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공간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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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자유공원
    광주시 서구 상무평화로 13(치평동)   5.18자유공원은 이곳은 1980년 당시 상무대의 군사법정과 영창 등이 있던 곳이다. 1980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싸우신 분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상무대 군사법정과 영창을 월내의 위치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와 원형으로 복원해 재현한 곳이다. 드높은 민주화 의지와 젊은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했던 분들의 뜨거운 용기와 숨결이 남아있는 이곳은 역사적 투쟁의 자취요, 인권.평화.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될 역사의 현장이다.상무대 영창은 자유공원 내 가장 안쪽, 철조망이 둘러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이곳으로 끌려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온갖 고문과 구타에 몸과 마음이 멍들었고 하루 16시간씩 정좌자세로 앉아있어야 했다.여섯 개의 방이 부채꼴로 배치되어 있으며, 수감자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감시대가 중아에 버티고 있다. 한방에 많게는 1백50명씩 총 8백여 명이 수감되어 혹독한 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던,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군사법정 내무반에 들어서기 전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80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 80년 그날 수많은 시민들이 부당한 군사재판에 대한 항의표시로 소리 높여 애국가를 불렀던 곳이다.당시 재판은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입장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군사재판부는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했다. 주요시설 보존시설로는 법정(222㎡), 영창(617㎡), 헌병대중대내무반(414㎡), 헌병대본부사무실(425㎡), 헌병대식당(181㎡), 식기세척장(19㎡), 창고(55㎡) 등이 있고 지원시설로는 자유관(1020㎡, 영상실 및 5.18전시실)과 편의시설인 조경수, 분수시설 등이 있다.내무반에 들어서기 전 왼편에 보이는 건물인 법정은 1980년 8월에 5.18군사재판을 위해 지어졌다. 5.18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이다.영창은 자유공원 내 가장 안쪽, 철조망이 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5.18 당시 상무대 헌병대 영창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일부 정치군인들의 정권찬탈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구금되었던 곳이다. 6개의 방이 부채꼴로 배치되어 있으며 수감자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감시대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전시실은 역사의 사건, 맨 주먹의 저항, 죽음과 부활, 천년의 빛 5.18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상실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들불야학 운동가 7인의 모습을 새긴 기념조형물인 들불열사 기념비도 있다.
    2018-05-28 | NO.40
  • 5.18기념공원
    서구 내방로 152(쌍촌동)1995년 상무대 이전과 함께 정부가 광주시민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상무 신도심 개발지구내에 330,000㎡을 시민공원 부지로 무상 양여함에 따라, 5.18의 명예회복과 값진 교훈을 올바르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8,000㎡ 규모의 5.18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5.18기념공원에는 기념문화원, 현황조각 및 추모승화 공간, 오월루 등 5.18관련 시설물과 휴게 공간 및 공원기반 시설이 들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발전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5.18을 상징하는, ' 아!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의 조형물이 장엄한 형상으로 서 있어 오가는 이들에게 오월영령들을 추모하게 하고 광주의 내일을 기약하게 한다. 이 작품은 1997년 한국 조각 사상 최고 금액(40억원)의 최대 조형물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당선되었다.특히 기념문화관은 5.18정신에 대한 교육의 장 및 인권센터의 기능을 수행하며, 숭고한 정신의 계승.발전 도모하고 있다. 관람객 및 관광객들에게 5.18의 참모습이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 소개하고 있다. 5.18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밝은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인 시민상을 표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나아가 시민 일상생활의 장으로서 기념공원 일상생활 속에서 시민들이 자주 접하고 이용하는 생활 속의 공원을 지향하고 있다. 