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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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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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 ⾦搢 인조 3년(1625) 8월 4일∼인조 3년(1625) 10월 3일
    김진 ⾦搢 인조 3년(1625) 8월 4일∼인조 3년(1625) 10월 3일김진(1585∼?)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기중(記中), 호는 추담(秋潭), 아버지는 선산부사를 역임한 김윤국(⾦潤國)이다. 1610년 사마양시와 문과에 모두 급제하여, 1612 년 설서·검열, 1613년 봉교·사서, 1614년 정언을 거쳐, 1617년 공홍도도사, 1624년 평안도사가 되었다. 1625년 8월에 나주목사로 제수받았으나 10월 3일에 부임을 포기하였 다. 1627년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을 당하여, 능한산성(凌漢⼭城)에서 항전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1630년에 송환되어, 예안현감이 되었으나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위원(渭原)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다. 저서에 백과사전식 어휘집인 『신보휘어(新補彙語)』가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625 년) 8월 4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3일에 부임을 포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516
  • 김진옥 ⾦鎭⽟ 숙종 41년(1715) 11월 10일∼숙종 44년(1718) 2월 11일
    김진옥 ⾦鎭⽟ 숙종 41년(1715) 11월 10일∼숙종 44년(1718) 2월 11일김진옥(1659∼1736)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백온(伯溫), 호는 유하(柳下) 또는 온재(韞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김장생(⾦⾧⽣)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익희(⾦益 熙)이며, 아버지는 승정원 좌부승지 김만균(⾦萬均)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700년 음직으로 사산감역에 임명되었으며, 1702년 부사과·와서별제(⽡署別提)·장악주 부·감찰, 1703년 한성판관·광산현감, 1704년 용담현령, 1709년 파주목사, 1710년 청주목사, 1715년 8월 11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1월 10일 부임하였다. 1718년 수원 부사, 1721년 안동부사, 1725년 공조참의·승지·형조참의·여주목사·호조참의, 1727년 강원도관찰사, 1728년 여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온재유고(韞齋遺稿)』가 전하는 데, 그 속에 실린 「나주보역청기(羅州補役廳記)」는 나주지방에 사신과 관리가 자주 내왕하여 이들을 접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역청을 설치하고 그 경위를 밝힌 글이며, 「나주양사재중수기(羅州養⼠齋重修記)」는 나주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세운 양사재를 수리하게 된 내력을 밝힌 글이다. 나주목사 때 구봉 송익 필의 문집 『구봉집』 간행을 계획하여 이희조(李喜朝)와 권상하(權尙夏)에게 편차와 교정을 맡겼는데 일부 내용의 편집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가 엇갈렸고, 김진옥이 곧 체직 되어 간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김천일의 묘비음기를 지었다. 『금성읍지』에는 “을미 (1715년) 11월 10일 도임하였고 무술 (1718년) 2월 11일에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 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515
  • 김진현(金珍鉉)
    김진현(1878~1966)의 본관은 광산이며 서방면 반용리, 현재의 북구 풍향동에서 살았다. 자는 경유(景儒)이며 호는 운파(雲坡)이다. 김진현은 광산(光山) 김씨이며 자는 경유(景儒), 호는 운파(雲坡)며 광주(光州) 서방(瑞坊)에서 출생하여 송사(松沙)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그의 거처에서 율계栗溪 정기鄭琦(1879~1950)의 寄贈鄭栗溪, 경당 최윤환의 呈崔敬堂(二首), 이용희李熙容의 花卉賦謹呈李雙石丈, 윤종림 尹宗林의 擊壺放歌賦奉呈尹竹下, 고언주 高彦柱의 夢遊楓岳賦寄高春坡, 범형식의 宿范善仲書齋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다지마(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기도 했던 강직한 지식인이요 처사였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고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오늘날 장성 고산서원인 1924년 담대헌澹對軒의 중건 때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24 | NO.514
  • 김찬순(金燦淳)
