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공간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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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금산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북쪽풍암 유통단지와 전평호수, 서광주역을 품고 있는 듯한 개금산은 매월동 회산마을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백마산과 마주보고 있다. 개금산蓋金山은 ‘아름답고 돈이 많이 모인다 하여 마치 금으로 덮인 것 같다’는 뜻을 갖고 있다. 높이는 179.2m로 일명 계관산鷄冠山으로 불린다. 산봉우리가 세 갈래로 크게 갈라져 ‘마치 닭의 볏[鷄冠]과 같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산의 경사가 급해 벼랑산, 깔끄뫼, 깨그뫼, 개금산開金山이 됐다고 전해진다. 별명으로 화개산 또는 개감산蓋甘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의 남쪽은 주로 솔밭으로 이뤄지고 경사가 완만해 그 자락에 많은 민가와 음식업소가 들어서 있지만 근방 수려한 경관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쉬었다 가곤 한다. 이 산 뒷면 북쪽은 광주 도심이 가까워 전망이 좋고 산 끝자락에는 화개마을이라는 조그만 취락이 있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가까운 언덕에 매화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데서 지어졌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이 산은 녹지자연이 7∼8등급에 해당해 식생이 양호하다. 남서사면에 대동고등학교와 살레시오초등학교가 있고, 그 아래는 호수공원으로 꾸며진 전평제가 있다. 동쪽 자락의 회산마을은 임진왜란 때 공신이자 나주목사 등을 지낸 조선조 명종. 선조 때의 문신 회재懷齊 박광옥朴光玉(1526∼1592)의 탯자리가 있던 곳이다. 박광옥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실시하는 등 주민들을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 박광옥의 딸과 관련하여 주역각시의 정절에 관한 설화도 친근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문인 회재 박광옥에게는 영특한 딸이 하나 있었다. 여자지만 학업은 사서삼경에 통달했고 짐승의 말소리까지 알아듣는 신통한 재주를 지녔었다. 그녀의 나이가 15~16세가 되자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노정(盧楨)의 아들과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 밤 쥐들이 천정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는 것이 화근이 되어 시집에서 퇴박을 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옛날 이 마을 경치에 끌린 탁발승이 마을 뒤편 언덕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 중이 워낙 게을러서 봄과 여름이면 옷을 벗고 이를 잡기 좋아했으며, 개[犬]까지 잡아먹는 파계행위가 심해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내쫓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무등산에서 장불재로 내린 용맥 중 하나가 안양산으로 가고, 또 하나는 너릿재로 비룡飛龍해 달리다가 칠구재가 있는 분적산을 세우고 다시 효덕동을 지나 금당산으로 힘차게 낙맥 하니 나쁜 기운은 다 떨쳐내어 고은 자태로 화방산을 만들어 이곳까지 이르고 있다 한다.서광주역이 있는 화개마을에서 출발해 개금산 팔각정인 개금정을 거쳐 매월농장, 전평호수에 이르는 3.5km 구간이 등산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팔각정과 의자, 안내판이 잘 구비돼 있다. 서구의 가장 남쪽에 있는 백마산과 남구의 경계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김목 시인, 동화작가의 ‘서광주역’이라는 시가 있다. 기차역을 보면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서광주역사람들 마음을어디론가 보내기 위해 문이 열렸다. 기차역에 오면떠나간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기인 기적 소리가떠나간 그 사람 마음을여적도 내 마음에 살아있게 한다.   기차역을 지나면봄여름, 갈겨울이 함께 지나간다.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은 건우리들 사랑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나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2011년 4월 20일 김 목)
    2018-05-25 | NO.21
  • 개머머리
    쌍촌동 소삿골 북쪽에 있는 추녀처럼 내민 추녀모팅이 북쪽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2018-05-25 | NO.20
  • 계숫봉
    계숫봉:계수봉(桂樹峯)은 쌍촌동과 치평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2018-05-25 | NO.19
  • 금당산
    서구 풍암동 광주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은 해발 303.5m로 100m대의 백마산이나 개금산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산등성이를 따라 남구 진월동과 서구 풍암동의 경계에 속하는 산이다. 무등산에서 분적산을 거쳐 북서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1번 국도를 거쳐 오른 산이다. 금당산의 지질구조는 백악기 후반 유문암으로 암산이다.풍암동의 풍암楓岩은 금당산의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당산과 풍암은 언어학적으로 한 몸이자 지리적으로도 한 몸인 셈이다. 풍암동은 500년 전에 김녕 김씨가 터를 잡았다 한다. 풍암동에는 운리雲裡마을도 있다. 이 운리라는 뜻은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만큼 금당산은 아름답다는 의미다. 산림청 선정 2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북쪽으로는 옥녀봉(230m), 서쪽으로는 황새봉(187m)을 거느리고 있다. 등산로가 잘 닦여져 있고, 팔각정과 다목적 쉼터,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다. 풍암호수공원 건너편으로 등산로 입구가 있고 빛고을 산들길 제6구간을 소개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금당산신사金堂山神祠가 현 남쪽 10리에 있다’고 명기돼 있다. 금당金堂은 불교에서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집을 의미한다. 오래 전부터 금당산이라 불렀다. 산 바로 남쪽 밑으로 광주에서 남평가는 길이 있었고, 옥천사(玉泉寺)가 위치한다. 금당산은 옥녀봉과 함께 풍수지리설에서 여성을 지칭한다. 여성의 둔부같이 완만한 모양의 산이라서 옥녀봉玉女峰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음(여성)이 양(남성)보다 과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풍암동 일대는 금당산과 옥녀봉이 남동쪽 햇볕을 가려 그늘짐으로 음기陰氣가 센 편이라는 속설이 전해진다. 