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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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 李憪 현종 5년(1664) 4월 8일∼현종 6년(1665) 6월 24일
- 이한 李憪 현종 5년(1664) 4월 8일∼현종 6년(1665) 6월 24일이한(?∼?)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정사공신 이시백(李時⽩)의 둘째 아들이다. 1635 년 6월에 나주목사를 지낸 이시방(李時昉)이 큰아버지가 된다. 1639년 청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못했다. 1640년 죽산부사, 1645년 충원현감, 1648년 사재첨정, 상주목사, 1650년 통정대부, 1653년 공산현감, 1655년 여주목사, 1658년 서원현감, 1662년 양주목사를 거쳐 1664년 2월 1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8일 도임하였 다. 『금성읍지』에는 “갑진(1664년) 4월 8일 도임하였고 을사(1665년) 6월 24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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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함일(李涵一)
- 이함일(李涵一, 1562~1621)의 본관은 함풍, 자는 양오(養吾), 호는 일사(一査)이다. 이함일의 8대조 春秀는 왜구가 육지와 섬을 노략질을 하자 全羅水使에 제수되어 적을 평정하였으며, 7대조 李競은 兩館大提學을 역임하고 宗系辨誣로 명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부친은 承仕郞 邦弼로 河西 金麟厚의 제자이며, 모친은 光山金氏로 參奉 有仁의 딸이다. 이함일은 光州 梧峙里 집에서 1563년(명종 18) 3월 16일에 태어났다. 그는 재주와 역량이 뛰어났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양친에게 효도하고 세 동생들과 우애하니, 향리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따랐다. 그는 1589년(선조 22)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임진란 때에 성균관을 지켰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집에 돌아갔으나 부모들이 이미 피해를 입어 돌아가신 것을 알자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삼년상을 극진히 치루었다. 이후 그는 1603년(선조 36)의 식년문과에서 병과 1위로 급제하여 1606년부터 관직에 제수되어 成均館學正兼中學訓導, 宗簿寺主簿, 司憲府監察, 司憲府持平, 兵曹正郞, 康津縣監, 保寧縣監, 掌樂院僉正, 寧海府使, 春秋館編修官, 成均館司成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1618년(광해군 10)에 仁穆大妃의 廢母로 조정에 나가지 않아 康津縣監에 補任되었으며, 1620년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621년 7월 7일에 병이 들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光州 斗坊面 角化山이다. 그는 南陽洪氏 進士 景舫의 딸 사이에서 廷彙 등 1남 2녀를 두었다.
- 2020-08-02 | NO.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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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李顯弼 영조 12년(1736) 10월 20일∼영조 13년(1737) 4월
- 이현필 李顯弼 영조 12년(1736) 10월 20일∼영조 13년(1737) 4월현감 이현필(1689∼?)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익경(翊卿)이다. 172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22년 태릉참봉, 1724년 효릉참봉, 1725년 제용직장, 1728년 내사시 직장·사포별제·공조좌랑·호조좌랑, 1729년 호조정랑, 1730년 전주판관, 1732년 형조 정랑·공산현감, 1735년 귀후별제·사직령·한성서윤을 지내고 1736년 10월 10일 금성현 감에 제수되어 10월 20일 부임하였다. 이현필은 1737년 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게 되는데, 과거장을 관리하는 고관(考官)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삭과 (削科)를 당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금성읍지』에는 “병진(1736년) 10월 20일 도임하 였고 정사(1737년) 4월에 사직하였다.”기록.*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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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호 李⽞好 헌종 4년(1838) 3월 17일∼헌종 6년(1840) 2월 12일
- 이현호 李⽞好 헌종 4년(1838) 3월 17일∼헌종 6년(1840) 2월 12일이현호(1781∼1842)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공(⼦孔)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해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이양회(李良會)이고, 명필 수헌(秀軒) 서무수(徐懋修, 1716∼ 1785)의 사위이다. 1818년 광릉참봉, 1821년 의영봉사·금부도사, 1823년 선릉직장· 인의, 1824년 사복주부·현륭원령, 1826년 돈녕판관, 1827년 과천현감·강서현령, 1829년 영산현감, 1833년 김제군수, 1834년 청송부사, 1837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38년 2월 3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고 3월 17일 부임하였다. 1840년 3월 18일 신병으로 파직되었다. 1841년 선혜청 낭청을 거쳐 1842년에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술(1838년) 3월 17일에 부임하였고 경자(1840년) 2월 12일에 중(中)으로 평가 되어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목사 재임 시 1839년에 나주향교를 보수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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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협 李埉 영조 21년(1745) 6월 1일∼영조 21년(1745) 8월