    김찬순(1809~?)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명수(明修)이고 호는 유헌(幽軒)이다.부 : 金尙白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2-24 | NO.513
  • 김천수 ⾦天洙 광무 4년(1900) 10월∼광무 7년(1903) 8월
    김천수 ⾦天洙 광무 4년(1900) 10월∼광무 7년(1903) 8월김천수(1860∼1908)의 본관은 광산(光⼭), 자는 성언(聖⾔), 아버지는 김영목(⾦永穆)이 다. 187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77년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시작으로 1880년 설서, 1881년 기사관, 1882년 별겸춘추, 1890년 돈녕부 도정, 1891년 대사 성, 1893년 이조참의, 1895년 시종원 좌시종, 1897년 광주(光州)군수, 1899년 경주 군수, 1900년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1900년 10월 17일 나주군수로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902년 2월 17일 임기가 연장되어 1903년 8월까지 재직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907년 비서감 승을 역임하고 규장각기주관을 지냈으며 1910년 8월 훈3등을 받고 정2품으로 승급되었다. 나주객사 안에 1904년에 세운 「행군수김공천수 거사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512
  • 김춘경 ⾦春卿 성종 10년(1479) 3월 4일∼성종 14년(1483)
    김춘경 ⾦春卿 성종 10년(1479) 3월 4일∼성종 14년(1483)김춘경(1441∼151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중(明仲)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 하고 승문원판교를 지낸 김인민(⾦仁民)이다. 1462년 문과에 급제하여 1464년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성균관 직강, 예조정랑, 경상도 경차관, 의금부 경력, 사헌부 집의를 거쳐 1479년 2월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483년까지 역임하였다. 『성종실록』 3월 22일 기록을 보면, “김춘경은 지금 나주목사가 되었는데 또한 명성과 공적이 있다고 합니다.” 라고 왕에게 진언하는 내용이 있다. 이후 1484년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집의를 거쳐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했다. 『금성일기』 「기해년 1479년」 기록에 “신임 목사 통훈대부 김춘경이 3월 4일 도임하였다.”라고만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기해(1479 년) 3월 4일에 도임하였으나 이임하여 돌아가는 일자는 기록이 없다.”고 기록되었다.다만 『금성일기』,『금성읍지』에서는 1481년(신축)부터 1507년(정묘)까지 26년간은 나주 목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리들의 출입 기록도알 수 없다. 1480년(성종 11) 나주향교 생도 9명과 김춘경 목사의 아들까지 10명이 사마시에 급제하는 경사를 맞게 된다. 이때 나주향교의 교수였던 박성건(朴成乾, 1414∼ 1487)이 이를 기뻐하며 「금성별곡(錦城別曲)」을 짓는데 6장의 경기체가이다. 제3장에 “목사인 김춘경과 통판인 오한은 한때 뛰어난 인재로, 임금님의 근심을 나누어 주매, 천리 땅 한 고을을 능히 부지런하게 능히 검소하게 잘 다스리느니, 잘 하는 정치는 백성 들에게 재산을 얻게 하고, 잘 하는 가르침은 민심을 얻게 하고, 인자하다는 평판과 인자하다는 소문은, 그때마다 세 가지 기이한 일에 이르게 되도다.”라 노래하고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11
  • 김취문 ⾦就⽂ 명종 19(1564) 5월 3일∼명종 20년(1565) 9월 12일
    김취문 ⾦就⽂ 명종 19(1564) 5월 3일∼명종 20년(1565) 9월 12일김취문(1509∼1570)의 본관은 선산(善⼭), 자는 문지(⽂之), 호는 구암(久庵)이며 아버 지는 이조참판 김광좌(⾦匡佐)이다. 여섯 형제 중 다섯째로 맏형 김취성(⾦就成)이 마을 뒷산에 지은 서산재(西⼭齋)에서 교육받았다. 1537년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와 형조좌랑과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비안현감을 지냈다. 1544년 강원도도사, 1552년 영천군수, 1558년 사간원 사간, 1564년 3월 성주목사를 거쳐 5월 3일에 나주목사로 부임, 1565년 9월 12일 이임하여 성균관 사성으로 영전하였다. 1566년 의정부 검상, 사헌부 집의, 의정부 사인, 홍문관 교리, 사간원 사간, 1567년 의정부 사인, 1569년 대사간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마쳤다. 문집으로 『구암집』이 있다. 시호는 처음에 정간(貞簡)이라고 했다가 뒤에 문간 (⽂簡)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여섯 형제가 함께 서산사(西⼭祠)에 배향되어있다. 『금 성읍지』에는 “갑자(1564년) 5월 3일 도임하였고, 을축(1565년) 9월에 성균관에 제수 되었고 벼슬은 대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510
  • 김치원
