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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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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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찰방송공규식애인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찰방송공규식애인선정비(察訪宋公奎植愛人善政碑)는 북구 서방시장 상가에 있다가 광주공원 비석군으로 옮겼다.
    2018-07-03 | NO.59
  • 찰방송공택훈권학청덕거사비
    광주시 북구 우산동 514-21864년이 찰방 송공택훈 권학청덕거사비(察訪宋公宅薰勸學淸德去思碑)는 북구 서방시장 상가 부근에 있다가 광주시 북구 향토문화의 거리 입구 소공원으로 옮겼다.여산 송택훈은 1837년(헌종 3) 출생으로 안주(安州)에 거주했다. 부친은 송식언(宋植彦) , 조부는 송국렴(宋國濂) 이다. 1855년(철종 6) 6월 식년 병과에 8등으로 급제하여 1858년 2월 경양역 찰방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찰방 송택훈을 기리는 공덕비이다. 그는 경양역 찰방으로 1860년 7월 6품으로 승진되었고  1864년 1월 예조정랑이 되고 1865년 6월 어천도찰방으로 제수되었다.1866년 12월 사헌부 장령, 1878년 12월 교서관 판교, 1881년에 병조 참의에 올랐다.북구 우산동 383번지(옛 동광 주조장) 일대에 경양역이 있었다. 전라도에 3곳밖에 없는 찰방 주재 역이 서방에 있었다. 경양역이 있던 서방은 간뎃골, 모롱골, 시낙골, 괴약골, 병문안, 잿모실, 한거리, 진고샅, 풍동 등 9골(谷)을 둔 광주읍성의 위성도시였으며 정보화 마을이었다.
    2018-07-03 | NO.58
  • 찰방은공성호영세불망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경양 찰방은공성호영세불망비(察訪殷公成浩永世不忘碑)는 은성호를 기리는 비석으로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비석 앞면에는 그를 기리는 싯구가 있다.氷糵其操 邸債首擧儒雅之治 黎首便宜捐俸捄弊 匪徒載石七郵普施 豊口是鐫후면  甲子 四月 日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년, 淸 穆宗 同治 3年, 日本 元治 1年) 1월 16일 기사에 보면 '이조, 포폄에서 성적이 나쁜 수령들을 파출하도록 아룀 " 제목으로 이종순(李鍾淳)이 … (중략) … 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상략)경양 찰방(景陽察訪) 은성호(殷成浩)에 대해서는 ‘조사한 것이 혹 규례에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모두 ‘하고(下考)’에 두어야 마땅한데도 ‘중고(中考)’에 두었는 바, 엄명하게 고과한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여섯 도의 감사를 모두 추고하여 경책(警責)시키고, 위에서 말한 여섯 고을의 수령과 한 역(驛)의 찰방은 모두 파출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018-07-03 | NO.57
  • 찰방이공원기청덕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854년찰방 이원기 청덕선정비(察訪李元基淸德善政碑)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후면 갑인(1854년)철종 5년
    2018-06-13 | NO.56
  • 참봉제주양공기적비
    광주시 북구 문흥동 995-4(느티나무공원 내)1967년이 장사랑건원릉참봉제주양공기적비(壯仕郞健元陵參奉濟州梁公紀蹟碑)는 呂昌鉉 짓고 梁守根 쓰다.
    2018-11-13 | NO.55
  • 참봉최공찬문기사자혜산홍섭송덕비
    광주시 북구 거진길 48-4(용두동)1924년이 대자선가참봉최공찬문기사자혜산홍섭송덕비(大慈善家參奉崔公贊文其嗣子惠山弘燮頌德碑)는 용두동 거진마을에 있다. 최찬문과 최홍섭의 자선 행적을 의친왕 李堈 짓고 李明翊 쓰다.
    2018-11-13 | NO.54
  • 청신녀 금봉화조순임 공덕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46(원효사 아래 부도 및 비석군)1992년이 청신녀 금봉화조순임 공덕비(淸信女史錦奉華趙順任功德碑)는 금봉회원 일동 건립하다.