근린공원의 기능 확보와 관광 명소화 기념공원의 성격을 중심으로 하되 공원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며 산책을 즐기는 등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근린공원의 기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더불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역사 체험의 장을 제공하는 관광 명소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5.18기념공원의 기본 컨셉은 5.18 기념사업을 펴는 동시에 미래의 광주 도시이미지를 덧씌워 융.복합의 묘미를 살려낸 점이다. 광주의 5월 정신이 광주광역시 상무 신도심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더불어 오픈 스페이스 체계를 확립시켜 역사체험의 장으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망월묘역-도청-상무공원의 세 지역이 미래 광주광역시 도시 이미지와 융화되도록 기본계획 및 설계 개념을 정립한 것이 지향점이다. 또 광주광역시 경관로와 공원 연결로를 구성해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주변 경관로를 돌다 자연스럽게 5.18기념공원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흥미롭다. 공원 안에는 1972년 상무대 내에 창건된 무각사와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하는 단군전이 있다.조성면적은 전체 204,985㎡이고 5.18기념문화관(10421㎡), 대동광장(2700㎡), 오월루(900㎡), 현황조각 및 추모승화공간(3310㎡), 광주학생운동기념탑(350㎡) 등이 있다. 이외에 연못(5000㎡), 다목적 잔디광장(6200㎡), 계류정(2500㎡), 산책로(3200㎡), 어린이놀이터(2800㎡), 휴게공간.완충녹지(26300㎡), 진입광장(1715㎡), 팔각정, 단성전(10㎡) 등이 있다.그 중 5.18 현황조각 및 추모승화공간은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빛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충북 출신의 건축적 조각을 추구하는 심재현 작가(당시 60세)의 공모당선작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태극모양이다. “아! 광주여 영원한 빛이어라”라는 주제로 지상 현황조각과 지하 추모공간으로 나누어 조성하였다. 지상 현황조각에는 제기, 인물상, 관부조, 스테인리스 조형물이 있고 지하 추모공간에는 지하 인물상, 횃불, 부조, 5.18관련자 명단 등이 있다.        대동광장은 기념공원과 추모공간의 진입로로써 신분을 초월하여 한 덩어리로 뭉친 대동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광장의 주요 설계요소들은 중앙의 구심점으로 향하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중앙에 위치한 분수는 5.18정신의 승화 계승 발전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분수의 중앙 조형물은 민중의 힘이 땅으로부터 솟아 하늘을 향하고 5.18의 정신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형상, 5.18희생자를 받드는 손의 이미지를 의미한다. 연못은 조선시대 남도 전통정원 양식을 기조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세연지의 이미지를 도입하여 전통 조경요소 및 입수 기법으로 조성하였다. 계류정은 기존 정자와 연못을 정비하여 세심천의 개념을 갖도록 자연적인 계류경관을 고려하여 조성된 연못이다.* 2023.10.12. 수정
    2018-05-28 | NO.39
  • 개금산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북쪽풍암 유통단지와 전평호수, 서광주역을 품고 있는 듯한 개금산은 매월동 회산마을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백마산과 마주보고 있다. 개금산蓋金山은 ‘아름답고 돈이 많이 모인다 하여 마치 금으로 덮인 것 같다’는 뜻을 갖고 있다. 높이는 179.2m로 일명 계관산鷄冠山으로 불린다. 산봉우리가 세 갈래로 크게 갈라져 ‘마치 닭의 볏[鷄冠]과 같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산의 경사가 급해 벼랑산, 깔끄뫼, 깨그뫼, 개금산開金山이 됐다고 전해진다. 별명으로 화개산 또는 개감산蓋甘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의 남쪽은 주로 솔밭으로 이뤄지고 경사가 완만해 그 자락에 많은 민가와 음식업소가 들어서 있지만 근방 수려한 경관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쉬었다 가곤 한다. 이 산 뒷면 북쪽은 광주 도심이 가까워 전망이 좋고 산 끝자락에는 화개마을이라는 조그만 취락이 있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가까운 언덕에 매화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데서 지어졌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이 산은 녹지자연이 7∼8등급에 해당해 식생이 양호하다. 남서사면에 대동고등학교와 살레시오초등학교가 있고, 그 아래는 호수공원으로 꾸며진 전평제가 있다. 동쪽 자락의 회산마을은 임진왜란 때 공신이자 나주목사 등을 지낸 조선조 명종. 선조 때의 문신 회재懷齊 박광옥朴光玉(1526∼1592)의 탯자리가 있던 곳이다. 박광옥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실시하는 등 주민들을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 박광옥의 딸과 관련하여 주역각시의 정절에 관한 설화도 친근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문인 회재 박광옥에게는 영특한 딸이 하나 있었다. 여자지만 학업은 사서삼경에 통달했고 짐승의 말소리까지 알아듣는 신통한 재주를 지녔었다. 