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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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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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마암기적비(용마바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산 43-1(용강골마을)1989년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글공부와 말달리기, 활쏘기를 익힌 지 십여년만에 世祖 丁亥(세조 정해)를 당하여 吉州(길주)의 적 李施愛(이시애)가 七州(칠주)로써 반하여 흉악함이 헤아릴 수 없었다. 朝野(조야)가 진동하고 놀라는데 上(상)이 特選(특선)으로 驛馬(역마)를 보내 부르거늘 公(공)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뜻이 없은지 오래이지만 國家(국가)가 危急(위급)하여 存(존)하느냐 亡(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 世祿(세록, 代代(대대)로 官祿(관록)을 먹는 집안)의 臣(신)으로서 어찌 앉아서 볼 수가 있으리요 하고 즉시 말을 재촉하여 征伐(정벌)에 따르기로 나서는데, 上(상)께서 便殿(편전)으로 불러들이어 御 (어온, 임금이 드시는 술)을 下賜(하사)하시고 命(명)하여 曺錫文(조석문)의 從官(종관)이 되게 하니 魚油沼(어유소) 李綜(이종) 등으로 더불어 마음을 合(합)하고 힘을 다하여 龍馬(용마)를 몰고 나아가 칼과 창을 휘둘러 施合(시합)을 묶고 말이 뛰는 대로 달려가 홀로 施愛(시애)를 베니 北賊(북적)이 모조리 平定(평정)되었다.凱旋(개선)을 하자 上(상)께서 크게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주고 敵愾勳(적개훈)에 策錄(책록)하고 碑(비)를 세워 功(공)를 기록했으며 閣(각)을 세우고 形貌(형모)를 그리도록 하며 다음 해 四月에 通政(통정)으로 올려주고 七月에는 嘉善(가선)으로 進階(진계)하여 羅城君(나성군)을 封(봉)했으며 兵曹參判(병조참판)으로 任命(임명)을 했다. 九月에는 辭職(사직)을 하고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했는데 말과 함께 돌아왔다.睿宗 己丑年(예종 기축년)에 內艱(내간, 母喪(모상))을 當(당)하여 막집에 居(거)하며 喪(상)를 지켰는데 갑자기 말이 슬피 울거늘 公(공)이 달래 보았으나 돌아보고 돌아보며 더더욱 슬프게 울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강가로 달려가 잡을 수도 없이 한 번 뛰더니 강물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 나오지 않고 말았다.公(공)이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너를 命(명)하여 나를 돕게 하여 危險(위험)한 속에서도 死生(사생)을 같이 했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날마다 강가에 가서 그 情(정)과 功(공)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큰 바위를 깎아 龍馬(용마)의 形體(형체)를 본떠 彫刻(조각)을 했는데 九分(구푼)이나 비슷하고 다만 소리만 없는지라 먼데서 바라보면 은연중 풀속에 엎드려 있는 듯 하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公(공)도 享年(향년) 오십으로 작고하니 上께서 官(관)을 보내 致祭(치제)를 하고 吏曹判書(이조판서)를 贈(증)하고 諡號(시호)를 襄平(양평)이라 했으며 百世不(백세불조)를 명하고 光廟(광묘, 世祖廟(세조묘))의 庭(정)에 配食(배식)케 했다. 아! 公의 굳은 마음은 돌과 같았으나 危急(위급)함을 보고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救(구) 했으며 急流(급류)에서 勇退(용퇴) 도하여 明哲(명철)한 君子(군자)가 되었다. 무릇 말이 찾아온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요.사람을 따라 나오고 없어지고 한 것이다. 公의 한창 나이에 강가에 나왔다가 公을 도와 적을 토벌하고 公의 公明(공명)이 이룩되자 다시 강속으로 들어갔으니 아마도 龍(용)이 馬形(마형)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물로 들어가 龍(용)으로 化(화)하여 간 것이 아니겠는가? 