- 이협 李埉 영조 21년(1745) 6월 1일∼영조 21년(1745) 8월 이협(1696∼?)의 본관은 덕수(德⽔)이다. 아버지는 이희술(李喜述)이다. 172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31년 순릉참봉, 1732년 금부도사, 1734년 이천현감, 호조정랑, 1735년 대구판관, 1739년 청도군수, 1743년 광주(光州)목사, 1745년 원주목사를 거쳤다. 1745년 4월 1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5월 19일 하직하고 6월 1일에 부임하 였지만 행정능력이 부족하다는 중론에 따라 바로 8월에 사직 처리가 되고, 11월에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1746년 상주목사, 1752년 파주목사, 1753년 삼척부사, 1755년 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745년) 6월 1일 도임하였고 같은해 8월에 대언(坮⾔)을 만나 체직 되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상주시 남적동에는 1748년에 세운 「목사이후협승인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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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곤 李衡坤 영조 3년(1727) 9월 15일∼영조 9년(1733) 4월
- 이형곤 李衡坤 영조 3년(1727) 9월 15일∼영조 9년(1733) 4월이형곤(?∼?) 4) 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710년 영소전 참봉, 1712년 경기전 참봉·예 빈봉사, 1714년 사옹직장, 1716년 장악주부·의금부도사, 1717년 홍산현감, 1722년 의금부도사·한성판관·대구판관·안성군수, 1723년 공산현감, 1724년 첨지, 1727년 9월 1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0월 3일 하직하고 10월 13일 부임하였다. 1728년에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승정원일기』에 1729년 8월 23일 금성현 강등 윤허 기록이 있다. 이현곤은 파직되지 않고 종6품 현감으로 재임하게 된다. 1729년(영조 5) 2월 25일 『승정원일기』에는 나주의 해도(海島)에 관한 일에 대한 병조판서 조문명의 상소가 있는데, “나주목이 관할하는 서해와 남해에 있는 여러 섬은 57개나 됩니다. 그 넓이를 모두 합하면 길이는 모두 640여 리이고 너비도 300여 리이며, 민호의 숫자는 모두 4380여 호이고 전결(⽥結)의 총수는 모두 4010여 결입니다. 그 밖에도 누락된 섬이 23개인데 비록 작은 섬들이지만 각각 섬의 이름이 있고 또 주민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전 전라 병사 조경(趙儆)이 체차되어 돌아올 때 나주 목사 이형곤과 함께 각 섬의 형지(形⽌)를 자세하게 논하고 온 것입니 다. 이곳의 여러 섬은 바로 양남(兩南)의 조운이 거치는 길이니 조정으로서는 등한한 곳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1730년(영조 6) 12월 29일 기록에는 사간원에서 전라도 금성현의 하의(荷⾐)·태금(苔錦) 등 위아래 세 섬의 절수 문제로 인한 송사를 거론하는 내용이 있다. 1731년 선정하였다 하여 통정대부로 가자되고, 1732년 의금부 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사유는 “사사로이 1천 석에 가까운 쌀을 보내어 경강(京江)에서 발매하다가 마침내 양천현(陽川縣)에서 붙잡혀 진휼청에 보고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금성읍지』에는 “정미(1727년) 10월 13일 도임하였고 계축(1733년) 4월에 정배온 죄인을 체포하지 못한 일로 나포되어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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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석 李鎬奭 광무 2년(1898) 12월 27일∼광무 4년(1900) 2월 8일
- 이호석 李鎬奭 광무 2년(1898) 12월 27일∼광무 4년(1900) 2월 8일이호석(1854∼?)의 본관은 우봉, 할아버지는 봉조하로 치사한 이휘정(李輝正), 아버지는 이정(李 )이다. 1867년 가감역, 1873년 광릉참봉, 1874년 구일제(九⽇製) 합격, 1876년 좌부솔·조지별제·한성주부·한성판관, 1877년 문화현령, 1880년 옥천군수, 1883년 좌위솔·사옹원 첨정, 1885년 우사어를 지내고 증광시 문과 갑과에 3위로 급제,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1889년 형조참의·대사성, 1894년 병조 참의, 1897년 봉상사 부제조·비서원 승, 1898년 상의사장을 지냈다. 1898년 12월 27일 나주군수에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1900년 12월 8일 성주군수로 이임하였다. 1901 년 광주(廣州)부윤, 1902년 중추원 의관, 1903년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 1904년 봉상사 제조, 1905년 영희전 제조를 역임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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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헌
-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1858~1919)문집으로 《초은유고(樵隱遺稿)》(1929)가 있다.李顥獻(1858~1919)이 편찬했고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이 병환 중에 서문을 쓰고, 하한下澣 김기상金基尙이 발문을 썼다.
