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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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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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암이 도적의 발생한 일과 그 대책을 아뢰다 - 선조 27년
    전라 감사 이정암이 도적의 발생한 일과 그 대책을 아뢰다 - 선조 27년 갑오(1594) 5월 15일(임진)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치계(馳啓)하기를,“도내에 도적이 일어나 간혹 수백 명씩 작당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나주(羅州)ㆍ남평(南平)ㆍ남원(南原)ㆍ광주(光州)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ㆍ김제(金堤)ㆍ부안(扶安)ㆍ고부(古阜)ㆍ태인(泰仁)ㆍ흥덕(興德)ㆍ정읍(井邑)ㆍ고산(高山)ㆍ여산(礪山)ㆍ금산(錦山) 등의 지역이 더욱 심하여 대낮에도 사람을 협박하여 약탈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추포(追捕)되어 갇힌 자가 옥(獄)에 가득찼고 형장(刑杖)을 받아 죽는 자가 뒤를 잇고 있는데도 도둑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이 도둑들은 전쟁이 일어난 3년 동안에 번거롭고 무거운 부역(賦役)으로 가업(家業)이 판탕되어 부모와 처자를 보존해 갈 방도가 없자 그만 양심을 상실하여 도적으로 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힘드는 부역을 늦춰주고 개과 천선할 길을 열어준다면 한 순간에 사나운 백성을 순진한 백성으로 전이(轉移)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군관(軍官) 신수팽(申壽彭)을 조포장(措捕將)으로 정하여 열읍(列邑)을 순행하면서 자신이 늙고 병들어 겁에 질린 나머지 군사로 자신을 옹위하기에 급급한 채,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많이 잡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민심이 시끄럽고 반란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적미(赤眉)와 황건(黃巾)의 변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바야흐로 수령과 상의해서 각기 그 마을의 향병(鄕兵)을 결성하고 그 중에서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를 추대하여 영장(領將)으로 삼고 인리(隣里)와 약속하여 차차로 구제하도록 하되,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농사도 짓고 보초도 서게 하며, 만약 마음을 고쳐 개과 천선하는 자가 있으면 전범(前犯)의 죄과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榜)으로 효유하여 도적의 발생을 방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독부(督府)의 【유정(劉綎)임.】 대군(大軍)이 남원(南原)으로 이주(移駐)해 있는데, 이들을 지대(支待)할 산료(散料) 등의 일에 있어서 조금도 다른 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남 좌ㆍ우도(左右道) 장사(將士)들의 식량도 전과 같이 독책하여 운송하므로 물력(物力)이 탕갈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세상으로도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이 오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영남 지방이 적에게 함몰되긴 했었지만, 가을에 심은 밀과 보리가 매우 잘 여물었고 심어 놓은 잡곡(雜穀)들도 모두 무성하게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체로 이 도(道)가 정역(征役)을 감면받음으로써 민력(民力)이 조금 펴졌고 남아 있는 백성들이 농사(農事)에 전력할 수 있었던 소치라고 여겨집니다.그러나 옛날에 전쟁을 할 때에는 오디[桑椹]를 먹기도 하고 부들속[蒲嬴]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꼭 곡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에야 전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영남 우도에 유주(留駐)하고 있는 장사들은 본도(本道)에서 전과 같이 연속하여 궤향(饋餉)하더라도, 좌도는 그 도와 강원ㆍ충청도 등에서 편의한 대로 양식을 공급토록 한다면 본도의 민력이 일분이나마 펴질 것이며 따라서 도적을 지식시키는 계책이 된다고 봅니다.”