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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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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4년
    정언신ㆍ김대명ㆍ이후백ㆍ정엄ㆍ곽규ㆍ윤행ㆍ허충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4년 신미(1571) 8월 24일(계축)       정사가 있었다. 정언신(鄭彦信)을 지평에, 김대명(金大鳴)을 도사(都事)에, 이후백(李後白)을 대사헌에, 정엄(鄭淹)과 곽규(郭赳)를 장령에, 윤행(尹行)을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허충길(許忠吉)을 여산 군수(礪山郡守)에 제수하였다.【원전】 21 집 236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11 | NO.233
  • 천아(天鵝)를 면제해준 담당 관리를 추고하다 - 선조 4년
    광주에 천아(天鵝)를 면제해준 담당 관리를 추고하다 - 선조 4년 신미(1571) 5월 22일(계미)        광주(光州)에 천아(天鵝)를 제역(除役)시켜준 것은 매우 무상(無狀)한 일이나, 큰 폐단이 있으므로 특별히 색리(色吏)를 엄칙하고 없애도록 명하였다.【원전】 21 집 236 면【분류】 재정-공물(貢物) / 재정-진상(進上)
    2021-03-11 | NO.232
  • 양사가 광주 목사 이순형을 탄핵하다 - 선조 4년
    양사가 광주 목사 이순형과 담양 부사 임여를 탄핵하다 - 선조 4년 신미(1571) 3월 6일(정묘)        양사가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순형(李純亨)은 상소한다고 가탁하여 거짓으로 자신의 공로를 기술하여 은밀히 자신의 발판을 만들었으니 그 마음씀이 극히 무례합니다. 파직시키소서.”하고 또 담양 부사(潭陽府使) 임여(任呂)가 외람되게 그의 처부(妻父)를 데리고 관아에 부임한 죄를 논하니, 상이 먼저 임여를 파직시키자는 청을 따랐다.【원전】 21 집 234 면【분류】 사법-탄핵(彈劾)
    2021-03-11 | NO.231
  • 상도ㆍ하도를 좌도ㆍ우도로 하고 소속 고을을 정하다 - 선조 2년
    나주 부거 유생의 청에 따라 상도ㆍ하도를 좌도ㆍ우도로 하고 소속 고을을 정하다 - 선조 2년 기사(1569) 7월 13일(갑신)        나주(羅州)의 부거 유생(赴擧儒生)이, 상도(上道)ㆍ하도(下道)를 좌도(左道)ㆍ우도(右道)로 고쳐 줄 것을 청하니 감사(監司)가 따랐다. 좌도는 광주(光州)ㆍ능성(綾城)ㆍ화순(和順)ㆍ장흥(長興)ㆍ순천(順天)ㆍ순창(淳昌)ㆍ남원(南原) 등의 고을로 하고, 우도는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해남(海南)ㆍ영암(靈巖)ㆍ영광(靈光)ㆍ고부(古阜)ㆍ부안(扶安) 등의 고을로 하였다.【원전】 21 집 219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2021-03-11 | NO.230
  • 광주 등에 홍수가 내려 침수되었음을 보고하다 - 선조 1년
    전라 감사가 나주ㆍ광주ㆍ김제 등에 홍수가 내려 침수되었음을 보고하다 - 선조 1년 무진(1568) 6월 10일(무자)        전라 감사가 치계하였다.“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김제(金堤) 등 고을에 지난 5월 9일부터 14일까지 많은 비가 퍼붓듯이 내려 시냇물이 넘쳐 흘러서 물가의 전답이 모두 침수되어 곡식들이 썩거나 손상되었습니다. 김제의 넓은 들은 넘실거리는 물결이 바다와 같았는데 전에 없었던 일이고, 주민의 1백여 가옥이 침수되어 사람들은 가장 높은 지대로 피해 모여 있었습니다. 대체로 각 고을이 같은 상황이었습니다.”【원전】 21 집 195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11 | NO.229
  • 헌부에서 전 광주 목사 김적은 합당하지 않음을 아뢰다 - 명종 19년
