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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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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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소사(엄조이)
    광주에서 농민전쟁은 1894년 말과 이듬해 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1894년 12월 광주지역의 농민전쟁이 관군의 무력진압에 의해 와해되어 갈 즈음 관아에 자수를 했는데 동학 관련 문헌에는 그를 엄소사(엄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엄은 성이고 소사는 평민 아낙네에게 붙이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문헌에 의하면 엄소사의 별명이 ‘여자 통령’이었다고 한다. 이는 엄소사가 광주지역 농민군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비록 엄소사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은 찾을 길 없으나 같은 기록에는 엄소사가 다른 동학 관련자들과 함께 광주관아에 끌려와 곤장을 맞았다고 적고 있다. 전후 상황은 아직 베일에 싸인 면이 많으나 농민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인된 몇 안되는 사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어 보인다.
    2018-06-27 | NO.306
  • 엄순
    엄순(嚴純), 湖節5中-135-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305
  •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徐舒平)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은 독일 비스바덴 출신이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임종 후 미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간다. 미국에서 그녀는 간호학을 전공했고 개신교로 개종을 했다.서른둘이 되던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 의료인으로 지원해 한국에서 간호선교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군산 예수병원을 거쳐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에서 근무했다. 기독병원 전신인 제중병원 간호부장으로 부임하면서 광주와 인연이 되었다.광주에서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고아들이었다. 아름다운 동네였고 할 일이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조선말이 서툴렀고, 조선의 모든 풍속들이 낯설었다. 조선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름부터 바꾼다. 성은 서徐씨, 이름은 ‘천천히 할 서舒’, ‘평평할 평平’. 그녀가 붙인 새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이었다. 다소 급한 성격과 모난 성격을 다독이는 의미를 담았고, 자신의 본명 세핑의 발음을 살렸다.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의지했던 최흥종 목사의 생각을 보태준 이름이었다.양림동 길 언덕에서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은 서서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오갈 곳 없는 고아가 업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을 한 적 없는 처녀 선교사는 그렇게 양림동 아이들의 엄마로, 선생님으로 살았다.최흥종 목사가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수용소로 수시로 의료봉사를 나갔으며 헐벗은 한센인들을 만나면 옷과 밥을 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어린 거지나 여성 거지들을 보면 지나치질 못했다.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이는 일을 수시로 했다. 선교활동의 하나였던 금주 금연운동에 앞장서고, 금주동맹을 조직한 후 충장로 일대와 시장, 상가들을 돌면서 금주 금연의 의미를 설명했다. 마음을 바꾸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했던 것은 여성들의 처지였다. 여성들을 잡아다가 파는 인신매매 금지, 축첩금지, 성매매 금지 등을 주장하며 사창가에 묶여있는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애썼다.서서평의 당시 일기장에는 “한 달 동안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성한 사람이 없없다.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모두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서서평은 여성들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등으로 불리는 것에 분노했다. 왜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는가, 하며 일일이 새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었다.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한 번은 만주로 팔려가는 열아홉 살 처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고, 사창가에서 억류된 여성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사창가 여성들을 구해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도움으로 세운 ‘이일학교’로 불러 공부를 하게 했다.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매년 수많은 여성들을 교육의 장으로 끌어들였다.그녀에게는 자녀가 열네 명이나 있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 아이들을 자녀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과부 서른여덟 명을 집에 머물게 했다. 그녀가 제중병원에서 받는 급여는 대부분 이와 같이 고아와 여성들, 그리고 한센환자들을 위해 쓰여졌다.우리말에 자신이 붙자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로 간호교과서와 실용간호학, 간호위생법 등의 책을 저술하고 간호사업사와 같은 전문서 등의 번역에도 힘쓴다. 1923년 그녀는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 전신)의 결성을 주도한다. 초대회장이 되어서는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사 간호협회에 가입한다.고된 일에 쫓겨온 탓에 풍토병의 일종인 스프루병이 그녀를 덮친다. 면역력이 있으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병이었건만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몸은 이겨내지를 못했다. 1934년 그녀는 눈을 감는다.
    2021-05-04 | NO.304
  • 여위현 呂渭賢 공양왕 5년(1366) 2월 17일∼?
