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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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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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천정
    박천정(朴天挺), 湖節1上-069-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51
  • 박충렴
    박충렴(朴忠廉), 湖節4中-045-2,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50
  • 박치도朴致道(1642∼1697)
    박치도朴致道(1642∼169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진사 박충정(朴忠挺)이며 어머니는 고령(高靈) 신씨(申氏)로 신택(申澤)의 딸이다. 문장에 능하고 학업이 정치하여 1662년(현종 3) 20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지평에 이어 정언이 되어 절도정배(絶島定配)와 추록훈(追錄勳)을 신중히 처리하도록 상소하였다.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682년 북평사(北評事)·부수찬·지평, 1683년 장령·부교리·헌납·집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남인의 우두머리인 윤휴(尹?)의 사사(賜死)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배척되어 변방에 귀양갔다. 그 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에 의해 남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서용되어 형조참의, 능주목사 등을 지냈다.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 등과 깊이 사귀었다. 문집으로 《검암유고黔岩遺稿(검암집)》이 있다.
    2020-09-23 | NO.149
  • 박하형(朴夏炯)
    박하형(朴夏炯, 1891~1971)의 자는 춘엽(春燁)이며 호는 송애(松厓)이다. 광주 서창면 사동리 출생이다. 후석 오준선의 문인으로 『松涯遺稿』 가 있다.
    2020-08-08 | NO.148
  • 박해량(朴海量)
    박해량(1850~1886)의 본관은 순천, 자는 도겸(道謙), 호는 율수(聿修)이다. 광산구 하남동(장수리)이 거주지이다. 박해량의 호는 율수재聿修齋로 고산 임헌회,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노사 기정진 등에게서 학문을 터득했으나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탐라耽羅, 흑산黑山 등지에 유배생활을 한 1874~1876년간의 기록으로 귀양 중인 면암 최익현과 함께 하면서 경서에 대한 토론과 시국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그 당시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실록인 <해상일기海上日記>는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와 흑산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따라가서 수학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일기로, 1874년 2월 10일부터 4월까지, 1875년 4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1876년 2월 7일부터 1876년 6월 23일까지의 3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일기는 1873년 겨울에 면암선생이 제주도에 안치되자, 그 다음해인 1874년 2월 10일에 장성에 사는 김효환(金孝煥)과 함께 선생을 뵈러 제주도에 가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3월 1일에 제주도 무주포(無注浦)에 도착하고 다음날 면암선생의 배소에 들어가 인사하였으며, 그 다음날 집지하고 배우길 청하여 계사(繫辭)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4월 3일에 조천관에서 배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에서 일기는 일단락된다.두번째 일기는 1875년 4월 20일에 면암선생이 사면되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방문해준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 선생을 배행하고 장성 노사 기정진선생에게 찾아가고, 함께 올라갔는데 29일 성환역에 도착했을 때는 장성의 기우번과 기우만이 선생을 알현하기도 했다. 5월 1일에 동작진을 건너 2일에 선생의 집인 가거(嘉菃)에 도착했고, 15일부터 서울에서 선생이 있는 거곡(菃谷)을 오고가며 주역의 괘사, 격몽요결, 태극도설, 경재잠, 맹자 등을 공부하고, 모르는 것은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질문하고 답을 받았으며, 8월 23일에 경무대(慶武臺)에서 구일제(九日製) 시험을 보았다. 9월 22일에는 내려와서 임헌회(任憲晦)선생에게 지알(贄謁)하고, 수학하며 10월 3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는 1876년 2월 7일에 면암선생이 마항점(馬項店)에 행차한 것부터 시작되는데, 면암은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도끼를 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다가 체포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선생을 배종하고 배소인 흑산도로 향해간 것이다. 27일에 다경진에 도착하고, 윤5월 2일에 관청도에 정박하였으며, 4일에 우이도에 닿았다. 5일에 화가가 와서 선생의 진영을 그리려고 하자 선생이 꾸짖으며 허락을 하지 않았으나 15일에 영정이 완성되었다. 노사선생이 문목에 대해 답장을 보내온 것을 베껴서 선생에게 바치자, “이 어른의 언론은 어찌 이리도 매양 명백한 것인가.”라고 하였고, 이밖에도 유소(儒疏)나 이전의 큰 사건 등에 대해 선생의 의견을 들었다. 장무(瘴霧)가 자주 끼자 선생이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으며, 6월 23일 아침에 동쪽에 청기(靑氣)가 일어남을 보고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일기는 끝을 맺는다. 6권 3책으로 1909년 아들 박원동이 간행. 책머리에 기우만의 서문, 시 58수, 서 60편, 기 1편, 제문 4편 등이 수록되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대한 기록은 노사문집蘆沙文集의 연보를 비롯한 최익현의 율수재행장聿修齋行狀에 “외모의 풍채가 뛰어나고 사색辭色의 기운이 온화하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시문의 착상이 속 빠르며 글씨의 필법이 대단하다.장모풍영(狀貌風盈) 사색온윤(辭色溫潤) 사친지효(事親至孝) 작문부시수우입취(作文賦詩隨遇立就) 필법주건(筆法遒健)”고 표현했다.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연보(年譜), 병자년(1876년) 윤5월 선생 44세 때 기록에 보면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察)· 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 …(중략) 이제 또 화승(畵僧)을 데려와서 선생의 초상을 그리고, 3개월 동안 모시다가 돌아갔다. …(후략)” 1880년 노사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광산구 장수길 33에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와 흑산도 유배 때 지성으로 보살핀 제자 박해량(朴海量)과 그의 아들이자 의병으로 활약한 박현동의 강학 공간인 율수재(聿修齋)가 있다. 『聿修齋遺稿』 가 있다.부 : 朴鼎鉉조 : 朴聖洛증조 : 朴達鎭외조 : 兪致福처부1 : 林基休처부2 : 金盧休
