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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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路上石翁仲
- 斲石作人頭如黿黃茅小屋依山足不知創造何年代面目獰怪而粗惡野火不燒雷電遺頑然當路迷浩刦山魈木魅來相依雨嘯風號衆妖集恐是往世墓前物俗語轉訛稱彌勒行旅祈禳各有求人施米帛馬剪鬣前者纔過後者繼紛紛拜跪致恭肅福田利益終杳茫恒受厚享顔不恧誰能奮舌叫九閽請擲天外淸穢慝-사암선생문집(思菴先生文集) 권1박순(朴淳, 1523-1589)의 자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菴)이다.
- 2018-06-16 | NO.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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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문 (제방) 에게 답하다〔答朴舜聞, 濟邦〕 - 노사집 제4권
- 박순문 (제방) 에게 답하다〔答朴舜聞, 濟邦〕 - 노사집 제4권 : 봄여름 사이에 병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한 번도 차도를 묻지 못하였네. 그 뒤에 오곡(午谷)에 사는 당질을 통해 이미 쾌유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본래 연약한 몸이어서 반드시 여증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걱정스러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여름에는 장마로 지체되었고 가을에는 또 무단히 3개월 동안 헛되이 나다니다가 돌아오니 눈이 이미 이어진 산에 쌓여 있었네. 몸소 찾아갈 계책을 이미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한 차례 사람을 보내 안부를 살필까 하였으나, 피로한 종이 춥다고 해서 우선 햇볕이 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네. 그런데 뜻밖에 먼저 사람을 보내고 편지까지 주었으며 편지 끝에 적어 보낸 선물 또한 나의 가난함을 짐작한 것이니, 그 위로되고 감사함을 말로 형용하기 어렵네. 중당(重堂)의 건강이 좋지 않다가 곧 좋아졌다고 하니 매우 축하하네. 어른들 모시며 조섭하는 그대의 몸도 크게 탈이 나지 않은 듯한데, 건강을 말끔히 회복했는지 모르겠네.무슨 글을 일과로 공부하며 외우는가? 이것이 궁금하네.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옛날부터 어찌 몰랐겠는가마는 요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더욱 느끼고 있네. 예전에는 들떠 지내느라 세월을 헛되이 버림을 면치 못했고 이제는 또 저물어가는 늘그막에 정력이 쇠약하니, 궁려(窮廬)의 탄식이 적지 않네. 그러나 오히려 힘쓰고 채찍질하려는 생각이 없지 않네. 그대 같은 이는 나이가 나에 비하면 아직도 넉넉하게 남았으니, 마땅히 병 조리하고 어른들 식사를 살피는 여가에 공부하는 일에 마음을 다 쏟아야 하네. 참으로 할 말이 많지만 얼굴을 대하지 않으면 말하기가 어렵네.[주-D001] 박순문(朴舜聞) : 박제방(朴濟邦, 1808~?)으로, 기정진의 문인이자 인척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순문, 호는 안호(安湖)이다.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의 후예로 광주(光州)에서 살았다.[주-D002] 나의 …… 것이니 : 원문의 지중(知仲)은 자신의 사정을 잘 알아준다는 뜻으로, 포숙아(鮑叔牙)가 그의 벗인 관중(管仲)의 행위를 다 이해해 주었다는 관포지교(管鮑之交)에서 온 말이다.[주-D003] 궁려(窮廬)의 탄식 : 주희의 〈봉수구자야표형음주지구(奉酬丘子野表兄飮酒之句)〉 시에, “고래로 곤궁한 선비는 세모에 고심이 많다네.[古來窮廬士, 歲暮多苦心.]”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晦庵集 卷1》
- 2020-10-04 | NO.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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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원-發昌平宿光州
- 朝發龍州遡峽天 아침에 용주를 떠나 골짝을 거스르니湖山到處足風烟 호산의 가는 곳마다 풍연이 넘치네淸秋㫌纛黃雲裡 맑은 가을 황운 속에 깃발이 나부끼고 細雨茅茨綠竹邊 가랑비 내리는 녹죽 가엔 초가집들瑞石悵望難再到 서석을 슬피보니 다시 오기 어렵고錦城招集有餘緣 금성의 초대모임은 남은 인연 때문重陽獨酌他鄕酒 중앙절에 홀로 타향의 술을 따르니月小樓頭月已弦 월소루 머리엔 어느덧 상현달이 떴네 - 오서집(梧墅集) 책2박영원(朴永元, 1791-1854)의 자는 성기(聖氣) 이며 호는 오서(梧墅), 석래당(石萊堂)이다.월소루(月小樓)는 '산은 높고 달은 작다,는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듯하는 의미의 누각이다. 1699년(숙종 25) 광주목사로 부임한 한성우(韓聖佑, 1633~1710)가 지금의 민주의 종각 옆 건물 상무관 주변에 소빈헌(笑嚬軒)과 함께 건립했다.서쪽을 높여 한 채의 소루를 짓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산이 높으니 달이 작다’라는 뜻을 취해 월소루(月小樓)라 이름하였으며 정명처럼 이 건물은 고작 3칸짜리에 불과해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1877년(고종14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 2018-07-26 | NO.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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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우의 모살사건-첩과 종의 모의가 의심된다
