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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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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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학묵(宋鶴黙)
    전략가로서 광주와 담양에서 의병활동을 한 송학묵(1870∼1909)의 자는 자화(子化), 본관은 홍주이다. 해광 송제민의 10세손이며 송래영(宋來永)의 둘째아들로 북구 본촌동(용두동 거진마을) 출신이다.증조부는 송수대(宋守大)이고, 조부는 송삼현(宋三賢)이며, 부친은 송내영(宋來永)이다. 외조부는 광주노씨(光州盧氏) 노계주(盧啓胄)이고, 처부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준(曺駿)이다.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극락강 상류 삼각산 요처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왜병이 포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듣고 적과 10리쯤의 거리를 두고 백주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를 고지에서 관망한 왜군은 어둠을 타고 추격하니 적의 전략을 미리 알고 북으로부터 다시 회군하여 자기 진지로 돌아와서 훈련을 계속하므로 부하들이 그 전략에 감복하였다.그런데 어느 날 훈련 중에 적에게 포위되자 의병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자 그는 군사를 향하여 “만일 혼란을 일으키면 대사가 와해될 염려가 있으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내 계책을 따르라.”하고 “한 시간 후에 산 위에서 총소리가 나면 모두 동쪽으로 탈출하라.”고 하였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태연히 남산(南山)으로 올라가 몇 방의 총성을 내어 적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의병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1907년 10월에 의병을 일으켜 광주와 담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어느 날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단총을 몸에 품고 단신으로 적의 경비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도중에 일본 기마병과 마주치게 되어 그의 등 뒤를 쏘아 사살하고 총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그런데 1909년 3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의병은 불리하게 되거나 살상당해 그 전력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송학묵도 마침내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싸우다가 체포당하여 광주감옥에 구금됐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면서 맨주먹으로 감옥을 부수다가 수족(手足)을 모조리 절단당하고 교수형을 받았다.적이 최후의 유언을 묻자,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고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광주시사1(1992)》, 《광주북구지(1994)》
    2020-03-06 | NO.121
  • 송형묵(宋亨默)
    송형묵(1856~?)의 본관은 홍주이고 자는 군식(君寔)이다. 오늘날 북구 용두동 지역인 거진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來璇조 : 宋璡源증조 : 宋命鉉외조 : 許晦
    2020-03-06 | NO.120
  •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1644~1700)-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연암집 제9권 별집 /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 )께서 특별히 고(故) 승지 신(臣)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에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옛날 송(宋)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 )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이 소(疏)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 )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모(某 서유린(徐有隣) )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 )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 )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삼가 살피건대, 공(公)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諱)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堣)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 )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祖)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고(考)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 )하였다. 비(妣)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월 5일에 공(公)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세 )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 )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 )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 )에 의선(議選 선발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 )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아!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하였고, 또 이르기를,“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곤성(坤聖 인현왕후 )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諫)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 )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그 뒤 사간원 헌납, - 원문 빠짐 -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 )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의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광묘(光廟 세조(世祖) )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하였다.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 )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 )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하였다.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과,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주자(朱子)는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과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하였다.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목사(光州牧使, 1694)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印)을 던지고 돌아왔다.