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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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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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국이 광주 진사 이창우의 농서에 관하여 회계한 것에 대한 판부 - 홍재전서 제47권
    비국備局이 광주(光州) 진사 이창우(李昌)의 농서에 관하여 회계한 것에 대한 판부 - 홍재전서 제47권 :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 아뢴 대로 윤허를 한다. 매우 좋은 말이다. 한 말이 모두 보기 드물 정도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李) 유생의 유식함에 대해서는 이미 작년의 대책(對策)에서 알고 있었다. 종자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양식이 있어야 농사를 권장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은 조적(糶糴)에 달려 있어서 조적이 실(實)하지 못하면 농민이 그 해를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신칙해야 할 일단(一端)이다. 삼사(三司)의 곡물이 날로 점차 축나고 진분(盡分 창고의 곡식을 다 나누어 줌)의 조목이 뒤따라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니 백성들의 고통이 되는 것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군침을 흘리고 손을 대는 등 이런저런 폐단의 근원이 오로지 저들에게서 말미암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남이 들을까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저번에 호남 수령의 상소 중에 말한 고(故) 중신(重臣) 정일상(鄭一祥)이 이 도를 다스릴 때 검약한 일은, 조정에서 그 소를 보고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데, 오늘의 외임을 맡은 자들은 어째서 도리어 고 중신을 법받지 아니하는가.금송(禁松)에 관한 일로 말하면, 그의 말이 참으로 옳다. 시골에 있다가 조정에 돌아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시골에 송패(松牌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는 표시로 세운 패)가 있는 곳은 그 산이 헐벗지 않았다고 하니, 별도로 유사를 정하여 그 금령을 엄하게 하는 것이 우형(虞衡)의 옛 제도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좌상이 연석에서 상주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이었는데, 초기를 회하(回下)한 뒤로 과연 이렇다 할 실효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 또 더구나 고상(故相) 김 봉조하(金奉朝賀)가 전례를 이끌어 신명(申明)한 뒤 근래 들어 팽개쳐 두는 상태를 면치 못하였으니, 사람이 있어야 정사가 거행된다는 것이 그만 이러하단 말인가. 묘당이 각별히 유념하여 일체 약속을 따라 준수하여 잘못됨이 없도록 하라. 이단을 물리치고 문학을 권장하자는 일로 말하자면, 이는 조정이 이른바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설(邪說)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 곧 또한 이 뜻이다. 지금 그가 논열한 것은 공거(公車)에서 흔히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호남은 참으로 선비들의 기북(冀北)이라 하겠다.[주-C001] 판(判) : 문체의 일종으로, 단죄(斷罪)의 이유를 설명하는 글이다. 판하(判下) 또는 판부(判付)라고도 한다.[주-D001] 우형(虞衡)의 옛 제도 : 우형(虞衡)은 주대(周代)의 직명(職名)으로 산택(山澤)의 자원을 길러 내는 일을 관장하였다.[주-D002] 선비들의 기북(冀北) : 기북은 기주(冀州)의 북부(北部)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2020-09-30 | NO.300
  • 사월 초이튿날 서리가 내리다.- 백사집 제1권
    사월 초이튿날 서리가 내리다.- 백사집 제1권 :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인사와 천시를 그 누가 주장하는고 / 人事天時孰主張가는 도중 창랑수에 귀밑머리 긁어 다하네 / 征途搔盡鬢滄浪군왕께서 억조 창생의 일을 아시려거든 / 君王欲識蒼生事사월 하늘 광주 지방에 서리가 내렸다오 / 四月光州有殞霜
    2020-09-18 | NO.299
  • 사호강과 극락강
    硏經齋全集外集卷四十四 / 地理類 - 東水經 a277_254d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은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원집(原集) 61권 30책, 외집(外集) 70권 40책, 속집(續集) 17책, 행장(行狀) 1책 합 88책에 속하는 책을 말한다. 고려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가 생전에 정리하여 필사해 둔 手稿本으로 추정된다.沙湖江源出潭陽之秋月山。山壁削立。四圍如城。徒行者只得緣西北而上。其中有泉十三。而溪澗縈紆。東爲二石潭。潭下有巨巖。水由巖穴而瀉下。飛湍洒空。注爲大澤。是爲龍淵。諺傳岩穴龍所穿也。屈曲之迹猶在。南流爲原栗川。至府東。北折而西南流。爲竹綠川。又西南爲滄江。至昌平縣。爲㓒川爲碧津。由極樂之坪。爲極樂江。至王子臺。砥石江自東來會。         由王子臺以上大川二。長城白岩山之黃龍川。長城蘆嶺之可川入㓒川。小川五。潭陽滅峙之薪川。玉果之大橋川入竹綠川。光州無等山之三支川入㓒川。無等山之巾川。長城三聖山之九登川入碧川。砥石江源出綾州之呂岾。西北流爲車衣川。環綾州州治。西北流經南平縣。爲城灘砥江。西北至王子臺。入沙湖江。由王子臺以上大川二。光州無等山道川。入于綾州治前。南平德龍山之魚川。入于王子臺之下。二江旣合。環羅州▣治。爲廣灘。折而西至鸕鷀巖。爲錦津爲滎江。西爲洄浦。至古幕院。爲沙湖津。西南爲曲江梨山夢灘駐龍之浦。經奄山爲木浦。西入于海。木浦者高麗莊和后吳氏浣紗而五色雲所見處。至今有浣絲泉。大川來會者二。靈光高城山之鵲川入沙湖江。靈岩月出山之德津浦入駐龍浦。
    2021-03-31 | NO.298
  • 삼매당기(三梅堂記) - 계곡선생집 제8권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 제8권 / 기(記)광주(光州)는 호남 지방의 이름난 고을로써 서석산(瑞石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계산(溪山)과 임천(林泉)의 승경(勝景)이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한 편이다. 그런 가운데 대사(臺榭)와 원유(園囿)가 또한 많아 서로들 그 높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정(丁)모씨는 유자(儒者)의 조행(操行)을 대대로 지녀 온 집안의 후예로서 평소부터 향리(鄕里)의 추중(推重)을 받아 왔다. 바로 그가 자신이 은거하고 있는 곳에다 몇 칸짜리 초옥(草屋)을 마련하고서 방 안에 도서(圖書)를 빙 둘러 놓은 다음 대나무와 화약(花藥, 작약(芍藥)의 별칭임) 등을 섞어서 심어 앞뒤로 그 집을 감싸게 하였다.그런데 그의 화원(花園)에 오래 된 매화나무 세 그루가 처마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가지가 기이하게 뻗어 내려 창문을 가리며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마침내 이를 취하여 그의 집 이름을 삼매당(三梅堂)이라고 내걸었다.그러자 어떤 이가 이 말을 언뜻 듣고는 의아해 하며 말하기를,“모씨의 화원에는 온갖 꽃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붉은색 자주색에 짙은 빛 옅은 빛의 꽃들이 사계절 내내 끊이지 않고 핀다. 