    헌부에서 전 광주 목사 김적은 사유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뢰다 - 명종 19년 갑자(1564) 윤 2월 11일(갑신)헌부가 아뢰기를,“요사이 학교가 해이해져서 사풍(士風)이 아름답지 못한 까닭에, 상께서 학풍을 일으키려고 사유를 골라 뽑아서 가르치는 것을 전임(專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김적(金適)은, 성품이 본디 탐욕스럽고 간사스러워 오직 권력에 아부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전에 유신 현감(惟新縣監)이 되었을 때에는 관고(官庫)의 재물을 배로 실어다가 뇌물로 바쳐 출세하는 밑천으로 삼았고, 광주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비루한 일을 많이 행하여서 사류(士類)에 용납되지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관직일지라도 다시 임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어찌 사유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김적을 삭제하여 사유의 선발을 중하게 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20 집 691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政論)
    2021-03-11 | NO.228
  • 전라도 광주 등에 천둥이 치다 - 명종 17년
    전라도 흥덕ㆍ장성ㆍ고창 등에 천둥이 치다 - 명종 17년 임술(1562) 10월 11일(임술)        전라도 흥덕(興德)ㆍ장성(長城)ㆍ고창(高敞)ㆍ담양(潭陽)ㆍ무장(茂長)ㆍ무안(務安)ㆍ광주(光州)ㆍ능성(綾城)에 천둥이 쳤다.【원전】 20 집 630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11 | NO.227
  • 헌부가 첨지중추부사에 유잠을 잉임할 것을 청했다 - 명종 15년
    헌부가 첨지중추부사에 유잠을 잉임할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 명종 15년 경신(1560) 7월 10일(갑술) 헌부가 아뢰기를,“첨지중추부사 이증영(李增榮)이 전에 비록 특명으로 본직에 제수되었지만, 일찍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었을 때에 유잠(柳潛) 【성절사(聖節使)로 부경(赴京)하였다.】 이 대신 그 직에 제수되었으니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증영이 광주에서 체직되자 줄 만한 직책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그 자리가 비었다고 전조가 계품하였으므로, 유잠이 이미 첨지에 제수되었는데 이증영을 잉임(仍任)시켰습니다. 어찌 신들이 성상께서 감반(甘盤)의 옛일을 기억해서 이 특별한 은혜가 있게 된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유잠도 부경 사신으로 지금 만리 먼길의 힘든 길에 있으니 예(例)에 따라 반열을 따르는 신하와는 같지 않은데, 저 사람에게서 빼앗아다가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상께서 저 미고(糜盬)를 생각하시는 뜻에 어긋나므로 물정이 온편하지 못하게 여깁니다. 유잠을 첨지에 잉임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이증영을 첨지사(僉知事)에 잉임시킨 것은 내가 옛정을 생각해서 전에 이미 특별히 제수한 것인데, 지금 아무 까닭없이 체직되었다. 잉임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니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이증영은 상이 잠저에 있을 때의 사부이다. 상이 옛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명을 내렸다. 대체로 상이 아랫사람들을 대우할 때는 매번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본체가 적어서 여러 차례 애증과 호오의 편견을 나타냈으므로 해이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하였다.【원전】 20 집 561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주-D001] 감반(甘盤) : 은(殷)나라의 현신(賢臣). 고종(高宗) 무정(武丁)의 스승으로서, 고종이 즉위한 후 정승이 되었다. 보통 세자 때의 스승을 감반이라고 일컫는다.[주-D002] 미고(糜盬) : 왕사(王事)를 소홀히 하지 못한다는 뜻. 신하가 멀리 외국이나 외방에 사명을 띠고 나가 직무에 힘쓰고 자기의 수고로움은 돌아볼 겨를이 없음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지심(鹿嗚之什) 사무편(四牡篇).