    2018-11-13 | NO.53
  • 청신녀이선근화공덕비
    광주시 동구 운림길 57-15(운림동) 세심정사2018년이 청신녀이선근화공덕비(청신녀이선근화공덕비)는 세심정사 내에 있다.
    2018-12-01 | NO.52
  • 청은김공창규공적비
    광주시 북구 청풍동 2801985년이 청은김공창규공적비(淸隱金公昌奎功績碑)는 鄭德采 짓고 쓰다.전면글씨 鄭炳璿
    2018-11-13 | NO.51
  • 최석규-은사 야은 최공석규 공적비
    서구 유촌동 374 인근은사야은최공석규공적비恩師野隱崔公錫圭功績碑는 최석규의 제자들이 글을 짓고 李容九이용구가 글씨를 썼다. 최석규(1902~?)의 본관은 탐진이며 일제강점기 때 한글이 폐지되고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서당을 건립하여 서창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의 문맹 퇴치와 지역문화 발전에 선봉장이 되었다.서창 지역의 마지막 훈장으로 일컫는 최석규의 제자들이 늦게나마 그 은혜에 보답하고 선생의 學導之功을 잊지 않기 위해 1977년(丁巳)에 이 공적비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서구 원마륵2길 11 원마륵마을 입구의 마륵동노인회관 건너편에 있다. 지금은 대형 빌딩을 신축 공사 중이어서 따로 보관되어 있지만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자리에 세운다고 한다. 비문 뒤에는 그를 기리는 시가 있는 데 마륵마을에서 야은처사가 서당을 세우고 책을 통해 성인의 은덕을 가르쳤으나 일찍 돌아가셔 천추의 한이 남아 스승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거울처럼 귀감이 되어 여러 문하생들이 달을 보듯 우러르는 마음을 갖겠다는 내용이다.
    2018-05-25 | NO.50
  • 최한일-제헌 최한일선생 송덕불망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1년 건립, 1973년 재건립제헌최한일선생 송덕불망비(濟軒崔漢鎰先生頌德不忘碑) 비문 앞면에는 奉公警署 功德攸曁 惟愛商旅 玆頌永世라 했다.이 비는 최한일(崔漢鎰, 1846~1923)의 불망비(不忘碑)로 광무5년(1901년)에 세웠던 것이 훼손이 심하여 1973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찬자(撰者)는 김유신(金裕新)이고 서자(書者)는 고정흠(高廷欽)이다. 비문에 의하면 제헌(濟軒) 최한일(崔漢鎰)은 본관은 탐진(耽津), 손암(遜庵) 최윤덕(崔允德)의 11대손으로 1846년(헌종12) 서석산 아래 북촌(北村)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조선 말 국정이 혼란하여 민란이 봉기하는 등 전국이 어수선할 때 지사(志士)와 의인(義人)들이 광주(光州)에서 모여 공(公)을 수성별장(守城別將)으로 추대하였고, 당시 목사(牧使)인 이희성(李羲性)과 함께 별초군(別抄軍) 300명을 거느리고 방어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이 공으로 전라남도경무관서리총순(全羅南道警務官署理總巡) 겸 화순군수(和順郡守)에 제수되었다.