하니, 상이 비변사에 복계(覆啓)하라고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전쟁이 일어난 지 3년 동안 번거롭고 무거운 부역 때문에 백성들이 모여 도적이 되었는데,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적을 지식시키는 계책은 오직 안집(安輯)과 무마(撫摩)에 있는 것이지 잡아 죽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니, 이정암(李廷馣)의 장계(狀啓) 내용이 합당하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 이일이 신수팽을 정송(定送)하여 옥석(玉石)을 분간하지 않고 많이 체포하는 것만을 힘쓰고 있다고 하니, 그 계책은 잘못된 것입니다. 괴수만을 잡아죽이고 나머지 무리는 돌려보내어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이일에게 이문(移文)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남 장사들의 양식은 중국군이 나온 뒤로는 현재 한 섬의 양식도 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도(右道)는 전라도에서 운반해 오고 좌도(左道)는 본도와 충청도ㆍ강원도에서 거두어 운반해다 먹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천리 밖의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도원수에게 이문하여 상량(商量)해서 계문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원전】 22 집 271 면【분류】 사법-치안(治安)[주-D001] 적미(赤眉)와 황건(黃巾)의 변 : 적미는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났던 도적으로 자기들의 무리를 식별하기 위하여 눈썹을 빨간 색으로 물들였기 때문에 적미라고 이름하였다. 황건은 황건적을 말하는 것으로 후한(後漢) 말엽에 일어났던 도적인데 장각(張角)의 무리로서 역시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이름한 것임.
    2021-03-15 | NO.248
  • 충용장 김덕령이 치계하였다 - 선조 27년
    충용장 김덕령이 군량이 부족하니 호남 군사로 출신한 자 이외는 농업에 종사시킬 것을 청하다 - 선조 27년 갑오(1594) 3월 2일(경진)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치계하였다.“신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동지 몇 명을 불러모아 한 장수의 선봉이 되고자 하였을 뿐인데 뜻밖에 상께서 장수의 호칭을 내려 주시고 모여 있는 군사를 위무(慰撫)해 주시니 신이 감당할 수 없어 밤낮으로 두렵고 민망합니다.무군사(撫軍司)에서는 광주(光州)ㆍ담양(潭陽)ㆍ장성(長城) 등 3읍(邑)에 이 군인들의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전적으로 위임하였습니다. 이 군대의 현재 병력이 3천여 명이나 되는데 궤향(饋餉)하는 일을 유독 3읍에게만 맡기니 연이어 운송(運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호남(湖南) 군사로 출신(出身)한 자 이외에는 모두 귀농(歸農)할 것을 허락하여 농사일을 알차게 하고, 영남(嶺南)에서 정병(精兵) 수천 명을 뽑아 인솔하여 적(賊)을 토벌한다면, 전쟁에 유리할 뿐 아니라 국가의 구황 정책(救荒政策)에 있어서도 편리하고 보탬이 될 것입니다.신이 뜻을 결정하여 전진하고 싶으나 지금 군량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대군(大軍)을 흩어 보내고 별도로 5백여 명을 뽑아 여러 장수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주둔하고서 적의 형세를 탐지하여 살펴가며 아울러 복병을 매복하려 하는데, 군량만 계속될 수 있다면 흩어 보낸 군사를 다시 모아 한 차례 결사전(決死戰)을 치를 계획입니다.”【원전】 22 집 231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2021-03-15 | NO.247
  •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 선조 27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 선조 27년 갑오(1594) 1월 5일(갑신)        무군사(撫軍司)가 치계하기를,“광주(光州) 사람 김덕령(金德齡)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납니다. 지금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모집한 의병(義兵)이 이미 1천 인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모두 곡식을 바치고 징병(徵兵)에 누락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동궁께서 불러보고 시재(試才)한 뒤로는 원근의 의도(義徒)들이 날마다 더욱 모여들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해남 현감(海南縣監) 위대기(魏大器)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부족하지만 적을 죽이는 데는 능한데 덕령을 따라가 공 세우기를 바라고, 군산 만호(群山萬戶) 이세침(李世琛)도 따라가려 하니, 이 두 사람의 본직(本職)을 체차시켜 