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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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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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여익 李汝翊 효종 1년(1650) 3월 11일∼효종 1년(1650) 10월 23일
    이여익 李汝翊 효종 1년(1650) 3월 11일∼효종 1년(1650) 10월 23일현감 이여익(1591∼1650)의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자는 비경(棐卿), 호는 수봉(秀峯) 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응원(李應元)이다. 1616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624년 추천 으로 유릉참봉에 임명되었다. 163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형 이여정(李汝靖)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1631년 승정원 주서·사정, 1632년 예조좌랑·진주판관, 1638년 예조정랑·개성경력·성균관 사예, 1639년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겸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에 승진하였다. 1641년 서장관·충주 목사, 1644년 군기시정·사헌부 장령 겸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고,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폐단을 일소하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창포정(菖蒲亭)을 중건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1649년 시강원 보덕으로 이동하였다. 1650년 3월에 금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근무 하다 재임 중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인(1650년) 3월 11일 도임하였고 동년 10월 23일 석림(⽯淋=신장결석)으로 졸서하였다.”라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201
  • 이영견 李永肩 예종 1년(1469) 2월 15일∼성종 2년(1471) 11월 24일
    이영견 李永肩 예종 1년(1469) 2월 15일∼성종 2년(1471) 11월 24일이영견(1403∼1482)의 본관은 수안(遂安)이며, 호는 석재(⽯齋)이다. 1429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434년 봉례랑이 되었고, 경상도 도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우사간, 좌사간, 첨지중추원사, 예조참의, 이조참의, 인수부윤을 거쳐 1469년에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주에 장문을 열었다가 금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1473년 신숙주의 상소를 보면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화폐가 행용되지 않는 데에는 그럴 까닭이 있습니다. 경성 이외에는 시포(市 鋪)가 없으니, 화폐가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 경인년(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를 열고 장문(場⾨)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힘입어 보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외방에 시포를 설치하는 기회였 으나, 호조에서 수령들에게 물으니 수령들이 이해를 살피지 않고서 전에 없던 일이라 하여 다들 금지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상습만을 좇는 소견이었습니다. 다만 나주목사 이영견은 금지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호조에서는 굳이 금지하여 천년에나 한 번 있을 기회를 잃었으니 아까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되어있어, 지방의 장문이 처음 열린 곳이 나주임을 알 수 있다. 『금성일기』 「기축년 1469년」에 “신임 목사 가선대부 이영견이 2월 15일 도임하였다.”라 하였고, 「신묘년 1471년」에는 “전임 목사 가선 이영견이 중추부동지사로 선환되어 11월 24일 상경하였다.”라 되어있어 『금성읍지』 기록과 일치 한다. 『금성읍지』에는 “기축(1469년) 2월 15일에 도임하였고, 신묘(1471년) 11월 24 일에 중추부동지사로 승진하여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00
  • 이완근
    이완근(李浣根), 湖節3上-014-1, 光州, 壬辰, 權慄參佐-《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99
  • 이용순 李⽤淳 선조 25년(1592) 12월 28일∼선조 29년(1596) 2월 19일
    이용순 李⽤淳 선조 25년(1592) 12월 28일∼선조 29년(1596) 2월 19일이용순(1550∼1605)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사화(⼠和), 호는 동고(東皐)다. 아버지는 행당진현감 이질(李礩)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 18)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魁院)·승정원(承政院)에 뽑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11월 나주목사에 제수된 기록이 있다. 1593년 도원수 권율(權慄)이 담략이 뛰어나다하여 충청감사로 전임시킬 것을 천거하였으나 당시 왜군이 제주도로 침구한다는 풍문이 있었고, 오랫동안 나주에 있으면서 모든 방비에 심력을 다해 조치하고 수성(守 城)의 규모에 있어서도 또한 점점 질서가 잡혀 인민들이 의뢰하는 마음이 있어 봄철에새 수령으로 바꾸면 손해가 적지 않을 것이라 하여 계속 근무하다 1596년 2월 19일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이때 왜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진격하여오자 권율장군이 비안까지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으며, 순찰사였던 이용 순은 의성군 북산(北⼭)에서 왜군의 급습을 받아 물러섰다. 1599년 자헌대부 충청감사로 전임되고, 그해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603년에는 함경북도병사에 전임되었는 데, 경원·경흥·은성 등지에 여진족의 침범이 몹시 심함을 보고 그들을 귀순하게 하는 길은 군량미를 확보한 뒤 정예한 포사수(砲射⼿) 5000∼6000명을 훈련시켜 이 지방에 상주하게 하여 은위(恩威)를 병행하게 하는 것이 첩경임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금 성읍지』에는 “임진(1592년) 12월 28일 본도 방어사종사관에서 제수받아 도임하였고 금성산성을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198
  • 이용헌(李龍憲)
    이용헌(李龍憲, 1851~1895)의 본관은 함평이고 자는 운오(雲五), 호는 오산(梧山) 이다. 광주 오치리에 살았다. 승지에 증직되었다.부 : 李敏炯조 : 李萬燁외조 : 高時洪처부1 : 閔三顯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오산정梧山亭을 경영했다.
