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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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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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모재 敬慕齋
    광산구 동호동 본촌 206-5경모재 敬慕齋는 김해부사를 지낸 청송심씨 심광헌(1641~1593의 재실이다.무등산(無等山) 서쪽 50里 본량방(本良坊)에 太白의 雄氣가 연맥(聯脈)하여 용진산(聳珍山) 靈峰에 精氣를 結集시켜 개국(開局)한 湖南의 大明堂인 만월괘서혈(滿月掛西穴)이있으니 바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金海府使에 諱는 광헌(光憲)이요 字는 언장(彦章) 號는 삼암(三巖)의 유택(幽宅)이요 그 계하(階下)에묘각(墓閣)이 있으니 재호(齋號)는 경모(敬慕)라 沈氏가 靑松에 발상(發祥)하야 高麗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 諱 홍부(洪孚)를 始祖로 하니 公의 9代祖요 고휘(考諱)는 풍()이니 號는 묵헌(默軒)이라 成宗 13年 壬寅生으로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러 當年 38歲時 己卯사화(士禍)에 조정암(趙靜庵)先生을 구명상소(救命上訴)타철산(鐵山)에 流配된 후 羅州에 定住하게 된 己卯명현(名賢)으로 동호사(東湖祠)에향사(享祀)하다. 公이 中宗 36年 西紀1541年 辛丑生으로 천자(天姿)가 卓越하고 기우(器宇)가 홍의(弘毅)하여 學德을 兼備하야 임사(臨事)에 忠直하여 士林이 推重하였다. 조년(早年)에 무과(武科)에 及第하야 훈련주부(訓鍊主簿)를 歷任한 후 壬辰年에 왜적(倭敵)이 侵入하야 우리 강토(疆土)를 짓밟음에 國恩을 입은 家門의 후예(後裔)로 적개충심(敵愾忠心)이 强하여 公의나이 52歲임에도 宗廟의 危急함을 重視하고 정예수천(精銳數千)을 募兵하야충무공(忠武公) 이순신막하(李舜臣幕下)로 들어가 옥포전(玉浦戰)에서 적선(賊船) 30隻을 擊破한 後 固城 다월포(多月浦)로 가서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최철견(崔鐵堅)과 힘을 합쳐 防禦陣을 構築하였다.노량전(露梁戰)에 參戰하야 패주적병(敗走敵兵)들을 사천(泗川)까지 追擊하여 敵船十餘隻을 擊破하고 이어서 점포한산도안골포(店浦閑山島安骨浦) 海戰에서도 많은 戰功을 세운 후에 분진(分陳)을 이끌고 江陵에 當到하니 明將 송대빈(宋大斌)이 倭敵에게 包圍되어 苦戰함을 보고 卽時 攻擊하여 倭敵을 討伐하고 명장(明將)을사지(死地)에서 救出하였다.이에 明將 송대빈(宋大斌)이 조정(朝廷)에 장계(狀啓)하야 萬一 沈將軍의 救援이 없었더라면 敵鋒에 명군(明軍)이 全滅을 免치 못했으리라 하니 宣祖가 公의 戰功을 嘉尙하여 특제김해부사(特除金海府使)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훈봉(勳封)하였음이 壬辰錄과 나주읍지(羅州邑誌)에 事載되어 있으며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찬(撰)의 墓碣에도 상기(詳記)하였고 公의 忠志를 追慕하고자 향천(鄕薦)으로 동호사(東湖祠)에 享祀하다. 靑松沈氏는경락(京洛)의 화족(華族)으로 歷代의 많은 忠臣과 烈士를 輩出한 後裔답게 墓道에 따라 1918年 戊午春季에 정랑공(正郞公)門中의 종의(宗議)에 依하야 묘각창건사업(墓閣쾍建事業)을 推進키 爲한 任員을 추정(薦定)하니도유사(都有司)에 종대(鍾大)요 유사(有司)에 相文 遠玉 鍾彦 鍾玉 鍾秀遠和 樂興 樂奎의 주재(主宰)로 全 子孫들의 物心兩面의 誠金으로서 齋閣을 창건(刱建)하야 숭조보본(崇祖報本)의 道理로 敬先하고 경친우공(敬親友恭)의 情으로 목족공영(睦族共榮)의 義理를 돈독(敦篤)하여 聖域保存에 힘써왔다.次에 刱建年久歲深하야 개와(改瓦)가 破損되고 표색(表色)이 변모(變貌)하니 宗會長 영구(永求)의 發議로 1984年 12月2日에 종의(宗議)에 依하야 淨化委員會가 發足되어 京鄕各地의 後孫들의 誠金이 답지(遝至)하여 墓域을 淨化하고재사(齋舍)를 개와(蓋瓦) 및 도장보수(塗裝補修)한 後 불녕(不佞)에게 記文을 請託하기에 그 實錄을 보니 온겨레의 사표(師表)가 될 府使公의구국충정(救國衷情)에 感歎하고 숭조효제(崇祖孝悌)를 家訓으로 先代를이어서 奉仕하는 신구아형(信求雅兄)의 至極한 위선성심(爲先誠心)으로 平素에 羨望한지라 公의 行蹟을 사기(寫記)하고 이에 명(銘)하노니 인의(仁義)는천지(天地)의 대경(大經)이요 충(忠)과 효(孝)는 古家의 典型이라 公의구국투혼(救國鬪魂)에 依한 勳功은 日月과 함께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요 선현(先賢)의유방(遺芳)과 蔭德이 聖域과 함께 永遠하리라.       1991年辛未 7月    咸平 李啓國 謹撰(幷)書