들여보내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별좌(別坐) 김응회(金應會)와 전 찰방(察訪) 김언욱(金彦勖)은 모두 덕령과 절친한 사람들로 당초 의병을 모집할 적에도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덕령이 동궁에게 익호장(翼虎將)이라는 호칭을 받아 관군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두 물러가려고 하여 사세에 지장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모두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의 직을 제수하고 막하에서 종사(從事)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모두 이 장계대로 시행하게 하도록 하소서.”하였다.【원전】 22 집 201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군사-특수군(特殊軍)
    2021-03-13 | NO.246
  • 김덕령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상소하다 - 선조 27년
    김덕령이 국왕의 소명에 대해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상소하다 - 선조 27년 갑오(1594) 1월 3일(임오)        광주(光州) 충용장(忠勇將) 김덕령이 상소하기를,“신은 어리석은 자질로 하읍(下邑)에서 생장하여 장구(章句)는 대강 읽었습니다만 궁마(弓馬)는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혈기에 충동되어 분발했을 뿐인데 헛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원수 권율(權慄)이 막하(幕下)에 거두어 두고 여러 번 적봉(敵鋒)을 시험하게 했습니다.신이 비록 국난(國難)을 평정한 공은 부족하지만 위로 군부의 원수를 잊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 번 죽을 결심이 없겠습니까. 단지 병든 어미가 오늘 내일 하고 형 또한 전사(戰死)하였기 때문에 오조(烏鳥)의 사사로운 정에 차마 옷깃을 뿌리칠 수가 없어 잠시 항오(行伍)를 따르다가 이어 사양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금년 8월 자모(慈母)가 돌아가셨고 이미 장사도 지냈습니다. 이 한몸 비록 상중(喪中)이기는 하지만 흉적이 아직도 치성하여 국운이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하였으니 신하로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절치 부심하다 분에 복받쳐 국난에 달려가고자 하였던 바,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순찰사(巡察使) 이정암(李廷馣)에게 신보(申報)하고, 순찰사는 도원수 권율에게 전보(轉報)해서 게호(揭號)하여 초승(超乘)하게 하였습니다.제반 전투 기구는 경린이 자신의 봉급을 깎아서 빠짐없이 극력 주선하여 주었고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도 함께 같이 주선하여 주었는데 기계(器械)를 이렇게 판출하여 준 것은 실로 지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도 부득이 최복(衰服)을 벗고 전진(戰陣)으로 달려가기를 허락하였습니다.그런데 비상한 소명(召命)이 갑자기 내릴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황공스러움만 깊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12월 20일에 도계(道界)에서 학가(鶴駕)를 지영(祇迎)하는 자리에서 즉시 고하고 출발하려 하였습니다만 뜻밖에 천병(天兵)*이 철병함에 따라 적세가 매우 급박하게 되었으므로 무군사(撫軍司)에서 신에게 영남으로 달려가서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지키게 하였습니다.신이 생각하건대, 군명(君命)에 급히 달려가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지만, 바로 전진(戰陣)으로 달려가 군기(軍機)를 그르치지 않는 것도 신하의 직분이기에 즉시 소명을 받들어 달려가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하시고 공효를 책임지우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이 상소를 비변사에 내리라. 포장하라는 내용으로 하유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하였다.【원전】 22 집 201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군사-특수군(特殊軍)*천병(天兵)을 '중국군'으로 번역(1987, 정기태)하였는데 오류로 보임.[주-D001] 오조(烏鳥)의 사사로운 정 :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마음. 까마귀는 어미새가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여 어미새가 늙으면 모이를 가져다 먹인다는 데서 온 말임.[주-D002] 학가(鶴駕) : 동궁을 가리킴.
