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68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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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갈 兪漢葛 정조 10년(1786) 2월 30일∼정조 10년(1786) 2월
- 유한갈 兪漢葛 정조 10년(1786) 2월 30일∼정조 10년(1786) 2월유한갈(1722∼1795)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여수(汝⽔), 호는 소요헌(逍遙軒)이 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충주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지낸 유언탁(兪彦鐸)이고 성균진사 유언전(兪彦銓)에게 입적되었다. 1747년(영조 23)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756년 선릉참봉, 1757년 종묘 부봉사, 1758년 상서 부직장, 1759년 공조좌랑·용인현령, 1762년 대흥군수, 1757년 사복주부, 1768년 남원부사, 1771년 돈녕부 판관, 1772년 균역청 낭청, 1777년 제천현감, 1780년 사복판관, 1780년 무주부사, 1783년 평양서 윤을 역임하였다. 1786년 2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1786년 3월 6일 부임을 지체한 일로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에도 1787년 부사과, 1794 년 첨지·오위장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오(1786년) 2월 30일 도임하였으나 같은 해 3월에 부임을 지체한 일로 순영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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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봉 박우(1476~1547)
- 박우朴祐(1476~1547)의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박광리朴光理의 중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광주 출신으로 1476(성종7년)년 광주시 서구 절골, 불암마을에서 태어났다. 형은 하촌 박정, 눌재 박상이며 아들은 선조시절에 정승을 14년이나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이다.박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개성유수 등을 하였다.1507년에 진사, 3년 후인 15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ㆍ장령ㆍ집의ㆍ성균관사예ㆍ성균관사성ㆍ세자시강원필선ㆍ직제학ㆍ좌승지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또한 박우는 1538년에 장성의 '삼마태수라'는 별칭을 얻은 청백리 지지당 송흠(1459-1547)이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 관수정에도 들려 시를 남겼다.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으며 다시 해주목사, 대사성을 거쳐 병조, 이조 참의, 한성부 우윤, 개성부 유수 등을 지냈다. 인종 때는 한성부 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 2020-04-28 | NO.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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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격 尹檄 현종 4년(1663) 5월 25일∼현종 4년(1663) 9월 9일
- 윤격 尹檄 현종 4년(1663) 5월 25일∼현종 4년(1663) 9월 9일현감 윤격(1596∼?)의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경빈(景賓)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禦侮將軍) 윤형언(尹衡彦)이다. 162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는데, 관직은 1638년 내시교관(內侍敎官)부터 시작하였다. 1642년 강원도 평릉찰방, 1643년 감찰, 1652년 호조좌랑, 1654년 영천군수, 1655년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59년 서산군수로 부임하다가, 1663년 5월 25일 금성현감으로 부임을 한다. 그러나 서산군수로 있을 때의 부정과 나이가 들어 능력이 없다는 대사간의 청원에 1663년 8월 23일 금성현감에서 파직을 당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1664년 오위장·부평부사·원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금성읍지』에는 “서산군수에 이동하여 계묘(1663년) 5월 25일 도임하였고 동년 9월 9 일에 체직되었다.”라 기록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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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
- 윤경(尹?), 湖節4下-131-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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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면교 尹勉敎 영조 19년(1743) 8월 22일∼영조 21년(1745) 4월