- 중종 28년 계사(1533) 9월 24일(계해) 인사정책에 관해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강론을 마친 뒤에 영사 한효원이 강론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의 말을 인용하여 아뢰기를,“사마광(司馬光)이 ‘조례(條例)는 이와 같더라도 실정(實情)을 따져서 죄를 정해야 한다.’ 한 이 말은 영원히 본받기에 합당한 말입니다. 한결같이 법의 조문만을 따를 뿐이라면 이는 실정을 살펴 죄를 정하고 죄수를 위해 살려줄 방도를 찾는 뜻이 없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이 말이 타당하다. 유사(有司)가 법을 집행할 때는 마땅히 조절하여 살려줄 길을 찾아야지 법의 조문만을 따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박우(朴祐)의 첩이 연원수(連原守)와 간통한 일은 강상에 크게 관계되는 일인데, 지난번에 의금부가 취품했다. 이와 같은 일은 판결하기가 지극히 어렵다.”하였다. 한효원이 아뢰기를,“박우의 첩에 관한 일은 추문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일이 종실(宗室)에 연관되었고 그 첩도 아직 어린데 일죄(一罪)를 범했으니 가볍게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이 전에 추관의 말을 들었습니다. 다만, 대체로 실정을 알기 어려운 은미한 옥사(獄事)는 반드시 철저히 추문하여 의심스러운 일이 없은 다음에야 판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증거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본 사람은 없어도 반드시 왕래한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형적(形跡)만으로 곧바로 본인을 추문하니, 일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애석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종실이니 상께서 분명히 가리셔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증거도 없이 의심스럽다는 생각만으로 여러 차례 고문을 가하면 끝내는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하고, 동지사 심언경이 아뢰기를,“지난번에 사증(辭證)을 갖추기 위해 종을 추문하였으나 뚜렷이 드러난 일이 없었고 밖의 사람들이나 이웃사람들도 다 애매하다고 하였고, 박우도 역시 첩의 심성이 착하지는 않으나 그 일이 확실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또 옥사(獄事)로 보더라도 은장(銀匠)에게 약을 사려 했는데 은장은 바로 박우의 일족이라서 독(毒)이라고 하여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우의 종이 박우에게 그것이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했을 따름이며, 이 때문에 대간이 아뢴 것입니다. 일이 매우 중대하지만 사증이 없는데,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가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므로 사중(司中)에서 계품하는 것입니다.” 【언경이 이때 의금부 동지(義禁府同知)로 있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유사(有司)가 짐작해서 해야 한다. 첩이 그 지아비를 모살(謀殺)하는 것은 일이 매우 중대한 일인데, 그러나 의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시끄러운 것이리라.”하였는데, 대사헌 권예가 아뢰었다.“전에는 정청(政廳)의 의논이 대간을 오히려 압도했었습니다. 그래서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당상관이 감히 주의(注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낭관들도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정청이 인물에 대해 논하는 일이 없는데 인물이 얼마나 되기에 현부(賢否)를 알 수 없겠습니까. 대체로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어올 수 없는 것인데, 앞의 정사(政事)에서 논박하여 파직한 사람을 뒤의 정사에서 다시 주의하고, 대간이 내쫓으면 전조(銓曹)는 다시 등용하니, 이 폐단이 매우 큽니다. 지금 좌우에게 들어보면 역시 이런 폐단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 사사롭게 인정(人情)을 쓰는 일이 매우 많으니 상께서도 이것을 알아두셔야 할 것이고, 유사(有司)도 역시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원전】 17 집 472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인사-임면(任免)[주-D001]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송(宋)의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충하여 명(明)의 구준(丘濬)이 지은 책.[주-D002] 정사(政事) : 인사행정.
