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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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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선대시주비
    광주시 서구 눌재로 258 서창치안센터 맞은편1769년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碑는 영산강과 황룡강이 어우러지는 서창교 일대에 1769년 강姜 아무개와 조曹 아무개가 농선을 기부해 주민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한 데 따른 칭송비로 알려져 있다. 서창동 서창치안센터 맞은편에 있다. 김희태는 이를 농선부시주비農船夫施主碑로 읽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건륭乾隆 34년에 한량閑良 강선주姜善周와 통정通政 조창좌曹昌佐가 농선을 시주했다.”이다.건륭 34년은 서기 1769년이다. 또 뒷면 두 곳 가운데 한쪽에 화주化主의 거주지가 금부촌리金夫村里와 성명 김순봉金順奉이 있다. 앞면과 연대 표기면 사이의 옆면 한 곳은 서일중徐日仲이라는 시주 인명과 금액 3량兩이 적혀있다. 금부촌리는 조선시대 후기 광주 당부면當夫面 관할이었다. 1914년에 금부金夫와 만호가 합해져 금호리가 되면서 서창면에 속하게 된다. 이 금호리가 뒷날 금호동이 된다.김희태는 이 비를 ‘농선의 선부가 시주를 해서 통정 조창좌와 한량 강선주 등이 세운 비’로 볼 것인지, 또 ‘농선의 선부를 위해서 세운 것인데 비 세우는데 통정과 한량 등이 시주 한 비’로 볼 것인지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배가 접안하던 나루터는 현재의 서창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했다. 농선은 예전에 동네와 강 너머의 농토를 오갈 때 사용된 배를 말한다. 주로 농토로 건너갈 때 사람과 농기구를 싣고 수확기면 볏단을 실어내던 쪽배였다. 지금으로부터 260여년 전 서창마을에 귀중한 배를 쾌척한 두 사람에게 그 감사의 뜻을 담아 동네 사람들이 이 비석을 세웠다. 이는 강을 끼고 살았던 서창 주민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자료에는 당시 서창마을에 법으로 나룻배 1척을 비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배는 5년에 한 번 꼴로 정기적으로 수리를 해야 했고 건조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에는 새로 나룻배를 짓도록 했다. 하지만 나룻배를 수리하고 건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광주의 옛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목재 부족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그것을 고치고 새로 짓는데 필요한 굵고 긴 나무를 확보하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이 와중에 농선대시주비에 기록된 것처럼 누군가 배를 쾌척했다면 이는 사람들의 노고를 크게 덜어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2018-05-25 | NO.254