    2020-08-07 | NO.37
  • 광유재
    남구 행안동 구남마을 광유재(光裕齋) 뒤에는 함양윤씨 입향조 윤지화 묘가 있다.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는 연산군 때 중종반정이후 이곳에서 난을 피해 머물렀다.광유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로 224-7(행암동 9번지) 빛고을건강타운 앞 효덕로(孝德路) 북동편 신현산(新峴山) 아래 위치해 있다. 함안윤씨(咸安尹氏) 입향조(入鄕祖) 남촌공(南村公)파 500년 세거지(世居地)이다. 광유재(光裕齋) 유래는 남촌공 후손들이 크게 빛나고 넉넉하게  명문가로 번창(繁昌)하라는 뜻이다.남촌공 휘(諱) 지화(之和)요, 중시조 돈(敦)의 9세손으로 조선 연산군 때 호조정랑으로 봉직중  중종반정으로 1506년 9월 3일  장흥으로 7년 동안 귀양을 갖다. 1513년 11월 1일 해배(解配) 되여 고향인 경기도 양주(楊洲)로 귀향(歸鄕) 하지 않고 광주 효골(노대 행암 대동마을 일컬음)에 은거(隱居)하여 당시 하천(霞川) 고운(高雲.고경명 장군 조부), 눌재(訥齋) 박상(朴祥), 조계(棗溪) 정만종(鄭萬鍾) 선생 등과 서로 왕래하면서 시를 창화(唱和)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558년 2월 28일 83세에 별세했다.광유재는 남촌공(南村公) 을 비롯하여 25위 재향을 모시기 위하여  1948년에 건립한 재실로 형태는 정면4칸 측면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건축하여 60여년간 사용하여 왔는데 오랜 세월에 노후(老朽) 되고 초라하여,  화개재(華蓋齋)가 빛고을노인 건강 타운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헐리게 됐다.현 광유재 위치의 바로 위에 빛고을건강타운이 한눈에 보이는 경관 좋은 곳에 위치를 선정하여  2008년 8월19일 건축허가를 득하여  2009년 5월29일 착공  대지면적 1,296㎡(392평)에 건축면적  242㎡ (73평)[재각 124㎡ (37.4평) 삼문  18.2㎡(5.5평) 관리사100㎡ (30평)]에 9억여원의 예산으로,  건물 형태는 정면 5칸 측면 3칸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원기둥과 사각 기둥 으로 중앙 북쪽에 사당을 모시고, 중앙에 대청을 두고 대청 앞에 마루를 놓고, 문은 사창사리 빛살합문으로 설치 중건(重建)하였다.                             설계와 감리는 건축사무소 삼정 대표 주형신,  시공사는 태청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 이준호 ,도편수는 최명진 ,현장소장에 윤성길이 맡아 내일같이 정성을 다하여 문화재를 짓는다는 마음으로 명예와 사명감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였다.나무는 경기도 포천에서 한대지방에서 생산된 잘 건조되고 나이테가 촘촘하고 좋은 홍송(紅松)을 구입 잘 다듬어 2009년 9월 13일 상량식을 하고, 질 좋은 고령산 토기와을 올려 2010년 5월 31일 준공 검사를 받아, 검소 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재실을 지어 300여명의 종원(宗員) 여러분과 내외귀빈을 모시고 2010년 6월11일 중건 준공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2020-03-19 | NO.36
  • 구산재
