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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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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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 면장석파윤공기원공적비
    광주시 북구 망월동 668-3(동주민센터내)1965년이 前 면장석파윤공기원공적비(前 面長石坡尹公器源功績碑)는 宋永淇 짓고 쓰다.석곡면민 일동 건립했다.
    2018-11-13 | NO.158
  • 前 석곡면장용암함양박공장길공적비
    광주시 북구 망월동 668-3(동주민센터내)1984년이 前 석곡면장용암함양박공장길공적비(前 石谷面長龍菴咸陽朴公長吉功績碑)는 李炳炫 짓고 쓰다.석곡면민 일동 건립했다.
    2018-11-13 | NO.157
  • 前 참봉석곡면장최달석공덕기념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891927년前 참봉석곡면장최달석공덕기념비(前 參奉石谷面長崔達錫功德記念碑)
    2018-11-13 | NO.156
  • 건향각건립비
    광주시 남구 양과동 향등마을1972년마을 뒤편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경주 김씨 죽헌공파 종친회에서 건립한 재실이 건향각이다. 당시 여러 사람으로부터 모은 기금으로 중수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광주시 위생매립장에 편입되어 그 뒤를 알 수 없다.
    2018-06-15 | NO.155
  • 겸도순찰사원공두표선정류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兼 都巡察使元公斗杓善政流德碑(겸 도순찰사 원공두표선정류덕비)는 원두표(1593~1664)의 선정비로 5언 4구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어렵다.원두표의 본관은 원주, 자는 자건(子建)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사복시 주부, 형조정랑, 영광군수를 거쳐 이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후 이괄의 난의 공으로 전주부윤을 거쳐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원당(原黨)의 영수로 재상의 지위인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일개 서생이었던 신분에서 인조반정을 거쳐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주목사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자 승진하여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주자대전서》를 간행하여 임금에게 진상하며 말하기를, “주자가 남으로 강을 건너간 후 시절을 근심하고 세상에 격분하여 그 임금을 위해 적을 물리칠 계책과 어질고 어질지 못한 분별에 대하여 극진히 진언하였는데, 그때를 회고해 보면 지금과 비슷합니다. 송나라가 주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망하였으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을 보는 것이 오늘날에 옛날을 회고함과 같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주청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가납하였다.
    2018-06-13 | NO.154
  • 경백당이상휴공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6 (원산동 원산마을)2002년경백당이상휴공적비(景栢堂李祥休公蹟碑)는  괘고정수 인근에 있다.상서공 도유사는 이승주이며 필문선생유적보존회장 이영휴 등이 2002년(임오년)에 건립하다.
    2018-06-11 | NO.153
  • 경운박공재룡공적비