그 선명함이나 화려함의 정도를 따져 본다면 세 그루 매화보다 필시 몇 배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집의 편액(扁額)을 내걸면서 그런 꽃들은 그만두고 매화를 취하였다. 생각건대 모씨는 이 점과 관련하여 호오(好惡)의 감정면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하였는데, 모씨가 이 말을 듣고는 웃으며 말하기를,“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천박하단 말인가. 군자가 외물(外物)을 취함에 있어 눈요기만으로 만족하려 한다면야 어느 것인들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진대 어찌 아무것이나 구차하게 택해서야 되겠는가.내 화원에 있는 꽃들로 말하면 상당히 많다고 할 만하다. 따스한 봄철에서부터 낙엽지는 가을까지 꽃들이 연이어 피고, 요위(姚魏)와 같은 진품(珍品)으로부터 요염한 자태를 보이다가 말 없이 스러지는 이름없는 꽃들에 이르기까지 하고많은데, 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나의 완상용(玩賞用)으로 제공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남보다 뒤질세라 아리따운 색깔을 다투어 내면서 우로(雨露)의 자양분을 자기 위주로만 받아먹는 꽃들에 불과하다. 대체로 볼 때 색깔을 좋아하는 것은 덕을 애호하는 이가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할 것이다.그런데 가령 뭇 화초류와 선두를 다투지 않고 기후의 변동에 자기 지조를 바꾸지 않은 채 맑은 향기를 내뿜어 높은 품격(品格)을 보여 주면서 곧장 고인(高人) 운사(韻士)와 서로 어울릴 그런 꽃을 찾는다면, 우리 매형(梅兄)을 놔두고 어디에서 따로 구하겠는가.시험삼아 세한(歲寒) 무렵에 관찰해 보기로 하자. 된서리가 내리고 눈발이 흩날려 모든 꽃들이 시들어 버리는 그때, 비록 절조(節操)를 보여 주는 소나무나 대나무라 할지라도 내 동산으로 하여금 향기를 내뿜게는 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이 매화나무 세 그루가 그야말로 비로소 준수한 자태를 선보이며 화원에 우뚝 서서 그 정채(精彩)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남다른 향기와 차고도 고운 영상이 내 방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와 나의 금서(琴書)에 반사(反射)되어 비치면서 곧장 사람의 마음을 한 점의 티도 없이 맑고도 시원스럽게 해 주곤 한다. 그러고 보면 이 매화야말로 나에게 세 가지 유익함을 제공해 주는 친구가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하였다.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모씨가 기암자(畸庵子 정홍명(鄭弘溟)임)를 통해 나의 기문(記文)을 청해 왔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모씨와 하루도 같이 있어 본 적이 없고, 또 이 집으로 말하면 천 리 밖이나 떨어진 호남의 산중에 있어 꿈에도 가 보지 못한 곳이라서 이런 이유로 못하겠다고 사양을 하였다. 그럼에도 기암자가 계속 억지를 부리면서 당호(堂號)에 대한 모씨 자신의 해설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또 덧붙여 말하기를,“모씨는 풍아(風雅)가 이처럼 고상한 데다 또 나와는 절친한 관계이다. 이 정도면 그대의 글을 얻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라고 하겠다.”하였다. 이에 내가 그 대략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이와 관련하여 모씨를 권면하기를,“예로부터 매화에 관심을 쏟은 이들이 많다. 그러나 수조(水曹)가 읊은 것은 시흥(詩興)을 일으키는 자료를 제공한 데에 불과하고, 광평(廣平)의 매화부(梅花賦)는 한갓 물색(物色)을 나열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중에서 그야말로 높은 품격과 뛰어난 운치를 보여 주며 주객(主客)이 서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영원토록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화정처사(和靖處士)의 그것만이 존재할 뿐이다.그런데 모씨로 말하면 그 아취(雅趣)를 몸에 간직하여 초복(初服 벼슬하기 이전에 입던 청결한 옷으로 재야 생활을 말함)에 아무 흠집도 없게 하였고, 또 기암자(畸庵子)와 같은 인물을 벗으로 삼게까지 되었으니, 이 집이 비록 해외(海外 중국 밖의 지역이라는 뜻임)에 있다 하더라도 어찌 고산(孤山)에 비교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손색이 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의 글이 이 집을 중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집 때문에 내 글이 중하게 되는 셈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모씨는 더욱 힘쓰도록 하라.”하였다.[주-D001] 요위(姚魏) : 요황위자(姚黃魏紫)의 준말로 모란(牡丹)의 이름이다. 옛날 낙양(洛陽)의 요씨와 위씨 집에서 각각 황색과 자주색의 진귀한 모란이 피어났다고 한다. 《歐陽脩 洛陽牡丹記 花釋名》[주-D002] 매형(梅兄) : 수선(水仙)에 대해서 매화를 꽃의 형이라는 의미로 매형이라고 한다.[주-D003] 수조(水曹) : 수조(水曹)는 수부(水部)로서, 수부랑(水部郞)을 지낸 당(唐) 나라의 문장가 원결(元結)을 가리킨다.[주-D004] 광평(廣平) : 광평은 광평군공(廣平郡公)의 봉호(封號)를 받은 당 나라 문장가 송경(宋璟)을 말하는데, 매화를 읊은 그의 광평부(廣平賦)는 당시에 청편염려(淸便艷麗)하다는 호평을 받았다.[주-D005] 화정처사(和靖處士) : 송(宋) 나라의 은자(隱者) 임포(林逋)를 말한다.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막을 짓고 20년 동안 출입하지 않은 채 매화를 가꾸고 학을 기르면서 독신으로 살았으므로 당시에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梅妻鶴子]’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일명 고산처사(孤山處士)라고도 한다.* 이 글에서 정모씨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과 가선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던 본관이 영성(靈城)인 정일(丁鎰, 1583~?)을 말한다. 매화를 특히 사랑하여 손수 뜰에 매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당호를 삼매당이라 했다. 당시에 정철의 아들 기암자(畸庵子) 정홍명(鄭弘溟)이 담양 지실마을 계정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부탁으로 기를 썼으며 조선 중기 때 정자임을 증명되고 있으나 위치를 정확하지 않다. 기암의 서석산부(瑞石山賦)의 후기도 그가 써 근친했음을 알 수 있다.정일은 정홍명(鄭弘溟)·조희일(趙希逸)·강항(姜沆)·신경진(辛慶晉) 등과 절친했다.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 선조8∼1638 인조16)이 1924년(인조2)과는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이어 1627년(인조5)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있을 때 교류했으며 특히 이정태와는 같이 의병을 일키면서 정일(丁鎰)과  상당히 근친했던것으로 여겨진다. 문집으로 <삼매당유고(三梅堂遺稿)>는 불분권 1책. 목활자본. 1847년(헌종 13) 6세손 언길(彦吉)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서유소(徐有素)의 서문과 문인 김단술(金湍述)의 장(狀)이 있고, 권말에 백주진(白周鎭)의 발문이 있다.