- 2022-05-31 | NO.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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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형-부용정
- 三公不換一竿絲 삼공과도 바꿀 수 없다네. 낚시 한 자루好箇江山好榭池 좋은 강산 아름다운 사지에서 드리우고 있으면千里南來萍水客 천리 길 남쪽에 온 부평같은 나그네浴沂時節詠歸遲 늦은 봄날 시를 읊고 돌아감이 더디네-박제형(朴齊珩)
- 2018-08-02 | NO.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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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登瑞石山賦
- 處人世之僻陋 인간 세상 편벽하고 비루한 데 살다보니 動皆窒而不通 움쩍하여도 다 막히고 통하지를 않는다思登高而望遠 높은데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一盪余之愁胸 나의 시름찬 가슴 후련히 씻고 싶어져穿芒鞋而捫薜 짚신을 신고 담장이를 붙들고서陟瑞石之層峯 서석산의 층진 봉우리를 올라가超積蘇而獨立 쌓인 나무 뛰어올라 홀로 서서撫石上之矮松 돌 위의 난쟁이 소나무를 어루만진다顧鷹隼之瞥起 새매 별안간 일어나는 것 돌아보니一瞬過乎長空 깜짝하는 사이에 먼 하늘 지나간다悵學仙之無術 서글프다 신선 배울 재주는 없고塚纍纍於蒿蓬 무덤은 쑥대밭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游余目而四顧 내 눈을 움직여 사방을 돌아보니天杳杳而無窮 하늘은 까마득히 다할 줄을 모르고水練白而千回 물은 흰 게 천 번이나 구비치고 山戟立而萬重 산은 창같이 선 게 만 겹이라彼城邑之傍羅 저 성읍이 한쪽에 늘어있는 것은 齊道上之蟻封 길 위의 개미 둔덕과 같다惟人物之絡繹 오직 사람들이 연닿아 있는 것은寄蜉蝣於纖洪 하루살이가 공간에 붙여 사는거라問頭流其何許 두류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니複嶺限乎天東 포개진 산들이 하늘 동쪽을 막고 있구나望遠海之渺茫 먼 바다 까마득한 것 바라보니耽羅塊於目中 탐라가 눈 속에 덩어리져 보인다繄湖南之一域 그런데 호남 한 지역은 視荊揚其誰雄 형양에 비해 어느 쪽이 큰가地勢壯而綿邈 지세는 씩씩하게 멀리 뻗어있고田野闢而和豐 전야는 펼쳐져서 철 잘하여 풍년이라忽心馳於往古 홀연히 마음 옛날로 달려가增慷慨乎幽衷 깊은 마음 속에 강개 더한다方羅濟之割據 신라와 백제 할거하고 있을 적엔務挾矢而張弓 화살잡고 활 당기기에 힘을 썼었다及賊萱之跳梁 도적 견훤이 날뛰게 되자尋産禍於頑童 곧 이어 완악한 아이에게 앙화 생겼다阿龍迷而不振 阿龍 혼미하여 힘 떨치지 못해 外寇乘以交攻 외부의 원수들 그 틈을 타서 번갈아 공격해왔다鷰含泥而巢林 제비는 진흙 물어다 수풀에 둥우리 틀고鶴無聲於却戎 학은 눌러난 오랑캐 속에서 소리 없었다天府化爲賊藪 하늘의 府庫는 도적의 굴혈로 변화하였고 戰骨暴於林叢 전사자의 뼈는 숲속에 드러나 있었다賴麗祖之神武 고려 태조의 神武에 힘입어 攘餘孼之肆凶 악당들의 멋대로 부리는 흉악함 쳐 없애버려使鬼哭之荒野 귀신이 울던 황야를藹禾黍之芃芃 곡식이 무성한 좋은 곳으로 만들어歷百年而昇平 백년의 태평세월을 지내면서尙飽鮮而醉醲 그대로 좋은 음식 배불리 먹고 진한 술 취하게 마시고 살았다將解甲於戍樓 戍樓에서 무장을 풀려고 하였으며民捨身於梵宮 백성들은 梵宮(佛寺)에다 몸을 버렸다雖太平之有像 비록 태평의 정상 갖추기는 하였으나奈覆隍之無終 어찌하리오 성지가 유지되지 아니하였으니王春廻於仙李 王者의 봄 신선 李氏에 돌아와 大和氣之融融 지극한 和氣 흐뭇하여져天北極而拱星 하늘 북극성의 자리에서 뭇 별 거느리듯亦江漢之朝宗 또한 강한의 조종이 되듯 하였다遂仰天而長嘯 마침내 하늘을 우러러 길게 휘파람 치며送雲表之孤鴻 구름 끝의 외로운 기러기를 보낸다日忽忽而倒影 해는 급작스리 빛 거꾸로 비춰霞片片而曳紅 노을 조각 붉은 빛 끈다探絶頂之壯觀 절정의 장관 구경하느라久躑躅而扶笻 오래도록 머뭇거리며 지팡이 짚고 있다.