    2021-03-13 | NO.245
  • 왜노에게 침탈당한 도와 침범당하지 않는 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 - 선조 26년
    왜노에게 침탈당한 도와 침범당하지 않는 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 - 선조 26년 계사(1593) 6월 5일(무자)        경략이 이자(移咨)하였는데 대략에,“본국의 팔도 중에 어느 도 어느 읍은 모두 왜노가 점거하였고, 어느 도는 침범당하였으며, 어느 도는 아직 침범받지 않았고, 어느 곳 어느 도는 전혀 지경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하는 사실을 세세히 갖추어 기록하여 자복(咨復)하도록 하십시오.”하였는데, 회자(回咨)하기를,“<중략>전라도 진산(珍山)ㆍ금산(錦山) 등 군과 용담(龍潭)ㆍ무주(茂州) 등 현은 모두 분탕과 노략을 겪었고, 그 외에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남원(南原)ㆍ장흥(長興)ㆍ순천(順天)ㆍ담양(潭陽)ㆍ제주(濟州) 등 부진과 보성(寶城)ㆍ익산(益山)ㆍ고부(古阜)ㆍ영암(靈岩)ㆍ진도(珍島)ㆍ순창(渟昌)ㆍ김제(金堤)ㆍ여산(礪山)ㆍ영광(靈光)ㆍ낙안(樂安) 등 군과 창평(昌平)ㆍ임피(臨陂)ㆍ만경(萬頃)ㆍ금구(金溝)ㆍ능성(綾城)ㆍ광양(光陽)ㆍ용안(龍安)ㆍ함열(咸悅)ㆍ부안(扶安)ㆍ함평(咸平)ㆍ강진(康津)ㆍ옥과(玉果)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ㆍ옥구(沃溝)ㆍ남평(南平)ㆍ흥덕(興德)ㆍ정읍(井邑)ㆍ고창(高敞)ㆍ무장(茂長)ㆍ무안(務安)ㆍ동복(同福)ㆍ화순(和順)ㆍ흥양(興陽)ㆍ해남(海南)ㆍ구례(求禮)ㆍ곡성(谷城)ㆍ장성(長城)ㆍ진원(珍原)ㆍ운봉(雲峯)ㆍ임실(任實)ㆍ장수(長水)ㆍ진안(鎭安)ㆍ대정(大靜)ㆍ정의(旌義) 등 현은 모두 적이 침입하지 않았고, 다만 전주부(全州府)만이 적이 성 밑에 왔다가 수비가 완고함을 보고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하였다.【원전】 22 집 4 면【분류】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2021-03-13 | NO.244
  • 광주의 못물이 적색으로 변했다고 보고하다 - 선조 21년
    전라 감사가 광주의 못물이 적색으로 변했다고 보고하다 - 선조 21년 무자(1588) 11월 17일(병인) [DCI]ITKC_JT_N0_A21_11A_17A_00030_2005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전라 감사 서장에, 지난 9월 사이에 광주(光州)의 못물이 적색으로 변한 것이 10여일 간이었고 물고기와 새우가 모두 물위에 떠서 죽었다고 하였다.【원전】 21 집 455 면【분류】 과학-지학(地學)
    2021-03-13 | NO.243
  • 노사영 등이 판관의 혁파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다 - 선조 21년
    광주 사는 노사영 등이 판관의 혁파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다 - 선조 21년 무자(1588) 윤 6월 1일(임오)        광주(光州) 사람 노사영(盧士英) 등이 소를 올려 판관(判官)을 혁파하기를 청하는데, 이조가 연혁(沿革)은 중대한 일이라 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좌상(左相) 정유길(鄭惟吉)이 의논드리기를,“광주는 지역이 작고 공무가 간소하여 한 목사(牧使)로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으며, 노사영 등은 그 지방에 거주하면서 민폐를 익히 생각하여 본 터이므로 이같은 소청(疏請)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호남(湖南)은 풍속이 다른 곳과 달라서 관리를 혁파하는 일이 주민의 소(疏)에 의해 한번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왕화(王化)를 승선(承宣)하는 일은 방백(方伯)의 임무로 조정도 방백에게 의중(倚重)하고 있는 바이니, 그곳 감사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감사에게 물어 처리하라고 전교하였다.【원전】 21 집 451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사헌부가 작폐가 심한 문의 수령 이맹연의 파직을 청하다 - 선조 21년 무자(1588) 윤 6월 5일(병술)        사헌부가 아뢰기를,“문의 현령(文義縣令) 이맹연(李孟衍)은 작폐(作幣)가 범람(泛濫)하니 파직하소서. 또한 수령(守令)을 혁파(革罷)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한 것이므로 의당 조정의 결정에서 나와야 하고 주민이 감히 거론할 바가 아닙니다. 이러한 습관을 한번 열어 놓아 그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되니, 광주(光州)의 진사(進士) 노사영(盧士英) 등의 상소를 거행하지 마소서.”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원전】 21 집 451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2021-03-13 | NO.242