산림청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산 이름은 봉화산이 47개로 1위이고, 국사봉이 43개로 2위이며, 옥녀봉이 37개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2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광주와 전라남도에만 80여개가 있다고 한다. 전국의 옥녀봉을 집합시킨다면 수백 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수적으로 가장 많고, 가장 일반적인 산 이름일 지도 모른다.어떻든 이런 음기를 누르기 위해 옥천사玉泉寺를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금당 지명 자체가 음기를 잠재우기 위해 만든 이름이라는 설도 함께 존재한다. 풍수적으로 약점이 있으면 이름이나 숲, 시설 등으로 보완하는 비보 풍수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날 풍암지구에 있는 월드컵 경기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자들이 뛰어 실력을 겨루는 양기가 강한 월드컵 경기장을 음기의 기운이 있는 옥녀봉 근처에 지어졌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로 4강 진출이 가능했다는 덕담이 전해지고 있다.금당산옥천사와 금당정 정자의 '당塘'은 집 당堂자가 아닌, 못 당塘자를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파악할 길 없다. 금당과 한자 명기가 다르게 표현돼 있는 것은 아마 건너편 풍암호수가 있어 이 못을 의미할 수도 있다.등산코스는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에서부터 국민통신 국민산업에 이르는 구간이다. 대표적 정자로는 어르신들의 쉼터이자 바둑 한수로 세월을 낚을 수 있을 듯한 옥녀정(옥녀봉대. 옥녀봉 팔각정)과 금당정, 황새정, 풍암정 등이 있다. 옥녀정 현판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이 글씨를, 백양사 일주문 현판 등을 제작한 목연木然 박원식朴源植이 각刻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품위로우나 현란하지 않는 옥玉이여 부드러히 감싸안으나 탁濁하지 않는 여인이여 늘 무등無等을 우러러 여기 빛고을 사람 저 등等 없는 등等이 되어 온 세상 무등으로 일깨워주기를 염원하옵는 봉이여   또 태현사와 옥천사가 있다. 8경 전망대와 옥녀봉 조금 못가 광주선명학교로 하산하는 길에 약수터가 있으며. 바위전망대와 헬기장이 있는 금당산 정상에서 동성중학교 가는 길에 사각정, 옥천사, 체력단련장이 있다. 황새봉에서 풍암동 SK뷰 아파트로 가는 길에 쉼터가 구비돼 있다. 신암교회에서도 오를 수 있다. 풍암호수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풍암호수공원 건너편 풍암정으로 올라 금당산으로 넘어가는 봉우리는 황새봉이라 한다. 송정리 쪽에서 보면 사월산은 화방산 및 개금산이 제일 앞 선에 위치해 있고, 이선에 금당산이, 제일 뒷선에 무등산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매년 새해가 되면 해돋이 명소로 사람들이 오르는 곳이다.등산객이나 시민들이 산책로를 따라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으로 원점 회귀하는 데까지의 거리는 대략 7.83㎞로 3시간 남짓 소요된다. 등산로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산책이나 마실 보다는 등산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 좋다. 관내 100m대의 산과는 다르다. 금당산은 의병으로 활동했던 박광옥朴光玉(1526~1593)과 연관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호를 딴 도로명인 회재로가 풍암정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의 사당 운리사雲裏祠도 풍암동에 위치하고 있다. 박광옥은 우리 지역의 대표문인 중 한 명으로 나주목사 등을 냈다.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박순朴淳, 이이李珥, 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했다.한편 지역대학의 한 지질학자는 이곳을 지질학습장으로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지질학습장 개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지질 분포와 암석학적 기재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금당산 지역은 광주시의 전체 기반을 이루는 넓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쥐라기의 흑운모화강암,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암류(응회암, 래피리, 유문암)와 심성암(미문상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리를 따라 관입한 산성 및 중성 암맥 관찰도 용이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형 요소로는 빙하기에 형성된 U자형의 금당산 형태, 다양한 크기와 방향의 절리, 화산암 지대에서 단애斷崖와 너덜지대(애추崖錐) 등이 관찰되고, 여러 지역에서 토양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8-05-25 | NO.18
  • 노인고개
    서구 풍암동노인고개는 이름 때문에 ‘노인老人’으로 생각하기 쉽다. 명칭이 그럴 뿐 노인과는 무관하다. 어느 평범한 도심구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곳이다. 백운동 쪽에서 풍암동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노인고개가 나온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개라는 흔적을 찾기는 어렵게 됐지만 상당히 가파른 형세 때문에 어림잡아 짐작은 할 수 있는 곳이다. 원광대학교한방병원 앞 사거리 일대가 노인고개다. 짚봉산의 끝자락이자 금당산의 초입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노인고개를 중심으로 풍암호수공원과 염주생활체육공원이 인접해 있다. 남구 주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노인고개는 금당산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북쪽으로 내려서 재를 이루고 짚봉산으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서창 방면에서 광주 읍내로 들어오는 지름길인데 지금은 회재로懷齋路로 명칭이 부여돼 있다. 1896년 신설된 지도군수가 서창에서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인 회재 박광옥의 고향인 개산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대목에서 노인고개가 언급된다. 고갯마루가 넓고 평평한 곳이어서 ‘너른덕’이라고 불렸는데 이 명칭이 결국 노인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너른이 노른에서 늘근으로, 늘근에서 노인으로 변한 듯하다’는 풀이다. 옛날에는 주월동 신기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풍암마을로 연결하는 재로 ‘신암고개’라고도 불렸다. 옛날에는 나그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주막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원골’이란 땅이름이 남아 있다. 인근 금당산에는 서당재라 불리는 재도 있다. 노인고개를 기점으로 남구 쪽으로 가면 백운광장이, 풍암지구 쪽으로 행하면 풍암호수공원과 마재마을이, 염주동 방향으로 가면 염주생활체육공원과 짚봉터널이, 금당산 방향으로 가면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이 각각 나온다. 주월교차로에서 노인고개와 마재고개를 지나 나주 광이교차로까지 이어지는 회재로가 지나고 있다.