그녀의 나이가 15~16세가 되자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노정(盧楨)의 아들과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 밤 쥐들이 천정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는 것이 화근이 되어 시집에서 퇴박을 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옛날 이 마을 경치에 끌린 탁발승이 마을 뒤편 언덕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 중이 워낙 게을러서 봄과 여름이면 옷을 벗고 이를 잡기 좋아했으며, 개[犬]까지 잡아먹는 파계행위가 심해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내쫓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내린 용맥 중 하나가 안양산으로 가고, 또 하나는 너릿재로 비룡飛龍해 달리다가 칠구재가 있는 분적산을 세우고 다시 효덕동을 지나 금당산으로 힘차게 낙맥 하니 나쁜 기운은 다 떨쳐내어 고은 자태로 화방산을 만들어 이곳까지 이르고 있다 한다.서광주역이 있는 화개마을에서 출발해 개금산 팔각정인 개금정을 거쳐 매월농장, 전평호수에 이르는 3.5km 구간이 등산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팔각정과 의자, 안내판이 잘 구비돼 있다. 서구의 가장 남쪽에 있는 백마산과 남구의 경계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김목 시인, 동화작가의 ‘서광주역’이라는 시가 있다. 기차역을 보면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서광주역사람들 마음을어디론가 보내기 위해 문이 열렸다. 기차역에 오면떠나간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기인 기적 소리가떠나간 그 사람 마음을여적도 내 마음에 살아있게 한다.   기차역을 지나면봄여름, 갈겨울이 함께 지나간다.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은 건우리들 사랑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나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2011년 4월 20일 김 목)
    2018-05-25 | NO.38
  • 개머머리
    쌍촌동 소삿골 북쪽에 있는 추녀처럼 내민 추녀모팅이 북쪽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2018-05-25 | NO.37
  • 개산제(전평호수)
    서구 매월동 519-1옛날에는 개산, 회산마을 사이로 하천이 흘렀다. 각시봉과 백마산에서 내려온 작은 물줄기가 개산을 지나 개산제로 모여 세하천으로 흘러갔는데 개금산의 작은 물줄기도 회산을 거쳐 개산제로 흘러들었고, 학산사 뒷산과 화방산花芳山 물도 매월제에 모여 개산제로 흘러들었다. 이곳 들판의 야트막한 산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개산제로 흘러든 셈이다. 개산제의 물은 세하천을 거쳐 극락강으로 흘러간다.개산제(전평호수)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이 1568년(43세)에 당시 광주 선도면 회산懷山마을에 살면서 매월과 벽진마을 주민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방축을 만든 것이 시초였다. 원래 명칭은 개산방죽(1879, 1924년 광주읍지)이었다.현재의 개산제(전평호수)는 개산방축을 1943년에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서구 매월동을 비롯해 벽진동 지역의 농토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재해방지를 위해 축조됐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농토가 크게 줄어들자 한때 방치됐지만 1999년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을 통해 수변공원으로 다시 조성됐다.2005년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약칭 공원녹지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저수지는 공원녹지의 범주로 포함됐고, 주제공원의 종류 중 수변공원이 신설됨으로써 공원녹지기본계획에 포함돼 있다. 2006년에 지정된 도시공원이다. 수변공원은 저수지 가운데 인공섬을 사이에 두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목교가 설치됐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게 한데다 자연생태 탐방까지 가능해져 주민들의 힐링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개산제 면적은 46,992㎡, 저수량은 10만 톤에 달하고 있다. 도심 속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개산제(전평호수)를 건너 만나는 공간이 수월당水月堂이다. 수월당은 저수지 서편 고목을 옆으로 하고 자리하고 있는데 회재 박광옥이 선비들과 나라를 걱정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8각 정자였다. 세월이 흘러 퇴락한 정자를 서구가 복원했다. 이 정자에서 회재 박광옥이 기대승, 고경명과 고경순, 이일원, 이군현 등과 시회詩會를 열고 음풍농월을 즐겼다. 시회와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로 이용됐다.이곳은 마을 앞산인 백마산白馬山과 뒷산인 개금산蓋金山이 위치해 있어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백마산은 단순히 도심에 놓인 하나의 산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산 위에서 김세근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왜적에 대항하는 훈련을 했던 곳이다.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도 이곳에 자리해 있다. 