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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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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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 선조 36년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 선조 36년 계묘(1603) 3월 14일(경오)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ㆍ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원전】 24 집 457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2021-03-16 | NO.263
  • 전라 암행 어사 이정험이 도내 사정을 아뢰다 - 선조 34년
    전라 암행 어사 이정험이 도내 사정을 아뢰다 - 선조 34년 신축(1601) 3월 21일(기미)       전라도 암행 어사 홍문관 부교리 이정혐(李廷馦)이 아뢰었다.“신이 지난 1월 30일 외람되이 엄명(嚴命)을 받들고 민간에 출입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해보니, 영광 군수(靈光郡守) 경섬(慶暹)은 정사를 엄정하고 분명하게 하며 부역을 공평하게 하므로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흠모하여 칭송이 자자하니, 호남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납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자상하게 다스려 백성들을 매우 아끼므로 온 고을이 태평하며, 태인 현감(泰仁縣監) 김자(金滋)는 몸가짐이 청렴하며 털끝만큼도 재물을 취하지 않으며 정사를 강직하고 분명하게 함으로써 아전들이 기만하지 못하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경립(李景立)과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정남(李挺男)은 모두 나이 젊은 무부(武夫)로서 마음을 다하여 고을 일을 보아 백성들의 폐해가 없게 하여 흩어진 백성이 모여드는데, 자신들은 더욱 간소하게 지내고 관아의 식솔들도 매우 단촐하였습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현즙(玄楫)은 호족(豪族)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역(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면서 혹시라도 전임될까 염려하였습니다.<중략>그리고 장흥(長興)으로 병영(兵營)을 옮기려는 뜻을 매우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강진 고영(康津古營)은 장흥과의 거리가 10여 리로서 서로의 형세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흥의 백성들은 장졸(將卒)의 지공(支供)에 시달려 그 고통을 못 견뎌하고, 강진 고영의 백성들도 본현(本縣)의 치우친 침해에 시달려 강진에다 병영을 설치할 것을 원합니다. 이토록 인심이 원하고 지리적으로 가능하며 더구나 조금도 이해에 관계가 없는 데이겠습니까. 듣자니 이제 담양(潭陽)에다 옮겨 설치한다고도 하는데, 이는 더욱 잘못된 계책입니다. 호남 지방에서 방비해야 할 곳은 연해(沿海)입니다. 그런데 이제 연해를 놔두고서 주장(主將)이 산군(山郡)으로 들어가서 갑작스런 변이라도 있게 되면, 연해의 열읍들이 함락되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고 구하지 않을 것입니까. 병영을 바다와 가까운 곳에 설치한 것은 반드시 그 의도가 있는 것이니, 경솔히 옮겨서는 안 될 듯합니다. 또 진산군(珍山郡)은 수십 호에 불과하여 잔파된 형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금산(錦山)과 합병한다면 온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관찰사 이홍로(李弘老)는 문서나 장부에 관해서 판단하는 재주는 가장 뛰어나지만 이기기를 좋아하는 성품이 있어 장사(將士)들을 종 보듯 하여 통제사 이하 모두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친 무부(武夫)들이 서로 반목하므로, 변방의 급병이라도 있는 날이면 필시 한마음으로 같이 구제하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반드시 조정에서 선처한 뒤에야 호남을 보존하는 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신은 외람되이 근시(近侍)의 직에 있으면서 분에 넘치게도 어사의 임무를 받았으므로, 듣고 본 것을 감히 주달하지 않을 수 없어 아울러 서계(書啓)합니다. 신이 직산(稷山)의 소사평(所沙坪)에 도착했을 때 한 수령을 만났는데, 10여 바리의 많은 짐을 싣고 곧장 달려오다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신의 말을 떠밀치고 지나가기에 신이 역졸(驛卒)을 시켜 그 하인을 잡아오도록 하니 무리지어 달려들어 난타하고 어떤 자는 쇠꼬챙이로 찌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 뒤에 떨어진 자가 한 명 있어 따져 물으니, 해주 판관(海州判官) 박명부(朴明榑)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타도(他道)의 수령이지만 사명(使命)을 멸시하였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정상이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이 모두 신이 용렬한 소치로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였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원전】 24 집 222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군사(軍事)
    2021-03-16 | NO.262
  • 장지의 선정과 조성 문제로 대신들과 논의하다 - 선조 33년
    장지의 선정과 조성 문제로 대신들과 논의하다 - 선조 33년 경자(1600) 7월 26일(정묘)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의정 이항복, 좌의정 이헌국, 우의정 김명원, 이조 판서 한응인, 지중추 윤자신, 예조 판서 이호민, 좌윤 성영, 예조 참판 유영길, 병조 참판 한준겸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이상의(李尙毅), 주서(注書) 이유연(李幼淵), 기주관(記注官) 허균(許筠), 기사관(記事官) 정입(鄭岦)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아뢸 일이 있으면 아뢰라.”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술관 등이 모두 포천의 산을 매우 좋은 곳으로 여기는데, 다만 자(子)와 임(壬)을 분변하지 못함으로 의문을 삼고 있었습니다. 지금 정밀한 침석(鍼石)을 얻어 여러 대신과 더불어 다시 간심해 보니, 분명 임산이 되며 수파 역시 좋아 쓸 만합니다.”하였다. <중략>상이 이르기를,“정국이 술업에 정밀하다는 것을 내 일찍이 들었다. 황상의 수릉(壽陵)도 이 사람이 정하였다고 한다. 대개 중국 사람은 잡술을 많이 아는데, 우리 나라는 그 조박(糟粕)만을 알 뿐이다. 정국이 정한 것이 필시 정묘할 것이지만 다만 무엇을 근거로 믿을 것인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격국(格局)이 다릅니다. 그가 말한 곳을 보니 결코 쓸 수 없습니다.”하고, 응인은 아뢰기를,“난리 후에 술관들이 술업에 정통한 자가 없습니다. 신평을 처음 간심할 때 장혈(長穴)을 정하였는데, 이의신(李懿信)이 주산(主山)에 올라 간심하고 단혈(短穴)을 쓸만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서로 쟁론하다가 지금에야 결정한 것입니다. 조종조로부터 모두 술관의 말을 믿었으니, 지금 다른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의신은 어떤 사람인가?”하니, 성영이 아뢰기를,“광주(光州) 사람으로 서얼(庶孽)인데 허통(許通)되어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입니다. 그는 모든 산을 편답하여 팔도 중에 여섯 도를 다 보았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의 서계(書啓)를 보니 글을 아는 사람이다. 술업은 어떠한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술업의 고하는 알 수 없습니다. 《옥수진경(玉髓眞經)》을 전공하고 다른 방서는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영은 아뢰기를,“산을 보는 법이 매우 익숙하여 내맥(來脈)을 알아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의신은 수파를 따지지 않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산의 형세가 좋으면 수파를 보지 않습니다.”하고, 헌국은 아뢰기를,“정사룡(鄭士龍)의 묘를 쓸 때 수파가 좋지 않다고 말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세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수파 또한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호민은 아뢰기를,“임화(壬火)의 산지라면 수파 또한 좋습니다.”하였다, 헌국이 또 아뢰기를,“이지방(李之芳)의 묘산을 남사고(南師古)가 제왕의 산지에 적합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국용에 기록되었는데, 큰 길가에 있어 천로(淺露)한 것 같습니다.”하고, 성영은 아뢰기를,“지나가는 산이므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세가 뭉쳐 모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전일 이지홍(李之洪)은 길지라고 하였는데, 경들의 소견은 어떠한가?”하니, 호민이 아뢰기를,“이의신(李懿臣)이 취하지 않았으므로 술관도 그렇게 여깁니다.”하고, 준겸은 아뢰기를,“소신이 이호민과 함께 가 보니, 청룡ㆍ백호는 내향(內向)하는 형세가 없고 주산(主山)은 그냥 지나가는 형세이며, 혈도(穴道)가 평정하고 풍후하기는 하나 깊숙이 틀고 앉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하고, 응인은 아뢰기를,“큰길에서 바라보면 정혈이 환히 드러나 보이니 길을 막으면 좋을 듯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길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결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평산에는 사대부의 분묘가 없던가?”하니, 호민이 아뢰기를,“화소(火巢) 안에 한두 곳 있으나 이 또한 매우 멀어서 꼭 파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성영은 아뢰기를,“명당(明堂) 안에 인가가 많으니, 이것은 매우 좋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미리 광(壙)을 팔 수는 없겠는가. 지리에 정통한 자는 땅속에 돌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하니, 모든 일을 의논하여 하라.”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미리 파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하고, 성영은 아뢰기를,“술가(術家)들의 말로는 미리 광을 파면 지기(地氣)가 샌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렇다면 어려운 일이다.”하였다. 이호민이 아뢰기를,“성상께서 한 곳에 모두 쓰라고 하신 하교에 대해 감격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찍이 내관의 취품(取稟)으로 인해 성상의 뜻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근일 산을 볼 때 반드시 지산(支山)을 택하였는데, 지금 신평은 지엽의 산맥이 매우 많으니 필시 쓸 만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준겸은 아뢰기를,“전교하신 것처럼 다만 바람이 자고 양지가 바른 곳만 택한다면 어찌 그런 자리가 없겠습니까.”