    2018-05-25 | NO.17
  • 덕산
    서구 덕흥동유덕동의 덕산은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에 동네 사람들은 똥뫼라 불렀다. 해발 30여m에 불과하여 산처럼 보이진 않지만 주변으로 넓고 평탄한 들녘이 펼쳐져 있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덕산이라는 이름에는 ‘큰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전에는 드넓은 들판에 우뚝 솟아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던 듯하다. 지난 수년간 이 산만한 높이의 건물들이 주변에 쭈뼛쭈뼛 들어서면서 지금은 예전만큼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다. 덕산에는 오래된 노거수가 있고 정월대보름(음력 정월 14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 12당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3당산만 남은 듯 하다. 1990년대 초까지 당산제를 지내다 농악을 할만한 사람, 젊은 사람들이 크게 줄어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2018년에 복원했다.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산은 동학농민전쟁과 관련이 깊은 장소다. 1894년 12월 동학농민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거듭된 나주 공략이 연거푸 수포로 돌아가고 북쪽에서는 전봉준의 농민군이 관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연일 날아들었다. 결국 전봉준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뒤 군대를 해산하고 장성 갈재를 거쳐 순창으로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관군은 그의 행적을 쫓아 언제든 갈재를 넘을 기세였다. 이 때 전남지역을 총괄하던 동학지도자 손화중은 농민군을 이끌고 덕산이 머물렀다. 당시 덕산에는 태인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도 있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오던 길을 되밟아 북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이름 없는 유생들과 아전들이 상처 입은 먹잇감에 달려드는 포식자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렇게 공을 세워서라도 보잘 것 없는 직함이라도 하나 꿰차려고 안달이었다. 농민군들이 의지할 곳은 오직 손화중이 장악하고 있던 광주뿐이었다. 나주공략이 실패했지만 그들에겐 아직 덕산에서 진영을 갖출만한 여력이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유진留陣할 무렵은 추운 겨울이었다. 덕산은 살을 에는 북풍을 막아줄 산치고는 너무 작았다. 사방도 툭 터져 있었다. 한여름이라면 모르되 많은 군사가 머물기에는 분명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에 유진한 것은 그간 나주 공략 때 겪은 뼈아픈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1894년 내내 나주는 완강했다. 감영이 있는 전주 공략에도 성공했던 전봉준까지 내려와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나주는 백기를 내걸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방비를 다지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나주에 대한 공략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됐다. 첫 번째는 황룡강변인 선암장터(광산구 호남대 근처)에 본진을 두고 선발대를 나주 접경인 광산구 동곡동의 침산까지 내려 보냈다. 이러한 농민군의 공세에 나주 수성군도 은밀히 야산지대를 파고들어 침산에 이르렀고 벼락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기습을 가했다. 수적 우세를 믿고 방심했던 농민군은 부리나케 황룡강 쪽으로 내달렸고 수성군은 그들을 쫓아 선암나루(호남대 남쪽 강변) 앞까지 몰려왔다. 농민군의 명백한 패배였다. 두 번째 공략은 나주 남쪽에서 이번에도 농민군의 선제로 시작됐다. 무안과 함평 등지에 전갈을 넣어 손화중과 최경선의 군대가 나주 북쪽에 머물며 수성군의 눈을 빼앗는 동안 나주의 약한 지역인 남쪽을 가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수천의 농민군이 기세등등하게 나주 다시면 일대의 세곡을 털어 군량으로 삼고 북상했다. 하지만 기습이라 하기엔 그들의 규모는 너무 컸고 행군도 떠들썩했다. 금세 남쪽에서 농민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나주성에 파다하게 퍼졌고 수성군은 채비를 갖추고 다시면 쪽으로 나갔다. 접전은 고막원천에서 절정에 달했다. 농민군에게는 나주 맛재에서 고막원천에 이르는 비교적 험준한 산세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산세는 수가 적지만 화력은 더 센 수성군이 은밀히 접근하는데 유리했다. 그리고 수성군의 위력사격에 놀란 농민군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총탄과 화살에 죽은 이들보다 허겁지겁 퇴각하느라 고막원천에 빠져 익사한 이들이 더 많았다. 이번에도 농민군은 완패했다. 세 번째 공략은 그래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북쪽의 농민군에 의해 다시 시도됐다. 수성군은 여전히 나주성 밖으로 나올 조짐이 없었다. 전략적 거점을 잃을 위험이 없는 한 그들은 나주성이란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손화중이 이끈 농민군은 노안면 남산리까지 들어갔다. 그들은 선발대를 보내 위력정찰을 실시해 나주성의 전력을 가늠해 봤다. 하지만 나주성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금방 역습을 가해 올 기미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밤 12월 남산리에는 수천의 농민군이 이런 분위기에 안도하며 결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추위에 다들 민가에 들어가 한기를 피했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수성군은 야음을 틈타 침투해 들어왔고 총포를 쏘며 달려들었다. 밤의 정적을 깨는 기습에 농민군은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혼비백산했다. 역시 농민군의 패배였다. 그리고 다시 제기하기 불가능하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그래도 마냥 흩어지기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짓눌렀다. 그래서 그들은 사방이 확 트인 이곳 광주의 덕산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영산강 유역에서 농민군의 마지막 유진이었다. 이들은 이후 일부는 능주로, 일부는 장흥으로 갔다. 그리고 한때 남평 관아를 점거하기도 하고 장흥과 영암 병영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장흥 석대들에서 무너졌다. 이후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학살이 뒤따랐다. 지금, 덕산에는 그 마지막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다만, 높다란 언덕 위로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혼미한 기억을 홀로 품고 있을 따름이다.