이런 유서 깊은 역사적 자취가 서린 공간에 자리한 개산제(전평호수)에는 호수 가득한 연꽃과 빨간 빛깔이 더욱 아름답게 눈에 맺히는 배롱나무들, 그리고 모정과 정자가 설치돼 있어 옛 선현들이 구가했던 시회나 음풍농월 한 토막을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매우 외진 곳은 아니지만 도심생활에 지친 시민들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옛 선비들처럼 10∼20분 정도 공원 한 바퀴를 돌면서 느림의 삶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개산제는 ‘마을 앞 방죽’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옛 이름을 찾아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는 동시에 대동고등학교와 살레시오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만큼 각종 음식점과 커피숍, 그리고 빌라 등이 난맥상을 보이지 않도록 서구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정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수정 2023.11.12. '나주 선도면'을 '광주 선도면'으로
    2018-05-25 | NO.36
  • 계숫봉
    계숫봉:계수봉(桂樹峯)은 쌍촌동과 치평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2018-05-25 | NO.35
  • 권안제
    서구 세하동백마산에서 만귀정으로 가는 길에 왼쪽에는 백마제, 오른쪽에는 권안제가 있다. 권안제는 노랑꽃창포 등 원예식물 식재로 습지의 훼손뿐만 아니라 원예식물의 고사체로 인하여 수질오염이 가속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8-05-25 | NO.34
  • 금당산
    서구 풍암동 광주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은 해발 303.5m로 100m대의 백마산이나 개금산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산등성이를 따라 남구 진월동과 서구 풍암동의 경계에 속하는 산이다. 무등산에서 분적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1번 국도를 거쳐 오른 산이다. 금당산의 지질구조는 백악기 후반 유문암으로 암산이다.풍암동의 풍암楓岩은 금당산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당산과 풍암은 언어학적으로 한 몸이자 지리적으로도 한 몸인 셈이다. 풍암동은 500년 전에 김녕 김씨가 터를 잡았다 한다. 풍암동에는 운리雲裡마을도 있다. 이 운리라는 뜻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만큼 금당산은 아름답다는 의미다. 산림청 선정 2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북쪽으로는 옥녀봉(230m), 서쪽으로는 황새봉(187m)을 거느리고 있다. 등산로가 잘 닦여져 있고, 팔각정과 다목적 쉼터,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다. 풍암호수공원 건너편으로 등산로 입구가 있고 빛고을 산들길 제6구간을 소개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금당산신사金堂山神祠가 현 남쪽 10리에 있다’고 명기돼 있다. 금당金堂은 불교에서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집을 의미한다. 오래 전부터 금당산이라 불렀다. 산 바로 남쪽 밑으로 광주에서 남평가는 길이 있었고, 옥천사(玉泉寺)가 위치한다. 금당산은 옥녀봉과 함께 풍수지리설에서 여성을 지칭한다. 여성의 둔부같이 완만한 모양의 산이라서 옥녀봉玉女峰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음(여성)이 양(남성)보다 과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풍암동 일대는 금당산과 옥녀봉이 남동쪽 햇볕을 가려 그늘짐으로 음기陰氣가 센 편이라는 속설이 전해진다. 산림청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산 이름은 봉화산이 47개로 1위이고, 국사봉이 43개로 2위이며, 옥녀봉이 37개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2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광주와 전라남도에만 80여개가 있다고 한다. 전국의 옥녀봉을 집합시킨다면 수백 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수적으로 가장 많고, 가장 일반적인 산 이름일 지도 모른다.어떻든 이런 음기를 누르기 위해 옥천사玉泉寺를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금당 지명 자체가 음기를 잠재우기 위해 만든 이름이라는 설도 함께 존재한다. 풍수적으로 약점이 있으면 이름이나 숲, 시설 등으로 보완하는 비보 풍수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날 풍암지구에 있는 월드컵 경기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자들이 뛰어 실력을 겨루는 양기가 강한 월드컵 경기장을 음기의 기운이 있는 옥녀봉 근처에 지어졌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로 4강 진출이 가능했다는 덕담이 전해지고 있다.금당산옥천사와 금당정 정자의 '당塘'은 집 당堂자가 아닌, 못 당塘자를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파악할 길 없다. 금당과 한자 명기가 다르게 표현돼 있는 것은 아마 건너편 풍암호수가 있어 이 못을 의미할 수도 있다.등산코스는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에서부터 국민통신 국민산업에 이르는 구간이다. 대표적 정자로는 어르신들의 쉼터이자 바둑 한수로 세월을 낚을 수 있을 듯한 옥녀정(옥녀봉대. 옥녀봉 팔각정)과 금당정, 황새정, 풍암정 등이 있다. 