    2020-03-06 | NO.147
  • 박현동(朴玄東)
    박현동(朴玄東, 1886~1962)은 광산구 장수길 33(독립운동 당시 주소 全南 光州郡 瓦谷面 相村)번지의 강학공간인 율수재(聿修齋) 뒤에 있는 살림채에서 율수재 박해량(朴海量, 1850~1886)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4월 부친의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병오, 정미, 무신 호남창의기군대장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03-09 | NO.146
  • 박희수
    박희수(朴希壽), 湖節3下-135-1, 光州, 壬辰, 大駕扈從-《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45
  • 박희수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면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의 직을 받고 형조좌랑에 이르렀고 함열현령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2018-05-28 | NO.144
  • 방명달
    방명달(房明達), 湖節4下-135-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43
  • 백록(白麓) 신공(辛公) 행장- 신응시 광주목사
    백록(白麓) 신공(辛公) 행장- 신응시 광주목사송자대전 제206권 / 행장(行狀)고조부 익조(益祖)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고조모는 강씨(康氏)이다.증조부 석(奭)은 수의부위(修義副尉)로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모는 원주 변씨(原州邊氏)이다.조부 윤형(尹衡)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조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아버지 보상(輔商)은 부사(府使)로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공의 휘(諱)는 응시(應時)요, 자(字)는 군망(君望)이요, 백록(白麓)은 그 호(號)이다. 그의 선대(先代)는 영월인(寧越人)으로서 상조(上祖) 중석(仲碩)은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냈고, 그의 손자 희(熹)는 우리 왕조(王朝)에서 한성 관윤(漢城官尹)을 지냈다. 직장공(直長公)과 부위공(副尉公)은 모두 조졸(早卒)하였고, 부사공(府使公)은 성품이 너그럽고 신중하였다. 일곱 고을의 원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공(公)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임진년(1532, 중종27)에 태어났다. 나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뛰어나서 6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글귀를 지으면 남을 놀라게 하였다. 11세에 이웃에 있는 가숙(家塾)에서 글을 읽을 때였다. 한번은 의금(衣衾)과 서책(書冊)을 모두 훔쳐서 달아난 아이가 있었다. 함께 글을 읽던 여러 아이들은 크게 놀라서 모두들 달려가 그 부모에게 말했지만, 공은 말하고 웃고 하는 등 태연히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를 보고 식자(識者)들은 모두 공(公)이 이미 큰 인물이 될 사람임을 알았다.16세(1547, 명종2) 때였다. 명묘(明廟 명종)께서 알성(謁聖) 후 선비를 뽑을 때, 공(公)이 지은 글이 합격되었으나 당시 좌상(左相)인 안현(安玹)이 고관(考官)으로 있다가 공이 지은 것임을 알아보고는 즉시 붓으로 끌어당겨 소매 속에 넣고는 ‘이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니, 소년(少年)에 등과(登科)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였다. 공이 이런 일을 전해 듣고는 기뻐하며 ‘안공(安公)이 나를 아껴주는구나’ 하니,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임자년(1552, 명종7)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기미년(1559, 명종14) 가을에는 상(上)이 경회루(慶會樓)에서 베푼 친시(親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공(公)이 어려서부터 큰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오랫동안 급제하지 못하자 모든 사람들이 공이 꺾였다고 말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들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후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갑자년(1564, 명종19)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이때 청송(聽松) 징사(徵士) 성수침(成守琛)이 죽자 공이 호당(湖堂)에서 성 처사(成處士)를 추모하는 시 30운(韻)을 지어 선생의 안빈수도(安貧守道)와 구원(丘園)에서 양덕(養德)한 일을 갖추어 말하고 국가에서 마땅히 포증(褒贈)해야 한다는 뜻을 표하니, 상(上)이 즉시 명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뒤에 서 처사 경덕(徐處土敬德)이 죽었을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을축년(1565, 명종20)에는 뽑혀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는데 이 뒤로는 수시로 체직(遞職)되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병인년(1566, 명종21) 1월에는 잠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병조 정랑(兵曹正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고, 이해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명묘(明廟) 말년에 와서 저사(儲嗣)가 없음으로 해서 내외(內外)가 근심하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公)이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의론을 내어 건백(建白)하려 하였으나 끝내 장관(長官)에게 저지당하였다.얼마 후 명묘(明廟)가 승하하였는데 공은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상을 모시어 남다른 은우(恩遇)를 받았으므로 슬픔이 더욱 컸다. 