    2018-05-25 | NO.16
  • 돌고개
    서구 경열로(양동.농성동)돌고개는 서구와 남구의 경계에 놓여있다. 월산동과 농성동, 그리고 양동의 경계에 자리한 돌고개는 지금은 그저 그만한 곳이 됐지만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고개로 기능했다.고개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일정높이를 담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렇지 않더라면 굳이 고개라 했을리 만무하다. 우선 이 지역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돌고개는 까치고개를 먼저 이해해야 접근이 용이하다. 광주시 남구 백운동 까치고개를 거쳐 수박등(10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광주문화방송이 자리한 덕림산 자락 끝자락이다. 이 끝자락에 놓인 고개가 돌고개이기 때문이다. 돌고개의 한 쪽면이 덕림산이고, 또 한 쪽면이 양동초등학교가 있는 제봉산이다. 덕림산은 과거 산으로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산이 개발된 후 도시빈민촌 등을 수용하는 공간이 됐고, 지금은 많은 아파트와 빌라,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심지로 탈바꿈됐다. 제봉산은 옛 광주서부경찰서가 자리한 곳이었다. 서부경찰서는 1970년 1월4일 개소했으며, 1973년 7월 14일 광주서부경찰서로 변경됐다. 그러다 2006년 11월27일 광주시 서구 치평동 1161-4번지로 이전하면서 돌고개 시대를 마감했다. 옛 경찰서 부지는 결국 아파트가 들어섰다. 돌고개 인근에는 경찰서 외에도 광주시 서구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지방자치시대가 열리면서 서구의회도 자리 잡았다. 광주 최대의 재래시장인 양동시장이 능선 아래쪽에 자리잡아 돌고개는 상무지구나 금호지구 등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구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초등학교도 양동초등학교와 농성초등학교, 월산초등학교 등 이 세 학교가 돌고개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현재 광주 도시철도 1호선의 지하철역인 돌고개역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돌고개 남서쪽에 농성보가 자리했는데 보성군수 정화가 막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리안전답으로 농토가 변해 농사가 잘 되자 농성보의 이름을 빌려 농성이라 했다. 농성동은 조선 후기 광주군 군익면에, 구한말에는 광주군 군익면 연례리와 신흥리에, 1914년 광주군 극락면 신례리에 각각 속했다. 1935년 광주부 농성정으로, 1946년 근농동으로 개칭됐다가 1947년 다시 농성동으로 확정됐다. 1973년 농성동은 서부관할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농성1, 2동으로 분동됐고, 1995년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이 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돌고개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돌고개’는 ‘돌’과 ‘고개’의 합성어다. 한자 지명 ‘석현石峴’과 함께 쓰여 대부분 ‘돌[石]과 관련되는 곳으로, ‘돌이 많은 고개’를 의미한다. ‘석령石嶺’으로도 불린다. 광주 돌고개는 지리학자 김경수씨(前 전남대 사대부고 지리교사.향토지리연구소장)가 집필한 ‘광주지리지-풍수 지리와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광주 땅 이야기’(도서출판 향지사)에 보면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이 책 101쪽에는 ‘돌고개’는 ‘석치石峙’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나, 높드리 넘이란 뜻인 ‘달고개’가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기술되고 있다. 돌고개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돼 있으나 광주의 돌고개는 광주만의 돌고개라 할 수 있다.