하고, 항복은 아뢰기를,“만약 성상께서 결정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헌국은 아뢰기를,“역대로 계승하여 반드시 정통의 산맥에 썼는데, 신자된 자로서 어찌 이와 같이 구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호민이 아뢰기를,“어제 대신이 청대(請對)한 의도는, 대행 왕비가 승하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 능산을 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직접 성교(聖敎)를 받들어 속히 조처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만약 이 산을 결코 쓸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 결의하고 나아가 다시 다른 산을 택하겠습니다.하고, 준겸은 아뢰기를,“이의신(李懿信)이 소신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산은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술가에선 상하분(上下墳)으로 하는 것을 별로 꺼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한 조항을 강정(講定)해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 말이 어떠한가?”하니, 성영이 아뢰기를,“술가의 말에 ‘한 산에 3곳 이상은 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상하분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전부터 상하분의 제도가 있지 아니하므로 감히 경솔히 상달하지 못한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예문에 상하분을 하지 말라는 말이 없다면 무엇이 해롭겠는가.”하니, 준겸이 아뢰기를,“이와 같이 하면 향배(向背)와 수파가 동일하나 법규 밖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한 것입니다.”하고, 헌국은 아뢰기를,“상하분은 전부터 그런 규례가 없으니, 어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여염에도 상하분이 있는가?”하니, 모두 상하분을 쓴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쌍분과 상하분의 일은 측량한 후에 술관과 다시 의논하여 정하라.”하였다. 영길이 아뢰기를,“소신이 지리는 알지 못하나 신평은 하늘이 만든 길지로서 때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산을 쓰면 모든 일이 매우 편할 것입니다.”하고, 헌국은 아뢰기를,“상하분과 쌍분을 물러가 결정하겠습니다.”하고, 준겸은 아뢰기를,“한 산에 같이 쓰라고 하신 하교는 실로 우리 나라가 평소 하고자 하면서도 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신평산뿐 아니라 광릉(光陵)ㆍ창릉(昌陵)ㆍ경릉(敬陵) 및 다른 능의 화소(火巢)안에도 필시 쓸 만한 곳이 많을 것인데, 지금은 수목이 무성하여 간심할 수 없습니다. 서서히 낙엽이 지기를 기다린 후에 여러 능을 두루 간심하여 쓸 만한 곳을 선택해서 국용(國用)으로 등록해 만세의 계책을 삼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고, 상의(尙毅)는 아뢰기를,“이는 여염에서 일찍이 강론하던 일입니다. 성상께서 천수산(天壽山)의 제도를 말씀하셨는데, 만약 한때의 논의로 그치고 말게 되면 후에 근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글로 기록하여 후세로 하여금 준행하게 함이 좋겠습니다.”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난리를 겪은 후 의궤와 등록이 모두 보존된 것이 없으므로 오직 견문에만 의거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명목의 가짓수가 너무 많으므로 이처럼 물력이 탕갈한 때를 당하여 공역을 쉽게 성취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모든 일에는 본말과 경중이 있는데 만약 말절(末節)에만 전력하면 대사에 미치지 못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장례의 일로써 예를 들어 말하면 의금(衣衾)의 정결함과 관곽의 견고함은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의당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해야 할 것이요, 불삽(髴翣)의 휘황함과 치봉(雉鳳)의 찬람함은 말절(末節)인 것입니다. 또 회탄(灰炭)의 정미함은 근본이며 의물(儀物)의 번다함은 말절입니다. 그리고 한번 정해진 후에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물력이 비록 빈약하더라도 힘써 정성과 노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시로 개조할 수 있는 재수(齋守)와 낭무(廊廡)의 등속은 우선 조그마한 집으로 꾸며도 무방한데, 유사(有司) 등은 한결같이 옛 규모대로 하여 감히 그 사이에 감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위의에 관한 물건들을 반드시 헤아려 줄인 연후에야 모든 일을 조처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하고, 헌국은 아뢰기를,“신이 외람되이 총호(摠護)의 책임을 맡았는데 영악(靈幄)이 만약 샌다면 미안한 일이니, 옹가(甕家)의 유둔(油芚)이 없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소용되는 물건의 품목을 미리 작성해 둔 후에야 해관(該官)이 스스로 준행하게 될 것입니다.”하고, 명원은 아뢰기를,“지금은 물력이 탕진된 때이므로 마땅히 이항복의 말과 같이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외부의 의논 역시 그러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말이 옳다. 전일 해조가 복정해 놓은 것이 많아 내가 이미 말하였다. 이런 일은 도감(都監)이 살펴서 하라.”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반드시 공사(公事)가 있은 후에야 해조가 다시 이에 따라 살펴서 시행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상사에 관련된 물건은 감축할 수 없다. 그 밖의 의물(儀物)이야 어찌 일일이 다 마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석물(石物)도 어찌 반드시 높고 크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실로 무익한 일이다.”하였다. 준겸이 아뢰기를,“석물은 정해진 척수(尺數)가 있어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커져서 강릉(康陵)ㆍ태릉(泰陵)의 석물은 매우 큽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 등의 석물을 자로 재어 와 《오례의》에 정한 척수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헌국이 아뢰기를,“장인(匠人)이 매우 적어서 두어 달 안에 미처 조치하지 못할 듯싶으니 이 때문에 염려됩니다. 김시헌(金時獻)이 풍수(風水)를 안다고 예조 판서가 말하니 이 사람을 참석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헌국이 아뢰기를,“성영과 한준겸도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원전】 24 집 104 면【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2021-03-16 | NO.261
  •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 선조 33년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ㆍ요역ㆍ관방ㆍ수령ㆍ적정ㆍ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 선조 33년 경자(1600) 6월 15일(병술)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 이항복(李恒福)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閔中男), 가주서(假注書) 변응벽(邊應壁), 기사관(記事官)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남방의 일은 어떠한가?”하니, 답하기를,“신이 전라ㆍ충청 두 도를 순심(巡審)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召命)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하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중략>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하니, 답하기를,“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金城)을 지키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다.”하니, 답하기를,“담양 산성(潭陽山城)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平壤城)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하니, 답하기를,“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운봉(雲峯)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열(邊安烈)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金城)을 지키라.’고 하셨고, 아기발도(阿只拔都)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고 했고 주(註)에 ‘금성은 광주(光州)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南原)두 곳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하니, 답하기를,“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남방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은 어떠한가?”하니, 답하기를,“변장 가운데 송희립(宋希立)ㆍ소계남(蘇繼男) 등은 다 쓸 만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하니, 답하기를,“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杖罰)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銓曹)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善政)을 일컫는가?”하니, 답하기를,“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賦役)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監司)에 적합한 사람인가?”하니, 답하기를,“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가 없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하였다.<중략>【원전】 24 집 77 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재정(財政) / 교통-수운(水運) / 농업(農業) / 사상-유학(儒學)
    2021-03-16 | NO.260
  • 전라도 병영의 실태와 포도 대책을 아뢰다 - 선조 33년