-박정(朴禎, 15~16세기)은 눌재 박상의 형이다. 다른 유람기가 무등산의 형태나 자연에 대해 읊고 있는데 반해 박정은 무등산에 올라 광주 고을을 바라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2018-07-12 | NO.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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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빈 (제문) 에게 답하다〔答朴周彬, 濟文〕 - 노사집 제4권
- 박주빈 (제문) 에게 답하다〔答朴周彬, 濟文〕 - 노사집 제4권요사이 어떤 사람이 귀촌(貴村)의 근처에 전염병이 극성이라고 전해주던데,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지는 못했지만 염려가 컸었네. 이럴 즈음에 편지를 받고 대소가의 건강이 두루 평안하고 마을의 집들도 깨끗하다고 하니, 이는 변란의 해에 기쁜 소식이네. 가려움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언제부터이며, 학업은 전폐하지 않았는지? 그대 조카는 집에서 학업을 하는가? 저번께 괴화(槐花)가 벌써 맺힌 것을 보고 조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네. 만나거든 이런 뜻을 전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나는 집안에 다행히 다른 일이 없고, 전염병의 기운도 다행히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네. 그런데 이웃 마을은 모두 깨끗하지 않아 원근에서 들려오는 사망 소식이 참담하니, 내왕하거나 들르는 것도 이로부터 더욱 어렵게 되었네. 일단 여름이 다 가고 서늘한 바람이 나기를 기다려야 하겠네. 집이 가난하여 제삿날이 될 때마다 밥과 국만 차리는 일도 항상 재물이 없어 걱정인데, 올해는 더욱 궁색하여 예법을 갖추지 못하였네. 그대가 매번 잊지 않고 제수(祭需)를 도와주니, 딸집의 효도가 도리어 아들집의 불초(不肖)함보다 더 낫네. 서글프기 그지없네.[주-D001] 박주빈(朴周彬) : 박제문(朴濟文, 1813~?)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주빈이다. 칠졸재(七拙齋) 창우(昌禹)의 후예로, 광주(光州)에서 거주하였다. 기정진의 문인이자, 매부(妹夫)이다.[주-D002] 괴화(槐花)가 …… 없었네 :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응시하라는 뜻이다. 괴화는 홰나무 꽃인데 중국에서는 괴화가 필 때 곧 음력 7월에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이때 괴화가 누렇게 피기 때문에 당(唐)나라 속어에 “괴화가 누렇게 피면 과거 보는 선비가 바쁘다.[槐花黃, 擧子忙.]” 하였다.
- 2020-10-04 | NO.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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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원-南門口呼
- 兩湖緩急此要衝 特地關防壯百墉水抱北樓開錦繡 山圍南紀峙鷄龍溫王設國經千歲 聖祖停鑾有二松咫尺挽河思壯士 悲歌一曲激詩胷-금석집(錦石集)박준원(朴準源, 1739-1807)의 자는 평숙(平叔)이며 호는 금석(錦石)이다.
