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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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옥 비지
    서구 매월동(회산마을 입구)서구 매월동 회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 편에 2000년에 서구문화원에서 세운 ‘임란공신회재박광옥선생비지 壬亂功臣懷齋朴光玉先生碑誌’라는 회재 선생의 기록비가 처음 세워졌다.
    2018-05-25 | NO.224
  • 박노경 - 산난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23
  • 박봉우 '조선의 창호지'
    남구 양림동 108-101994년사직공원 내 광주 출신 박봉우(1934∼1970)의 ‘조선의 창호지’ 시비이다. 관리소에서 약 100미터 아래 배드민턴장 옆 절개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창호지에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하늘만큼 한 사연을...눈물 흘리지 말고웃으며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하늘만큼 한 밤을...조선의 창호지에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이 시비는 1994년 2월 당시 광주시에서 건립했다.  조각은 정윤태, 글씨는 이돈흥이 맡았다.
    2018-06-21 | NO.222
  • 박상 시비- 깊은 산에 묻혀(山居詩)
    남구 사직길 49(사직공원)눌재 박상의 시비는 1994년 광주시에서 사직공원에 건립했다. 호남 시단의 시조로 숭배되는 눌재 박상의 시비에 조각된 시는 신숙주의 증손자인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의 시에 화답한 칠언절구 백수 중에서 하나이다. 신잠이 기묘사화로 파직되고, 1521년 신사무옥으로 장흥에 유배됐을 때의 일이다.揮淚佳花落滿庭 휘루가화낙만정 낙화는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夜來風雨知多少 야래풍우지다소 밤사이 비바람이 얼마나 휘몰아쳤는지有時天變亦關情 유시천변역관정 천기 변할 때는 가슴이 조일래라 雖遁深山晦姓名 수둔심산회성명 깊은 산에 묻혀 이름 없이 산다 한들‘깊은 산에 묻혀[山居詩]’ 시비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글을 쓰고 조각가 김철수가 조각했다. 이 시는 기묘사화에 참사를 당한 사림들을 애통해 하며 쓴 시다.
    2018-05-25 | NO.221
  • 박정 제각건립비
    서구 사동길 118(서창동)충주박씨하촌공제각건립비忠州朴氏荷村公祭閣建立碑는 1989년 하촌공 문중에서 건립했다. 눌재 박상의 큰형인 하촌荷村 박정朴禎(1467~1498)은 중국 송나라 삼소三蘇에 견주어 동국에 형제삼박兄弟三朴이 있다고 할 때 중심이 된 인물이다. 32세로 요절하였으나 수백년이 지나도록 재실이 없어 안타까움에 14대손인 박하련朴夏璉 박하만朴夏樠 두 사람의 노력으로 1947년(정해년)에 완공하였다. 그 뜻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1989년에 이 비를 세웠다.
    2018-05-25 | NO.220
  • 박학독지- 한국방송통신대학 광주전남지역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광주전남지역대학 준공기념비 2005년 12월 18일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내촌로 6 (월계동)2003학번 중어중문학과 김종렬이 글을 쓰고 건립추진위원으로 광주전남지역대학장 김형근, 제23대 광주전남지역대학 총학생회장 김정곤, 제19대 광주전남지역대학 중문학과 학생회장 이극이 참여함박학독지博學篤志(널리 배워서 뜻을 굳게 하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論語, 子張篇)자하(子夏)가 말하였다."널리 배워서 뜻을 굳게 하고, 절박하게 질문하여 몸 가까운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면 인(仁)의 덕은 스스로 그 중에서 생겨 나리라.