    광주시  남구 양과동 1237-1, 지산마을1969년  이 경운박공재룡공적비(耕雲朴公載龍功蹟碑)는 남구 양과동에서 포충사로 들어가는 큰길에서 공예창작촌 입구 옆에 세워져 있다.  박재룡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장동과 양과동 주민들이 공동으로 1969년(단기 4302년) 8월에 세운 비석이다.  옆에는 성재 최홍진 공적비가 나란히 있다.비문에 쓰여진 공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經⽈ 河潤九⾥ 澤及三族 盖君有憂⺠之⼼則 必有濟⺠之道 ⼈救命之志則 必有濟命之策 ⽽道策⼤⼩ 雖⽈不同 其規則⼀也 咸陽朴公載⻯ 性天早拔 ⼼地正直 接⼈如坐春⾵ 決事如⼑剖⽵ 歷任農林技監 國⽴農産物檢査所⻑ 全羅南道農村振興院⻑ 及 農事敎導委員會道委員⻑ 爲國爲⺠ 獻誠⾄⼤ ⽽三⼗餘年 官事有公無私 ⼀不失差矣 庚⼦ ⼤統領奬許功勞 以綠條素星勳章 丙午 ⼤統領以銀塔産業勳章賞賜也 內務部⻑官 農林部⻑官 農村振興廳⻑ 全羅南道知事 贊揚功勞 各有賞 ⽽爲勇退鄕⾥ 講究救⼈之策 州⻄⼆⼗⾥有⼭峽 農地數萬町步 素是乾庄也 逞⾟⺒崔省齋鴻鎭 極⼒周旋 築良苽堤 事巨⼒綿 不及廣範矣 丁未冬公交涉官府 得略干金 廣其周圍 益鑿數尋 增築堤堰 儲⽔洋洋 戊申春 痛禁之笛版 專⼼儲⽔ ⽽此年旱魃 前代所無也 灌漑數町步 乾畓無憂移秧 倘飢之樂 無踰於此 公之功德稱譽 藉藉 其他地⽅事業 亦熱誠 不可枚擧 噫歲之豊稔 不常 ⽽⼈之儲畜 有常則何患乎 養親敎⼦之道哉 故地⽅⼈僉議詢同竪碑 紀功益勉 後來者之矜式 可也云檀紀四千三百二年乙酉八月中弦泥場良苽共同堅번역경에 가로되 “황하는 구리를 적시고 윤택은 삼족에 미친다.” 하니 대개 군주가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생명을 구하는 책략이 있을 것이니 도책의 대소는 비록 같지 않으나 그 규칙은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함양 박재룡은 성품이 어려서부터 빼어나고 심지가 정직하여 사람을 접하면 춘풍에 앉아 있는 것 같고, 일을 결단할 때는 칼로 대를 자르듯 하였다. 농림기감을 역임하고 국립농산물검사소장 전라남도농촌진흥원장 및 농사교도위원회도위원장으로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헌성이 지대하여 삼십여 년 간 공사를 사심이 없고 실수 없이 처리했다. 경자년에 대통령으로부터 녹조소성훈장을 병오년에는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내무부장관 농림부장관 농촌진흥청장 전라남도지사로부터 찬양공로와 각종 상을 수상하고 용퇴하여 향리에서 주민들을 구제할 방법을 연구하였다.마을 서쪽 이십리에 산골짜기 논 수만 정보가 본래 말라 있는 땅이었다. 신사년 최홍진의 극력 주선에 힘입어, 양과제를 쌓는 일에 크게 힘을 내어 광범위하게 못하다가 정미년 겨울 관청과 교섭하여 약간의 자금으로 범위를 넓히고 두어 길의 땅을 파서 둑을 쌓음에 물이 넘실넘실하게 되었다. 무신년 봄 통금의 간판을 세우고 저수에 전심하였는데, 이 해에는 전대에 없는 가뭄이 들었지만 수 정보에 관개를 하여 마른 논에 모내기 걱정이 없어졌다. 그 즐거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하리요?공의 공덕은 모두에게 칭송을 받아 자자하니 다른 지방사업도 열성으로 다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아, 해의 풍년은 일정하지 않되 사람의 저축함은 일정함이 있은즉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도리를 어찌 근심하리요? 지방 인사들의 여러 의견이 동일하여 공적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여 후대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노라.단기 4302년 기유 8월 보름 이장동 양과동 공동으로 세움2018.11.26. 수정
    2018-06-11 | NO.152
  • 고계영-장흥고씨진사공휘계영기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10-142013년
    2018-11-30 | NO.151
  • 고동재-성재 장흥고동재 모선공적비
    광주시 남구 포충로 701(원산동), 황산사 1987년성재 장흥고동재 모선공적비는 황산사 올라가는 옆길에 있다. 1987년에 세웠다.
    2018-10-21 | NO.150
  • 고제철 박사 공덕비
    서구 용두동 414-1고제철박사공덕비는 1988년 3월 전주 이한용이 찬하고 남양 홍순만이 썼다.충렬공 고경명 장군의 11대손으로 서구 용두동에서 태어났다. 송원대학교 설립자이며 금강기업 회장이다.