    2018-06-11 | NO.49
  • 최현숙 애국지사 흉상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산 127 (문성고 건너편)1993년일제치하 1919년 3월 1일 당시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담갔던 유관순이 있다면 빛고을에는 ‘광주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여성 독립운동투사 최현숙 선생이 있다. 최 선생은 선구적인 여성으로 일찍이 독립운동과 농촌 계몽에 젊음을 바쳤으며, 폭악한 일제의 총검에 항거하여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쳐왔던 여성운동가다. 그녀는 3·1운동에 가담한 16세의 최연소 독립운동가로 옥살이를 지냈으며, 광주 최초의 여성언론인이다. 그녀는 1904년 1월 27일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남구 양림동)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잣집 막둥이 외동딸로 태어났다.당시 여성의 교육이 중시되지 않았던 때. 그녀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0살의 나이로 수피아 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4년을 마친 후, 다시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를 진학하게 될 만큼 총명하고 영특했다. 1920년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 제 6회 졸업생이었던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 정신여학교의 진학에까지 이르는 계몽의식이 남달랐다.그녀가 고등과 3년 재학 당시 3·1운동이 발생했다. 체격이 남들보다 성숙했던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렬을 선도했다. 광주에서는 3월 10일 봉기를 하기로 있던 터라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다.시위 당일. 그녀는 결단의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했다. 머리를 땋고 치마끈을 단단히 매고 짚신을 신은 채 시위진열에 섰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수피아 여학교에서 광주시장까지 가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16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갖은 고초를 겪고 미결구금으로 50일간을 투옥하게 됐다. 최 선생은 투옥당시 일경에게 무수한 매와 두부 15cm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어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끈을 매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고 한다.그녀는 만세운동으로 옥살이 이후 1924년 3월 서울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녀는 독립운동의 정열을 이어 흥학관(동구 광산동 구시청)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문맹퇴치운동, 주민계몽운동에 힘써왔다.그녀는 독립운동 이외에도 여기자 활동, 후학육성, 사회봉사활동 등 광주 여성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로 조명되고 있다. 또한 ‘수피아 백년사’에도 수피아가 존경하는 인물로 최현숙 선생을 다루고 있어 여성 운동사에 귀감을 주고 있다.
    2018-11-23 | NO.48
  • 춘강거사나주오공종남선행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137-7(가마마을)
    2018-11-11 | NO.47