    여위현 呂渭賢 공양왕 5년(1366) 2월 17일∼?여위현(?∼?)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상도 성주성 북쪽의 야동(冶洞)에 살았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잠저에 있을 때 친구로 지냈다.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 를 칠 때 여위현의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을 잤다는 기록이 『경산지(京⼭誌)』에 있다. 고려말 관작이 삼중대광(三重⼤匡)에 이르렀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으나 조선건국 뒤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자녀와 조카의 교화에 전심했다. 『금성일기』 「병오년 1366년」에는 “목사 여위현이 2월 17일 도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 지』에는 “1366년(병오) 2월 17일 부임하였지만 이임하는 날은 기록하지 못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03
  •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여의손(?∼?)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393년 제주 첫 목사가 되어 1395년까지 제주 만호를 겸임하고 제주향교를 설립하였다. 1396년 제주목사 재임 시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을 조성할 때 당대의 석공을 동원하여 석물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표창을 받은 뒤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404년 10월 25일 보빙사 (報聘使)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업무를 소홀히 한 죄로 진도로 유배되었다. 『금성일 기』 「정축년 1397년」에 “목사 여의손이 3월 26일 도임하였다가 6월 2일 임금의 명에 의해 목포진첨절제사 겸임하였다가 1398년 3월 20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 “정축(1397년) 3월 26일 도임, 무인(1398년) 10월 20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02
  • 여칭 呂稱 공양왕 2년(1390) 6월 15일∼공양왕 4년(1392) 1월 29일
    여칭 呂稱 공양왕 2년(1390) 6월 15일∼공양왕 4년(1392) 1월 29일여칭(1351∼1423)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는 중보(仲⽗, 仲夫), 호는 저곡(樗⾕)이 다. 아버지는 선관서 영을 지낸 여길손(呂吉孫)이다. 문과 급제자로 사헌규정, 전라도안 렴사, 공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지냈다. 조선에 들어서 양광도·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 사(漕轉副使), 강원도관찰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 사, 개성유후, 형조판서를 지냈다. 『금성일기』 「경오년 1390년」에 “목사 통헌대부 여칭이 6월 15일 부임하였고, 임신(1382년) 1월 삼도조전부사로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경오(1390년) 1월 15일 도임, 임신(1392년) 1월 29일에 이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01
  •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오달선(1811∼1892)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행(汝⾏), 오최선(吳最善)으로 개명하 였다.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오치수(吳致壽)로 오치준(吳致俊)에게 입양되었다. 아들 오익 영(吳益泳)은 문과 급제 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850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56년 동부도사, 1857년 사옹봉사, 1860년 상의별제·공조좌랑, 1861년 공조정 랑·종묘서령, 1863년 낭청, 1864년 안의현감, 1866년 천안군수, 1868년 보성군수, 1871년 장흥부사, 1874년 충주목사, 1875년 남원부사, 1877년 홍주목사를 지냈다. 1878년 2월 28월 전임 나주목사 김선근과 바꿔 제수되어 4월 2일 부임하였다. 5월 3일에는 청주에서의 일로 죄진 채 나무목사 일을 본다. 1879년 6월 11일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나주목의 유망(流亡) 세미(稅⽶) 6182석에 대하여 전라감사 심이택이 보고 자하자 세미는 절반에 한하여 상정(詳定) 하여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고, 반드시 당년 안에 수량대로 납부하도록 한다. 1882년 6월 공조참판, 호군, 동의금, 1883년 동지중 추부사, 1890년 행호군, 1892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878년) 2월 28일에 홍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4월 22일 부임하였고 신사(1881년) 6월 20일에 경주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는 1880년 8월 임기 만료가 가까워지자 전라감사 심이택(沈履澤)이 장계를 올려 오 목사의 임기를 연장시켜 달라고 이조에 청한 결과 “오달선을 한 임기 동안 연장하라”는 인사가 있어서 결국 1년 더 재직하여 1881년 6월 20일까지 2년 4개월 동안 나주목사 직을 수행하였다. 1881년 6월 경주부윤에 부임하자 10월에 자기 이름이 역적의 이름과 같다 하여 ‘最 善’으로 바꾸었다. ‘㝡善’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300
  • 오빈(吳賓)
    오빈(吳賓)의 본관은 낙안이며 자는 관국(觀國)이다.1543년(중종38) 식년시 생원 3등 66위로 입격하였다.권지성균관을 지냈다.