    2018-05-30 | NO.149
  • 고한석-겸헌고공행적비
    광주시 동구 지원동 용연마을1976년이 겸헌고공행적비(謙軒高公行蹟碑)는 장흥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고한석, 자는 도일이다.公姓高氏諱漢錫字道一號謙軒公之平口言行常自謙故當時士林公稱之號也盖高氏始自耽羅乙邦致麗朝良獻公諱福林有勳封長建興伯故仍籍焉於公爲十八代祖也李朝成均生員 贈司憲府持平號滄浪諱敬履九代孫也公生長于簪纓世家天姿淳粹溫恭自虛言動以禮惟以飾躬奉先導迪門子弟爲弟石義今外榮達推暴別人念化者吾宗族門戶植敦(이하 입력중)睦增揱先祭有田止衛墓道具儀物皆使無遺感焉此莫非公之垦生誠孝廣 恩義之致也於乎公之盛德高義己, 郷黨定論無待乎門少輩之讚沙阿好乜然異及公時喜有以墓效而承述之者則不可己也此承裕契之設而樂其有賢父兄也周年後公輒知峻責嚴絶不容貸時日故不敢遠嚴今而强忍而罷悔恨之餘以實想告于大小門長老則僉曰公也固有實德實行者也豈可以公之自謙而拒絶沒其實而蔑承述之道乎於是更謀於門 則周盛之餘欣然從之比承裕契之耵以復設而實因公之老昏不者者也未數月而公遽見背後生之痛爲何如哉因其從f濟信勞力拮据而僅僅維支日濟信告余曰而今世道日非人心   첨륜향모선덕지심일익소박유공오계역수이해지이탄보의원석일言而記碑使進常目재지인득기덕화무량이이以爲水冬慕效之資如何余悵然良久以其自소견德己久向慕尤심고불감이무졸고사이서기만일凡我門少令而後能認得非復公在之曰而深念倚靠着부득지의而自省自勵常思喜以振拔於衰李則可謂善於承述而忠於爲謀矣若夫簪裾도재이唁行不相顧虛장성名而沒其實者非但余習性之所惡也公亦厭之矣   檀紀四千三百九年丙辰二月
    2018-11-11 | NO.148
  • 관암류공상렬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신촌동기 59-6(동호동) 대동사1998년이 관암류공상렬기적비 寬菴柳公庠烈紀績碑는 월성 정동휘가 짓고 철성 이석환 쓰다. 이름은 상열庠烈이며 자는 관일寬逸이다.관암 유상열(寬菴 柳庠烈)이 광산구 본촌동 호은정(湖隱亭)에 지은 시에 정자를 지은 의미가 남아 있었다.호산(湖山)위에 몸을 숨겨 칩십춘(七十春)이 되었는데천석(泉石)위에 지은 정자 그 모습이 새롭도다자손 위해 남긴 유업(遺業)이 늙은이 제일이요뜻에 의해 이룬 사업이 사람을 보았도다.독실하는 그의 행동 많은 선비 칭찬하고일생동안 힘을 모아 그의 몸을 지켰도다매화나무 벗을 삼아 성심으로 좋아하니교자 같은 높은 유풍 평탄하여 솔진(率眞)하네.호은(湖隱)은 심원하(沈遠河)의 호이며 호수의 물가에서 숨어 산다는 은거호상(隱居湖上)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작지만 정자가 갖는 상징성은 다 지니고 있다. 관수정이란 정자에도 이런 시를 남겼다.謹次觀水亭韻 重修舊址十分椽眼下龍 江又鵲川返照魚登波底 峀高秋鴈落渡頭天竹山 風宿村相接松洞雲坪野 更圓靜坐悠然觀以術無 人不謂是神仙 寬菴文化柳庠烈
    2018-11-21 | NO.147
  • 관암류선생강학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1978년이 관암류선생강학기적비寬菴柳先生講學紀蹟碑의 주인 이름은 상열庠烈이며 자는 관일寬逸이다. 신촌마을에 있다.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문화류씨 좌상공파 대승공(左相公派 大丞公) 32세손이다.유상열(柳庠烈, 1880~1962)은 자 관일(寬逸), 호 관암, 본관 문화(文化)이다. 고조는 명종(命宗), 증조는 흥일(興一), 조는 위영(渭榮)이고, 아버지 인엽(寅燁)과 어머니 금성나씨(錦城羅氏) 종익(鍾益)의 딸 사이에서 1880년(고종17) 10월 17일 나주 금호리(琴湖里)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도 후진을 이끌고 강학을 전수하였으며, 향리의 사람들을 위무(慰撫)하였다. 1962년 봄에 한기(寒氣)로 인하여 병이 일어 6월 16일 자제들에게 효제(孝悌)를 당부하고 사망하였다. 묘는 나주 본량면(本良面) 신촌(新村)에 있다. 문집으로 관암유고가 있다. 화호영당(華湖影堂)에서 발행했다. 관암유고는 1965년에 간행된 1책 석인본이다. 