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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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덕 姜思德 태종 8년(1408) 10월 5일∼태종 9년(1409) 9월 20일
- 강사덕 姜思德 태종 8년(1408) 10월 5일∼태종 9년(1409) 9월 20일강사덕(?∼1410)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397년(태조 6) 남포진 첨절제사, 동북면도순문사를 거쳐 나주목사로 재직하다 다시 순문사로 돌아갔다. 이후 형조전서, 우군총제, 우군도총제, 길주도도안무찰리사, 전라도병마도절제사, 판승녕부사를 지냈다. 1406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경상도도절제사 재직 시 경상 도·전라도 해안출몰 왜구 방어에 공이 많았다. 1409년 윤목·이빈·조희민 등의 모반사 건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되었다. 『금성일기』 「정해년 1407년」 에 “병마도절제사 겸 영목사 강사덕이 10월에 도임하였다가 기축(1409년) 9월에 순금 사(巡禁司)로 배귀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무자(1408년) 10월 5일 도임, 기축(1409년) 9월 20일 순금사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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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여호 姜汝㦿 숙종 6년(1680) 2월 26일∼숙종 6년(1680) 6월 21일
- 강여호 姜汝㦿 숙종 6년(1680) 2월 26일∼숙종 6년(1680) 6월 21일강여호(1620∼1682)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계숙(啓叔), 호는 기재(耆齋)이다. 아버지는 진사 강설(姜渫)이며, 어머니는 여대로(呂⼤⽼)의 딸이다. 1654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들었다. 1658년 승문원 부정자·가주서, 1659년 호조좌 랑, 1661년 강진현감, 1665년 평안도사, 1667년 사간원 정언, 1671년 장령, 1675년 헌납·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1680년 2월 2일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2월 26일 도임 하였다. 1681년 부호군이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680년) 2월 26일 도임하였고 동년 6월 21일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라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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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창
- 강희창(姜熙昌), 湖節2下-210-1, 光州, 임진왜란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
- 2020-03-31 | NO.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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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리(高敬履, 1560~1609)
- 김장생 문인록, 사계전서 제47권 부록고경리高敬履(1560~1609) 자는 이척(而惕)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며, 경신년(1560, 명종15)생이다. 장흥인(長興人)으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종제(從弟)이다. 어려서부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광해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무고를 변론하였다가 상소는 불태워지고 금고(禁錮)되었다. 생원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창랑실적 滄浪實蹟, 1857>이 있다.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 2020-10-03 | NO.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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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명高敬命(1533~1592)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태헌(苔軒)이다. 환갑의 나이,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해 광주의병의 첫머리에 오르내린다.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이다. 1552(명종7년)년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했다. 공조좌랑ㆍ전적ㆍ정언 등을 거쳐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다. 한말 의병으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순절한 고광순(高光殉 대장) 고광훈(좌익장) 고제량(부장) 고광수(선복장) 고광채(우익장)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두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양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선조14)년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박광옥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마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하였다.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 유팽로, 안영 등과 순절했다.시ㆍ글씨ㆍ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물인 『유서석록』,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 금산 성곡서원, 종용사, 순창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광주시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시작하여 장동로타리와 대인광장을 지나 광주역에 이르는 도로를 제봉로로 부르고 있다.
- 2020-03-06 | NO.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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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신
- 고경신(高敬身), 湖節1下-173-1,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 2020-03-31 | NO.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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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조(高敬祖)
- 고경조(高敬祖, 1528~?)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원(貽遠), 호는 구암(龜巖)이다.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낸 고운(高雲), 부친은 고중영(高仲英)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사촌이다. 김지달(金之達)의 딸인 영광김씨(靈光金氏)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고성후(高成厚), 차남은 고근후(高根厚), 삼남은 고응후(高凝厚), 사남은 고극후(高極厚)이다. 광주에서 거주하였다.1555년(명종 10)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561년(명종 16) 식년시에서 을과 2위[전체 5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 급제 이후의 기록은 많지 않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1574년(선조 7) 6월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재직할 당시 뇌물을 받고 송사를 처결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는 기사와, 1593년(선조 26) 윤11월에 고경조를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1590년(선조 23)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인 평해(平海)의 군수로서 망양정(望洋亭)을 중수하였다. 서형수(徐瀅修)[1749~1824]가 쓴 《명고전집(明皐全集)》에 따르면, 임천군수가 된 1593년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고경조는 주로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광주읍지(光州邑誌)》나 《여산부읍지》 등의 지방지에 따르면 고경조는 명종이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횡포를 막기 위해 중용한 이량(李樑)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지방직을 전전하였다.1645년(인조 23)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 2024-11-18 | NO.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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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형
- 고경형(高敬兄), 고경명의 동생이다. 湖節1下-173-2, 光州, 壬辰, 高從厚 同殉《호남절의록》(1799)
- 2020-03-31 | NO.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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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련(高光璉)
- 고광련(高光璉, 1872~1949)의 본간은 장흥이며 자는 호기(瑚器), 호는 침천(枕泉)이다. 남구 압촌동에 거주했다. 부 : 高馹柱조 : 高濟尤증조 : 高鳳鎭외조 : 李基彬처부1 : 申文休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했다.
