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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동향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 선조 29년

이항복과 적중의 사정ㆍ정사가 탈출한 곡절ㆍ지방의 동향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 선조 29년 병신(1596) 4월 23일(기미)       


부천사의 접반사인 우참찬(右參贊) 이항복(李恒福)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서가 국사로 인해서 갖은 고초를 다 겪는구나. 무슨 일로 올라왔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변방의 사정을 조정이 혹시 다 알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부사(副使)가 신으로 하여금 직접 가서 면대해 아뢰게 하였습니다. 대개 상천사(上天使)는 갑자기 왜영을 탈출한 후 죄책이 있을까 염려하여 장황한 말을 하며 일신의 모면을 기도할 것이니, 우리 나라가 어찌 그 곡절을 알겠습니까. 또 중국 조정이 그의 면죄되고자 하여 하는 맹랑한 말에 빠지게 되면 거의 이루어져 가는 일이 실패되고 좋은 기회가 깨어질 것입니다. 신이 올라온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사는 무엇 때문에 도주하였는가. 적정(賊情)은 어떻다 하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정충신이 평조신(平調臣)에게 적의 정세를 물으니, 조신의 말이 ‘나 역시 알지 못한다.’고 하므로, 은자(銀子)를 가지고 조신과 가까운 하인을 달래기를 ‘밀고하면 은자를 주겠다.’ 하니, 그가 고하기를, ‘관백(關白)이 크게 기뻐하면서 관사(館舍)를 수리하고 천사를 맞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상사의 말이 「이는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모자(謀者)의 【이른바 밀고자다.】 말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면서 나아가 고하기를 「봉사(封事)가 이루어져 천사가 바다를 건너면 필시 곤욕을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천사가 도주하였다.’고 하였답니다. 이처럼 빨리 도주한 것은 오로지 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군사를 늘리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군사를 늘리는 것은 알 수 없지만, 대개 부산에는 적고 죽도(竹島)에는 많습니다. 또 심 유격(沈遊擊)을 【심유경(沈惟敬).】 결박했다는 말은 망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 유격이 떠나 간 후에 소식을 들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조신(調信)의 말에 ‘하늘이 순조롭게 돕지 않아 천사를 도망하게 하였다. 심 유격은 낭고야(浪古耶)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조신(調信)의 아들 경직(敬直)을 만났는데, 먼저 죽도(竹島)와 기장(機張)의 병력을 철수하여 온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날짜로 행장(行長)의 말을 따져보면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적이 만약 책봉을 받는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중국 사신을 맞아가지 않으며 또한 일개의 사행을 보내 위문하지도 않는가. 내 생각에는 애초 봉사가 허언이라고 여기었다. 저 수길(秀吉)은 곧 동황제(東皇帝)니 서황제(西皇帝)니 하고 칭하던 자라, 왕(王)으로 봉하는 것을 필시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한번 고명(誥命)한 후 적이 반드시 물러가리라는 말은 실로 망언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왕을 봉하는 것이 무엇이 좋을 바가 있겠는가. 과연 봉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난 겨울에 사신이 왜영에 들어갔는데, 왜 아직까지 맞아가지 않겠는가. 정사가 탈출한 것은 그르지만 정사의 의심은 역시 옳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제의 칙서를 김해(金海)의 풀밭 속에 버렸는데, 왜노가 그것을 습득하여 평조신(平調信)에게 주고 평조신은 이를 부천사에게 주었습니다. 용절(龍節)도 정사가 품고 가지 않았으니 필시 잃었을 것입니다. 장만록(張萬祿) 역시 도주하였으니 어떻게 가져왔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시 가지고 나오다가 그만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황칙(皇勅)은 황급하여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는 우리 나라가 놀랠까 염려하여 즉시 중국에 주달하고, 또 상사 이 노야가 허황한 말을 많이 하여 남의 이목을 현혹시킬까 하여 경을 시켜 여기에 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가 장황히 하는 말이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왜인이 모두들 말하기를 ‘상천사가 돌아오면 가능하지만 만약 지체하며 들어오지 않으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와 상의하지 않고 경솔히 탈출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인을 시켜 절(節)을 가지게 한 것이 또한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루 전에 왜추(倭酋)와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치해야 하겠는가. 원병을 청해야 하겠는가. 