    전라도 병마 절도사 겸 장흥 도호부사 이광악이 병영의 실태와 포도 대책을 아뢰다 - 선조 33년 경자(1600) 1월 12일(정사)        전라도 병마 절도사 겸 장흥 도호부사(全羅道兵馬節度使兼長興都護府使) 이광악(李光岳)이 장계(狀啓)하기를,“신은 신병(身病)이 날로 깊어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따라서 도내의 군무(軍務)를 조처할 겨를이 없어 머리를 움츠리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병영(兵營)의 원래 입방(入防)하는 군졸이 평시에는 기병과 보병을 합쳐 한번 입번하는 숫자가 3백 50명인데 난리를 겪은 뒤로는 이들 군사가 겨우 삼분의 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내지(內地)의 경우에는 살략(殺掠)당한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바닷가의 나주(羅州)ㆍ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영광(靈光)ㆍ무장(茂長)ㆍ함평(咸平) 등의 고을은 배를 타고 피난하였기 때문에 간혹 전몰(全沒)한 경우가 있었어도 생존자가 그래도 내지보다는 나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병영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주 등 6개 고을의 군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주사(舟師)를 중히 여기고 육군을 가볍게 여겨 주사의 격군(格軍)을 마련할 적에 병영으로 들어올 여섯 고을 군사의 호보(戶保)를 거의다 속오(束伍)에 편입시켰습니다. 신은 속수무책일 뿐 아니라 또한 군진(軍陣)에 임하여 시양졸(厮養卒)도 없는 형편이어서 명색은 주장(主將)이지만 일개 별장(別將)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만일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주장 행세를 할는지 매우 안타깝고 우려스럽습니다.그리고 본도(本道)의 흉황(凶荒)은 근고(近古)에 없던 것이어서 구렁에 나뒹굴어 있는 백성이 부지기수입니다 이 때문에 근거없는 무리들 가운데 조금 강건한 자들은 당류(黨類)를 결집하여 화적(火賊)이 되어 살략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신이 특별히 도적을 체포할 과목(科目)을 만들어 힘을 다하여 여러 고을을 검칙하고 있는데,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포도책(捕盜策)을 날로 새롭게 검칙하고 있고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규문(李奎文)도 계책이 있는 무인(武人)을 도장(都將)에 차임하여 도적의 체포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장성(長城)은 읍재(邑宰)가 자주 바뀌어 도적의 체포를 전폐하고 있기 때문에 노령(蘆嶺)의 일로(一路)에는 나그네가 다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웃 고을의 무사를 초출하여 관(關)을 설치하고 장수를 정하여 파수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나주 목사 정엽(鄭曄)은 백성을 보호할 줄만 알 뿐, 상사(上司)의 명령을 백에 하나도 시행하지 않아 도적 체포하는 일을 전혀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문(移文)했어도 이를 온편하지 않다고 여기고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사방의 도적들이 소문을 듣고 떼지어 몰려와서 곳곳에서 꺼림없이 멋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니, 신은 이런 정상을 들음에 통분스럽고 경악스럽습니다. 마땅히 잡아다가 추문(推問)해야 될 것 같습니다. 신 같이 용렬한 무부는 미물처럼 여기고 있으니 진래(進來)할 리가 만무합니다. 신은 평소 인망이 부족하여 일개 수령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급히 파척(罷斥)을 명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시고 정엽은 조정에서 참작하여 조처하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나주 등 여섯 고을의 군사를 처음에는 병영에 예속시켰었는데 그뒤 또 주사로 이속시켰습니다. 이것은 모두 본도 감사(監司)가 한 것으로 그 사이에는 반드시 헤아려 조처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석의 변에 대비해야 할 이때에 이곳에서 지휘하는 것은 잘못 간섭하는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정엽은 품계가 높고 식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주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번번이 거역하면서 전혀 봉행하지 않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먼저 파출하여 그 나머지 자들을 경계시키소서. 병사(兵使)가 사퇴하는 것은 이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니 경솔히 체직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퇴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으로 회유(回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정엽은 우선 추고하라.”하였다.【원전】 24 집 23 면【분류】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주-D001] 호보(戶保) : 군호(軍戶)에게 지급하는 보인(保人). 보인에게서 받아들인 쌀이나 베를 그 군호에게 지급하였음.[주-D002] 진래(進來) : 어느 관하에 예속된 사람을 체포할 적에 미리 그 이유를 통보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스스로 출두한다는 뜻으로 쓰였음.
    2021-03-15 | NO.259
  • 광주에 사는 전 참봉 김덕구에게 논상할 것을 청하다 - 선조 32년
    비변사가 왕세자가 전주에 있을 때 소 등을 바친 자에게 논상할 것을 청하다 - 선조 32년 기해(1599) 12월 19일(갑오)        비변사가 아뢰기를,“광주(光州)에 사는 전 참봉 김덕구(金德龜)가 본사에 정장(呈狀)하기를 ‘갑오년 정월에 왕세자가 전주(全州)에서 머무실 때, 대우(大牛) 3마리와 전마(戰馬) 1필을 무군사(撫軍司)에 바치어 군대를 도왔으나 아직까지 그 댓가를 받지 못하였다.’ 하기에, 시강원에 이문하여 당시 문서를 찾아보게 한 결과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호조를 시켜 전례를 참조해 논상하게 하여 후인들을 권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원전】 24 집 17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군사-병참(兵站) / 재정-진상(進上)
    2021-03-15 | NO.258
  • 광주 목사 이상길 등의 표창을 청하다 - 선조 32년
    전라 감사가 광주 목사 이상길 등의 표창과 무안 현감 홍제 등의 파출을 청하다 - 선조 32년 기해(1599) 9월 25일(신미) [DCI]ITKC_JT_N0_A32_09A_25A_00010_2005_027_XML DCI복사 URL복사 전라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하기를,“백성을 해치는 관리를 도태시키고 백성을 위하는 관리를 포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오늘날 유민을 보호 안정시키는 일의 급선무입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일 처리가 강단있고 분명하여 행정에 조리가 있어 간리(奸吏)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서민들이 그 은덕을 생각합니다. 비록 탕패한 때에 있어서도 부고(府庫)가 충실하고 온 경내가 안정하여 도내의 양리(良吏) 중 이 사람이 제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의당 파격적으로 포상하여 그 훌륭함을 표창해야 하겠습니다. 그 나머지 창평 현령(昌平縣令) 홍익영(洪翼英),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홍원(金弘遠), 보성 군수(寶城郡守) 김극제(金克悌)는 백성들의 일을 유념하여 그 행정에 있어 항상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을 숭상하였으니, 이들 역시 논상하여 다른 사람을 권면함이 마땅합니다. 무안 현감(務安縣監) 홍제(洪霽), 고창 현감(高敞縣監) 정준경(鄭峻慶)은 백성을 구휼하는 데는 뜻이 없고 오직 침학만을 일삼고 있으니 가까스로 살아남은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우선 파출하소서.”하였는데, 이조에 계하하였다.【원전】 23 집 683 면【분류】 과학-역법(曆法)
    2021-03-15 | NO.257
  • 이비가 도원수 권율을 추증하는 일로 아뢰다 - 선조 32년
    이비가 도원수 권율을 추증하는 일로 아뢰다 - 선조 32년 기해(1599) 7월 19일(병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 을 추증(追贈)하는 일로 이비(吏批)가 아뢰었다.“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와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는 의논드리기를 ‘증직(贈職)의 고하(高下) 문제는 해조(該曹)가 참작하여 시행하기에 달렸다.’ 하였고, 행 판부사 정탁(鄭琢)은 의논드리기를 ‘숭품(崇品)으로 품계를 올리더라도 안될 게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최흥원(崔興源), 행 판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영상(領相)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다음 호조 정랑이 되었고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뛰어올랐다. 임진년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서 호남의 방백(方伯)으로 승진되었다. 그의 성품은 본래 우둔하고 겁이 많았으며 위망이나 지략이 별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행주(幸州)에서 한 차례 승첩을 거두자 갑자기 중명(重名)을 얻게 되어 도원수에 제수되고 곤외(閫外)를 전제하였다. 오랫동안 적진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한 가지의 계책이라도 바쳐 적의 흉봉(凶鋒)을 꺾지는 못하고 도리어 겁을 먹고는 적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늘 멀리 피하곤 하였다. 정유년 주사(舟師)의 전투에서 아무리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진실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왜적과 대결하기가 어렵다는 상황을 즉시 치계했어야 하였다. 그리고 제장(諸將)에게 분부하여 군사를 정돈하여 고수하고 적을 가벼이 보지 말라고 했더라면 적이 많다고는 하나 필시 제멋대로 충돌해 오기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율은 이런 계책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멋대로 경거망동하면서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을 형장(刑杖)하면서까지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하였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어렵게 모은 주사를 일패시켜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하였으며, 그 많은 산채(山柵) 역시 한 곳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호남ㆍ호서를 침입하게 만들었다. 그는 겁내고 나약하여 방략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는데도 조정에선 그의 후임자를 구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그에게 병권의 중임을 맡겼는데, 권율 역시 과거의 잘못을 고쳐 제진(諸鎭)을 독려하며 힘껏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다는 짓이 그저 아병(牙兵)으로 자위책(自衛策)을 삼고 주전(廚傳)을 사치스럽게 하면서 적이 물러간 영호(嶺湖)의 고을들을 왕래하는가 하면 단지 이문(移文)하여 열진(列鎭)을 그냥 단속해 보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소지를 삼았으니, 그가 군무를 보살피지 않고 등한히 세월을 보낸 것이 회남(淮南)에서 고변(高駢)이 한 짓과 다를 게 없다. 다만 8년 동안 밖에서 수고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조정에서 증직(贈職)한 것이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원전】 23 집 647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주-D001] 주전(廚傳) : 역참(驛站)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거마.[주-D002] 회남(淮南)에서 …… 짓 : 당 희종(唐僖宗) 때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키자 황제가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을 출동시켰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희종이 그가 출병할 뜻이 없음을 알고 왕탁(王鐸)으로 대신하게 하고 그의 병권을 몰수하였다. 《당서(唐書)》 권224.