公이 그가 始終(시종) 死生(사생)을 같이 했음을 생각하여 큰 바위에다 形體(형체)를 조각함으로써 龍馬巖(용마암)이란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이다.그 뒤 450여년에 倭人(왜인)들이 그 머리를 깨트렸다가 즉시 피를 吐(토)하고 느닷없이 죽어 버리니 곁에 있던 倭人(왜인)이 겁을 먹고 그 머리를 다시 때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말의 靈(영)이 그랬다고 하지만 어찌 말의 靈(영)만이 그랬으리요. 아마도 이는 公의 靈(영)이 항상 그 위를 배회하면서 不祥(불상)스러운 것을 금하여 靈驗(영험)을 보여줘 後人(후인)을 징계함이니 누가 半千年(반천년)이 지난 뒤에까지도 公(공)의 靈(영)과 말의 魂(혼)이 혁혁하게 없어지지 아니하여 아직도 이 바위를 禁(금)하고 지킬 줄을 알았으리요.이렇게 생각한다면 靈(영)은 반드시 無窮(무궁)토록 傳(전)하리라. 누가 감히 一便(일편)의 바위라 하여 경홀히 보겠는가. 대대로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 羅城君(나성군)의 혁혁한 偉蹟(위적)이 世上(세상)과 함께 傳(전)해 가리니 이는 千古(천고)의 奇蹟(기적)이라. 아! 이제는 公의 모습과 말의 소리는 막연히 멀어졌지만 오직 龍馬巖(용마암)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가리키고 있다.襄平公(양평공)의 後孫(후손) 璟烈(경렬)이 그 先世(선세)의 遺蹟(유적)을 追慕(추모)하여 龍馬巖(용마암)의 아래에다 碑(비)를 세우면서 그 宗人 東烈(종인동렬)을 통하여 나에게 文(문)을 求(구)하니 내 그런 爲人(위인)이 못된다고 사양타 못해 諸賢(제현)들의 證據(증거)가 되는 글을 뽑아 모으고 銘(명)으로 써 붙이노니 하늘이 襄平公(양평공)를 냈음이여땅에서는 龍馬(용마)가 나왔도다.能(능)히 神力(신력)을 이용하여이름 떨치고 功(공)을 이룩했도다.功(공)이 이룩되자 말은 가버리니그를 생각하여 모습을 刻(각) 하였도다.우뚝한 龍馬(용마)의 모습이여千古(천고)에 靈(영)이 남아 있도다.辛酉年(신유년)가을 七月 立秋日(입추일)에 月城(월성) 李瑾雨(이근우) 지음1989년 3월 七松公(칠송공) 14대손 境烈(경열) 謹竪(근수, 삼가 세움)용마암(龍馬巖)은 송산교를 가는 도중 황룡강 강둑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우람한 바위이다. 복룡산 북방 산기슭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양평공 오자치 장군이 그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손수 자연석을 쪼개 만들었다는 이 바위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송정 일대에 야생마 한 마리가 나타나 민가에 피해를 주었다. 오자치는 이 말을 길들여 어등산·복룡산등을 달리며 무술을 닦았다. 하루는 중방마을에서 복룡산을 향해 활을 쏘아 놓고 그가 타고 있는 말이 화살보다 앞서 달리라고 명령했다. (화살보다 날쌔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산위에 올랐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성미가 급한 오자치는 타고 있는 말의 목을 베어 죽였다. 이때 화살이 날아와 말의 허벅지에 박히는 것이었다. 오장군은 그제야 자신의 경솔을 뉘우치고 그 밑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마행을 새겨 애마의 억울한 넋을 달랬다고 한다.2018.12.01. 수정
    2018-11-11 | NO.134
  • 용아 박용철 생가
    광산구 소촌로46번길 24박용철(1904~1938)은 1930년대 시문학파를 탄생시키고 한국 순수 서정시대를 개척한 시인이다. 또한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2018-06-26 | NO.133
  • 용아 박용철 시비
    광주 광산구 소촌동 산 25-11. 송정공원1985년 송정공원내의 박용철 시비 '떠나가는 배'이다. "나두야 간다~"로 시작하는 용아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가 새겨져 있다. 용아는 항상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학생으로, 고교시절에 지하신문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고 강진 출신 김영랑과 왕래하면서 문학과 시작에 전념했다.경철의 시를 선했고 뒷면의 글은 손광은이 썼으며 글씨는 하남호가 썼다. 조각은 김정수가 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2018-06-21 | NO.132
  • 용연마을 충효비
    광주시 동구 용연동 278-1(용연마을)용연새마을청소년회에서 건립했다.