옥녀정 현판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이 글씨를, 백양사 일주문 현판 등을 제작한 목연木然 박원식朴源植이 각刻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품위로우나 현란하지 않는 옥玉이여 부드러히 감싸안으나 탁濁하지 않는 여인이여 늘 무등無等을 우러러 여기 빛고을 사람 저 등等 없는 등等이 되어 온 세상 무등으로 일깨워주기를 염원하옵는 봉이여   또 태현사와 옥천사가 있다. 8경 전망대와 옥녀봉 조금 못가 광주선명학교로 하산하는 길에 약수터가 있으며. 바위전망대와 헬기장이 있는 금당산 정상에서 동성중학교 가는 길에 사각정, 옥천사, 체력단련장이 있다. 황새봉에서 풍암동 SK뷰 아파트로 가는 길에 쉼터가 구비돼 있다. 신암교회에서도 오를 수 있다. 풍암호수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풍암호수공원 건너편 풍암정으로 올라 금당산으로 넘어가는 봉우리는 황새봉이라 한다. 송정리 쪽에서 보면 사월산은 화방산 및 개금산이 제일 앞 선에 위치해 있고, 이선에 금당산이, 제일 뒷선에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매년 새해가 되면 해돋이 명소로 사람들이 오르는 곳이다.등산객이나 시민들이 산책로를 따라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으로 원점 회귀하는 데까지의 거리는 대략 7.83㎞로 3시간 남짓 소요된다. 등산로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산책이나 마실 보다는 등산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 좋다. 관내 100m대의 산과는 다르다. 금당산은 의병으로 활동했던 박광옥朴光玉(1526~1593)과 연관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호를 딴 도로명인 회재로가 풍암정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의 사당 운리사雲裏祠도 풍암동에 위치하고 있다. 박광옥은 우리 지역의 대표문인 중 한 명으로 나주목사 등을 냈다.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박순朴淳, 이이李珥, 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했다.한편 지역대학의 한 지질학자는 이곳을 지질학습장으로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지질학습장 개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지질 분포와 암석학적 기재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금당산 지역은 광주시의 전체 기반을 이루는 넓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쥐라기의 흑운모화강암,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암류(응회암, 래피리, 유문암)와 심성암(미문상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리를 따라 관입한 산성 및 중성 암맥 관찰도 용이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형 요소로는 빙하기에 형성된 U자형의 금당산 형태, 다양한 크기와 방향의 절리, 화산암 지대에서 단애斷崖와 너덜지대(애추崖錐) 등이 관찰되고, 여러 지역에서 토양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8-05-25 | NO.33
  • 금호제
    서구 금호동 676서광주역앞 사거리에서 상무역으로 가는 방향으로 중간쯤 왼쪽에 있다.
    2018-05-25 | NO.32
  • 노인고개
    서구 풍암동노인고개는 이름 때문에 ‘노인老人’으로 생각하기 쉽다. 명칭이 그럴 뿐 노인과는 무관하다. 어느 평범한 도심구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곳이다. 백운동 쪽에서 풍암동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노인고개가 나온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개라는 흔적을 찾기는 어렵게 됐지만 상당히 가파른 형세 때문에 어림잡아 짐작은 할 수 있는 곳이다. 원광대학교한방병원 앞 사거리 일대가 노인고개다. 짚봉산의 끝자락이자 금당산의 초입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노인고개를 중심으로 풍암호수공원과 염주생활체육공원이 인접해 있다. 남구 주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노인고개는 금당산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북쪽으로 내려서 재를 이루고 짚봉산으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서창 방면에서 광주 읍내로 들어오는 지름길인데 지금은 회재로懷齋路로 명칭이 부여돼 있다. 1896년 신설된 지도군수가 서창에서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인 회재 박광옥의 고향인 개산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대목에서 노인고개가 언급된다. 고갯마루가 넓고 평평한 곳이어서 ‘너른덕’이라고 불렸는데 이 명칭이 결국 노인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너른이 노른에서 늘근으로, 늘근에서 노인으로 변한 듯하다’는 풀이다. 옛날에는 주월동 신기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풍암마을로 연결하는 재로 ‘신암고개’라고도 불렸다. 옛날에는 나그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주막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원골’이란 땅이름이 남아 있다. 인근 금당산에는 서당재라 불리는 재도 있다. 노인고개를 기점으로 남구 쪽으로 가면 백운광장이, 풍암지구 쪽으로 행하면 풍암호수공원과 마재마을이, 염주동 방향으로 가면 염주생활체육공원과 짚봉터널이, 금당산 방향으로 가면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이 각각 나온다. 주월교차로에서 노인고개와 마재고개를 지나 나주 광이교차로까지 이어지는 회재로가 지나고 있다.
