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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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
-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오한원(1750∼?)의 본관은 나주(羅州)로 담양 출신이다. 자는 공예(公藝)로 아버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오현주(吳鉉冑)이고, 사간원 대사간 오정원(吳⿍源)이 형이 된다. 177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고, 1775년에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등용되었는데, 1775년 가주서, 1793년 사헌부 장령, 1796년 장악정, 1799년 정언·봉상시정, 1800년 헌납·부수찬, 1801년 부교리 겸 중학교수, 1805년 병조참지·승지, 1806년 동래부사, 1809년 부호군, 1809년 대사간, 1810년 우부승지를 지냈다. 1810년 8월 17일 나주목 사로 제수되었다. 12월 29일 『승정원일기』에 “나주목사의 상소에 정식(定式)에 어긋나고 오자(誤字)가 었으므로 도로 내려보내 다시 수정하여 올려보내야 하는데, 원래의 상소가 민사(民事)에 관계되므로 부득이 봉입(捧⼊)하더라도 해당 목사를 경책하지 않을 수 없어 추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소 내용은 기근에 대한 것과 섬 지방의 결총에 대한 것이다. 1812년 6월에 의주부윤, 1815년 대사간·우윤, 1818년 동지사 부사, 1821년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810년) 8월 17일 승지에서 본직을 제수받고 당일 사조한 후 동월 29일에 도임하였고 임신(1812년) 5월 25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가 파손 침몰된 일로 서울로 나포되어 체직되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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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림 王琳 현종 22년(1031) 5월 21일 정묘∼?
- 왕림 王琳 현종 22년(1031) 5월 21일 정묘∼?왕림(?∼?)은 『고려사』 세가(世家) 권5 1031년(현종 22) 5월 21일 정묘 기록에, “왕림 (王琳)을 검교우복야 나주목사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나주목사의 최초 기록이다. 왕림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志 권58에 “980년(경종 5) 최한(崔罕)과 왕림을 송(宋)에 파견하여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986년(경종 11)에 최한과 왕림이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서 돌아와 비서랑을 제수받았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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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복룡 禹伏⿓ 선조 35년(1602) 10월 3일∼선조 38년(1605) 1월 4일
- 우복룡 禹伏⿓ 선조 35년(1602) 10월 3일∼선조 38년(1605) 1월 4일우복룡(1547∼1613)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현길(⾒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이다. 아버지는 우숭선(禹崇善)이다.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곳에서 수령을 역임한 우경석(禹敬錫)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1577년 이이(李珥)의 천거로 소문전 참봉이 되었고, 1582년 내섬시 직장과 김포현령을 역임하였다. 1585년 목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에는 용궁현감으로서 끝까지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부사로 승진하였다. 1596 년 강화도호부사로 있을 때에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의 횡포를 금단하니,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1599년 홍주목사로 전임되었다. 1602년 충청도관찰사를 임명하 였으나 사간원 등의 파직 상소가 이어지자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 고, 1604년에는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를 건립하였다. 1605년 1월 이임하여 충주목 사로 이동하였다. 1612년 성천부사에 부임했으나 사간원의 청원으로 교체되었다. 문집 으로 『구암집(懼庵集)』과 『동계잡록(東溪雜錄)』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602년) 10월 3일 도임하였고, 계묘(1603년) 4월 어사 목장흠이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고 관리 들이 청렴하며 군병의 훈련이 잘 되었다는 계를 올리자 향표리 1습을 내렸으며, 갑진 (1604년) 정월에는 본도 순시병련어사 윤훤(尹暄)이 백성 다스림이 도내 제일이라는 계에 따라 표리 1습을 받았으며, 같은 해(1604년) 10월에 본도 순찰사의 계에 따라 조련 숙마 4필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1605년에 세운 「목사우공복룡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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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하 禹夏 태조 1년(1392) 9월∼태조 1년(1392) 윤12월