- 2020-04-06 | NO.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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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환검 李還儉 우왕 2년(1376) 8월 12일∼우왕 4년(1378) 1월. 상경
- 이환검 李還儉 우왕 2년(1376) 8월 12일∼우왕 4년(1378) 1월. 상경이환검(?∼?)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고려사』열전 1386년(우왕 12) 1월에 “우왕이 숙녕옹주(肅寧翁主)에게 주옥장을 주려고 보원고별감 황보(⿈補)를 불러 주옥의 숫자를 물었는데, 황보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우왕이 크게 화를 내면서 즉시 황보를 순군에 가두고, 또 제조 박천상·서균형·이환검의 가노(家奴)를 각 10인씩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병진년 1376년」에는 “목사 이환검이 8월 12일 나주에 왔다 무오(1378년) 1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병 진(1376년) 8월 12일 도임, 무오(1378년) 정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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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연 李晦淵 순조 33년(1833) 6월 4일∼헌종 3년(1837) 3월 21일
- 이회연 李晦淵 순조 33년(1833) 6월 4일∼헌종 3년(1837) 3월 21일이회연(1779∼1850)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양(景養)이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1775년 3월부터 1776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낸 이명중(李明中)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의열(李義悅)이다. 형 이지연 (李⽌淵)은 1830년 9월부터 1831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지냈다. 1805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 1816년 온릉참봉, 1821년 제용 부봉사·빙고별검·호조좌랑, 1822년 신계현 령, 1823년 함양군수, 1824년 호조정랑, 1830년 해주판관을 지냈다. 1833년 5월 10 일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6월 4일 부임하였다. 1838년 군자정, 1839년 여주목사, 1840년 재령군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사(1833년) 6월 4일에 부임하였고 정유(1837년) 3월 21일에 병으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나주목사로 재직 시 나주향교의 「사마재개건기」를 지었으며, 나주시 영산동주민센터 광장에는 1836년 흑산도 주민들이 세운 「목사이공회연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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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李 영조 22년(1746) 4월 24일∼영조 22년(1746) 4월 29일
- 이후 李 영조 22년(1746) 4월 24일∼영조 22년(1746) 4월 29일이후(1694∼1761)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후옥(厚⽟), 호는 구옹(癯翁)이다. 아버지는 참판 이명희(李命熙)이다. 1726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문음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746년 윤3월 1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고 4월 24일 부임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4월 29일 이임하였다. 1750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해에 호남균전세사(湖南均⽥稅使)가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호남균세사가 되었 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1752년 동의금이 된 뒤 한성부우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 였다. 1755년 이조참판, 형조판서·병조판서·우빈객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58년 이조 판서 때 김상로(⾦尙魯)를 천거하였던 문제로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그 해에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760년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傅)를 겸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인(1746년) 4월 24일 도임하였고 같은 달 29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시호는 충현(忠顯)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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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李垕 효종 7년(1656) 7월 11일∼효종 8년(1657) 4월 5일