  • 춘강김공순곤기실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 신기마을 양양재1981년이 춘강김공순곤기실비(春岡金公淳坤紀實碑)는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 입구 도로변에 1981년 건립되었다가 노대동 신기마을 뒷편 양양재洋洋齋로 옮겨졌다. 이 비는 김순곤이 이 고장 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기록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김순곤의 자는 경순, 호는 춘강, 본관은 김해로서 김용관金容權의 3남으로 1918년 10월29일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濯纓 관영 선생의 15대손이다. 1979년 11월28일에 사망하였다. 서체는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다. 높이는 165cm, 폭 57cm, 두께 22cm이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낙후된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번민하면서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향토인이 함께 뭉쳐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춘강 선생은 南堤池防 저수지 축조공사에 심혈을 기울여 답 825평을 희사하였고 사재를 털어 하수도 개발과 다목적 마을회관을 건립하는 등 어려운 일에 대의를 일해 살았다는 비문 내용을 볼 수 있다. 비문은 1981년 2월에 조선대학교 교수인 김명현 ⾦海 ⾦明炫이 지었다.
    2018-06-14 | NO.46
  • 춘담기인 최병채기적
    광주시 동구 학동 필문대로329번길 22(武光祠)1958년이 춘담기인 최병채기적(春潭奇人崔炳釵紀績)은 동구 학동 구 춘태여상 자리인 무광사(武光祠) 경내에 있다. 춘담 최병채春潭 崔炳釵(1907~1987)의 공적내용을 화강암에 음각하였다.최병채는 1907년 곡성군 석곡면 운룡리(현 순천시 주암면 운룡리)에서 부친 경환(炅奐)씨와 김해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중엽 중종대에 의정부 사인(舍⼈)을 지낸 최산두의 16대 손이다. 15세부터 순천의 조정림에게 한의학을 배우고 화순 동복의 이진규에게 침구학(鍼灸學)을 배운 후 22세 되던 1928년 한약업사 면허증과 침구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부족한 공부를 위해 일본 오오사카 하마대라 침구학교에 유학했다. 43세 되던 1949년,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인과원(因果院)을 개업한 후 한의사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그는 특히 육영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운룡초등학교(곡성 석곡ㆍ1947)를 시작으로 춘태여자고등공민학교(1960), 농업기술학교(화순 이서ㆍ1965), 춘태여자중학교(1966), 신농중학교(1967),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1967), 국제고등학교(1984)를 설립했다.그는 한의사로 번 전 재산을 궁핍한 사람을 구하고, 거지들을 도와주며, 민족교육을 위해 분토(糞⼟)처럼 쓴 인물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기인이라 불렀다.무광사(武光祠)는 그가 1957년 이은상(李殷相)박사의 자문을 받아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을주벽으로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든 문열공 김천일, 충장공 김덕령, 충장공 정운, 금계 노인,수은 강항, 수사 송희립을 모시고 있다. 무광사에서는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춘향제(春⾹祭)를, 기일인 12월 16일 추향제(秋⾹祭)를 지낸다.⼘天下宰相 不許則⼘天下名醫 此以其尊卑雖殊 濟世均也 然余嘗疑其語矣 今⺫擊⽽後 知其不誣也 春潭奇⼈崔炳釵 通政⼤夫光洙之抱寢郞炅奐之嗣 上祖新⿑ 先⽣天性慈孝 才器過⼈ 涉獵經史 嗜軒岐之書⽽知醫 常對證論劑 ⾨庭成市 爲闡家世之潛光幽德 ⽴碑碣建齋閣 所謂 望雲閣 迎⽉軒 翠⾬亭 雙萱橋 在天寺 等 六七棟合三⼗餘間 櫛⽐淹洞壑 ⼭明⽔淸 ⽯奇花繁 有此美莊終⾝ ⼀朝卷歸于光州市楊林洞 ⼈莫知其故也 居無幾庚寅亂作 舊居之雲⻯⾥百餘⼾ 皆化焦⼟ 嚮⽈同隣之張三李四 皆爲劍頭寃魂 若⾮奇⼈不俟終⽇ ⽽作必隨其中矣 不惟⽐也 右建物亦爲獨存之靈光 ⼈以爲神 當戊戌之春 ⼜於府南⼭之顚 拓起⼟⽊ 不數⽉⽽告成 第⼀ 武光祠 配享 李忠武公 ⾦千鎰 ⾦德齡 鄭運 魯認 姜沆 宋希⽴ 七公 興起觀感第⼆ 醉醒院 延賓朋資燕嬉 第三 ⻱蓮菴 供禮 觀世⾳ ⻄⼭⼤師 泗溟堂之影 第四 ⾬花堂 居沙彌淸淨道場 第五 貞蘭室 啓虛菩薩修鍊最後 第六 ⽇⽉閣 藏圖書及國寶繙閱博識 第七 龍鳳院 育孤兒無告 馴致⽂明 第⼋ 烏⾸堂 招迎者宿討論古今 輦巖⽯筧 ⽔泉環築池臺 地勢兀兀落落 如移⼀仙境 放府中之半空 其江⼭之杳靄 市街之參差 眼欲窮⽽膏忽開也 猗歟韙哉 奇⼈ 平⽣⽤金如糞⼟ 療疾病 救窮之憐丐乞 興學校扶會社 布宮室享⻤神 安老少 其廣業崇德 果何如哉 旣⺒有良⼼ 窮⾏實踐 如此 以菲薄⾃奉 ⽽利⼈澤物之功 昭著遐邇 令名之無窮 眞可也 與范⽂正之宰相 相仲也 左記⼈⼠ 欲誇鄕産⽽奇績 ⻱將戴⽯ 放三塔之傍 徵余⽂ ⽂拙雖辭不獲 略擧梗槩 後之君⼦ 覽此⽽宜有以考焉 乃繫之以詩⽈雲⻯欝盤 洞壑深寬泉紅苔紫 沙碧松寒篤⽣異⼈ 才良形端遷居光州 倍勝⾵流杏林慈航 花⽯名樓豚肩不掩 節儉⾃修祠祀諸公 挽⽇頹⾵資⽗移居 ⾮孝曷忠天應有報 昌⼤無窮檀紀 四⼆九⼀年 戊戌 ⽉ ⽇ 完⼭ 李敎儀 撰번역천하에 재상을 바라나 허락하지 않은 즉 천하의 명의를 기대한다. 