    2020-09-10 | NO.297
  • 삼연 김창흡공의 〈소쇄원〉에 차운해서 능주 사또 조 정이에게 부치다〔次三淵金公 昌翕 蕭灑園韵 寄竹樹使君趙定而〕-손재집
    삼연 김공 창흡 의 〈소쇄원〉에 차운해서 능주 사또 조 정이에게 부치다〔次三淵金公 昌翕 蕭灑園韵 寄竹樹使君趙定而〕- 손재집 제1권 / 시(詩)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중국 땅은 어둡고 악취가 진동해서 / 九有冥蒙腥臭鄙칠 척의 이 내 몸이 갈 수 없지만 / 七尺身無可往矣우리나라에도 산수가 있어 / 惟我箕封山水在명승지 두루두루 모두 기억할 만하여라 / 名區歷歷皆可紀서석산 우뚝 솟은 걸 보시라 / 須看瑞石高屹屹그 형세가 우주를 지탱하듯 치솟았는데 / 勢若撑支宇宙峙옛날 내가 바위 밟고 다 올라가 보니 / 昔我足踏巖蹬盡방장산과 봉래산이 보이는 곳에 있었지 / 方丈蓬萊指點裏골 깊고 층층 구름 덮인 남악에서 어떻게 흉금 씻었는지 주부자를 생각하네 / 絶壑層雲南嶽何盪胷緬憶朱夫子주부자를 내가 어찌 감히 흉내내랴만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는 건 오히려 할 수 있다오 / 朱夫子吾豈敢登高騁望尙能此중원을 바라봄에 눈물 흘릴 만하고 / 擧目中原堪下淚비스듬히 일본 땅 보니 이가 갈릴 뿐 / 橫看日域但切齒낭랑하게 시 읊조리며 동쪽 소선대로 내려옴에 / 浪吟東下蘇仙臺적벽의 갠 달이 가을 물을 비추었다오 / 赤壁晴月照秋水돌고 돌아 또 물염정에 묵다가 / 繚繞且宿勿染亭흥 다하여 도로 돌아갈 지팡이 매만지는데 / 興盡還復歸筇理소쇄원이라 애양단의 / 蕭灑園愛陽壇그윽하고 청절함은 비할 데가 없었다오 / 幽深淸絶無與比담재 노인 당년에 붓 한번 날렸는데 / 湛老當年一揮灑옛 담장 여전해서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구려 / 古墻依然猶未圮유묵 어루만지노라니 언뜻 어제 일 같아 / 摩挲遺墨乍如昨책상 옆에서 모시지 못한 게 한스러워라 / 恨不從傍侍案几남쪽에는 장군이 칼 주조하던 굴 있어 / 南有將軍鑄劍窟만 길 되는 노을은 타오르는 불꽃 같은데 / 頳霞萬丈光焰似연기가 깔린 모래 시내는 비단보다 하얗고 / 煙布沙溪白於錦서리가 물들인 단풍 숲은 깁보다 붉구려 / 霜染楓林紅勝綺솔 거문고에 여울 비파 소리가 청량하니 / 松琴澗瑟響冷冷땅은 상산 아니어도 기리계 생각나도다 / 地非商山想綺里지금까지도 정감에 이끌려 오히려 꿈속으로 드나니 / 至今猶作牽情夢시 읊조리며 몇 번이나 옛 절벽 향해 가 기댔던가 / 吟筇幾向古壁倚바람에 옷깃 날리던 능주 사또여 / 飄灑風襟竹樹宰벼슬 관두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겼는데 / 未能休官以爲恥짧은 시와 긴 노래로 화답한 이 누구던가 / 短詠長歌唱酬誰한 시대에 날 알아주던 이는 삼연 노인뿐이었네 / 一世峩洋淵老耳신선의 동산에 들어와 품평하는 사이에 / 仙園已入品題間특별히 맑은 시 지어 준 까닭 있음을 알겠으니 / 特贈淸詞知有以팔도를 두루 유람하며 끝없이 일던 흥이 / 周游八路不盡興강남의 명승에 오자 다시 일어나누나 / 又因江南名勝起연하에 집 짓자던 계책 만약 이루어진다면 / 結構煙霞計若遂실컷 놀며 명승지 고르다가 이곳에 정하리니 / 窮遊選勝卜於是이 노인의 가슴 녹록하지 않아서 / 此老胷中不草草얼음과 서리 보고 청백하며 검소하게 살리라 / 觀象氷霜淸素履붕새가 나는 하늘 탁 트여 만리가 펼쳐지니 / 鵬天寥廓萬里長날개 치며 어느 날에나 남명으로 옮겨 올까 / 擧翼何日南溟徙혹시 신선과 함께 구름 계곡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 儻携仙侶歸雲壑나는 거문고만 안고 오솔길에서 기다리리라 / 我抱孤琴蘿逕俟[주-D001] 삼연(三淵) …… 부치다 : 김창흡(金昌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소쇄원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하자, 제자였던 처사 양산보(梁山甫)가 벼슬을 버리고 담양(潭陽)에 조성하고 은거한 곳이다. 죽수(竹樹)는 전라도 능주(綾州)의 옛 이름이다.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본관은 임천(林泉), 자는 정이, 호는 오재(寤齋)이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승정원일기》 숙종 40년 11월 28일 기사에 능주 목사로 제수된 일이 보인다. 박광일이 차운한 김창흡의 원시는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10에 수록된 〈북관에서 돌아온 후 조정이에게 부치다.[北關歸後寄趙定而]〉이다.[주-D002]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주-D003] 방장산(方丈山)과 봉래산(蓬萊山) :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삼신산(三神山)에 속하는 산들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그런 이름을 쓰는 산이 가깝게 보인다는 말로 여겨진다.[주-D004] 골 깊고 …… 생각하네 : 남악(南嶽)은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형산(衡山)을 말하는데, 송나라의 주희가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함께 이곳에 노닐면서 많은 양의 시를 주고받았다. 《宋子大全隨箚 卷4》[주-D005] 적벽(赤壁) : 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란 이름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同福)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고 한다.[주-D006] 물염정(勿染亭) : 창평(昌平)의 남쪽 동복현(同福縣) 방향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한 정자의 이름이다.[주-D007] 담재(湛齋) …… 날렸는데 : 담재는 김인후(金麟厚, 1510~1560)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소쇄원의 제월당에 자신이 지은 〈소쇄원48영〉을 친필로 써서 걸어 두기도 하였는데, 그 작품이 《하서전집(河西全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주-D008] 남쪽에는 …… 있어 : 광주 무등산 입석대(立石臺) 아래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이 철을 생산하여 무기를 만들었다는 제철유적지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주-D009] 땅은 …… 생각나도다 : 상산(商山)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인데, 진(秦)나라 말기에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기리계(綺里季)ㆍ녹리선생(甪里先生)이 이곳에 은둔했으므로, 이들을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불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주-D010] 짧은 …… 노래 : 짧은 시는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10에 수록된 〈광석대에서 조정이의 시에 차운하다[廣石臺次趙定而]〉이고, 긴 노래는 〈북관에서 돌아온 후 조정이에게 부치다[北關歸後寄趙定而]〉를 가리킨다.[주-D011] 날 알아주던 이 : 원문의 ‘아양(峨洋)’은 지기(知己)가 서로 만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고산(高山)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가 “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 하고, 유수(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평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주-D012] 붕새가 …… 올까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명(北溟)에 사는 곤(鯤)이라는 물고기는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물고기가 붕새로 변화하는데, 그 길이 역시 몇천 리나 되고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그 새가 해풍(海風)이 일어나면 이를 타고 날아올라 단숨에 남명(南冥)으로 날아간다.”라고 하였다.