    2021-06-26 | NO.219
  • 박형구 - 동구민의 노래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18
  • 박호련시혜불망비
    서구 눌재로 258 서창치안센터 맞은 편농선대시주비 근처에는 박호련의 이름자가 선명한 송덕비(朴浩連施惠不忘碑) 2개가 서 있다. 하나는 을축년인 1925년에, 다른 하나는 기사년인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에 적힌 글귀를 보면 박호련은 참봉도 한량도 아니었다. 이 비석들을 세울 쯤에 그런 직함을 쓰기엔 너무 늦은 탓이었다. 짧은 비문도 비석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행히 박호련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박호련은 본래 이 마을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한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더 가난했고 버팀목이 되어 줄 부모마저도 가난했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빚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갚아야할 빛만 쌓이고 그렇게 앉아 있다가는 빚에 눌려 질식당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야반도주를 했다. 몇 해를 그렇게 고향을 떠나 타향을 전전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먹고 어느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곱지 않은 시선들만이 그의 귀향을 맞았다. 그래도 채권자들의 양해를 얻어 나루에서 뱃사공 일을 시작했다. 근근이 뱃삯을 모아 빚을 갚았고 가진 배로 화물운송업 같은 사업도 했던 것도 같다. 몇 해가 지나자 그의 살림형편은 크게 펴졌고 1920년대 중반 그는 제법 큰 재산을 모아 지역유지라 불릴 만큼 성공도 했다. 자수성가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주변 세상은 그의 성공담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춘궁기가 되면 어김없이 배를 곯았다. 박호련은 보릿고개 때마다 굶주린 이웃들을 구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오만하거나 인색해지기 쉽다고 하지만 그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서창나루의 송덕비들은 지금도 길섶의 외진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변변한 안내표지도 없다. 색 바랜 빗돌만이 세월의 덮개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 송덕비의 주인공이 뱃사공 출신이라는 점, 고관대작이나 지주의 흔한 송덕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한 가난했어도 따뜻했던 시절의 기록이라 더욱 값져 보인다.2개의 비면엔 각각 4자字의 운문으로 네 구句 16자字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끼고 아껴서 남은 것이 있는 줄 알면,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깊고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고, 그 높은 덕은 산보다 높다네.[節食節用 剩知救貧 恩深於海 德高於山]”1925년 2월 서창면 共立“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모든 사람들이 입모아 칭송하니,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飢思若己 傳施恤貧 萬口咸誦 遺德日新〕”1929년 11월 서창면 일동
    2018-05-25 | NO.217
  • 박홍원 - 시민의 노래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16
  • 박홍원의 '아! 무등'
    광주시 북구 청풍동 209-5 청품쉼터 박홍원의 '아, 무등' 시비는 무등산 청풍쉼터에 있다.경산(鯨山) 박홍원(朴烘元, 1933~2000)은 전남 신안군 도초면 발매리 출신으로 1952년 목포사범학교 재학중 문학에 뜻을 두고 당시 조선대 문학과 교수였던 김현승 시인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게 된다.  문학 잡지인 '현대문학'에 1959년 6월 시 '고행' 과 '밤'으로 초회 추천. 1960년 8월 시 '수난 이후' 로 2회 추천, 그리고 1962년 9월 시 '종언을 보며' 로 완료 추천을 받았다.그는 이후에 '구두'(현대문학, 1963.3), '술과 나와 오늘'(현대문학, 1963.11), '선인장의 역설'(현대문학, 1965.1) 등의 수작을 꾸준히 발표하여 시단에서의 위치를 굳혀 갔다.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10년만인 1969년 9월 그는 첫 시집 "설원"(예문관)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는 10년간의 노작 3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73년에 제17회 '전라남도 문화상(문화부문)'을 받았고, 1998년에 '신안군민의 상(교육 문화 부문)'을 받았다.  전남문인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이사, 한국현대시협회 중앙위원 등을 지내면서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원탁시' 창립동인이며, '표현문학' 동인이다. 광주광역시의 '시민의 노래', '아! 무등'의 작사를 비롯하여 도초중·고교등 여러 학교의 교가 와 응원가 등을 작사했다.  영광 원자력 발전소 준공 기념탑, 광주·전남 경우회 충혼탑, 여천 돌산의 현충탑 등에 새긴 시문 등을 지었다.  또한 무등산 자락 제2수원지의 청풍 쉼터에 "아! 무등"의 노래시비와 지원동 화순터널의 시민공원에 '시민의 노래' 시비가 있다.  