이는 그 존비가 비록 다르나 세상을구제하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일찍이 이 말을 의심하였으나 지금 목격한 후로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춘담기인 최병채는 통정대부 광수의 손자요, 경환의 아들이다. 선조는 신제이다. 선생은 천성이 자효하고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 경사를 섭렵하고 의서를 좋아하여 의술을 알았으며 항시 병의 증세를 보고 약을 지었다. 문전성시를 이루어 가세의 잠광유덕을 열었으며 비석을 세우고 재각을 건립하였다. 이른바 망운각, 영월문, 취우정, 쌍훤교, 재천사 등 6, 7동을 합하여 30여칸이 즐비하게 마을에 잠겨있어서 산은 밝고 물은 맑고 돌은 기이하고 꽃은 번성하여 이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곳에서 종신코자 했으나 갑자기 광주시 양림동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인란(6.25전쟁)이 일어나 옛 살던 운룡리 백여호가 모두 초토화되었다. 지난 번 마을의 보통 사람들이 다 칼끝의 원혼이 되어 만일 기인이 지체하고 떠나지 아니했다면 반드시 그 속에 들고 말았을 것임은 비할 바가 없다. 위 건물 또한 홀로 노나라의 영광전처럼 남았으니 사람들이 묘하다고 여겼다.무술년 봄을 맞아 또 광주의 남산 끝자락에 토목사업을 넓혀 일으켜 몇 달 가지 않아 완성하니 제1 무광사로 이충무공 김천일 김덕령 정운 노인 강항 송희립 등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7공을 배향하였다. 제2성원은 손님을 맞아 연회를 베푸는 곳이고, 제3 구연암은 관세음보살 서산대사 사명당의 영정을 공례한 곳이며, 제4 양화당은 사미가 거하는 청정도량이다. 제5 정난실은 보살이 전심으로 수련하는 곳이고, 제6일월각은 도서 및 귀한 자료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제7 용봉원은 고아를 길러 순치하여 문명에 이르게 하는 곳이며, 제8 도수당은 초대한 자들과 밤새 고금을 토론하는 곳이다. 좋은 돌을 쌓고 주변에 연못을 둘러 파 지세가 빼어나서 마치 하나의 선경을 옮겨서 시내의 공중에 띄워 놓은 듯하다. 여기에서 보면 강산의 아득함과 시내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눈으로 다 볼 수가 있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하다.아, 위대하다. 기인은 평생 돈을 분토같이 쓰면서 남의 질병을 치료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걸인을 불쌍히 여겨 주고 학교를 세워 배우게 하고 회사를 도와주고 궁실을 지어 귀신을 향사하고 노소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그 광업숭덕이 과연 어떠한가? 이미 어진 마음이 있어 궁행실천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이런 선한 마음으로 몸소 실천을 하고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해 남에게 이로움을 베풀어 그 공덕이 멀고 가까운 데에 두루 드러나 훌륭한 이름이 한없이 나고 있으니 범문정공의 재상됨과 맞먹을 만하다. 고향사람이라  자랑하고자 하여 기적을 돌에 새겨서 삼탑 옆에 놓고자 내 글을 구하니 글이 졸렬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요점만을 들어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후의 군자들이 이를 보고 마땅히 살핌이 있으리라. 이어 시로써 말하기를,雲⻯欝盤 洞壑深寬 운룡마을 울창한 곳에 동학은 깊고 넓어泉紅苔紫 沙碧松寒 샘이 맑고 이끼 푸르니 모래 푸르고 소나무는 곧네.篤⽣異⼈ 才良形端 하늘이 이인을 내니 재주 넘치고 몸이 단정하여遷居光州 倍勝⾵流 광주로 이사하여 풍류는 배로 늘었네.杏林慈航 花⽯名樓 의원으로서 자비를 베푸니 화석에 명루로다.豚肩不掩 節儉⾃修 풍족히 먹지 않고 검소함을 스스로 다해祠祀諸公 挽回頹⾵ 여러 성인을 제사지내며 퇴폐한 풍속을 만회하였네.資⽗移居 ⾮孝曷忠 아버지 섬기기를 다하니 효 아니면 어찌 충성하리요.天應有報 昌⼤無窮 하늘이 복을 내려 창대함은 끝이 없구나.단기 4291년 무술년 완산 이교의 지음
    2018-11-09 | 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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