    2020-12-23 | NO.296
  • 상무대 비행장
    광주 항공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지금의 상무지가 들어선 치평동이라 할 수 있지요. 1920년대 한반도에는 일본 육군의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평양 능라도에 있었던 제6항공연대였는데 이 부대는 비상시 항공기의 이착륙을 위해 전국 각지에 임시 활주로를 물색했던 적이 있었어요. 한때 그 후보지 중 하나로 광주 계림동의 경양방죽이 거론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임시 활주로 개설이 이뤄진 곳은 치평동 일대였습니다. 1929년 일본 육군은 이곳을 임시 활주로로 선정하는 동시에 20여대의 항공기를 상주시킬 계획이었는데 실제 이 계획이 실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를 본격적인 민간 비행장으로 개발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상무대 비행장은 1937년 확장 공사를 시작해 1939년 11월에 정식 비행장으로 개장했습니다. 그에 앞서 1938년 5월 전북 고창 출신의 비행사인 신용욱이 승객 3명을 태우고 서울을 이륙해 4시간 만에 이 비행장에 착륙한 일이 있었지요. 당시 신용욱이 조종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을 보기 위해 1만여 명의 광주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아울러 이 비행장이 민간 비행장으로 운영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운영하게 됐고, 항공기의 운항에 필요한 기상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인근에 기상관측소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오늘날 광주지방기상청의 기원이 됐을 뿐 아니라 광주에서 근대기상관측의 효시가 되기도 했습니다.이 무렵 신용욱이 만든 항공사를 중심으로 광주와 서울 간에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운항을 했다고 합니다. 항공기는 그리 크지 않았고 요즘처럼 실내 객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승객은 3~4명이 타는 정도였고 조종사들처럼 두터운 모자를 쓰고 자켓을 걸쳐야만 했지요. 그래서 승객은 많지 않았고 주로 항공기의 업무는 우편물을 수송하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전남 장흥 출신의 비행사인 이상태도 있습니다. 장흥신문에 실린 박형상 변호사의 글(2018.10.26.)에 따르면 덕천 이상태(李相,1904~1985). 우리나라 둘째 또는 세번째 비행사였다고 합니다. "그 무렵 1903년생으로 장흥읍에는 '최상채,김두헌'이라는 공부 귀재들이, 강진읍에는 '김영랑,김현구'라는 시인 재목들이 있었는데, 회진 바닷가에서 1904년생 비행사가 나왔다니, 대단하다. 일본 지바(千葉)비행학교를 나왔으며, 1923년경 ‘지바~목포’ 방문운항에 성공을 하였고(장흥 하늘도 날았다한다), 몇 년 후 비행업무를 그만 두었는데, 집안 반대가 심했다한다. 해방 후 대한항공협회 이사와 전남지부장으로 일시 일했다고는 하나, 하늘에 남겨진 별다른 흔적은 없다. 오히려 고향 땅에 그 족적이 남았다. 1938년에 돌개포구 간척사업으로 조성한 순흥농장(상태농장) 경작지를 소작인들에게 헐값 분배하였다. ‘순흥농장 경작인 일동’ 명의로 1983년경에 ‘德川 이상태 시혜비’가 세워졌다. 그 시혜비 뒤편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상태 묘소가 있다. 지금의 선학동 세트장으로 가는 길목의 우측 모퉁이, 양지바른 언덕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생, ‘이상민’ 사연을 보태본다. 한창 젊었을 1942년경에 중국 해남도에서 격추되었다. 兄 대신에 하늘을 날던 민간비행사였지만, 군속 신분으로 동원되어 수송업무에 종사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생기면서 그런 징용업무에 앞장을 섰던 항공사 사장은 체포되고, 兄 이상태 역시 그를 처벌하라는 서명을 하였는데, 그 피의자 사장은 풀려나고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다."그러나 상무대 비행장이 민간비행장으로 이용된 기간은 오래가지는 않았어요. 1944년 일제는 이곳을 일본 해군에게 넘겼고, 특공特功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게 될 가미카제 조종사들을 속성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바뀌었지요. 상무대 비행장이 요카렌[豫科練](구 일본 해군의 소년 항공 요원 지망생)비행장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이 시기부터입니다.한편 상무대 비행장에 주둔한 일본 해군 항공부대는 별도의 독립된 부대로 지칭되지는 않았지요. 이 부대는 10대도 채 되지 않는 훈련기를 보유한 소규모였던 탓에 일반적으로 ‘광주항공대’로 호칭됐습니다.그러나 이 부대가 주둔하면서 길이 1000m의 활주로가 아스팔트 포장의 초기 시공형태인 매카덤 공법으로 닦였는데 활주로는 현재 전남고등학교 자리에서 상무소각장 방향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아울러 요카렌, 즉 비행연습생의 막사 등을 비롯한 부속시설들이 비행장 인근에 설치됐어요. 이로 인해 옛 국정원과 국군통합병원, 대신신학대 일대에 있었던 응세농도학원이나 호남대학교 쌍촌동 캠퍼스 자리에 있었던 임업시험장 등이 1944년을 기점으로 모두 일본해군 군용지로 징발당하기도 했습니다.한편 상무대 비행장은 해방 후 다시 운영을 재개했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9년 이곳에서는 다시 여객기가 취향해 주로 서울을 왕복했어요. 당시 여객기는 2차 대전 중에 미군이 사용했던 군용기를 개조한 것으로 승객은 5명을 태우는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주와 항로가 열리기도 했어요. 