  • 농은공장동진 · 덕암공장동택공적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회룡마을 입구1975년이 농은공장동진 · 덕암공장동택공적비(農隱公張東軫 · 德菴公張東澤 功績碑)는 국한문혼용체로 쓰여 있다. 비문의 공적내용은 다음과 같다.始祖太師忠獻公 諱 ⿍畢의 三⼗九世孫의 號는 農隱 諱는 東軫이요 號는 德菴 名은 東澤이다. 惟兩⼈은 爲先事業에 ⼼⾎을 傾注하여 ⾨中에 模範되었기에 功績碑를 건립하여 後世⼦孫의 귀감으로 삼고 천추만대에 永遠不渴의 ⽣命⽔가 되도록 하였음.功績農隱公 東軫은 ⾃幼時 孝誠이 지극하여 叩氷한 ⺩祥과 泣⽵한 孟宗의 본을 받아 善事兩親에 得⼀味면 必獻하고 ⾏⼀事면 必告하여 효행과 면정이 藉하였고 爲先之⼼이 進達하여 衆謀鳩財三⼗餘星霜에 ⼋代祖 號는 松隱 諱는 運亮의 永慕齋를 건립하고 ⽯碑를 改竪하였음. 德菴公 東澤은 少時에 家貧하였으되 孝⾏과 爲先之⼼에 雄志를 품고 ⽗⺟의 孝⼼이 特出하였고 종친에게 敦睦하였으며 節⽤節⻝으로 ⽣計를 하여 가면서도 位⼟畓 ⼗餘⽃落을 宗中에 獻納하였음.檀紀 四千三百⼋年 ⼄卯 三⽉ ⽇ ⾨中⼀同 竪
    2018-11-10 | NO.253
  • 눌재 박상 행장비- 訥齋先生集附錄卷第一
    서구 사동길 93(서창동)   訥齋先生行狀[尹衢]      귤정(橘亭) 윤구(尹衢, 1495~?)가 박상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인 1531년 4월에 두 아들 부사공 박민제와 진사공 박민중의 요청으로 쓴 글이다. 윤구는 윤선도(1587~1671)의 증조부이다. 윤구는 151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제교,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 글은 당시 바로 쓰였기 때문에 박상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글로 그 의미가 크다.先生姓朴。諱祥。字昌世。系出忠州。高王考諱世梁。高麗匡靖大夫,知都僉議司事。曾王考諱光理。中散大夫,民部郞中。贈司僕寺正。王考諱蘇。本朝成均進士。官至朝散大夫,宜川郡事。贈資憲大夫,吏曹判書。考諱智興。成均進士。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妣桂城徐氏。生員宗夏之女。先生以成化甲午五月十八日生。生而神氣英爽。異於常兒。少孤。從伯氏學。强記過人。稍長。能自勸學。博通經史。爲文詞日進。弘治丙辰歲。年二十三。中進士選。辛酉歲登第。授校書館正字。例遷至博士。拜承文院校檢。遷侍講院司書,兵曹佐郞。乙丑歲。出爲全羅道都事。正德丙寅秋。今上反正。秩滿。除長興庫令。擢授司諫院獻納。有戚里人。越資陞堂上。是時廢朝積威之餘。士氣摧沮。人皆畏懦蓄縮。雖知其非。而莫敢言。先生慷慨首議。同憲府廷爭彌旬。方解冠辭職。會有國試。命先生考選。乃辭曰。臣旣不能盡所職。不敢奉命。上大怒。命下于理。將加之罪。朝廷咸危懼。大學生上書訟之。宰相亦交救得解。先生猶不自悔。在諫院一年。彈論無所避。謇然有直名。執政惡之。出補韓山郡守。故事。侍從臺諫。銓曹不得擅擬外官。憲府卽日。擧劾銓曹。改授先生宗廟署令。尋徙昭格署 缺。先生旣仕不得志。又以親老乞外。得守臨陂縣令。公廉明斷。務祛冤滯。三年而政成。一日。引疾投紱。謝歸光城之里第。唯日以圖書自娛。辛未冬。拜弘文館修撰。陞校理。半歲。又陞應敎。時館中凡有所章疏。必屬先生。先生操紙立就。文約而義盡。同列稱其能。未幾。以親年益高。上疏乞歸養。故例。近侍爲親乞養者。嘗授近鄕守宰。於是。來守潭陽府。爲府二年。觀察使以淸謹聞。特賜表裏。以優奬之。乙亥春。章敬王后上賓後。中壼無主。時災異疊臻。求聞直言。先生乃與淳昌郡守金淨。上封事。請復廢妃愼氏正中位。且論三元勳。謀爲自全。建廢國母之失。於是。臺諫交章請罪。