    서구 회재로 551(서창동)구산재龜山齋는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과 서창동주민센터 방향을 가르는 백마교차로에 있다. 백마산과 팔학산이 좌우에 있고 바래봉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구산재는 구산龜山 김규환金奎煥(1769~?)으로 문중에서 세운 입비에 따르면 김해 가락국 수로왕의 66대손 삼현파이다.삼현은 사헌부,집의 절효공 金克一, 이조판서 문민공 탁영 金馹孫, 홍문관 응교 삼족당 金大有 등 세 사람을 말한다. 김규환은 삽봉 김세근 장군의 7세손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증 받았다. 자녀로는 在平, 在亨, 在邦, 在旺 등 4남1녀를 두었다. 서창에 살면서 불우한 이웃을 자애로 보살펴 마을에서 칭송이 높았다.구산재는 그 후손들이 시대정신과 숭고한 효사상을 기리며 가문의 융성과 화평의 상징으로 1960년 구산재각을 건립해 재를 올렸다. 이후 광주-남평간 도로 확장사업으로 인하여 철거되면서 근처에 새로운 터를 마련하여 2004년 재건축 단장하였다.구산재 뒤편 언덕에 묘소가 있고 구산동산이라는 비석을 세운 것을 보니 문중 산으로 활용하고 있는듯 하다.
    2018-05-24 | NO.35
  • 귀후재1- 기동준
    광산구 광곡길 133에 위치해 있다. 고봉 기대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서당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한옥으로 건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귀후재기>에 따르면 고봉 기대승의 후손인 기동준이 세웠으며, 건립 시기를 1917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건축의 특징인 단조로움과 깔끔함을 갖추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정내의 현판 글씨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1871년(고종 8) 문과에 등제하여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세사를 멀리하고 야인의 길을 걸었던 서울 출신 명필인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쓰인 것으로 보아 재건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2019-12-03 | NO.34
  • 귀후재2 歸厚齋- 김윤제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87번지 광산김씨 교리공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재실이다. 자는 공로(恭老), 호는 사촌(沙村)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1531년 문과에 급제 나주목사, 전주진관 병마정제사 겸 춘추관 편수관, 외직으로 남원외 13개 고을의 수령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노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교리공은 또한 창계천을 가로막아 황무지에 물을 대게하여 권농하며 농사의 이치를 깨우쳐 실천케하니 향리가 풍요로워졌고 지금까지도 그 교화에 감복하여 농민들이 그 보(洑)를 금다리보(金橋)라 칭하고 있으며 또한 벽간당을 구축하였다. 配는 창녕조씨(昌寧曺氏)니 父는 교리 완(椀), 祖는 대사성 극신(克信)이며 繼配는 금성정씨(錦城鄭氏)이다. 귀후재는 교리공의 세일사를 받드는 재실이다. 아들은 습독 웅변(熊變), 주부 일변(一變), 주부 이변(二變), 주부 삼변(三變)이다  [세일사 : 음 3월 3일]
    2020-05-16 | NO.33
  • 담숙재 湛肅齋
    광주시 동구 월남동 녹동마을 복판에 있다. ‘녹동’이라는 이름은 제(차)일봉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의 지형에서 유래한다. 마치 사슴이 마을을 품에 감싸고 길게 누운 형국이다. 담숙재는 의병장 행주기씨 기은공 棄隱公 문중에서 관리한다.담숙재는 의병장 기의헌(奇義獻)을 기리는 재실이다. 전하는 바로는 매봉에 기은공 혼백을 묻어 초혼장을 치렀다고 한다.조선중기 학자였던 그는 정묘(1627)·병자(1636) 양 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인조가 머무르던 남한산성으로 출병하였다.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성립된 걸 알고, 호를 기은(棄隱)으로 고친 뒤 죽을 때까지 은거했다.