    2018-10-22 | NO.215
  • 백당문화류재만행적비.백당류재만옹모선기실비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고암마을, 경위도좌표: N 35˚10´52.8″, E 126°40′36.5″  1945년이 백당문화류재만행적비栢堂文化柳在萬行蹟碑는 문화류씨 문중이 관리한다. 梁在晟이 찬했다.류재만의 자는 극일克一, 호는 백당栢堂이다. 1909.3.19. 출생으로 송은 홍렬(松隱 洪烈)의 장자요, 광산 김귀선(光山 金貴璿)의 외손으로 덕림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독실하고 재예(才藝)가 명민할 뿐 아니라 효성이 출중하여 부모의 뜻을 순종하고 어김이 없으므로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기었다. 본래 가세(家勢)가 빈한하여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몸소 농사지어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거느리며 가사를 영위하였다. 한편 조석으로 부모의 처소(處所)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색다른 반찬을 구하여 드리되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였다. 나이 40에 이르러 학문에 뜻을 두고 동향(同鄕)의 장덕(長德)인 회산 양일묵(晦山 梁鎰黙), 만헌 오필선(晩軒 吳弼善) 선생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탐구하고, 많은 사우들을 종유하여 문난질의(問難質疑)로 수년을 몰두, 드디어 학문의 요체(要諦)를 깨달았다. 50 이후로 위선사(爲先事)에 뜻을 두고 농사를 짓는 한편 여가로 지방 특산물인 돗자리(莞草席) 행상에 나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수입을 저축하여 매년 선대묘 한군데씩 사업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30년 동안 무릇 30여처에 석의(石儀)는 물론 제전(祭田)을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외가가 무사(無嗣)함으로 외조의 묘소에 석의와 위토를 갖추고 계자(系子)를 주선, 봉사(奉祀)토록 하였다. 1964년 정월, 모친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을 다하고 상장(喪葬)의 절차를 가례에 쫒아 행하며 삭망(朔望)의 성묘를 폐하지 않았다. 1965년 3월에는 덕림사(德林祠)를 복설하여 선조 서산선생(西山先生)을 주향(主享)하고 이하 사현(四賢)을 배향(配享), 유림(儒林) 행사를 주선하는 한편 위토 10여두락을 헌납하였다. 1968년 7월 부친상을 당하여 모든 예제를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니 원근의 인사들이 공의 효성에 감복하여 조객(吊客)이 무릇 수백명에 이르렀다. 복을 마친후 선고 송은공(松隱公)의 유고(遺槁)를 간행하였다. 지난 1969년에 향당(鄕黨)의 사우(士友)들이 이같이 지극한 효성과 위선(爲先)의 정성에 흠앙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행적비(行蹟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술암 송재성(述庵 宋在星)이 지었다. 1985년 5월, 덕림사지(德林祠誌)를 간행하고, 이듬해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이상 제반 사업에 소요된 비용은 모두 공이 전담하였다. 1986년 음10월23일, 문화류씨대종회(文化柳氏大宗會) 정기총회에서 선행표창패(善行表彰牌) 제1호가 공에게 수여되었다. 또 1988년 3월, 광산 종중(光山 宗中)에서 공의 위선사업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자 모선기실비『慕先紀實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중헌 윤정복(重軒 尹丁鍑)이 지었다. 동년 여름에 백당찬고『栢堂讚槁』가 간행되었는데 공의 위선의 지고(至高)한 뜻을 찬양한 전국 유림(儒林)의 한시(漢時) 3백여수가 실리었다. 찬고(讚槁)의 서문은 죽하 정동휘(竹下 鄭東暉)가, 발문은 성재 라갑주(誠齋 羅鉀柱)가 각기 지었다. 배위 장흥고씨(長興高氏)는 시원(時遠)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영광정씨(靈光丁氏)는 진옥(鎭玉)의 따님인데 현숙한 부덕(婦德)을 갖추어 평생을 부군의 뒷바라지에 헌신하였으니 실로 공의 이같은 사업은 부인의 내조(內助)가 컸었다.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기선(淇善)이요, 따님은 하음 봉영렬(河陰 奉永烈), 함양 박윤섭(咸陽 朴允燮), 장흥 고재삼(長興 高在三)에게 출가했다. 끝에 연숙(連淑)이는 미혼이다. 특히 위로 딸을 두고 68세의 노령으로 늦게야 아들을 두니 향리에서 이르기를 『조상의 감동으로 아들을 두었다. 』고 칭송이 대단하였다. ※ : 慕先紀實碑.