그러나 광주-제주 항로는 승객 4명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얼마 후에 운항이 중단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무대 비행장은 워낙 좁고 애초부터 민간공항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어서 결국 1964~65년께 비행장을 이설하기에 이르러 현재처럼 광주공항 자리인 광산구 신촌동으로 이전하게 됩니다.※광주 비행의 역사는 광산구 신촌동에 있는 광주공항의 전신이 상무대안 비행장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일본해군이 세운 요카렌비행장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계속돼 왔으나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요카렌’이란 용어는 1910년대에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 사람들이 비행기를 목격한 것은 1910년대다. 1918년 일본인 조종사 야마카타 도요타로가 복엽기로 광주천(옛 도시제사공장 둔치)에 착륙할 때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육군 소속의 항공기 1대가 광주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동구 계림동에 있는 경양방죽을 활주로로 착각해 불시착하기도 했다.<2019.5.1. 수정>
    2018-05-28 | NO.295
  • 새 사또(使道)가 부임한 뒤에 감영(監營)에 농형(農形)을 보고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 8월 초1일 새 사또(使道)가 부임한 뒤에 감영(監營)에 농형(農形)을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지난달 보름 이후로 본부(本府)의 농형(農形)과 비가 내린 상황을 기록하여 작성한 책자 2건을 올려 보냅니다. 농사를 권장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잇따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였습니다. 금년의 농사는 때마침 이앙하는 절서를 당하여 한 달 동안 날씨가 매우 가문 바람에  하였고 또 이앙하지 못한 곳도 많습니다. 그리고 6월 11일과 12일에 내린 비가 처음에는 마구 퍼붓다가 이어서 장마로 변한 바람에 물 주변이나 산 밑에 있는 전답(田畓)이 내가 되고 모래밭이 된 경우가 또한 많았습니다. 이처럼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재앙이 된 바람에 전답의 각종 곡식이 모두 피해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 이하 5자와 2행은 판독 불가 - 차례대로 이삭이 패서 모두 결실할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대가 높아 건조하여 늦게 이앙한 곳은 처음에 이미 시기를 놓친 데다 곧바로 장마가 진 바람에 잘 자라지 않아 풍작의 가망이 없습니다.목화(木花) 농사는 계속된 장마로 인하여 꽃망울이 썩어서 떨어져 버렸으므로 이미 흉작으로 판단이 났습니다. 그리고 팥ㆍ콩ㆍ기장ㆍ벼는 때마침 꽃이 피고 이삭이 팰 적에 또한 손상을 많이 입었으므로 부실(不實)을 면할 수 없으니, 민사(民事 농사)를 생각할 적에 너무나 민망합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 판결 또는 처분)계문(啓聞)하겠다. 성책(成冊)은 받았음.[주-D001] 농형(農形) : 농사 형지(農事形止). 농사의 진행 상황 또는 작황을 말한다. 지방관은 농사가 시작되는 춘분(春分)에서 추분(秋分) 사이에 대체로 열흘 간격으로 농형을 보고하였음.[주-D002] 첩보(牒報) : 첩정(牒呈)으로 보고하는 일. 첩정은 하급 관아에서 상급 관아로 올리는 공문서.[주-D003] 계문(啓聞) : 임금에게 아뢴다는 의미인데, 관찰사(觀察使)나 절도사(節度使) 또는 지방에 출장 중인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문서로 아뢰는 것임.
    2023-08-17 | NO.294
  • 서경우- 조양대에서
    底意松翁臥此間  아마도 송천옹은 이곳에 기거하면서當年進退不應閑  그 당시 진퇴에 한가롭지만은 않았으리라終知敎子惟忠孝  마침내 알았노라, 자녀들을 오직 충효로만 가르쳤기에矗石三鄕重泰山  촉석루(矗石樓)과 삼향(三鄕)은 태산보다 무거웠네.인조 때 (晩沙) 서경우(徐景雨 1576~1645)는 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10년간 은거하였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며 대사성·도승지 등을 역임에 이어 우의정을 지냈다. 그가 천의 거처 조양대를 지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흘러내고 있다.
    2020-05-02 | NO.293
  • 서석산을 유람하며〔遊瑞石山〕 - 존재집
    서석산을 유람하며〔遊瑞石山〕 광주(光州)에 있다 - 존재집 제1권 / 시(詩) :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빠른 바람을 날개 삼아 티끌 속을 벗어나 / 羾出塵埃翼迅風아득히 높은 산에 오르니 사방 모습이 똑같구나 / 逈臨穹岳四望同산천은 삼한 땅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 山川錯落三韓國천지는 위대한 해동에 활짝 열려 있네 / 天地褰開大海東첩첩 골짜기 신령스런 경관 모두 조물주 솜씨라 / 萬壑靈觀皆造化천년의 정기로 영웅을 몇이나 내었던가 / 千年正氣幾英雄두 눈동자로 인간 세상 두루 이해하면 / 雙眸領略人間世세상 다스리는 얼마간의 공덕 얻으리 / 消得經綸多少功
    2020-12-31 | NO.292
  • 서정연-객사 광산관 圖障行
    光山大縣雄南州 地勢此來何穹窿城郭人民亂離後 十戶八九皆成空聖主求賢先一州 李侯於是眞分憂初來因革便不便 百里農桑民有秋江山移入盡圖間 白者是江靑者山荒村煙外鳥飛去 苦竹叢邊人往還池塘亭謝餘古迹 大道如砥通南北無等層巒淑氣濃 其間往往人生傑風流文彩鄭松江 義理正學奇高峯英華才士藯然興 大家世族聯官封可惜飛將竟何事 有志未展身光死孝子忠臣何代無 最愛當年招討使沙場痛哭父子魂 宅里千載風聲美龜頭剝落古荒碑 使君功德懸於斯風詠繁華已寂寞 壁上空有先賢詩我是湖外作遠遊 客館逢迎三日留山川歷歷一步地 歎息看來揩病眸圖成不是好事爲 此間風土要人知化民成俗政之本 李侯玆州治不治-광주읍지서정연(徐挺然)의 자는 수부(秀夫)이며 호는 사봉(沙峯)이다. 1600년대 사람이다.