그리하여 매일 조정에서 돌아와서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방에 들어가 면벽(面壁)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집 사람들이 감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었다.선묘(宣廟 선조)가 즉위하자 자전(慈殿)이 어휘(御諱)의 개정(改定)을 명하면서 날일[日] 변의 글자 중에서 택하여 행공(行公)하여 올리도록 하였다.경연에서 진강(進講)할 때는 음운(音韻)이 홍창(洪暢)하고 토론이 상명(詳明)하였으며, 특히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미에 이르러서는 고사(古事)를 인용 비유함으로써 의견을 진술함이 매우 적절하였다.하루는 상(上)이,“《황명통기(皇明通紀)》는 매우 좋은 책인가?”하고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전하는 어디서 이 책을 구하셨습니까?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하는 책 이외에는 일체 보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이 책의 권말(卷末)에서 논(論)한 내용은 통서(統序)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습니다.”하였다. 이는 대개 조정에서 마침 사친(私親)에 대한 전례(典禮)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 터인 데다, 《황명통기(皇明通紀)》는 편말(篇末)에서 ‘흥헌제(興獻帝)의 추존(追尊)이 이치상 당연하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공은 이어서 또,“국가의 치란은 항상 군자와 소인의 용사(用舍)에 달렸고, 용사의 요점은 반드시 거주(擧主)가 책임을 엄격히 처리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사람을 함부로 천거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하였다.대개 선조(宣祖) 초기의 보도(輔導)와 계옥(啓沃)의 공은 실로 공(公)의 비중이 컸으므로 자전(慈殿)은 이를 가상하게 여겨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무진년(1568, 선조1)에 태감(太監) 장조(張朝)와 행인(行人) 구희직(歐希稷)이 입국(入國)하여 조서(詔書)를 전할 때,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공(公)이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때 구공(歐公)이 공의 의표(儀表)를 보고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이 사람이야말로 해동(海東)의 위인(偉人)이니 귀국의 보배요.”하였다. 시(詩)를 수창(酬唱)할 때에 가서는 혀를 차며 더욱 감탄하였다.기사년(1569, 선조2)에 한림 검토(翰林檢討) 성헌(成憲)과 급사중(給事中) 왕새(王璽)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도 공이 정철(鄭澈)ㆍ이해수(李海壽)와 함께 종사관이 되었을 때였다. 의주(義州)의 고진강(古津江)은 산이 험하고 물살은 급한 데다 마침 큰비가 와서 배를 타고 사신을 맞이하다 배가 바위에 부딪쳐 익사한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다. 제공(諸公)이 탄 배도 계속해서 위급해지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얼굴빛이 변했으나 공은 홀로 태연하여 동요하지 않았고, 가까스로 위험을 벗어나서도 별로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이를 보고 제공(諸公)들이 탄복하며 공의 담력은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영남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주상(主上)이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고 떠나 각 고을을 출입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위로하였다. 이때 품질(品秩)이 높은 수령(守令) 가운데 탐오(貪汚)하고 포악(暴惡)하나 아무도 이를 말하지 못하는 자가 몇 명 있었다. 공이 이들을 모두 탄핵하여 제거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감복(感服)하였다.이해 겨울에 모친상(母親喪)을 만나자, 예경(禮經)을 참고하여 반드시 옛사람들이 행한 대로 따랐으나, 또한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 일은 하지 않았다. 또 예경을 읽는 틈틈이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서 예(禮)를 논(論)한 말만을 가려 모아 2권으로 만들었는데, 현재 출판되어 세간에 유행하고 있다. 복(服)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비변사(備邊司) 낭청(郞廳)을 겸하였는데 묘당(廟堂)에 규획(規劃)이 있을 때마다 제공(諸公)이 반드시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다.호남(湖南)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나갔을 때는 수령들이 공을 대하기도 전에 두려워서 떨었고, 심지어는 남방(南方)에 사는 선비들까지 다투어 찾아와 공을 보려 하여 마치 천 길 아래에서 높이 나는 봉황을 보려는 것 같았다.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였다. 이는 장차 문형(文衡 대제학의 별칭)을 삼으려 해서였다. 전한(典翰)을 거쳐서 승진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어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하였다.공(公)이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주상(主上)의 권우(眷遇)가 더욱 융숭하였으므로 단의(丹扆)에다 경계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올린 옛사람의 고사를 본떠서 학문에 힘쓸 것, 백성을 사랑할 것, 어진 이를 가까이할 것, 간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 등 6개의 잠(箴)을 지어 바치자, 주상이 깊이 느껴 받아들였다.갑술년(1574, 선조7) 1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승진 임명되었는데, 일에 따라 사전(事前)의 모책(謀策)을 잘하여 충익(忠益 진심(眞心)을 다하여 세상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매우 많았다. 이때 상(上)이 황랍(黃蠟 꿀벌의 집에서 꿀을 짜내고 찌꺼기를 끓여 만든 기름 덩이. 