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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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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계윤-계산김계원모선공적비
    광주시 북구 동문대로112번길 99(장렬사 내)2015년桂山 金桂潤 慕先 功績碑文세상(世上)에 선덕(善德)을 베풀면 천복(天福)을 받는 것이니 원치 않는 자 있으리오만 이를 행하는 자는 드문 것이다.여기에 자랑스러운 의덕(懿德)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해인 김계윤(金海人 金桂潤)이요 호는 계산(桂山)이니 가락국 수로왕의 70세손이며 흥무왕 휘 유신의 58세손으로 전주 이남희(全州 李南熙)를 배우자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문의와 의학박사 학위(學位)를 취득하고 정형외과병원을 개설하여 종합병원(綜合病院)으로 성장발전시킨 의료계의 원로(元老)이며 고향인 장성에 복지관(福祉館)과 장학회(獎學會)를 설립하였고 특히 나주시에 대단위 사회복지법인 계산원(桂山院)을 건립하여 장애인복지사업에 필생의 과업으로 심혈(心血)을 기우리고 계시니 인술(仁術)과 봉사(奉仕)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이외에 지역사회 발전에 공(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지역의 덕망가(德望家)로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숭조경종(崇祖敬宗)의 정신이 남달라 종사(宗事)발전에 열성적(熱誠的)으로 헌신하신 종중(宗中)의 큰 어른이시다.1976년 장열사중건(壯烈祠 重建) 사업에 1백 만원을 헌성(獻誠) 하였으며 1987년 종친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거금 오천만(5千萬)원을 쾌척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니 많은 헌성금이 답지하였고 그 후 2011년에 종친회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숙원사업을 이루었다. 또 제6대 장열사 보존회장시에는 일천만(1千萬)원을 솔선 출연(出捐)하고 열악한 재정을 1억 원이 될 때까지 모금하였으며 2002 년에는 전국 12사우(祠宇) 보수자금 2억 원을 배정받아 기와교체 및 단청작업을 완공(完工)함으로써 장열사(壯烈祠) 관리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공(公)의 지극정성이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이외에도 남다른 숭조 정신으로 위선(爲先)과 부종(扶宗)과 계도(啓導)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기시니 그 크신 공적(功績)을 빗돌에 새겨 한평생 종사 발전을 위한 값진 삶이 후대에 큰 교훈(敎訓)이 되고 영원히 본 보기가 되를 바라는 바이다.서기 2015년 (가락기원1974년 乙未) 5월 일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부회장 장열사 보존회장 김종태 짓고 쓰다
    2018-12-16 | NO.284
  • 김기명-통훈대부희천군수의암김공충의비
    광주시 북구 본촌동 378-1(동주민센터 앞)1961년이 통훈대부희천군수의암김공충의비(通訓大夫熙川郡守義菴金公忠義碑)는 金珍鉉이짓고 金容仁(전면) 李玟秀(후면)이 썼다.이 충의비는 1961년 광산김씨 문중에서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힘쓴 희천군수 김기명(金基命, 1540~1593) 장군의 숭고한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공의 자는 응여이고 호는 의암이며 조선 중종 때 광주 북구 본촌동 옛 부동(釜洞)에서 참봉 김광헌과 광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기명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함경도 희천군수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양성 행주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의병장 김천일의 막하 부대장으로 최경회, 고종후, 황진, 장윤 등과 함께 성을 사수하다 함락위기에 처하자 향년 54세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선조는 1605년 3등 선무원종공신에 봉하였고, 1623년 인조는 도총경력에 추증하였다.*2022년 4월 1일 수정
    2018-11-13 | NO.283
  • 김남주 시비
    광주시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 어린이공원지구내2000년김남주 시비는 중외공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광주비엔날레 가는 방향의 길 중간 오른편에 있다. 시는 김남주(金南柱, 1946~1994)의 '노래'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편에 김남주의 흉상이 있다.노래 / 김남주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靑松綠竹(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시비는 2000년 9월에 조성되었으며 그림 홍성민, 초상 김희상, 설계 홍성담 박동준 등이 맡았다.