    2021-03-08 | NO.226
  • 이희손의 고신을 거둘 것을 청하다 - 명종 12년
    헌부가 을묘 왜변 때 죄가 있는 최인과 이희손의 고신을 거둘 것을 청하다 - 명종 12년 정사(1557) 11월 20일(기사) 헌부가 아뢰기를,“을묘년 왜변이 있었을 때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죄는 비록 중전(重典)에 의해 죄를 주더라도 오히려 애석할 것이 없는데 지나치게 상은(上恩)을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역시 족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배한 지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죄를 용서받으니 물정이 분격해 합니다. 더구나 최인(崔潾) 등에게 급첩(給牒)하라는 명을 내리자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성(城)을 버리고 싸움에 진 장수를 법대로 처단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미처 못할까 염려하는 듯이 급급하게 수서(收敍)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뒷날 위난을 당하여 다급하게 되었을 때 누가 기꺼이 자신을 잊고 적을 향하여 나아가겠습니까? 최인이 성을 버린 【을묘년에 진도 군수(珍島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이 달량포(達梁浦)를 함락하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죄는 다른 장수들보다 더 심하므로 남쪽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살점을 먹고자 합니다. 병조가 공론이 여기에 이른 줄을 모르지 않으련만 갑자기 녹직(祿職)에 붙였으니 지극히 잘못되었습니다. 최인의 고신(告身)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이희손(李希孫) 【을묘년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왜구가 달량포를 함락하자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강진(康津)을 지키다가 적병이 성을 핍박하니, 군대를 버리고 밤중에 도망갔다.】 의 죄도 최인과 다름이 없으니 그의 고신도 아울러 도로 거두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20 집 450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주-D001] 을묘년 : 1555 명종 10년.
    2021-03-08 | NO.225
  • 전라도 광주에 천둥이 치다 - 명종 12년
    청홍도 홍주 등지에 천둥이 치고 무지개가 서다. 전라도 광주에 천둥이 치다 - 명종 12년 정사(1557) 10월 22일(신축)        청홍도 홍주(洪州)ㆍ면천(沔川)ㆍ부여(扶餘)ㆍ해미(海美)ㆍ태안(泰安)ㆍ서산(瑞山)에 천둥이 치고 태안에 무지개가 섰다. 전라도 광주(光州)에 천둥이 쳤다.【원전】 20 집 446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08 | NO.224
  • 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서 인견하다 - 명종 10년
    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군관 남정을 보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서 인견하다 - 명종 10년 을묘(1555) 5월 30일(계해)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 김경석이 군관(軍官) 남정(南井) 보내 장계(狀啓)를 가지고 올라왔으므로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남정을 앞으로 다가오도록 하여 이르기를,“서로 싸울 때의 일과 보고 들은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하니, 남정이 아뢰기를,“당초에 왜적(倭賊)들이 영암(靈巖)에 와서 향교(鄕校)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적장(敵將)인 자는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 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旗)를 든 선봉(先鋒)인 자가 그 기를 낮추었다 높혔다 하여 마치 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였고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拍手)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여염(閭閻)의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 모여들어서 처음에는 순찰사와 방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이를 믿으며 안정되어 있다가 왜적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장(主將)이 군관을 시켜 통유(通諭)하여 동요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군중(軍中)에 전령(傳令)하기를 ‘나아가 싸우는 사람은 살고 물러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가.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한결같게 가져야 한다. 