天怒震動。命繫詔獄以鞫之。群下洶洶。莫不爲先生危之。賴大臣救理。上亦恕其狂直。只令除名。配隷于南平之烏林驛。丙子夏。大旱赤地。宰相言之于上。乃命放歸。是年冬。復授儀賓府都事。遷掌樂院僉正。先生以屢繫縲絏。怪謗叢集。忽忽不樂仕進。黽勉就職。丁丑春。出守順天府。冬十月。丁內憂。居廬三載。執喪過禮。哀毀骨立。杖而後起。己卯冬。服除。拜儀賓府經歷。未幾。陞授繕工監正。是時。士林禍起。同時儕流。奔竄貶黜無餘。先生以久侍經幄。受國恩厚。義不可以含默無言。乃具疏若干言。將一陳于上。雖更得罪黜。不恨。子弟親戚。咸諫止之曰。疏雖上。於事無益。祗重其禍。先生喟然仰天歎曰。一至於此乎。遂焚之。先生自以孤危之蹤。踽踽周行。如浮江之木。泛泛東西。益不喜居中。而欲外補。朝廷亦不惜其去。辛巳春。出爲尙州牧使。其年夏。換移忠州。先生不以疏外自嫌。盡心職事三年。觀察使又以廉能聞。又命褒贈表裏。秩滿。拜司導寺副正。嘉靖丙戌冬。擢重試壯元。陞堂上階。以前在忠州。有軍丁漏失。丁亥春。罷歸鄕里。是年夏。又授羅州牧使。先生旣以道不容於世。進退之難。跋胡疐尾。强之就官。非其好也。爲治務振紀綱。大矯時弊。遂致多口喧騰。然不以此少撓。益自厲焉。己丑夏。風邪乘虛。疾病內搆。不能視事。卽移疾駕車以俟。遂爲觀察使所抑。竟不能焉。然其志將不久於官也。未幾。考課居殿。官居野處。遠近聞之。咸駭以歎。先生之道。吁亦窮矣。又至於此。窮之極也。卽日。輿返里舍。謝絶往來。日以醫藥爲事。疾或作或止。歲餘。庶幾大瘳。庚寅三月。疾復作轉劇。四月十一日。終于家。享年五十有七。夫旣不能於人。而天又不與之年。其知先生者。莫不慟傷而惜之。先生少而聰明穎脫。長而剛毅。不顧流俗是非。涉世逾多。兢危險艱。靡所不嘗。以成其器。好古益篤。前言往行。無有不識。以養其正。故持身整肅。而準繩有截。處心莊栗。而言笑不妄。其接物也。溫然可愛。其臨事也。凜然不可犯。莅官居家。常終日端坐。儼然若齊。無偸惰戲豫之色。雖庸人傲夫。自不覺其起敬。而不敢侮狎也。先生好惡。每與世俗相反。羶薰厚味。世俗皆然。而先生所餐。蔬菜淡如。畫棟丹楹。世俗皆是。而先生所居。僅蔽風雨。世俗所悅者媚順。先生之所賤惡也。世俗所忌者剛方。先生之所自寶也。世俗所競騖者財利。先生之所唾擲不顧也。先生所愛者。佳山秀水。遊賞而忘歸。所好者。典籍辭章。自少至老。未嘗暫輟。自視平生。他物未足以易其樂。所欲與之處者。淸修吉士。幸而遇之。則披心徹肝。論文說古。竟日夜不知厭。所不齒者。貪叨饕餮。視之若糞壤。若將浼焉。宜夫世之與先生者常尠。而疵議者居多也。先生爲詩與文。亦不樂熟軟。力去陳言。獨追古作者爲徒。夫其中之所存。旣拔乎萃。而又博觀古昔。冥探幽搜。擷芳咀華。靡所不至。以至於成。故源流混渾。而氣力雄勁。託興幽遠。而稱物芳美。其存者凡八百餘篇。號訥齋稿。實希世之奇寶也。先生爲政。嚴明一斷。絜持維綱。鉏削荒類。必先夫窮寡無告。而抑豪右兼幷。其一心奉公。惓惓而不懈。未知古君子何如爾。先生立朝。少居於內。而在外者常多。其在諫院一歲。侍講經帷半歲。率不得展其所抱。行其所學。輒以親故。卷而之外。歷一縣二府三州。其綱條法度。有可稱述。而先生之所長者。豈止於斯而已乎。若夫才不爲世好。道不爲世重。命與仇謀。謗隨事集。是則昔之人所不免也。何與於先生哉。先生再娶。先夫人晉陽柳氏。昌平縣令宗漢之女。綾城縣令誼之孫女。有美德淑行。先先生二十四年而卒。夫人生二女三男。男長曰敏齊。金海府使。次曰敏中。進士。能世其業。餘皆夭。後夫人河東鄭氏。生員稅之女。河原君守忠之孫女。生一男。幼。敏古。蔭出監役。 庚寅。葬于光州芳荷洞鳳凰山成才之原。夫人柳氏墓右。衢愚不肖。嘗辱先生。不以鄙夷拒絶。今因先生之子敏齊,敏中之請。義不敢固辭。謹敍家世行業及歷官行事之大槩。俾求誌於作者。嘉靖十年四月日。海南尹衢。謹狀。
    2019-11-15 | NO.252
  • 도강이기수시혜비
    광주시 북구 본촌동 349-1(도로사업소 내)1974년이 도강이기수시혜비(渡江李基壽施惠碑)는 盧文永 짓고 쓰다.
    2018-11-13 | NO.251
  • 도은거사전주이공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4(명도동) 평림마을 평림경로당 앞2008년이재철의 기적비이다.