- 윤면교 尹勉敎 영조 19년(1743) 8월 22일∼영조 21년(1745) 4월윤면교(1691∼176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자강(⼦强)이다. 아버지는 호조정랑 증이조참판 윤부(尹扶)이다. 경은부원근(慶恩府院君) 김주신(⾦柱⾂)의 사위이며, 윤면 교의 처는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아우이다. 172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27년 서부참봉, 1729년 내시교관, 1732년 호조좌랑·문경현감, 1733년 대구판관, 1736년 호조정랑, 1740년 삭녕군수, 1743년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743년 8월 28일 나주 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일 하직하고 바로 부임한다. 1745년(영조 21) 3월 7일 『승정 원일기』에 하리들이 포흠(逋⽋)한 것을 적발해 다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1746년 호조정랑, 1747년 평양서윤, 1750년 청주목사, 1751년 대흥군수, 1755년 청주목사, 1757년 도정, 1760년 형조참의, 1762년 우윤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743 년) 8월 22일 도임하였고 을축(1746년) 4월에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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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익 尹相翊 고종 28년(1891) 12월 29일∼고종 30년(1893) 8월 21일
- 윤상익 尹相翊 고종 28년(1891) 12월 29일∼고종 30년(1893) 8월 21일윤상익(1847∼?)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은필(殷弼)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윤자승(尹滋承)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 임기수(林驥洙)의 딸이다. 1877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시작으로 1880년 설서, 1881년 기사관·검열·부수찬, 1883년 동학교수, 1884년 교리·사서, 1885년 동부승지, 1886년 우부승지, 1889년 좌부승지를 지냈다. 1891년 11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29일 부임하였다. 1894년 1월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891년) 11월 13일 제수되어 12월 29일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계사(1893)년 8월 21일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고 기록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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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익 尹守翼 정조 24년(1800) 윤4월 11일∼정조 24년(1800) 7월 26일
- 윤수익 尹守翼 정조 24년(1800) 윤4월 11일∼정조 24년(1800) 7월 26일윤수익(?∼1800)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윤면원(尹勉遠)이고 숙부 승지 윤면헌(尹勉憲)에게 입양되었다. 음관으로 1783년 현릉참봉, 1784년 사옹주 부, 1785년 감찰·사직령, 1788년 순창군수, 1791년 한성주부, 1792년 현륭원령·홍산 현감, 1793년 의성현령·안주목사를 지냈다. 1795년 8월 1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이 중하여 8월 21일 체차, “나주목사의 후임은 특례로 각별히 가려 차임하여 하비를 기다려 즉시 내려보내라.”하였다. 1797년 시흥현령을 거쳐 1800년 4월 2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30일 하직하고 도임하였다. 1800년 7월 24일 나주목사 윤수 익을 가까운 곳의 수령과 바꾸라는 대왕대비전의 전지가 있었고 7월 26일 청주목사 서교수(徐敎修)와 서로 바꾸었다. 1802년 장원별제, 1804년 장악원정, 1806년 청도군 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800년) 윤4월 11일에 도임하였고 동년 7월 26일 청주목사와 교대하면서 이임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청주목사로 간 윤수익은 병이 심하여 1800년 12월 22일 별세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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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우신 尹⼜新 선조 21년(1588) 4월 23일∼선조 22년(1589) 7월 28일
- 윤우신 尹⼜新 선조 21년(1588) 4월 23일∼선조 22년(1589) 7월 28일윤우신(1534∼1594)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선수(善修)이다. 할아버지는 목사 윤시영(尹時英)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윤징(尹澄)이다. 1561년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하였다. 아들 윤섬(尹暹)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1573 년 안악군수, 함흥판관이 되었다. 1581년 창원부사로 있다가 옥사를 늦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2년 7월부터 1583년 6월까지 인천도호부 부사로 재직하였고, 지중추 부사를 지냈다. 1587년 영위사(迎慰使), 안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고, 재직 중병사한 임윤신을 대신하여 1588년 4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서용하지 않는 준기 불서(準期不敍)로 있었으나 특별히 서용하여 차송(差送)하였다. 1589년 7월 28일 허술하게 근무한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1590년 전주부윤이 되었 다. 3)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지중추부사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호조 참판이 되었다. 이 후 동지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정헌대부에 가자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자(1588년) 1월 17일에 도임하였으나, 체직된 일자는 기록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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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익 尹以益 숙종 2년(1676) 10월 3일∼숙종 3년(1677) 2월 15일