    2018-05-25 | NO.15
  • 마재
    서구 세하동 ‘마재’하면 금호동과 풍암동 경계에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공간으로는 시청자미디어센터와 119풍암안전센터가 자리한 곳 일대를 마재마을이라고 부른다. 마재마을은 광주시 서구 서창동 관할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있는 백마산의 말발굽자리에 소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광역시 누리집에도 이와 같은 문구가 언급돼 있다. 이것이 정설의 하나였으나 오늘날에는 잘못 해석된 오류로 지적되고 있다.‘마재’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두루 있지만 창원시와 통합된 경남 마산의 옛 이름이 마재였다. 마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마산馬山이라 한다. 마산이나 말산末山, 두산斗山 등이 모두 같은 ‘마재’나 ‘말재’를 표기한 것으로, 두산이 ‘말재’가 된 데는 한자 두斗가 ‘말 두’자이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분명한 것은 ‘마재’라는 지명이 동물 말이나 말발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마’나 ‘말’은 으뜸, 최고, 최초, 우두머리의 뜻을 지닌 말로, ‘재’는 고개를 나타내는 말이 됐지만 예전에는 높은 성城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마재’라는 지명은 ‘아주 높은 고개’를 뜻하지만 예전에는 ‘크고 높고 넓은 곳에 자리한 동네’를 가리키는 말로 ‘큰 고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인근 백마산白馬山 역시 동물인 말과는 아무 상관없는 지명이라는 지적도 있다.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현재 마재마을과 마재는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통 시청자미디어센터 일대를 마재마을으로 부르지만 마재는 회재로 백마교차로에서 서창동주민센터와 서창동 우체국, 송학초등학교를 지나 세하동시내버스공영차고지 가는 길에 오른쪽에 있다. 이곳에 마재골이 있다. 세하동시내버스공영차고지를 조금 지나치면 만귀정과 만날 수 있다. 제2순환로를 경계로 마재마을과 마재(고개)는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마재라는 명칭은 정작 마재가 있는 곳이 아니라 시청자미디어센터 일대로 통용되고 있다. 풍암마재우체국을 위시로 부영, 리젠시빌 호반, 주은, 송촌파인힐아파트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두 마재마을의 아파트들이다.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회재 박광옥의 호를 딴 회재로가 지나고 있고 지류처럼 회재로가 가닿는 도로 역시 마재로다. 이 일대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연 ‘마재’임에 틀림없다.
    2018-05-25 | NO.14
  • 모장재
    서구 세하동모장재는 지도를 펴놓고 보면 만귀정과 백마산, 서광주역의 한 가운데쯤 자리하고 있다. 모장재는 순재와 마찬가지로 백마산 일대에 있는 고개다. 송학산과 개금산 사이에 있는 백마산은 현재 광주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광산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영산강 너머 평야지대로 연결되던 통로 쯤에 해당된다. 권안제 옆 능선에 자리한 모장재는 산을 넘나드는 역할을 한 순재와 달리 산자락 아래 마을과 마을의 왕래에 더 요긴한 통로 역할을 했다. 정확히는 세하동 저수지인 권안제 아래 자락에 위치해 있다. 동하마을 주민들에게 모장재를 물었더니 대다수 젊은 층에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정자에 모여 있던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분이 겨우 기억해냈을 뿐이다. 손으로 정확히 가리키면서 ‘저 곳이 옛부터 모장재로 불리던 곳이었다’고 했다. 비포장 길로 조금 들어갔더니 길은 끊겼고 묘소를 지나 언덕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곳이 모장재였다. 모장재가 돌고개나 마재처럼 대로변이나 아스팔트도로로 편입됐더라면 시민들에게 기억됐을 것이다. 안내이정표라도 세워놓으면 좋으련만 백마산 숲유치원 쪽 산자락 산길에 불과해 점차 그 존재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행정의 손길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모장재는 동하마을을 예로 들면 동하마을에서 매월자연농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2018-05-25 | NO.13
  • 백마산
    서구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백마산은 서구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화방산을 거쳐 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 동편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서 솟아있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광주공항과 송정리 일대가 조망된다. 개금산을 마주보고 있으며 해발고도는 162.1m다. 백마산으로 불리는 설은 대략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중종.연산군 때 전라도사와 담양부사를 지낸 조선 중기 문신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과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다. 박상의 부친이 충청도 대덕 와동에서 처갓집(정지 장군 손녀)을 따라 마땅히 거처할 곳을 정하기 위해 오던 중 장성 갈재 주막에서 꿈을 꾸었는데 입암산 산신령께서 흰 말 두 마리를 내어주면서 하얀 말이 멈추는 곳에 정착하라 했다 한다. 그런데 백마가 서창 방하동 방마산에 이르러 더 이상의 이동을 멈추었다. 