    2018-11-30 | NO.250
  • 도은이재철선생정년퇴임기념비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94(명도동) 평림마을 평림경로당 앞1996년
    2018-11-30 | NO.249
  • 도지사신공용우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66년도지사신공용우선정비(道知事申公庸雨善政碑)의 양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莅政三載 尊聖惠民   伐石純續 永世不湮도지사를 역임한 신용우(申庸雨, 1912~1989)의 선정비로, 1966년에 전남유림(全南儒林)들이 건립하였다. 신용우는 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순천면 출신으로 1960년 전매청 청장을 지내고,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제3대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냈다.
    2018-06-11 | NO.248
  • 도지사이공기세선정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59년도지사이공기세선정비(道知事李公琦世善政碑)는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낸 이기세(李埼世, 1903~1992)의 선정비(善政碑)로 1959년에 건립되었다. 이기세는 1903년에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출생하였다. 1956년 전라남도지사로 근무하였다. 비음(碑陰)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公來旬宣 공이 순선(여기서는 도지사를 가리킴)으로 와憂民寔寧 백성을 근심함에 진실로 평안하였네. 敬聖敏政 성인을 공경하고 정사에 힘을 쓰고 勤儉增産 근검하여 물자가 늘어났네.矯弊彰德 폐단을 고치고 덕을 드러내고遵法淨官 법을 준수하여 관을 깨끗하게 하였네. 縮費輕賦 비용을 줄이고 세금을 경감하였으며善導民福 민복으로 선도하였네.先賢之碑 선현의 비들을 集竪此所 모아 이곳에 세웠네.受薑桂性 강계한 성품을 타고나尙氷雪操 빙설의 지조를 숭상했네.能任鼎餗 능히 정속(나라의 임무)을 수행하여經世屛翰 병한(국정의 중신이나 지방수령)으로 세상을 다스렸네.堯風舜雨 요임금의 교화와 순의 은택이요 周愛甘棠 주나라에서 감당(召公의 善政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감당을 소중히 여김)을 사랑하였네. 朝野咸頌 조야에서 모두 칭송하여 刻于金石 금석에 새기네. 功照靑史 공이 청사에 드러나 天地俱長 천지와 함께 길리라.
    2018-06-11 | NO.247
  • 두암사묘정비
    광주시 북구 두암동 837-1(두암사 내)1977년이 두암사묘정비(斗巖祠廟庭碑)는 魏錫漢 짓고 金容桓(전면) 金鎬永 쓰다. 산정문중 貞烈‧禎熙 건립하다.두암사(斗巖祠)는 장열사(壯烈祠) 옆에 있는 사우로 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되어 김해 김씨 京파의 중조인 고려조 삼중대광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과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삼위를 봉사하였다. 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해 두암사라 하여 김목경을 추배하고 있다. 김목경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여 조정에서 ‘금녕군’의 호를 받았으며 후일에 세속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갔다.그의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하여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함께 제를 올렸는데, 지금으로부터 1984년께 우연히 지석을 발견해 금녕군의 묘를 확인하고 후손이 장열사에서 따로 모셔 두암사를 짓고 모시게 됐다.두암사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3일과 9월 13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2018-11-12 | NO.246
  • 들불열사 기념비
    광주시 서구 상무평화로 13, 5.18자유공원2002년5.18자유공원의 들불열사 기념비는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등의 모습을 새긴 조형물이 있다. 광천동성당의 야학당을 다시 기억나게 만든다.
    2018-06-19 | NO.245
  • 러셀 블레이즈 델 대령 동상(2009
    남구 제중로84, 사회복지법인 충현원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의 포화속에서 가족을 잃고 고아가되어 길거리에 버려진 어린 생명 1.059명의 어린생명을 살려야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목숨을 구해낸 러셀 로이드 블레이즈델(1910-2007) 미국 공군 군목(대령)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는 동상이다.