군량을 청해야 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조처에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왜적은 우리 나라 사람과 달라서 일체 숨기고 진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별로 변동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우자(牛子) 및 중물(重物)을 헐한 값으로 바꾸며, 또 당황하여 안정하지 못하니 이는 필시 돌아가려는 계책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민심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좌도(左道)는 【경상도.】 모두 경동하나, 전라도의 광주(光州)ㆍ나주(羅州)는 영문이 가깝기 때문에 경동하지 않으며, 전라 이남 및 호서는 모두 분주합니다. 호남은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만약 변고가 있으면 도체찰사로 하여금 군사를 훈련시키려 하여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 농사는 풍년이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쌀이 천한 것으로 보면 농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포목(布木)이 귀한 것입니다. 곡식을 쌓아 둔 자도 완전한 옷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 또 조신(調信)이 처음 갔을 때 관백(關白)을 바로 들어가 보려 하였는데 관백의 병이 비로소 나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바로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하니, 그럴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또 들으니, 대마도의 형세는 우리 나라가 아니면 자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서속(黍粟) 외에는 다른 곡식이 없는데, 일본은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나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물화를 무역하여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사로이 조선을 의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중에 분명히 헤아리지 못할 화가 있다면 솔직하게 원병을 청함이 좋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책봉을 받고 돌아가면 꼭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중국 사신이 탈출하게 된 까닭입니다. 지금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는 어떻게 조처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이라도 쉽게 결단하지 못할 것으로, 지연 작전만 쓸 뿐인 것입니다.”
하고, 오억령(吳億齡)은 【도승지(都承旨).】 아뢰기를,
“책봉만 받고 다른 일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정사가 탈출한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옳든 그르든 간에 상사가 탈출해 나온 것은 더없는 실책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상사의 일행을 모두 가두었는데, 음식 제공은 전보다 후합니다. 오직 유 상공(兪相公)만 출입하고 다른 사람은 비록 부사가 있는 곳이라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증병(增兵)하지 않고서는 쳐들어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요시라(要時羅)의 말이 ‘동산도(東山道)의 군사 12만 명이 있는데, 만약 출병(出兵)하게 되면 의당 그곳에서 나올 것이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淸正)은 무엇 때문에 머물러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병마 1천명을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 중국 사신을 뒤쫓아가 붙들어 오고자 한 것이 청정의 계책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 군문(孫軍門)이 3만 3천 명의 군사를 내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량을 마련하라고 하는데, 군량도 계속해 댈 수 없거니와 이 군사로서도 공격할 수 없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의령(宜寧)에 왜자(倭子) 50명이 왔는데 그들의 하는 일을 보니 비상한 군사였습니다. 담을 쌓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과 현격히 달랐습니다. 김응서(金應瑞)는 【우병사(右兵使).】 왜노를 부리기를 마치 떡으로 아이를 꾀듯이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노를 부리니 범인의 도량이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항왜(降倭)는 사냥을 나가면 사슴과 오리 등을 가득히 싣고 돌아와서 그것을 팔아 식생활을 하며, 진주(晉州)ㆍ산음(山陰) 등을 안토(安土)로 삼고 서로 무역을 합니다. 그리고 방자(榜子) 2~3명을 거느리고 응서(應瑞)의 진중에 있으면서 그를 애모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군사는 더불어 대적하기 어려우나 많이 꾀어 내면 쓸만한 것인데, 우리 나라가 졸국(拙國)인 까닭에 능치 못하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주사불(朱沙不)은 【왜인의 이름.】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성품 또한 일반적인 법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 후 별로 불순한 일이 없었으며, 항상 ‘왜노를 치고자 하면 나를 선봉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서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비록 털털한 것 같으나 여력이 남보다 크게 뛰어나며 용렬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기(單騎)로 행장(行長)을 만나 본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판서는 바로 가겠는가? 가면 어느 지방에 있겠는가?”