    2018-05-30 | NO.282
  • 김덕령-춘산에 불이 나니
    광주시 남구 사직공원춘산(春山)에 불이나니 못 다핀 꽃 다 붙는다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이 몸의 내(川) 없는 불이나니끌 물 없어 하노라-忠壯公 金德齡-
    2020-03-19 | NO.281
  • 김덕령은륜비-有明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謚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㫖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 충장사 내1842년김덕령 은륜비각이 있고 그 안에 비석이 있다. 원래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백비로 있었으나 나중에 목사 조철영이 이 사실을 알고 글을 새겨 충장사로 옮겼다.은륜비(恩綸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에 있는 빗돌로 명나라 영력(永曆) 연호(年號)로부터 네 번의 임인(壬寅)년이 지난 1842( 헌종8년)년도에 세운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비석이다.그 옆에는 원래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은륜비가 있다. <유명조선국김충장공덕령은륜비>라고 했다.비문은 비신의 네 면에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조철영趙徹英(1777-1853)이 정조 연간에 내려진 전교傳敎와 사제문賜祭文,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중 정조가 지은 서문을 옮겨 지은 것이다. 글씨는 조철영이 썼다. 서체는 안진경풍顏眞卿風의 해서이다. 비신 좌측면에 ‘방만동묘비자倣萬東廟碑字’라고 밝히고 있어서, 글씨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만동묘비’, 곧 ‘만동묘 묘정비萬東廟廟庭碑’의 글씨는 안진경의 해서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각자는 미상이다.비는 개석,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비신의 재질은 석회암이며,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비신의 상태는 양호하나, 전면 우측 상단과 후면 좌측 하단에 파손이 확인된다. 하대석은 직육면체 형태이다. 은륜비의 좌측에는 비의 건립 경위를 기술한 ‘추기비(1842)’가 있다. 비는 개석 없이 비신 상단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비문은 비신의 네 면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순절한 김덕령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흥양이씨興陽李氏의 순절처에 세워진 비를 조철영이 건립했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은륜비가 세워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비문(碑文)>본주(本州) 목사(牧使) 조철영(趙澈永) 지음지난 정묘(正廟) 무신(戊申)년에 김장군의 마을에 그의 유업(遺業)을 기리는 표리비(表里碑)를 세우라는 임금의 교시(敎示)에 의해 갑자기 빗돌을 마련하여 이를 다듬으면서 약간의 흠집이 생기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께서 이 돌을 버리고 보다 견고한 돌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의해 다시 새로운 돌을 구하였다. 이 때문에 그 돌이 현재까지 그 비의 명사(銘詞)를 지은 사람의 집에 그대로 방치되어 그 용도를 찾지 못한 많은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오호(鳴呼) 통재(痛哉)라! 장군의 뛰어난 정충(精忠), 억울한 죽음에 있어서는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많은 설원(雪寃)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더욱 이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었다. 높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정함과 동시에 표리(表里)의 윤음(綸音)을 비롯한 사우(祠宇)의 제문(祭文) 및 유사(遺事)의 서문(序文)을 내리는 등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백대(百代)의 오랜 광영(光榮)을 누릴 수 있는 대성인(大聖人)의 위대한 포상(褒賞)임이 분명하다.비록 만분지일(萬分之一)의 조그마한 은전(恩典)이라 할지 라도 이 세상의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이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김장군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께서 내리신 전후(前後)의 어제(御製)를 해당 연월(年月)의 순서에 따라 이 돌에 새기어 이를 기념하는 오늘의 이 비(碑)를 세우게 된 것이다.옛날의 그 돌이 마치 오늘의 이 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깊은 감회가 있기 때문에 표리비가 있는 그 근처(近處)에 이 비를 세워 그 이름을 은륜(恩綸)이라 하였다.*자료 : 전라북도.전라남도.광주광역시(2020), 2020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2018-06-18 | NO.280
  • 김만옥시비
    광주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 어린이공원지구 내1998년김만옥 시비는 북구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광주비엔날레 가는 방향 중간쯤 왼편에 있다. 반대편에 김남주 시비가 보인다. 시는 '딸아이의 능금'을 적었다.봄비가 다녀간 담장 밑 양지쪽에어느 날 딸아이가 능금씨 심는다 봄이 다 가고 여름이 와도싹은 나지 않고 가슴 죄는 데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와서까막득 그 일 다 잊어버릴 때 딸아이 마음 속에 능금꽃 필까딸아이 마음 속에 능금이 열릴까 딸아이에게퇴비 한 줌 주지 못한어른이 송구스럽다.비의 뒷면에 "김만옥(金萬玉)은 1946년 3월 전남 완도에서 출생하여 조대부고를 졸업하고 조선대 국문과에서 수학하였다. 1966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아침 장미원 」등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향(詩鄕)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에의 집념을 불태웠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10여년간 곤고한 생활을 견디며 「흥보집」 「아이들의 잠꼬대」 등 좋은 작품을 발표하여 꾸준히 주목을 받았으나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소설 창작에도 재능을 보여  1971년 <전남일보>와 <대한일보>의 신춘문예에서 당선되었고  이듬해에는 <서울신문>의 5.16민족상을 받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슬픈 계절의> (64년) 와 유고 시집 <오늘 죽지않고 오늘 살아있다> (85년)가 있다"글은 김종이 작성하고 글씨는 이무재가 써서 1998년 11월 5일에 광주문인협회에서 세웠다.