밀랍) 수백 근(數百斤)을 진상(進上)하라고 명하자 공이,“대체로 임금에게 헌상(獻上)하는 물품은 모두가 백성들의 고혈(膏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당 상정(詳定 나라에서 세액(稅額)ㆍ공물액(貢物額) 등을 심사 결정하던 일)의 규례(規例)에 본디부터 그 수(數)가 정해져 있으니 1년 동안의 세입으로 충분히 1년 동안의 용도(用度)에 지공(支供)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경상적(經常的)인 비용 이외에 조금만이라도 더 쓰면 그 영향은 반드시 백성들에게서 추가로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데 미치고, 한 번 추가로 거두어들인 다음에는 이것이 문득 전례(前例)가 되어서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옛날 송 인종(宋仁宗)은 어느 날 밤 속이 허출하여 양구이[燒羊]를 먹고 싶었으나 이것이 규례(規例)가 될까 염려한 나머지 끝내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물품(황랍)은 어전(御前)에 진공(進供)된 일상적인 용도 이외에는 달리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외인(外人)들은 혹, 성상(聖上)께서 불상의 주조(鑄造)에 쓰시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일이야 진정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신(臣)은 삼가, 전하께서 취색(取索)하시는 것이 이렇듯 많아져서 뭇 신하들의 의구심을 초래하고 백성들에게 폐단을 거듭 끼치는 것을 탄식합니다.”하며, 극력 진술하였다. 이때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을 일컫는 말)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표정이었고 음성도 매우 노기가 등등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용하게 개도(開導)하였고, 율곡 선생(栗谷先生)과 함께 선후로 쟁론(爭論)하여 끝내는 임금의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환관(宦官)의 무리들이 참람할 조짐이 있자, 공이 규례(規例)에 의거하여 참람한 길을 방색(防塞)함으로써 환관들이 공을 미워하여 곁눈질을 하였다. 또 대간(臺諫)이 권귀(權貴)들과 협동하여 자신의 편의를 취한 사실이 있으므로, 공이 그의 무망(誣罔)한 정상을 논계(論啓)하여 마침내 대간과 함께 모두 파직되었다.그후 얼마 안 되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서용(敍用)되었는데,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맨 먼저 염능(廉能 청렴하고 현능함)한 사람을 등용하고 탐오(貪汚)한 사람을 파출시키며, 풍교(風敎)를 두텁게 하고 폐막(弊瘼)을 제거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은 결과, 그곳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호남(湖南) 전역이 일신되었다. 공효(功效)가 한창 일어나는 판에 갑자기 큰 병을 얻었고 게다가 대부인(大夫人)까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疏)를 올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병자년(1576, 선조9)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공이 사는 백록(白麓)에 있는 계정(谿亭)이 지은 지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대략 보수를 하였던바, 갑자기 유언비어가 위에 알려짐으로써 상(上)이 중사(中使)를 명하여 조사한 결과 금산(禁山 나라에서, 나무를 베거나 돌을 캐내지 못하도록 금제한 산)에서 돌을 캐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에게 이런 일이 없는 것을 알지만 공은 끝내 그에 대한 변명이 없었다.정축년(1577, 선조10)에 서용(敍用)되어 군직(軍職)에 임명되었는데,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守令)이 되기를 청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12) 가을에 임기가 차서 조정에 돌아오자, 조정에서 공을 서쪽으로 보냈다.경진년(1580, 선조13)에는 대사성(大司成)으로 있다가 또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공은 날마다 부서(簿書)를 다루는 데 있어 조금도 태만함이 없었고, 옥사(獄事)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 한번은 강도가 어떤 사람을 격살(擊殺)하였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서,“나를 죽인 자는 아무개다.”하여, 그의 아내가 관가에 와서 그렇게 고소하므로 즉시 아무개를 체포해다가 신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었고, 또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았다. 그래서 공이 같은 추관(推官) 및 관찰사(觀察使)에게 아무개가 범인이 아님을 쟁론(爭論)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어느 중이 어떤 사람을 겁략(劫略)하다가 체포되어 국문(鞫問)을 받고 자복하였는데, 이어 전후로 죽인 사람을 죽 열거해 보니 지난번 그 사람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의 아내는 그 중이 가지고 있는 조대(條帶 허리띠를 가리킨 듯함)를 알아보고는 슬피 울면서,“이것은 바로 우리 남편의 것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아무개’는 살인죄를 면하였다.임오년(1582, 선조15)에 명(明) 나라 한림(翰林) 황홍헌(黃洪憲)과 급사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자, 조정에서 공을 체직하여 의주 도사 연위사(義州都司延慰使)로 임명하였으니, 대체로 문예(文藝)에 관한 일과 자금을 조달하여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에 있어 원접사(遠接使)가 유고시에는 공으로 대치(代置)하려고 했던 것이다.갑신년(1584, 선조17)에 재차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때 옥비(玉非)의 자손을 추쇄(推刷)하는 일이 있어 수백 호의 민가를 소요(騷擾)시켰는데, 사족(士族)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대간(臺諫)이 추쇄하지 말도록 간쟁(諫爭)하였으나, 상(上)이 윤허하지 않다가,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극력 논술하자 즉시 윤허하였다. 공이 아니었으면 화기(和氣)를 크게 해칠 뻔하였기에 조정에서 모두 감탄하였다.이해 가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어 대궐에 나아갔다가 갑자기 질병이 발작하여 들것에 실려 들아와서 졸(卒)하니, 때는 을유년(1585, 선조18) 1월 모일(某日)이었다. 향년(享年) 54세였다. 공은 일찍부터 공보(公輔 재상(宰相) 지위를 가리킴)의 인망(人望)이 있었던 터라, 공의 부음(訃音)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애도하면서 공의 학덕(學德)이 다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공은 뛰어난 인물에 크나큰 도량(度量)에다 덕(德)이 높고 박학(博學)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고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모나고 굳세고 밝고 정직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천품(天稟)이 본디 뛰어난 데다가 평소의 수양이 깊었던 것이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색양(色養 부모의 안색을 살펴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섬기는 일)을 잘하여, 한 번도 어버이 곁에서는 노복(奴僕) 등을 큰소리로 꾸짖지 않았다.