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蔘), 꿀,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월 17일,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斂)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 )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 )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 )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주-C001] 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을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주-D001] 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권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주-D002] 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年 11月 5日》[주-D003] 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주-D004] 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주-D005] 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주-D006] 옥산(玉山)의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주-D007] 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주-D008] 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주-D009] 조사기(趙嗣基)의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3월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주-D010] 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5월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주-D011] 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12] 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년(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주-D013] 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찬(撰)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주-D014] 《춘추(春秋)》의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주-D015] 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주-D016] 광대의 …… 바이니 : 노(魯) 나라 정공(定公)이 제(齊)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年》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주-D017] 정색(正色)을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즉,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주-D018] 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주-D019] 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년(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주-D020] 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주-D021] 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주-D022] 천리(天理)와 …… 설 : 호굉(胡宏)은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禮)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情)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주-D023] 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주-D024] 장희재(張希載)가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년(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주-D025] 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學8 力行》[주-D026] 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주-D027] 내언(內言)이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주-D028] 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주-D029] 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30] 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주-D031] 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는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주-D032] 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에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주-D033] 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주-D034] 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년(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년(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2023-08-09 | NO.119
  • 신건
    신건(申楗), 湖節1上-053-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18
  • 신덕균(申德均)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신덕균(1878∼1908)은 광주 우산동(또는 각화동 277) 출신이다.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夢菴), 본관은 평산으로 신태수(申泰洙)의 아들이다.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광주북구지(1994)에는 우산동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호적부 제적등본에는 각화동 277번지로 등재되어 있다. 출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의 손자 후복(厚福)이 현재 각화동에 거주하고 있다.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 그는 1907년 4월에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 의병대가 도마치전투에서 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그는 1907년 9월 1일을 기하여 고광순 의병대가 재기하자 가담하여 참모의 중책을 맡았으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신덕균은 윤영기(尹永淇)와 함께 광주에 가서 해산군인들을 소모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병력을 거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 의병대의 패배 소식과 고광순 등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신덕균은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 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차츰 병력과 장비가 부족해지자 부장에게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아 군기를 마련한 후 부대로 돌아와 전남․북의 경계를 누비면서 활동하다가 11월 초순에 의병을 해산하고 도피 은신하던 중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7일 정읍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서 적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20-03-06 | NO.117
  • 신응하
    신응하(申應河), 湖節1上-046-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16
  • 신태호