    2020-08-05 | NO.197
  • 이용헌(李龍憲)
    이용헌(李龍憲, 1851~1895)은 광산 출생으로 본관은 함평이다. 자는 운오(雲五)이며 호는 오산(梧山)이다. 조부는 취헌(醉軒) 이만엽(李萬燁)이다. 효행이 출전(出天)하여 승지(承旨)의 증직(贈職)을 받았다.「십회잠(十懷箴)」‧「척사부정설(斥邪扶正說)」등을 쓰는 등 유학의 진수(眞髓)를 다하여 사림의 좌명(座銘)이 되었다.조선시대 경학자(經學者)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스승으로 섬겼고 송사 기우만과 함께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문집을 간행하였다. 1912년에 이계익이 편집, 간행한 3권 1책. 목활자본의 《오산유고梧山遺稿》가 있다.1917년 오산(梧山)의 아들인 재랑 계익(齋郞 啓翼)(1878~1945)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북구 오치동에 오산정(梧山亭)을 건립하였으며 종손 재열(宗孫 載烈)의 주소지에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전남 무안군 일로읍에도  이용헌(李龍憲)이 왕산당(旺山堂),을 지어 지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왕산당은 1896년 조선 고종(건양1) 때 광양현감 등을 지낸 김근식(金近植)의 시가 남아 있어 조선 말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무안의 고사(高士) 일류(一柳)  이계희李啓僖(1865~1934)가 왕산당중수기(旺山堂重修記)를 남겼다.왕산당(王山堂) 관련 시를 보면 이용헌은 당시의 구한말 의병항일전의 사상적 맥락의 하나인 민족적 위기의식 속에서 배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항거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성리학을 보위하는 위정(衛正)에 목표를 두고 외래 사상과 문화를 사악한 것으로 단정하여 배척하는 척사(斥邪) 운동인데 열국의 침략이 일제의 침략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구한말 항일무장투쟁노선으로 반일운동 또는 의병항일전으로 나타났다.그는 시에서 停驂斜日暫偷閒   해는 저무는데 나귀 멈추어 잠깐 한가함을 얻어經宿通明屋數間   통명전(通明殿)다운 큰 숙소에서 하룻밤 지내는구나一軆君臣朝對地  조대(朝對) 앞의 땅에서 군신이 한 몸이 되었고忠忠洞裏見王山  충성스런 곧은 마을 왕산(王山)을 보았도다.*조대(朝對)는 "前對之峰, 朝入之水"의 줄인 말이다. 풍수지리에서 조대의 길흉화복은 전적으로 혈처에 달려 있는데 아무리 앞산이나 들어오는 물이 좋아도 혈장이 흉하면 그 좋은 조대도 흉하게 작용하며 나쁜 조대라 할지라도 혈장이 좋으면 그 조대는 길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2020-03-09 | NO.196
  • 이우규 李祐珪 건양 1년(1896) 6월 26일∼건양 2년(1897) 5월 22일
    이우규 李祐珪 건양 1년(1896) 6월 26일∼건양 2년(1897) 5월 22일이우규(?∼?)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성천(聖天), 호는 아주(鴉州)이다.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교식(李敎植)이다. 1885년 유학(幼學)으로 별영초관(別營哨官)에 임명되어 관직에 오르면서 내무 주부사, 1886년 내무부 주사, 1889년 과천현감, 1890년 안성군수, 1892년 연천현감, 1895년 곡성군수를 거쳤다. 1896년 3월 15일 나주참서관에 제수되어 3월 17일 나주재판소 검사를 겸임하고 4월 30일 부임한다. 6월 26일에는 나주군수로 부임하여 단발령 의병 봉기 뒤의 혼란한 나주민심을 정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나주군수로 부임하던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남도 나주군이 된다. 1897년 5월 22일에는 면직된다. 1900년에는 전라남도양무감리 6품을 역임하고 1901년에 양무감리가 되어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특히 잠업에 식견이 높아 1884년에 『잠상촬요(蠶桑撮要)』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안성시 안성공원에 「행군수이공우규영세불망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195
  • 이우규 李禹圭 정조 14년(1790) 4월 11일∼정조 16년(1792) 6월 9일