물러서다 죽는 것이 어찌 나아가 싸워 살게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한참 만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 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 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왜인들이 1위(衛) 1천여 명을 나누어 나주(羅州)의 통로를 가로 막고 우리 구원병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병사(兵使) 조안국(趙安國)이 영산진(靈山津)에서 변을 듣고서 오다가 왜적들의 침범을 받아 통하지 못했습니다.신이 전주(全州)의 효용군(驍勇軍) 6명과 함께 향교를 살펴보니, 왜장(倭將)이 위판 모시는 교의에 걸터 앉아 있기에 신이 편전을 쏘자 화살이 그가 앉아 있던 옆의 기둥에 맞았는데 우리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쏘아 그의 왼쪽 다리를 맞추자 왜장이 칼로 자기 휘하(麾下)들을 치므로 칼에 맞은 사람들이 모두 다쳤습니다. 주장이 화전(火箭)을 쏘도록 했었는데 마침 서풍(西風)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 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적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 하자 적들이 드디어 기세를 잃고 무너져 도망하므로 인하여 적의 머리 1백 4급을 베고 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더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신이 나올 때에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 남치근(南致勤) 및 병사 조안국은 패하여 도망하는 도적을 추적하려 하여 작천(鵲川)에 진을 쳤는데, 작천은 병영(兵營)ㆍ강진(康津)ㆍ영암이 서로 만나는 데입니다. 주장은 추격하려 하다가 왜적들이 이 틈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게 될까 싶으므로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사신은 논한다. 김경석이 남정을 보내 온 까닭은 자기의 공을 드날리려 한 것이다. 영암에서 이긴 것이 김경석의 공으로 된 것이 아닌데도 남정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속임수가 심하다.사신은 논한다. 남정이 비록 김경석의 공을 드날리려고 했었지만 두려워하여 움츠린 실상이 그가 하는 말에 나타나니 가리울 수 없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순찰사는 어디 있는가?”하니, 남정이 아뢰기를,“나주(羅州)에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왜구(倭寇)는 날로 번성하는데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번에 참획한 것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국가의 수치는 조금도 씻지 못했으니, 순찰사와 방어사 및 병사에게 말하여 다시 더욱 더 잘 조치(措置)하여 기어코 모두 섬멸시키도록 하라.”하니, 좌승지(左承旨) 이탁(李鐸)이 아뢰기를,“신이 그 곳의 지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정의 말을 들어보고 병가(兵家)의 일로 헤아려보면 왜적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참이 바로 기회를 탈 수 있는 순간이니 만일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군사들이 바야흐로 작천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만일 왜적들이 내지(內地)로 들어 와서 배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면 모조리 잡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만일 왜놈들이 여기에 있으면서 도망하여 흩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에서 공격할 염려가 있으므로 기필코 섬멸한 다음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이런 뜻을 순찰사에게 말하라.”하니 이탁이 또 아뢰기를,“왜놈들이 달량(達梁)을 함락한 뒤부터 우리 나라를 만만하게 여겨 사방으로 분산하여 들어 왔습니다. 영암에서 이긴 것을 바로 기회로 삼아야 할 때인데 다만 돌아가는 길을 끊어 버리지 못한다면 잡지 못하게 될 듯싶습니다.”하였다.당초에 왜선(倭船) 60여 척이 전라도 달량진(達梁鎭) 해구(海口)에 정박하자, 절도사(節度使) 원적(元績)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구원하러 들어갔는데, 왜적들이 거짓 피하여 도망하자 원적이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 지키며 방어하였다.적들의 무리가 크게 몰려와 성을 포위한 지 3일이 되니 원적은 구원할 군사는 오지 않고 양식도 장차 다 떨어져 가므로 군사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 화친(和親)을 청하게 하였다. 이에 적들이 사세가 약함을 알아차리고서 더욱 급박하게 포위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원적의 머리를 베고 군사들도 남김없이 살해하였으며 한온도 또한 죽었다. 이덕견은 애걸하여 살아서 돌아왔는데 도적들이 그 편에 글을 부쳐 ‘바로 서울을 범하겠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하였다.이때 수사(水使) 김빈(金贇)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이 구원하러 들어갔다가 모두 패하여 도망하자 적들이 승세를 타고 마구 각처의 진(鎭)에 침입하였으며 드디어 병영(兵營)과 강진(康津)까지 위협하였으므로 지키는 장수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도망하였다. 