    2020-05-16 | NO.32
  • 덕호재
    서구 덕흥로 312(덕흥동)극락강변에 유유자적하며 금성錦城(나주) 송암거사 오길주吳吉柱가 지냈던 곳이나 지금은 금성오씨 재각인 덕호재德湖齋로 대신하고 있다. 학사 민병한閔丙漢이 쓴 기문이 『조선환여승람』(1935)에 남아 있어 이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후손인 오동수吳東洙의 찬기가 있다.지금은 빨간 벽돌로 사면의 담을 쌓았고 담 위로는 철조망을 쳐놓았으며 알루미늄 대문에 열쇠가 굳게 잠겨있다. 재각 왼편에는 1988년에 세운 덕암德菴 오경렬吳璟烈의 공적비와 은진恩津의 송재성宋在晟이 찬하여 1971년에 세운 충신忠臣 증선무원종훈贈宣武原從勳 와헌卧軒 오공吳公 기적비紀蹟碑가 서 있다.덕호재가 있었던 덕흥홍등德興弘澄에서 바라보이는 강변은 한때 서구5경西區五景이 이야기될 때 제1경으로 꼽힌 바 있다. 덕호재에서 바라보이는 극락강변은 왼쪽으로 덕흥대교가 길게 뻗어있고 그 밑을 흘러가는 강변의 아름다움이 절로 묻어나온다.덕호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거대한 암석으로 물길이 굽어지는 곡점을 형성하고 있어 이곳에서 서편으로 물길을 바라 볼 수 있어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한 암벽의 조대가 있어 낚시를 즐기며 풍류를 즐겼다.민병한의 기문 내용은 이렇게 시작된다.德湖額因地名也此盖錦城吳氏爲其先祖臥軒公以下諸墳墓享之齋宿所而所建也 ……
    2018-05-24 | NO.31
  • 동촌재
    광주시광역시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에는 균산정이 있고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으며 담밖 열 걸음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다. 또 죽파재 위에 괴양정이, 그 위에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1891년에 지어진  서석단(瑞石壇), 괴양정(槐陽亭)이 있다.마을 동쪽입구에는 동촌재(東村齋)가 자리하고 있다. 동촌재는 함평이씨 이경도李敬道(1630~1708), 자는 중임(仲任), 호는 동촌(東村)의 재각이다.기성군 이긍(箕城君 李兢)의 9세손이며 청사공 이처일(淸査公 李處一)의 손(孫)으로 숭고한 유덕을 길이 전승키 위하여 1977년 공적비를 세웠고 1987년 묘역을 정비하고 동촌재실(東村齋室)을 창건하였다. 제향일(祭享日) : 매년 음력 3월 15일 동촌재기(東村齋記)휘는 경도(敬道)요 자는 중임(仲任)이요 호는 동촌(東村)이다. 휘 긍(兢) 기성군(箕城君)의 10세 9세손으로 인조 경우(仁祖 庚牛) 1630년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서 출생하였다. 공(公)은 학식이 정박(精博)하고 재국(才局)이 굉위(宏偉)하여 장래가 기대되었다. 후손이 인근향(隣近鄕)에 많이 거주하여 종중(宗中)의 우애와 친목에 진력하였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또한 지방사회에 대한 봉사에 노력하여 공헌한 바가 많아 향인(鄕人)이 공을 경모하였다.공의 인근사회에 대한 봉사와 공적은 가족에 대한 향인(鄕人)의 선망으로 되었던 바 이는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숙종 무자(肅宗 戊子) 1708년 수(壽) 79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淸風洞) 신촌마을 등(登) 병좌(丙坐) 상하영(上下塋)이다.광주 오치(悟峙) 동촌공(東村公) 종중(宗中)에서는 공의 숭고한 유덕을 길이 간직하기 위하여 종중의 중의를 모아 1977년 정사(丁巳)에 공적비를 건립한 바 있거니와 1987년 정묘(丁卯)에 묘성(墓城)을 정화하고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 신촌(新村)마을 옆에 동촌재(東村齋)를 재국(載國) 건원(乾元) 주간하(主幹下)에 창건하였고 제향일은 음 3월 15일이다. 1988년 후손 건원 근기 (1988年 後孫 建元 謹記)
    2020-04-25 | NO.30
  • 명덕재