    2018-06-19 | NO.244
  • 려헌거사박공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1983년이 려헌거사박공기적비(藜軒居士朴公紀蹟碑)는 박상호(朴尙鎬)의 기적비이다. 건립 당시에는 광산구 지평동 지정마을 입구에 1983년에 세웠다. 마을 앞에 도로가 나면서 마을 뒤에 있는 공의 묘 앞으로 옮겼다. 그의 셋째 형인 박영호(朴泳鎬)의 유적비도 마을 골목 안에 세워져 있다.비문 내용擎天할 만한 才質과 貫道할 만한 學問을 간직하였지만 감추고 나타내지 않으면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잠긴 踪跡과 숨은 德은 闇然히 어딘가 나타나 不⾒不問中에서 世敎에 隱然的 도움이 적지 않은 法이나 이 또한 達理者가 아니면 相互議論할 수 없는 것이다. 藜軒 朴公諱尙鎬는 咸陽世家로 淸⽩吏 遂智의 後裔며 諱廷奎의 四男으로 哲宗壬戌(⻄紀 ⼀⼋六⼆年) 三⽉⼆⼗⼋⽇에 出⽣하였는데 四兄弟中 ⻑兄⻱鎬와 次兄⽂鎬는 光州市柳等⾕⾯良苽⾥에서 出⽣하여 現三道新亭에 移居하였고 三兄泳鎬와 公은 三道에서 ⽣⻑하였다. 그런데 公은 天性이 純粹하고 才質이 卓犖하여 일찍이 遠⼤한 뜻을 품고 上學하였을 때 채찍질 안 해도 精密히 硏究하고 意味깊게 ⽣覺해서 學問에 精誠껏 勉勵하였으며 松沙 奇宇萬 先⽣의 ⾨下에서 修道하고 또 다시 勉菴 崔益鉉 先⽣에게 就正하여 性命의 學과 治⿑의 道를 習得하였으니 가히 天衢에서 活步할 만하며 王庭에서도 垂翼할 만하였으나 때로 더불어 맞지 않아 道를 품고 林樊에 숨어 世上의 榮利에 뜻이 없고 오직 後進을 養育해서 世道를 不知不覺中에 붙잡으러 ⼰任을 삼고 諄諄히 次序있는 指導와 訓誨로 成德한 者를 많이 輩出하였다. 그리고 治世의 道를 엮고 傷時의 情을 읊은 ⽂稿를 남겨 유소한 ⽂字라 하겠으나 顯功이 문에 보이지 않으니 말하는 이가 적으며 ⽂稿마저 紛失되었으니 슬프다. 達理者라 할지라도 公의 深奧한 ⼼情을 測定키 어렵다. 純宗後 癸亥(⻄紀⼀九⼆三年) ⼗⽉ ⼆⽇ 卒하니 墓는 ⿃前洞先瑩下⽩⻁嶝⾉坐에 모셨고 配羅州林⽒는 元默의 女요 ⽩湖悌의 後다.⼦는 濟弘이요 女는 坡平尹相俊의 妻며 孫은 永柱景柱鐵柱達柱다. ⻑孫 永柱의 妻光⼭鄭⽒는 特殊한 孝烈로써 道薦에 올라 이미 表⽯까지 세웠는데 恒時 公의 隱蹟이 아주 湮沒될까 걱정한 끝에 그 ⾨⼈과 族⼈들의 뜻을 모아 公의 懿德을 永久히 記念키 위하여 紀蹟碑를 세우고저 할 제 그 碑⽂을 懇請하기에 族⼈으로서 鄭⽒의 孝誠에 感動되어 ⼈微學淺하나 固辭치 못하고 銘을 부치노니-世上은 모두 外華에 달리고 富貴에 汲汲하는데 公은 홀로 內性만 지켜 淸寒에 淡淡하였네.世上은 모두 顯功을 ⼀時에 세우려고 하지만 公은 홀로 隱德을 萬世에 숨으려고 하였네.그 隱德이여 闇然히 世敎에 도움이 되었지만 아는 이 많지 않구려. 아-슬프고 슬프도다.光復後三⼗六年庚申冬⼗⽉ ⽇ 前成均館副館⻑ 族⼈ 載⻯ 撰                                                                            信川 康仁煥 書
    2018-11-10 | NO.243
  • 류재을 열사 추모비(2007)
    동구 필문대로 309, 조선대학교류재을은 조선대 행정학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97년 3월 20일 ‘한보비리 진상 규명과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처리 규탄을 위한 남총련 결의대회’ 도중 쓰러져 숨졌다.