대부인(大夫人)께서 중년(中年)에 병이 많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셨는데, 공이 형제들과 함께 약을 달여 간호하면서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았고, 똥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증험하였으며, 밤이면 반드시 밖에 나가 어머니의 병이 낫게 해주기를 천지신명께 빌곤 하였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서는 애통함이 예절(禮節)보다 지나치게 하여, 또한 정문(情文 정의(情意)와 예의범절)을 극진히 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을 모실 때는 말과 얼굴빛을 유순(柔順)하고 화평스럽게 하여 대부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힘썼다. 공이 거처하던 곳이 처음에는 어머니가 거처하는 곳과 약간 거리가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거처를 어머니의 곁으로 옮겨 놓고서 종일토록 즐겁게 모셨다.형제들과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여러 아우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엄하게 하지 않고 예(禮)로 하였으며, 경계하여 타이르는 말은 온순하고 간절하여 저절로 감동되게 함으로써 여러 아우들도 모두 힘써 배우고 실천하였다. 집 안의 살림살이에 쓰이는 기구(器具)는 일체 마음대로 가져다 쓰도록 하였고 노복(奴僕)들이 사용하는 것도 피차의 구별이 없이 하였다.공이 벼슬을 할 때는 도의(道義)를 높이고 명절(名節)을 숭상하며, 대사(大事)에 임(臨)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고, 경전(經典)과 고법(古法)을 의거 인용하고, 공(公)과 정(正)을 굳게 지키어 확고부동하였다. 치체(治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에 밝고 시무에 통달하였으며, 변방의 정세와 병무(兵務)에도 매우 밝아, 율곡 선생(栗谷先生)과도 논의가 서로 협동하여 끝내 변함이 없었다.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일을 만나면 용감하게 대들어서 회피하는 일이 없었으되, 천위(天威 임금의 위엄. 전하여 임금을 가리킴)를 가까이 대하여 뇌정(雷霆 천둥) 같은 위엄이 거듭되어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을 다 진술하고 나서야 물러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비록 누차에 걸쳐 폐척(廢斥)을 당하였지만 태연하게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그리고 군현(郡縣)을 다스릴 때는 반드시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가르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선비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모름지기 궁리(窮理)와 독행(篤行)을 근본으로 삼고 문사(文辭)만을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듣는 자들은 기꺼이 복종하여 진작(振作)하였다.공은 그 넓은 도량과 맑은 회포로 담담하여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허노재(許魯齋 원(元)나라 허형(許衡))의 말에 ‘학문을 하는 사람은 생업(生業)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하였으니, 만일 생업을 다스리더라도 의리[義]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본디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군자의 수치거리가 될까 염려해서 생업을 다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나의 본성이 생업을 다스리는 일에는 거리가 멀어서 아무리 억지로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하였다. 그러므로 거의 30년 동안이나 벼슬을 하면서 누차 대읍(大邑)들을 다스리곤 하였지만 집 안에 장물(長物)이 하나도 없었고, 봉록(俸祿) 이외에는 절대로 조금이나마 생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사는 집에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어 마치 그윽한 중[幽禪]처럼 생활하였다. 평소에 벼슬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매양 한적하게 물러날 마음이 있었으나, 다만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해 계시므로 어쩔 수 없이 벼슬을 하였을 뿐이다.일찍이 회덕(懷德)의 갑천(甲川) 가에서 일구(一區)의 좋은 곳[佳處]을 발견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은거(隱居)할 곳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개연(慨然)한 회포가 시(詩)에 자주 드러났으니, 공의 아회(雅懷 평소에 간직하고 있는 풍류스러운 회포)가 청고(淸高)함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겠다. 공의 시(詩)는 골격(骨骼)이 잘 전개(展開)된 데다 음조(音調)가 호건(豪健)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유집(遣集) 몇 권이 간행(刊行)되었다.아, 국가가 불행하여 누차 사화(士禍)를 치루었고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경계시키고 형은 아우를 경계시키되 모두 성현(聖賢)의 글을 화근(禍根)으로 여기고, 인의(仁義)의 설(說)을 짐독(鴆毒)처럼 여겨 천리(天理)가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인도(人道)가 절멸(絶滅)되었다. 그러다가 명종(明宗) 말기로부터 전철(前轍)을 개역(改易)시킴으로써 한때의 권간(權奸 권세 있는 간신(奸臣))들이 서로 잇달아 추방되고, 오랫동안 막혔던 초야(草野)의 공론(公論)이 수십 년 뒤에야 행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림(士林)들의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었으며, 잘못된 점들을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세도(世道)가 태평해지고, 성인(聖人)의 정치가 한창 새로워졌다. 