    김치원(金致謜 1562~?)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守眞堂)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湖節3上-021-3, 光州, 壬辰, 權慄參佐 -《호남절의록》(1799)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손자 김치원(金致謜 1562~?)은 ‘수진당(守眞堂)’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수진당이 풍영정 동쪽 산 기슭에 있다(堂在風詠亭東麓)고 적고 2수의 시를 남겼다.(題守眞堂/潭州錄)竹裏茅齋僻 苔庭絶點塵 煙沙一面水 花木四時春 耕釣堪終老 琴棋且樂眞 蕭然北窓下 方見葛天人夜宿仙滄里 林深草閣幽 芭蕉五更雨 蟋蜶一年秋 簪紱非吾好 丘園入客愁 遙知廣津畔 黍稷滿西疇/東岳集시애서 구원(丘園)은 언덕과 전원으로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 데  수진당(守眞堂)을 두고 그는 말하고 있다.다른 비슷한 기록도 있다. 김치원(金致源)은 광주 출신으로 선무랑 군자감주부인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의 아들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음사(蔭仕)하였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왜병을 격퇴하고자 투필종융(投筆從戎)하고 권율(權慄)의 막료로서 전투를 독전(督戰)하다가 커다란 상처를 입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공을 세웠다.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공급하였으며 세운 공으로 인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에 오르고 공훈이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또 임진왜란 때 도원수 휘하에서 활약했던 이세환(李世環)과 재종제 서암 이완근(李浣根)은 정충신(鄭忠信), 이충립(李忠立), 고성후(高成厚), 박대수(朴大壽), 김치원(金致源) 등은 광주팔장사(光主八壯士)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2020-04-02 | NO.509
  • 김태순(金泰淳)
    김태순(1832~1897)의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신여(信汝)이고 호는 백봉(白峯)이다.부 : 金尙烈조 : 金海中증조 : 金賁載외조 : 梁錫源처부1 : 權淳宗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1882년과 1885에 光州牧에서 金泰淳에게 준호구를 발급해 주었다.
    2020-02-24 | NO.508
  • 김홍담
    김홍담(金弘淡)의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자원子元, 幸州城戰(1593), 露粱海戰(1598)/ 宣武原從勳湖節2下-204-3, 光州, 壬辰, 一道擧義 -《호남절의록》(1799)*조선시대 1866년(咸豊 5년) 충훈부忠勳府에서 仁祖(1595~1649) 때 宣武功臣 金弘淡의 子孫 金東成 등 5인에게 각종 軍役을 부과하지 말 것을 명기한 계하절목啓下節目이 있다.
    2020-04-02 | NO.507
  • 김홍두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아호는 악포樂浦이며 서창면 용두리 155,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 서당에서 글을 배운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였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유장열柳璋烈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하였다.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김정호金鼎浩, 권태진權泰鎭, 임병한林炳翰, 윤형중尹瀅重, 윤치성尹致晟, 이현李鉉. 박성태朴性泰, 기명섭奇明燮 등과 규합하여 다시 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단원들은 수백명으로 증가하였고 군자금 보급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김홍두는 1918년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 남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하여 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창 학동 본가에 근거를 두고, 군자금 조달과 국내 각지의 청년회 조직정비를 위하여 활동을 하던 중 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 함구하니, 1920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상진朴尙鎭, 안재홍安在鴻, 현익길玄益拮, 이기선李起選, 기산도奇山度 등과 같은 감방에서 형기를 마쳤다.출감 후 1926년에 다시 전남과 전북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 하다가 장성경찰서에 피체되어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서승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 1933년 6월 9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전 애국지사 제1묘역에 잠들어있으며, 서구 용두동 163-4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18-05-28 | NO.506
  • 김홍원 ⾦弘遠 광해군 7년(1615) 9월∼광해군 7년(1615) 12월