- 2020-08-06 | NO.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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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문 고광인 고광룡
- 남구 이장동 고광문(高光文, 1860~1898), 고광인(高光寅, 1862~1936), 고광룡(高光龍, 1867~1938) 형제는 부농 집안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가사에 근면하였다. 동학군에 종군한 뒤 집안의 수많은 전답을 동학군자에 헌납하고 목숨 걸고 싸웠다. 결국 일본군에게 동학군이 밀리면서 타향 객지로 피신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통탄 비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3형제의 행적이 110년이 지난 뒤로도 잘 알려지지 않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동학 3형제기> 비석이 2004년 10월 세워졌다.후손인 고영두(高永斗. 1930~2006)씨의 450평방미터 부지 희사로 이장동 216에 2016년 6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 2020-03-06 | NO.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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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선
-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본관은 장흥(탐라)이며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원여(元汝) 호는 현와(弦窩)이다. 서창면 용두리에 살았다. 1855년(哲宗 6) 光州 復村에서 湖隱 高璞柱와 행주기씨 禹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霞川 高雲과 忠烈公 高敬命의 직계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행동이 비범하여 아이들과 함부로 섞여 놀지 않았으며, 스스로 글을 깨쳐 경서와 제자서를 읽을 줄 알았다. 10세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상례를 어른처럼 행하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이러한 고광선을 두고 부친의 친구들이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여 자못 기대하는 바가 컸다.그때 마침 德岩 羅燾圭가 이웃 石亭里에 와서 강의를 함으로 나아가 학문을 닦는다. 또한 蘆沙 奇正鎭 문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바를 듣고서 기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기정진에게서 성리학을 익혀 깊이 있는 학문의 세계를 이룬다. 또한 기정진의 문하에 있으면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는데, 吳繼洙, 朴魯述, 奇宇萬 등이 그들이다. 고광선의 나이 40세 무렵에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고광선은 그 어지러움을 매우 걱정하며 거동을 바르게 하여 흔들리지 않아 안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처럼 성격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상과 그리 어울리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는 을사조약(1905년), 경술국치(1910년), 고종의 승하(1919년) 등 국내적으로 굵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목도한 고광선은 적과 함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하여 光山 西倉 鳳山(봉황산)으로 숨어들어 掩耳齋를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생을 마감하고자 했으나 원근에서 많은 이들이 학문을 닦으러 찾아옴으로 막지 못하고 봉산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1934년 생을 마감하니 향년 80세였다. 훗날 제자들이 그를 기리는 鳳山祠를 지어 배향했으나 시간이 오래되어 찾는 이가 없어지면서 2017년을 전후해 멸실되었다. 남긴 문집으로는 『현와유고』가 있다. 부 : 高璞柱 조 : 高濟說 증조 : 高公鎭 외조 : 奇禹鎭 처부1 : 李周洪 처부2 : 金運錫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1906년 12월 12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454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했다.
- 2020-02-05 | NO.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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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수
- 고광수(高光洙), 1870~1937의 본관은 장흥으로 장흥고씨(長興高氏)이다. 자는 도일(道一)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부 : 高德柱 조 : 高濟乙 증조 : 高性鎭 외조 : 李志容 처부1 : 光州 李秉一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 2020-02-05 | NO.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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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익(高光益)
- 고광익(高光益, 1858~?)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성오(省五), 호는 우정(愚汀)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 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李基彬처부2 : 具元模처부3 : 鄭大彦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6 | NO.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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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준(高光俊)
- 고광준(高光俊, 1853~193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치삼(致三), 호는 인암(忍菴) 이다. 남구 양과동에 거주했다.부 : 高儀相조 : 高濟憲증조 : 高厚民외조 : 朴齊莞처부1 : 尹柱興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소의계昭義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6 | NO.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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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규상(高奎相)
- 고규상(高奎相, 1878~1959)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윤화(允和), 호는 덕봉(德峰) 이다. 남구 니장동에 거주하였다.부 : 高濟國조 : 高宜鎭증조 : 高時興외조 : 昌寧 曺처부1 : 李謙緖 1929년 나도규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 2020-08-06 | NO.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