    2018-07-26 | NO.291
  • 서형수- 광주 사직 기우제문(光州社稷祈雨祭文)
    묵묵히 기도하고 공경히 기다린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물고기는 수면으로 나와 숨을 쉬고 개미는 둑을 지으며 비둘기는 짝을 쫒고 달은 필성에 걸리는 것을 모두 바라보는데도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를 얻지 못하면 나중에 얻은들 무엇하겠습니까?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이 비에 달렸고 백성의 생사도 여기에 있으니 토지와 오곡을 맡으신 신께서는 응당 가련히 여길 줄로 아오니 원컨대 정성과 향기를 뒤따라 예천(醴泉) 같은 단비를 내려주소서. 감응하고 하지 않고는 사람이 초래하는 바이니 감응은 옛날에도 뚜렷하였습니다. 한나라 사람이 옥사를 판결하자 비가 내렸는데, 광주 고을의 옥에는 아마도 원통하고 괴로운 자가 있는 것입니까? 송나라 사람이 정사(政事)를 바르게 닦자 비가 내렸는데, 광주 고을의 정사엔 혹시 부정한 일이 있는 것입니까? 서화(西華)의 수령이 분신하려 하자 비가 세차게 내렸으니, 관리가 능히 그 허물을 반성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양의 수령이 정성을 바치자 큰비가 내렸으니, 관리가 능히 정성껏 호소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도는 환난을 구하는 방법이 아니며 언어만으론 견책(譴責)에 대해 사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천심은 지극히 인자하고 지도(地道)는 사람을 도와 처음엔 인색한 듯하다가 끝내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사람으로선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까? 금년의 비는 8도가 모두 부족한데 호남이 더욱 심하고, 호남의 농사를 온 도가 함께 근심하나 광산이 특히 더합니다. 대개 땅에 수리(水利)만 있어서도 안 되고 사람이 농사에만 힘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실로 사직과 산천의 그윽한 가호에 힘입어야 우리의 농토를 다스려 천맥(阡陌)마다 오곡 물결이 하늘에 이어지고 이삭마다 구름처럼 무성하게 땅에 가득하게 되어, 기어코 장후(張侯)의 웃음을 일으키고 양공(楊公)의 은혜를 펼치게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가뭄이 20일을 지속하고 잡초를 비로소 제거하자마자 땅이 거북등처럼 갈라져서 전준(田畯, 권농관)은 이랑에서 속을 태우고 농부는 가을을 맞는 때에 근심하도록 하십니까. -박선홍, 『광주 1백년 2』, 금호문화, 1994, 252~254쪽 서형수(徐瀅修, 1749~1824) 今年之雨。八路同窶而湖南爲愈。湖南之農。一道同憂而光山特優。盖地不獨有水利。人不獨勤穡事。實維社稷山川之冥庇。是衣是被。倘庶乎我疆我理。阡阡之浪色連天。穗穗之雲容匝地。期期其發張侯之笑而布楊公之賜矣。若之何秧未著根而亢暘兼旬。稂纔初鋤而厥土如龜。使田畯緣畒而焚惔。農夫將秋而顑頷哉。隔幷惟人所召。感應于古可炤。漢人决獄而雨光之。邑獄豈有寃苦者歟。宋人修政而雨光之。邑政或有窫窳者歟。西華之令欲焚軀而沛然。吏不能省其愆歟。漢陽之守以精誠而大澍。吏不能虔其籲歟。抑禱祀非救患之術。言語非謝譴之實。而天心至仁。地道有相。始若靳而終必惠者。會有其時。非人所敢量歟。默祈而祗俟之有日矣。魚喁也。蟻垤也。鳩逐婦也。月離畢也。皆望望而不叶一矣。今而不得。得之何爲。歲之有無在玆。民之生死在玆。神司土穀。知應垂憐。願隨心香。挹注醴泉。
    2018-07-10 | NO.290
  • 서형수-光州佛臺山祈雨祭文 광주불대산기우제문
    嶽名佛㙜 爲其慈人 慈人則那 含澤布仁亦旣布止 胡今之旱 自播及耘 一此火傘間者乍霑 杯水車薪 溝斷細流 塍飄軟塵三庚將邁 千耦都閑 彼岸嵯峨 須彌與班普濟神功 非靈曷倩 衆生無知 過不足譴雖譴惟守 在民何慍 于社于隍 聽我汶汶言至于山 禮成三歎 飯甑有盖 膚寸經漢詰朝報謝 戒汝祝贊-명고전집(明皐全集)서형수(徐瀅修, 1749-1824)의 자는 유청(幼淸), 여림(汝琳)이며 호는 명고(明皐), 오여(五如)이다.