    2021-03-15 | NO.256
  • 부총 이여매의 관소에 나가 접견하다 - 선조 31년
    부총 이여매의 관소에 나가 접견하다 - 선조 31년 무술(1598) 2월 3일(무오)       상이 이 부총(李副總)의 【이여매(李如梅).】 관소에 행행하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대인 진영의 병사들이 성(城)에 먼저 오르고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참획한 수급(首級)이 매우 많았소. 대인의 은덕에 적지 않게 감격하고 있으나 무엇이라 사례할 길이 없소.”하니, 부총이 말하기를,“울산(蔚山)의 싸움에서 이긴 전공을 오로지 저에게만 돌리고 계시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13일 외성(外城)을 공략하였고 또 14일에는 내성(內城)을 공략하였는데, 토굴(土窟)의 병사들이 함께 힘을 쓰지 않아서 한번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참획(斬獲)한 공은 있다 하더라도 전혀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사로잡아 온다면 귀국이 그로 인하여 편안할 것이고 조도 조국으로 돌아가는 영광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싸움을 다시 하게 되면 소요와 피해가 반드시 많을 것이기에 국왕을 대할 면목이 없어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리고 갈 때에는 문 밖에 나와 전송해 주셨는데 올 때 또 나와 맞아 위로해 주시니 감격스런 마음에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소방(小邦)과 왜적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외다. 그런데 그들이 대인의 영하(營下)에 의해 많이 죽었으니 다시 감사의 뜻을 드리는 바이오. 망극하기 그지없소”하니, 부총이 말하기를,“수급을 많이 얻은 것이 무슨 공이랄 게 있겠습니까. 반드시 섬멸시키기를 기필했어야 하였습니다. 거사하던 날에 일제히 힘을 다하였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아서 거의 다 이루어졌다가 실추된 것입니다. 강개(慷慨)한들 무엇하겠습니까.”하고, 또 말하기를,“유 제독(劉提督)이 이미 요양(遼陽)에 도착했다 하니 이제 20일간이면 왕경(王京)에 당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군사를 호남(湖南)에 나누어 보내고 마 제독(痲提督)의 군사는 영남(嶺南)에 머물러 주둔케 해야 합니다. 황상께서 울산의 승첩 소식을 들으시고 은(銀) 5만 냥을 13일에 세운 공로의 상으로 보냈고 또 5만 냥의 은자(銀子)를 보냈다고 합니다. 황상께서 변방의 일에 대해 이와 같이 마음을 다하시고 계시는데 저희들이 어찌 분골쇄신하여 보응하기를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로잡은 왜적을 통하여 적정(賊情)을 탐문해 보았는데, 왜적이 가을 사이에 출동하여 호남으로 길을 잡았다 하였습니다. 천병(千兵)도 이때에 대대적으로 출동하여 섬멸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주례(酒禮) 행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금 듣건대 제독께서 【이여송(李如松).】 오시어 광녕(廣寧)의 마병(馬兵)을 총괄 한다고 하오. 지난 임진 왜란 때에도 오로지 대인의 덕을 입어 소방이 지금까지 보존 되었으므로 마음에 늘 감격스러웠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소. 그런데 지금 듣건대 대인께서 멀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고 하니 소식을 자주 전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다행스럽소.”하니, 부총이 말하기를,“제독형이 동토(東土)에서 돌아간 뒤에 5~6년간을 한산(閑散)한 자리에 몸담고 있었으나 마음은 귀국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까운 곳에 와 있게 되었으니 형께서도 소식을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왜적이 쉽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대인이 다시 올 수 있겠소이까? 대인이 다시 오기를 소방에서는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소.”하니, 부총이 말하기를,“마 제독이 여기에 있고 유 제독이 잇따라 왔으며 게다가 양 노야(楊老爺)가 경리하고 있는데 어찌 왜적을 평정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울산 싸움에서 왜적의 기예(技藝)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경박하여 용맹스럽지 못하였으므로 왜자(倭子) 30명이 달자(㺚子) 1 명을 당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섬멸시키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제독이 다시 오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하고, 또 말하기를,“능성(綾城)에 김대인(金大仁)이란 사람이 있는데 홀로 산성(山城)을 지키면서 무리를 거느리고 왜적을 막았습니다. 광주(光州)ㆍ나주(羅州) 등 여러 고을이 모두 함몰되었는데도 굳게 지키고 동요되지 않아 홀로 보전하였으니, 참으로 쓸 만한 사람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분부(分付)가 이와 같이 정녕하시니 감사하오.”하였다. 부총이 말하기를,“능성 김대인은 참으로 쓸만하니 파격적으로 크게 기용하소서.”하고, 이어 말하기를,“술이 만족하니 그쳤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대인이 멀리 전장(戰場)에서 돌아왔느데 교외(郊外)에서 맞이하다 보니 조용한 시간을 얻을 수가 없소이다. 오늘은 편안히 주례(酒禮)나 행하기 바라오.”하였다. 부총이 말하기를,“노라적(老羅赤)이 근래 노략질하였다는 소식은 없었습니까? 저들이 난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마 제독이 회군(回軍)할 때 광녕의 제독(提督)과 귀국의 병사가 함께 안팎에서 협공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수년 전에는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전혀 형적이 없소이다. 이 적들이 마침내 교화에 불복하고 난을 일으킬 자들이오? 잘 모르겠소이다. 감히 그들의 형세와 강약에 대해 묻소이다.”하자, 부총이 말하기를,“이 적(賊)은 정병(精兵)이 7천이고 대갑(帶甲)이 3천인데 이 적 7천 명은 왜적 10만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비가 저의 아버님에게 죽었는데 그때는 무리가 3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직접 불러 모은 무리가 7천 명에 이릅니다. 10명을 거느리고 와서 국경을 침범하더라도 즉시 요동에 보고하여 구원을 청하소서. 서북 지방에 달자가 있다고 하나 모두 이 적만은 못하니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 적과 북로(北虜)는 원래 서로 통하는 유종(遺種)이오? 북로에는 황태길(皇太吉)이 있는데 이 또한 달자의 종류이오?”하니, 부총이 말하기를,“황태길은 바로 서호(西胡)입니다. 몽고(蒙古)의 파라나야파라(波羅那耶波羅)가 노라적(老羅赤)을 치려고 황태길에게 요청하여 공격하다가 불리하자 물러간 적이 있습니다. 노라적은 곧 금(金)의 달자(㺚子)를 대신하고 태길은 곧 요(遼)의 달자(㺚子)를 대신해서 적은 숫자로 많은 수의 적을 대항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대인께서 이와 같이 분부하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소.”하였다. 이어 승지에게 전교하기를,“전일 오유충(吳惟忠)ㆍ유정(劉綖)은 모두들 남병(南兵) 10만이라도 왜적을 당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북방의 장수로서 왜적의 정세를 모르고서 함부로 한 말이다.”하니, 우부승지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오유충이 ‘양 노야(楊老爺)는 성질이 급하여 한번에 섬멸하고자 하지만 실은 병력이 당할 수 없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도산(島山)을 공격할 때 내가 사람을 경리(經理)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오늘날 미비한 때에 급히 친다면 즉시 항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자, 경리가 심부름을 간 사람의 귀를 베었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호민(李好閔)의 장계를 보건대, 사세용(史世用)이 ‘마 제독이 이여매(李如梅)가 공로를 독점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늦장을 부리면서 급히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이는 모두 우리 나라가 복이 없는 까닭이니 모름지기 중국 장수들을 원망하지 말아라”하였다. 상이 서로 읍하고 나왔다.【원전】 23 집 375 면【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2021-03-15 | NO.255
  • 지방의 동향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 선조 29년
    이항복과 적중의 사정ㆍ정사가 탈출한 곡절ㆍ지방의 동향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 선조 29년 병신(1596) 4월 23일(기미)        부천사의 접반사인 우참찬(右參贊) 이항복(李恒福)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판서가 국사로 인해서 갖은 고초를 다 겪는구나. 무슨 일로 올라왔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변방의 사정을 조정이 혹시 다 알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부사(副使)가 신으로 하여금 직접 가서 면대해 아뢰게 하였습니다. 대개 상천사(上天使)는 갑자기 왜영을 탈출한 후 죄책이 있을까 염려하여 장황한 말을 하며 일신의 모면을 기도할 것이니, 우리 나라가 어찌 그 곡절을 알겠습니까. 또 중국 조정이 그의 면죄되고자 하여 하는 맹랑한 말에 빠지게 되면 거의 이루어져 가는 일이 실패되고 좋은 기회가 깨어질 것입니다. 신이 올라온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정사는 무엇 때문에 도주하였는가. 적정(賊情)은 어떻다 하던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정충신이 평조신(平調臣)에게 적의 정세를 물으니, 조신의 말이 ‘나 역시 알지 못한다.’고 하므로, 은자(銀子)를 가지고 조신과 가까운 하인을 달래기를 ‘밀고하면 은자를 주겠다.’ 하니, 그가 고하기를, ‘관백(關白)이 크게 기뻐하면서 관사(館舍)를 수리하고 천사를 맞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상사의 말이 「이는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모자(謀者)의 【이른바 밀고자다.】 말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면서 나아가 고하기를 「봉사(封事)가 이루어져 천사가 바다를 건너면 필시 곤욕을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천사가 도주하였다.’고 하였답니다. 이처럼 빨리 도주한 것은 오로지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왜적이 군사를 늘리던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군사를 늘리는 것은 알 수 없지만, 대개 부산에는 적고 죽도(竹島)에는 많습니다. 또 심 유격(沈遊擊)을 【심유경(沈惟敬).】 결박했다는 말은 망언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심 유격이 떠나 간 후에 소식을 들었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조신(調信)의 말에 ‘하늘이 순조롭게 돕지 않아 천사를 도망하게 하였다. 