    명덕재(明德齋)는 광산구 임곡동에 창녕 조씨(昌寧曺氏) 송암(松庵)  조언수(曺彥壽)를 기리는 제각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옛 나주군 본량면이다.1938년에 발간한 조선환여승람 나주(朝鮮寰輿地勝覽 羅州)편에 전하고 있어 1897~1938년 기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명덕(明德)은  대학(大學)의 첫머리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는 것으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만사에 수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조언수는 1876년(고종 13) 황해도 암행어사  문학.시강원 겸 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고 1880년 순천부사에 재임했던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쓴 창녕 조씨 삼강 유적기(昌寧曺氏三綱遺蹟記)에서 "선조 임진왜란 당시, 송암  조언수를 공은 포의로서 떨치고 일어나서 대중을 고무시켜 군사를 모집했다. 나중에 조중봉趙重峰(조헌趙憲, 1544~1592) 선생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국하여, 포상으로 아경(亞卿)에 추증되고 곧 맹부(盟府)에 공훈이 실렸다"고 적고 있어 조선중기 때 의병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유적기에서는 " 공의 아들 참봉(參奉) 조성복(曺成福)의 부인인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를 베었으며, 남편이 죽자 맹세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자식을 가르쳐서 가정을 이루게 하고, 죽은 남편의 뜻을 이루었기에 정려(旌閭)의 포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인의 아들 통정(通政) 순악(舜岳)은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효행에 감응하여 물고기를 얻는 이적(異蹟)이 일어날 정도였기에 고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일을 칭송한다. 순악의 아들 후건(厚建) 또한 효로 이름났다.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어사가 포상을 내려주십사 아뢰어준 덕에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씨 집안에는 정려문이 이어져 백 년 동안이나 전해졌으며, 또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1897년 <광무원정> 에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져 1923년에 정려(旌閭)를 세우면서 명덕재(明德齋)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2020-05-12 | NO.29
  • 박지수-密陽朴氏永慕齋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密陽朴氏永慕齋重修記尒陵古稱山水鄉 其秀爽清淑之氣 多聚於西方 若天台海望文山德峯 可數者非一 然體德中立 而盡得西方之美者又莫若德峯焉 昔者宣廟朝 忠臣补公諱枝樹葬其王大人監察公於此 子孫因居山下 監察公六世孫尚彥與諸宗就山之右麓 得一平坦與安亭相對處 構數椽屋子以其在德峯安亭之間 故一稱德安齋 以其世世為瞻慕之所故一稱永幕齋 青氊舊物 殆二百餘年于茲矣鞏固者縱緩 塗飾者漫漶 有不免再貽肯構之慮 歲丁亥春門議齊發 將謀葺理 準彩尸其事 春鎭董其役 賢秀掌其財麟鎭主其簿 首尾八個月 工役告訖 東房西室 前廳後寢各遵舊䂓 渙然改觀 其繼志述事 可謂至矣 爲仔孫而入此室者必有所咸 而孝悌之心 豈不油然而生乎 孟子曰設為庠序學校以敎之 皆所以明倫也 此室是思幕祖先之地 而兼爲諸子孫肄業之方 視諸鄉黨庠塾 其所重不亦有間乎 人生所以讀書者 為何事 先世所以期望於子孫者爲何事 戒燕玩無畚之遊 去纂組無用之習 嚴恭寅畏常菩對越祖考 一以天叙天秩人生日用合做底道理立定課程 讀書以明之 會友以講之 存之於心 體之於身自灑掃應對 至於窮理盡性 自愛親從兄 至於治國平天下循循征邁 期有成立 則其於永慕似述之道 爲何如哉此不但爲朴氏一門之福而已也 予游此齋有年耳竊覸其螽斯椒聊 至為番衍 而詩禮問學之風 蔚然方張其秀爽清淑之氣 必有以助發 而所産將不止爲一歐陽子而已遊此室者 其各勉焉   *전남 화순군 도암면 벽동마을에 1621년 덕안재(德安齋)가 건립되었으며, 1804년 영모재(永慕齋)로 개칭됐으며, 강학소인 서당이 있었다. 박지수(朴枝樹, 1562~1593, 朝散大夫, 司憲府監察,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司)의 재각이었다.