    2018-06-19 | NO.242
  •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
    일제강점기에 결성된 시회, 만귀정시사 당시 만귀정에서는 멋스러움을 한시로 읊으며 세상을 논하는 시회가 결성되었다. 1939년 송광세(宋光世)가 지은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문의 내용을 통해 1939년경 '만귀정시사(晩歸亭詩社)'라는 시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귀정은 현재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인해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았던 장소였던 것이다. 다음은 비문에 새겨진 내용의 일부이다. "서석 서쪽에 만귀정이란 정자가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고우며 숲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한 곳으로 옛날 효우당(孝友堂) 장공(張公)이 노닐던 곳이다. 이 옛터에 정자(亭子)를 다시 일으킨 후손이 있으니 상열, 대섭, 안섭, 김정섭, 창섭 등이다. 지난해 가을에 박창환이 이 정자로부터 돌아와 나에게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설명하면서 결사(結社)의 뜻을 비치었다. 당시 시를 좋아 하던 선비로 박장주(朴璋柱), 이회춘(李會春), 김병권(金炳權), 박하형(朴夏炯), 조병희(趙秉熙), 이석휴(李奭休) 등이 있었다. 원근의 제현들과 상의하여 봄철에 한번 정도 시를 읊고 노니는 계획을 마련하니 이 시사의 조건일 뿐이다. 진나라의 난정(蘭亭)과 당나라의 향산(香山)을 방불케 하니, 그 사이 장씨의 제현들이 특별히 누정 앞에 비를 세워 기록하여, 이 시회의 전말을 후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한다."(중략) 위의 내용을 통해서 일제강점기인 1939년경에 시사가 어떤 취지로 결성되었는지, 또 구성원이 누구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결성되어 활동한 시사임은 확실한 셈인데, 과연 당시 모임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시기적으로 검열과 감시가 삼엄했을 것인데, 누가, 얼마나 그 울분을 한시로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처한 신분에 따라 자신들의 여유로움만을 즐기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암흑과 같던 일제강점기 시기를 오히려 즐겼던 부류도 없진 않았을 것이기에 많은 상상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특수한 상황에 해당하는 하나의 문학 활동의 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진 않아 을 것이다.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만귀정 시사에 참여한 여러 인물과 작품들을 검토해보는 일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당시의 다른 지역의 시사와는 달리 별도로 편찬한 시집이 없어 많은 다양한 작품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후손에 의해 광주지역의 지방지와 개인문집 등에 흩어져 있는 몇몇 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이 있어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으나, 더 많은 작품이 있을 것으로 보여 계속적인 발굴 작업이 요구된다.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은 만귀정시사와 같이 20세기 호남지역 곳곳에서 결성된 시사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이 시사들에 대한 연구들이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수집된 작품 중 몇 작품을 소개했다. 만귀정원운 晩歸亭原韻 - 장안섭(張安燮) 아둔하고 어리석어 현명치 못한 이내 몸 鈍質癡心體不明두어 서까래 초가집에 한 평생 늙어가리 數椽茅屋老生平찬 강 비 오는데 어부의 피리소리 들리고 一區漁笛寒江雨산 중턱 초동의 노래 예스런 달빛 맑구나 半嶺樵歌古月晴산을 본래 좋아할 뿐 속세 피한 게 아닌데 性本愛山非避世들만 애써 가는 중에 공명심도 벗어났구려 力能耕野可逃名이 땅 거닐어 보니 왜 그리 뒤늦게 왔는지 盤桓此地歸何晩자식 교육에 순탄한 집안이 내 심정이라네 敎子齊家是我情 봄은 늙지 않아 春不老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사방 녹음이 눈앞에 비끼는데 四面綠陰眼界斜두어 집 짙은 향기 기운도 좋구나 濃薰佳氣數三家나물 캐는 소녀여 이 봄 꽃 비녀에 여전하고 菜女花簪春不老목동의 풀피리라 그 소리 끝 간 데 없구나 牧兒萊笛渺無涯때마침 제비 소리 높은 들보에 싱그러운데 梁高時適新燕語울창한 숲 깃들 줄 아는꾀꼬리 노래까지 樹密止知黃鳥歌고개를 돌려 다시 봐도 모두 다 좋으니 回首更看盡相好섬돌 앞 방초도 짜 놓은 비단만 같구나 階前芳草織如紗
    2019-04-30 | NO.241
  • 매동사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매동길 80(매동마을)1980년매동사는 1980년 건립되었다.梅洞祠廟庭碑는 진주 정복규가 짓고
    2018-12-02 | NO.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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