- 2018-07-10 | NO.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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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관- 죽림정에서
- 난간가에 꽃 그림자 환한 봄날 저물었고평상위의 밝은 달빛 밤 구름이 가볍도다.죽동(粥洞)이란 이 마을이 이제부터 빛이나니흔흔(欣欣)한 감우(感遇)속에 바람소리 요란하네.
- 2020-04-28 | NO.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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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하형-海陽吟杜韻
- 光山勝地幾經春 광산의 명승지에서 봄을 몇 번 보냈나滿目風煙倍舊新 눈에 가득한 풍광이 옛날보다 더욱 새롭네汽笛東南升降客 동남쪽 기적소리에 여객이 오르내리고市街上下往來人 시가지 위아래로 사람들이 왕래하네 錦溪花柳長舒色 금계의 화류는 늘 고운 빛을 펼치고瑞石雲林不染塵 서석의 구름숲은 티끌에 물들지 않았네點看雄州前進蹟 큰 고을의 옛 자취를 점점이 살펴보니 遮天樓閣疊成鱗 하늘을 가린 누각이 첩첩히 이어졌네-송애유고(松厓遺稿)박하형(朴夏炯, 1891~1971)의 자는 춘엽(春燁)이며 호는 송애(松厓)이다. 광주 출생이다.(광주의 옛 이름이 해양현이다.)
- 2018-07-10 | NO.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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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량(朴海量) 행장 -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병자년(1876, 고종13) 선생 44세
- 박해량(朴海量) 행장 -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병자년(1876, 고종13) 선생 44세, 거유 최익현(崔益鉉)윤5월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札)ㆍ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박해량의 자는 도겸(道謙),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집이 광주(光州) 하남(河南)에 있었다. 일찍이 제주에서 선생을 뵈었고 또 용서받고 돌아올 적에 책 상자를 지고 따라와서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이제 또 화승(畵僧)을 데려와서 선생의 초상을 그렸고, 3개월 동안 모시다가 돌아갔다. 뒤에 항상 천리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포천을 내왕하더니, 병술년(1886, 고종23)에 와서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선생이 그를 애석히 여겨 행장을 지어 주었다.○ 이때 사방에서 선생의 의리를 사모하는 이가 흑산도로 많이 들어와 뵈었는데, 단천(端川) 사람 최영호(崔永皓)가 그중에 더욱 특출난 사람이다. 중암이 그를 위하여 ‘최영호 입흑산도기(崔永皓入黑山島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금상(今上) 10년 계유(1873) 11월, 면암(勉菴) 최공(崔公)이 일을 말한 것 때문에 조정의 비위를 거슬려 제주 바닷가로 위리안치되었다가 3년 뒤 을해년(1875)에 방환(放還)되어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듬해 병자년(1876) 정월에 또 도끼를 가지고 궐문 밖에 엎드려 ‘양구(洋寇)가 왜적을 끼고 맹약을 요구하니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극력 말하였더니, 조정에서 또 흑산도에 위리안치하였다.대개, 한 신하가 참되어 국가가 망해감을 통분하고 천하가 바르지 못함을 슬퍼하기를, 산 동쪽에서 우는 봉황[朝陽之鳳]이나 가을 하늘의 새매처럼 하니 비록 원수와 적이 많아져서 찬배되어 만번 죽을 고비를 겪었으나, 이에 힘입어 우주가 동량(棟樑)으로 삼고 일월이 어두워짐을 면한 것은 옛사람의 일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기에 감동되어 농부나 심부름하는 하인들도 사마(司馬)를 알아보고 칭송하였으며, 먼 시골 구석 사람들도 구역(九罭)ㆍ낭발(狼跋)의 의사가 있었다.박해량 도겸(朴海量道謙 도겸은 자(字))이 광주(光州)에서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에 들어가서 제자의 예를 매우 공손하게 닦았다. 