심 유격은 낭고야(浪古耶)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조신(調信)의 아들 경직(敬直)을 만났는데, 먼저 죽도(竹島)와 기장(機張)의 병력을 철수하여 온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날짜로 행장(行長)의 말을 따져보면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적이 만약 책봉을 받는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중국 사신을 맞아가지 않으며 또한 일개의 사행을 보내 위문하지도 않는가. 내 생각에는 애초 봉사가 허언이라고 여기었다. 저 수길(秀吉)은 곧 동황제(東皇帝)니 서황제(西皇帝)니 하고 칭하던 자라, 왕(王)으로 봉하는 것을 필시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한번 고명(誥命)한 후 적이 반드시 물러가리라는 말은 실로 망언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왕을 봉하는 것이 무엇이 좋을 바가 있겠는가. 과연 봉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난 겨울에 사신이 왜영에 들어갔는데, 왜 아직까지 맞아가지 않겠는가. 정사가 탈출한 것은 그르지만 정사의 의심은 역시 옳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황제의 칙서를 김해(金海)의 풀밭 속에 버렸는데, 왜노가 그것을 습득하여 평조신(平調信)에게 주고 평조신은 이를 부천사에게 주었습니다. 용절(龍節)도 정사가 품고 가지 않았으니 필시 잃었을 것입니다. 장만록(張萬祿) 역시 도주하였으니 어떻게 가져왔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필시 가지고 나오다가 그만 잃어버렸을 것이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황칙(皇勅)은 황급하여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부사는 우리 나라가 놀랠까 염려하여 즉시 중국에 주달하고, 또 상사 이 노야가 허황한 말을 많이 하여 남의 이목을 현혹시킬까 하여 경을 시켜 여기에 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가 장황히 하는 말이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왜인이 모두들 말하기를 ‘상천사가 돌아오면 가능하지만 만약 지체하며 들어오지 않으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부사와 상의하지 않고 경솔히 탈출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인을 시켜 절(節)을 가지게 한 것이 또한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루 전에 왜추(倭酋)와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그런 일이 있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치해야 하겠는가. 원병을 청해야 하겠는가. 군량을 청해야 하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우리 나라의 조처에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왜적은 우리 나라 사람과 달라서 일체 숨기고 진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별로 변동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우자(牛子) 및 중물(重物)을 헐한 값으로 바꾸며, 또 당황하여 안정하지 못하니 이는 필시 돌아가려는 계책일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의 민심은 어떠한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좌도(左道)는 【경상도.】 모두 경동하나, 전라도의 광주(光州)ㆍ나주(羅州)는 영문이 가깝기 때문에 경동하지 않으며, 전라 이남 및 호서는 모두 분주합니다. 호남은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만약 변고가 있으면 도체찰사로 하여금 군사를 훈련시키려 하여도 불가능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금년 농사는 풍년이던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쌀이 천한 것으로 보면 농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포목(布木)이 귀한 것입니다. 곡식을 쌓아 둔 자도 완전한 옷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알 수 없습니다. 또 조신(調信)이 처음 갔을 때 관백(關白)을 바로 들어가 보려 하였는데 관백의 병이 비로소 나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바로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하니, 그럴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또 들으니, 대마도의 형세는 우리 나라가 아니면 자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서속(黍粟) 외에는 다른 곡식이 없는데, 일본은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나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물화를 무역하여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사로이 조선을 의뢰하고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에서는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중에 분명히 헤아리지 못할 화가 있다면 솔직하게 원병을 청함이 좋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책봉을 받고 돌아가면 꼭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중국 사신이 탈출하게 된 까닭입니다. 지금 판단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국에서는 어떻게 조처하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중국이라도 쉽게 결단하지 못할 것으로, 지연 작전만 쓸 뿐인 것입니다.”하고, 오억령(吳億齡)은 【도승지(都承旨).】 아뢰기를,“책봉만 받고 다른 일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정사가 탈출한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옳든 그르든 간에 상사가 탈출해 나온 것은 더없는 실책이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왜인들이 상사의 일행을 모두 가두었는데, 음식 제공은 전보다 후합니다. 오직 유 상공(兪相公)만 출입하고 다른 사람은 비록 부사가 있는 곳이라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증병(增兵)하지 않고서는 쳐들어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요시라(要時羅)의 말이 ‘동산도(東山道)의 군사 12만 명이 있는데, 만약 출병(出兵)하게 되면 의당 그곳에서 나올 것이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청정(淸正)은 무엇 때문에 머물러 있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병마 1천명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중국 사신을 뒤쫓아가 붙들어 오고자 한 것이 청정의 계책이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손 군문(孫軍門)이 3만 3천 명의 군사를 내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량을 마련하라고 하는데, 군량도 계속해 댈 수 없거니와 이 군사로서도 공격할 수 없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의령(宜寧)에 왜자(倭子) 50명이 왔는데 그들의 하는 일을 보니 비상한 군사였습니다. 담을 쌓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과 현격히 달랐습니다. 김응서(金應瑞)는 【우병사(右兵使).】 왜노를 부리기를 마치 떡으로 아이를 꾀듯이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왜노를 부리니 범인의 도량이 아니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항왜(降倭)는 사냥을 나가면 사슴과 오리 등을 가득히 싣고 돌아와서 그것을 팔아 식생활을 하며, 진주(晉州)ㆍ산음(山陰) 등을 안토(安土)로 삼고 서로 무역을 합니다. 그리고 방자(榜子) 2~3명을 거느리고 응서(應瑞)의 진중에 있으면서 그를 애모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 군사는 더불어 대적하기 어려우나 많이 꾀어 내면 쓸만한 것인데, 우리 나라가 졸국(拙國)인 까닭에 능치 못하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주사불(朱沙不)은 【왜인의 이름.】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성품 또한 일반적인 법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 후 별로 불순한 일이 없었으며, 항상 ‘왜노를 치고자 하면 나를 선봉으로 삼으라.’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응서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비록 털털한 것 같으나 여력이 남보다 크게 뛰어나며 용렬하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단기(單騎)로 행장(行長)을 만나 본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하고, 또 이르기를,“판서는 바로 가겠는가? 가면 어느 지방에 있겠는가?”하니, 바로 경주(慶州)로 간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들은 바가 있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영남은 부역이 가중하지 않기 때문에 생리(生理)가 좀 안정되어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죽령(竹嶺)으로 거쳐 왔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남원(南原)의 길을 경유하여 올라왔습니다. 또 모두 비슷비슷해서 장재(將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명련(韓明璉)과 김덕령(金德齡)이 장재가 있기는 하나 또한 군사가 없는 장수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용맹을 쓸 곳이 없다. 남원성(南原城)을 보았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한번 대충 보았습니다. 비록 수축하였다고는 하나 작은 돌로 쌓아 마치 제비의 둥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면이 절험(絶險)하여 요새지로 되어 있어서 적이 쉽게 지날 수 없으니 형세는 몹시 좋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성 안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성 안에 쌓아 둔 것이 겨우 수백 석이며, 장편전(長片箭)이 1백여 부(部)였습니다. 금성(錦城)은 좀 견고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남원 산성에 수장(守將)이 없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김경로(金景老)가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최염(崔濂)이 지킬 만하던가?