- 이후 李垕 효종 7년(1656) 7월 11일∼효종 8년(1657) 4월 5일현감 이후(1611∼1668)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중(⼦重), 호는 남곡(南⾕)이 다. 아버지는 봉래군(蓬萊君) 이형윤(李炯胤)이다.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44년 정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동생 이무(李堥)도 문과 급제자이다. 검열을 거쳐 1647년 승문원 저작, 1650년 지평으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4년 장령, 1655년 필선·사간·함경도 어사, 1656년 5월 18일 금성현감 으로 제수되어 7월 11일 도임하여 1657년 4월 5일 이임하였다. 1658년 사간, 1659 년 보덕·집의, 1660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사간원 사간·부호군, 1660년 9 월 광주목사(光州), 1662년 종부시정·사성, 1663년 사복시정, 1664년 봉사시정·집의· 홍양현감, 1667년 사간을 거쳐 온성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금성읍지』에는 “갑오 (1654년) 2월 19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8월에 영장 성익(成釴)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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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원 李厚源 정조 13년(1789) 8월 27일∼정조 14년(1790) 3월 12일
- 이후원 李厚源 정조 13년(1789) 8월 27일∼정조 14년(1790) 3월 12일이후원(?∼?)의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전라감사를 지낸 부제학 이석표(李錫杓)이다. 음관으로 관직에 나아가 1776년 순릉직장, 1778년 전설별제, 1779년 신녕현감, 1782 년 금부도사, 홍산현감, 1785년 안산군수, 1788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789년 8월 6 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792년 의성현령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기유 (1789년) 8월 6일 선산부사에서 옮겨 왔다. 8월 27일 부임하였는데, 경술(1790년) 3 월 12일 대계(臺啓)에 의해서 나포되어 파직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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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년 李喜年 숙종 1년(1675) 9월 25일∼숙종 2년(1676) 7월
- 이희년 李喜年 숙종 1년(1675) 9월 25일∼숙종 2년(1676) 7월이희년(1618∼?)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자수(⼦壽)이다. 아버지는 조산대부 행승 문원 저작을 지낸 이적(李), 동생 이연년(李延年)은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648년∼1652년 의금부 도사, 1652년 목천현감, 1656년 호조 좌랑, 1657년 횡성현감·경산현령, 1663년 형조정랑, 1665년 안악군수, 1666년 남원부 사, 1671년 사복시 첨정, 1672년 밀양부사를 거쳐, 1675년 9월 25일 나주목사로 도임 하였다. 1676년 2월 과거시험 시관으로서 술을 마셨다 하여 파직되었다, 1676년 나주 목사로 있을 때 최부의 『표해록』을 재발간하였다. 1677년 공조정랑·원주목사, 1679년 배천군수·사복판관, 1680년 파주목사, 1689년 제용감 정, 1697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밀양부사에서 이동하여 을묘(1675년) 9월 25일 도임하였다.”라 되어 이임일은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실록에 의하면 병진(1676년) 7월에 파직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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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두 李羲⽃ 순조 24년(1824) 윤7월 10일∼순조 25년(1825) 9월 9일
- 이희두 李羲⽃ 순조 24년(1824) 윤7월 10일∼순조 25년(1825) 9월 9일이희두(1768∼?)의 본관은 한산(韓⼭)이며, 자는 칠여(七汝)이다. 아버지는 경상감사를 지낸 이태영(李泰永)으로 통덕랑 이규영(李奎永)의 양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태영이 경상감사 재임 시 7개의 바위에 7명의 아들 이름을 하나씩 새겨 기원하였더니 형제 일곱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칠성바위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곱 형제중 둘째 아들로 형 이희갑(李羲甲), 동생 이희준(李羲準)·이희조(李羲肇)가 문과에 급제 하였다. 179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06년 동몽교관, 1809년 금부도사, 1810년 전생판관, 1811년 평강현감, 1814년 청도군수, 1821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824년 6월 2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윤7월 10일에 도임하였다. 1827년 사복첨정, 1837년 70세가 되어 통정대부가 되고, 1847년 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갑 신(1824년) 윤7월 10일 부임하였고 을유(1825년) 8월에 상경한 후 사표를 내고 체직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의하면 1825년 2월 18일에 의금부가 전라도관찰사 보고를 빌어 죄상을 고한다. 3월 13일에는 병이 심해 보방해서 조사를 하겠다고 하였 으며, 3월 17일에는 의금부에 의해 죄상이 밝혀지고 난 후 9월 9일에 파직당했다. 6)확인 불능이므로 삭제*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