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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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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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택 尹澤 충목왕 1년(1345, 을유) 전후
    윤택 尹澤 충목왕 1년(1345, 을유) 전후윤택(1289∼1370)의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이며 시호는 문정(⽂貞)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해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공부했고, 특히 『춘 추좌전』에 능통하였다. 1317년(충숙왕 4)에 급제하여 경산부사록과 교감을 거쳐 검열에 올랐다. 우부대언과 우대언을 거쳐 충목왕 초기인 1345년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충목왕 서거 후 밀직이었던 이승로와 함께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즉위 후 밀직제학을 거쳐 개성부윤에 임명 되었다. 또 1357년(공민왕 6)에 왕이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에게 궁궐터를 축조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자 간하여 막아내었다. 효성이 깊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공민왕이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고 율정(栗 亭)이라는 호를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栗亭集)』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46
  • 윤행 尹⾏ 명종 15년(1560) 8월 24일∼명종 16년(1561) 8월
    윤행 尹⾏ 명종 15년(1560) 8월 24일∼명종 16년(1561) 8월윤행(1508∼1592)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대용(⼤⽤), 호는 졸재(拙齋)로 윤효정(尹孝貞)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해남윤씨의 해남 입향조이며 나주 출신 금남 최부(崔溥)와 동서간이다. 형 윤구(尹衢)와 동생 윤복(尹復)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1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 1553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1560년 7월 7일 나주 목사에 제수되어 8월에 나주목사에 부임한다. 1561년에 7월에 나주 토호들이 대낮에 양민의 얼굴에 재를 바르고 때려죽인 뒤 물속에 시체를 버린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나 가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토호들이 도망간 몇 달 뒤에야 관찰사에게 보고한 다. 이 사실을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밝혀지자 파직당한다.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1563 년 동래부사, 1566년 상주목사, 1571년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 신(1560년) 8월 24일 도임하였고, 신유(1561년) 8월에 살인수 김응란을 체포하지 못한 일로 파직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45
  • 윤효손 尹孝孫 성종 17년(1486)∼성종 18년(1487) 3월
    윤효손 尹孝孫 성종 17년(1486)∼성종 18년(1487) 3월윤효손(1431∼1503)의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1473년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을 지내고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임(外任)을 청하자 1486년(성종 17) 가선대부 행 나주목사가 되어 6월 17일 사조(辭朝)하고 부임하였다. 12월 29일에는 윤효손 목사가 올린 철장(鐵場) 도회(都會)를 폐지하지 말라는 상서에 대해 의논하는 기록이 『성종실 록』에 있다. 창평 등을 사례로 언급하였다. 철장은 철을 캐내어 제련해 생산하던 곳이고 도회는 사람을 모으거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설치하는 곳이다. 1490년 정조사(正朝 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효(⽂孝)이다.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묘소에 있는 신도비는 보물이고 석등과 석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다. *상세이력은 전주부윤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44
  • 윤흡 尹潝 영조 16년(1740) 12월∼영조 19년(1743) 8월
    윤흡 尹潝 영조 16년(1740) 12월∼영조 19년(1743) 8월윤흡(1689∼1753)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화숙(和叔)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윤세수(尹世綏)이다. 오음 윤두수(尹⽃壽)의 후손이다. 1726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725년 휘릉참봉, 1726년 선릉참봉, 1730년 형조좌랑, 1730년 함흥 판관, 1734년 배천군수, 1740년 호조정랑을 지냈다. 1740년 11월 2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16일에 하직하고 부임하여 재임하다가 1743년 8월 29일 체포된 뒤파직되었다. 재임 때에 금성관을 보수하고 망화루를 중건하였다. 1746년 황주목사, 1749년 수원부사, 1751년 원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740년) 12 월에 도임하였고 계해(1743년) 8월에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243
  •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로 1641.11~1643년까지 있었다.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 ~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 제33권 / 묘지명(墓誌銘)에 '사위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묘지명'에 "나의 사위 진사 이상주는 나의 벗인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이돈시(李敦詩)의 장손(長孫)이다. 돈시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諱) 귀(貴)의 사자(嗣子)이다. 나의 사위는 돈시의 아들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이각(李恪)의 아들이다. 나와 돈시의 관계는 골육의 형제와 같은데, 두 집안이 잇따라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들였으니, 내 아들 내양(來陽)은 돈시의 사위가 되었고 돈시의 손자 상주는 내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또 '망녀(亡女)의 묘지문'에는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처(妻) 조씨(趙氏)는 전 예조 판서 익(翼)의 딸이요,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맹(孟)의 후예이다. 나의 5남 1녀 중에서 이 딸이 또 가장 늦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부처가 귀중하게 여긴 것이 매우 남달랐다.나이 16세에 이상주에게 출가하였는데, 상주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의 증손이요,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휘 시백(時白)의 손자요, 광주목사(光州牧使) 휘 각(恪)의 아들이다. 연평은 종사(宗社)에 큰 공훈을 세워서 귀한 신분이 되고 총애를 받은 것이 조정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집안은 대대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 성대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상주의 사람됨을 보면 온아(溫雅)하고 간결(簡潔)하였으며 문사(文思)가 또 영발(穎發)하였으니, 뭇 선비들 중에서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했다.