- 윤이익 尹以益 숙종 2년(1676) 10월 3일∼숙종 3년(1677) 2월 15일윤이익(161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수지(受之)이다. 아버지는 윤세징(尹世徵), 동생 윤이제(尹以濟)는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판서를 지냈다. 164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1648년 의금부도사·사포별제, 1655년 감찰·형조좌랑, 1656년 태인현 감, 1662년 영평현감, 1665년 인의 겸 참군·형조좌랑, 1667년 개천군수, 1672년 의금부도사, 1673년 금산군수, 1675년 밀양부사를 거쳐 1675년 10월 3일 도임하였는 데, 1677년 2월 증광 회시(會試)에서 윤이익의 수종(隨從)인 최해원이 초시를 보지 않았음에도 시권도 없이 과거를 보는 일이 발각되어 파직당하였다. 당시 시권이 없는 사람이 12인이었다. 『금성읍지』에는 “밀양부사에서 이동하여 병진(1676년) 10월 25일 도임하였다. 증광 회시를 보려고 상경하였으나 과장에 시종을 데리고 들어간 일로 정사(1677년) 2월 15일 의금부에 하옥되고 체직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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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화 尹⿍和 숙종 16년(1690) 12월 8일∼숙종 17년(1691) 7월 15일
- 윤정화 尹⿍和 숙종 16년(1690) 12월 8일∼숙종 17년(1691) 7월 15일윤정화(1648∼?)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열지(說之)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윤필양(尹必讓)이다. 1675년 식년시 생원‧진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에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예조정랑, 1689년 정언, 1690년 지평·사간, 1690년 10월 1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8일 도임하여 1691년 7월 15일에 제주목사로 이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12월 11일 기록에 “고을 백성이 굶주리는 정상을 극진히 아뢰고, 유사(有司)의 신하를 시켜 너그러이 돌보는 정사를 다시 의논하여 여러 가지 조곡(糶穀)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고 여러 가지 신역(⾝役)을 전감(全減)하고 전세(⽥稅)·대동(⼤同)도 머물러 두었다가 진휼에 쓰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국에 내렸으나, 복주(覆奏)에는 채택하여 시행한 바가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1694년에는 민정중(閔⿍重)에게 극형을 내리도록 간언을 올렸는데, 잘못된 간언으로 인하여 김원섭(⾦ 元燮)‧조식(趙湜) 등과 함께 유배를 당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690년) 12월 8 일 도임하였고 신미(1691년) 7월 15일 제주목사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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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화(尹之和)
- 조선 전기의 문신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순경(順卿)이다.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봉상시(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尹起畝)이다. 연산군의 외삼촌인 참판(參判) 윤구(尹遘)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임(尹之任)의 동생이며, 사복시 첨정 윤지청(尹之淸) 형으로, 제헌왕후(齊獻王后 폐비윤씨) 조카다.1476년에 태어나니 낳아서부터 총명하고 효우(孝友)와 문장이 출충하며 지조가 굳건하고 기상이 엄준 하였다.1504년(연산군 10) 갑자(甲子)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여 1506년(연산군 12) 벼슬이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다. 동년(중종1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 외척으로 전남 장흥(長興)으로 부처(付處)된 후 1513년에 해배(解配)되여 30대 초반에 광주(光州)로 이거 함안윤씨 입향조 세거지로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에 자리 잡고 살아왔다.1535년에 아들 제(霽)가 죽음을 당하니 이후로 매우 두려워하여 장차 깊은 못에 빠지는 것 같아 세상에 뜻이 없어, 당시 문장으로 유명한 하천(霞川) 고운 (高雲 1479~1530, 고경명 장군의 조부) 눌재 (訥齋) 박상(朴祥), 양곡 소세양(蘇世讓) 감사(監司) 정만종(鄭萬鍾) 선생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어 시와 술로 창수(唱酬)하며 세월을 보내다 1558년(명종13) 83세로 세상을 떠났다.중종 때에 서사정랑(筮仕正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귀향 후 은거하여 도학을 강명(講明)하고 후학을 개진(開進)하니, 눌재 박상이 시를 평하기를 ‘동양천화작지선(同養天和作地仙)’이라 하였다.스스로 찬한 지(誌)에 따르면, ‘아홉 마디의 창양(昌陽)은 수명의 긴 것과 같고 높은 뫼는 그 성품의 굳셈과 같다. 겸공(謙恭)을 밖으로 들어내고 성경(誠敬)을 안으로 간직하였다. 오유(五遊)하고 추창(趨昌)하며 구원(邱園)에서 숨어 살아 문장을 스스로 머금고 광채를 스스로 감추었다. 문을 닫고 생도를 가르치며 혹은 방으로 들어가고 혹은 마루로 오른다’라 하였다.성종의 계비인 윤씨가 폐위되자 광주(光州)로 낙향하였다. 묘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구 孝友面 龜巖)에 있다.저서로 현재 남촌유고(南村遺稿)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 있다.