건립위원은 전원범, 백수인, 이향아, 강만 오재열, 김종, 오건탁, 정광주 등이다.김만옥은 1946년 3월 6일 전남 완도군 청산면 여서리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곤궁하게 자랐다. 고향 여서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완도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읽혀졌던 청소년 잡지 [학원]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 잡지에 시와 수필 등을 발표하여 청소년문단에 알려지게 된다.    일찍이 중학시절부터 문학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조선대학부속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광주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전국의 문예백일장을 휩쓸 정도로 문학적 기량을 떨쳤다. 그리하여 1964년 고등학교 2년생인 김만옥은 <슬픈 계절>이라는 시집을 낼 정도로 이 분야에 조숙해 있었다.    그는 당시 광주 시내 각 고등학교의 문학지망생들을 모아 [석류] [시향] 등의 문학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시절 함께 활동한 [석류] 동인으로는 송기원, 김준태, 김종 등이었고 [시향[ 동인으로는 한옥근, 정중수, 김창완 등이었다.    196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고교 3년생인 그의 시가 가작으로 뽑히면서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 6월에 제5회 신인예술상에 그의 소설이 차석상을 차지함으로써 소설 부문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1967년 2월에 시 <아침 장미원> 외 3편이 제8회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그는 약관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문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는 이해 1967년 3월 조선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여 창작에 몰두한다. 대학생이 되기도 전에 이미 기성의 문인으로 알려진 그는 대학사절에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가작, 시조문학 추천 완료 등 각종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그가 이미 문단에 등단했으면서도 이렇게 각종 현상모집에 계속 응모한 것은, 원고료와 상금을 생활에 보태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9월 29일은 조선대학교 개교 22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백일장에서 국문과 2년생인 그는 대학부 시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아무데서도 보인다.   젊은 지산동이나 아주 먼 방림동   혹은 유덕동 종점에서도   그의 얼굴은 잘 보인다.   얼굴이 왼통 하이얀   키가 큰 청년   아침에 일어나서 대하는 태양이듯   사람들은 그의 앞에 숙연히 선다.   아무 사람도 그는 알아본다.   골목의 코흘리게들도 저녁 시장의   늙은 상인들도 그는 알아본다.   항상 그의 곁에서   떠나려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친절히 손바닥을 펴들고   학우들을 전송하며 때때로   껄껄 웃어줄 줄도 아는 청년   아무 사람도 그를 칭송한다.   그의 반짝이는 총명의 눈은   세계의 눈처럼   종일 드넓게 가슴 벌려   지혜를 숨쉬는   그의 폐활량은 세계의 목숨처럼   무변(無邊)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광망(光芒)이여,   세계는 여기서부터 밝아진다.               - 김만옥: <조선대학교> 전문 -    이 작품에서 보여주듯이 그가 가졌던 조선대학에 대한 애정이 이토록 강렬하였지만, 3학년 2학기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그는 1971년에 대한일보와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1972년 5ㆍ16민족상에 각각 그의 소설이 당선되었다. 그는 이처럼 문학의 여러 장릉[ 걸쳐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열정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어린 식구가 불어나고 생활고의 중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만다. 1975년 9월 4일 홀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세 딸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 문단은 아까운 문사 한 사람을 잃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한 지 10년이 된 1985년 시인 김준태가 주선하여 그의 유고시집 <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있다>(도서출판 청사)를 내어 그의 문학 업적을 기렸다. 그리고 지난 11월 22일 광주문협 주관으로 광주중외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 시비에는 그의 시 <딸아이 능금>이 새겨져 있다.    특유의 비유적 언어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이 그의 시에 드러난 형식적 특성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순수한 동심의 시계,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고독과 어두움에 대한 내면의식 등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   내 빈 도시락 같은 종생(終生)을 내다보고   부끄러워, 부끄러워, 부끄러워   쫓기듯 왔네만 산허리서   달빛 냄새나는 꽃 한송이 들고 와   흙, 돌, 벌레들과   나는 물소리를 베고 짚베개 누워.                       (<자연인> 중에서) 라고 노래한 것처럼 그는 이미 달빛 냄새나는 꽃 한송이에 자족하고 근원적 자연으로 돌아갈 자신을 예견했던 것일까.  (조대신문 699호 1998년 12월 7일)
    2018-06-28 | NO.279
  • 김석겸 -무궁화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78
  • 김세근 장군 훈적비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임진왜란 의병장 삽봉 김세근 장군 훈적비勳積碑는 비문에 김해 가락국 수로왕의 제 60세손으로 성장과정과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금산전투에서 순국하고 부인도 목숨을 끊은 내용이 담겨 있다. 2000년에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장 오성근吳晟根과 학산사보존회장 김종훈金鍾燻 등이 서창한옥문화관과 야은당 사이 주차장 한쪽에 세웠고 흥성인 장재철張在鐵이 글을 짓고 영천인 李敦興이 글씨를 썼다.