  • 광주 목사 김행을 파직하다 - 선조 20년
    감사로 있을 때 도적 처리를 잘못한 호조 참판 한준과 광주 목사 김행을 파직하다 - 선조 20년 정해(1587) 9월 7일(계사)        호조 참판 한준(韓準)은 전일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광주(光州)의 적승(賊僧) 청운(靑雲)이 그 주인댁에 도적질을 하면서 칼로 주인 부처를 상하게 하고, 스스로 자기 일당을 포고(捕告)하여 공을 세울 것을 마치 서림(徐林)의 예와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의 지시를 따라 큰 도적 무리들을 많이 포획했는데, 치죄(治罪)하기가 곤란하자 그 주인에게 보내 그의 처치에 맡겨 버렸다. 뒤에 감사 윤두수가 그 사건을 아뢰자, 상은 한준의 공사(公事)가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하여 정원(政院)에 하교하였는데, 양사가 한준과 광주 목사(光州牧使) 김행(金行)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원전】 21 집 437 면【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2021-03-13 | NO.241
  • 김우옹이 호남의 기근을 아뢰며 사직을 청하다 - 선조 18년
    석강에 《강목》을 강하고 김우옹이 인재 등용, 호남의 기근을 아뢰며 사직을 청하다 - 선조 18년 을유(1585) 2월 20일(신유)        석강(夕講)에서 《강목(綱目)》 애제기(哀帝紀)의 ‘이심(李尋)이 여알(女謁)과 사신(邪臣)의 말을 듣지 말라고 말하였다.’ 한 부분에 이르러 김우옹이 아뢰기를,“정도(正道)에 어긋나는 사특한 말은 단절시켜 듣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여알의 간청을 총명한 임금의 경우에는 쉽게 단절할 수 있지만, 만약 공론을 빙자하여 사특한 방법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아무리 총명한 임금이라도 간혹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속임을 당하기 쉬운 것이니, 이것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하였다. <중략> 또,“신이 호남(湖南)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보니, 본도의 기황(飢荒)이 대개는 비슷했습니다만, 우도(右道)의 바닷가 7~8 고을이 더욱 심했습니다. 겨울 사이에 이미 백성 가운데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봄이 되면 반드시 사정이 매우 급해질 것입니다. 관에는 저축된 곡식이 없어 진구(賑求)할 계책을 마련할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대저 하삼도(下三道)는 바로 국가의 근본인데, 민력은 이미 고갈되었고 징발 또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바야흐로 북방(北方)을 근심하여 근본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이 어찌 실책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항상 근본을 염두에 두셔야 될 것입니다.”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탁(鄭琢)이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권덕여(權德輿)는 병이 심해 일을 보지 못할 정도인데도 감히 병이 있음을 고하지 않고 있습니다.”하니, 우옹이 아뢰기를,“신이 직접 만나보았는데 중풍(中風)으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여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죄를 얻어 쫓겨났기 때문에 감히 병이 있음을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임금이 한때 우연한 일로 내보낸 것인데 어찌 그리 마음에 두는가. 이처럼 병이 중하다면 체직하라.”