최공이 풀려 포천으로 돌아온 뒤에는 또 제자의 예를 행하여 떠나지 않고 머물러 온갖 고생을 겪으며 학문에 힘썼는데 이때 와서 또 흑산도로 따라가서 성심으로 섬기고 떠나지 않았으니, 이는 정자(程子) 문하의 마동평(馬東平)을 오늘날에 다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박생(朴生)은 사부(士夫)이니, 손재공(遜齋公 박광일(朴光一))이 방조(傍祖)가 된다. 손재공은 일찍이 화양 선생(華陽先生 우암(尤菴) 송시열을 말함)을 사사하여 세상에서 고제자(高弟子)로 일컬어졌으니, 그 연원(淵源)의 소종래가 본디 이와 같았던 것이다.최영호는 단천(端川)의 하민(下民)으로서 공의 명성을 듣고 도보로 1천여 리를 왔는데, 집이 가난하여 노자가 없어 남루한 차림으로 걸식해 가며 와서 문을 두드리고서 공을 뵙기를 청하였다. 공의 집에서, 다시 절해(絶海)로 방축되었다고 말하니 영호가 깜짝 놀랐다. 이어서 편지 하나를 굳이 청하여 품에 넣고, 다시 포천에서 남으로 1천여 리를 가서 바다를 건너 흑산도에 이르러, 공의 안색을 바라보고 기거(起居)를 물어서 제자의 예를 닦은 뒤에야 돌아갔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어찌 더욱 기특하지 않겠는가.또 김의현 진여(金懿鉉晉汝 진여는 자임)는 창평(昌平)에서 흑산도로 찾아왔고, 조종헌 준로(趙鍾憲俊魯 준로는 자임)는 순천에서 두 번 들어갔고, 이인(吏人) 이필세(李弼世)는 임피(臨陂)에서 제주도에 들어갔다. 하권묵(河權默)은 영암(靈岩) 아전이고, 손태효(孫台孝)는 나주 아전인데, 두 사람이 사모하는 성의를 드린 것도 또한 혜주(惠州)가 하늘 위에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아, 저 광란(狂亂)을 불어내어 모함하여 해치기를 마지않는 자는 다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른바 ‘천성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은 서로 멀다.’는 것인가. 위의 몇 사람에게 참으로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이듬해 정축년(1877) 3월에 내가 가릉(嘉陵)에서 서쪽으로 화산(花山)에 가서 선영(先塋)을 성묘하고 최공의 집을 찾아가서 대정(大庭 남의 아버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최익현의 아버지를 가리킴) 어르신네를 뵈었더니, 어르신네께서 나를 붙들어 하룻밤 자면서 몇 사람의 일을 일러 주고 나에게 그것을 쓰게 하였다. 내가 삼가 응낙하고 물러와서 대강 몇 줄의 글을 지어 돌려 드리면서 어르신네에게 ‘이것을 비밀로 하고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 방붕(邦朋)ㆍ방무(邦誣)의 죄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주 선생(朱先生)이 조자직(趙子直) 제공(諸公)들과 당적(黨籍)에 들고 시를 지어 스스로 자랑하여 이르기를 ‘늙은 몸의 영광이다.’ 하였으니, 이런 의의에 의거해 보면 또한 신밀(愼密)히 할 것이 없도다. 아, 슬프다.”
- 2020-09-16 | NO.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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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효덕-湖南五十縣 호남의 많은 고을 쉰 곳에 이르지만
- 湖南五十縣 호남의 많은 고을 쉰 곳에 이르지만君子也斯亭 군자가 거한곳은 이 정자 뿐이로다.極浦流如白 극랑강 흐르는 물은 그 빛이 청백하고瑞岑節彼靑 서석산 높은 봉은 그 기운 청청하네.孝思千古篤 효도의 그 생각이 천고에 독실하고忠義一心明 충의의 그 마음이 한없이 밝았도다.尙緩褒崇典 나라의 포숭함이 이처럼 늦어지니偏多激仰情 격양한 나의 정이 유난히 깊었도다.삼한재(三寒齋) 박효덕(朴孝德)이 광주 양과동 출신이며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윤중(潤仲), 호는 삼한옹(三寒翁)이다. 김이안(金履安)에게서 학문을 닦아 학행(學行)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천거되어 그 후 현감(縣監)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고 정조(正祖) 21년에 호남 세족(世族)의 추천에 들었다.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의 후손으로 충주박씨(忠州朴氏) 충주박문(忠州朴門)의 높은 학풍을 끼친 석학이엇다.