하니, 바로 경주(慶州)로 간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들은 바가 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영남은 부역이 가중하지 않기 때문에 생리(生理)가 좀 안정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령(竹嶺)으로 거쳐 왔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남원(南原)의 길을 경유하여 올라왔습니다. 또 모두 비슷비슷해서 장재(將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명련(韓明璉)과 김덕령(金德齡)이 장재가 있기는 하나 또한 군사가 없는 장수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맹을 쓸 곳이 없다. 남원성(南原城)을 보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한번 대충 보았습니다. 비록 수축하였다고는 하나 작은 돌로 쌓아 마치 제비의 둥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면이 절험(絶險)하여 요새지로 되어 있어서 적이 쉽게 지날 수 없으니 형세는 몹시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 안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성 안에 쌓아 둔 것이 겨우 수백 석이며, 장편전(長片箭)이 1백여 부(部)였습니다. 금성(錦城)은 좀 견고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 산성에 수장(守將)이 없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김경로(金景老)가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최염(崔濂)이 지킬 만하던가?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있던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급히 지나왔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과 호남의 그 어느 길을 따라 넘어왔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운봉(雲峯)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왔는데 방어의 형세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운봉은 산속에 있고 산성은 길 초입에 있어 형세가 몹시 좋았습니다. 팔량치는 대강 수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는 일 처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일이 순조롭지 못할 것 같다. 설사 3만 3천명의 군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잘 싸우지 못하면 도리어 궤멸된다. 또 겨우 목숨을 보전한 외로운 백성을 침해하면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공격을 청한 것에 대해 승지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적의 심정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필시 책봉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불화의 실마리가 이미 생겼으니 끝내 그 완결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미리 이뜻으로 중국에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사가 3일 밤에 연회를 베풀고 왜중에게 말하기를, ‘다만 책봉의 일뿐이라면 들어갈 수 있거니와 책봉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하였다는데, 경이 그 말을 들었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그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모사(某事)로 인해 급히 탈출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탈출하려 하였기 때문에 미리 계책을 올리게 한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정월부터 2월 그믐께까지 도주할 기미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상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뜻밖에 만약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서 은자(銀子)를 내어 수삼필의 말을 샀습니다. 그 말을 침문(寢門) 밖에 세워두고 먹이면서 항상 간로(間路)를 물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행장(行長)이 나왔다면 필시 전도되는 행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명(命)을 버리고 또 절(節)을 버렸으니 크게 불가한 일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너희 나라는 본디 한 집안이니 상관이 없지만 외국에 비웃음을 산 것이 이와 같다.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사의 말이 이와 같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절칙(節勅)은 비록 지고 와도 무방하다. 어찌 하인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 물건이 무겁지 않으니 비록 지고 와도 무방한데 버리고 왔으니, 이는 절(節)을 잃은 사람이다.”
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
“‘그 진절(眞節)은 따로 두었고 가짜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또한 진정시키는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묶어 놓고 구타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니, 항복은 아뢰기를,
“이것은 허언입니다.”
하고, 오억령은 아뢰기를,
“비록 묶어 놓고 구타하여도 유익될 것이 없으니, 필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사가 자결하려고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필시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의 접대를 전후 달리하고자 아니하는 것이 어찌 체봉(體奉)을 위해서이겠는가. 그가 온갖 고생을 하며 도망쳐 왔는데 우리가 그를 대접함에 전후를 달리하지 않는 것은 후한 뜻에서이다. 하물며 황제의 명령을 받든 사람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억령이 아뢰기를,
“일로의 지대(支待)가 그렇게 하기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이언공(李彦恭)의 아들이다. 조론(朝論)을 주장하여 그 형세가 몹시 탄탄하다. 중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말을 시행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왜인의 성문(城門)이 좋지 않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성문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만약 왜중으로 하여금 뒤쫓게 했다면 필시 면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 청정(淸正)의 진에 가까우니 위태로왔던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승종(兪承宗)의 말을 빼앗아 가지고 왔는데 승종은 스승입니다. 일찍이 원망하면서 ‘10년 동안 글로 사귀었는데 이제 와서 이처럼 배신하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와 함께 황명을 받들고 왔으니 같이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상사의 사람됨이 음흉스러우나 강포한 것은 볼 수 없고, 또 예모를 알지 못하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다.”
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
“비밀 일에 대해서 자주 전교하셨는데, 대개 장계(狀啓)를 계하(啓下)한 후 낭관(郞官)ㆍ당상(堂上) 중에 이를 아는 자가 많기 때문에 비밀이 유지되지 않고 도하(都下)가 모두 알게 됩니다. 지금부터 군사의 기밀 이외의 기타 일들은 비밀히 하지 마소서. 근일에 서목(書目)을 내지 않으므로 대간도 또한 알지 못하니 끝내 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량하여 하라.”
하였다.
【원전】 22 집 693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군사-관방(關防)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풍속-풍속(風俗) / 물가(物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역(役) / 인사-관리(管理) / 재정-창고(倉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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