    성암晟巖 신태호申泰浩(1922~2012)는 광주상공회의소 9~12대 회장을 4번이나 연임하며 광주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경제인이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독립운동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신태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서 경제와 법률 공부를 한 뒤 귀국해 광주에서 평생을 기업인으로서 지역 경제부흥에 힘써 왔다.1952년 대광산업을 설립, 일본으로 우뭇가사리 수출하는 등 수출업에 뛰어들어 지역경제를 세웠으며 1968년에는 동화석유(현 소모석유)를 설립해 지역 에너지 산업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소모석유는 '정량공급·신속배달'을 모토로 창사 5년 만에 광주·전남 유류시장 점유율 55%를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소모석유는 소모홀딩스엔테크놀로지, 소모옵티칼, 성암산업, 소모농산 등을 거느린 소모그룹의 모태가 됐다.신태호는 1976년 광주상공회의소 제9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본촌산단, 송암산단 등의 조성에 힘써 ‘광주권 생산도시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생산도시운동을 앞장섰다. 그에 그치지 않고 하남산단 대기업 유치 등에도 적극 나서 지역산단 활성화에 박차를 기했으며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5년이란 긴 시간 동안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행했다. 고령 성암문화재단을 설립해 문화사업을 통한 지역 문화예술 부흥에 기여했으며 만대학원 광주 광덕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2018-05-29 | NO.115
  • 심남일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 자가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였꼬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작성한 시, ‘거의유감’(擧義有感)은 다음과 같다.乘風南渡馬如飛 (승풍남도마여비)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가니 말도 나는 듯 하구나.林下書生振鐵衣 (임하서생진철의) 초야에 글 읽는 이가 갑옷을 떨쳐입고蠻夷若末掃平盡(만이약미소평진) 내 만약 왜놈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면一死沙場誓不歸(일사사장서불귀)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왜 모래밭에 죽으리라고 맹서했을까? 1908년 1월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곳이 광주천의 모래밭이었다.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 등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 부대를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秋風將卒泣相離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古引山前馬去遲 고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一掃腥塵終有一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草違三載死生期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
    2020-03-24 | NO.114
  • 심의종 沈宜鍾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포목상으로 이름을 날린 심덕선은 충장로 4가에 남창상회南昌商會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심덕선은 광주 북동 출신으로 일찍이 행상부터 시작해 광주장, 송정장, 장성장을 돌며 어느 정도 자본이 모아지자 충장로 점포를 낸 것이다.그는 호남 일대에서 큰 판로를 가진 거상이 되었는데 1927년 1월에는 경영체제를 합명회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1936년부터는 광주 임동의 가네보방적鐘淵紡績 공장에서 생산했던 면직물의 총판매를 맡게 되어 남창상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충장로4가에 도매부, 소매부의 넓은 점포와 창고는 물론 수기동에 있었던 3채의 대형창고에도 중국산과 일본산 비단과 옷감, 광목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심덕선은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핵심멤버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2020-03-10 | NO.113
  • 안규면(安圭冕)
    안규면(安圭冕, 1880~1958))의 본관은 竹山이고 자는 자용(子用), 호는 삼곡(三谷) 이다.거주지역은 광주 서방면 봉곡리이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4 | NO.112
  • 안규일(安圭鎰)
    안규일(安圭鎰, 1888~1965)의 본관은 竹山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성(晩惺)이다. 부 : 安正煥조 : 安瑛壽증조 : 安思行외조 : 尹佑鎭처부1 : 曺圭斗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賓次司書로 참석하였다
    2020-08-04 | NO.111
  • 안길환(安吉煥)
    안길환(安吉煥, 1851~1908)의 본관은 竹山 , 자는 성운(成運)이다.부 : 安秀權조 : 安志默증조 : 安起魯외조 : 全幸魯처부1 : 羅相翊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110
  • 안병택(安秉宅)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의 본관은 竹山, 자는 처인(處仁) , 호는 부해(浮海)이다. 하남면 장자동에 거주했다. 《부해유고》가 있다.부 : 安達三조 : 安鍾秀증조 : 安弼蓮외조 : 坡州 尹처부1 : 金海 金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執禮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3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5 | NO.109
  • 안용환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48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淸深堂安君行狀 君諱龍煥字慶雲。淸深其堂顔也。安氏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上祖。有闢異衛正之功。從祀夫子廟。文惠公諱元衡門下侍中。勳封竹城君。子孫分貫竹山。雙淸堂諱勉官判典。封興寧君。竹溪諱魯生。始仕國朝。集賢殿大提學。生員諱孟孫。始居光州。荷谷諱忠達。文章行義。爲世宗仰。官正郞。士林建祠俎豆之。高祖諱斗胤。曾祖諱宅魯。祖諱思孝。考諱載五。下鄕數世後。顯榮雖少替。而世篤文行。爲鄕邦矜式。衣冠古家。妣光山金氏父修儀。德配君子。君生哲宗丁巳(1857)五月戊寅。才晬而孤。不記父顔。爲畢生痛。誠敬事母。出外遄反曰吾母待我。得異味。必以獻。與儕兒遊。口無戲言曰。悖出必悖入。羞辱及於父母。甫上學。自知劬書。不煩提敎。每日授課。歸讀於母側曰。母氏孤踽。須臾不可離也。少長。乃閣書曰。親老不養。徒事文墨。子職有闕。樵山漁水。庋閣常餘。慈夫人常多疾。迎醫合藥。舍置他事。疾革。晝宵涕淚。遭故。擗踊頓絶。水穀不入於口三日。雖甚貧困。而附身附棺。誠信無憾。旣殯。曰吾據禮守廬。則奠獻莫需。行傭樵採。饋食無闕。及葬。展晨昏不廢。當膝成坎。至行所感。有欲妻之者。君卻之曰。雖甚竆厄。禮限不可違越。服闋娶婦。勤儉立家。先置祭田。以永香火。周恤族戚。不計有無。收養族子女。嫁娶資生者亦數人。凡民有喪。貧不能經紀。則出力相助。使無遺憾。族黨墳墓無主頹圮。改築之。使不犯五患。蓋其天性仁厚。見人之急。若癏在己。嘗靑馬邪熾。勒人爲黨。君乃與里人立約曰。凡我同約之人。勿染於邪。否者不可與同閈。有潛誘里子弟者。君招致諭之曰。惑亂黔首。鄕有八刑。人雖可欺。不畏于天。人之異乎禽獸。爲不失其良心。耕田鑿井。庶民常職。左道惑衆。爲獸爲禽。辭氣懇至。其人愧謝。是以一里賴而潔淨。每爲彼輩眼釘。數被侵擾。亂平後皆來請罪。君笑曰。往日之事。否運所使。革心爲貴。何至相謝。聞者皆服其寬弘。平居不見邑宰。或致書願見。輒辭以愚劣。歲丙申。余妄意討復。駐陣在光山館。君仗劒而至。誓以同死。僨事之後。痛哭杜門。敎子課孫。爲日間事業。于後五賊賣國。憤不自勝。卽欲叫閤請斬。沮格莫遂。仰天痛歎。或至廢食。晩構一堂將落。夢有老人大書壁上曰淸深。覺而自解曰。擧世皆濁。反之則淸。擧世皆淺。反之則深。所以爲戒者大矣。因受以爲扁。蓋其平日所守者正。故發於宵寐者如此。所謂老人者。豈靈臺主人歟。辛亥(1911)冬。偶得難醫之祟。臨命。顧謂子圭冕曰。世衰道微。魍魎晝行。世間萬事。無足置胷中。須立心制行。從師取友。謹守世風。則入地之目。庶可瞑矣。以翌年正月二日乙丑(1925)終。得年僅五十五。嗚呼短矣。見今滔滔胥淪。不與俱。所謂千萬人中常知有己。如君者不數數有焉。使久於世。庶可以激濁揚淸。而何天奪之速也。葬再遷於白蓮洞後佳藏洞戌坐之原。夫人河東鄭氏仁默女。有婦德。一男卽圭冕。副室一女適高濟崑。圭冕以父命從余遊。淳謹好學。庶不負君之遺訓矣。草事行爲家狀。以余知君深。請刪潤以示久遠。吾何忍辭。
    2020-04-08 | NO.108
  • 안정환(安正煥)
    안정환(安正煥, 1843~1909)의 본관은 죽산이고 자는 덕유(德有), 호는 명수(明水)이다.부 : 安瑛壽조 : 安思行증조 : 安碩魯외조 : 盧彦鉉처부1 : 尹佑鎭처부2 : 丁奇杓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8-05 | NO.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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