    2018-05-25 | NO.31
  • 덕산
    서구 덕흥동유덕동의 덕산은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에 동네 사람들은 똥뫼라 불렀다. 해발 30여m에 불과하여 산처럼 보이진 않지만 주변으로 넓고 평탄한 들녘이 펼쳐져 있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덕산이라는 이름에는 ‘큰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전에는 드넓은 들판에 우뚝 솟아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던 듯하다. 지난 수년간 이 산만한 높이의 건물들이 주변에 쭈뼛쭈뼛 들어서면서 지금은 예전만큼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다. 덕산에는 오래된 노거수가 있고 정월대보름(음력 정월 14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 12당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3당산만 남은 듯 하다. 1990년대 초까지 당산제를 지내다 농악을 할만한 사람, 젊은 사람들이 크게 줄어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2018년에 복원했다.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산은 동학농민전쟁과 관련이 깊은 장소다.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거듭된 나주 공략이 연거푸 수포로 돌아가고 북쪽에서는 전봉준의 농민군이 관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연일 날아들었다. 결국 전봉준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뒤 군대를 해산하고 장성 갈재를 거쳐 순창으로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관군은 그의 행적을 쫓아 언제든 갈재를 넘을 기세였다. 이 때 전남지역을 총괄하던 동학지도자 손화중은 농민군을 이끌고 덕산이 머물렀다. 당시 덕산에는 태인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도 있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오던 길을 되밟아 북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이름 없는 유생들과 아전들이 상처 입은 먹잇감에 달려드는 포식자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렇게 공을 세워서라도 보잘 것 없는 직함이라도 하나 꿰차려고 안달이었다. 농민군들이 의지할 곳은 오직 손화중이 장악하고 있던 광주뿐이었다. 나주공략이 실패했지만 그들에겐 아직 덕산에서 진영을 갖출만한 여력이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유진留陣할 무렵은 추운 겨울이었다. 덕산은 살을 에는 북풍을 막아줄 산치고는 너무 작았다. 사방도 툭 터져 있었다. 한여름이라면 모르되 많은 군사가 머물기에는 분명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에 유진한 것은 그간 나주 공략 때 겪은 뼈아픈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1894년 내내 나주는 완강했다. 감영이 있는 전주 공략에도 성공했던 전봉준까지 내려와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나주는 백기를 내걸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방비를 다지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나주에 대한 공략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됐다. 첫 번째는 황룡강변인 선암장터(광산구 호남대 근처)에 본진을 두고 선발대를 나주 접경인 광산구 동곡동의 침산까지 내려 보냈다. 이러한 농민군의 공세에 나주 수성군도 은밀히 야산지대를 파고들어 침산에 이르렀고 벼락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기습을 가했다. 수적 우세를 믿고 방심했던 농민군은 부리나케 황룡강 쪽으로 내달렸고 수성군은 그들을 쫓아 선암나루(호남대 남쪽 강변) 앞까지 몰려왔다. 농민군의 명백한 패배였다. 두 번째 공략은 나주 남쪽에서 이번에도 농민군의 선제로 시작됐다. 무안과 함평 등지에 전갈을 넣어 손화중과 최경선의 군대가 나주 북쪽에 머물며 수성군의 눈을 빼앗는 동안 나주의 약한 지역인 남쪽을 가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수천의 농민군이 기세등등하게 나주 다시면 일대의 세곡을 털어 군량으로 삼고 북상했다. 하지만 기습이라 하기엔 그들의 규모는 너무 컸고 행군도 떠들썩했다. 금세 남쪽에서 농민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나주성에 파다하게 퍼졌고 수성군은 채비를 갖추고 다시면 쪽으로 나갔다. 접전은 고막원천에서 절정에 달했다. 농민군에게는 나주 맛재에서 고막원천에 이르는 비교적 험준한 산세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세는 수가 적지만 화력은 더 센 수성군이 은밀히 접근하는데 유리했다. 