그러자 관아(官衙)에 불을 질러 화염이 뒤덮혔고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또 적들이 나뉘어 가서 장흥부를 침범했는데 성에 지키는 사람이 없어 즉각 함락되었다. 여염(閭閻)으로 들어가 집들을 불태우고 재물 약탈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하므로 사민(士民)들이 산골로 도망하여 숨었다. 이때 마을마다 들어온 적이 혹 겨우 3~4명이었는데도 감히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고 연해(沿海)의 진(鎭)과 고을들이 한결같이 텅 비어버렸다.도적들이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조금도 기탄하는 것 없이 영암 향교(靈巖鄕校)로 들어가 위판(位版)과 제기(祭器)를 망가뜨리고, 때때로 촌락(村落)에 나와 노략질하며 오래 있을 계획을 했었는데, 방어사 김경석(金景錫)은 겁내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서 싸울 계책을 하지 못하고 단지 성으로 들어와 자신을 보존하고만 있었다.당초에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영암에 진 치고 머무르면서 나가 싸우기를 청하여도 김경석이 오히려 듣지 않다가, 군교(軍校)들이 ‘만일 군사가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말을 하며 재삼(再三) 강청하자, 김경석이 할 수 없이 나가 싸우라고 허락하기만 하고 자신은 오히려 성 안에 남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 나서지 않았다. 장사(將士)들이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憤慨)하고 원망하며 결전(決戰)하여 적의 머리 1백여 급을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하였다.이날 나뉘어 나가 나주(羅州)의 촌락을 약탈한 적들이 향교에 와 보니 그의 무리들이 이미 흩어졌으므로 드디어 정신없이 도망갔다. 이에 이윤경이 또한 군사를 내어 끝까지 추격하기를 청하였으나 김경석이 듣지 않다가 강청해서야 들어주어, 겨우 몇급만 베게 되었다.사신은 논한다. 국조(國朝) 이래로 태평한 지 수백 년이 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이번의 달량(達梁) 왜변(倭變)이 생겼으므로 각 고을을 지키는 장수들이 풍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지니, 적들의 기세가 날로 치열해지므로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하였다. 조정이 형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로 삼아 시위병(侍衛兵) 및 도성(都城)에서 뽑아낸 용맹스럽고 힘 있는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가게 했다. 그러나 나주에 진 치고 있으면서 왜적들의 무리가 나주 지경까지 마구 들어와도 오히려 또한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있고 나가지 않았다. 이준경은 평소에 당시의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조정이 그를 믿으며 중시하는 바이었는데 갑자기 소소한 도적을 만나자 조처가 이러하였으므로 사민(士民)들이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절도사(節度使)가 죽었음을 듣고 즉시 이희손(李希孫)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도록 했는데 이희손이 적을 바라보곤 도망하여 피했는데도 김주가 죄 주지 않았고, 장흥(長興)에 있어서는 심지어 주장(主將)을 차정(差定)하여 지키게 하지도 않았다가 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듣고서는 즉각 영암(靈巖)으로 물러가 피하였다. 또 이희손으로 하여금 강진(康津)을 지키도록 했었는데 이때 방어사 김경석(金景錫)과 남치근(南致勤), 절도사 조안국(趙安國)이 모두 왔었으나 이희손이 구원을 청했는데도 오히려 머뭇거리고만 있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희손이 겁을 먹고서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해남(海南) 성 하나는 현감(縣監) 변협(邊協)을 힘입어 극력 수비(守備)하며 때때로 나가 분산(分散)하여 도적질하는 적들을 잡았으므로, 이로 인해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암에서 이겼을 적에 만일 앞질러 나가서 싸워 바다 어구에 있는 왜선(倭船)들을 빼앗고서 추격했었다면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을 것인데, 주장이 나가서 싸울 뜻이 없어 적을 돌아가도록 놓아두었으며 심지어는 하룻밤을 지내고 모두 배를 타고 도망하게까지 하였다. 남치근은 또한 요격(邀擊)할 수 있었는데도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있으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마침내 수치를 씻지 못하게 하였었다. 모든 장수들의 무상(無狀)함이 한결같이 이와 같았다.【원전】 20 집 278 면【분류】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2021-03-08 | NO.223
  • 이희손 등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다 - 명종 10년