    2018-11-18 | NO.214
  • 범대순 시비-무등산송
    광주시 동구 증심사길 71(운림동) 무등산 세계지질공원 탐방지원센터 옆2018년범대순 (1930∼2014) 시인은 생전에 무등산 1,100회, 서석대 160회를 오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산행이 단순한 횟수가 아닌 이야기이다. 그는 4계절을 끊임없이 무등산의 역사를 그 흔적으로 남겼다.그의 광주에 대해 사랑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 세계의 근원에 대한 깊은 사유는 고행의 산행에서 시작되었다. 무등산을 노래한 시만도 100여 편을 넘을 만큼 그의 무등산 사랑은 지극했다.자연석으로 세워진 비에는 우석 박신근의 글씨로 대표작인 ‘무등산 송'과 그의 모습을 암각형으로 새겼다. 범대순 ‘무등산송’ 우리가 무등산이 좋은 것은눈을 감아도 그 동서남북서서 바라보는 자리가 화순인 듯 담양인 듯광주 어디 서서 보아도 크고 넉넉함이며우리가 무등산이 좋은 것은춘하추동 계절 없이 넘어선언제나 붉은빛이 푸른빛이고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만 자색이 꿈우리가 무등산이 좋은 것은알맞게 높고 알맞게 가난하고그 안에 수많은 장단과 고저역사가 바위가 되고 흙이 된 긴 이야기평생 한 번만이라도 원노니낮에도 별들이 내려와 노는너덜겅같이 밤에도 태양이 뜨는침묵이 바로 함성인 큰사람 같이
    2018-11-16 | NO.213
  • 병천사비군
    광주시 서구 금호운천길 31 (금호동)1918~1920년참봉 지응현의 시혜불망비 13개가 나란히 있다.
    2018-12-01 | NO.212
  • 보건사회부장관 정희섭공적비
    광주시 남구 양림동 108-101970년사직공원내에 있다. 1970년 1월에 전라남도지사 김재식과 부지사 손수익 및 국장, 시장 군수들이 협찬하여 세웠다.뒷면에 적힌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정희섭 박사는 1920년 2월 1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준장으로 육군의무감을 거쳐 1966년 4월 두번째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 1969년 10월 21일 퇴관하다.육군병원장으로 광주에서 근무한 일이 있는 정박사는 전라남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전남 사람임을 자처하며 이 고장의 개발에 힘쓰다.특히 1967년, 68년 두해 혹심한 한발이 겹쳐 그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정박사는 몸소 현지를 돌아보고 정부에 건의하여 외원을 요청하여 알뜰한 구원의 손길을 뻗치다.양년 3백억에 달하는 농작물 감수에 구호를 요청하는 농가만도 46만호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도 굶는 이가 없었으며 양곡 32만톤과 국고보조 39억원을 지원하다.우리 도민은 이 양곡과 자금을 거저 쓰지 아니하고 표난 것만 추려도 수리사업 5만6천학탤, 도로 확장 6백키로미터를 완성하고, 간척 2만2천헥탈을 착공하다.여기 작으나마 비석을 세워 정희섭 박사의 은공을 적고, 온 도민이 칭송하여 길이 전하고자 한다.
    2018-06-21 | NO.211
  • 봉산사 묘정비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사)봉산사 묘정비鳳山祠廟庭碑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의 건립 취지와 그 사당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다. 1976년에 묘정비를 세워 기록을 남겼다.전 성균관장 영가永嘉 권중해權重海가 글을 지었고 덕양德陽 기영명奇靈命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당대 거목들인 송사 기우만, 일신재 정의림,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춘담 기동준 등과 함께 교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18-05-31 | NO.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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