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10월 2일(기미)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상소하였다. (원경하는 여주 출신으로 영조의 조력자이자 정조의 스승이다) 대략 이르기를,“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공신 정충신의 비범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조선 후기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공신인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 1981년에 광산군지편
광주광역시에서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일정한 서사 구조를 지닌 이야기. 1. 설화의 정의 설화는 입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입으로 전해 오는 모든 이야기가 설화는 아니다. 일상의 신변잡기,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적 사실을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설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설화는
동명집 제8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61수금포가〔錦袍歌〕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금남군 정 절도사를 / 錦南鄭節度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함릉군 이 사군을 / 咸陵李使君이 두 영웅 발해 바다 동쪽에서 태어나서 / 兩雄挺生渤海左삼한 사직 곤륜산과 같이 안정되게 했네 / 三韓社稷安崑崙장안에선 선비들 다 이 두
금남군 정충신의 졸기 - 인조 14년 병자(1636) 5월 4일(정미)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 졸하였다.충신은 광주(光州)의 아전이었다. 젊어서부터 민첩하고 총기가 있었다. 임진 왜란으로 선조가 용만(龍灣)으로 피난하였을 적에 본도 병사가 사람을 뽑아 행재소(行在所)에 일
이항복과 적중의 사정ㆍ정사가 탈출한 곡절ㆍ지방의 동향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 선조 29년 병신(1596) 4월 23일(기미) 부천사의 접반사인 우참찬(右參贊) 이항복(李恒福)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판서가 국사로 인해서 갖은 고초를 다 겪는구나. 무슨 일로 올라왔는
원모정기〔遠慕亭記〕 〕 - 운양속집 제3권 / 기(記)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서석산(瑞石山)은 아득히 드넓게 휘감아 솟아 올라 우뚝하니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예로부터 이름난 이들과 통달한 선비들이 이 고을에서 많이 배출되었는데, 가까운 옛날로 거슬러 살펴보면 재략이 뛰어난 금남(錦南)과 충
정충신(鄭忠信)의 화상과 사당의 유지비를 도와주고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전답을 하사하는 건- 영조(英祖) 13년(1737) : 서원등록(書院謄錄)이번 3월 21일에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봉조하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상심한 바가 있어서 감히 이렇게
광주의 제유들에게 답하다〔答光州諸儒〕- 미호집 제8권 / 서(書) : 김원행金元行(1702~1772) 말씀하신 경렬사(景烈祠)에 금남(錦南)을 배향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선향(仙鄕)이 평소 문헌(文獻)이 있는 고을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서로 더불어 자세하게 강구한 다음 신중하게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멀리 칩복하고 있는
고대일록 부록 인명록 (광주일기 정리) :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고경명(高敬命) :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ㆍ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두 아들
고대일록 - (광주일기 정리) :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1593년 6월 22일 을사(乙巳)왜적의 한 무리가 진주(晉州)로 쳐들어와서는 성의 동북(東北)을 포위했다.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등이 힘을 다해 방어하니, 적들은 향교동(鄕校洞)에 모여 진을 쳤다. 왜적의 다른 한 무리가 삼가(三嘉)로 쳐들어가서
백사(白沙)의 북천록(北遷錄) 서문 - 약천집 제27권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옛날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중흥(中興)하실 때에 큰 공을 세운 대신(大臣)이 있었으니, 백사 선생 이공 항복(李公恒福)으로 자가 자상(子常)이다. 광해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 )를 폐위
정충신(鄭忠信) - 성호사설 제17권 / 인사문(人事門) : 성호 이익(李瀷, 1680~1763) 금남군(錦南君) 정충신은 곧 광주(光州) 통인(通印)이었는데, 통인이란 것은 인장을 맡은[知印] 천리(賤吏)의 속칭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알아준 바로 발신(發身)하여 벼슬을 하다가 갑자년(1624, 인조 2)의 변란에 큰
금포가〔錦袍歌〕 - 동명집 제8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금남군 정 절도사를 / 錦南鄭節度그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함릉군 이 사군을 / 咸陵李使君이 두 영웅 발해 바다 동쪽에서 태어나서 / 兩雄挺生渤海左삼한 사직 곤륜산과 같이 안정되게 했네 / 三韓社稷安崑崙장안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