    2024-11-18 | NO.299
  •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오상(1512∼157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아버지는 예조좌랑 오예손(吳禮孫)이다. 1531년 진사시 합격, 153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0년 사간원 정언, 1541년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1542년 홍문관 수찬, 1543년 홍문관 부교리, 1544년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강원도 재상어사, 1547년 사간원 사간, 1548년 7월 25일 나주목사가 되어 8월 16일 배사할 때 “근래에 백성들이 곤궁한 것을 깊이 유념하여 환자[糴]를 받아들일 때 가혹 하게 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 구휼하는 마음으로 하여 민폐를 모두 없애도록 하라.”는 전교를 받았다. 1552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1555년 시독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1557년 강원도관찰사, 1558년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1559년 승정원 좌부승지,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1560년 병조참판, 1562년 예문관 제학, 1563년 병조참판, 경상도관찰사, 1564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1567년 예조참판, 1571년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부훤 당유고』 1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 9월에 도임하였고, 임자(1552년) 1월에 홍문관 수찬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대사헌에 제수되었을 때 사관이 『명종실록』에 기록하길, “오상이 재주가 있었는데, 왕이 그의 사조(詞藻)를 좋아하여 더욱 두텁게 사랑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선조실록』 그의 졸기에는, “유희춘(柳希 春)의 일기(⽇記)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사람은 안정(安靜)하고 자상하며 사장(詞章)에도 능한 선량한 사람이다. 조정(朝廷)이 좋은 선비를 잇달아 잃으니 누가 한탄하지 않겠는가.’”라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98
  • 오자치 (吳自治)
    본관은 나주이며 금성군 오신중(錦城君 吳愼中)의 아들로 태어났다.조선 전기의 무신 오자치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무예를 닦으며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병서를 두루 읽으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후 무과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오자치는 주부벼슬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부장 조석문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평정하여 왕이 훈장을 내렸다. 1476년(성종 7) 9월 부친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현재 그의 영정인 ‘오자치 영정(吳自治影幀)’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로 보물 1190호로 지정되었다. 또 광산구 지평리에는 오자치가 자신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오자치 용마’가 있다. 오자치의 용마바위에 관한 전설은 오자치의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오자치 장군은 민가에 피해를 주던 야생마를 단숨에 잡아 길들이고 말과 함께 무예를 닦던 중 하루는 ‘말이 화살보다 느릴 경우 목을 베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복룡산을 향해 화살을 쏜 오자치는 말을 타고 달려 산위에 도착해 화살을 찾아보았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뒤에 날아와 꽂혔고 오자치 장군은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며 그곳에 놓인 자연석을 이용해 비석을 세운 뒤 죽은 말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바위를 부숴 도로공사에 사용하려고 했다가 돌을 떨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있었다는 등 이 용마바위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의 묘와 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용진산 아래 원당마을 원당영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자치 장군의 재실인 시기재와 근처엔 재현된 용마바위가 놓여있다.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생기면 꽃을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2020-03-02 | NO.297
  •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오재문(1743∼1800)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성장(聖章)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 중에 한 명인 오달제(吳達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형조판서 오언유(吳彦儒)이다. 1762년(영조 38)에 도목정사(都⽬政事)에서 오달제의 후손이라 하여 음직으로 명릉랑(明陵郞)에 제수된 후에 1764년 전설별검, 1766년 금부도사, 1768년 한성판관, 1768년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개령현감으로 자리를 옮긴다. 1773년 한성서윤, 1776년 의성현령, 1779년 해주판관, 1782년 옥천군수, 1783년에 울산부사를 역임한다. 1784년 12월 1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큰고을으로서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므로 가려 차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의를 하여 제수된다. 1786년(정조 10) 2월 13일 의금부의 계에 따라 잡혀 가는데, “표류해 온 사람을 접대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매우 중요한데, 해당 고을에서 쫓아 보내는 일” 때문이었다. 1787년 풍기군수, 1789년 부사과, 1792년 예빈주부를 거쳐 1800년에 사망하였다. 1854년 증직으로 이조참의에 올랐다. 『금성읍 지』에는 “갑진(1784년) 12월 18일 울산부사에서 나주로 제수되어 을사(1785년) 1월 22일에 도임하였고, 병오(1786년) 2월 13일에 표류인을 문정하는 일을 지체하였기 수영(⽔營)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296