- 우하 禹夏 태조 1년(1392) 9월∼태조 1년(1392) 윤12월우하(?∼?)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1383년 6월, “왜구가 경상도 길안·안강·기계·영주 등을 노략질하였기에 전의령 우하(禹 夏)를 경상도에 파견하여 원수들이 왜구를 제대로 방어하는지 감찰하게 하였다.”는 기록과 1383년 7월, “우하(禹夏)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구와 싸워 3급을 베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임신년 1392년」에 “목사 우하가 9월 10일 도임하였다가 윤12월에 돌아갔다.”는 기록과, 『금성읍지』에는 “임신(1392년) 9월 도임, 동년 윤12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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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홍부 禹洪富 태종 3년(1403) 3월 6일∼태종 3년(1403) 7월 25일
- 우홍부 禹洪富 태종 3년(1403) 3월 6일∼태종 3년(1403) 7월 25일우홍부(?∼1414)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단양백 우현보(禹⽞寶)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입사하여, 1382년 장복서령으로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다. 아버지와 형 우홍수 (禹洪壽), 동생 우홍강(禹洪康), 우홍득(禹洪得), 우홍명(禹洪命)도 모두 문과 급제자다.1392년 6월 전의감 부령으로 재직 중에 이성계 일파의 구신(舊⾂) 제거와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까지 갔으나, 1398년 윤5월에 직첩을 환급받았다. 1400년 11 월 개성유후사 부유후를 지내고 1412년 원종공신에 추록,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다.『금성일기』 「임오년 1402년」에 “목사 우홍부가 3월 6일 도임하였다가 동년 7월 25일 판내섬시사로 임명되어 갔다.”로 되어 있는데, 사섬시(司贍寺)와 내섬시(內贍寺)로 달리 표기되어 있다. 『금성읍지』에 “계미(1403년) 3월 6일 도임, 동년 7월 25일 판사섬시 사(判司贍寺事)로 승진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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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경하(元景夏)
- 《영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10월 2일(기미)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상소하였다. (원경하는 여주 출신으로 영조의 조력자이자 정조의 스승이다) 대략 이르기를,“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부안(扶安)의 격포(格浦)는 곧 삼남(三南) 해로의 인후이며 심도(沁都)를 막아 지키는 땅입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곡식을 쌓아 놓고 배를 감추어 두었으니, 이는 먼 훗날을 헤아린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의 규모가 중간에 여러 번 바뀌어 검영을 이미 파하고 다만 별장(別將)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이 변산(邊山)에 들어와 바다를 따라 60리를 가면서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고군산(古群山)ㆍ위도(蝟島)가 아득한 대양(大洋)의 중간에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데, 양도(兩島)에 대해 바람을 타고 돛을 달면 3, 4일 지나지 않아 배를 댈 수 있습니다. 연미(燕尾)의 아래 격포는 양도와 함께 서로 기각(掎角)이 되고, 산이 항구 깊숙이 둘러져 있어 거센 바람과 심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조선(漕船)ㆍ상박(商舶)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 삼로(長年三老)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도ㆍ군산(群山)ㆍ금모포(黔毛浦) 등 4진이 수영(水營)에 이속(移屬)된 이후로 해마다 수군을 조련할 때 전함(戰艦)이 패몰(敗沒)하거나 방졸(防卒)이 익사하는 일을 더러 요행히 면하지 못합니다. 금년 가을에는 군산에서 조련하러 갔던 병졸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 40명이나 되어 과처(寡妻)ㆍ고아(孤兒)가 물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신은 비로소 4진은 평소 검영에 소속시켜야지 수영에 소속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의 응원이 될 뿐만 아니라 또 4진에서 수영에 가려면 바람을 기다렸다가 험지를 건너야 하므로 자칫 열흘이나 보름을 넘기게 되니, 설령 뜻밖의 경보(警報)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기간 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적을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풍이(馮夷)ㆍ해약(海若)의 노여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도신ㆍ어사가 전후의 소장에서 구제(舊制)를 회복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4진을 검영에 다시 소속시키고, 경진년(庚辰年)의 유제(遺制)를 본받아 검영의 중군(中軍)에게 첨사를 겸임시켜 격포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봄ㆍ가을에 순력(巡歷)하여 4진의 전함ㆍ방졸(防卒)을 기회(期會)하여 항구의 앞 바다에서 조련하게 하면, 칠산에서 패선되고 익사하는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격포로 다시 해산(海山)의 관방(關防)을 삼으면, 훗날 국가가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신이 개량(改量) 때문에 나주(羅州)ㆍ영암(靈巖) 간을 왕래할 때 작설(綽楔)이 정리(井里)에서 훤히 서로 바라보이므로, 말을 멈추고 물어 보았더니, 충신의 집이 아니면 효자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손을 방문했는데 지금은 모두 쇠퇴하여 서민(庶民)으로 변하였으며, 고가(故家)의 유풍(流風)ㆍ유운(遺韻)은 다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남은 예로부터 화려한 지방으로 일컬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고기잡고 농사짓는 즐거움에 편안하지 못하고 헤어져 유랑하여 흩어졌으며, 옛날의 높고 큰 정자는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원유(園囿)의 흥폐(興廢)로써 낙양(洛陽)의 성쇠(盛衰)를 안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정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호남의 쓸쓸함을 슬퍼합니다.