    이우규 李禹圭 정조 14년(1790) 4월 11일∼정조 16년(1792) 6월 9일이우규(1736∼?)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현보(⽞甫)이다. 아버지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이익정(李益炡 1699∼1782)이고 동생이 공조판서를 지낸 이성규(李聖圭)이다. 1756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홍릉참봉을 시작으로 1770년 장악주부, 1771년 양성 현감, 1774년 과천현감, 1776년 안산군수, 1781년 공조좌랑, 인천부사, 1782년 돈녕 주부, 1785년 금산군수, 1788년 순흥부사를 지냈다. 1790년 3월 14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1791년(정조 15) 5월 22일 승정원일기에 흑산도 김이수(⾦理守)가 도감 (都監)에 납본하는 지역(紙役)이 폐단에 대한 격쟁 원정을 논의하는 내용과 나주목사 이우규의 첩정 기록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술(1790년) 4월 11일 부임하였고 임자 (1792년) 5월에 휴가를 얻어 상경한 이후에 병이 심하여 6월 9일에 이조에 사직소를 올리고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194
  • 이욱 李勖 세종 8년(1426) 4월 7일∼세종 12년(1430) 4월 4일
    이욱 李勖 세종 8년(1426) 4월 7일∼세종 12년(1430) 4월 4일이욱(?∼?)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1418년 판전의감사,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거쳐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역임한 후 1426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3월 26일 기록에, 나주목사 이욱과 전라도절제사 이각(李恪)이 서로 다투다가 각각 외방에 부처되었고 1431년에 석방된다. 또 1433년 4월 28일 기록에 “형조에서 전목사 이욱이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을 만든 죄를 아뢰니, 직첩을 거두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금성일기』 「을사년 1425년」의 기록에 “1426년 4월 9일 시행 신임 판목사 가선대부 이욱이 4월 7일 직급이 올랐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병오 (1426년) 4월 7일 도임, 경술(1430년) 4월 4일 직산군수로 폄하되어 출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93
  • 이운홍
    이운홍(李運鴻), 湖節2上-070-1, 光州, 壬辰, 奇孝曾同募-《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92
  • 이원배 李遠培 정조 10년(1786) 7월 26일∼정조 12년(1788) 4월 5일
    이원배 李遠培 정조 10년(1786) 7월 26일∼정조 12년(1788) 4월 5일이원배(1725∼?)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장(⼠⾧),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성균 진사 이덕윤(李德潤)으로 성균진사 이덕해(李德海)에 입적되었다. 176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763년 의금부 도사·종부직장, 1764년 사옹주부·감찰, 1765년 공조정랑, 1766년 문화현령, 1768년 재령군수, 1775년 함흥판관, 1780년 선혜낭청, 1781년 임피현감, 1782년 인천부사, 1786년 형조정랑을 거쳤다. 7월 13일에 나주목사에 제수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오(1786년) 7월 13일 본직을 제수받아 동월 26일에 도임 하였으나 무신(1788년) 3월 7일 본주의 세선(稅船) 3척이 치패(致敗)된 일로 대죄하기 위하여 상경하였고, 4월 5일에 순영(巡營)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가 5월 10일에 풀려났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191
  • 이유겸 李有謙 효종 원년(1649) 8월 6일∼효종 1년(1650) 1월 12일