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있던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급히 지나왔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영남과 호남의 그 어느 길을 따라 넘어왔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운봉(雲峯)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왔는데 방어의 형세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운봉은 산속에 있고 산성은 길 초입에 있어 형세가 몹시 좋았습니다. 팔량치는 대강 수축되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국에서는 일 처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일이 순조롭지 못할 것 같다. 설사 3만 3천명의 군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잘 싸우지 못하면 도리어 궤멸된다. 또 겨우 목숨을 보전한 외로운 백성을 침해하면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공격을 청한 것에 대해 승지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적의 심정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필시 책봉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불화의 실마리가 이미 생겼으니 끝내 그 완결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미리 이뜻으로 중국에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이러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상사가 3일 밤에 연회를 베풀고 왜중에게 말하기를, ‘다만 책봉의 일뿐이라면 들어갈 수 있거니와 책봉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하였다는데, 경이 그 말을 들었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그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모사(某事)로 인해 급히 탈출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일찍이 탈출하려 하였기 때문에 미리 계책을 올리게 한 것이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정월부터 2월 그믐께까지 도주할 기미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상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뜻밖에 만약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서 은자(銀子)를 내어 수삼필의 말을 샀습니다. 그 말을 침문(寢門) 밖에 세워두고 먹이면서 항상 간로(間路)를 물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행장(行長)이 나왔다면 필시 전도되는 행동이 있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미 명(命)을 버리고 또 절(節)을 버렸으니 크게 불가한 일이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너희 나라는 본디 한 집안이니 상관이 없지만 외국에 비웃음을 산 것이 이와 같다.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사의 말이 이와 같았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절칙(節勅)은 비록 지고 와도 무방하다. 어찌 하인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 물건이 무겁지 않으니 비록 지고 와도 무방한데 버리고 왔으니, 이는 절(節)을 잃은 사람이다.”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그 진절(眞節)은 따로 두었고 가짜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또한 진정시키는 말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묶어 놓고 구타한다는 말은 무엇인가?”하니, 항복은 아뢰기를,“이것은 허언입니다.”하고, 오억령은 아뢰기를,“비록 묶어 놓고 구타하여도 유익될 것이 없으니, 필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상사가 자결하려고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필시 있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사신의 접대를 전후 달리하고자 아니하는 것이 어찌 체봉(體奉)을 위해서이겠는가. 그가 온갖 고생을 하며 도망쳐 왔는데 우리가 그를 대접함에 전후를 달리하지 않는 것은 후한 뜻에서이다. 하물며 황제의 명령을 받든 사람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하니, 억령이 아뢰기를,“일로의 지대(支待)가 그렇게 하기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는 이언공(李彦恭)의 아들이다. 조론(朝論)을 주장하여 그 형세가 몹시 탄탄하다. 중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말을 시행할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왜인의 성문(城門)이 좋지 않다.”하니, 항복이 아뢰기를,“성문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만약 왜중으로 하여금 뒤쫓게 했다면 필시 면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 청정(淸正)의 진에 가까우니 위태로왔던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유승종(兪承宗)의 말을 빼앗아 가지고 왔는데 승종은 스승입니다. 일찍이 원망하면서 ‘10년 동안 글로 사귀었는데 이제 와서 이처럼 배신하는가.’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부사와 함께 황명을 받들고 왔으니 같이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상사의 사람됨이 음흉스러우나 강포한 것은 볼 수 없고, 또 예모를 알지 못하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다.”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비밀 일에 대해서 자주 전교하셨는데, 대개 장계(狀啓)를 계하(啓下)한 후 낭관(郞官)ㆍ당상(堂上) 중에 이를 아는 자가 많기 때문에 비밀이 유지되지 않고 도하(都下)가 모두 알게 됩니다. 지금부터 군사의 기밀 이외의 기타 일들은 비밀히 하지 마소서. 근일에 서목(書目)을 내지 않으므로 대간도 또한 알지 못하니 끝내 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요량하여 하라.”하였다.【원전】 22 집 693 면【분류】 왕실-의식(儀式) / 군사-관방(關防)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풍속-풍속(風俗) / 물가(物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창고(倉庫)
    2021-03-15 | NO.254
  • 도원수 권율을 인견하다 - 선조 29년
    도원수 권율을 인견하다 - 선조 29년 병신(1596) 3월 4일(신미)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인견하였다. 상이 권율에게 이르기를,“지금 경이 내려가거든 흉적을 토평하여 국가로 하여금 안녕을 누리며 변방이 소란하지 않게 하라.”하니, 율이 재배(再拜)하고 아뢰기를,“신의 용렬함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인데 또다시 중임을 받으니, 장차 일을 그르치는 걱정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체찰사가 이미 남하하였으니 한결같이 그의 지휘를 따르겠습니다. 국가가 믿을 만한 곳은 오직 양호(兩湖)에 있는데 열읍이 탕진하고 인호(人戶)가 유산하여 초군(抄軍) 등의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기계와 성곽도 한결같이 허술합니다. 오직 남원(南原)의 산성(山城)은 그 형세가 험요(險要)하여 수비할 만하나, 본부는 인심이 사나와서 본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경동할 사태가 있게 되면 백성이 반드시 와해되어 산성에 들어가 지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상란(喪亂)을 겪은 후 천장(天將)의 공대와 온갖 부역을 양호에 전담시키므로, 약간 완전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도리어 변란을 겪은 곳만 못합니다. 양호의 백성들이 모두 영남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징발할 때 그 족속을 침해하게 되며 그 족속은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또 따라서 몸을 피합니다. 그러므로 군정(軍丁)이 비고 빠져서 점점 전과 같지 못합니다. 또 김덕령(金德齡)이 천거한 최담령(崔聃齡)이란 자는 체구가 남보다 크고 또 영기(英氣)가 있으며 7식(息)이나 되는 길을 하루에 가니, 이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사람들의 말이 최담령은 흙덩이와 같다고들 하는데 사실이 그러한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그렇지 않습니다. 흙덩이와 같다는 것은 완인(頑人)을 일컫는 것인데 이 사람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문장에 능한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담령의 측근에게 물으니, 담령은 평소에 옷소매 속에다 병서(兵書)를 넣고 다닌다고 하였는데, 정작 담령에게 물었더니, 담령은 ‘한 글자도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에는 문자를 많이 씁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사람 중에는 자기 재주를 감추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오직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김덕령을 내가 한번 보고자 했으나 그는 먼저 내려 갔다. 행주(幸州)의 싸움 때 경의 휘하에 있던 군사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혹은 흩어져 외방에 있고, 혹은 다른 진영에 소속되어 있는데, 남변(南邊)의 용사를 병조로부터 열명(列名)하여 불러온 결과 1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를 당해서 경성이 비록 중요하나 외번(外藩)도 견고히 해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충길(李忠吉)이 행주의 싸움에서 공로가 많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겁장이라고도 말하여 비방과 칭찬이 상반되니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경은 필시 알 것이다.”하니, 권율이 아뢰기를,“행주 싸움에서 충길이 북문장(北門將)이 되었습니다. 종일 역전하여 자못 공로가 있었는데, 날이 어두울 때 이르러 기갈이 들고 기운이 불편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소제(少弟)가 신에게 와서 고하기를 ‘우리 형이 기절하였으니 청심원(淸心元)을 얻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약을 주어 보내고 다른 사람으로 북문장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동열(同列)이 조소하기에 소신 역시 조소하여 말하기를 ‘적병이 있으면 기절하고 적병이 물러가면 소생하니 참으로 용장(勇將)이군!’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대간의 평이 사실인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대간의 평이 어찌 근거가 없겠습니까마는, 또한 한때의 조롱에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어찌 참으로 겁장이이겠습니까. 북문에 침입한 강적을 충길이 방어하면서 참획한 것이 많았습니다. 