- 2018-07-06 | NO.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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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용 尹致容 철종 7년(1856) 8월 7일∼철종 8년(1857) 10월 15일
- 윤치용 尹致容 철종 7년(1856) 8월 7일∼철종 8년(1857) 10월 15일윤치용(1798∼?)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대수(⼤受)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윤경렬(尹慶烈), 동생은 이조판서 윤치정(尹致定)이다. 182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8년 혜릉참봉, 1832년 장원별제·공조좌랑, 1833년 신계현령, 1837년 사옹첨정, 1839년 보은군수, 1840년 함흥판관, 1843년 활인별제, 1844년 공조정랑, 1845년 서흥부사, 1847년 광주목사, 1849년 충주목사를 지냈다. 1856년 7월 5윌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7월 17일 부임하였다. 1857년 1월 7일 『승정원일기』에 “선혜청이 엄한 것은 조법(漕法)이라 하면서 근년 이래 기강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져 곡주관(穀主官) 이 된 자가 재운(再運)이라고 칭하면서 늦게 짐을 꾸려 얼음에 닿는 해가 없는 해가 없다 하면서 작년의 대동미(⼤同⽶)에 나주의 9척이 얼음이 얼 때가 되어 해가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았다.”하여 나수하라는 전교가 내렸다. 1858년 강릉부사, 1860년 광주(廣 州)판관, 1861년 형조참의, 1862년 우부승지, 1862년 돈녕도정, 1863년 영변부사, 1865년 도총관, 공조참판, 1867년 동돈녕, 1868년 행호군, 1871년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진(1856년) 7월 5일에 광흥수에서 옮길 것을 제수받고, 7 월 17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8월 7일에 부임하였으며 정사(1857년) 10월 15일에 여주목사로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주객사 금성관내에 1861년에 세운 철비(鐵碑) 「목사 윤후치용 청덕휼민영세불망비」가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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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응 尹致膺 헌종 13년(1847) 8월 12일∼헌종 15년(1849) 5월 1일
- 윤치응 尹致膺 헌종 13년(1847) 8월 12일∼헌종 15년(1849) 5월 1일윤치응(1794∼?)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취여(就汝)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윤명렬(尹命烈)이다. 음관으로 1831년 7월 경릉참봉, 1834년 부사용, 1835년 호조좌랑, 1836년 의빈도사, 1837년 가례도감 낭청·돈녕판관·휘경원령, 1839년 진천현 감, 1841년 공주판관, 1844년 금산군수, 1846년 12월 선산부사를 지냈다. 1847년 7 월 1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2일 부임하였다. 1849년 4월 25일에는 성묘하는 일로 경기의 삭녕(朔寧)에 말미를 받았는데 속히 고을로 돌아가라는 관문을 감사에게 통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4월 17일에는 돌아갈 것을 경기감사에게 통지했으나 신병 으로 어려워 파출되었다. 1848년 9월 10일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49년 7월 호군, 1853년 돈녕도정, 1854년 동부승지, 1855년 첨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미(1847년) 8월 12일에 부임하였고 기유(1849년) 5월 1일에 상경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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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태원 尹泰元 고종 23년(1886) 9월 10일∼고종 25년(1888) 7월 10일
- 윤태원 尹泰元 고종 23년(1886) 9월 10일∼고종 25년(1888) 7월 10일윤태원(1833∼190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정보(正甫)이다. 부친은 통훈대부행 건원릉령 윤후성(尹厚成)이다. 1865년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여 1875년 광릉참봉, 1877년 빙고별제, 1882년 장수현감, 1883년 평양서윤, 1885년 금산군수를 지냈다. 1886년 7월 2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0일 부임하였다. 1888년 7월 장성부사, 1890년 공조참의, 1892년 상주목사, 1893년 충주목사, 1902년 동지돈녕원사를 역임 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所)에 들면서 4품 이상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승급에서 종2품으로 진급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임금의 피난을 수행하여 공로를 세웠고, 이 공로로 사망 후 종1품 참정대신(參政⼤⾂)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술(1886년) 7월 29일에 금산군수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같은 해 9월 10일 부임하 였고 무자(1888년) 7월 10일 장성부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3년 9 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참찬관 홍종영(洪鍾永)이 “전 나주목사 윤태원은 고을을 다스린 지 3년 동안 묵은 포흠을 거두어들인 것이 8000여 섬이고, 정해년 조에 원납전(元 納錢)과 아울러 잡비 2만 4000석을 수량에 맞추어 봉실하였으니, 사방에서 모두 칭송 하다.”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참로 장중하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 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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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태한(尹泰翰)
- 남구 대지동 윤태한(尹泰翰. 1857~1932)은 본관이 남원이고 호는 한암(漢菴)이다. 1882년(고종 19) 25세에 동학의 교리에 심취하여 제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동학에 입도하였다.32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광산(光山)‧화순(和順)‧나주(羅州)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1월 수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선봉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1895년(고종 32)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우금치(牛禁峙)전투에서 동학군은 패퇴하였다.이후 을사조약, 고종의 퇴위, 군대해산 등에 울분을 느껴 반일운동과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동학접주로 김개남군에 참여한 뒤 살아돌아와 한말의병에 가담했다가 1907년 12월 체포되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손발톱이 빠지고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으며, 동상으로 발이 썩어 가는 고초를 겪으며 2년간 옥고를 치렀다.고문 후유증으로 성불구가 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는 종교 집회와 교육활동을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항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1932년 사망한 뒤, 계룡산(鷄龍山) 천도교 본당에 제향(祭享) 되었다.
- 2020-03-06 | NO.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