- 2018-07-31 | NO.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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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휘진 - 漁等山 풍경
- 어등산(漁等山) 산빛이 푸르고 잠잠(潛潛)한데산위에 흰구름은 달빛을 가리우며 지나가네.달그림자 처마에 내릴때 나혼자 즐기니이 세상 그무엇이 나의 사립문을 시끄럽게 하는고.*만회재(晩晦齋) 창암(蒼庵) 박휘진(朴徽鎭, 17051~1790)은 어등산 일대의 풍경을 그리면서 지금의 세태를 두고 꼭 이렇게 꼬집는 듯하다.
- 2020-04-10 | NO.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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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죽과 보를 수축(修築)하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42년(1766) 정월 초6일 방죽과 보를 수축(修築)하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작년의 홍수는 근년에 없던 것으로 방죽과 보를 막론하고 도처마다 붕괴되고 훼손되었으므로 봄철에 수축하는 것을 조금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또 지엄한 관문(關文)의 신칙을 받았으니만큼 더욱더 마땅히 경각심을 갖고 거행해야겠습니다.경내 각처에 방죽과 보가 홍수로 파손된 상황에 대해 작년 가을에 복심(覆審)할 때 목사(牧使)가 거의 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니 소소하게 파손된 곳을 두루 다 손꼽아 셀 수 없었습니다만 이것은 봄에 역사를 크게 벌이지 않아도 일일이 다 완전히 수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보와 긴 방죽 중에 형체가 없어져 질펀하게 끝이 없는 것은 바로 황룡강(黃龍江) 선암보(仙巖洑)와 방하동(方下洞) 가음내(可音內) 축언(築堰) 등 두어 곳인데, 그 보는 수천 석의 논에 수리(水利)의 혜택을 입히고, 그 방죽은 수백 호가 의지해 살고 있는 곳입니다.지금 막 첫봄을 만나 의당 먼저 이와 같이 큰 곳을 수축해야겠기에 이미 상중하(上中下)의 소임을 차정(差定)하여 미리 계획을 세워 놓았다가 해빙(解氷)이 되기를 기다려 즉시 역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공사를 할 곳이 엄청나게 커서 단지 일을 하는 것만으로 의논할 수 없으므로 부근의 면민(面民) 장정에게 조금 품삯을 지급하여 같이 힘을 합해 완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흐르는 물을 막고 파손된 곳을 보완하려면 소나무 가지가 아니면 안 되므로 개인의 산이나, 공한지에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 가지를 가져다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꾼을 동원해 사용하는 것과 소나무 가지를 베는 것은 임의로 할 수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첩보(牒報)하오니, 특별히 참작하여 지시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이 첩보의 내용을 보니, 공무를 봉행하는 성근함에 정말로 존경하고 감탄하였다. 대체로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것이니, 어찌 민력(民力)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근 백성의 장정을 동원하여 힘을 합해 완전하게 수축해야 할 것이다. 소나무 가지도 가져다 사용해야 하는데, 비록 개인의 산이지만 이와 같이 할 적에 전체를 벨 염려가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 엄하게 신칙해야 할 것이다.
- 2023-08-17 | NO.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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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광훈-次松川先生喜慶樓韻
- 三年南雪隔皇州 세 해 내린 남쪽 눈 임금 계신 곳 막히었고頭白從敎百事休 머리 희어짐에 따라 모든 일을 쉬었노라樓閣入天絲管迥 누각은 하늘에 들어 사관 소리 멀리 나고江湖滿地水雲悠 강호 가득한 땅 물과 구름 유유하다將軍義烈猶生氣 장군의 의열은 아직도 생기 있고學士風流有古丘 학사의 풍류는 옛 언덕이 있어라想得腴顔耆舊內 늙은 친구 안에 살진 얼굴 상상하여 보니淸歡不下晩香侯 맑은 기쁨 늦은 향기 절후에 내리지 아니하리 -옥봉시집(玉峯詩集)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자는 창경(彰卿)이며 호는 옥봉(玉峯)이다. 방랑시인의 원조격인 백광훈이 스승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과 함께 희경루에 오르고 차운하며(次松川先生喜慶樓韻) 시를 읊었다.
- 2018-07-17 | NO.316