어찌 공로가 없다고 하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대장(大將)이란 삼군(三軍)의 목숨을 맡은 사람이니, 그 책임이 극히 중대하다. 김응서(金應瑞)와 고언백(高彦伯)의 사람됨을 내가 일찍이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이복남(李福男)과 김경로(金敬老)는 어떠한 사람인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복남은 장수의 후예입니다. 연소하고 용력이 있는 데다가 문필(文筆)도 갖추었습니다. 일찍이 나주 통판(羅州通判)이 되어 청백함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다만 기세가 너무 지나쳐 웃사람들을 멸시합니다. 이것이 그의 병통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웅치(熊峙)의 싸움에서 자신이 먼저 퇴패(退北)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웅치의 싸움에서 정담(鄭潭)이 죽자 신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장수(長水)와 임실(任實) 사이를 수비하고, 이광(李洸)은 전주(全州)를 수비하였는데 화살이 다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물러났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국사가 이에 이른 것은 모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경은 어서 내려가서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흉적을 토평하라.”하고, 이어 태복마(太僕馬) 및 마장(馬粧)을 하사하니, 권율이 재배하고 나갔다.【원전】 22 집 656 면【분류】 왕실-의식(儀式)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어문학-문학(文學) / 군사-병법(兵法) / 출판-서책(書冊)
    2021-03-15 | NO.253
  • 광주 교생 김덕령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 선조 29년
    특진관 권율ㆍ윤선각과 왜병의 동태, 광주 교생 김덕령 등에 대하여 논의하다 - 선조 29년 병신(1596) 2월 19일(병진) 진시(辰時) 초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상이 특진관(特進官) 권율(權慄)에게 이르기를,“경이 나의 죄로 변방에서 해를 넘기면서 자신을 잊고 노고하였다. 경처럼 어진이가 아니라면 누가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도맡았겠는가. 더욱 심력을 다해주기 바란다.”하니, 권율이 【다시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는데 아직 남하(南下)하지 않았다.】 아뢰기를,“신이 조그마한 재략(才略)도 없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마침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 한 번 싸운 공이 있었고 그로 해서 이어 도원수가 되었으나 날로 전공이 없었으므로 비방이 집중되었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부재(不才)함을 굽어 살피시고 특별히 개정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분에 넘치는 은전을 입어 글을 올려 사면을 빌었으나 끝내 사피(辭避)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차 무슨 얼굴로 남중(南中)에 부임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경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라. 이제 내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어느날 출발할 것인가?”하자, 권율이 아뢰기를,“신이 비록 병이 있으나 이미 도원수란 이름을 띠었으니 빠른 시일내에 남하하여 요새를 설치하고 파수하는 일을 지시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이 적은 동태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심 유격(沈遊擊)과 서로 짝이 맞아 책사(冊使)를 왜영(倭營)에 머무르게 해놓고 따르기 어려운 요청으로 우리 나라를 조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적이 만약 재침하다면 중국으로 곧장 향하겠는가?”하자, 권율이 아뢰기를,“중국에게는 필시 함부로 대들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특진관(特進官) 윤선각(尹先覺)은 아뢰기를,“관백(關白)이 늘 행장(行長)을 책하기를, ‘너는 어찌해서 평양(平壤)으로 곧장 향하였는가. 만약에 양남(兩南)을 잠식하고 살상을 금하였다면 인심이 향모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필시 중국으로 곧장 쳐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상책(上策)을 쓴다면 양호(兩湖)를 점거할 것이요, 하책(下策)을 쓴다면 곧장 달려 서쪽으로 향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김덕령(金德齡)은 어떠한 사람인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덕령은 본래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으로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늘 군율(軍律)이 엄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휘하 사람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귀를 자르거나 혹은 곤장을 치기도 하므로 휘하 사람들이 점차 도망한다고 합니다.”하고, 김응남(金應南)은 아뢰기를,“살인은 중옥(重獄)이라 아래에서 감히 전제할 수 없으나, 덕령은 힘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임을 남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지금 만약 특명으로 석방하고 면대해 교유하여 돌려보내면 그는 필시 감격하여 은혜를 알아서 힘을 다해 보답하기를 도모할 것입니다.”하였다.【원전】 22 집 650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사법-재판(裁判)
    2021-03-15 | NO.252
  • 광주목 하늘에 나타난 이상 현상에 대해 치계하다 - 선조 28년
    전라도 관찰사 홍세공이 광주목 하늘에 나타난 이상 현상에 대해 치계하다 - 선조 28년 을미(1595) 12월 22일(경신)        전라도 관찰사 홍세공(洪世恭)이 치계(馳啓)하였다.“광주목(光州牧)에 12월 3일 진시(辰時)에 하늘가에 흰 무지개가 가로 뻗치어 해를 꿰고 동방으로 향하여 하늘 끝에 이르지 못하고서 그쳤으며, 또 이방(离方)으로부터 청홍색의 무지개가 건방(乾方)으로 향하여 흰 무지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진시(辰時)ㆍ사시(巳時) 사이에 마치 해가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백길쯤 되는 빛이 하늘의 해와 서로 비추며 나란히 가다가 오시(午時)에야 없어졌는데 예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낙안(樂安)ㆍ남평(南平) 등의 군에 12월 3일에 햇빛이 혼황(混黃)하고 천지가 깜깜하여 모든 사물의 색깔이 변하였습니다. 군수가 뜰에 내려 바라보니, 해의 4면에 흑색이 감겨 있고, 술방(戌方)ㆍ유방(酉方)ㆍ신방(申方)ㆍ미방(未方) 등의 방면에 청홍색의 무지개가 검은 구름밖에서 가로 걸려 있었는데 진시(辰時)에 시작하여 사시(巳時)에 가서야 그쳤습니다. 사지(巳地)에 청홍색의 무지개가 해의 가장자리로부터 하늘 끝까지 가로질러 있었는데 진시에 시작하여 미시(未時)에 이르러서야 그쳤고, 또 인지(寅地)에 청홍색의 무지개가 해의 가로부터 하늘 끝까지 갈로질러 있었는데 진시 중간에 시작하여 사시 초에 이르러서야 그쳤습니다. 묘시(卯時)ㆍ진시(辰時) 사이에 따로이 햇빛이 비추어서 해의 형체가 보이지 않고 밝은 거울처럼 환하였는데 사시(巳時)에 가서 그쳤습니다.”【원전】 22 집 616 면【분류】 과학-천기(天氣)[주-D001] 이방(离方) : 남방.[주-D002] 건방(乾方) : 서북방.[주-D003] 술방(戌方) : 서북과 서방 사이.[주-D004] 유방(酉方) : 서남.[주-D005] 신방(申方) : 서북과 서방사이.[주-D006] 미방(未方) : 서방과 남방사이.[주-D007] 사지(巳地) : 남쪽에서 동남방 사이.[주-D008] 인지(寅地) : 동쪽과 동북사이.
    2021-03-15 | NO.251
  • 요동 도지휘사의 자문 내용을 논하다 - 선조 27년
    대신과 비변사 당상, 양사, 옥당 등과 요동 도지휘사의 자문 내용을 논하다 - 선조 27년 갑오(1594) 7월 16일(임진)        상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 양사, 옥당을 인견하고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 판중추부사 정곤수(鄭崑壽), 호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지중추부사 김수(金睟), 병조 판서 심충겸(沈忠謙), 호조 참판 성영(成泳), 병조 참판 강신(姜紳), 동부승지 이수광(李晬光), 지평 이경함(李慶涵), 수찬 정엽(鄭曄), 정언 김용(金涌)이 입시하였다.】 이르기를,“오늘 온 자문(咨文)은 작은 일이 아니다.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봉공의 일은 이미 취소가 되었고 유정(劉綎)이 거느린 병사 5천에다 3천 병력을 추가하여 본국의 왕이 처리하게 하였으니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일찍이 중원(中原) 사람을 만났을 때 대다수가 ‘조선은 반드시 지켜야 할 나라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나 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적의 정탐은 아무리 먼 데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미 봉공을 거절한다는 성지(聖旨)를 받았으니 이 일은 적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적은 반드시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독기를 부릴 것이다.”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적은 중원(中原)이 필시 소서비(小西飛)를 죽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소서비의 졸개가 이미 내려갔으니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소서비가 만약 화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면 반드시 그들에게 알릴 것이고 또 적이 정탐할 것은 분명하다. 고 총독이 갈리고 손 시랑이 와서 교대한 일을 적이 이미 말했을 것이다. 손 시랑이 적을 칠 것인가, 방수(防守)할 것인가?”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그의 뜻은 싸우기에는 부족하고 지키는 것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만약 대거 돌격해오면 수천의 병마로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즉시 철병하지 않은 것은 기쁜 일입니다만 끝내 지탱해낼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1만 2천의 병력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하니, 김수와 김응남이 아뢰기를,“군사는 남쪽에 있는 자를 조달해 낼 수 있을 것이나 군량은 가장 조치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심충겸은 아뢰기를,“요즘 보면 자문(咨文)을 삭제하고 고치는 일이 지나칩니다. 비록 주상 앞에서 의정(議定)하였더라도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고쳐서 아예 본질이 없어집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의 존망은 이 자문의 회답에 달렸다.”