그래서 원래 방마산이라 불렸는데 이 백마 사건 이후 백마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하나는 대동여지도를 통해 유추되는 부분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송악 출신의 호족으로 궁예 밑에서 세력을 키우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이 진을 쳤다는 왕조대王祖臺가 표기돼 있는데 그 터가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뒷산과 이곳 백마산이라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우뚝 선 뫼’로 몰매→말매→마산→백마산으로 변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산은 서창동 동사무소가 자리한 세하동 세동마을 뒤에 있다. 임란왜란 의병장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이 조선조 중기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마륜동을 떠나 거주하기 위해 들어선 곳으로 그 행자를 따서 부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이 세동이 됐는데 세동마을의 병풍 같은 역할을 한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으나 그 모습이 새끼 말을 거느린 어미 말을 닮아 더욱 친근감을 안겨준다. 그 말의 입이 닿는 듯한 곳에 송학초등학교가 있다. 어미말과 새끼말 사이가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수려한 곳이었다. 항간에는 백마산이 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지역 명칭에 따른 오류라는 지적이다. 세동마을을 언급할 때는 김세근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김세근 장군은 조선 선조 때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백마산에 장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켜 의병으로 키워냈다. 이 의병 300명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출전, 나중에 관군 200명까지 규합해 충남 금산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 장군과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1592년 7월10일 순국했다. 김세근 장군이 장정들을 모아 의병들을 키워냈던 군사훈련장이 바로 이곳 백마산이다. 그리고 이 훈련장이 자리한 골짜기를 수련골이라 부른다. 또 산 정상에 조그만 암굴이 있는데 김세근 장군이 무더운 여름철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장수골로 불린다.동하마을에 있는 담에 거석(巨石)이 끼어 있다. 백마산 김장사(세근)와 무등산 김장사(덕령) 간 힘겨루기를 하여 백마산 장사가 이겼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바위이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과 함께 금산에서 순절한 김세근은 불암마을 학산사(鶴山祠)에 배향되었다.세동마을에서 산을 넘어 매월 사동마을(절골)로 넘어가는 곳에 가파른 고개 하나가 있다. 그런데 이 고개에는 몹시 슬프고 외설스러운 설화 하나가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초 일본인과의 상종이 싫어 집을 떠나 전국을 방랑하는 어느 마을 양반집 남매가 있었다. 이들이 어쩌다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앞서 가는 누이의 치마가 갑자기 일어난 회오리바람에 말려 감아 오른 바람에 하체가 드러났다. 이를 본 동생은 순간 욕정을 느껴 큰 나무 밑에 숨어 신음을 하다가 인륜을 벗어난 자기 행동을 하고 심한 자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 누이는 뒤쳐진 동생이 오지 않자 용변 때문이러니 하고 정상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동생의 기척이 없자 다시 내려가서 보니 동생이 혀를 깨물고 죽어있었다. 그것을 본 누이도 그 자리에서 같이 죽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서려 있다. 서창동사무소에서 백마산을 타고 정상을 지나 매월동 개산호수(전평호수)로 넘어가는 길의 왼쪽에 자리한 봉우리가 각시봉이다. 각시봉은 부부가 함께 오르면 부부 금술이 좋아진다고 한다. 인근에 백마제와 권안제라는 작은 못이 있다.백마산은 도심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보니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개산호수에서 출발했을 경우 백마정을 거쳐 백마산 전망대, 팔각정, 세동마을을 오가는 코스를 통해 서창들녘을 바라보며 느린 산행을 즐겨보는 것도 또 다른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2018-05-25 | NO.12
  • 백석산
    서구 금호동과 마륵동 경계서구에는 백白자로 시작하는 산이 많다. 백마산이 있고, 백일지구라고 해서 붙여진 백일산이 있다. 그리고 백석산까지 있으니 서구는 유난히 ‘백’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백석산은 금호동과 마륵동의 경계에 자리한 산으로 해발 79.8m로 채 100m가 안 되는 야트막한 구릉이다. 이처럼 야트막한 산에도 소소한 일상과 역사가 스며있다. 이 일대에는 운천호수와 사당인 병천사, 사찰로는 조계종 향림사, 태고종 운천사, 천태종 금광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도심 속 산책과 등산 모두를 겸할 수 있는 공간 중의 하나다. 백석산은 마륵동과 금호동의 경계에 자리한 산이라고 설명하지만 쉽게 이해하자면 서구 금호동 코아루아파트나 푸르지오아파트 뒷산이라거나 한국불교 태고종 광주전남교구 종무원 운천사 뒷산이라고 하면 빨리 알아듣는다. 운천사는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자리한 사찰이다. 운천사는 선암사 말사로 처음부터 운천사였던 것은 아니고 산 이름을 따서 백석사라 이름이었던 때도 있었다. 