    이희손 등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자 왜적이 강진현에 들어와서 군량을 가져가다 - 명종 10년 을묘(1555) 5월 28일(신유) 왜놈들이 강진현(康津縣)에 들어왔다.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을 가장(假將)으로 삼고 강진 현감 홍언성(洪彦誠), 나주 판관(羅州判官) 김기(金錡) 및 전 부사(府使) 박민제(朴敏齊), 마량 첨사(馬梁僉使) 홍수양(洪守讓)과 함께 강진현을 지키도록 했었는데, 5월 26일에 이희손 등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하자 적들이 드디어 성으로 들어와 병영(兵營)의 군량(軍糧)을 모두 가져갔다. 비변사가 이희손ㆍ홍언성ㆍ김기를 모두 종군(從軍)하게 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었다. 그뒤에 김기는 망명(亡命)했다.【원전】 20 집 277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2021-03-08 | NO.222
  • 오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명종 8년
    임열ㆍ원혼ㆍ이몽필ㆍ오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명종 8년 계축(1553) 6월 16일(신묘)       임열(任說) 【임열은 어릴 때 빈곤하여 살아가기가 어려웠는데 지위가 겨우 3품에 이르자 재물이 두 집에 가득하고 밤낮으로 이자놀이를 하여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니 사림(士林)이 비루하게 여겼다.】 을 지제교로, 원혼(元混)을 예조 참의로, 이몽필(李夢弼)을 병조 참의로, 【 이몽필은 청렴하고 검수하게 스스로를 지키므로 당시의 논의가 훌륭하게 여겼다.】 오겸(吳謙)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조안국(趙安國)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원전】 20 집 142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08 | NO.221
  • 상주 목사 이거를 체직시키도록 청하다 - 명종 7년
    사간원에서 상주 목사 이거를 체직시키도록 청하다 - 명종 7년 임자(1552) 4월 12일(갑자) 간원이 아뢰기를,“상주 목사(尙州牧使) 이거(李璖)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적에, 사유(師儒)의 적임이라 하여 임기 전에 체직시켜 올라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상주 목사에 제수하였으니, 체직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거는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다가 갑자기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이는 이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이 이거가 이기(李芑)의 사반인(私伴人) 숫자를 적발하여 임구령(林九齡)을 파직당하게 한 것을 미워한 때문이었다. 송세형은 임백령 처(妻)의 외숙이요 임구령은 임백령의 아우이어서 서로 흉허물없이 두터이 지내는 처지이므로 사당(死黨)이 될 수 있었다.】 【원전】 20 집 81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2021-03-08 | NO.220
  • 전 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다 - 명종 7년
    전 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다 - 명종 7년 임자(1552) 3월 18일(경자)        정원에 전교하였다.“지금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의 서장(書狀)을 보니, 광주(光州)에 이기(李芑)의 사반(私伴) 10인이 있다고 한다. 전 목사(牧使) 임구령(林九齡)을 파직하라.” 【임구령을 체직하여 하옥하자 신문하기 전에 자백하였다. 앞으로는 은닉하여 거짓으로 보고하고 뒤로는 아랫사람을 공갈하여 바르게 납초(納招)하지 못하게 한 실상이 현저히 드러났으므로 이렇게 하명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사반 10인을 한 고을에서 점유하였는데도 목사로 있는 자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기망하였으니, 두 사람의 죄는 모두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파직만을 명하였으니 아, 이것을 ‘내가 너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독실히 잊지 않는다.’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사신은 논한다. 임구령(任九齡)은 임백령(任百齡)의 아우로 함께 훈적(勳籍)에 기록되고, 몇 해 안 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당상이 되었다.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을 자기 아비처럼 섬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함께 악행을 이룩한다.’는 것이다.【원전】 20 집 78 면【분류】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주-D001] 내가 …… 않는다 : 이는 주성왕(周成王)이 미자(微子)를 송(宋)에 봉하면서 미자의 공로를 찬양한 말.《서경(書經)》 주서(周書) 미자지명(微子之命).
    2021-03-08 | NO.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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