    2018-07-10 | NO.289
  • 서형수-광주성황단기우제문(光州城隍壇祈雨祭文)
    日于社稷 날마다 사직에 나아가서 誠切詞急 정성 다해 급한 말씀 아뢰나 神罔我憐 신이 우리를 가련히 안 여겨 澤慳終洽 흡족한 은택을 내리지 않네 何艸不黃 어느 풀인들 시들지 않으리 無原無隰 평원과 습지가 따로 없어라 匪穀曷民 곡식 아니면 백성이 어찌 살며 匪民曷邑 백성 아니면 어찌 고을이 서랴 滿野拋鋤 들판 가득히 호미를 버리고 緣畒耦立 이랑을 따라 짝지어 서있네 此旱古稀 이번 가뭄은 옛날에도 드문 일 渾境同悒 온 경내가 모두 답답해하네 源窮漑灌 원천은 말라 관개를 못하고 力殫綆汲 힘은 우물 기르느라 고갈되었네 逝將咬菜 장차 풀뿌리를 먹어야 할 형편 誰哉能粒 누가 쌀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城隍於州 성황당은 우리 고을에서 人所仰給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곳 求救之聲 구원을 기도하는 목소리를 敢緩呼吸 감히 잠시라도 늦추리오 吉未及蠲 길일을 미처 가리지도 못했고 儀未暇習 의식도 익힐 겨를이 없었지만 祗鑑精忱 바라건대 정성을 살피시어 言下滃潝 곧바로 비를 흡족히 내리기를 -박선홍, 『광주 1백년 2』, 금호문화, 1994, 252~254쪽.서형수(徐瀅修, 1749-1824)의 자는 유청(幼淸), 여림(汝琳)이며 호는 명고(明皐), 오여(五如)이다. 179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남고(南皐) 서형수(徐瀅修)가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지원동 쪽으로 가는 남문로 주변에 있던 성황단(城隍壇)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2018-07-10 | NO.288
  • 석서정기 - 동문선 제75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석서정은 고적(古跡)으로 소개되고 있다. ‘고을의 남쪽 2리에 있었다’고 설명하며, 고려후기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이 남긴 ‘석서정기(石犀亭記)’를 실었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글을 보면, 설천용(偰天用)이라는 위구르 사신이 우리나라 남쪽을 여행하다 광주에도 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석서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후 이색에게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청하자, 이색은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지 놀고 관람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석서(石犀)’라는 이름을 지은 경위를 밝히고 있다. 과거 이렇게 명성이 높았던 석서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제작된 1530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석서정의 존립 기간은 채 200년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색의 석서정기다. ---석서정기 - 동문선 제75권 : 이색광주(光州) 읍됨이 동, 남, 서 3방면은 모두 큰 산으로 되어 있되, 유독 북면만이 평탄히 멀리 트여 있으며, 남산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다. 이러한 까닭에 합류하게 되면 그 형세가 더 클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게 되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쏟아져 나와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 가는 등 백성들의 피해됨이 적지 않았으니, 고을의 장(長)이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으리오.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을 둔 것은 옛 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마침내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두 개의 물이 부딪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어, 물결로 하여금 방향을 조금 서쪽으로 돌려 북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地勢)가 북으로 내려간지라 물이 천천히 흘러 백성의 피해가 이제야 끊기게 된 것이다.이에 옛 물길 위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으로 봇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璧水)와 같은 체제가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꽃나무를 심고, 두 군데에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고는 그 가운데 앉아 휘파람을 불며 시도 읊으니, 마치 뗏목을 타고 바닷속에 앉아 많은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 같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회홀(回鶻, 위구르) 설천용(偰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 위에 노닌 바 있었는데 서울로 돌아와서 목사(牧使) 김후(金侯)의 서신으로써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청해 왔다. 나는 말하기를, “우(禹)가 치수(治水)한 것이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편명) 한 편에 나타나 있으나,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고 진(秦) 나라의 효문황(孝文王)이 이빙(李冰)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물의 재해를 진압한 바 있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이빙이 만든 옛것이 아니었으나, 뒤에 물의 이해(利害)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니, 이것으로 이빙의 마음쓴 것을 구하여 보면 가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두공부(杜工部 두보를 두공부라 한다) 가행(歌行)을 지었으니 이르기를,但見元氣常調和 원기만 항상 조화됨을 볼 수 있다면自免坡濤恣調瘵 자연히 파도의 피해는 면하리라 安得壯士堤天堈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천강을 끌어다가再平水土犀奔茫 다시 수토를 다스려 돌물소를 없앨꼬 한 것이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키고 수토를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 요·순)와 삼황(三王 우·탕·문왕 )의 일이었고, 이제 삼황의 마음의 정치는 후세에 고유(固有)한 바로 일찍이 잠시라도 없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괴상하고 정도에 벗어나는 말을 구하여 경제의 요원한 시책으로 삼는다면 두공부의 마음도 또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孔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조그마한 도(道)라 해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하는 사실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도 다 같이 아는 바이요, 물소의 형상을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의 글에 이르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尺)나 갈라졌다”는 것을 보면, 물소란 것이 가히 수재(水災)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하물며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을 이것으로 피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 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른 뒤에야 말 것이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 좇아 다시 일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으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리오. 이 정자를 지은 것을 쓰는 것은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로써 그 정자를 이름하고, 두공부의 돌물소의 행위를 취하여 근본으로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함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노라.이 정자에 오르는 자는 그 이름을 고증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수령에게 경의가 일어날 것이다. 수령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을 역임한 바 있으며, 지방 행정에 있어 청령하고 능력 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있다. 光之州理 三方皆大山 獨北面平遠 而南山之谷 出水者二 水之來又遠 是以 合流則其勢之益大也可知矣 每年盛夏 雨霖旣作 狂奔猛射 破屋宅 齧田壟 爲民害不小 爲之長者 寧不重爲之慮乎 南山之下 置分水院 古人所以殺水勢也 而卒莫之分 於是 二水走衝之地 積石爲城 使水小西而北流 地勢北下 水順其性 民之害斯絶矣 迺作亭於水之故道 正據其中 分引洑流 繞亭四面 如辟水之制 亭之前後 累土爲嶼 樹花木凡二所 浮橋以出入 坐嘯其中 如乘桴于海 而群島之出沒於煙濤雲浪之間 信乎其可樂也 回鶻偰天用之南游也 得至其上 旣還京 以牧使金侯之書 求名與記 予曰 大禹理水 見於禹貢一篇 大抵順其勢而導之耳。秦孝文王用李氷守蜀 氷作石犀壓水災 及酈道元撰水經 石犀已非永舊 然後之言水利害者 必稱氷云 因以求氷之心 可見已 是以 杜工部作歌行 乃曰 但見元氣常調和 自免波濤恣彫瘵 安得壯士提天綱 再平水土犀奔茫 蓋調元氣 平水土 二帝三王之事 而二帝三王之心之政 後世之所固有 而未嘗頃刻之亡也 然必求詭怪不經之說 以爲經濟久遠之策 則工部之心 又可見已 雖然 孔子嘗曰 雖小道 必有可觀 石之鎭水 愚夫愚婦之所共知也 象之以犀 必有其理 抱朴子之書 言曰 刻犀爲魚銜入水 水開三尺 則犀之爲物 可以避水災彰彰明矣 又況石爲山骨 犀又郤水 水於是避之必矣 水旣知避 又導之下 霈然無少齟齬 日趨於空曠之地 滔滔汨汨 至于海而後已 水患何從而復作 邑居何從而不寧 書作斯亭 當不在貶例矣 故以石犀名其亭 而取工部石犀行爲之本 又以抱朴子爲之證 而斷之以春秋之法 俾後之人知亭之作 禦水災也 奠民居也 非徒爲游觀設也 登是亭者 考名思義 其必起敬於金侯矣 侯名賞 知印宰府 掌令憲司 爲政有廉能名
    2018-08-02 | NO.287
  • 석서정기(石犀亭記) - 목은문고 제5권