광복 후 태고종 종정을 지낸 해남 대흥사 주지였던 응송 박영희 스님이 이 절에서 생활하면서 운천저수지 위에 있는 절이라 해서 운천사라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산 중간 허리쯤에 해당하는 곳에 인도와 차도를 겸한 도로가 놓여 있다.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와 상가 등이 밀집돼 양 지역을 왕래할 수 있는 길목으로 사용되고 있고 운천사를 끼고 돌아가면 그 길목 중간쯤에 효열부관산임씨기행비孝烈婦冠山任氏紀行碑이라는 효열문孝烈門이 하나 서 있다. 산이 잘린 부분은 인도와 차도가 지나기 때문에 작은 연육교로 연결돼 있어 등산을 끊어지지 않고 진행할 수 있다. 능선을 연결해놓아 향림사나 운천호수 방향, 그리고 상무초 방향으로 자연스레 오갈 수 있다. 산행길은 아담하다. 산행 옆으로 번갈아가며 시누대숲이 형성돼 제법 운치가 있다. 백석산 정상 일대는 마륵공원 지역으로 금호정과 백석정 등 정자가 들어서 있고, 700m에 이르는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이 산 정상에 오르면 서창, 풍암, 상무, 중앙공원, 대촌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2007년 백석산 벚꽃거리가 조성되었다. KBC에서 ‘좋은이웃 밝은동네’ 대상을 수상한 곳이다.일제강점기 직전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를 보면 벽진나루에서 백석산 중턱고개를 넘으면 심우곡(尋牛谷)이란 동네 표지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길 따라 상무동 여의산 기슭 노치(老峙)마을로 가고 동쪽으로 풍암동 노인고개에 이르는 길이 그려져 있다. 전통 촌락도 엄연히 존재했으나 급격한 도시화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산 남쪽에 만호마을, 동쪽에 금부마을, 병천사秉天祠가 자리한 일대에 심곡心谷마을 등을 들 수 있다. 금호마을에 있는 저수지가 금호제로 서쪽에 상이용사 자활촌이 자리 잡았으나 지금은 주인이 모두 바뀌었다. 본디 백석산 남쪽동네 금호동은 전주 이씨들 동네로 이곳 출신이 전남도 교육감을 지낸 이양우씨이다. 이 산의 동쪽 동네가 금부로 수원 백씨들이 살았다. 충주 지씨들의 병천사가 있는 동네가 본디 심곡으로 순흥 안씨들 동네였다. 근래 심곡에서 만호로 가는 길목에 조계종 염주사가 자리 잡고 있다. 2019.7.4. 수정
    2018-05-25 | NO.11
  • 백일산
    서구 화정동‘친일 잔재’라는 이유로 논란이 됐던 ‘백일산’이 여전히 명칭 변경 없이 ‘백일산’ 으로 불리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상무대 이전 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지금의 화정4동에 ‘백일택지개발지구’ 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되면서 이 주변에 들어서는 도로, 학교, 공원 등에 백일초등학교, 백일로(학생독립로), 백일어린이공원(학생독립어린이공원) 등의 공식 명칭이 붙여졌다.‘백일’ 명칭의 시원이 된 김백일은 1951년 경기도 시흥시에 있던 육군보병학교가 광주 상무대로 이전한 후 초대 육군보병학교장이었다. 1930년대 조선독립운동가를 진압한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으로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의 명단에 등재된 친일파다. ‘백일산’은 그냥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지 공식 명칭이 아니다.
    2018-05-25 | NO.10
  • 봉황산
    서구 용두동과 남구 압촌동광주 무등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수레바위산 - 소룡봉 - 분적산 - 금당산을 지나 화방산 - 송학산 - 봉황산 - 등룡산으로 이어지다가 승촌에서 영산강을 만나 끝을 맺는데 그중에 봉황산은 167.8m이다. 서창과 대촌의 중간에 있으면서 눌재로를 사이에 두고 송학산과 마주보는 산이다. 해동지도와 비변사인 방안지도에 봉황산이 그려져 있다. 남구 석정마을의 배산으로 부엉이 울음이 들린다하여 일명 ‘부엉산’이라고도 한다. 산 밑 독정이에 1864년경에 덕암 나도규(羅燾圭)가 지냈다는 남덕정(覽德亭)이 있다. 남덕은 봉황의 다른 표현이다. 봉황산에는 어느 장군이 지나가면서 손과 발자국을 남겼다는 장군바위와 덕석모양의 덕석바위가 있다. 석정마을에는 명천(鳴泉)과 칠암(七岩)이 있다.황룡강 가까이 자리잡은 봉황산에는 현와 고광선 선생이 인근의 수많은 문인들을 길러낸 봉산정사라는 강학당이 있었다. 고광선이 주로 기거하며 책을 읽었던 엄이재도 있다.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봉산사를 지었다. 봉산사는 후손들이 찾지 않아 지금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았다. 봉황산 아래에는 구룡마을과 봉학마을로 이어진다. 구룡마을에서 호남 거부인 송원그룹 고제철 회장이 배출되고 봉학마을에선 국중인물(國中人物)의 반열에 오른 김동신 전 국방부장관이 배출됐다. 또 시장 및 교육감 등 요직에 오른 인물도 많다. 풍수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무등산으로 부터 발원해 내룡(來龍)한 용맥(산맥의 줄기)이 화순으로 통하는 너릿재를 돌아 광주에서는 무등산 다음으로 높다는 분적산을 일으켜 세우고 화산마을 가까운 제2순환도로로 낙맥한 연후에 기룡(起龍)하고 화룡(산맥이 좌우로 선회함)해 금당산을 세운 뒤 금당산 줄기가 절골 가까운 학산(鶴山)을 세운 다음 서남방으로 다시 회룡해서 하늘높이 치솟아 드디어 명산인 봉황산을 일으켰다. 그런 연후에 그 중 하나의 지맥(가지 쳐 나누 듯 산맥이 갈래 지워 나아감)이 봉학마을로 내려앉아 토성체(土星體·봉우리가 일자형의 산)로 마무리한 뒤 꿈틀꿈틀 살아움직이는 산맥이 휘돌아 안착한 곳에 평범한 주택이 동남향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빈집이 있었다. 비어있는 그 주택지가 혈적(기를 담고 내려온 산맥이 그 기를 서리게 한 곳)이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과 믿음으로 그 마을에 오래 살아온 어른에게 물으니 “그 집이 바로 4성 장군과 국방부장관이 태어난 태자리다”고 확인해 줬다.