하였다. 심충겸이 아뢰기를,“신의 생각으로, 이 자문의 회답에는 그 대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적의 형세가 점차 전과 같지 않으니 만약 중국이 군대를 출동하여 친다면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음으로 요해처를 방수(防守)하는 것이 좋으나 우리 나라는 비용을 지탱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이어 회유의 계책을 써서 적이 바다를 건너 가게 해야 한다는 등의 뜻으로 글을 지어 채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보내 이 자문을 가지고 영상(領相)을 찾아가 보여서 내용을 알도록 하라. 그리고 일을 반드시 빨리 처리해야 한다. 판서(判書)가 ‘항상 자문을 고친다.’고 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지금 우선 회유하는 계책으로 요청하고 한편으로는 방수하면서 천천히 계획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또 이르기를,“지금 모조리 섬멸한다면 나중에는 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진주하고 이어 양향(糧餉)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사사신(司使臣)은 우리 나라를 방수하자는 의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내가 사사신의 장주(章奏)를 보니 우리 나라를 위하는 말이 매우 많았다.”하였다. 성영이 아뢰기를,“삼가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세공(洪世恭)의 장계를 보니, 토적(土賊)이 매우 성하여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없겠습니다. 만약 그들의 살 길을 열어 주면 교화되어 착한 백성이 될 것이니, 고부 군수(古阜郡守)를 유능한 자로 철저히 가려 차송하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토적이 옥(獄)을 습격하였다는 소식은 참으로 한심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경이 들은 것을 말해 보라.”하니, 성영이 아뢰기를,“토적이 관가에서 5리길 밖의 민가에 전령(傳令)하여 곡식을 보내게 하였다고 하니 매우 두렵습니다. 그리고 수령은 하리(下吏)가 그 일을 전파할까 염려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아 소탕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더욱 세력이 불어난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식량이 준비되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니 추수한 뒤에 반드시 대책을 세워 식량을 계속 이을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또 들으니 부민(富民) 중에 곡식을 쌓아둔 자가 있다고 한다. 적이 만약 분탕질을 하면 그들은 필시 그 소유물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그들에게 상을 주어 바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성영이 아뢰기를,“강신(姜紳)이 와서 하는 말이 ‘외방은 3년 간의 병화(兵火)로 농사를 짓지 못하여 비록 오래된 부민이라도 스스로 보존할 수 없을 정도이고, 또 부민은 결복(結卜)이 많기 때문에 요역(徭役)의 번잡함을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요즘 은자(銀子) 4백 냥을 요동 중강(中江)에 보내 곡식을 사들이려고 하는데 다만 은자가 매우 적으니 호조의 은냥을 더 보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반드시 여러 방면으로 헤아려 많이 저축할 수 있도록 하라.”하니, 성영이 아뢰기를,“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항상 가설관(加設官)을 제수하니 이 때문에 바치려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실직(實職)으로 올려 보임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이조 판서가 이곳에 있으니 마땅히 의논하여 조처하라.”하였다. 심충겸이 아뢰기를,“1백 석의 곡식을 바치고 실관(實官)이 되고 싶어하는 자는 근래 도하(都下)에 매우 많이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대체로 곡식을 바친 사람은 임용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심수경이 아뢰기를,“대간이 논박하더라도 이조(吏曹)는 의당 임용해야 합니다.”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모두가 곡식을 바쳤다고 하여 그들을 천하게 여깁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삼한 갑족(三韓甲族) 중에 능히 왜적을 찌른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국가에서 사족(士族)을 매우 후하게 대우해 주었기 때문에 사족 가운데는 적에게 붙은 자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국 군사에게 지급할 군량이 매우 어렵다. 만약 수로(水路)를 통하여 온다면 좋을 것이니 그대로 전라도로 가서 적을 칠 수가 있다. 수(隋)나라가 우리 나라에 용병(用兵)할 때와 소정방(蘇定方)이 나올 때에도 다 수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하니, 강신이 아뢰기를,“이제 경상 감사의 장계를 보니 ‘투항한 왜를 조처하는 일은 예기치 못한 일이 많이 있다.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에서는 하마터면 변이 생길 뻔하였는데, 그것은 응서가 전투에 사용하려고 왜인이 차고 있던 칼을 회수하자 왜가 칼을 뽑아 찌르려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군관(軍官)이 잘못 전령한 것으로 사과하고 마침내 군관을 치죄하여 왜인의 마음을 안심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빨리 조처해야 합니다. 경성의 인심이 이 때문에 더욱 소동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국 군대 3천 명이 나오면 군량을 어떻게 지공(支供)할 것인가? 그리고 유 총병은 대구(大丘)에서 진영을 옮겼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그것은 왜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김수가 아뢰기를,“현재 팔도의 재정이 탕갈되어 완전한 고을이 거의 없는데 오늘날 민폐가 많은 것은 바로 삼전(三殿)이 각기 다른 곳에 있으므로 종관(從官)의 지공(支供)으로 인한 폐단이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궁(東宮)은 민정을 무순(撫循)하고 폐단을 제거하여 호서(湖西)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주가(駐駕)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배신(陪臣)과 종관이 어찌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겠습니까. 삼전이 각기 따로 있는 것은 매우 온편치 않아 뜬소문이 크게 전파되므로 도하가 놀라 술렁거려 장차 괴멸하게 되었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반드시 사생 존망(死生存亡)을 종사 신민(宗社臣民)과 함께 하겠다는 뜻으로 아래 백성들에게 두루 하유하여 인심을 굳게 결속시킨 다음에야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하의 백성이 이러하고 먼 지방이 이러한데 변보(邊報)가 한번 이르면 인심이 풀리고 흩어져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호종했던 여러 신하들의 처자(妻子)에게 급료(給料)하게 하신 것은 성상의 은택이 지극하니 그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의리에 죽은 신하는 이미 국사 때문에 죽었는데 그 처자는 굶주려 구학(溝壑)에 쓰러진다면 너무도 불쌍하니 명하여 휼전(恤典)을 베풀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면 다행이겠습니다.”하니, 상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이수광이 아뢰기를,“고경명(高敬命)의 처자는 거의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김수는 아뢰기를,“조헌(趙憲)과 김천일(金千鎰)의 처자도 마찬가지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비변사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되 이 사람들뿐 아니라 전쟁에 나간 사람의 부모와 처자도 급료해야 한다. 해사가 만약 잘 살피지 못하면 국가의 은택이 도리어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선전관(宣傳官)이 고언백(高彦伯)의 처소에서 와서 하는 말이 ‘언백이 「나는 의당 국사에 죽을 것이지만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는 장차 굶어 죽을 것이다.」 했다.’ 하였다. 이 사람도 제급(題給)해야 한다.”하자, 김수가 아뢰기를,“비록 제급을 하게 하더라도 본관(本官)이 그가 공생(貢生)이라 하여 제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경명(敬命)은 어느 지방 사람인가?”하니, 김수가 아뢰기를,“광주(光州) 사람입니다. 그의 처자도 그곳에 있습니다.”하고, 정곤수는 아뢰기를,“심대(沈岱)의 처자도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굶주리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승지는 일체 행이(行移)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22 집 312 면【분류】 재정-상공(上供) / 재정-국용(國用) / 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 군사-병참(兵站)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사법-치안(治安) / 인사-관리(管理)[주-D001] 결복(結卜) : 토지의 단위면적.[주-D002] 삼전(三殿) : 왕ㆍ왕비ㆍ세자를 말함.
    2021-03-15 | NO.250
  • 안중복ㆍ이경신 등의 역모 사건을 보고하다 - 선조 27년
    전라 병사 이시언이 강진의 안중복ㆍ이경신 등의 역모 사건을 보고하다 - 선조 27년 갑오(1594) 6월 10일(정사)        의금부가 아뢰기를,“삼가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시언(李時彦)의 장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모를 고발한 사노(私奴) 건경(巾京)과 그의 아내 납춘(納春), 또 이른바 창수인(倡首人)으로 강진(康津)에 사는 안중복(宋重復)ㆍ이경신(李景信)ㆍ유승업(柳承業) 및 광주(光州)에 사는 신한봉(幸漢鳳), 택일인(擇日人)인 서천(舒川)에 사는 심대원(沈大原), 회문 전시인(回文傳示人)으로 강진에 사는 고몽례(高夢禮)ㆍ안제문(安濟文)과 노(奴) 몽상(夢祥)을 먼저 국문하지 않으면 안되니, 의금부의 낭청(郞廳)을 보내 잡아오게 하고, 이른바 안중복의 집 사당 앞에 묻어둔 명록기(名錄記)도 가져오게 하소서. 다만 이때 소요가 일어날까 염려되니, 건경이 고발한 각인(名人)은 형편에 따라 사로잡아 단단히 가두어 두고 기다리되, 공초 안에 드러나지 않은 자는 우선 추착(推捉)하지 말고 진정시키기를 힘쓰라는 일로 본도의 감ㆍ병사(監兵使)에게 밀유(密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신의 뜻도 그렇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원전】 22 집 294 면【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2021-03-15 | NO.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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