이때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선왕(先王)의 뜻을 잘 계승하여 경연(經筵)에 자주 나가서 성학(聖學)을 힘써 강론(講論)하고, 산림(山林)에 숨어있는 선비들을 초치(招致)하여 당세의 시무(時務)를 자문하니, 도덕(道德)을 품은 사람들이 모두가 머리를 쳐들고 소회(所懷)를 토로하여 공경하고 화합해서 찬양(贊揚)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자(儒者)의 의리(義理)에 대한 학문이 다시 세상에 밝아져서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바른 데로 돌아가고, 민속(民俗)이 크게 변화하여 사람마다 씻고 닦고 달구고 갈고 하여 염치(廉恥)와 명절(名節)을 숭상하고, 이욕(利欲)과 피음(詖淫 편파적인 행동과 부정한 말)을 싫어할 줄 알았으니, 경력(慶曆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ㆍ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시대의 정치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시론(時論)이 서로 어긋나고, 사류(士類)들이 서로 버티어 피차(彼此 저기와 여기, 즉 동서(東西)의 분당을 가리킴)에 나고 들고 하면서 서로 불화(不和)를 조성하여 조정(朝廷)에는 지난날의 기상(氣象)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공이 한두 명의 제공(諸公)과 함께 그 분당(分黨)을 보합 진정(保合鎭定) 시키어 서로가 마음이 화합하는 좋은 결과를 도모하려 하였지만 어찌할 수 없으므로, 탄식하기를,“대체로 사람의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는 마땅히 개개인 각자에게서 찾아야지, 만일 여기[此]는 옳고 저기[彼]는 그르게 여기거나, 자기 당여(黨與)라서 바르게 여기고 자기 당여가 아니라서 부정하게 여긴다면, 진퇴(進退)와 용사(用舍)가 인재의 현능(賢能) 여부에 매이지 않음으로써, 출세하는 데 예민(銳敏)하여 유행(流行) 풍조에 영합하는 자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염치(廉恥)와 명절(名節)이 점차로 땅에 떨어지고 세도(世道)가 점차로 쇠퇴(衰頹)해져서 마침내 어찌할 수 없게 될것이다.”하였는데, 수십 년 뒤에 이르러서 공의 말이 적중되었다.전부인(前夫人) 무령 정씨(武靈丁氏)는 별제(別提) 기(琦)의 딸로서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후부인(後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군수(郡守) 응서(應瑞)의 딸인데, 학식과 도량이 뛰어나서 사군자(士君子)와 같았다. 전부인에게서 낳은 일남(一男) 경진(慶晉)은 공의 덕(德)을 잘 닮았는데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고, 후부인에게서 낳은 일녀(一女)는 참판(參判) 윤흔(尹昕)에게 시집갔는데 후사가 없다. 참판 경진(慶晉)의 아들은 희손(喜孫)ㆍ희업(喜業)ㆍ희순(喜循)인데 희손ㆍ희업은 모두 군수(郡守)이고, 딸 셋은 찰방(察訪) 심평(沈枰), 진사(進士) 남궁걸(南宮杰), 지평(持平) 이시우(李時雨)에게 시집갔다. 희손의 두 아들은 광(㫛)과 단(暺)이고, 두 딸은 현감(縣監) 정성원(鄭星源)과 정석윤(鄭錫胤)에게 시집갔다. 희업은 네 아들을 두였는데, 장남 항(暅)은 현감이고, 나머지는 상(㫾)ㆍ후()ㆍ숙(㬘)이다. 심평(沈枰)은 2남 3녀를 두었고, 남궁걸(南宮杰)도 2남 3녀를 두었으며, 이시우(李時雨)도 2남 3녀를 두었다. 참판 경진의 측실(側室) 소생이 3남 2녀인바, 아들은 희백(喜白)ㆍ희한(喜漢)ㆍ희계(喜季)인데 희계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가 되었다.공은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경연사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성균관사(司憲府大司憲兼同知經筵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추증되었는데, 뒤에 아들 참판이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됨으로써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가증(加增)되었다.나는 공(公)보다 훨씬 뒤에 났기 때문에 비록 그 문하에 들어가서 그 덕(德)을 우러러보지는 못하였지만, 선세(先世)에 서로 혼인을 하였던 때문에 인연이 깊어져서, 공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공을 깊이 복종한 자로는 의당 나만 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입언(立言 후세에 전할 만한 말을 남기는 것)의 군자(君子)를 기다린다.숭정(崇禎) 병인년(1686, 숙종12) 10월 모일에 덕은후인(德恩後人) 송시열은 삼가 쓰다.[주-D001] 사친(私親)에 대한 전례(典禮) 문제 : 선조(宣祖)의 생부(生父)인 이초(李岹)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하는 데 대한 논의를 가리킨다.[주-D002] 단의(丹扆)에다 …… 고사 : 당 경종(唐敬宗)이 소인을 가까이하고 자주 놀이를 나가자 절강 관찰사(浙江觀察使) 이덕유(李德裕)가 단의(丹扆)에, 소의(宵衣)ㆍ정복(正服)ㆍ파헌(罷獻)ㆍ납회(納誨)ㆍ변사(辨邪)ㆍ방미(防徵)의 6가지 잠(箴)을 써서 올린 고사를 말한다. 단의는 천자가 백관(百官)의 조회를 받는 곳에 치는 붉은 색의 병풍이다. 《新唐書 卷180》[주-D003] 옥비(玉非)의 …… 추쇄(推刷)하는 일 : 옥비는 본래 경원(慶源)의 관비(官婢)였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65~1487) 연간에 진주(晉州) 사람이 북도(北道)의 변장(邊將)이 되어 경원의 관비를 얻어 살면서 딸을 낳았는데 이가 곧 옥비이다. 진주의 군관(軍官) 강필경(姜弼慶)이 이 사실을 진고(陳告)하자 국가에서 옥비의 자손을 쇄출(刷出)하라고 명함으로써 전후로 무려 5백여 명이나 쇄출하였는데, 그중에는 옥비의 친자손 이외에 인척(姻戚) 관계에 얽힌 사람이 많았는바 사족(士族)들도 그 가운데 많이 들어 있었으므로 경상도 일대에 소요(騷擾)가 매우 심했었다. 《宋子大全隨箚 卷12》[주-D004] 장물(長物) : 일상생활에 긴요하지 않는 물건, 즉 사치품 등을 일컫는 말이다.
    2023-08-08 | NO.142
  • 백언학
    백언학(白彦鶴), 湖節5上-090-1, 光州, 丙子, 安邦俊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41
  • 범세동(范世凍 : ?~?)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는데, 이성계가 이곳에 불을 지르자 고향 땅인 광산군 본량면 복만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태종은 선생을 대사성(국립대총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저술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살폈으며,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를 저술하여 동방의 인물들을 소개하였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들이라는 허왕된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환단고기》에서는 범장(范樟) 혹은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가 〈북부여기〉를 썼다고 언급되어 있다.선생의 충절은 조선시대의 사육신이나 퇴계 이황 그리고 상촌 신흠의 칭송을 받으며 선비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유림의 추천을 받아 광주 생룡동 복룡사(伏龍祠)에 모셔 매년 추모하고 있다.