    2023-08-09 | NO.242
  • 이갱생 李更⽣ 인조 20년(1642) 10월 10일∼인조 23년(1645) 10월 18일
    이갱생 李更⽣ 인조 20년(1642) 10월 10일∼인조 23년(1645) 10월 18일이갱생(1585∼1646)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숙향(叔向), 아버지는 승지에 추증된 이유(李綏)이다. 1623년에 김화현감, 1624년 소모관, 1631년 공조정랑, 1632년에 풍덕군수, 1635년 통훈대부 한성부 서윤, 1638년 청도군수, 1642년 인천도호부사, 1642년 9월 11일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10월 10일 부임하였다. 백성을 잘 보살펴 1643년 9월 19일에는 반숙마(半熟⾺) 1필 하사받았다. 1645년 7월 11일 주리(州吏) 양한룡(梁漢⿓) 등이 목사 이갱생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현(錦城縣)이라 하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 이름을 바꾸었다. 1645년 7월 19일 실록에 의하면 나주목사의 교체 논의가 있었으나 그대로 복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가 10월 18일에 교체되었다. 『인조실록』에 이갱생 목사는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총명하고 관찰력이 있어 본디부터 고을을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형벌을 함부로 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리 양한룡 등이 임금에게 진상할 전죽(箭⽵)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다스리는 과정에서 양한룡의 족당(族黨) 10여 인이 양한룡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칼을 가지고 아문(衙⾨)으로 들어가 목사를 찔러 상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목이 현이 되고 도명이 바뀌고 관찰사는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나주의 삼향죽전은 가장 유명한 토산이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오(1642년) 10월 10일에 도임하여 을유(1645년) 8월 28일 오리(惡吏)로 되었기에 목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41
  • 이거이 李居易 우왕 14년(1388) 2월 1일∼우왕 14년(1388) 7월 10일
    이거이 李居易 우왕 14년(1388) 2월 1일∼우왕 14년(1388) 7월 10일이거이(1348∼1412)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자(淸虛⼦)이 다. 아버지는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 문간공(⽂簡公) 이정(李挺)이다. 1374년에 나주 목사로 재임한 이거인(李居仁)의 동생이다. 고려 말엽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쳤 고, 이성계와 뜻을 같이한 관계로 조선왕조에 평안도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참찬문하 부사,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사일등공신과 좌명일등공신의 책록을 받았으며, 영의정까지 올랐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도(⽂度)이다. 『금성일기』 「무진년 1388년」에 “목사 이거이가 3월 11일 도임하였다가 동년 7월 10일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무진(1388년) 2월 11일 도임, 동년 7월 10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40
  • 이거인 李居仁 공민왕 22년(1373) 10월 13일∼공민왕 23년(1374) 7월 12일
    이거인 李居仁 공민왕 22년(1373) 10월 13일∼공민왕 23년(1374) 7월 12일이거인(?∼1402)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부(壽⽗), 호는 난파거사(蘭坡居⼠)다. 아버 지는 문간공(⽂簡公) 이정(李挺)이며, 1388년 2월 1일부터 1388년 7월 10일까지 나주목 사로 재직한 이거이가 동생이다. 우왕 초부터 밀직부사, 경상도도순문사, 상만호, 문하평리를 거쳤다. 조선이 건국되자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청천백(淸 川伯, 淸城伯)에 봉하여졌다. 1399년에는 조박(趙璞) 살해 음모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 되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은퇴하였다. 『금성일기』 「계축년 1373년」에는 “목사 이거인이 10월 13일에 도임하여 갑인(1374년) 7월 11일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 는 기록과 『금성읍지』에 “계축(1373년) 10월 13일에 부임하였고, 갑인(1374년) 7월 12 일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39
  • 이경록 李慶祿 선조 24년(1591) 3월 20일∼선조 25년(1592) 7월
    이경록 李慶祿 선조 24년(1591) 3월 20일∼선조 25년(1592) 7월이경록(1543∼1599)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백수(伯綏), 아버지는 회덕현감 이간(李幹)이다. 1576년(선조 9) 식년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호조좌랑, 하동현감, 고성현령, 경흥부사로 발탁되었다. 1588년 1월 북병사 이일(李鎰)과 함께 여진족을 물리치고, 1589년 김해목사가 되었다. 1591년 2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 는데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야 한다는 사간원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592년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 (⾦千鎰)을 도와 공을 세우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2년 7월 13일 제주목사로 전직되 었다가 1598년 춘위장으로 사직했다. 완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되 었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591년) 3월 20일에 도임하였으나, 임진(1592년) 8월에 당상관에 오르고 제주목사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38