    이유겸 李有謙 효종 원년(1649) 8월 6일∼효종 1년(1650) 1월 12일현감 이유겸(1586∼1663)의 본관은 우봉(⽜峯)이며,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 이다. 할아버지는 관찰사 이지신(李之信), 아버지는 증 승지 이길(李劼)이다. 1623년 인조 즉위 후 직언하다 죄를 입은 유생으로 김효성 등과 함께 선정되어 6품을 부여받아 신령현감에 제수되었다. 신령현감 재임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布)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1629년 공조좌랑, 함흥판관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 봉기, 1637년 사복판관, 1639년 순창군수, 1644년 사복시정, 1645년 대구부사, 1648년 판결사, 1649년 6월 22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8월 6일 부임하였는데,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 1650년 1월 12일 파출되어 떠났다. 이후에도 1653년 김제군수, 1654년 성주목사, 1655년 공조참의, 1656년 호조참의, 1657년 오위장, 1660 부호군, 오위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만회유고 (晩悔遺稿)』 4권 2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기축(1649년) 8월 6일 도임하였는데 경인(1650년) 1월 12일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峯書院)과 순창의 지계 서원(芝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쓴 그의 신도비명이 『송자대 전(宋⼦⼤全)』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190
  • 이유인 李有仁 성종 18년(1487) 4월 12일∼*성종 21년(1490) 6월
    이유인 李有仁 성종 18년(1487) 4월 12일∼*성종 21년(1490) 6월이유인(?∼1492)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산수(⼭叟), 거주지는 죽산(⽵⼭)이다. 아버 지는 낙안군수 이계번(李繼蕃), 형은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감사를 지낸 이윤인이다.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465년 사간원 헌납을 시작으로 훈련원 첨정, 통정대부 행 사복시정으로 삼았다. 이유인은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있을 때 청렴하고 공평하고 공정하여 특별히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로 승진하였다. 1478년 통정대부 호조참의, 전주부윤, 행호군, 병조참지, 강원도 관찰 사, 이조참의 등을 거쳐 1487년 4월 12일에 가선대부 나주목사를 제수 받았다. 특히 1489년 승정원에서 또 특진관을 뽑을 때 김종직과 함께 선발되기도 하였다. 1491년 사헌부 대사헌을 병으로 사직하자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1492년 예조참판으로 재직중 4월 13일 사망하였다. 나주목사로 재직할 때 객관의 옛터에 금성관을 복원하고, 동시에 객사의 정문인 망화루도 건립하였다. 『성종실록』 그의 졸기에 사신이 평하길, “공 근(恭謹)하고 염정(廉靜)한 성품으로, 치민(治民)을 잘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명성(名 聲)과 업적(業績)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189
  • 이윤무(李允武)
    광산(光山) 출신. 기우(氣宇)가 헌앙(軒昻)하고 재학(才學)이 높아 인조 때에 사복사부정(司僕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영진(榮進)에 뜻을 버리고 그 정훈(庭訓)을 받들어 후학교도(後學敎導)에 전력하였다. [참고문헌] 광주지, 전라남도지
    2020-03-06 | NO.188
  • 이은 李垠 태종 2년(1402) 2월 1일∼태종 2년(1402) 4월 24일
    이은 李垠 태종 2년(1402) 2월 1일∼태종 2년(1402) 4월 24일이은(?∼1438)의 본관은 흥양, 초명은 이치(李致), 아버지는 좌찬성 이서원이다. 1388 년(창왕 즉위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형 이균(李均)도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소윤을 지냈다. 조선개국 이후 1400년 우간의, 1401년 충청도안렴사, 1403년 우사간, 1405년 좌사간, 1406년 대언, 1410년 개성부유후, 1413년 풍해도 관찰사, 1414년 대사헌,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6년 경주부윤이 되었다. 『금성일기』「임오년 1402년」에 “목사 이은이 2월 1일에 도임하였다가 4월 24일에 휴가를 얻어 서울로 갔는데 이임발 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임오(1402년) 2월 1일 도임, 동년 4 월 22일에 교체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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