    석서정기(石犀亭記) - 목은문고 제5권 :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광주(光州)의 지세(地勢)를 보면, 삼면이 모두 큰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오직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터져 있다. 그리고 남산(南山)의 계곡에서 두 개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데, 그 물의 근원이 또 멀기만 하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물줄기가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욱 커질 것 또한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매년 한여름철이 되어 일단 장마가 들기만 하면 그 급류가 미친 듯이 질주하며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가옥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할퀴는 등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어찌 이 점을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남산 아래에 예전부터 분수원(分水院)이 있어 왔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물의 형세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물의 흐름을 양분(兩分)하는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두 개의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와 마주치는 지점에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는 물의 흐름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러자 물이 자연히 지세를 따라 북쪽의 평탄한 지역으로 천천히 흘러가게 되면서 백성이 피해를 받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이에 예전에 물이 흐르던 길목에 정자를 세우고 그 중앙을 거점으로 하여 보(洑)의 물을 양분해서 끌어들이니, 물이 정자의 사면을 에워싼 것이 흡사 벽수(辟水 벽옹(辟雍))의 체제처럼 되었다. 이와 함께 정자의 앞뒤에다 흙을 쌓아서 자그마한 섬을 조성한 뒤에, 그 두 곳에 나무와 꽃을 심어 놓고는 부교(浮橋)를 설치하여 드나들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앉아서 노래라도 읊조리노라면 마치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서 운무(雲霧) 자욱한 파도 속에 뭇 섬들이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았으니, 그 즐거움이 참으로 어떠하였겠는가.회홀(回鶻)의 설천용(偰天用)이 남쪽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 위에까지 올라갔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목사(牧使)인 김후(金侯)의 글을 보여 주며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위대한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를 했던 자취가 《서경(書經)》 우공(禹貢) 한 편(篇)에 수록되어 있는데, 요컨대 물의 형세를 따라서 물길을 인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 뒤에 진(秦)나라 효문왕(孝文王)이 이빙(李氷)을 촉(蜀) 땅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자, 이빙이 석서(石犀 돌로 조각한 물소)를 만들어서 수재(水災)를 진정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후위(後魏)의 역도원(酈道元)이 지은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석서가 이미 이빙의 옛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후대에 물의 이해(利害)를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빙을 일컫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 이빙과 같은 사람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이 때문에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가 이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원기가 항상 조화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홍수가 멋대로 병들게 하는 일을 절로 면할 수 있으리라. 어떡하면 장사에게 하늘의 벼리를 잡게 하여 수토를 다시 평정하고 물소를 사라지게 할까.[但見元氣常調和 自免洪濤恣凋瘵 安得壯士提天綱 再平水土犀奔茫]”라고 하였던 것이다. 대개 원기(元氣)를 조화시키고 수토(水土)를 평정하는 일은 이제 삼왕(二帝三王)과 같은 분들의 사업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제 삼왕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사를 행하려고 하는 노력은 후세에도 원래 있었던 바로서 잠시라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또 이치에 닿지도 않는 황당한 설을 찾아서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원대한 계책으로 삼으려 한다고 했고 보면, 두 공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또한 알 수 있다는 것이다.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자(孔子)는 일찍이 이르기를 “작은 기예(技藝)라 하더라도 반드시 볼 만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雖小道 必有可觀]”고 하였다. 돌을 가지고 물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거기에다 물소의 형상을 새겨 넣는 것은 필시 나름대로의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 “물소뿔에다 고기 모양을 새겨서 입에 물고 물속에 들어가면 물길이 석 자쯤 열린다.”고 했고 보면, 물소라는 물건으로 수재(水災)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하겠다.그러니 또 더군다나 산의 뼈라고 할 암석에다 물을 물리치는 물소의 모양을 새겨 놓는다면, 물이 이를 피해 갈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물이 이미 피할 줄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다시 그 물을 아래로 유도한다면, 조금도 막힘없이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날마다 텅 빈 광활한 지역으로 흘러 내려가 넘실거리면서 바다에 이른 뒤에야 그치게 한다면, 다시 또 물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겠으며 주민들이 안정을 찾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춘추(春秋)》에서 이 정자에 대해 한 마디로 평하더라도 당연히 폄례(貶例)를 따르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내가 그래서 이 정자의 이름을 석서(石犀)로 정한 다음에 두 공부(杜工部)의 ‘석서행(石犀行)’을 취하여 그 근본적인 의미를 밝혔고, 다시 《포박자》의 설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은 뒤에 《춘추》의 필법으로 단안(斷案)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정자를 지은 목적이 수재를 예방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데에 있지 한갓 노닐면서 관람하는 장소를 제공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였다. 그러니 이 정자에 오른 사람이 정자의 이름을 고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김후(金侯)에 대한 존경심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賞)이다.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사를 행함에 있어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이름을 얻었다.[주-D001] 진(秦)나라 …… 있었다 : 《사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에 “촉(蜀) 땅의 태수 이빙(李氷)이 이퇴(離堆)를 굴착하여 말수(沫水)의 피해를 제거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晉)나라 상거(常璩)가 지은 《화양국지(華陽國志)》 촉지(蜀志)에 “진(秦) 효문왕(孝文王)이 이빙을 촉 땅의 태수로 임명하자, 이빙이 석서(石犀) 다섯 마리를 만들어서 물귀신을 제압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주-D002] 원기가 …… 할까 :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10 〈석서행(石犀行)〉 끝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주-D003] 사람들이 …… 했고 보면 : 위에 인용한 시의 바로 앞부분에 “선왕께서 만드신 법도야말로 모두 바른길인 걸, 이치에 닿지도 않는 황당한 설을 어찌 꾀할 수 있으리오. 아 너 다섯 마리 물소 따위는 경국제민의 길이 못 되니, 깨어져 단지 저 강물에 떠내려가도 좋으리라.[先王作法皆正道 詭怪何得參人謀 嗟爾五犀不經濟 缺訛只與長川逝]”라는 내용이 나온다.[주-D004] 작은 …… 마련이다 :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말인데, 목은이 공자의 말로 착간한 듯하다.[주-D005] 물소뿔에다 …… 열린다 : 《연감유함(淵鑑類函)》 권430 서(犀)에 “물소뿔 한 자 이상짜리를 구해서 거기에 물고기 모양을 새긴 다음 입에다 물고 물속에 들어가면, 항상 사방 석 자 정도로 물길이 트이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있다.[得其角一尺以上 刻爲魚 而銜以入水 水上爲開方三尺 可得息氣]”는 《포박자》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주-D006] 그러고 보면 …… 여겨진다 : 일자포폄(一字褒貶)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논한다 하더라도, 토목공사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貶例]을 가한 것과는 달리, 이 정자를 세운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褒例]를 내릴 것이라는 말이다.*<동문선>에 실린 내용과 같다.
    2020-09-18 | NO.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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