  • 이계익(李啓翼)
    이계익(李啓翼, 1878~?)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경직(敬稷), 호는 오촌(梧村)이다. 광주 누문리에 살았다. 부 : 李龍憲조 : 李敏炯증조 : 李萬燁외조 : 閔三顯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7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吳東洙 등 通文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8-05 | NO.237
  • 이계인(李繼仁)
    이계인(李繼仁)용인(龍仁) 출신. 도학과 문장이 탁월하여 명류(名流) 가운데 그 이름이 뛰어났다. 을묘사화(乙卯士禍)에 그 장자 윤(允)이 조정암(趙靜菴)과 함께 화를 입자, 명류사회(名流社會)에 이름을 감추고자 광산군(光山郡) 서방면(瑞坊面) 오치(梧峙), 현 서산동(瑞山洞)에 터를 닦고 이주하여 후학에 도의(道義)를 가르치며 여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2018-07-06 | NO.236
  • 이계종(李啓琮)
    이계종(李啓琮, 1857~?)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명숙(明淑), 호는 삼산(三山) 이다. 광주 서방면 오치리에 살았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典賓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0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235
  • 이교 李晈 세종 6년(1424) 10월 19일∼세종 7년(1425) 7월
    이교 李晈 세종 6년(1424) 10월 19일∼세종 7년(1425) 7월이교(?∼1446)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이요정(⼆樂亭)이다. 아버지는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義安⼤君) 이화(李和, ?∼1408)으로 이교는 다섯 째 아들이다. 1388년에 음직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호군이 되고, 1409년에 원윤(元尹)에 임명되었다. 1412년에 좌군 동지총제, 1417년 동지돈녕부사, 1424년 중군총제를 역임하였다가 1424년 10월부터 1425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역임한다. 이후 우군총제, 동지돈녕, 동지총제, 지중추원사, 충청도도절제사, 지돈녕부사, 경상도도절제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일기』「계묘년 1423년」의 기록에 “신임 병마도절제사 이교가 1424년 10월 4일에 나주에 왔다가 1425년 7월에 서울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34
  • 이노영 李魯榮 헌종 8년(1842) 9월 24일∼헌종 9년(1843) 10월 20일
    이노영 李魯榮 헌종 8년(1842) 9월 24일∼헌종 9년(1843) 10월 20일이노영(1781∼?)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공무(公茂)이다. 아버지는 이정모(李正 模)로 1788년 4월부터 1789년 4월까지 나주목사로 재직했다. 1810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13년 부사직, 1817년 헌릉참봉, 1819년 내섬봉사, 1820년 금부도사, 1822년 사복주부, 1823년 신계현령·남평현감, 1826년 한산군수, 1830년 선혜청 낭청, 1832년 금산군수, 1841년 보은군수를 지냈다. 1842년 8월 9일 나주목사로 제수 되어 9월 24일 부임하였다. 1843년 6월에 조법(漕法)에 관한 일로 해임 논의가 있었고 윤7월에는 표류해 온 사람이 중도에서 도망하여 감일등 논의가 있었다. 10월 21일 에는 전라감사 서기순(徐箕淳)의 공문에 따라 이조에서 “나주목사 이노영이 상경한 지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임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데, 현재 환곡의 상환(償還)이 한창 진행되어 고을을 비우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니 재촉하여 내려보내라.”고 했으나 신병이 중해져 내려갈 수 없다하여 파출 전교가 내린다. 1847년 아산현감을 역임 하였고. 1860년에 통정대부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842년) 9월 24일에 부임하였고 계묘(1843년) 10월 20일에 상경하여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233
  • 이도현 李道顯 영조 11년(1735) 10월 26일∼영조 12년(1736) 9월
    이도현 李道顯 영조 11년(1735) 10월 26일∼영조 12년(1736) 9월현감 이도현(?∼?)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722년 상의원 별제· 의금부 도사·빙고 별제·사복시 주부, 1723년 고산현감, 1729년 재녕군수, 1732년 부사과, 1733년 대흥군수를 지냈다. 1735년 9월 25일 금성현감으로 제수되어 10월 26일 부임하였다. 1741년 전설별제·사재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나주에 부임한 이도현 목사가 향풍을 교화시킴은 물론, 나주지역의 오랜 폐단이었던 향교의 제수와 관련된 세금 문제를 해결하였다며 그 공을 높이 평가한 글이 오달운(吳達運, 1700∼1747)의 『해금집(海錦集)』에 실린 「나주향교포수리혁서(羅州鄕校脯修釐⾰序)」이다. 1736년(영조 12) 6월 23일 『승정원일기』에 “어공(御供)을 하는 배에 강제로 곡물을 운반하게 한 금성 현감 이도현 등을 파직하고 감색 등은 형추하여 정배하기를 청하는 사옹원 도제조 등의 계”에 따라 윤허한다는 전교가 있었다. 그러나 6월 25일 기록에 “폐단을 개혁하여 여러 해 동안 쌓인 포흠(逋⽋)을 모두 속속들이 조사해서 징수하였고, 잡힌 감색이 탈출하여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 투서하였던 것”으로 밝혀져 파직을 당하지는 않는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735년) 10월 26일 도임하였고 병진(1736년) 9월에 사직하였 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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