    2018-11-30 | NO.131
  • 용전들노래 기념비
    광주 북구 용전동 용전마을 입구2000년용전 들노래는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의 하나로 1999년 제40호 한국민속 예술 축제에서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그 기념비를 건립하나니 원컨대 이와 더불어 고향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움이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로 타오를 지어라.후면전승 김귀천(金貴千)고증 지춘상(池春相)지도 김동언(金東彦)범대순(范大錞) 글 짓고, 청원(靑原) 오세영(吳世永) 글씨 씀.
    2018-11-15 | NO.130
  • 우리의 교육지표
    광주시 북구 전남대학교 인문대1호관 앞2007년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인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뿌리 내리지 못한 교육 현실과 그 실패의 집약적 본보기가 ‘헌장’이라고 지적했다. ‘지표’는 “민주주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은 애국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4개항 실천 지침을 적었다. 인간화되고 민주화된 교육, 교육자 자신의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열, 교육 외부 간섭 배제, 3ㆍ1정신 4ㆍ19정신 계승 전파와 민족역량 함양 교육이었다. 송기숙 명노근 등 서명자 전원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됐고, 29일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 교수들은 모두 해직됐고, 송기숙과 서명에 가담하지 않은 당시 해직교수 성내운(전 연세대)은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시위 학생 30여 명도 구속되고 제적ㆍ정학을 당했다. 이로부터 35년이 지난 2015년 4월 29일 박정희 정권 당시 대표적인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인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인 신현범 광주지법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와 함께 법원의 과거 잘못된 재판을 반성했다.
    2018-11-30 | NO.129
  • 우송홍공우선기적비(友松洪公祐譔紀蹟碑)
    우송홍공우선기적비(友松洪公祐譔紀蹟碑)는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에 있다. 이 비는 삼명광주노인회(三明光州老人會)에서 1968년에 건립하였다. 찬자(撰者)는 홍석희(洪錫熹)이고 서자(書者)는 심한구(沈翰求)이다. 비문에 의하면 홍우선(洪友譔)은 삼명노인회를 창립하여 광주공원 광장 남쪽의 가옥을 얻어 회관으로 하고, 지원금을 얻어 양돈사업(養豚事業)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 사람들을 권면하여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2018-06-11 | NO.128
  • 우평이진환모선송덕비
    광주시 동구 운림길 57-122012년이 우평이진환모선송덕비는 광산이씨 충의사 옆 추원재 앞에 있다.