하니, 우옹이 또 아뢰기를,“소신은 매우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고 본래 학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달리 배운 바는 없으되 오직 임금을 섬김에는 아버지를 섬기듯 해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무릇 가슴에 품은 것이 있는데도 군부에게 다 아뢰지 않으면 큰 죄악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전일 망령된 소견을 상께 아뢰어 시휘(時諱)를 저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죄책을 받아야 할 텐데 죄를 주지 않고 도리어 수용(收用)하시어 외람되이 경연의 자리에까지 참여하게 하였으니 성주(聖主)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가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분수에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요, 학술이 소루하고 몽매한데다 또 병 때문에 독서를 폐지한 것이 둘입니다. 더욱이 종적(蹤跡)이 고단하여 사세(事勢)가 불편한데도 고루하고 막힌 견해를 바꾸지 못하고 묵묵히 참아가며 구차하게 용납되기 위해 시세와 함께 저앙(低昻)하는 것은 또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당초 소장을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두 번 세 번 소장을 올리고 떠나려고 했었습니다. 그뒤 다시 생각을 고쳐 경연에 입시하여 천안(天顔)을 뵈옵고 직접 저의 실정을 아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지체하여 왔던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자, 이에 물러나왔다.【원전】 21 집 414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구휼(救恤)[주-D001] 이심(李尋) : 전한(前漢) 평릉(平陵) 사람으로 자(字)는 자장(子張).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특히 홍범(洪範)의 재이(災異)에 달통하였다. 관직이 기도위(騎都尉)에 이르렀는데 외척을 억제해야 되고 도덕이 있는 선비를 선발해야 된다는 것을 극론하였다. 후에 하하량(河賀良) 등의 옥사에 연루되어 돈황(敦煌)으로 유배되었다. 《전한서(前漢書)》 권75.[주-D002] 회남왕(淮南王) …… 것 : 조정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역적도 두려워한다는 뜻. 한 무제(漢武帝) 때 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꾀하면서 중앙 조정의 인물을 논할 때 “한나라 조정에서는 유독 급암(汲黯)만이 직간(直諫)을 좋아하고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릇된 방법으로 유혹하기가 어렵다.” 하였다.[주-D003] ‘존심 양성(存心養性)’ :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배양한다는 말. 《맹자(孟子)》 진심장 상(盡心章上)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주-D004] 하삼도(下三道) : 충청ㆍ전라ㆍ경상도.
    2021-03-13 | NO.240
  • 성절사 이해수가 조사의 출발일을 치게 하다 - 선조 15년
    성절사 이해수가 조사의 출발일을 치게 하다 - 선조 15년 임오(1582) 9월 7일(임술)        성절사 이해수(李海壽)가 치계하기를,“황태자(皇太子)가 지난 8월 11일에 탄생하여 천하에 조서를 반사(頒賜)하는데 본국의 조사(詔使)는 한림 편수(翰林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을 차송하기로 정하여 9월 보름경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대신을 불러 전례에 따라 모든 일을 급히 조치하도록 하라.”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지대(支待)에 관한 모든 일은 해사가 관례에 따라 살펴서 할 것입니다. 도사 영위사(都司迎慰使)는 반드시 문장에 능한 사람을 임용해야 합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응시(辛應時)를 도사 영위사에 차임하여 역말을 타고 올라오게 하고, 정유길(鄭惟吉)을 관반(館伴)으로 삼고 이이(李珥)를 원접사(遠接使)로 삼도록 하소서.”하였다.【원전】 21 집 383 면【분류】 외교-명(明)
    2021-03-13 | NO.239
  • 광주 사람 정문경이 숙모를 타살했음을 아뢰다 - 선조 14년
    광주 사람 정문경이 숙모를 타살했음을 아뢰다 - 선조 14년 신사(1581) 3월 25일(무자) 전라 감사가 서장을 올렸다.“광주(光州) 사람 정문경(程文卿)이 그의 삼촌 숙모를 타살했습니다.”【원전】 21 집 374 면【분류】 사법(司法) / 윤리(倫理)
    2021-03-13 | NO.238
  • 광주 목사 신응기의 체직을 청하다 - 선조 13년