    2021-04-08 | NO.140
  • 범희대(范熙大)
    지은(芝隱) 범희대(范熙大)
    2020-08-10 | NO.139
  • 병조 참판 이공(李公) 신도비명- 이경함
    병조 참판 이공(李公) 신도비명- 이경함(1553~1627)광주목사 1604.1.28. 제수약천집 제1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집(藥泉集)》공은 휘(諱)가 경함(慶涵)이고 자가 양원(養源)이고 호는 만사(晩沙)이고 관향은 한산(韓山)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비로소 가문이 커져서 명망과 덕업(德業)이 이어져 왔다. 선조(宣祖) 때에 명신이 있었으니, 예조 판서로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된 의간공(懿簡公) 휘 증(增)이 바로 공의 선고이다. 배위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사직(司直) 몽원(夢黿)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 8)에 공을 낳았다.공은 기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을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들어가고, 전적(典籍), 정언(正言), 지평(持平), 직강(直講), 사예(司藝), 북평사(北評事), 필선(弼善), 겸 교서관 교리(兼校書館校理), 장령, 군기시 정(軍器寺正), 통례(通禮),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는데, 남양에서는 송덕비가 있었으며, 사간, 집의, 승지, 광주 목사(廣州牧使), 호조 참의, 성주 목사(星州牧使),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두 번이나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성절사(聖節使)로 명 나라에 조회하였으며 경주 부윤(慶州府尹), 황해 감사, 호조 참판, 경기 감사, 한성부 좌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전위사(餞慰使)로 명 나라 사신을 국경에서 전송하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는 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병조 참판을 지내었다.광해군 정사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공은 간흉의 뜻을 거슬러 탄핵을 받고 삭거사판(削去仕版)당하였다. 계해년 인조(仁祖)가 반정한 후 인조가 일찍이 옛날 배운 은혜가 있다 하여 불러서 한성부 우윤을 제수하고 도총부 총관과 의금부를 겸하게 하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역변(逆變)에 공주(公州)에 대가를 호종하였으며, 호조 참판으로 옮기고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을축년 나이가 70이 넘었다 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자, 상은 마지못해 허락하고 해임하여 중추부(中樞府)의 직임에 임명하였다.정묘년(1627, 인조 5) 오랑캐가 침입하였는데 공은 병환 때문에 대가를 호종하지 못하게 되자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공은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분한 마음으로 병환이 심해져서 이해 10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상은 놀라고 서글퍼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규례와 같이 치제(致祭)하였다. 광주(廣州) 번천리(樊川里)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공의 초취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직장(直長) 의충(義忠)의 따님이고, 재취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진사 덕수(德秀)의 따님이고, 삼취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찰방 오(悟)의 따님인데, 세 부인의 묘소는 모두 같은 고을의 낙생리(樂生里)에 있는 아천군 묘소 왼쪽 기슭에 있다.세 부인이 모두 자식을 생육하지 못하여 아우인 군수 경황(慶滉)의 아들 판교(判校) 전(䆄)을 양자로 삼았다. 측실에서 난 딸 하나는 군수 신희계(辛喜季)에게 시집갔다. 전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서우(瑞雨)이고, 딸은 사인(士人) 신창(申㫤)에게 출가하였다. 서우는 2남을 두었으니 형(泂)은 현재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맡고 있으며 염(濂)은 일찍 요절하였다.공은 외모가 빼어나고 훤칠했으며 의표와 법도가 정돈되고 엄숙해서 앉을 때에는 무릎을 꿇고 앉고 설 때에는 바르게 서서 진흙으로 만든 소상(塑像)과 같았다. 때에 알맞은 뒤에야 말씀하여 함부로 희롱하거나 친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의 환대를 받는 것을 백붕(百朋)의 선물을 받는 것보다도 소중히 여겼다.경자년 의간공(懿簡公)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하고 훼손함을 예보다 더하였으나 오히려 대부인(大夫人)이 집에 계시다 하여 슬픔을 억제한 적이 많았다. 임자년 대부인의 상을 당하자, 스스로 “내 나이가 이미 하수(下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한스러울 것이 없다.” 하여, 밤낮으로 슬피 곡하고 하루에 몇 홉의 미음만을 먹었다. 집안사람들이 공이 생명을 잃을까 우려하여 음식을 더 들기를 권하자, 공은 크게 한하며 말씀하기를 “내 날마다 죽 한 그릇을 먹었더니,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몸을 온전히 하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다시 나를 보통 사람으로 자처하게 하려는가.” 하고는 마침내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몸소 제사를 올리다가 넘어져 이가 부러지는 지경에 이르니, 친척들이 차마 그 뜻을 상하지 못하여 감히 다시는 맛있는 음식을 들라고 말하지 못하였다.상을 벗은 뒤에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내직과 외직을 맡았을 적에 모두 직책을 잘 수행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만 노쇠한 나이에 상을 당하여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해서 몸이 손상되어 번거롭고 힘든 임무를 맡을 수가 없으니, 그의 사직을 허락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공이 평소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 말씀하신 언론과 행하신 사적은, 여러 번 병난(兵難)을 겪어서 가승(家乘)이 대부분 없어져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배와 늙은 신료들의 귀와 눈에 전해지는 것이 또한 한두 가지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공이 처음 사헌부에 제수되었을 적에 상공(相公) 정철(鄭澈)을 추탈(追奪)해야 한다는 의논이 나와 형세가 장차 점점 퍼져 나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사림(士林)들 사이에 이견을 내세우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중한 견책을 당하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 몸이 언로에 있으니, 사사로이 내 한 몸을 생각하여 국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들어가 의간공에게 여쭈니, 의간공은 막 식사를 하시다가 수저를 놓고 군주를 섬기는 대의(大義)로 권면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개의치 않고 터무니없는 무고임을 통렬히 변론하니, 상의 뜻이 크게 깨달아 화기(禍機)가 공의 변론에 힘입어 다소 잦아들게 되었다. 이백사(李白沙)와 김선원(金仙源) 형제는 공의 부자간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정사년 폐모론을 수의(收議)할 때에 백사 등 여러 공이 큰 절의를 세우다가 멀리 유배가게 되었다. 이때 공은 의금부에 있으면서 유배 보낼 곳을 의논하였는데, 마침내 공석(公席)에서 탄식하기를 “이공(李公)과 같은 분들을 어찌 세상의 의론에 영합하여 사지(死地)에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배지를 정하여 들이자 승지 백대형(白大珩)과 한찬남(韓纘男)은 노하여 공을 꾸짖고 아뢰는 단자(單子)를 땅에 던졌으며 사헌부의 탄핵이 뒤이어 나왔다. 아, 이 두 가지 일을 본다면 그 나머지를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공이 조정에 오르던 초기에 곧바로 임진왜란을 만나 아우인 좌랑(佐郞) 경류(慶流)가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공은 의간공을 따라 아우의 시신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할 적에 고삐를 잡고 따라갔다. 그리고 지위와 명망이 다소 높아지자 또 윤리강상이 무너지는 변고를 만나서 여러 소인들에게 곤액을 당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인조(仁祖)의 중흥(中興)을 만나서 여러 인재들이 모두 분발하였고, 공은 또 감반(甘盤)의 옛 은혜가 있어서 세상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치사할 때에 이르러서 끝내 명성이 그 실제에 미치지 못하고 지위가 그 덕에 차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인들이 깊이 개탄하는 바이다.