아! 기대승(奇大升)ㆍ김인후(金麟厚)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金千鎰)ㆍ고경명(高敬命)의 순충(純忠)ㆍ대절(大節), 이후백(李後白)ㆍ박상(朴祥)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鄭忠信)의 공적, 김덕령(金德齡)의 용기, 임형수(林亨秀)ㆍ임제(林悌)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는 반드시 충신(忠臣)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개 도(道)를 수방(搜訪)한다면 ‘인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간혹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고, 간혹 행의(行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감히 그 사람의 성명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이이정(李頤正)은 고 수찬 이상형(李尙馨)의 후손이고, 민사하(閔師夏)는 고 사인(舍人) 민덕봉(閔德鳳)의 후손이고, 임대(林薱)는 고 유수 임영(林泳)의 족자(族子)이고, 김회(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이고, 신사철(愼師喆)은 고 부학 신천익(愼天翊)의 후손이고, 최필흥(崔弼興)은 고 평사 최경창(崔慶昌)의 후손이고, 고석(高晳)은 고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고, 안황(安煌)은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고, 정민하(鄭敏河)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후손입니다. 강진(康津)의 이의경(李毅敬), 영광(靈光)의 이중익(李重益), 무장(茂長)의 이만석(李萬錫), 장성(長城)의 유광현(柳光顯), 영암(靈巖)의 조석침(曹錫琛), 무안(務安)의 김경삼(金景森), 보성(寶城)의 김연년(金延年), 전주(全州)의 이익렬(李益烈)ㆍ정사협(鄭斯鋏)은 모두 글이나 읽고 뜻을 강논하며 곤궁한 것을 견디고 안정을 지키면서 혹은 백수(白首)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견발(甄拔)하여 그를 등용하면 혹 격려하고 권장하여 홍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신이 일신(一新)을 지나다가 그 이른바 충렬사(忠烈祠)라는 곳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이복남(李福男) 등 7인의 충신(忠臣)을 여기에서 제사하는 데 의사(義士) 임박(林樸)을 배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신을 향하여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이 순국(殉國)한 절개는 진실로 모두 뛰어나지만, 의사의 죽음은 더욱 기이합니다. 정유년(丁酉年) 섬나라 오랑캐 적들이 쳐들어 와서 외딴 성(城)이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병사(兵使) 이공(李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는데 의사가 개연(慨然)히 그를 따르며 말하기를, 「죽으면 같이 죽을 뿐이다.」라고 하고 적진으로 이격(移檄)하며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의롭게 여기고 진(陳)을 열었습니다. 병사와 의사가 갑옷을 입고 취라(吹囉)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겨 천천히 가니,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 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이 격파되니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성안의 사민(士民)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병사와 의사는 함께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 죽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신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그 성취한 바가 그 같이 뛰어났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이 유독 임박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그로 하여금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침울함을 억누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며 충절(忠節)한 사람을 표양(表揚)하는 바가 아닙니다. 임박은 지위가 낮아서 여러 신하들과 견장(甄奬)의 은전(恩典)을 함께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더욱 슬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빨리 높이 포상하라 명하시어 교훈(敎訓)을 수립하시고 퇴락한 풍속을 치켜 세우소서.”하니, 비답하기를,“부진(附陳)한 것에서 경의 소장을 머물러 두고서 경을 보고 하교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올라와서 복명(復命)하라.”하였다.【원전】 43 집 263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호구-이동(移動)[주-D001] 장년 삼로(長年三老) : 뱃사공.[주-D002] 풍이(馮夷) : 수신(水神).[주-D003] 해약(海若) : 해신(海神).[주-D004] 경진년(庚辰年) : 1700 숙종 26년.[주-D005] 견발(甄拔) : 인재를 구별함.[주-D006] 정유년(丁酉年) : 1597년 선조 30년.
