇世讓, 梁山甫 부자, 奇大升, 梁應鼎, 金成遠, 鄭澈, 高敬命, 白光勳 등 湖南詩壇의 대표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 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들이 많다.
    2020-03-19 | NO.217
  • 김윤현
    김윤현金胤鉉은 광산김씨로 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화순현감(1878), 서흥부사, 안주목사, 남원부사(1886), 광주목사, 보성군수,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군 화순읍 대리 154번지(한고을길 16)에 있는 충신 정려각인 칠충각의 기문을 지었다.1885년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봉급을 털고 호남 지방의 종인들의 협조로 종회소 10칸, 제사(齋舍) 8칸, 문청(門廳) 5칸을 지었고 문헌공 대제학 김영수가 취사당(聚斯堂)이라 이름을 지었다. 취사당이란 의미는 광산김씨 후손이 이곳에 (斯: 이사) 모이는(聚: 모일 취)는 집(堂: 집당)이라는 뜻이다.
    2020-04-10 | NO.216
  • 김응복
    김응복(金應福)의 자(字)는 경서(慶瑞), 호는 서봉(瑞峰). 문경공(文敬公) 탁(琢)의 후손이며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김세천(金世天)의 둘째 아들이다.선조 때 무과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고종후(高從厚)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부 송암공(松庵公)과 함께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湖節1下-176-1,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 -《호남절의록》(1799)- 김윤해(金允諧) : 김응복의 아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응복공의 손자 김철생 공이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을 개촌하였다.
    2020-04-02 | NO.215
  • 김익두(金翼斗)
    광주(光州) 출신. 삽봉 김세근, 경당 김희환 후손이다. 호는 죽재(竹齋)이다.천성이 착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병이 났을 때 의원이 웅자치(雄紫雉)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자 크게 통곡하였다. 때마침 산 꿩이 사냥꾼에게 쫓기다 앞에 떨어져 구할 수 있었다. 이 꿩을 들고 가는데 사냥꾼이 말하길 자신이 잡으려던 꿩이라며 내놓으라고 말하자 그가 부모님 약에 쓸 것이라며 사정을 말했다. 사냥꾼이 허락하여 부친에 효도할 수 있었다. 김익두의 부인 김씨도 손가락에서 피를 부친의 입에 흘려 넣어 드시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호남지> 5권 열행(烈行)편에 있다.순종(純宗) 때에 정려를 내렸다고 전한다.
    2020-03-09 | NO.214
  • 김인연(金仁沇) -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급암시집 제3권 / 시(詩) 옛 은거지가 큰 바다를 누르는 곳 / 舊隱壓滄海신선을 찾아 자줏빛 구름을 넘어갔구려 / 仙游凌紫煙지금까지도 강좌의 명망 있는 가문 / 至今江左望오직 연연산에 비석 세우기를 기다린다네 / 唯待勒燕然성을 나와 백 리쯤 되는 곳 / 出城百里地바다 곁 한 층의 누각 / 傍海一層樓어진 재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賢相今何處신선의 학을 타고 표연히 노닐리라 / 飄然笙鶴游이상은 이상(二相) 김인연(金仁沇)의 청암장(靑嵒莊)에 대해 쓴 시이다.강좌는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진(晉)나라가 중원을 외적에게 빼앗기고 강좌 지역에 와서 동진(東晉)을 세웠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江左望〕으로는 왕씨(王氏)와 사씨(謝氏)가 있었다. 당시 공경(公卿) 장상(將相)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이 이 두 가문에서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김인연(金仁沇)의 가문을 광주(光州)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칭송한 것이다.김인연(金仁沇) : 대본에는 ‘金仁衍’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의 문신 ‘김인연(金仁沇)’으로 보인다. 김인연은 화평부(化平府) 즉 광주(光州) 출신으로, 밀직사로 있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왕의 환국을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왕과 적대 관계에 있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의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순군옥에 갇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밀직사와 찬성사(贊成事) 등을 역임하였고, 충숙왕이 죽은 뒤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복위를 청원하였다. 충혜왕 복위 시에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즉위 초에 시종한 공으로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022-05-03 | NO.213
  • 김인후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울산 김씨 이름은 인후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 시호는 문정이다. 1510년에 장성 맥동에서 태어나니 자질이 비범하여 6세에 시를 짓고 8세 때 조원기 관찰사와의 시문답으로 신동의 명성을 얻다. 이듬해 기안재가 보고 세자지신을 예언하다. 세에 김모재(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우니 모재가 3대 상의 인물이라 하고 소우로 대하다. 13세에 경서공부에 정진하고 글씨도 체마다 신묘한 경지에 들다. 18세에 최신재에게 배우니 신재는 선생의 학문이 이미 심오함에 경탄하다. 19세에 상경하고 성균관시회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다. 22세에 진사가 되고 24세에 성균관에서 퇴계와 학문을 강론하고 이후 그의 추중을 받다. 31세에 문과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호당에 들다. 34세에 홍문관박사 겸 세사시강원설서로 세자 곧 인종과 수어지교를 맺고 묵죽도 한 폭을 받아 제시를 써넣다. 유월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에 관해 극렬히 논변하고 귀향하여 옥과현감이 되다. 36세에 제술관으로 일시 상경하였으나 곧 귀임하다. 7월에 인종이 승하하자 통곡기절을 거듭하며 벼슬을 그만두다. 이후 향리에서 후학교육에 힘쓰며 학문에 전념하다. 거듭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효경간오발 대학강의발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는 한편 인심도심설 이기사칠론 태극론 등 도학의 주요 논점에 관한 치열한 논쟁에 선생은 심오정밀한 학식으로 의문을 명쾌히 풀어 학계의 방향을 바로잡다. 퇴계 고봉의 사칠논변에도 고봉과의 강론을 통해 많은 영향을 주다. 1560년 1월 16일 51세에 서거하다. 1662년 필암서원사액 1669년 문정시호를 받다. 1796년 정조20년 문묘에 종향되고 문정시호를 받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직을 받다.
    2020-03-19 | NO.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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