    2020-06-14 | NO.28
  • 봉강재
    청주한씨 봉강재鳳岡齋는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에 있다. 호남대에서 영광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서봉마을 들어가는 곳에 봉강재 입구 석비가 보인다.봉강재는 청주 한씨 제학공 한사기(提學公 韓謝奇, 1257~ 1314)의 재실이다.  건물은 정면4칸, 측면1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고당 김규태(顧堂 金奎泰 1902~1966)가 건물 기둥의 주련을 써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 보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로 보인다.한사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문혜공(文惠公) 강(康 : 初諱 璟)이요, 조정대부행예빈경(朝正大夫 行禮賓卿)에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 光綠大夫 守司空 左僕射)에 추증된 광윤(光胤)의 손자이다. 《고려사약전(高麗史略傳)에 있는 유사(遺史 : 史蹟)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고려사(高麗史)》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忠烈王) 원년(1275)년 6월 새로 禿魯花(두루아치 : 즉 중국어로 인질을 말함)를 선정하는데 3계급을 특진발령한 관직을 주어서 보내기로 하였다. 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된 한사기(韓謝奇)는 강(康)의 아들이요, 추밀 이분희(樞密 李汾禧)의 사위니, 나이 20 미만으로 품계(品階)를 초월(超越)해서 八品에 배명(拜命)하게 되었다. 충렬왕 5년 3월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派遣)하여 두루아치를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흔)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타)와 허공(許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검(薛公儉)의 아들 지충(之沖)과 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돌(돌) 등으로서 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월등(越等)하여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 문혜공 본전(文惠公 本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아들 사기(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아들 악(渥)과 영(泳)이 있다. 처음에 사기가 두루아치로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管)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렇게 영달(榮達)함으로써 아버지 사기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로 사직하였다. 홍규열전(洪奎列傳)에 간략하게 적었으되 충열왕이 양가(良家)의 예쁜 여자를 선발하여 원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추밀부사 홍규(樞密副使 洪奎)의 딸도 마침 선발되어 대열 속에 있었다. 규(奎)가 한사기(韓謝奇)에게 이르되 “나는 내 딸의 머리를 깍아서 이번 選出을 免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떠할지요”하니, 사기(謝奇)가 그러면 그 화(禍)가 귀공(貴公)에게 미칠까 두려우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규(奎)가 듣지 아니하였다 한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지은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행장(行狀)에는 아버지 사기(謝奇)는 본국(本國)에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조정대부우사의대부지제고(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다. 公(泳)의 영달(榮達)로 因하여 한림직학사아중대부경차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을 받았다. 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되었으니 어머니 채씨(蔡氏)와 정씨(鄭氏)는 모두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公은 鄭氏의 所生이다. 처음에 本國에서 세도(勢道)집 자제들 중에서 질자(質子 : 인질)를 뽑아 보내는데 公의 부친이 역시 선출된 인질 중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가권(家眷)을 인솔(引率)하여 왔다고 하였다. 공의 묘소(墓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후에 실호(失護 : 잃어버림)되었다가 다시찾았다고 한다. 특징(特徵)은 고려장의(高麗葬儀) 표본(標本)으로 四角 長方形의 석장(石杖) 호석(護石)의 분묘(墳墓)이다.