권수 구분 없이 시(詩), 서(書), 서(序), 기(記), 발(跋), 장(狀), 문(文) 등과, 부록(附錄)으로 만사(輓辭)와 제문(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서(序)는 유인원(柳寅瑗, 1965), 발(跋)은 심영구(沈永求, 1965)가 썼으며, 책의 첫 머리에 서(序)와 발(跋)을 함께 실어놓았다. 책의 끝 부분에 충현각각회록(忠賢閣講會錄)과 계원명록(契員名錄)이 있어 그 당시 저자와 교유하였던 지역 인사들에 관하여 알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용 정리중)道百而難齊未可率爾解必須先覺之解惑而講說之難疑?問然復曲暢旁通以入於眞師之功其大矣夫寬菴柳先生諱庠烈字寬逸文化人西先生自湄之肖孫也豪邁?豁之姿少而任俠好義個?慷慨有萬夫不當之勇折節窮經出入師門識其宗皆讀書每當古人卓節奇行合於義理處未嘗不菴卷嘆嘗當國之屋社忠念激奮視虜如犬大言蹴踏劫禍至少不挫撓矢心夙僕社門自靖仍愍祖蹟幽滯創大東祠妥八祖而俎豆之繼述其先志矣盖忠孝之心自學問上傲出來耳公志常存乎聖學手不釋卷時復思繹眞積力久得於心而踐履篤實成於行而儼然爲一鄕之師表風化所及學徒稱益進非徒以尋章摘句句讀之敎乃解其惑博之以及以明聖旨約之以禮敎其天然學不壓敎不倦刮劇講討各充其量心悅誠服各自供一辨番矣以鄭先生禮建宇俎豆之餘誠??猶其未足也竪碑以表其寬菴峯下講學之所以寓裳壇之慕昭示來百噫目今曰師曰弟之道土?之際有此盛擧庶或復見一線之?將回泰歟碑其成求文於余余寔非其人豈可不朽其事哉固辭不護以平曰所見聞者敍之月城 李瑾雨 撰 冠山 林晩洙 書戊午 九月 日
    2018-11-18 | NO.146
  • 관찰사 민정식 추모 마애비
    관찰사 민정식 추모 마애비가 무등산 원효사  미처 못가서 북구 금곡동 818번지에 있다. 무등로 1448 인근이다.광서신화(光緖辛和)가 옆에 적혀 있다.
    2018-07-03 | NO.145
  •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898년이 관찰사윤공웅렬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있다. 비의 양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維公喬木世華  氷O淸操  哭O設府 毁尿咸O  革二O染   一省OO十里湖山 人皆自得 召棠冠栢 百世匹休 豊功盛德 書難盡辭이 비는 관찰사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선정비로 무술년(1898년)에 건립되었다. 윤웅렬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영중(英仲), 호는 반계(磻溪)이다. 1856년 무과에 합격했다. 1896년 8월부터 전라남도관찰사로서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합병 직후인 1910년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2월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예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1년 사망 후 작위는 장남 윤치호(尹致昊)가 이어 받았다. 김영집 지역미래연구원 원장은 "윤웅렬은 1896년 고종이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전라도 초대 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이 때 나주에서 군수와 관리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윤웅렬은 광주로 도망쳤고 그 뒤 광주에 눌러 앉아 관찰사 일을 했다. 이후 광주에 배치된 관찰도는 전남도청이 됐다. 매국노 윤웅렬도 한때 개화파 정치인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일본에 망명한 후 친일내각의 군부대신이 됐다."고 했다.<광주매일, 2017.8.9.)〇참고문헌『친일인명사전』
    2018-06-11 | NO.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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