  • 오재영(吳在永, 1865~1911)
    전남 화순 동복출신 소재(小齋)  오재영(吳在永, 1865~1911), 동복오씨로 아버지 식시(息是) 오연수(吳然秀)로 어려서부터 글씨에 재주가 있었고 부모에 효도하며 집안에 두루 우애했다. 그는 집 뒤의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상을 그려 벽에 모셔 놓고 조석(朝夕)으로 참배했다. 갑오경장이후 의원(議員)의 제도를 채용함에 그는 동복의 대표로 촉망이 높았고 1897년 7월에 관찰사의 천거로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제수받아 풍속을 바로잡고 엄정하고 부정을 척결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자 실의와 분노로 그 직을 사직하고 죽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1919년 고종의 장례를 치르고 고향에서 운명했다. 그의 아들들과 문인들이 그의 시문을 수집하여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의 서문을 받아 1920년에 소재집(小齋集)을 간행했다. 무등산(題瑞石奎峰庵, 遊瑞石上峰,  瑞石道中)
    2018-07-06 | NO.295
  •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오준(1587∼1666)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며,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南)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동생 오단(吳端)은 1636년(인조 14)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1624년 지평, 장령, 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 3월 9일 가의대부 행 나주 목사에 임명되어 5월 도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체부 종사관 김광혁을 인견할 때 동부승지 한형길 등이 입시하여 변란 때의 전라도 정황에 대해 논의한 내용 가운데 “나주 고을은 지역도 크고 사람들도 거칠지만, 목사 오준이 상당히 잘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놀란 뒤부터 성 안이 모두 비고 태수만 남았는데, 밤마다 관아 안에 화살을 비 오듯이 쏘면서 옥문(獄⾨)을 부수고 중죄수(重罪囚)를 모두 빼냈습니다.”란 부분이 있다. 이로 보아 목사로써 선정을 베풀었음과 변란 때의 행적을 알 수 있다. 1639년 한성부 판윤,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 예조 판서, 형조판서·대사헌, 1660년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삼전도비,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 구례 화엄사의 벽암대사비, 칠장사의 벽응대사비 등의 비문이 전해 온다. 저서로 『죽남당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636년) 5월 4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목사의 도임시기로 보아 1637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94
  • 오준선(吳駿善)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은 광주시 도덕동 출신으로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後石遺稿』가 있다. 
    2020-08-08 | NO.293
  • 오지호(吳之湖 ; 1905~1983)
    오지호(吳之湖 ; 1905~1983)는 화순 출신으로 인상주의 회화 양식을 우리 나라에 토착화시켜 구상화만을 고집하면서 독특한 회화세계를 보여준 우리 나라 현대 회화사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예술원종신회원이며, 국전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양화의 원로였던 오지호는 망국을 재촉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에 화순군 동복에서 오재영의 아들로 태어났다.오지호는 애국애족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미술에 대한 취미와 함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심을 가졌다. 그는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고영동의 지도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 뒤 고려미술회관 미술연구소에서 계속 공부하였다.그 후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후기인상파의 기법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산하를 한국적 색채감으로 담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28년에 신미술운동을 표방하고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미전에 대항하여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고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작품 활동을 펴나가자고 했다. 한때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광주로 돌아와 지산동 초실(草室)에 정착하여, 4·19혁명을 계기로 학원민주화에 앞장서다가 5·16군사정권 때에 조선대학교를 그만두고 야인으로 예술 활동과 한자교육 부활운동에 전념하였다.시에서는 오지호의 서양화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회화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전국규모의 ‘오지호미술상’을 시상해오고 있으며, 지산동의 생가인 초실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화단에서 소위 ‘남도화단’이라고 일컬어지는 화맥을 형성하였다. 「사과밭」, 「야생화」, 「금강산」등의 작품과 저서로는 1968년 「현대회화의 근본문제」, 「알파벳 문명의 종언」 등이 있다.광주시에서는 오지호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에서 무등파크호텔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호로라 명명하였다.
    2021-04-08 | NO.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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