    2018-11-22 | NO.127
  • 운리사(벽진서원) 묘정비
    광주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운리영당이 훼철되고 운리사가 세워지자 운리사 묘정비廟庭碑를 쓴 박석무 전 한국고전번역원 원장(다산연구소 이사장)은 “학향이자 의향인 광주의 상징적 인물이던 선생은 살아계시던 당시에 옥玉 같은 마음과 옥 같은 용모, 이름까지 옥이어서 삼옥三玉이라고 불렸다”고 쓰고 있다. ‘옥 같은 마음’은 운리사와 회재로의 주인공 박광옥이 당대에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가를 느끼게 한다. 회재 박광옥의 영정은 서구 풍암동 운리사雲裏祠에 있다. 다만 지금은 개보수 중이라 금호동 회재회관 음성박씨 종친회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다. 운리사는 2018년 중에 벽진서원으로 변경하여 문중과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2018-05-25 | NO.126
  • 운암서원 묘정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235-1 동배마을 앞에 있는 운암서원 내에 있다. 충민사에서 시내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왼쪽에 조그마한 서원 하나가 있는데, 운암서원[雲岩書院]이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을 비롯하여 고경리(高敬履) 송 타(宋 柁) 권 필(權 韠) 신 필(申 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배향하였다.   廟 庭 碑 雲 巖 書 院雲巖書院은 湖南儒林 朴致泰 等 300餘名의 發議로 洪州人 海狂 宋齊民 先生의 精靈을 奉安한 祠宇로써 肅宗 34年(1708)에 光州市 北區 雲巖洞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建立하였다.海狂 宋先生은 "仁"과 "義"를 갖추신 분으로 湖南義兵 從事官으로 壬辰倭亂 時에 義兵을 일으키어 倭敵을 殲滅하고 軍馬와 軍需 物資를 調達하여 戰爭 터에 보냈고 임금에께 萬言疏를 作成하여 보내는等 救國의 一念으로 義兵活動에 專念하시였고 孔子께서 春秋를 지으셨던 義와.장재(張載)가 學堂의 한쪽 窓에" 어리석게 보일지언정 바른길로 나아가라고"써붙이며 强調하였든 仁을 同時에 갖추신 분이시다. 朝奉大夫司憲府 持平에 贈되시었다. 이듬해 先生의 사위 石洲 權 필(韠)先生을 配享하였고 石洲 權 先生은 安東人으로 朱子學에 通達하고 詩文에 뛰어나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不就하고 學文을 하고 남는 餘暇마다 高竹淸風을 題材로 삼아 詩賦를 지었다. 특히 훌륭한 文章家로 後儒들의 尊崇을 받았으나 光海祖에 宮柳詩를 지어 親鞫을 맡고 流配 途中 卒하고 그後 持平에 贈되시었다. 그 60年後에 祠宇 重修와 더불어 큰아드님이신 花菴 宋 타 先生은 海狂 先生의 長子로 天性이 至孝하였고 丁酉再亂時 捕虜가 되어 배에 실려 가든중 閑山島에 이르러 홀로 倭寇의 칼을 脫取하여 倭寇 數十名을 죽이니 살아 남은 倭寇가 逃亡하여 倭寇陳營에 가서 다시 처들어오니 衆過不足으로 다시 잡히시니 바다에 投身하면서 나는 光州 사는 누구에 아들인데 여러분 중에 살아 도라가신 분이 계시면 나의 父母님께 이事實을 傳하여 주라는 遺言을 남기고 殉節 하셨으며 그後에 朝奉大夫司憲府 持平에 贈되시었다. 滄浪 高敬履 先生은 여러 차례 名山을 찾아 다니며 修道하였고 올바른 길을 分別하고 거짓들을 씻어 버리니 公의 靈 靈은 萬物의 根源 인 太極에 머문다고 했다. 靜友堂 申公은 나라에서 벼슬을 授與하려 해도 받지 않고 終身토록 國家의 悲運을 슬퍼함이 父母喪을 當한겄 같이 하고 義兵을 糾合하고 王統을 保位하였으니 그의 忠 과 孝를 잘알수 있다.道溪 申公은 經學硏究에 全念하였고 當代및後代 儒者들의 模範이되었다.이상과 같이 六位를 모시였으나 그후 高宗 一年에 全國의 書院撤廢令에 따라 高宗 五年(1868)書院이 毁撤되어 있다가 1994年부터 書院 復元事業을 儒林과 門中 宗員들의 誠金으로 始作하여 1998年(戊寅)十月에 竣工을 하여 現在는 海狂 宋 齊民 先生을 主壁으로 하고 石洲 權 韠 先生과 花菴 宋 柁 先生 三賢을 奉安하고 있다.
    2018-06-18 | NO.125
  • 울산김종혁사적비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오룡마을1972년 이 울산김종혁사적비(蔚山金鍾赫事跡碑)는 靈泉寺에 있다.