명 나라 사신 주난우(朱蘭嵎 주지번(朱之蕃) )가 왔을 적에 스스로 주량이 크다고 자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천거하여 상대하게 하였는데, 주난우가 먼저 의자 아래로 쓰러졌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자, 상은 말씀하기를 “더 마실 수 있겠는가?” 하고는 또다시 큰 그릇으로 술 석 잔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이것을 마시고 나서 하직하고 물러갈 적에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똑같았다. 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사람의 주량은 술을 마신 뒤에 경연(經筵)의 자리에 들어가 강(講)을 마치고 나와서 공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아야 하니, 술 마시고 취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위의(威儀)를 손상하는 자는 아무리 많이 마신들 어찌 이것을 주량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주-D001] 백붕(百朋) : 많은 돈 또는 큰 보물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다.〔旣見君子 錫我百朋〕” 하였는바, 옛날에는 자개〔貝〕를 화폐로 썼는데, 5패를 붕(朋)이라 하였다.[주-D002] 이백사(李白沙)와 김선원(金仙源) 형제 : 백사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며, 선원은 김상용(金尙容)의 호로 아우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덕망과 지위가 모두 높았다.[주-D003] 감반(甘盤)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수학한 스승이다. 이경함(李慶涵)이 인조의 잠저(潛邸) 시절 스승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023-08-09 | NO.138
  • 사암 박순(1523~1589)
    박순은 1523(중종17년)년 서울에서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아버지 박우와 어머니 당악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성균관 대사성 박우의 아들이며 눌재 박상의 조카이다. 8세 때 다니던 서당 훈장이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동국삼박의 하나였던 아버지 육봉 역시 차남이 지은 글을 보고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1540(중종35년)년 18세가 되던 해에 소과에 응시했다.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아울러 같은 화담 동무인 홍인우, 허엽, 남언경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글을 읽으며 학문의 폭을 차츰 늘려갔다. 1547년 2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형 연파처사 박개와 더불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시묘를 너무 극진히 하다 건강을 해쳐 소상을 지낸 뒤에도 죽을 먹어야 했다. 1549년에는 그의 시조묘 있는 대전에 '사암'이란 서실을 짓고 글을 읽었는데 스승 서경덕의 방법론그대로 독자적인 학문연구를 시작하여 근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이라 높여 불렀다. 어려서는 호가 청하자였으나 이때부터 사암을 주로 썼다. 박순은 독자연구의 단점인 학문의 좁은 폭을 넓히기 위해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등을 찾아 다니며 배웠다.1553(명종8년)년 31세의 나이로 대과에 응시했다. 해당 시험은 명종이 특히 갑과를 직접 주관했는데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의 몇 가지 직접 질문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장원으로 급제했다. 갑ㆍ을ㆍ병 세 등급의 과거에서 갑과 1등이었던 그는 이조좌랑, 홍문관수찬, 교리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에서 글을 읽었다. 1556년(명종11년) 의정부 검상(정5품), 사인(정4품)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 응교(정4품)로 승진하여부마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는 등, 권력의 높이에 굴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1562(명종17년)년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 군수(정4품 외직)에 임명했다. 그는 사림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로 가서 그날그날 계획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1563(명종18년)년에 성균관 사성(정3품)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보덕(종3품), 사헌부 집의(종3품), 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관)을역임하면서 차자(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시사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였다. 승지로서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그는그 후 이조참의(정3품 당상관)에서 사간원 대사간(정3품)으로 옮겼다. 그 뒤 대사간에서 한 번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요승 보우의 죄를 논하여 치죄할 것을 요청하고 또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사휘 1591(선조24년)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박순은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15년간 정승 생활을 하면서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기부해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추천해 훌륭한 역할을 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두고 당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청백리 박순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본인의 능력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겸손한 태도로 어려운 결단을 내린 박순의 청렴에 대한 일화이다.선조때, 박순이 대제학으로 재직할 당시 퇴계 이황이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박순은 임금에게 청하기를 "대제학과 제학이 비록 같은 비슷한 일을 하나 제학의 임무가 대제학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나이 많고 학식 높은 선비는 아래의 임무에 있고 도리어 후진 초학이 중한 지위에 있으니, 저와 이황의 관직을 바꿔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대신을 불러 모아 의논했고, 박순과 이황의 관직을 서로 바꾸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황이 늙고 병들어서 그 직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퇴했으나 이 일화는 박순의 어진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높은 자리에서 다른 이의 능력이 본인보다 낫다고 인정하며 직을 바꿔달라고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나 남보다 자신에게 관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박순은 그렇지 않았다. 박순의 청렴하고 대쪽 같은 성품으로 간사한 벼슬아치를 물리치고 어진 신하를 높은 지위에 오르는 등 밝은 정치를 위해서도 앞장섰다.박순이 대사간일 때 윤원형과 이량 등의 만행에 분개해 마음이 북받쳤다. 박순은 곧바로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말했다. “내가 윤원형의 죄를 논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찬성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탁은 몸을 움츠리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대가 내 일족을 멸문시킬 작정인가.”하지만 박순은 끈질기게 이탁을 설득했고, 결국 둘은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쫓아냈다. 이에 사림의 공론이 펼쳐지게 되어 조정이 맑고 깨끗해졌다. 이후 박순은 용기 있고 올바른 사람의 표본이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안위를 염려해 바른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겼기에 그만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전한다.송균절조 수월정신 (松筠節操 水月精神)박순은 소나무나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다.-박순에 대한 선조의 찬사
    2020-03-02 | NO.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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