    2020-03-25 | NO.27
  • 봉산재(눌재 박상)
    서구 사동길 93(서창동) 봉산재鳳山齋는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재실로서 소촌동의 송호영당松湖影堂과 더불어 눌재訥齋 박상朴祥(1473-1530)의 재실이다. 2019년11월 1일 새로운 재실을 중건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재실 앞에는 박상 선생의 행장비도 새로 세웠다.재실 안에는 박상 선생 영정과 광산 김충호金忠浩가 쓴 '봉산재중건기'와 박래호 朴來鎬가 쓴 '봉산재중건상량문'이 있다.원래 건물은 1895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문은 완절문完節門이라는 편액이 있는 솟을대문이었다. 재실에는 기문記文이나 재각기齋閣記는 없고고 상량문에 을미구월초육일乙未九月初六日이라 쓰여 있었다. 눌재는 조정에 있을 때 관직과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훈구파와 왕의 인척들을 비판하고 정론을 펼쳤다.봉산재 옆 낮은 산을 ‘뒷메’라고 불렀으며 봉황산과 한새봉 사이 골짜기 맨 위쪽을 ‘남바우’ 그 아래를 ‘한생이골’, 그 윗부분 봉황산 아래쪽을 ‘모길, 불암마을 앞에서 마을 앞 야산 사이를 ’작살앞‘이라 불렀다.눌재의 묘소는 봉산재 옆 ‘뒷메’라 부르는 낮은 언덕에 있다. 눌재의 묘소는 정부인 진양 유씨와 함께 모셔져 있다. 이 묘의 발음發蔭으로 조카사암 박순이 출생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암 박순(1523~1589)은 박상 선생이 돌아가시기 7년 전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이 구전은 앞뒤가 맞지 않다. 또 사암이 눌재의 묘비를 세울 때 특별히 중국에서 백비에 가까운 돌을 구해와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재일은 매년 음력 10월 16일이다. 다음은 봉산재 중건기념일 문간공 문중회장의 인사말이다.봉산재 중건 기념 인사말안녕하십니까? 충주박씨 문간공 문중회장 박종률입니다.결실의 계절을 맞아 눌재 봉산재 중건을 기념하는 자리를 갖게 되어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축하의 자리에 함께하신 천정배 국회의원님, 서대석 서구청장님, 박성수 광주전남발전연구원장님, 정인서 서구문화원장, 충주박씨 대종중, 판서공, 회덕참의공, 찬성공을 비롯한 여러 문중 어르신들, 그리고 중건기문을 써주신 고당 김충호 선생님, 상량문을 써주신 노강 박래호 선생님, 주련글을 지어주신 원파 박수섭 선생님과 주련글을 아름답게 써주신 취석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봉산재 건축을 맡아 수고하신 대목장 감양수 님과 담장과 포천 사암묘역을 조성해주신 최정기 사장님과 삼복더위에 땀흘려 봉사한 우리문중 박화조 감독님과 총무님, 마을 통장님 그리고 많은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마을 주민 여러분과 문중종원들의 협조로 아름다운 봉산재를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축하의 화한을 보내주신 모든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선생은 광주광역시 서구 방하동(芳荷洞)에서 태어나, 28세 1501년 연산군 7년부터 관직에 나아가 56세1529년 중종 24년까지 공직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였습니다. 담양 부사 시절 순창 군수 충암 김정(冲庵 金淨)과 무안 현감 석헌 유옥 선생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일로 남평 오림으로 유배당하셨고, 담양 부사와 충주 목사로 재임 시 청백리(淸白吏)에 두 번이나 뽑히셨습니다.눌재 선생은 1,200여 수의 시(詩)와 부(賦)가 담긴 문집 눌재집(訥齋集)과 역사서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을 남겼습니다. 불의에 대한 과감한 지적과 비판은 이 시기 사림(士林)의 정신적 지표(指標)가 되었으며, 의리사상(義理思想)의 선도자(先導者)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후세에 사림의 부단한 요청과 군왕들의 호응으로 여러 차례 포장과 치제를 받으셨으며, 1688년 숙종 14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셨고. 1729년영조 5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문은 글에 밝고 견문이 넓다는 뜻이고, 간은 정직하고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뒷산 이름이 봉황산이어서 눌재 선생을 봉산거사라 했으며 재각 이름이 봉산재이고, 퇴계 선생은 눌재 선생을 ‘원우의 완인’이라 했으며 절의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대문을 완절문(完節門)이라 했습니다. 