    간원이 광주 목사 신응기의 체직을 청하다 - 선조 13년 경진(1580) 10월 12일(무신)        간원이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신응기(辛應基)는 내지(內地)에 적합하지 않고, 감찰 조여강(趙汝剛)은 눈이 어두워 분별하지 못하니 모두 체직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원전】 21 집 367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2021-03-11 | NO.237
  • 전라 감사 박민헌이 포상 인물을 보고하다 - 선조 7년
    전라 감사 박민헌이 전주 부윤 고경허, 남원 부사 정엄 등 포상 인물을 보고하다 - 선조 7년 갑술(1574) 7월 21일(계사)        전라 감사 박민헌(朴民獻)이 서장을 올렸다.“수령들이 관사(官舍)에 마음을 다하여 바야흐로 백성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법망에 저촉되면 그 즉시 파직되어 돌아가게 됩니다. 비록 백성들이 붙잡고 호소하지만 또한 어찌할 수 없으니 자못 선왕(先王)들의 의현(議賢)하고 의능(議能)하는 뜻이 아닙니다. 신이 본도(本道)의 수령 중에 행정의 공효가 월등하게 나타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개록(開錄)하겠습니다. 포숭(褒崇)하는 법이 진실로 경중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신의 구구한 마음에는 이조로 하여금 모두를 적록(籍錄)하도록 하되, 만일에 응당 파직해야 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잉임을 계청하도록 했으면 합니다.전주 부윤(全州府尹) 고경허(高景虛)는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어 은혜와 위엄이 겸비된 사람입니다. 그는 도임(到任)한 다음부터 그전의 폐단을 개혁하고 제거하였기에 한 지경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정엄(鄭淹)은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은 공렴(公廉)하고 결백(潔白)하므로 백성들이 빙호(氷壺)라고 지목하면서 오직 오래 유임하지 않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중호(李仲虎)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옛날 순리(循吏)의 기풍이 있고, 영광 군수(靈光郡守) 민정명(閔定命)은 과단성이 있고 분명하게 살피며, 일에 당해서는 지체없이 해결하므로 본래 영광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고을이지만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즉시 정돈되었습니다.여산 군수(礪山郡守) 심연(沈鍊)은 천성이 매우 부지런하여 무릇 백성을 편안하게 할 일들을 극력 조치하면서 오직 원통해 하거나 답답해 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했습니다. 구례 현감(求禮縣監) 송정순(宋廷筍)은 순박 정직하고 청렴 개결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일을 당하면 분발하여 권력 있는 사람이라도 피하지 않았으며, 옥사 결단과 송사 방지를 모두 지체없이 했습니다. 남평 현령(南平縣令) 이징(李徵)은 행정을 공평하게 하므로 온 도(道) 안에서 모두 칭찬하고 있으며 폐단 제거하는 일을 미처 다하지 못할 듯이 했습니다. 용안 현감(龍安縣監) 김천감(金天鑑)은 초야(草野)에서 나와 수령이 되었지만 백성 다스리는 일이 또한 매우 익숙하여 적절하고 명백하게 하였으며 백성을 자식처럼 애호했습니다.이 밖에 백성들이 잘 다스린다고 호소해 온 목민관들은 영암 군수(靈巖郡守) 심암(沈巖), 만경 현령(萬頃縣令) 조영규(趙英珪), 강진 현감(康津縣監) 변기(邊璣), 동복 현감(同福縣監) 신응원(申應元) 등입니다.비록 백성들이 정소(呈訴)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으나 공정하고 위신이 있다고 칭찬받는 사람은 진도 군수(珍島郡守) 김집(金緝)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공(奉公)하는 사람은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행(金行)입니다. 이조에 계하(啓下)하소서. 그리고 또 재주를 지니고 예능(藝能)을 가졌으면서도 암혈(巖穴)에 숨어 있는 선비를 추천하겠습니다.나주에 사는 진사 김응기(金應期)는 순후(淳厚)하고 침의(沈毅)한 사람으로 효우(孝友)한 성품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어버이를 섬기되 지극히 조심성 있게 했습니다. 일찍이 여묘를 살았는데 죽만 먹으면서 3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상기(喪期)를 마쳤습니다. 