- 2024-11-26 | NO.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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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추 元⽃樞 현종 1년(1660) 8월 14일∼현종 4년(1663) 4월 16일
- 원두추 元⽃樞 현종 1년(1660) 8월 14일∼현종 4년(1663) 4월 16일현감 원두추(1604∼1663)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자중(⼦中)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원유남(元裕男)이다. 1630년 10월에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1634년 4월부터 전라감사를 세 차례 지낸 원두표(元⽃杓)의 동생이다. 1623년 아버지와 형을 따라 인조반정에 참여한 후 그 공으로 1625년에 동부주부(東部主簿)를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46년에 이르러 출사하였는데 공조정랑·의성현령을 역임한 뒤 1650년 선산 부사, 1651년 통천군수, 1655년 사도시정(司䆃寺正), 충주목사로 있을 때는 곡식을 많이 축적하여 기근을 이기는 데 공을 세웠다. 1660년 호군, 1660년 6월 21일 통정대부 금성현감을 제수받고 8월 14일 부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6월 4일 으뜸가는 치적으로 포상을 받았다. 7월 13일에는 가자(加資)를 명하는 기록이 있다. 1663년 4월 16일 광주부윤(廣州)으로 이동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660년) 8월 14일 도임하여 계묘(1663년) 4월 16일 광주부윤으로 이동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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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표 元⽃杓 인조 8년(1630) 10월 4일∼인조 9년(1631) 9월 16일
- 원두표 元⽃杓 인조 8년(1630) 10월 4일∼인조 9년(1631) 9월 16일원두표(1593∼1664)는 전주부윤을 지내고 전라감사를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1625년 2월에 나주목사로 추천 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원평군 겸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630년 8월 16일 나주목사 제수되어 10월 4일 부임하여 1631년 9월 16일에 이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 오(1630년) 10월 4일 도임하였고 신미(1631년) 9월 16일에 부친 병간호를 위해 출발 하였는데 천원(川院)에 이르러 별세 소식을 듣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 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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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진택 元振澤 숙종 3년(1677) 4월 22일∼숙종 3년(1677) 10월 24일
- 원진택 元振澤 숙종 3년(1677) 4월 22일∼숙종 3년(1677) 10월 24일원진택(1624∼1699)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시보(施甫)이다. 부친은 원전(元錪) 이다. 1648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657년 식년시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8년 학유, 1659년 가주서, 1660년 양현고 직장, 1662년 어천찰방, 1673년 형조 정랑, 1674년 사간원 정언, 1677년 3월 18일 금산군수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22일에 도임하였다. 1686년 사간원 헌납, 1689년 갑산부사, 1690년 부호군을 역임하 였고, 1699년 원주에 머물던 중 화적 무리에게 변을 당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 다. 『금성읍지』에는 “금산군수에서 이동하여 정사(1677년) 4월 22일 도임하였고 동년 10월 24일에 재해로 파직 당하였다.”라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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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광천(柳匡天)
- 1732년(영조 8) 1월 26일∼1799년(정조 23) 1월 19일.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광주(光州) 오호리(五湖里)에서 출생하였다.증조부는 나옹(懶翁) 유익서(柳益瑞)이고, 조부는 생원(生員) 유지채(柳之采)이며, 부친은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양기공(兩棄公) 유휘소(柳輝韶)이고,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 생원 이숙빈(李淑馪)의 딸이며, 처부는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6세손 김기조(金基祖)이다.7세 때부터 학문을 익혀, 9세에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마쳤다.28세 때인 1759년(영조 35) 기묘 별시(別試) 병과 6위로 급제한 뒤, 벼슬은 1779년(정조 3) 장령(掌令)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제수(除授)되고, 1786년(정조 10) 헌납(獻納), 1792년(정조 16) 사간(司諫)에 이어, 1796년(정조 20) 승지(承旨)에 이르렀다.『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월 헌납(獻納) 유광천이 성군의 도리와 백성들의 구제에 대해 상소하였고, 3월에 성균관(成均館) 유생의 일과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후손의 녹용에 대해 건의하였으며, 12월에는 청렴한 관리의 등용 등을 들어 오늘날의 폐단을 없애기를 주청한 상소가 있다.부인 울산김씨(蔚山金氏) 사이에 두 아들 유학(幼學) 유동식(柳東植)‧유학 유동환(柳東煥)을 두었다. 저서는 시문집 『귀락와문집(歸樂窩文集)』 16권 8책의 석판본이 있는데, 1934년 그의 5세손 유영희(柳永禧)가 연보(年譜)를 작성하고, 6세손 유병구(柳秉九)와 유병희(柳秉熙)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에 유병구와 유병희의 발문(跋文)이 있다. 잡저 가운데 「산언(散言)」은 주로 경전(經典)에 있는 은미한 말과 매우 깊은 뜻만을 발췌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묘지는 군북(郡北) 오동촌(梧桐村)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원(李肇源)이 짓고, 행장(行狀)은 정기(鄭琦)가 지었다.