그리고 수성군의 위력사격에 놀란 농민군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총탄과 화살에 죽은 이들보다 허겁지겁 퇴각하느라 고막원천에 빠져 익사한 이들이 더 많았다. 이번에도 농민군은 완패했다. 세 번째 공략은 그래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북쪽의 농민군에 의해 다시 시도됐다. 수성군은 여전히 나주성 밖으로 나올 조짐이 없었다. 전략적 거점을 잃을 위험이 없는 한 그들은 나주성이란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손화중이 이끈 농민군은 노안면 남산리까지 들어갔다. 그들은 선발대를 보내 위력정찰을 실시해 나주성의 전력을 가늠해 봤다. 하지만 나주성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금방 역습을 가해 올 기미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밤 12월 남산리에는 수천의 농민군이 이런 분위기에 안도하며 결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추위에 다들 민가에 들어가 한기를 피했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수성군은 야음을 틈타 침투해 들어왔고 총포를 쏘며 달려들었다. 밤의 정적을 깨는 기습에 농민군은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혼비백산했다. 역시 농민군의 패배였다. 그리고 다시 제기하기 불가능하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그래도 마냥 흩어지기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짓눌렀다. 그래서 그들은 사방이 확 트인 이곳 광주의 덕산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영산강 유역에서 농민군의 마지막 유진이었다. 이들은 이후 일부는 능주로, 일부는 장흥으로 갔다. 그리고 한때 남평 관아를 점거하기도 하고 장흥과 영암 병영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장흥 석대들에서 무너졌다. 이후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학살이 뒤따랐다. 지금, 덕산에는 그 마지막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다만, 높다란 언덕 위로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혼미한 기억을 홀로 품고 있을 따름이다.
    2018-05-25 | NO.30
  • 돌고개
    서구 경열로(양동.농성동)돌고개는 서구와 남구의 경계에 놓여있다. 월산동과 농성동, 그리고 양동의 경계에 자리한 돌고개는 지금은 그저 그만한 곳이 됐지만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고개로 기능했다.고개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일정높이를 담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렇지 않더라면 굳이 고개라 했을리 만무하다. 우선 이 지역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돌고개는 까치고개를 먼저 이해해야 접근이 용이하다. 광주시 남구 백운동 까치고개를 거쳐 수박등(10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광주문화방송이 자리한 덕림산 자락 끝자락이다. 이 끝자락에 놓인 고개가 돌고개이기 때문이다. 돌고개의 한 쪽면이 덕림산이고, 또 한 쪽면이 양동초등학교가 있는 제봉산이다. 덕림산은 과거 산으로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산이 개발된 후 도시빈민촌 등을 수용하는 공간이 됐고, 지금은 많은 아파트와 빌라,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심지로 탈바꿈됐다. 제봉산은 옛 광주서부경찰서가 자리한 곳이었다. 서부경찰서는 1970년 1월4일 개소했으며, 1973년 7월 14일 광주서부경찰서로 변경됐다. 그러다 2006년 11월27일 광주시 서구 치평동 1161-4번지로 이전하면서 돌고개 시대를 마감했다. 옛 경찰서 부지는 결국 아파트가 들어섰다. 돌고개 인근에는 경찰서 외에도 광주시 서구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지방자치시대가 열리면서 서구의회도 자리 잡았다. 광주 최대의 재래시장인 양동시장이 능선 아래쪽에 자리잡아 돌고개는 상무지구나 금호지구 등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구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초등학교도 양동초등학교와 농성초등학교, 월산초등학교 등 이 세 학교가 돌고개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현재 광주 도시철도 1호선의 지하철역인 돌고개역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돌고개 남서쪽에 농성보가 자리했는데 보성군수 정화가 막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리안전답으로 농토가 변해 농사가 잘 되자 농성보의 이름을 빌려 농성이라 했다. 