봉산재는 1919년 기미년에 세워진 재각으로 올해로 100년만에 중건하게 됬습니다. 재실앞 마당에 세워진 눌재 행장비는 귤정 윤구선생(1495-미상)이 눌재선생 돌아가신지 1년 후인 1531년 4월에 두 아들 부사공 민제와 진사공 민중의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눌재 선생의 그 당시 眞面目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글로 그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눌재집에 면앙정 송순이 정만종에게 쓴 글에서 눌재 선생의 경의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治心以敬(치심이경) 하고 處事以義(처사이의)라 했습니다. 즉, 매사에 마음을 경으로 다스리고 일을 의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곧게 새워 나태함을 경계하고, 일을 행할때는 방정하게하고 사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눌재선생의 경의사상을 본받아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분들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2019년11월1일 문간공문중회장 박종률드림2019.11.15. 수정
    2018-05-24 | NO.26
  • 봉산재- 평택임씨
    광주 광산구 본량동 탑동마을에 평택임씨 재실인 봉산재가 있다.
    2020-05-18 | NO.25
  • 분산재
    남구 효덕동분산재 粉山齋는 1970년에 건립되었는데 함안윤씨 윤영기의 광유재와 꽌련이 있다.
    2020-03-19 | NO.24
  • 빙설당 氷雪堂
    광산구 동호동 석문산석문동천石門洞天의 깊은 곳에 빙설당氷雪堂이 있다. 석문산石門山은 마치 성처럼 생겨서 전해산全海山(1879~1910) 의병부대 등이 자주 주둔하며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다. 석문산은 나주오씨의 선산으로 나주오씨의 제각인 빙설당이다. 후석 오준선의 8대조로 병조좌랑을 지낸 석문공(石門公) 오이익(吳以翼1618~1666)이 석문산 속에 숨었다. 그는 “참된 귀함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고 거짓된 귀함은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良貴己也 假貴人也]”라고 역설한 무인이지만 철학인이기도 했다. 오이익(吳以翼)은 1618(광해군 10)∼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우서(于敍)이다. 그의 부친은  한림학사 오희도(吳希道, 1583~1624)의 셋째 아들이다. 오이익의 문집으로 <석문집 石門集>이 있다. 빙설당의 현판은 석촌 윤용구가 써 이곳의 중축의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내실을 들였다. 석문산은 나주오씨의 선산으로 빙설당氷雪堂은 원래는 초당 강학터로 현재는 나주오씨의 재각으로 다시 지어 사용하고 있다. 오준선은 1910년 망국 이후 5년 동안 이곳 빙설당에서 강학장소로 활용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후손들은 그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오준선도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빙설당에서 마주 건너다 보이는 산등성이에 석문공 오이익과 7대조 통덕랑通德郞 오명석吳明錫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 오준선이 부인인 상산김씨商山金氏와 함께 묻혀 있다. 묘소 왼쪽에 세워 놓은 묘도비墓道碑(安東 金密漢撰)에 ‘朝鮮遺民後石先生吳公墓碣銘’이라 새긴 머리글자의 조선유민朝鮮遺民이란 4글자가 끝내 조선의 백성이기를 고집했던 오준선의 의리정신을 읽을 수 있다.
    2020-03-12 |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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