- 2020-09-17 | NO.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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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정 兪⼤禎 선조 38년(1605) 2월 13일∼광해군 1년(1609) 3월
- 유대정 兪⼤禎 선조 38년(1605) 2월 13일∼광해군 1년(1609) 3월유대정(1552∼1616)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경휴(景休)이다. 아버지는 단성현감 유호(兪灝),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강계부사를 지낸 유수증(兪守曾)이다. 1582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식년시 문과 병과에 1위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 갔다. 1589년 대교, 1591년 이천현감, 1593년 형조 낭관, 1594년 지평, 1595년 사헌부 장령, 사간, 1596년 제용감정, 1599년 양주목사, 봉산목사를 거쳐 1605년 1월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1607년에는 잘 다스린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609년 충청도관찰사, 1611년 수안수령, 1612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라 중추부 동지사·오위 도총부 부총관, 1614년 황해감사를 역임했으며, 1616년에는 병조참판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8월에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605년) 2월 13일 도임하 였고, 기유(1609년) 3월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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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두명 柳⽃明 태종 6년(1406) 1월 8일∼태종 7년(1407) 10월 8일
- 유두명 柳⽃明 태종 6년(1406) 1월 8일∼태종 7년(1407) 10월 8일유두명(?∼1408)의 본관은 영광(靈光), 아버지는 유언(柳漹)이다. 아들이 지중추부사 유규(柳規)이고 손자가 유자광(1439∼1512)이다. 고령 신제(申梯, 1393∼1443)가 사위이 다. 1392년 낭사(郞舍), 1398년 교서감, 1401년 밀양부사, 1404년 사헌부 집의, 1406년 나주목사를 거쳐 1407년 10월 우사간 대부, 1407년 12월 대언이 된다. 『금 성일기』 「병술년 1406년」에 “목사 유두명이 1월 8일에 도임하였다가, 정해(1407년) 10월 8일에 우사간(右司諫)으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었고, 『금성읍지』에는 “병술(1406 년) 1월 8일 도임, 정해(1407년) 10월 8일 좌사간(左司諫)으로 승진 이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좌사간은 우사간의 착오인 것 같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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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건 兪命健 경종 원년(1720) 8월 17일∼경종 2년(1722) 4월
- 유명건 兪命健 경종 원년(1720) 8월 17일∼경종 2년(1722) 4월유명건(1664∼1724)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중강(仲强)이다. 할아버지는 강원 도관찰사 유성증(兪省曾)이며, 부친은 가의대부 대사헌 유철(兪㯙)로 1659년 9월에 나주목사로 재임하였다. 170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전설별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705년 사재주부·감찰, 1706년 양성현감, 1711년 해주판관, 1713년 한산군수·강화경 력, 1714년 사복판관, 1715년 안악군수, 1718년 담양부사, 1720년 8월 17일 나주목 사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720년) 8월에 도임하였고 임인 (1722년) 4월에 사직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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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몽정 柳夢⿍ 선조 14년(1581) 9월 1일∼*선조 16년(1583) 상반기
- 유몽정 柳夢⿍ 선조 14년(1581) 9월 1일∼*선조 16년(1583) 상반기유몽정(1527∼1593)의 본관은 문화(⽂化)이며 자는 경임(景任), 호는 학암(鶴巖)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유용량(柳⽤良)이다. 1567년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574년 별시 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1581년 4월 영암군수로 있을 때 “활을 잡지도 못하니 문관으로서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차송하게 하소서”하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가 그해 9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87년 성주목사로 재직 중 풍속의 문란을 방지하지 못하고, 죄수가 옥문을 부수고 도망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성절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끌어오는 데 공을 세웠다. 1593년 병조참의, 승정원 승지,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581년) 9월 1일 도임하였으나 체직한 날은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 목사의 부임일이 1583년 8월이므로 그해 상반기까지 재직하다 이임한 것으로 추정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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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경(柳思敬)
- 유사경(柳思敬, 1556~?)의 본관은 문화, 증조부는 유인손(柳仁孫)이고, 조부는 유여강(柳如岡)이며, 부친은 충의위(忠義衛)를 지낸 유혜(柳惠)이다.1585년(선조 18) 식년시에서 생원 2등 1위로 합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증광시 문과에서 갑과 3위(탐화랑)로 급제하였다.1589년(선조 22) 전라 유생인 진사(進士) 정암수(丁巖壽)‧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영(柳瑛) 등과 함께 연명으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통해 정여립(鄭汝立)의 난과 관련하여 정인홍(鄭仁弘)‧정개청(鄭介淸) 등은 정여립과 친하다고 하여 강력 처벌을 요구하였으며,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 등은 정여립과 친하지는 않지만 어지러운 사세에 처신을 못하였다고 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역당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 상소가 국가의 역변을 이용하여 무고한 술책을 써서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였다고 하여 추국할 것을 명하였다.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경명(高敬命)‧정운룡(鄭雲龍)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정운룡의 상소로 논상(論賞)되어 관직을 제수받았다. 1606년(선조 39)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 2024-11-19 | NO.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