평소의 행신이 온 가문에 나타나서 그런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자, 향천(鄕薦)으로 참봉을 제수했었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50이 넘어 장차 초목과 함께 썩어 버리게 되었으니, 어찌 성명(聖明)한 시대에 유주(遺珠)의 한탄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무안(務安)에 사는 유학(幼學) 정개청(鄭介淸)은 사람됨이 치밀하고 분명하여 독실한 뜻으로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가세가 지극히 청빈(淸貧)하지만 일찍이 한 걸음도 망령되이 행하지 않고 조금도 누구에게 간청(干請)한 적이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버이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받들고, 문생(門生)들과 날마다 도의를 강론하여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많고, 항시 예경(禮經) 공부에 공력을 들이고 역학(易學)에 있어서도 발명(發明)한 바가 많이 있습니다. 김응기와 정개청은 심상한 인물이 아니고 특히 백집사(百執事)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원전】 21 집 309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윤리(倫理)[주-D001] 관사(官舍) : 고을의 행정.[주-D002] 적록(籍錄) : 장부에 기록함.[주-D003] 빙호(氷壺) : 청렴하고 청백함.[주-D004] 순리(循吏) : 관사를 잘 처리하고 법칙을 잘 지키는 관리.[주-D005] 암혈(巖穴) : 산중.[주-D006] 침의(沈毅) : 침착하고 굳셈.[주-D007] 유주(遺珠) :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함.
    2021-03-11 | NO.236
  • 임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6년
    김명원ㆍ김관ㆍ윤현ㆍ한수ㆍ임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선조 6년 계유(1573) 10월 11일(무오)       김명원(金命元)을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김관(金瓘)을 장령에, 윤현(尹晛)을 정언에, 한수(韓脩)를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임훈(林薰)을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하였다.【원전】 21 집 274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11 | NO.235
  • 헌부가 홍보를 죄주라고 청하다 - 선조 6년
    헌부가 홍보와 박희립을 죄주고 또 내관 수를 《대전》의 본액대로 하라고 청하다 - 선조 6년 계유(1573) 10월 6일(계축)        헌부가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홍보(洪溥)는 부임한 뒤로 설시(設施)가 많지 않아 인심이 이반되었습니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희립(朴希立)는 몸에 병이 있어서 관사(官事)에 부지런하지 못한데다가 유식한 사람으로서 삼가지 않는다는 비난도 많습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하고, 또 열읍(列邑)이 빈객을 후하게 대접하여 공증(供贈)이 사치하고 방자한 폐단에 대해 논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논계하기를,“내관의 수가 《대전》의 규정보다 더하여 보솔(保率)이 매우 범람하니 한결같이 《대전》의 본액(本額)을 따르게 하소서. 지난번 내시부가 뻔뻔스레 이문(移文)하였으니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이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다. 근일 헌부가 통하지 않는 의논을 자주 제기하는 것은 형세를 짐작하여 상세히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온당하지 못하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21 집 273 면【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왕실-궁관(宮官)[주-D001] 차지 내관(次知內官) : 그 일을 분장(分掌)한 내관. 내관은 내시부(內侍府)의 관원.
    2021-03-11 | NO.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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