    김홍원 ⾦弘遠 광해군 7년(1615) 9월∼광해군 7년(1615) 12월김홍원(1571∼1645)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이중(⽽重), 호는 해옹(海翁)이다. 아버지는 부장(部將) 김경순(⾦景順), 아들은 순천부사를 지낸 김명열(⾦命說)이다. 1588년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들어 온 뒤 1599년 금산군수, 1607년 원주 목사를 거쳐 1615년 윤8월 9일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재임하다가 12월에 파직당하였 다. 파직 사유는 『인조실록』에 기록되길, “김홍원은 호남의 천얼(賤孽)로서 왜란 때 발신(發⾝)하여 외람되게도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혼조 때에 궁중과 결탁하고 권세있는 간신을 아비처럼 섬겼다. 그 뒤 나주에 제수되었는데, 이민(吏民)이 그가 관원이 된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할 수 없이 버리고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모아둔 곡식을 선조의 행재소(幸在所)인 의주로 보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전역에 격문(檄⽂)을 보내어 의병을 모은 후 추포(秋浦) 황신(⿈愼) 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본군을 전라도 순창까지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황신이 이를 보고하여 선조가 김홍원에게 통정(通政)의 품계를 내렸다. 그 뒤로 1624년 회양부사, 1627년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문집으로 『해옹집(海翁 集)』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615년) 9월에 도임하였고, 체직된 날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615년 12월에 파직되어 이임한 것을알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505
  • 김효성 ⾦孝誠 인조 27년(1649) 1월 15일∼인조 27년(1649) 6월 22일
    김효성 ⾦孝誠 인조 27년(1649) 1월 15일∼인조 27년(1649) 6월 22일현감 김효성(1585∼1651)의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행원(⾏源)이다. 아버지는 양양부사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김수연(⾦秀淵)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1615년 인목대비 관련 상소로 진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청안현감이 된다. 1625년 전라도 검률, 1626년 호조좌랑, 1627년 형조좌랑, 1628년 호조정랑, 1632년 면천군수, 1634년 한성부 서윤, 1635년 형조정랑·군기시 첨정·중추부 경력, 1637년 여산군수, 1639년 남원부사, 1641년 죽산부사, 1644년 공주목사, 1646년 통정대부·부사과, 1647년 조사위장을 역임하다가, 1648년(인조 26) 12월 6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1649년 1월 15일에 부임하였으나 6개월 만인 6월 22일에 청주목사로 교체되었다.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기축(1649년) 1월 15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6월 22일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에 그의 묘갈명이, 이단하(李端夏)의 『외재집(畏齋集)』에 그의 묘지명이, 조익(趙翼)의 『포저집(浦渚集)』과 조복양(趙復陽)의 『송곡집(松⾕集)』, 최기남(崔奇男)의 『구곡시고(⿔⾕詩稿)』에 그를 기리는 제문과 만사가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504
  • 김희선 ⾦希善 우왕 7년(1381) 4월 8일∼우왕 8년(1382) 2월 8일
    김희선 ⾦希善 우왕 7년(1381) 4월 8일∼우왕 8년(1382) 2월 8일김희선(?∼1408)은 개국원종공신으로 본관은 광산(光⼭)이며, 아버지는 개국원종공신 김천리(⾦天理)이다. 전라도호조전서, 전라도안렴사, 노비변정도감 판사, 동지중추부사, 형조판서, 경상도도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1393년(태조 2)에 전라도 안렴사 때각도에 의학원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集成⽅)』, 『우마의방(⽜⾺ 醫⽅)』을 저술하였다. 1408년 2월 19일 별세하자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시호를 원정(元靖)이라 내려 주었다. 『금성일기』 「신유년 1381년」 “목사 봉익대부 김희선이 4 월 8일 도임하였다가 임술(1382년) 2월 8일에 정무를 마치고 갔다.”는 기록과『금성읍 지』에는 “신유(1381년) 4월 8일 도임, 임술(1382년) 2월 8일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503
  • 김희수(金喜洙)
    김희수(1891~?)의 본관은 광산이다. 자는 창술(昌述)이고 호는 하은(荷隱)이다. 당시 서방면 하백동에 거주했는데 오늘날 북구 매곡동306 일대이다.부 : 金永德연파정과 하은정을 경영하였다. 현재도 있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澹對軒重建扶成錄』
    2020-02-24 | NO.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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