    2018-05-25 | NO.9
  • 사망당고개
    서구 매월동만취당을 가는 길에 사망당고개가 있다. 광주시의 서구 서창동 관할 매월동에 있는 고개이다. 개금산蓋金山 남쪽 안산으로 이어지는 등성이를 넘는 재로 서편 회산마을과 동편 화개마을 간 길목이었다. 서낭당이 회산마을 쪽에 있어 ‘사망당’과 관계된 듯하고, ‘춤만동고개’라는 별명도 있다. 서낭당은 돌무더미로 고개를 넘어 다닌 사람들이 한 개씩 돌을 쌓아 탑이 되었고, 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남쪽 임암동 가산마을과 원산동 이동마을로 넘는 고개는 ‘황토고개’라고 부른다.
    2018-05-25 | NO.8
  • 사월산
    서구 벽진동서창동 관할인 벽진동에 소재한 사월산은 높이 101.5m로 아담한 산이다. 광주-송정리간 도로에서 공항 혹은 순환도로 접어들기 전 좌측에 솟아있는 산으로, 광주와 송정 간을 잇는 극락교를 비롯해 극락평야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 산의 앞 쪽으로 극락강(영산강)이 흐른다.금당산에서 북쪽 짚봉산으로 내려선 능선이 서편 백석산으로 이어진 뒤, 내려서며 광산 탁씨 시조산과 공군 탄약고 등성이를 지나 자리하고 있다. 요즘은 공군탄약고로 더 알려진 곳이며 탄약고로 들어서기 직전의 우측에 자리한 산을 말한다. 사월산을 기준으로 서창지하차도, 제2순환로, 상무대로, 풍서좌우로, 영산강과 극락교, 경전선, 다리 건너 송정도서관 인근 말미산과 하남까지가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벽진이 나오고 <회재집懷齋集>에 ‘1602년 광주 벽진촌에 벽진서원碧津書院을 세웠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대충 벽진동의 유래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쓴 한국 지리서 대동지지에도 벽진碧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형세가 ‘똑뫼’로 ‘산월’山月이 ‘산’의 리을이 탈락하여 ‘사월’로 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이곳에 벽진부곡碧津部曲이 있었다. 사월산 남쪽에는 벽진마을과 의열사義烈祠가 있다. 벽진은 옛날 바닷물이 들어왔고, 나루가 운영되던 곳이다. 의열사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이이의 문인인 회재 박광옥을 배향한 사우祠宇로 1604년 건립됐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을 추가 배향하고 있다. 도로에 접한 북쪽은 가파르고 높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완만한 생김새 때문에 옛 사람들은 사자가 머리를 하늘로 높이 쳐든 형상으로 바라봤었고 그래서 사월산이라는 이름도 사자앙천獅子仰天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는 풀이도 존재한다. 이 산은 조선 초엽 광주시내 쪽에 살던 탁씨들의 선산이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본디 탁씨들의 선산은 북구 월계동에서 현재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으로 옮길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주향교가 처음에는 장원봉, 다음에는 광주읍성 안의 북문 쪽에 있다가 결국 성거산(광주공원)에 이전하게 될 처지가 되자 자신들의 선산을 기꺼이 희사하고 그 대체 부지로 택한 것이 이 사월산이었다고 한다.사월산에는 의외로 많은 일화들이 숨겨져 있다. 1930년대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광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을 지낸 야마모토 데스따로山本 哲太郞가 1933년에 펴낸 <광주군사光州郡史>를 통해 사월산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야마모토는 이전에 광주를 다룬 여러 기록들과 달리 당시 광주에 구전돼 오는 일화까지 꼼꼼하게 수집해 정리하고 있다. 이 책에 보면 “서창면 벽진리 사월산은 산마루에 봉화대가 있어 고려 이전에는 전쟁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려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마모토의 봉화대 기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내륙에 속한 광주에 굳이 봉화대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월산 산마루에는 녹슨 철탑과 참호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다. 또 사월산은 이 일대 건물 고도를 확정하는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다. 국방부는 2010년 인근 공군비행장과 관련한 건물 고도 제한을 종전 100m에서 45m로 낮춘 바 있다. 사월산 높이 이상으로는 건물을 짓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전운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상무대 비행장을 군용비행장으로 사용했는데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特攻隊를 양성하는 기지로 삼았었다. 그 무렵 비행장 주변에는 군용 막사와 배수지, 연료고와 탄약고 등을 건설했다. 이때 탄약고가 사월산 북쪽에 자리 잡았는데 터널을 뚫어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탄약고의 일부가 현재 벽진동 월암마을 쪽 벼랑에 남아 있어 공교롭게도 현재 그 위치는 조금 다르나 인근에 공군 탄약고가 위치해 있기도 하다. 1950년대에는 사월산 자락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소설가 강용준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보충병으로 징집되었지만 이후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부산 동래, 거제도 고현리, 광주 사월산 등지에서 만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다 1953년 사월산 수용소의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데뷔작인 <철조망>(1960)이 대표적이거니와, ≪밤으로의 긴 여로≫(1969), ≪사월산≫(1971), ≪탈주자들≫(1973), ≪유월에서 팔월 사이≫(1980) 등의 작품들이 인민군 참전과 포로 생활, 수용소 체험 등을 다룬 것들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쟁의 폭력성과 비참함을 고발하고 전쟁이 가져온 인간 조건의 비극적 숙명을 성찰해 왔다.사월산은 알아보기는 쉬우나 이 산을 접근하는 데는 조금 더 많은 이정표가 설치될 필요가 있다. 인터넷상에서의 통일된 정보 검색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공원인지, 야산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2018-05-25 |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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