    2018-05-25 | NO.277
  • 김승완-대하 김승완 박사공적비
    광주시 북구 동문대로112번길 99(장렬사 내)2015년대하 김승완 모선공적비조상을 숭상하고 종족이 돈목함은 효의 근본이다. 김해인 김승완은 호가 대하이니 가락국 수로대왕의 73세손으로 담양군 고서면 해평리에서 민선면장을 지낸 휘 대성의 1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임채갑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용모단정하고 품성이 근면 성실하며 재예가 뛰어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문의와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전남의대 조교를 거쳐 외과병원을 개원하여 인술과 봉사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였으니 광주광역시의사 회장. 대한의사협회 부의장 가사조정위원장등을 역임하였으며 고향 담양의 고서노인당과 창평 향교에는 공의 두터운 후원에 감사하는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숭조정신이 투철하여 종사벌전에 많은 협조와 열성을 다 하였다. 일찍이 광주전남 금녕군파 종회를 창립하여 40대에 초대회장을 역임한바 있고 1998년 흥무왕 장열사 보존회제9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노후 된 전기시설을 점검하고 교체공사를 실시하여 안전사고에 대비하였다.특히 1952년에 건립한 묘정비가 사우의 명칭이 아닌 흥무왕 묘정비로 표기되어 있어서 순한문으로 된 비문을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장열사묘정비로 개수하기로 종의를 모았으나 열악한 재정문제로 그 추진이 어렵던 차에 건립비 1천5백만 원을 전액 출연하여 장열사묘정비를 내삼문 앞 구 흥무왕 묘정비 좌측에 마주하여 웅위하게 건립 하였으니 숙원사업을 이루었다.그리고 최근에 장열사 발전기금으로 1천2백만 원을 헌성하니 공의 지극한 숭조 돈목정신을 짐작케 함이라.이외에도 위선 부종 계도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성원과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니 이에 그 공적을 빗돌에 새겨 후대에 큰 교훈이 되고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서기 2015년 (가락기원 1974년) 7월 일문학박사 송광운짓고사단법인 장열사보존회 세우다
    2018-12-16 | NO.276
  •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75
  • 김용휴-남광주에 나는 가리
    광주시 동구 제봉로 7(옛 남광주역)2002년설레임으로 여기 서 있다.아쉬움으로 여기 서 있다.기적소리 없는 새벽 누가 열꼬비껴가는 허공의 구름 일지라도스치는 바람이라도기적의 여운이라도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회상시켜 볼 수 있다면광주의 새벽을 여는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삶의 질곡을 푸는시골 할매들의먼 숨결소리라도 들으리
    2018-12-11 | NO.274
  • 김인후-어화 버힐시고
    광주 남구 사직공원어화 버힐시고낙락장송(落落長松) 버힐시고져근덧 두던들(잠깐동안 두면은)동량봉(棟樑棒) 되리러니명당(明堂)이 기울거든무서수로(무엇으로) 바치려노-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2020-03-19 | NO.273
  • 김재균 - 무등서설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72
  • 김재헌 선정비
    광주시김재헌(⾦在獻) 선정비는 1856~1858 광주목사로 재임한 뒤 세워진 것이다. 김재헌은 본관이 광산이고 사계 김장생의 이손(⽿孫, 7대손)이라고 한다. 병진년(1856년)에 부임해 오자마자 향교 흥학전, 교량 수보전, 사창 진휼곡 등을 마련했다. 광주 사림들이 비석을 세울 것을 결의했는데, 이 비문 작성 시기는 재임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입비 자체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관찬서에는 김재헌의 광주목사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별다른 역할이 없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광주 사림들과 사상적 연원이 연결되는 김장생의 후손인데다가 사림들의 숙원 사업을 해결해주어서 사림들이 나서서 선정비를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나도규의 <덕암집>에 그 비문이 실려 있다.나도규(羅燾圭, 1826∼1885)는 ‘월소루 시회에서 김재헌이 사운으로 화답하기를 청하여 삼가 이어서 짓다(月小樓詩會 金侯在獻 以四韻要和敬次)’라는 시를 남겼다. 당에 오르니 사육이 뜰에 떠들썩/오늘 마침 예원에서 즐겁게 노니네/삼대의 유관이 높게 자리에 모여서/흐드러진 봄빛에 술잔을 기울이네/맑은 노래 취한 후 감상을 즐기니/더운 기운이 바람에 머물지 않네/참으로 다행히 천추의 성절을 맞아/만수무강을 빌며 군은을 송축하네
    2018-11-09 | NO.271
  • 김재흔 - 무등연가
    광주시 동구 선교동 71, 너릿재공원 유아숲체험장
    2018-11-22 | NO.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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