    2018-12-01 | NO.124
  • 월봉서원 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너브실마을월봉서원 연혁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장 등을 기록한 묘정비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기리는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선조 11)년 호남유생들의 공의로 지은 신룡동의 망천사(望川祠)로부터 비롯되었다.그 후 정유재란의 화로 피해를 입고 월봉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1654년(효종 5) 월봉(月峰)으로 사액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짓고 1978년 증축을 거쳐 1981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봉은 본관이 행주로 아버지 진(進)과, 어머니 진주인 강영수(姜永壽)의 딸 사이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삼촌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는 소과는 물론 대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엘리트코스를 밟고 조선조 학문의 최고 기관인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정통관료이자 올곧은 유학자이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를 통한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은 조선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대학자이자 관직이 대사성인데 비해 그는 이제 갓 벼슬길에 나선 32살의 신출내기였다. 이러한 지위나 나이 차이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나중에는 서로가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황의 사단,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이(理)에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등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논사록>·<주자문록> 등이 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고봉이 얼마나 퇴계를 존경했는지는 한편의 시 “꿈에 퇴계선생을 뵙다”에 잘 나타나 있다. 前夜依俙杖屨陪 지난밤에 어렴풋이 스승을 모시었고今宵款曲笑談開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고 말씀하셨네.分明一念猶憂世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걱정하시니可識先生不著梅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 수가 있네  월봉서원 묘정비문 병서 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2018-12-04 | NO.123
  • 월호류인대공공적비
    광산구 본량신촌동길 59-6, 대동사(大東祠)월호 류인대(유인대)의 공적비이다.
    2018-11-21 | NO.122
  • 위르겐 힌츠 페터 추모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구망월묘역2016년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장면을 생생하게 촬영하여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을 전세계 알렸던 위르겐 힌츠 페터 독일 공영방송 기자가 지난 2016년 1월15일 독일 북부 라체부르크에서 79세로 작고한 후, 생전 유언에 따라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그해 5월 16일 유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시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 입구에 안장돼 추모비가 세워졌다.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는 독일의 기자이자 언론인이다.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로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영상에 담아 언론 통제로 인해 대한민국 내에서는 보도될 수 없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필름을 큰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숨겨서 일본으로 반출한 뒤 독일 함부르크의 뉴스센터에 전달하여 이 영상은 독일에서 수차례 방송되었다. 외국의 다른 언론들도 이 영상을 받아 보도함으로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일명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다
    2018-12-16 | NO.121
  • 유애서원 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용아로 460(경장각)유애서원은 광산구 흑석사거리 부근에 1754년 시정 유애사로 건립되어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5년 유애서원으로 복원하여 성균관에 등록하였다. 광주 유림들의 주관으로 매년 (음)2월 20일 문정공 석탄 이신의 선생의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행촌 민순을 스승으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왜적에 맞서 싸웠으며, 그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 유폐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항소하여 변방인 회령으로 위리안치 유배되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형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하사 받았으며, 고양의 문봉서원과 괴산의 화암서원, 광주 유애사에 배향되었다.석탄 이신의는 당대에 충의와 절의의 선비로 이름이 높았으며, 해주목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온 고을 백성이 그의 길을 막아설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폈던 관리였다. 회령의 유배 시절 거문고를 구해 지은 송松,국菊,매梅,죽竹의 사우가四友歌는 윤선도 오우가보다 24년이나 앞서 지어진 작품이다. 석탄집을 비롯한 이신의 종가 소장 고문서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으며, 명문이 새겨진 400년이 넘는 석탄금과 선조어필 병풍은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되고 있다. 石灘李愼儀先生神道碑銘은 우암 송시열이 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찾을 수 없었다.경장각이 위치하고 있는 하남 흑석동 시리마을은 옛부터 감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감남징이」라고 하였다가 그후 시정枾亭과  이동李洞을 합하여 시리枾理라 부르게 되었다 . 조선조 인종때의 명신名臣 이신의공李愼儀公의 후손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광주와 하남간 도로 확장공사로 교통의 중심지역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공단工團으로 들어가는 하남산단중앙로의 길목이다. 
    2018-12-02 | NO.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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