농성동은 조선 후기 광주군 군분면에, 구한말에는 광주군 군분면 연례리와 신흥리에, 1914년 광주군 극락면 신례리에 각각 속했다. 1935년 광주부 농성정으로, 1946년 근농동으로 개칭됐다가 1947년 다시 농성동으로 확정됐다. 1973년 농성동은 서부관할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농성1, 2동으로 분동됐고, 1995년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이 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돌고개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돌고개’는 ‘돌’과 ‘고개’의 합성어다. 한자 지명 ‘석현石峴’과 함께 쓰여 대부분 ‘돌[石]과 관련되는 곳으로, ‘돌이 많은 고개’를 의미한다. ‘석령石嶺’으로도 불린다. 광주 돌고개는 지리학자 김경수씨(前 전남대 사대부고 지리교사.향토지리연구소장)가 집필한 ‘광주지리지-풍수 지리와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광주 땅 이야기’(도서출판 향지사)에 보면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이 책 101쪽에는 ‘돌고개’는 ‘석치石峙’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나, 높드리 넘이란 뜻인 ‘달고개’가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기술되고 있다. 돌고개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돼 있으나 광주의 돌고개는 광주만의 돌고개라 할 수 있다.*수정 2023.11.6. 본문 내용 중 군익면을 군분면으로 수정함. 분(盆)자를 이전 자료에서 익(益)자로 혼동하여 오기한 것을 바로 잡음)
    2018-05-25 | NO.29
  • 마재
    서구 세하동 ‘마재’하면 금호동과 풍암동 경계에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공간으로는 시청자미디어센터와 119풍암안전센터가 자리한 곳 일대를 마재마을이라고 부른다. 마재마을은 광주시 서구 서창동 관할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있는 백마산의 말발굽자리에 소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광역시 누리집에도 이와 같은 문구가 언급돼 있다. 이것이 정설의 하나였으나 오늘날에는 잘못 해석된 오류로 지적되고 있다.‘마재’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두루 있지만 창원시와 통합된 경남 마산의 옛 이름이 마재였다. 마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마산馬山이라 한다. 마산이나 말산末山, 두산斗山 등이 모두 같은 ‘마재’나 ‘말재’를 표기한 것으로, 두산이 ‘말재’가 된 데는 한자 두斗가 ‘말 두’자이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분명한 것은 ‘마재’라는 지명이 동물 말이나 말발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마’나 ‘말’은 으뜸, 최고, 최초, 우두머리의 뜻을 지닌 말로, ‘재’는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 됐지만 예전에는 높은 성城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마재’라는 지명은 ‘아주 높은 고개’를 뜻하지만 예전에는 ‘크고 높고 넓은 곳에 자리한 동네’를 가리키는 말로 ‘큰 고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인근 백마산白馬山 역시 동물인 말과는 아무 상관없는 지명이라는 지적도 있다.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현재 마재마을과 마재는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통 시청자미디어센터 일대를 마재마을으로 부르지만 마재는 회재로 백마교차로에서 서창동주민센터와 서창동 우체국, 송학초등학교를 지나 세하동시내버스공영차고지 가는 길에 오른쪽에 있다. 이곳에 마재골이 있다. 세하동시내버스공영차고지를 조금 지나치면 만귀정과 만날 수 있다. 제2순환로를 경계로 마재마을과 마재(고개)는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마재라는 명칭은 정작 마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시청자미디어센터 일대로 통용되고 있다. 풍암마재우체국을 위시로 부영, 리젠시빌 호반, 주은, 송촌파인힐아파트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마재마을의 아파트들이다.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회재 박광옥의 호를 딴 회재로가 지나고 있고 지류처럼 회재로가 가닿는 도로 역시 마재로다. 이 일대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연 ‘마재’임에 틀림없다.
    2018-05-25 | NO.28
  • 마한제
    서구 용두동 503-1마한제는 1944년에 축조됐고 수혜면적은 21ha이며 저수량은 40㎡이다.
    2018-05-25 | NO.27
  • 마현제
    서구 용두동 2334신용마현경로당 인근에 있다.
    2018-05-25 | NO.26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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